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다해 3월24일 주님 수난 성지주일
[청주]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이사 50, 4 - 7
† 독서 : 필리피 2, 6 - 11
† 복음 : 루카 22, 14 - 23, 56(또는 23, 1 - 49
성주간의 첫째 날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교회는 오늘 성지(聖枝)
축복과 행렬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영광스럽게 기념하는 한편, ‘수난기’를 통하여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장엄하게 선포한다. 성지를 들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것은 4세기 무렵부터 거행되어
10세기 이후에 널리 전파되었다.
오늘 전례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오늘 예식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고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과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동시에 기념합니다.
당신 자신을 완전히 비워 낮추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으로써 우리를 어둠의 세력에서 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의 신비에
동참하도록 합시다.
★ 이사야서에 수록된 네 편의 ‘주님의 종’에 관한 노래 가운데
세 번째 편이다. 이 노래에는 온갖 모욕과 박해에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수난을 받아들이는 주님의 종이
소개된다. 이 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제1독서).
★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하느님 아버지께 철저히
순종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높이시고 가장 뛰어난 이름을 주심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온 누리에 드러내신다(제2독서).
★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주님의 수난기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잘 보여 준다. 고난 중에서도
예루살렘 여인들을 위로하시고, 당신을 죽이려는 이들까지
용서하시며,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바로 옆에 있는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모습이 그려진다(복음).
◈ 오늘의 묵상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루카 23,35).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조롱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이 보는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셨다면
어땠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도 있는데 왜
너무도 무력하게 수난과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셨을까요?
이를 잘 묵상해 보고자 비유 하나를 들겠습니다.
법정에 선 한 살인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선고 직전에
있는 이 사람을 바라보는 여러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검사입니다. 그는 살인자의 잘못한 점만을
바라봅니다. 두 번째는 변호사입니다. 검사와
대조적으로 살인자의 좋은 면을 부각시킵니다. 그러나
변호사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의 직업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판사입니다. 그는 법의 기준이기는
하지만, 사람 자체를 판단하며 그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청중입니다. 이들의 시선은 제삼자 그
이상의 것도, 이하의 것도 아닙니다. 그저 호기심과
무관심으로 일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살인자를 둘러싼 시선 가운데 어떤 시선을
지니고 계실까요? 하느님께서는 검사, 변호사, 판사,
청중과는 다른 시선을 지니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시선은 마치 살인자의 어머니가 지닌 마음과도 같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의 잘못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따질 틈도
없습니다. 그에게는 당장 자기 자식이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아들이 죽게 된다면, 차라리
자신이 대신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죄인들의
죽음을 바라시지 않고 오히려 살기를 바라시는 마음으로,
아무 죄도 없으시면서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채 묵묵히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매일 미사 -
◈ [청주]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3월24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 루카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입니다.
루카 23.1-49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인간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지만 주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이시간 한결 같은
사랑을 쏟아주시는 주님을 생각하는 가운데 풍부한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감탄고토’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이로울 때는 이용하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배척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유다백성들이 꼭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할 때에 제자들은
어린 나귀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걸치고 예수님을 거기에
올라타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길가의 나뭇가지를
꺾어서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고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
(루카19,38) 하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군사정권을
물리치고 유다민족을 1등 국민으로 독립을 시키며 수천 년
기다려온 메시아로서 부와 권력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옷을 길바닥에 깔았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바친
것입니다. 당시의 겉옷은 단순히 옷 그 이상의 것입니다.
겉옷은 담보 삼을 수 있을 만큼 중한 것으로 밤을 넘길
수 있는 이불이요,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천막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것을 길바닥에 깔고 주님을
환영하였던 그들인데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을 보고
“그 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루카23,21)하고 외쳤습니다.
베드로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고난의 길을 걷게 되리라고 예고할 때 베드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다가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는 꾸중을 들었고,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시며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마태26,31).하고 말씀하시자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 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26,33) 하였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루카22,33).하고 장담하였습니다.
그것은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위급한
상황이 닥치자 자기도 모르게 3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말하였습니다. 닭이 울고서야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목놓아 울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연약합니다. 강한 것 같지만 시련과 고통의
두려움 앞에서 무너집니다. 우리는 바로 이 약함 때문에
주님께 더 간절히 의탁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어떤 고난의 역경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의지만을 믿고 방심하면 걸려 넘어지고 맙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행위’는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자녀로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모든 죄를 끊어 버리고,
죄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 악의 유혹을 끊어버린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를 범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고, 부활의 삶을 믿는다.’고
선언하고서는 그 부활이 없는 것처럼 처신하고 있습니다.
우환이 생기면 성체 앞에 쫓아와서 기도할 생각보다도
‘어디 용한 사람 없나?’‘오늘의 운세가 좋지 않더니만…
이런 일이 생겼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자녀의 결혼
날짜를 정하는데도 길일을 정한다고 점쟁이를 찾고
사주팔자를 보시는 분도 많이 계십니다. 점쟁이를
찾아갔는데 너무 많은 사람이 와서 묵주기도를 하며
기다렸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점괘가 좋고 사주팔자가
좋으면 뭐합니까? 노력하지 않는데! 아무 노력 없이
복이 굴러옵니까?
가정 안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결혼하실 때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마지못해 하셨습니까?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너 없이는 못산다.’고 하였습니다. 너만 있으면
앞날이 열리고 행복할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눈에
꽁깍지가 씌워져 보이는 게 없었죠. 그래도 어찌 되었든
하느님과 일가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신의를 지키며 일생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선언해
놓고는 상대방을 무시하고 자기 뜻에 맞춰주지 않는다고
바가지 긁고, 변명을 늘어놓고…….
자녀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교육한다고
해놓고서는 신앙은 자유라고 합니다. 커서 자기가 판단해서
선택하게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다른 교육은 왜
하십니까? 자기가 커서 알아서 하게 두지. 신앙교육은
다른 것에 우선해야 합니다. 모든 가르침은 ‘주님을
두려워하여 섬기는데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배운 것이 많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주님 마음에
들게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부모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당신을 뱉어버린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죄수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하시며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혹 죄를 짓게 된다면 잘못을 뉘우치고 허물을
고백하며 주님께 의탁하여 구원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으로 걸려 넘어지는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하느님께 알게 모르게 약속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충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십자가에 못을 박는 행위가 더 이상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고 숨을 거두시는 광경을 목격한 백인대장이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23,47).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조롱과 모욕,
억지로 우겨대는 사람들을 상대하여 한마디의 항변과
변명도 없이 무력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그 깊은
침묵 속에서 백인대장만큼은 의로움을 발견하였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모함하고 헐뜯고 비방하며 흉을
본다면 그렇게 침묵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어떤 예기치
않은 상황과 처지에서 그리고 구설수에 침묵의 언어로
사랑의 깊이를 더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침묵은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깊은 침묵으로 사랑에 사랑을
더하고 사랑을 담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토마스
머튼은 “왜? 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용할 때 침묵은
흠숭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매순간 흠숭을 드리는
기쁨을 차지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성주간입니다.
거룩함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십자가와 계약
2013년 다해 3월24일 성지주일
<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
복음 : 루카 19,28-40
< 십자가와 계약 >
신앙심 깊은 슬로바키아 민족들은 공산주의 박해 아래
수십 년 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14살 양카도 수없이 많은 순교자들 중 한 명입니다. 1977년
늦가을 슬로바키아에서였습니다. 간호사가 되기 위해
준비하던 마리아는 어린 환자들과 놀기 위해 병원의
소아병동을 방문했습니다. 그녀는 이 병상에서 저 병상을
다니며 어린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 사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녀는 14살 소녀의 병상으로 갔는데, 그 때 만난 아이가
바로 양카였습니다.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양카가 물었습니다.
“가톨릭 신자세요?”
“그래.”
“성당도 다녀요?”
“그럼. 규칙적으로 다니지.”
“그럼 좋아요.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걸
당신에게 말해줄게요.”
“5년 전에 나는 첫 영성체를 했어요. 그러나 비밀이에요!
할머니께서 나를 준비시켜 주셨어요. 우리 부모님은
공산당원이기 때문이에요. 엄마는 선생님이고 아빠는 당
서기관 대리예요. 나는 부모님과 하느님이나 신앙에 대해
한 번도 얘기해본 적이 없어요. 첫 영성체 후 나는 특별한
꿈을 꿨어요. 나는 예수님을 보았는데, 하나는 흰색이고
하나는 붉은색인 두 개의 관을 손에 들고 계셨어요. 그리고
말씀하셨어요. ‘양카, 너는 어떤 걸 원하니?’ ‘둘 다요.’
‘그러나 붉은 관을 받으면 너는 고통을 받을 거야!’
‘상관없어요. 저는 둘 다 가질래요.’ 이렇게 대답한 후에
나는 오른쪽과 왼쪽에 많은 사람이 있을 것을 보았어요.
그들이 내게 소리쳤어요. ‘양카, 우리를 도와줘! 우리를
구해줘!’ 그게 내가 꾼 꿈이었어요.
부모님은 곧 내가 첫 영성체를 한 것을 알게 되셨어요.
그들은 할머니에게 소리를 지르고 마침내 할머니를 집에서
내쫓았어요. 나는 몹시 울었어요. 엄마는 내 방을 뒤져 내
눈앞에서 상본과 교리서를 모두 태웠어요. 그리고 레닌의
책을 책상 위에 놓고 소리쳤어요. ‘우린 이제 이걸 공부할
거다!’ 나는 흥분해서 그 불온한 책에 침을 뱉었어요. 그러자
아빠가 나를 몹시 때렸어요. 그리고 부모님은 나가셨고 나는
혼자 집에 있었어요.
나는 할머니가 과연 어디 계실까 곰곰 생각했어요. ‘분명
성당에 계실 거야.’ 역시 그곳에 할머니께서 계셨어요. 나는
계획을 세웠어요. ‘오세요, 할머니. ‘제 방에서 주무시면
돼요. 부모님은 하루 종일 밖에 계실 테니까 할머니는 제
방에서 지내시면 돼요. 제가 학교에서 급식 받은 빵을
가져오고, 학교 가는 길에 필요한 걸 사면 돼요.’ 할머니는
나를 따라와 내 방에 숨었어요. 바로 성탄 시기였는데
열흘 동안은 잘 지나갔어요.
그런데 부모님이 내 방에서 할머니를 발견했어요. 우리
부모님은 처음보다 더 무자비하게 할머니를 쫓아냈어요.
나는 몹시 울면서 소리 질렀지요. 아빠는 화가 나서 펄펄
뛰면서 나를 책상에 묶어놓고 거의 죽을 만큼 때렸어요.
보세요. 여기 무릎 아래 아직도 상처가 있지요. 지금은
그렇게 심하진 않지만... 마음은 몸보다 훨씬 더 아파요.
왜냐하면 할머니가 성당 뒤에서 얼어 죽어있는 걸 사람들이
발견했거든요. 나는 그 후에 병원으로 보내졌어요. 내
친척들 중 누구도 나한테 일어난 일을 알아채지 못했어요.
그 후 나는 집보다 병원에 있는 날이 더 많아요. 나는
완전히 혼자예요.”
마리아가 물었습니다.
“근데 지금은 왜 여기 있지?”
“보세요. 여기, 이 옆구리에 종기가 났는데 그게 점점
커져요. 아빠가 나를 때렸던 곳에 그게 생겨났어요.
그때부터 점점 자라면서 진물 같은 게 흘러요. 사람들이
나를 수술할 거래요.”
마리아는 그 종양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건 어려운 수술이야. 너는 사제에게 병자성사를 청해야
해.”
“바로 그 때문에 처음부터 당신이 가톨릭 신자냐고 물었고,
당신께 모든 걸 얘기한 거예요.”
얼마 후 담당 간호사가 마리아에게 그 소녀가 수술 후에
죽었다며 편지를 한 통 전해 주었습니다.
“마리아, 내게 마지막으로 성체를 모실 수 있게 해주어서
고마워요. 나는 첫 영성체와 마지막 영성체만을 했군요.
이제 나는 수술이 끝났어요. 어떻게 될지 당신은 아나요?
나는 수술 후에 귀가 안 들려요. 부모님은 그것을 아주
속상해 하세요. 그분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나는 전혀 듣지
못해요. 아빠가 지갑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상본을 꺼내시더니 거기 몇 마디 써서 내게 읽으라고
주셨어요.
‘양카, 우리에게 너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다!
너는 우리를 다시 하느님께로 인도해주었다. 나는 더
이상 공산당 서기가 아니다. 나는 창고 관리인이고
엄마는 더 이상 선생님이 아니라 상점 점원이다. 우리는
네게 고맙구나. 우린 공산당에서 탈퇴했단다.’”
양카는 1977년 12월 8일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죽었습니다. 12월 8일은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대축일입니다.
정광태씨가 부른 ‘도요새의 비밀’이란 노래를 아십니까?
“너희들은 모르지, 우리가 얼마만큼 높이 오르는지...
너희들은 모르지, 우리가 얼마만큼 멀리 날으는지...
너희들은 모르지 우리가 얼마만큼 빨리 날으는지...
도요새, 몸은 비록 작지만 가장 멀리 나는 새, 가장 높이
꿈꾸는 새”
도요새들은 해변가에 거주하게 되는 동안 작은 게나
벌레들을 잡아먹고 암컷의 경우 몸무게가 약 600g이
되게 살이 찐 후 점보제트 여객기로도 12시간가량 걸리는
거리까지 한번에, 쉬지 않고 잠도 안자고 먹지도 않고
하늘을 날아 이동하는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멀리 날고
높이 아는 새입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E7] 이라고 하는 위성 꼬리표를
부착한 이 도요새는 뉴질랜드 북섬 테임스강 하구
피아코 에서 3월17일 밤 자정 출발해서 곧장 타스만해를
가로질러 뉴칼레도니아 파푸아뉴기니아 괌 서부를 건너
한반도의 서해(황해) 갯벌까지 1만 205km를 날아갔다고
합니다. 장거리 논스톱 비행으로 몸무게가 반절 가 되게
줄어든 이 새들은 한반도 서해안 지역 갯벌 에서 약
5주가량 쉬며 기력을 회복한 후 또 다시 약 5000km 더
떨어지는 알라스카 까지 머나먼 여정 길에 오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도요새가 왜 이런 멀고도 험한
비행을 하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알려진 바가 없더라도 도요새가 그렇게 먼 여행을
한다면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모든 동물들은
생존본능이 있습니다. 그렇게 고생하는 것이 그만한
가치를 내게 가져다주지 않는다면 그런 고생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계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온전히 이해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관계를 계약으로
이해해야 할 때입니다. 계약이 체결되려면 먼저 내가
가지고 싶은 상품이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그 상품의
값은 내가 지불하려는 한계 내에 있어야합니다. 만약
내가 그 값을 지불하고 그보다 더 큰 이득을 얻게 된다면
우리는 가차 없이 그 값을 지불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비유 ‘밭에 묻힌 보물’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밭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전
재산을 팔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보물이
있으니 가차 없이 전 재산을 팔아 땅을 산 것입니다.
모든 관계는 이득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는 지불해야
하는 것도 있는 것입니다. 그 관계에서 얻는 이득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의무가 십자가입니다. 이는 양카의 꿈에서
예수님께서 흰 관과 붉은 관을 두 개 보여준 것과 같습니다.
양카는 계약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아이였습니다. 흰 관은
붉은 관 없이 얻을 수 없는 영광입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할
때 배우자의 좋은 면하고만 결혼할 수 있겠습니까? 배우자가
가지고 있는 좋은 면, 나쁜 면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으면 예쁜 것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자녀를
위해 해 주어야 하는 희생까지 함께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그런
고생을 해서 그만한 이득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결코
당신의 에너지를 소비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얻으려고 했던 상품?은 무엇일까요? 바로 아버지와의
관계입니다. 아버지가 아드님과의 관계를 조건으로 원하신
것이 십자가의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관계가 십자가의 죽음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기에 예수님은
그 값을 지불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노력하는 것과 돌아오는 것이 정확히 같은 가치라면
굳이 계약을 체결하고 무언가를 지불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나에게 좀 ‘더’ 이익이 되기 때문에, ‘플러스알파’가 있기
때문에 계약을 맺고 값을 지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목숨을 내어놓으셔서 다시 아버지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되돌려 받는다면 사실 십자가의 순종은
이득이 되는 계약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관계를 위해 지불한 십자가의 희생은
아버지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새로이 탄생한 교회와의
관계도 플러스알파로 주어집니다. 마치 부부가 혼인하여
부부간의 사랑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플러스알파인
자녀의 선물까지 얻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관계는 나를
완성시켜줄 뿐만 아니라 더 큰 것을 얻게 해 주기 때문에
항상 이익이 남는 장사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과 맺는 계약은 우리의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맺어야 하는 강요받은 계약입니다.
도요새나 철새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먼 이동을 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존재적으로 하느님과의
계약이 아니면 생명을 얻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남자와 여자가 태어나기 시작하면서부터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생각하게 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니 해 보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고들
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남자로서의 혹은 여자로서의 완성도 이룰 수 없으며
부모가 된다는 것도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나는 관계로 완성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위해서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이 십자가의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것이 싫다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끝이고 나의 생명도
끝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십자가가 가벼워지기 위한 유일한
길은 내가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이 훨씬 크고
이익이 많이 남는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길뿐입니다.
양카가 자신이 붉은 관도 받아들였을 때 많은 이들을 구원하게
될 것이라는 환시를 본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의 희생은
자기만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구원됩니다.
그리고 그 영광과 기쁨은 십자가의 희생보다 훨씬 크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지 않겠습니까? 자신들의 희생으로
얻는 것이 희생보다 작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익이 남는 것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도 십자가를 비켜갈
수 없는 것처럼 공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값을
치르고 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이
얼마나 큰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돈 몇 푼 벌기 위해 그렇게
노력하는데,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주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구원해준다는데 그분과 계약을 맺지
않는 것 자체가, 그래서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것 자체가 얼마나
바보스런 것이겠습니까?
십자가는 바로 이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내가 목숨을 내어놓고라도 맺어야 하는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가치를 올바로 인식만 한다면
내가 지불해야 하는 것은 아주 작은 비용임을 깨닫게 될
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희생을 하는 성인들은 그 희생의
가치를 알았기에 항상 더 많은 고통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늘나라 영원한 보물에 조금 더 투자해 보려는
결심을 해 보는 것을 어떨까요?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지금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새벽을 열며 묵상 글 글씨체가 너무 작다는 의견이
많아서 어제 하루 크게 했었습니다. 그런데 찬반이
갈리더군요. 새롭게 바뀐 것이 좋다는 분도, 또 예전
것이 좋다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 것은 예전
글씨체에다가 줄 간격을 조금 늘려서 올려 봅니다.
어제와 비교해 보시면 어떨까 싶네요. 참고로 글씨가
작다고 하시는 분은... 컨트롤 키(Ctrl)를 누르신 상태에서
마우스 휠을 위로 올리시면 확대가 될 것입니다. 아니면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메뉴로 들어가셔서 확대하셔도
됩니다. 그럼... 오늘의 새벽 묵상 글입니다.
한 청년이 고등학교 때의 선생님 이야기를 합니다. 그
선생님이 얼마나 못된 선생님인지, 만약 그 선생님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신나고 재미있는 학창시절을
보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지요. 그런데 이렇게 선생님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에게 좋은 선생님이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부정적인 모습만을 바라보니 그 누가
자신의 입맛에 맞겠습니까? 아마 저에 대해서도 나중에는
“내가 그 빠다킹 신부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니까.”라고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이런 사람과 달리 선생님에 대해 깊은 존경을 표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존경하는 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 분은 이래서 존경하고, 저 분은
저래서 존경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존경
받을 만한 스승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다면 스승 운이
좋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본인 스스로 갖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존경받기에 충분한 스승을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청년이 제게 자기 여자 친구라면서 사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요.
“신부님, 제 여자 친구 정말 예쁘죠?”
저는 이 사진을 보고서, 이 친구가 이상한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얼굴이었고,
또 요즘 청년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제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싶어서 다른 청년에게
사진을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 역시 저와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맞습니다. 긍정적으로 보는 마음이 가장 아름다운 여자
친구로 보이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곁에 존경할
사람이 없다면, 내가 운이 없어서가 아니라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닐까요?
이천 년 전에 오신 예수님. 존경과 사랑을 받기에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실
때, 사람들은 열렬히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마음들 안에 부정적인 생각들이 자리 잡으면서 존경과
사랑을 받기에 충분한 조건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보다 없어져야 할 대상, 죽어도 마땅할 사람으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던졌던
환호에서 “십자가에 못 박아라.”라는 악의에 찬 외침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지금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내게 정말로 필요한 분, 나에게 가장 좋은 것만을
주시는 분으로 받아들입니까? 혹시 내가 필요할 때에만
찾는 분, 내게 그다지 필요 없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렇다면 언젠가 내게 큰 전환점이 찾아올
때, 주님을 향해 악의에 찬 외침을 던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마음으로 주님께 다가서는
사람들은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면서 뜨거운 마음으로
늘 열렬히 환호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과연 어느 쪽인가요? 성주간의 첫날인 오늘,
깊이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낭비된 인생이란 없어요. 우리가 낭비하는 시간이란 외롭다고
생각하며 보내는 시간뿐이지요.(이치 앨봄)
교구청 사제관 성당. 새벽에 기도하러 들어갔다가
오늘 올릴 사진이 없어서 찍음. ㅋㅋ
애는 애처럼, 어른은 어른처럼
만약 갓난아기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요?
“엄마, 지금 바쁘시잖아요. 그러니까 젖은 나중에 주세요.
지금 무척 배가 고프기는 하지만 엄마가 바쁘니 힘들잖아요.
조금만 참죠 뭐.”
징그럽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갓난아기는 자신의
욕구를 그대로 분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 자신의 욕구를 그대로 드러내면 어떨까요?
“나 지금 배고프단 말이야. 얼른 밥상 차려!! 바쁘다고?
네 바쁜 거하고 나 배고픈 거하고 무슨 상관인데?”
자신의 나이에 맞게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어른이 되어
‘애처럼 굴면’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는 삶은 결코 어른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애처럼 구는 어른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습니다.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렵다고 계속해서 칭얼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의 나이에 맞게 사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애는
애처럼, 어른은 어른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그래도 가야할 길
2013년 다해 3월24일 주님 수난 성지주일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 22,14-23,56(또는 23,1-49>
<그래도 가야할 길>
수난 복음을 묵상하는 제게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것은
십자가 상 예수님께서 우도에게 보여주신 자비입니다.
예수님의 오른편 십자가에 매달려 있던 우도가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란 표현을 씁니다.
이 말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가장 극형인 십자가형을 받아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인간, 죄란 죄는 다 짓고 살아온 인간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구제불능의 인간, 십자가형에
처해져야 마땅한 인간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평생을 죄만 짓고 살아온 인간이었던 우도가 죽기 단 몇 시간
전 예수님과의 극적인 만남을 통해 천국을 보장받게 됩니다.
십자가 상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제자
요한에게도, 수제자 베드로에게도 건네지 않으셨던 말씀,
“구원을 확증하는 말씀”을 던지십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언제나 습관적이 죄에서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하는 우리,
똑같은 죄를 매번 반복함으로 인해서 죽고만 싶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그 말씀은 진정 희망과 위로를 건네는 말씀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임종하는 순간에도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말씀, 구원을 주는 말씀을 건네시는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에 마음이 다 짠해옵니다.
주님 수난 성지주일인 오늘, 교회는 고뇌와 비장함으로
가득 찬 예수님 얼굴을 기억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가기 싫어하는 길, 그러나 그 누군가가 반드시
걸어가야 할 길,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외롭게
걸어가십니다.
그 길은 고통과 번민으로 가득 찬 가시밭길이었지만,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길이었기에 두말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그 길은 처절한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는
사형수 길이었지만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길이었기에
기꺼이 걸어가십니다.
길가에 줄지어선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환호성을 올리며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환호 뒤에 숨겨있는 비수 같은 생각들을 이미 다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웃는 표정 뒤에 감춰진 사악하고 탐욕스런 마음들을
다 꿰뚫고 계셨습니다. 머지않아 저들의 환호는 돌팔매질로
바뀌고, 저들의 박수소리는 야유와 침 뱉음과 조롱으로 바뀔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향기로운 꽃길만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 길은 고난의 가시밭길, 조소와 야유로 가득 찬
슬픔의 길,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죽음의 길이기도 합니다.
진정 되돌아가고픈 길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걸어가십니다. 십자가 길 그 너머에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만을 바라보며 용기를 내어
걸어가십니다.
주님 수난 성지주일인 오늘은 우리 역시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
언덕길을 올라가는 날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의연하게 주님의 길을 따라가도록 합시다. 고통과
십자가 그 이면에 감추어진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을 깊이
묵상하면서 또 다시 길 떠나는 은총의 성주간이 되길 빕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고린 1,18)".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는
2013년 다해 3월24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는(루카22, 14-23, 56)
예수님께서는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라고 다급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없애려 하였듯이 사탄은 오랜 기간
동안 그리스도교 교회를 없애려고 음흉한 계략을
꾸몄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를 간파하시고
하느님께로부터 세상에 파견되시어 교회와 인류가
가야할 길을 제시하셨고, 겸손히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통해서 준비를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 때문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에게 돌아서셔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보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
아이를 배어 보지 못하고 젖을 먹여 보지 못한 여자는
행복하여라!’ 하고 말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 사람들은
‘산들에게 우리 위로 무너져 내려라.’ 하고, 언덕들에게
‘우리를 덮어 다오.’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날의 고통이 얼마나 심하면 아이를 배어 보지 못하고
젖을 먹여 보지 못한 여자는 행복하다고 말하겠는가?
그 날에 살아 있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산들에게
우리 위로 무너지라 말하고 언덕들에게 우리를 덮어
달라고 말하겠는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성모님께서 이미 여러
차례 여러 곳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인류에게 대경고가
주어지고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일찍이
인류가 겪어보지 못한 환란이 시작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경제공황, 대지진, 기근, 전쟁,
전염병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준비 없이 죽게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며 이미 죽은 사람들을
부러워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불행하게도 좌도는 죽어가면서까지
예수님을 조롱 합니다. 대경고가 주어져서 자신의
죄악을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느님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도처럼
죽음의 순간에 자비를 청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비가 주어질 것입니다.
이미 파우스티나 성녀를 통해서 하느님 자비의 기도를
가르쳐주셨고, 여러 차례 여려 경로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인류가 회개할 것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아무도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다.’ 라고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누구에게나 구원에
필요한 은총을 넘치도록 다 주셨기 때문입니다.
깨어 준비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다시 오심이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 시기가 기다리던 시기가
될 것입니다.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성령의 힘입어
하느님의 살아계심을 힘차게 전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 저희도 주님을 따라서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는 성령의 은총을 내려주소서.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 [서울] 사람이 하느님의 벗으로 세상에 산다는 것
오늘도 주님은 나를 필요로 하신다고 교회를 통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생긴 것이 문제 아니고 가진 것도
힘도 없지만 필요하시다는 겁니다. 늙어도 병들어도
죄를 지었어도 주님은 나를 필요하시다는 겁니다.
저는 신부가 될 때 이 대목을 저의 성구로 뽑았습니다.
너무 좋았거든요. 사람이 하느님의 도구로 세상에서
산다는 건 행복 중 행복이지요. 사람이 하느님의 벗으로써
세상에 산다는 것도 신앙인의 행복, 맞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루카 19,34)”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기타]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2013년 다해 3월24일 ‘주님의 수난주일’ 복음묵상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루카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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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타고 가실 나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어린 나귀 한 마리조차도 구원의
역사에 일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그분의 구세사
(救世史)에 참여하고 있을까? 물론 우리는 신앙생활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신앙을 너무 개인적인 것으로
이해할 때가 많다. 기도를 하고, 성사생활을 하며,
전례에 참여하고, 봉사를 하고 선을 행하면서 신자다운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러한 신앙생활이
가지고 있는 지향(志向)이나 이유가 대부분 자신이나
가족의 구원이나 행복을 위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한 단계 올라서야 한다. 나의 신앙에서 나오는 모든
행동은 그분의 구세사에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이
우선적인 동기가 되어야 한다. 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신 그분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시작되는 신앙이어야 한다. 하여, 나의
신앙생활은 그분의 구세사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의식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야 한다. 즉, 그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루어지는 신앙이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당신과의 사랑’이라는
관계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계시다.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나의 모든 신앙적 행위가 그분의 구세사에
작은 보탬이라도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우리의 작은 행동 하나
하나가 자신의 풍성한 신앙생활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분을 위한 것이 나를 위한 것이고, 나를 위한 것이
그분을 위한 것이라는 일치된 사랑의 느낌을 갖게 된다.
신앙인이라고 하는 우리가 그저 자신의 구원이나 현세의
행복에 급급하여 움직이고 있다면 그것은 참된 신앙생활이
아님을 깨달아야만 한다.
신앙은 적극적인 것이다. 어린 나귀 한 마리도 그분을
태우고 예루살렘을 입성했다. 우리 역시 그분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청해보자.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기타] <거룩한내맡김영성> 뭐 별 게 아닙니다
- 이해욱신부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뭐 별 게 아닙니다.
제가 "내맡김, 내맡김, 내맡김 - - - " 하고 자꾸 떠들어대서
그렇지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이란 뭐 특별한 어떤
방법으로, 또 어떤 특별한 사람들만이 살 수 있는 뭐
대단한 어떤 무엇이 절대 아니다.
"거룩한 내맡김"이란 자신의 결심,
즉 지금까지 "하느님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거의 모든 삶을 내 뜻대로 살아왔지만,
이제 앞으로는 내 뜻대로가 아니라,
나의 모든 삶을 정말 "하느님 뜻대로 살아가자."라는
"맹세 수준의 아주 굳은 결심"을 하느님께 봉헌해 드리는
것, 그것 외에 다른 그 어떤 무엇이 아니다.
그 결심은 어떤 특별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어떤 일이
아니다. 또 그 결심을 하기 위해 어떤 특별한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오직, 한 가지 필요한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려는 마음", 그것 하나뿐이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을 믿고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너는 이것이 부족해서 안 되고, 너는 저것이
부족해서 안 되고, 너는 이것을 갖추어서 되고..." 하는
식으로 사람들을 어떤 기준에 의해 선별하여 수준에 오른
사람들만을 믿고 따르게 하셨는가?
그리고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어떤 특별한 프로그램을
통해서 일주일 씩, 한 달씩 큰 돈 들여 골 때리고 골 썩히는
방법으로 긴 시간을 교육 훈련 시켜서 당신을 믿고 따르게
하셨는가 말이다.
"어떤 특뼐한 기준과 어떤 특뼐한 방뻡"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 예수님을 이상하게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서 자꾸 그 기준과 방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하느님은 어떤 수준에 오른 사람들을 어떤 방법으로
"찾아지는", 더 나아가 "얻어지는" 하느님이 절대 아니시다.
"진리"가 이미 이 세상에 왔기 때문에 그 어떤 방법에
의해 찾아지고 얻어질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진리가 이 세상에 오기 전에는 진리에 의해 특별히
선별된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이 "진리를 찾고 얻는
방법"을 가르침으로 진리가 찾아지고 얻어질 수 있었지만,
진리 자체인 진리가 세상에 온 이상 더 이상의 "진리찾기"는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진리가 진리에 의해 이 세상에 선포
되었는데 그 무신 "진리찾기 놀이"를 놀고 있는가?
진리는 분명히 자신을 "사랑"이라 선포했다!
"사랑 자체인 사랑"이 자신을 "사랑"이라 선포하였던
것이다! 그 "사랑"이 "진리"인데 "진리"인 "사랑"을
"사랑"하지 않으면 "진리"가 어떻게 찾아지고 얻어지겠는가
말이다.
"사랑"은 그저 느끼는 것이다.
느끼면 저절로 찾아지게 되어 있다.
그게 진리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적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왜곡시켜 왔다. "예수님"을 왜곡시켜 온
것이다. "사랑"을 왜곡시켜 온 것이다.
사랑은 "방법"이 아니다, "프로그램"이 아니다.
모든 동물의 어미가 새끼들에게 사랑을 가르치는가?
사랑하는 연인이 사랑을 배워 사랑을 하는가?
사랑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배우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며 하느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은 배워서 존재하지 않고 하느님에
의해 스스로 존재한다. 그게 자연인 것이다.
하느님에 의해 생겨난 모든 것은, 사랑에 의해 생겨난
모든 것은 사랑을 느끼게 되어 있고, 사랑을 느낄 때
사랑하면 그만이다. 그 사랑에 방법이 끼어들기
시작하면 사랑이 부자연스러워지게 되며, 부자연스러움에
의해 사랑이 왜곡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진실한 사랑"은 자기를 찾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어준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줌으로 진정한
자기(眞我)를 완성한다.
진실한 사랑은 자기의 뜻을 고집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방의 뜻을 헤아려 찾고 그 뜻을 따른다.
하느님의 참자녀는 "나의 뜻(자유의지)"을 고집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 찾고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인 "내 뜻"을
남김없이 하느님께 내어 맡긴다.
사랑은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맡긴다.
내맡기지 못하는 사랑은 "거짓사랑"이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다 내맡긴다.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지 못하는 사람은
"거짓 믿음"의 소유자이다.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이처럼 뭐 별 게 아니다.
하느님을 더욱 더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는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것일 뿐이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배우자를 더욱 더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는 배우자에게 자신의 전 일생을 다 내맡겼듯이
말이다.
그게 바로 "내맡김"이며, 그냥 하느님께 내맡기고 사는
것이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인 것이다.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 [기타] 주님 수난 성지 주일
2013년 다해 3월24일
오늘은 주님의 수난 여정에 함께 했던 사람들을 묵상하고
싶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마음 아프게 한 사람들입니다.
1) 유다.
한 자매님께서 주님의 최후의 만찬을 묵상하면서 한 시간
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제 이 저녁이
주님과 함께하는 마지막 식사라는 생각에, 주님께서
주셨던 그 많은 가르침과 주님께서 사랑해 주셨던 그
순간들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이 식사가
마지막이라는 그 느낌이 오면서 그렇게 눈물이 났다고
합니다. “저는 아니겠지요?”라는 제자의 말이 또한
가슴을 치게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경우에 배반은 절친했던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을
봅니다. 많은 것을 나누었던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을
봅니다. 본당에서도 보면 그렇습니다. 단체의 간부들끼리도
없는 자리에서는 상대방의 흉을 보기도 합니다. 이런 배반은
사제/ 수녀/ 평신도 모두에게서 나타나곤 합니다. 저는
교구에 있을 때 때로 본당에서 ‘투서’를 보내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본당 신부님의 잘못을 지적하고, 본당
신부님을 비난하는 그 사람은 사실 본당 신부님과 늘
가까운 자리에 함께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예수님을 팔아 넘겼던 그 유다와 비교해서 “나는 아니죠!”
라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2) 베드로
한 형제님은 늘 자신을 베드로의 입장에 놓고 묵상을
했습니다. 자기는 늘 모범생이었고, 남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았고, 기도도 공부도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피정을 하는데 늘 먼 가 부족하고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하는
베드로를 묵상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입장을 먼저 생각한 일들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께서는 늘 나와 함께 계셨는데,
나는 주님이 힘들어하실 때, 주님께서 함께 기도하자고 하실
때, 어쩌면 늘 주님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봅니다.
3) 안나스, 가야파, 헤로데, 빌라도 예수님을 고발하고,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게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많은
권한과 능력을 갖고 있었고, 사회적으로 지도층에 있었으며,
많이 배웠던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박해하고, 예수님을 죽음에로 몰고 갔습니다.
미국이란 세계 최강의 나라는 힘없는 나라와 전쟁놀이를
하였습니다. 전쟁을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대화와 타협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 힘에 의해서
해결하려했습니다. 그전에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노예로 팔아먹었으며, 아메리카의
주민들을 무참하게 죽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와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외국인이란
이유로 노동현장에서 무시 받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통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세계 경제의 80%이상은 10%도 안 되는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수 억 명
이상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동포인
북한에서도 수많은 어린이들이 영양실조로 발육 부진을
겪고 있으며 수많은 아이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들 모두에게 이렇게 물어
오실지 모릅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4) 군중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실 때 겉옷을 벗어서 환영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새로운 가르침에 감격하고,
하느님 나라가 다가올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고 요르단 강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이 가는 길가에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바라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초라하게 유대인의 법정에 설 때 군중들은
예수님을 향해 조소와 야유를 보냈으며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사제도,
레위인도, 율법학자도 지금 아파서 죽어가는, 피를 흘리며
간절히 도움을 청하는 그 사람을 외면하였습니다. 같은
동족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그 사람을 데리고 여관으로
갔고, 치료를 했으며 벗이 되어 주었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꽃동네는 없어져야
한다.”구요. 그렇게 꽃동네가 커지게 된 것은 어쩌면
우리들의 무관심과 우리들의 외면 때문이라고 이야길
했습니다. 어쩌면 오웅진 신부님과 꽃동네 가족들이
지금 병들어 버려진 사람들에게 벗이 되어준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실지 모릅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행복하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너희도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5) 십자가에 매달린 다른 사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그 죽음의 문턱에서 예수님께 자비를 구하였고,
그 사람은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으로 가리라.”는 위로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은 죽음의 문턱에서
예수님을 조롱하였고,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될지 모를 그
구원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말았습니다.
교도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지은 죄의 값을 치르고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아는 사람이 서울구치소에 있었기
때문에 잠시 면회를 간적이 있습니다. 구치소를 처음 들어갔기
때문이지 조금 무섭기도 했고, 몇 개의 문을 지나면서 구치소
안에 있는 그 친구가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잠시 유혹에 빠져서
그만 죄를 지었는데 부모님과 그 친구의 아내는 매일 면회를
가셨습니다.
교정 사목을 담당하는 신부님이 저와 동창 신부이기 때문에
특별면회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잠시
얼굴을 쳐다보았는데 무척 담담해 보였고, 자신의 죄를
솔직히 인정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아직 종교가 없기 때문에
가능하면 종교행사에 나가라고 이야길 하고 돌아왔습니다.
나중에 재판을 받고 다행히 집행유예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전화위복’이란 말처럼 공부를 하면서 잘못을 뉘우치고
열심히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교도소에서 말 그대로 교화나 교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쁜 방법을 배우기도 하고, 나와서도
사회에 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또 다시 잘못을 범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진심으로 뉘우치지 못하고 사회를, 가족을, 친구를 원망하면서
신세를 한탄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꼭 다른 사람에게 핑계를
대는 사람을 봅니다. 나는 나의 삶 속에서 나의 잘못을
인정하기 보다는 나의 환경과 나의 주변에 핑계를 댄 적은
없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오늘은 주님의 수난 여정을
묵상하면서 과연 나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주님께 위로를 드렸는지 돌아봅니다. 내일은 주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을 묵상하겠습니다.
-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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