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의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해설 / 권순진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신경림
질척이는 골목의 비린내만이 아니다
너절한 욕지거리와 싸움질만이 아니다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이 깊은 가난만이 아니다
좀체 걷히지 않는 어둠만이 아니다
팔월이 오면 우리는 들떠오지만
삐꺽이는 사무실 의자에 앉아
아니면 소줏집 통걸상에서
우리와는 상관도 없는 외국의 어느
김빠진 야구 경기에 주먹을 부르쥐고
미치광이 선교사를 따라 핏대를 올리고
후진국경제학자의 허풍에 덩달아 흥분하지만
이것들만이 아니다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이 쓸개빠진 헛웃음만이 아니다
겁에 질려 야윈 두 주먹만이 아니다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서로 속이고 속는 난장만이 아니다
하늘까지 덮은 저 어둠만이 아니다
—시집『농무』(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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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은 헌법재판소가 정당결성의 자유라는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한 부끄러운 오점으로 역사에 오래 기록될 것이다. 이는 비단 통진당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우리사회의 보편적 진보의 가치까지 위협하는 심히 걱정스런 사태가 아닐 수 없다. 헌법재판소는 1987년 독재정권에 항거한 국민들의 민주화 투쟁의 역사적 결실로 출범한 국가기관이다. 독재정권에 의해 유린당한 우리 헌정사의 비극이 또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감시하고 국내 모든 정치 경제 사회적 행위들이 헌법정신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도록 견제하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역사적 소임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번 결정은 우리 사회의 민주적 역량에 대한 불신에 근거한 것으로서 국가에 대한 자긍심에 크게 상처를 입혔다.
지난 1년간의 재판 심리 결과 통합진보당이 북한과 직접 연계되거나 폭력혁명을 추구했다는 점이 직접 밝혀진 바는 없다. 민주주의에 대한 어떠한 구체적이고 급박한 위험성을 초래한 바도 없다. 그럼에도 헌법재판소는 박근혜정부의 비이성적 종북 공세와 여론몰이에 편승하여 해산 결정을 하고 말았다. 헌재가 과연 권력으로부터 독립한 중립적이고 냉정한 양심에 의해 판단했는지 의심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선고기일 또한 산더미 같은 증거와 기록물들을 미처 다 보지도 않은 채 정권의 요구에 서둘러 응하지 않았나 하는 의혹마저 든다. 저들 말대로 지지계층이 얇아지면 저절로 도태하고 말 정당을 관용하여 참아내지 못하고 국가가 앞장서서 기어이 일을 저질러버리고 말았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진보정당을 인정하지 않는, 비판세력을 용인하지 않는 후진국가로 추락해버렸다. 1958년 진보당 당수 조봉암에 대한 사형이 2011년 무죄 선고된 사례에서 보았듯이 역사는 오늘의 이 결정이 명백한 오판이었음을 증명할 것이다. 물론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통합진보당의 이념이나 행태를 지지하진 않는다. 그러므로 그 존재로 인하여 국기가 흔들리거나 심각한 위험에 빠져들 것이라 우려하는 사람 또한 실제로는 많지 않다. 얼마 전 북한 대표단을 향해 "박근혜는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외쳐댄 황선 씨 남편의 경우를 보며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 혀를 찼던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런 자가 진보를 상징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재갈을 물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어쩌면 그런 행태가 북측 인사들에게 그들과의 차별성과 우리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역설적으로 입증해 보인 새삼스런 계기였을지도 모른다.
이 시집이 발간된 1974년은 서슬 퍼런 긴급조치가 발령된 시기였다.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혐의로 기소돼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고 장준하 선생에게 2013년 1월 24일 대한민국 사법부가 무죄판결을 내렸다. 그때 재판부가 "고인에게 국가가 범한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 공적으로 사죄를 구하고, 잘못된 재판절차로 인해 고인에게 덧씌워졌던 인격적 불명예를 뒤늦게나마 명예롭게 복원시키는 매우 엄숙한 자리다.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다."라는 주문을 낭독한 후 이례적으로 별도의 사죄의 변을 덧붙였다. "인권의 암흑기에 민주주의의 기본적 가치 회복을 위해 개인적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고인에게 진심어린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표합니다. 뒤늦게나마 지난날의 과오를 사법부가 공적으로 사죄하는 이번 재심 판결이 고인의 평안과 안식에 위로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유신독재시절 정권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사법부의 잘못된 판결에 대한 사과를 받기까지 무려 39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박정희의 쿠데타마저 나름대로 의미 있다고 지지해준 장준하 선생에게 씌운 올가미가 비로소 풀렸던 것이다. 그동안 장준하 선생은 물론 남아있는 가족들이 짊어져야 했던 고통과 시련의 아주 일부분이 떨어져 나간 셈이다. 그러나 아직도 풀어야 할 숙제들이 많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또 자꾸만 숙제들을 쌓아가고 있다.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이 깊은 가난만이 아니다 좀체 걷히지 않는 어둠만이 아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장준하 무죄판결이 있고서 채 2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또다시 과거로 후퇴했다.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서로 속이고 속는 난장만이 아니다. 하늘까지 덮은 저 어둠만이 아니다'
권순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