☆ 2013년 다해 3월5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청주] 복을 상속 받으십시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다니 3, 25. 34 - 43
† 복음 : 마태 18, 21 - 35
★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유배 생활을 할 때 다니엘의 세
동료는 우상 숭배를 거부하다가 불가마 속에 던져진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아자르야는 불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공평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그분의 도우심을 청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께 큰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늘 기억하여 형제가 지은 죄를 매번 용서하라고 가르치시며
하나의 비유를 드신다. 이 비유에 따르면, 어느 임금이
자기에게 만 탈렌트나 빚진 종을 가엾이 여겨 그의 부채를
모두 탕감해 주었다. 그러나 그 종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버리고
만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영화 ‘밀양’에서 어머니 ‘신애’는 아들을 유괴하여 살해한
동네 웅변 학원의 원장에 대한 증오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신앙을 가지게 되어 마음의 평안을
얻었고, 더 나아가 원수를 용서하겠다는 결심까지 하게
됩니다. 결국 교도소로 그를 찾아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유괴범이 너무나
밝고 편안한 얼굴로 대답합니다. “자매님도 하느님을
믿기 시작하셨군요. 잘하셨습니다. 저 역시 하느님을
믿어서 제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의 이 말에 주인공인 신애는 교도소를 뛰쳐나왔고 그
뒤로 하느님을 원망하며 교회를 멀리하게 됩니다.
자신이 용서받았다고 확신하는 유괴범의 모습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요? 유괴범은 하느님께 용서받았다고
확신하고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용서받은 데에
따른 보속을 치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의
죄를 깊이 인식하고 부끄럽게 여기며, 더 이상 그러한
죄를 짓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새롭게 살아가는 태도를
동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보속의 중요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어느 임금이 자기에게 만 탈렌트나 빚진 종을 가엾이
여겨 그의 부채를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종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버리고 맙니다. 이 종의
문제점은, 빚은 탕감받았으나 그 의미를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받았으나 그에 따른 보속을 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종은 화가 난 임금의 명에
따라 고문 형리에게 넘겨져 빚진 것을 다 갚아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세례성사와 고해성사를 통해 얻게 된 죄의 용서는
값싼 용서나 기계적인 용서가 아닙니다. 죄에 대한 깊은
성찰과 굳은 결심을 전제로 하는 용서인 것입니다.
-매일 미사 -
◈ [청주] 복을 상속 받으십시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작성일 2013년 다해 3월5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 마태오 18,21-35
복을 상속 받으십시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능한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어느
한 순간 걸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도 아무의 도움도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넘어지는
이유를 보면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야고보사도는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야고4,1-2).하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도 탐욕과 어리석음과
성냄이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독이라고 가르칩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화를 내고 다투는 일이 없을 텐데 욕심
때문에 남과는 물론 심지어 형제와도 등지게 되기도 합니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서로를 힘들게 하고 자유를 억압하며
담을 높이 쌓게 됩니다.
얼마 전 한 어르신이 자녀들에게 유언으로 유산을 분배하고
세상을 뜨셨는데 자녀들에게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자녀들은 모두 내로라할 만큼 큰 재산을 가진, 그야말로
살만한 사람들이었는데 서로 서운함을 가지고 등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재산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재산은 분명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데
재산이 사람을 죽입니다. 그 담을 허물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담을 허문다는 것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실 용서라는
것이 말같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할 수 있듯이 하느님으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성찰해 볼 때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삶을
살아온 날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음을 다잡으려 하지만 인간의 연약함에 넘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왔고 앞으로도
분명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내가 용서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 용서 덕분에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자유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수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당신을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며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7,60). 하고 애원하였던 스테파노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선물로 주어졌지만 만약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담고 있게 되면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고립되게
되고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건강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18,22). 용서는 결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닙니다. 선행도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만큼 우리도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설령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이라도! 어느 날, 내가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가슴깊이 느낄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3,9). 주님 안에서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메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용서의 주님께서 분명 도와주실 것입니다.
먼저 공지사항 하나 말씀드립니다. 제가 오늘 강의를 하러
제주도에 갔다가 내일 오전에 돌아올 예정입니다. 따라서
내일 새벽 묵상 글을 올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순시기라 그런지 강의가 조금 많네요. 이해해 주시길
바라며, 목요일 새벽 묵상 글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그럼
오늘의 묵상 글 시작합니다.
어느 가정에 심각한 고부갈등이 있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구박했고,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두 분 모두 열심히 성당에 다니시는 것입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성당에 다니면서 왜 이렇게 고부갈등이
심하냐고 말을 했지만, 이 두 사람 모두 어쩔 수 없다면서
그래서 하느님과의 관계라도 좋게 하기 위해 성당에
다닌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이 과연 하느님과의 관계는
좋아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
인간을 위해서 선택하신 길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었지요.
이 십자가를 통해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진정한 화해와
용서와 이루어져 우리 모두가 구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내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져
야지만 우리 삶 안에서 진정한 화해와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그러한 십자가 없이 단순히 자기만 괜찮으면 좋다는
심정으로 또 하느님과의 관계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심정이
과연 주님의 용서와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요?
한문의 ‘사람 인(人)’자를 보십시오.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한자의 모습처럼 우리 인간은 서로 기대고
살아야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 반목하면서
살아갈 때 과연 행복할까요? 그러면서도 하느님과의
관계만 좋으면 그만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요?
주님도 이 용서의 삶을 살라고 우리들에게 청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의 “몇 번 용서하면 됩니까?”
는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일흔일곱 번 용서하고 일흔여덟 번부터는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7’이라는 숫자가 성경
안에서는 완전수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일곱 번씩 일곱
번이라는 완전수를 쓰시지요. 곧 완전한 용서, 무조건적이고도
완벽한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용서를 해야 한다는 주님의 명령인 것이지요.
누군가를 너무나도 미워하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모두 암에 걸린 것입니다. 이에 한 사람은
자신이 암에 걸린 것은 그 미워하는 사람 때문이라고 하면서
더욱 더 증오하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은
‘내가 그를 미워해서 이렇게 암도 걸렸구나.’ 하면서
스스로를 깊이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누가 더 행복할까요? 주님께서 무조건 용서하라는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해서인 것입니다. 편안한 삶, 진정한 행복을
위해 용서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혹시라도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님께
맡기십시오. 용서의 주님께서 분명 도와주실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을 살게 끔 하는 것이다(논어).
인천가톨릭대 입학식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첫단추를
잘끼기를 기도합니다.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
어제 어떤 신부님을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 그렇게 잠도 제대로 자지 않으면서 활동하면 나중에
후회한다. 좀 쉬엄쉬엄 해.”
아마도 인터넷에 거의 빠짐없이 묵상 글을 13년째 쓰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러신 것 같습니다.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매일 다른 내용의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떻게
쉽겠습니까? 그래도 이제는 몸에 배어서 그런지 처음처럼
어렵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인터넷 카페를 보면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카페, 특별히 종교
분야를 보면 이단이나 미신에 해당하는 사이트가 상위권에
포진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셨지요.
지금 현재 교통의 발달로 인해 세상 끝까지 쉽게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지요.
바로 사이버 세상입니다. 이 사이버 세상 역시도 전교를 해야
할 장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활동을 하게 되었지요.
예수님의 복음 선포 사명은 이천년 전에 딱 한 번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역시도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명령인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합니까? 혹시
다른 사람에게만 그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아닌가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서로 계속 풀려고 하면 아주 쉽겠지요.
2013년 다해 3월4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서로 계속 풀려고 하면 아주 쉽겠지요.
문제가 있으면 걱정이 있게 마련이고 풀어야하는 게 세상사
아닌가요? 공해문제, 식품문제, 부정부패 문제 등 정치인들의
문제, 노후문제 등. 엄청난 문제들로 걱정은 태산 같지만
풀어내며 시원한 맛보기는 힘듭니다.
개인의 문제 중에서도 인간 대 인간의 문제는 참 복잡하지
않습니까. 적어도 한 쪽이 계속 풀어버리면 다른 쪽도 풀리게
마련 아닐까요? 어떤 문제든 쌍방이 있게 마련인데 서로 계속
풀려고 하면 아주 쉽겠지요.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오 18,22)”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의 묵상 글 -
◈ [서울] 올챙이 적 기억
우리나라 속담에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모든 사람은 어떤 일에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서투른 초보 시절이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 일과 상황에 능숙하게 되었을 때 과거를 잊어버리고
처음부터 잘났기 때문에 잘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다른
사람의 서투른 모습을 용납하지도 못한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다니엘은 바빌론의 왕궁에 끌려가
이방 민족의 방식으로 교육받으며 호화 호식할 수 있게
되었지만, 자신이 유다의 자손이라는 것을 끝까지 잊지
않고 하느님을 흠숭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한때 다니엘은
우상 숭배의 위협에까지 내몰렸지만, 목숨을 내놓고 하느님을
선택함으로써 이방 민족에게까지 그분의 이름을 드높였을뿐
아니라 축복도 받았다.
반면에, 복음에서 매정한 종은 임금한테 만 탈렌트를 탕감받고도
동료의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지 않으려 했다. 매정한 종은
남에게 야박하고 자신한테 관대한 교만의 극치를 보여주었고,
결국 임금은 그 종을 감옥에 가두었다.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고 늘 겸손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 전영준 신부(서울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교수) -
◈ [수도회] 진정한 용서에 이르기 위해서...
2013년 다해 3월5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마태 18,21-35
진정한 용서에 이르기 위해서...
영광스럽게도 예수님의 수제자로 선택된 베드로 사도,
수제자로서의 삶이 어떠했을까 묵상해봅니다. 물론
예수님과 함께 걸어갔던 3년간의 공생활 기간 참으로
행복했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지니고 있었던 자부심도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이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 바로
그분이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던 능력의 메시아셨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수제자로
불림 받았다는 것 보통 영예로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영예 이면에 반드시 희생이 따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수제자로서의 삶이 결코 녹록치 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단의 대표로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느라 힘든 일도 많았겠지요. 때로 반장으로서 제자들의
미성숙을 대표해서 스승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신랄한
꾸중도 엄청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제자들 사이에는 성격이 엄청
과격한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미성숙한 제자, 아직 인간 되려면 멀었던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시기심 질투심 많은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제자직은 세속적인 성공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수제자 베드로가 겪었던 스트레스는 무척이나
컸을 것입니다. 안 그래도 흔들리던 베드로, 좌충우돌하던
베드로였는데 그가 수제자로서 겪었던 고통은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는 폼을 봐서 또 누군가와
엄청 심하게 부딪혔는가봅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씩씩 대면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베드로 딴에 일곱 번이면 충분하겠지,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일곱 번입니다. 그만하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것이고 더
이상 용서는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져 7이라는 숫자를
내세운 것입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충만과 완성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숫자이지요. 이
정도면 예수님께서 OK 하시겠지, 하고 일곱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요구는 끝도 없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일까요? 용서고 뭐고 따질 필요 없이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밥 먹듯이, 숨 쉬듯이
습관적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바보처럼
살라는 말씀입니다.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솔직히
너무하시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배경을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단 하루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상태란 우리 몸에 별로 좋지 않은 종양
하나를 달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하느님 체험도 영적 생활도
요원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누군가가 남긴 깊은 상처, 평생 잊지 못할 모욕,
생각만 해도 온 몸이 부르르 떨리는 아픈 기억을 그저
묻어두고 용서한다는 것, 너무한 일이기도 합니다.
때로 진정한 용서에 이르기 위해서는 명확한 진상파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정중한 사과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때로 응분의 처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우리 마음처럼 순조롭게 이행되지가 않습니다. 상처는
더 큰 상처를 낫습니다. 온몸은 만신창이가 되어갑니다.
삶은 피폐해져만 갑니다.
이런 위험성을 꿰뚫고 계시는 예수님이시기 우선 우리가
살아있으라고, 그래서 필요한 세월을 좀 더 보내라고, 언젠가
깊은 상처가 아무는 순간, 그때 가서 제대로 된 용서를 할 수
있으면 하라는 의미에서 “일흔일곱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기에 진정한 용서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완전하시기에 그분 도움에 힘입어 진정한
용서가 가능합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거룩한내맡김영성>출세는 하늘이 도와야
-이해욱신부
<斷想> 9. 출세는 하늘이 도와야 한다?
내가 살고 있는 곳 바로 옆 절에 지관을 잘 보기를 전국에서도
손꼽는 내가 아주 존경하는 스님이 한 분 계시는데, 지인을
통해서 알게 된 어떤 분이 선산과 고택의 지관을 봐 주시기를
청해 오셔서 스님께 부탁을 드려 그렇게 해 드리게 되었다.
지인을 통해 말을 들어보니, 그분은 많은 공부를 하였으며
물질에도 전혀 욕심이 없고 국가의 요직도 두루 거쳤단다.
그런데 마지막 최고의 자리에서는 매 번 탈락을 한다는 것이다.
그분의 선산과 고택의 지관을 부탁하신 것도 그 이유였다.
만나 뵈니, 그분의 얼굴에서는 아주 맑고 깨끗한 기운이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분과의 시간을 가지면서 저런 분이야말로
국가의 중요 직책을 수행하는 분이 되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분을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한 말씀
드려보고자 한다.
“조상을 공경하고 후손이 잘 되기 위해 좋은 지관의 묘자리도
무시할 수 없지만, 땅에 너무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모든 기운이 다, 자신이 가장 많은 관심을 갖는 것에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면, 땅에 지나친 관심을 집중하고 의존하면 결국 기운이
땅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 관심을 집중하고
하늘에 의존하면 모든 기운이 하늘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땅은 언젠가 사라질 것, 땅에 의존하는 것보다 하늘에 의존하는
것이 천 배 더 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땅의 기운보다 하늘의 기운이 더 세고 높고 강한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하늘이 땅 위에 위치하고 땅의 기운을 누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높은 자리는 하늘이 도와야 한다고
말해 오셨을 것입니다.
저는 과거, 서울의 어느 본당에서 본당의 공원묘지 때문에
5년이라는 긴 시간을 아주 된 곤욕의 곤욕을 치렀고,
그 결과 인생을 배울 수 있는 매우 좋은 경험을 갖게 되었습니다.
90년대 초에 묘지장사로 수십억을 벌어들여 성당도 새로 건축했고
말입니다.
그 당시 묘지를 분양하는데 우리 천주교 신자들도 정말 대단한
사람이 많음을 알았습니다. 어느 자매님은 자신이 지기(地氣)를
느껴 직접 지관을 본다며 공원묘지 곳곳을 양손을 펼쳐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이 자리는 이래서 안 좋고,
저 자리는 저래서 안 좋고 하며 돌아다니는 모습(강시?)은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저는 저의 아버님 묘를 이장해야 할 때 남들이 원하지 않는
산의 8부 능선 위를 선택하였습니다. 제가 그 자리를 선택한
것은 그 자리에 올라가 보니 전경이 아주 훌륭하고 시원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으로 아버님의 묘자리를
선택하였더니, 지관을 잘 본다는 자매님 역시 제가 선택한
곳을 선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다음 많은 분들이
줄줄이 사탕이 되어 찾아왔습니다.
우리 조상님들 말씀대로 하늘이 도와야 자신이 원하는 자리를
얻게 됩니다. 어제 스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도 잘 참조하실
뿐 아니라 앞으로 정말로 땅보다도 하늘에 더 많은 관심을
쏟으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관심을 쏟아야 하늘이 움직입니다. 이 세상 어떤 것이
자신에게 관심을 쏟지 않은데 움직이겠습니까? 이제는 어제
말씀하신 대로 하늘에 관심을 쏟는 시기가 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늘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 관심을 쏟으시면 하늘이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하늘의 이치요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우선, 하늘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 제가 어제 말씀드린 "무위행
(無爲行)"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욕심 없이
살아오신 것처럼 윗자리를 얻기 위해 무엇을 하려 하지
마시고, 이제부터는 그 마음까지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소위, 마음마저 내려놓으시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천주교에서는 하느님께 내맡긴다고 하는데, 그 마음마저
내려놓으시게 되면, 그때서야 하늘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청렴하게 오로지 나라의 발전만을 바라며 살아오셨음이
얼굴에 다 나타나 있으시기에 그렇게 하시면 하늘이 바라시는
일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한 번 생겨난 것(잘 살아 오신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잠시 모습을 달리하여 숨어 있을
뿐입니다.
저는 어제 님의 맑고 깨끗한 얼굴 속에 그것이 숨어 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 일은 어떤 일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하늘이
움직여 생긴 일이기에 선(善)한 일일 것입니다.
모든 중요한 일에 있어서 "무위행(無爲行)" 하시면, 즉, 내가
무엇을 하려 하지 마시고 그 하려던 마음을 내려놓으시면,
그때부터 내가 아니라 "하늘"이 나 대신 해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이 해 주실 때, 우리 조상들께서는 "하늘이
도왔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바라시는 뜻이, 부디 하늘의 뜻대로 이루어지시기를
제가 믿고 사랑하는 하느님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영육(靈肉) 간에 건강하십시오.”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 [기타] 사순 제3주간 화요일
2013년 다해 3월5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가끔씩 서울에 갈 일이 생깁니다. 학교의 강의도 있고, 제가
담당하는 ‘복음화 학교’의 미사도 있습니다. 또 청소년국의
사제 모임도 한 달에 한번 있습니다. 서울에 가면 동창
신부님의 성당에서 하루 지내고 올 때가 있습니다. 지나가는
말이지만 때로 그 말 때문에 속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용문이
좋다면서 서울에 이렇게 자주 나오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상했습니다. 일 때문에 오는 것인데, 오고 가며 기름
값도 많이 드는데, 누구는 서울에 오고 싶어서 오나! 머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가볍게 들어 넘기면 되는 말인데,
제가 속이 좁아서 그렇습니다. 저 또한 제가 한 말 때문에
상대방에게 아픔을 준 적이 많습니다. 예전에 있던 성당에서
저는 그만 실언을 하고 말았습니다. 직원들의 급여 기록에
상여금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일을 얼마나 많이 했기에
그렇게 상여금을 받나!’ 상여금은 규정상 있는 것이고,
상여금이 나오는 것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큰 기쁨인데
그만 제가 마음을 상하게 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정중하게
사과는 했지만 정말 미안했습니다. 큰 다툼은 사소한 말
때문에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가하면 작은 말
한마디가 위로가 되고, 용기를 주고, 새로운 희망을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운동 경기에는 ‘퇴장, 실격’이라는 규칙이 있습니다. 심판의
권위는 크기 때문에 심판의 판단에 따라서 선수는 퇴장을
당하기도 하고, 실격을 당하기도 합니다. 심판은 선수를
보호하기 위해서, 게임을 정당하게 진행하기 위해서 ‘퇴장이나
실격’과 같은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이기고 싶은 욕심에
규칙을 어기는 선수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교통 법규에도 ‘음주운전, 중앙선 침범’과 같은
행위는 엄중하게 제제를 가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물론
타인의 생명에도 지장을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용서’에 대해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형제가 잘못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처벌과 제제는 법과
규칙의 문제입니다. 사회는 이와 같은 법과 규칙이 있어야지
질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양심과 내적인
자유의 문제입니다. 처벌과 제제는 질서를 유지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마음의 평화를 주거나, 상처를 치유해 주지는 못합니다.
용서는 마음의 평화를 주기 때문에, 내적인 상처를 치유해 주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아는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손자를 불의의
교통사고로 잃었습니다. 세상을 비관한 젊은이가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하였고, 손자는 그 차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젊은이는
처벌을 받아 감옥에 갔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은 손자를 잃어버린
슬픔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자매님은 가족들과
함께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있는 젊은이를 찾아가서
‘용서’를 해 주기로 했습니다. 용서를 한 후에 가족들은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고, 상처가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용서는 나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고, 나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宗敎란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한자입니다. Religion은 엉킨
실타래를 푸는 의미가 있는 영어라고 합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으로 세상사의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이 종교라면
그리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그리하여 참된 구원의 문에
도달 하려면 꼭 是非를 가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법과 규정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도 용서와
사랑으로 해결되는 것을 봅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갈등과
아픔이 있다면 그것 까지도 놓아버리고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따라서 용서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조재형 신부 -
◈ [수도회] 진정한 용서에 이르기까지
2013년 다해 3월5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마태18,21-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진정한 용서에 이르기 위해서...>
영광스럽게도 예수님의 수제자로 선택된 베드로 사도,
수제자로서의 삶이 어떠했을까 묵상해봅니다. 물론 예수님과
함께 걸어갔던 3년간의 공생활 기간 참으로 행복했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지니고 있었던 자부심도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이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 바로 그분이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하고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던 능력의
메시아셨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수제자로 불림 받았다는 것
보통 영예로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영예 이면에 반드시 희생이 따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수제자로서의 삶이 결코 녹록치 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단의
대표로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느라 힘든
일도 많았겠지요. 때로 반장으로서 제자들의 미성숙을 대표해서
스승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신랄한 꾸중도 엄청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제자들 사이에는 성격이 엄청 과격한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미성숙한 제자, 아직
인간 되려면 멀었던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시기심 질투심 많은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제자직은 세속적인 성공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수제자 베드로가 겪었던 스트레스는 무척이나
컸을 것입니다. 안 그래도 흔들리던 베드로, 좌충우돌하던
베드로였는데 그가 수제자로서 겪었던 고통은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는 폼을 봐서 또 누군가와 엄청
심하게 부딪혔는가봅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씩씩 대면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베드로 딴에 일곱 번이면 충분하겠지,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일곱 번입니다. 그만하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것이고 더 이상 용서는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져 7이라는 숫자를 내세운 것입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충만과 완성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숫자이지요. 이 정도면 예수님께서 OK 하시겠지, 하고 일곱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요구는 끝도 없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일까요? 용서고 뭐고 따질 필요 없이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밥 먹듯이, 숨 쉬듯이 습관적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바보처럼 살라는 말씀입니다.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솔직히
너무하시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배경을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단
하루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상태란 우리 몸에 별로 좋지 않은 종양 하나를 달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하느님 체험도 영적 생활도 요원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누군가가 남긴 깊은 상처, 평생 잊지 못할 모욕, 생각만
해도 온 몸이 부르르 떨리는 아픈 기억을 그저 묻어두고
용서한다는 것, 너무한 일이기도 합니다.
때로 진정한 용서에 이르기 위해서는 명확한 진상파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정중한 사과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때로
응분의 처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우리 마음처럼
순조롭게 이행되지가 않습니다. 상처는 더 큰 상처를 낫습니다.
온몸은 만신창이가 되어갑니다. 삶은 피폐해져만 갑니다.
이런 위험성을 꿰뚫고 계시는 예수님이시기에 우선 우리가
살아있으라고, 그래서 필요한 세월을 좀 더 보내라고, 언젠가
깊은 상처가 아무는 순간, 그때 가서 제대로 된 용서를 할 수
있으면 하라는 의미에서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기에 진정한 용서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완전하시기에 그분 도움에 힘입어 진정한 용서가 가능합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기타] 내 자신이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지
2013년 다해 3월5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프치는 이는 큰사랑이라고
불릴 것이다.>
(마태 18, 21-35)
내 자신이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지(마태 18, 21-35)
전에 기도하는데 작두로 손을 자르려하는 것이 환시로
보였습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용서합니다.
용서합니다. 용서합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그
환시는 이내 사라졌습니다.
저는 그 환시의 내용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순간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용서하라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나를 힘들게 한 사람들을 위해서 미사 중에 주님께서
그들을 축복해 주시라고 기도를 많이 하였고, 또 꾸준히
하였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내 마음에 그분들에 대한 미움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환시 사건을 통해서 저는 진심으로 그분들을
용서한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또 내 자신의 기준에
따른 인간적인 판단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까 제 마음 안에 큰 평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따금 마음이 힘들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 때 마다 바로
기도를 하거나 고해성사를 통해서 평화의 마음을 유지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해서 용서를 청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마음
안에 어떤 이유에서든 미움을 갖고 있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용서에 대하여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지 잘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
안에 많은 미움을 갖고 살아가지만 자신 안에 미움이 가득함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어느 사람을 만나면 왠지 꺼려지고 피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들 때 자신의 내면에 그 사람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입니다.
자비가 끝이 없으신 하느님께서는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많이 내려주십니다. 그리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하시기
위해서 친절하게 각자마다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보게
하여 주시길 원하십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각자마다
진심으로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한 하느님 자비의
행위입니다.
사랑의 주님, 저희가 저희 마음을 정확히 바라보기 위해
기도하고, 타인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는 은총을 내려주소서.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 [기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3/5일 화요일 복음 묵상)
2013년 다해 3월5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기쁨이 자라기를 원하는 곳에는 사랑을 심어야만 합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3월5일 화요일 복음묵상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오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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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숫자에 무지 약한 편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두
번이나 숫자놀이를 하게 만든다.
먼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생각해보자. 같은 구절에 대한
각기 다른 언어 번역본들을 찾아보니 어느 것은 일흔일곱(77)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나와 있고, 어떤 것은 일곱(7) 번씩
일흔(70) 번을 용서하라고 나와있다. 나로서는 지금 어느
것이 올바른 번역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여기서 어느 것이
옳은 번역인가가 이 말씀의 요점이 아니다. 이미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일곱(7)이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완벽을 의미하는
숫자, 즉 꽉 찬 숫자이다. 그러니 일흔일곱(77) 번이나
사백구십(490) 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칠(7)이라는 숫자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알고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을 담고 있는 루카 복음서를 보면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17,4)
그렇다. 오늘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하다.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이시다.
두 번째 숫자 놀이를 해보자.
예수님께서는 왕에게 만 탈렌트를 빚을 진 사람과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의 비유를 드신다.
왕은 만 탤런트의 빛을 진 이에게 갚을 것을 요구하였고, 빚진
이는 가능하지 않으니 선처를 봐달라고 애원한다.
그래서 왕은 측은한 생각이 들어 그를 용서하고 빚을 탕감한다.
그런데 탕감 받고 나온 그 사람이 길을 가다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난다. 보자마자 멱살을
쥐어 잡고 빚을 갚으라 한다.
빚을 갚지 못하는 동료가 엎드려 애원을 해보지만, 결국
감옥에 처넣고 만다.
이를 알게 된 임금은 크게 화를 내며 자신이 빚을 탕감해준
사람을 감옥에 처넣었다는 비유이다. 여기서 탤런트가 얼마나
큰 돈인지, 데나리온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빚을 탕감 받은 자가 보여준 악랄한 모습 자체만 보더라도,
우리는 혀를 차며 만 탤런트의 빚을 탕감 받은 자에게 욕을
퍼붓기 쉽다. 그런데 탤런트와 데나리온의 차이를 알게 되면
그 분노는 더 하게 될 지도 모른다.
탈렌트는 당시 유대인들의 중량을 재는 단위였다. 이것을
화폐단위로 환산하면, 1 달란트는 평균 30킬로가 좀 넘는
금의 값으로 계산 되었다 한다. 금값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1 달렌트가 금 30킬로의 값과 같다고 할 때, 만 탈렌트는
금을 30만 킬로를 살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그렇다면 데나리온의 단위는 어떻게 되는가?
데나리온은 일반적으로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 평균치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1 데나리온의 6천 배가 1 탈렌트라고
한다. 그러니까 1 달란트를 벌기 위해서는 보통 노동자가
쓰지 않고 6000일을 벌어야 한다는 계산이다.
평균 임금 노동자가 16년 이상을 벌어야 모아질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 된다는 뜻이다.
즉, 왕에게 평생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 받은
자가 백일치의 임금을 빚진 이를 용서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누군가를
비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돌아보라는
메시지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상상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고 살아가는 우리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감사의 마음도 가지지를 못한다.
그러기에 남의 작은 잘못에도 너그러움을 보여주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를 힘들게 한다. 반면 정말 옳지 못한 것을 보고도
눈을 감거나 피해버리는 서글픈 인간이 되고 만다.
우리는 늘 하느님께 우리의 허물 많은 삶을 용서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또한, 우리 모두는 알게 모르게 나 아닌
타인의 용서와 도움 속에서도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용서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삶을 살아간다.
조금만이라도 올바르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면 감사할
일이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의 감사할 일이란
부나 명예나 건강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뜻하지 않는다.
“남보다 부유하게 살게 해주셔서” “사고 중 나만을
살려주셔서”와 같은 감사의 기도는 바보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진정 내 마음과 영혼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 .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 용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분께 받고 있는 사랑과 용서의
체험이 절대적이다.
.
백 데나리온을 가지고 용서를 하지 못했던 사람은 결국 자신이
만 탈렌트를 탕감 받았으면서도 감사의 체험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저 운이 좋았거나 임금이 바보라고 생각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만이 타인에게도
감사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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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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