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잊을 수 없는 제일모직 대구, 경산공장 시절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를 필한 후 사회에 나와 첫 직장으로 삼성을 택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소박한 이유에서였다. 대학 재학 중에 ROTC를 지망했기에 1963년 3월 졸업하자 바로 ROTC l기로 현역 소집되어 군복무를 2년간 하고 1965년에 나와서 직장을 선택할 때 집에서 다닐 수 있는 직장을 구하려고 했던 것은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어서다.
당시 우리 집은 대구 삼덕동에 있었다. 아직 부모님이 살아계셨는데 두 분이 다 환갑을 넘긴 노년이어서 아들이라곤 나 하나밖에 없는 집안 형편으로 대학을 졸업하면 노부모를 내가 모셔야겠다고 마음을 정하고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님이 계시는 삼덕동 집에 있어야하겠다는 상념이 늘 나의 뇌리를 지배했던 것이다.
1970년 봄 삼덕동집에서ㅡ 외출하시기 직전 아버님 모습
이렇게 대구에서 근무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하려니 당시로는 대구에 지점이 있는 은행이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데 한국은행이나 산업은행은 기졸업자인 나에는 문턱이 높아보였고 시중은행에서는 신입행원은 창구 근무를 시킨다고 들어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가 9월의 어느 날 창간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중앙일보 1면에 삼성그룹 신입사원 채용공고가 나왔다. 당시에는 아직 삼성그룹이란 표현은 쓰지 않았고, 삼성물산, 제일제당, 제일모직 그리고 한국비료 등 4개사 공동명의로 공고를 했는데, 공고문을 보는 순간 대구에 제일모직 공장이 있으니 제일모직에 들어가면 대구 근무가 가능하겠구나 하는 판단이 서게 했다. 그래서 그룹공채 7기 입사시험에 응시했고 필기시험을 거쳐 선대 회장님이 참석하신 면접에도 통과를 하게 돼 입사하게 되었다.
다음 과제는 어떻게 제일모직으로 가서 대구공장 근무를 하느냐가 나에겐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격언대로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원하던 대로 대구공장 근무가 결정되어 신입사원 실습을 마친 1966년 3월초에 제일모직에 배치가 됐다.
법적으로는 제일모직의 본사는 대구시 침산동 105번지에 소재하는 것으로 돼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구에서는 제일모직은 ‘근로자의 낙원’이라는 소문이 나있었던 때라 자못 기대가 부풀기도 했다.
부임 첫날 입사동기인 박영순(朴永淳)씨와 함께 공장 사무실에 들어가 두리번거리는데
작업복 상의를 입은 이마가 훤한 분이 나타나더니 우리를 응접실로 데리고 갔다.
알고 보니 이분이 경리과장 송세창(宋世昌)씨였다. 송 과장께서는 우리 두 사람은 경리과에 근무하기로 결정됐다고 통보하면서 즉석에서 당부사항을 한마디 한마디에 기합을 넣어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이 순간부터 나에겐 고생길이 훤하게 열린 것이다. 연말 결산이네, 월말 마감이니 하면서 휴일도 없는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한 주일이 ‘月月火水木金金’으로 가면서 출근 시간 30분 전까지 나와서 숫자 쓰기, 주산 연습을 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고 낮 동안 힘들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퇴근은 밤에 별 보며 귀가하는 나날이 전개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아직 전산시스템이 도입되지 않아 모든 일은 수작업으로 했다. 전표의 내용을 장부에 기장하고 계산업무는 주산으로 가감산(加減算)을 하고 곱하기 나누기는 수동식인 타이거계산기를 돌려서 했는데 그 둔탁한 소리가 온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더욱이 어려움을 겪은 것은 비록 상과대학을 나왔으나 경제학과 출신이라 상업부기나 회계에 관한 지식이 별로 없어 분개(分介)도 제대로 하지 못해 당시에 사용하던 현금분계식 전표를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다행히 송 과장 외에도 최종원(崔鐘元) 선배, 이상욱(李相旭) 선배 같은 노련한 분들이 계셔서 부지런히 묻고 또 물어 겨우 일 처리를 하곤 했다.
이런 와중에도 그해 여름철에 한 가지 놀라운 사건이 벌어진다.
1966년 국세청이 처음 발족하여 초대 국세청장으로 부임한 이낙선(李洛善)씨가 세수목표 700억 징수를 내걸고 그 달성을 위해「700 가방 - 007가방이 아님」에다「견금여석(見金如石)」을 새긴 대규모 조사반을 편성, 전국의 대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다고 하더니 조사반 일행이 어느 날 이른 시간에 수십 명이 차를 타고 대구공장에도 들어 닥쳤다. 이들 일행은 사무실을 에워싸더니 모두 일어나 책상에서 뒤로 물러서라고 지시하였다. 이때 인상에 남는 일이 일어난다.
갑자기 송세창 경리과장이 앞에 나서며 사무실 직원들을 향해 "여러분들 우리의 상사는 누구입니까? 여기 이상근(李相根)이사님의 지시 없이는 누구나 한 걸음도 물러서면 안 됩니다" 라고 하면서 제지하였다. 조사반장도 순간 당황한 듯 멈칫하며 이 이사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다. 약간 상기된 이 이사도 잠시 후에는 웃음 띤 얼굴로 "여러분, 조사반장의 지시에 따르세요!" 라고하였다. 이들은 온 사무실과 현장을 돌아다니며 장부와 서류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 트럭 몇 대에 싣고 가버렸다.
그런데 이들이 간 뒤 간부들의 표정은 별로 걱정하거나 근심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웃음 띤 얼굴들이었다. 그 전날 이미 출동 정보를 입수했던 터라 치워야 할 서류는 이미 치워놓았던 것이다. 따라서 송 과장의 태도도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해야겠지만 하여간 놀라운 순발력의 발휘라고 생각됐다.
1966년 여름 대구공장 경리과원 일동, 좌로부터 권영호, 조동복, 이종석, 송세창과장, 김한욱, 최종원선배, 이 연, 전병덕
이렇게 신입사원 생활을 하는 사이에도 부모님으로 부터 장가가라는 독촉은 이어져 몇 차례 맛선 보기를 했다. 그러다 그해 가을에 어떻게 좋은 규수가 나왔다하여 가서 선을 본 규수가 지금의 내 아내가 됐다. 아내도 대학은 서울에서 했으나 집이 있는 대구로 내려와 한 약국에서 관리약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살며시 가서 감기약 하나 사면서 안색을 살폈더니 마음에 들었고 정식으로 대면을 하니 교감이 잘 돼 바로 골인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결혼은 이듬해인 1967년 1월에 음력으로는 아직 해가 바뀌기 전에 택일하여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그래도 회사에서는 1주일의 신혼휴가를 주어 해운대를 거쳐 제주도에서 며칠 보내고 올라올 수 있었다.
다시 사무실에 나오니 내 일은 밀려 있었고 또 별 보기 생활을 지속되었다.
그러나 강물이 흐르듯 세월도 가면서 변화의 바람이 불어와 경산공장의 착공이 시작되었고
송세창 과장은 경산공장의 부장으로 전출되고 후임에는 최종원 선배가 승진하였다. 그리고 한국비료의 국가 헌납으로 인해 그 간 차출됐던 많은 인원들이 돌아왔는데, 경리과에는 안시환(安是煥)씨가 컴백했다. 그리고 다음해 최종원 과장은 총무부장으로 승진하고 안시환씨가 경리과장으로 부임하자 나는 과의 주무사원이 돼 주로 세무관리 일을 담당하여 세무서나 대구지방국세청 출입을 하면서 안목을 넓혀 가며 나날을 보내다 어느덧 1970년 새해를 맞았다.
그해 가을 어느 날 공장 사무실에 젊은 박사 일행이 찾아 들었다. 일행 중에 낯익은 사람들이 눈에 띄어 가보니 송병락(宋丙洛)의 얼굴이 있어 반가이 맞이했다. 그는 나와 대학동기이고 ROTC 통역장교로 부산 병참기지사령부에서 같이 복무한 적이 있는데 예편 후 바로 미국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개발연구원(KDI)이라는 것이 생겨 자기도 거기에 스카우트되어 미국에서 나왔다고 하며 오늘 온 것은 산업시찰 코스로 제일모직 공장에 들린 것이라 했다. 그리고 같이 온 일행을 소개하는데 그 중에는 사공일 박사도 있는데 오늘은 딴 일이 생겨 같이 못 왔다고 했다. 그리곤 바로 일행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가 서동금(徐東金) 공장장과 면담을 하는 것이었다. 잠시 배석하여 들으면서 나는 차츰 쇼크를 받아야 했다. 당시에는 아직도 사원이었던 나에게는 공장장은 대단한 존재였는데, 젊은 박사들이 공장장을
막 상대하여 거침없이 물어 대었고 어떤 부분에선 공장장도 답변이 힘든 듯 어려워하는 기색마저 눈에 띄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질문이 추상적이고 경영 전반에 걸친 것이어서 공장의 생산관리를 주로 해온 공장장으로서는 영역 밖의 것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지금의 소모방업계 불황이 경영력 부족 때문이냐, 아니면 기술력 부족 때문이냐?하며 다그쳐 묻는 데는 당시 서 공장장도 얼른 답변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이들은 돌아갔지만 나는 한동안 그들이 나에게 준 쇼크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군복무 마친지 어느덧 5~6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침산동 105번지에서 파묻혀 지나던 동안 저들은 미국 가서 박사가 되어 돌아와 KDI의 연구원으로 큰소리를 치는데 비해 나의 모습은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때의 충격은 오래 동안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달리 대안은 보이지 않았고 지나간 세월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1967년 여름 일요일에 경리과원 동화사로 야유회 갔을 때.
좌로부터 조동복, 최종원 ,김영길, 이상욱, 이 연, 김한욱, 송세창과장, 김흥록, 박영순, 안용태
그리고 1970년 12월에는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12월 7일(음력 11월 9일) 아침에 나는 출근할 때 아버님 방문을 열고 다녀오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나왔다. 아버님은 며칠 전 치과에 다녀오셨는데 의사가 하는 대로 발치(拔齒)를 하나 했다고 하셨는데 그 후 통증으로 힘들어하셨고 이 날 아침에도 누워 계셨지만 그냥 편치 않으신 정도로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날 오후 3시경에 나는 아내의 급한 전화 연락을 받고 집으로 달려왔다. 급히 방안으로 들어서니 아버님은 내 손을 잡고 일어나려고 하시며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듯 하다 더 잇지 못하시고 숨을 몰아쉬시며 그냥 누워 버리셨다. 그리곤 바로 운명하셨다. 향년 72세. 평소에 건강하시던 아버지의 갑작스런 별세에 너무 놀라 그 충격에 나는 한동안 시달렸지만 당숙을 비롯한 집안 어른들의 도움으로 5일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바로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사인(死因)은 항상 궁금했는데 최근에 아내의 소견으로는 발치 때의 출혈에 의한 패혈증(敗血症) 때문이 아닐까 했다. 이 후로 나는 치과에서 이를 뽑는 것은 아주 조심스러워하고 있다.
이듬해인 1971년은 오일 쇼크가 본격적인 불황으로 연결되던 해였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모방을 비롯한 섬유업계는 심한 불황을 겪어야 했다. 하기야 산업 전반에 걸친 불황이었지만 제일모직으로선 대구공장 뿐만 아니라 69년 9월에 준공한 경산공장도 가동과 동시에 불경기를 맞아 고전하고 있었다. 그래서 초대 공장장을 역임하던 홍승려(洪承呂)씨가 물러나고 본사에 가 계셨던 손달식(孫達植) 상무께서 경산으로 내려와 공장장을 맡아 요즈음 말로 감량경영을 하고 있었다.
12월 초 어느 날 갑자기 나더러 경산공장으로 가라는 통보를 전해 들었다.
상사들에게 물어봐도 자세한 경위는 모르겠다고 하며 경산공장의 손달식(孫達植) 상무께서할애 요청을 한 것 같다는 정도였다.
내심 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대안도 없는 처지라 꾹 참고 경산공장으로 가서 이상욱 경리과장 밑에서 몇 달 더 사원생활을 했다. 그랬더니 해가 바뀌어 이듬해인 1972년에 3월에 이 과장께서 중앙개발 총무부장으로 영전하시고 뒤를 이어 내가 과장으로 승진발령을 받았다. 실로 입사 6년 3개월만의 과장 승진이었다.
1972년 3월 중순 김종필총리 경산공장 방문시 간부,사원들이 도열하여 영접하는 광경. 김총리 우측은 구자춘 경북도지사
그 해 7월 1일자로 경산공장은 제일모직에서 분리되어 제일합섬(第一合纖)으로 신설되는 과정을 밟았다. 이 때 회사 설립에 따른 법적 문제와 세법에 정한 제반 처리는 법적으론 본사인 경산공장에서 총괄 담당해야했기에 나는 분주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 그해 12월에 경리과에 신입사원 3명을 배정받았는데, 이들이 김순택(金淳澤), 원명보(元明甫)
이선우(李善雨)이고 이듬해엔 한용외(韓龍外)가 들어와서 함께 일했다.
지금은 흔적조차 사라진 제일합섬 경산공장 전경 (엘리트학생복지 생산, 화섬방 5만추 일관공정)
그런데 그 때만 해도 나는 과장으로 제몫은 한다는 생각에서 부하들의 교육이나 업무수행을 독려한다고 나섰고 일이 잘 되면 내가 관리를 잘해서 그렇게 된 걸로 알았는데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런 것이 아니라 유능한 부하들이 모두 열심히 해준 덕분에 그만한 성과라도 올렸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곤 혼자 쓴 웃음을 짓기도 한다.
1973년 5월 13일 본지사 경리과 간부들이 회의 마치고 동학사~갑사 코스로 등산하던 중 휴식하는 장면
뒷줄 좌로부터 김흥록과장, 이 연과장, 이대원과장, 앞줄 좌로부터 유재호과장, 경주현부장, 심재영부장, 남정우과장
그 뒤 나는 총무부 차장으로 승진하여 일하는 동안 시간은 흘러 경산공장에서 4년을 보냈다. 그러다 1975년 10월에는 제일합섬 본사로 전출 발령을 받아 단신 서울에 올라왔고 노모를 비롯한 식구들은
다음해 3월 1일에 내려가 모두 서울로 이사를 해왔다.
힘들고 괴로웠던 시절도 지나고 보면 다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고 했던가.
시인 유안진의 <살아온 세월이 아름다워>라는 시도
‘살아온 세월이 아름다웠다고/
비로소 가만가만/
끄덕이고 싶습니다/‘ 라고 시작하지만
나에겐 제일모직 대구공장에서의 6년, 경산공장에서 4년 도합 10년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세월이었다. 처음부터 대구 근무를 자원하여 내려가 이 10년 동안 나는 결혼, 삼남매의 출생과 아버님의 별세 등 가족사의 중요한 일들이 이루어졌으니 그 사실만으로도 정말 귀중한 세월이었다. 아울러 처음 사회 진출하여 회사생활하면서 경험과 식견을 넓혔고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했으니 이보다 더 아름다운 추억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섬유산업 불황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곳곳에 추억이 서린 이 두 공장의 기계설비는 모두 철거되고 아름다웠던 건물들도 사라져버려 이젠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2011. 10. 9.)
ㅡ 위 글은 삼성 퇴임임원들의 동호지 성우회보(Samsung Forever) 2011년 겨울호에 게재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원고청탁자가 사정상 못쓰겠다고 하여 편집책임을 맡은 제가 지면을 채우기 위해
마감을 앞두고 급히 쓴 글입니다.
[追記]
이 글의 독자가 삼성퇴임 임원들이라 1966~1975년의 10년 동안 대구에서 생활하는 동안
대구 친구들과 만나고 즐기며 우정을 나눈 얘기는 하나도 쓰지 못했다.
생각을 가다듬으니 침산동105번지 회사 정문 바로 옆에 '조일(朝日)알미늄'이 있어
퇴근할 때 언젠가 이재섭(李在燮)이 2층에서 내려다 보다 나를 알아보고 불러서 그의 사무실에
들어가 얘기를 나눈 기억이 난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일알미늄은 규모가 크지 않았으나 곧 경산으로 옮겨 확장, 발전하여
대규모 기업으로 성장한 것은 대단한 일이나 한 번 찾아가 축하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지났다.
그리고 고교시절부터 가까이 지나던 순하(淳夏)는 서울에 올라가 무슨 회사에 취직해 다니다
관두고 대구집으로 내려와 쉬다가 '진영산업'이란 건설회사에 다녔는데 퇴근후에 가끔 만나 그가
좋아하는 다찌노미를 함께 하곤했다. 그러다가 그는 정맥류인가 하는 병으로 대학병원에 입원하여
장시간에 걸친 큰 수술을 받았다. 회복은 됬으나 그 후에는 건강이 여의치 않아 고생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서울로 올라갔는데, 그는 결국 1984년 10월 46살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기완(起完)는 나에게는 언제나 형같은 모습으로 닥아왔는데 혼자 고생하여 이룩한
대창화공(大昌化工)이 잘 돼 친구들을 만나면 꼭 술을 샀다. 대완(大玩)이도 기완이와 같이
자주 만났고 태호(台鎬), 창우(昌雨), 인기(仁基)도 동석할 때가 많았다.
그리고 이제 기억이 나는데 정식(正植)이와 정원(鄭源)이는 내가 장가갈 때 가까이서 도와
주었고 결혼식에는 서울에서 수정(秀正)이를 비롯하여 친구들이 많이 내려와 축하해주었는데
강원조(姜元照)는 여늬 때처럼 우스개 소리를 해서 좌중을 웃기던 기억이 난다.
성진(城鎭)이는 내 결혼후 대구로 내려와 12호 검사인가를 했는데 가끔 자문역할을 해줬다.
그리고 경산공장 시절에 박만돈(朴晩敦)은 생산부의 가공과장을 해서 자주 만나는 사이였고
언젠가 어금니가 탈이 나서 신용환(申龍煥) 치과에 가서 크라운을 했는데 20년 이상 잘 견뎠다.
|
첫댓글 대구공장 경라과 시절을 읽고 있으니 함께 고생하던 그시절 추억들이 아스라히 떠 오르는군요.
힘들기도 했지만 아름다운 추억들도 많았지요.그래도 그때가 제일 좋았던 시절로 기억되고
이공 결혼해서 경리과 직원들이 초대받아 삼덕동집에 갔을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 하답니다./조동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