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다해 3월27일 성주간 수요일
[청주] 저는 아니겠지요?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이사 50, 4 - 9ㄴ
† 복음 : 머태 26, 14 - 25
★ 주님의 종은 자신의 귀를 열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의 혀로 그것을 전하여 지친 이를 격려한다. 또한 자기가
당하는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삼아, 매질하며 괴롭히는
자들에게 등과 뺨과 얼굴을 내어 준다(제1독서).
★ 유다 이스카리옷이 은돈 서른 닢을 받고 수석 사제들에게
스승 예수님을 팔아넘기고자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배반을 이미 알고 계셨고, 그가 불행에 빠지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을 팔아넘길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왜
예수님께서 굳이 이를 예고하셨을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시는 제자 유다가 스승이며 주님이신 당신을
배반하지 않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의 이러한 마음을 외면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만 헤아렸다면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라며
예수님을 시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유다의 배반을 두고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
유다가 어쩔 수 없이 배반자의 숙명에 놓였던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다가 자신의 죄 때문에 얻게 될 불행을 두고 안타까워
하시는 내용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을 이미 구약에서부터
계획하셨으며(마태 26,24 참조), 이는 유다 한 사람의 배반의
유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당신을
시험할 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스승을
배반하는지 그렇지 않는지가 유다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음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말았습니다(마태 26,49 참조).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회개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에 대한 배반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우리도 유다처럼 완고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묵상해 봅시다.
-매일 미사 -
◈ [청주] 저는 아니겠지요?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3월27일 성주간 수요일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 마태오 26,14-25
저는 아니겠지요?
미국에서 교포사목을 할 때의 일입니다. 행려자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젊은이였는데 분명 아침미사참례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밤10시가 다 되었는데 배가 고프다고
하니 돌려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늦은 저녁을 먹으려고
준비하던 때라 사제관으로 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어설프게
준비한 파스타를 먹으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본인을 이탈리아사람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종이를
달라고 하여 그림을 그리며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어설프게 알아듣는 저를 보고 얼마나 답답하였을까? 음식을
챙겨 주었지만 제 마음 한 구석에는 이제 사제관에서 재워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하였습니다. 결국 담요 한 장을 챙겨
내보내고는 미처 여관비도 주지 못한 후회스러움 속에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부끄러운 밤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 아침미사 봉헌을 위해 제단에 올랐는데 그가 담요를
둘둘 말아 가지고 성당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디서 밤을
지새웠을까? 행려자로 오신 주님을 외면하고 봉헌하는
미사에 가슴이 저며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에 앞서서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26,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26,22)
하고 말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하셨습니다. 일상을 살아오면서
오늘도 여전히 주님의 뜻을 외면하면서도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말합니다. 밥 한 끼 주고서는 할 일을 다 한양 “저는
사랑을 베풀었지요?” 하고 말합니다. 아직도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는 소리는 살아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성사를 받을 때 약속한 것들을 얼마나
지키고 있는지? 혼인계약으로 새 가정을 시작하면서 다짐한
약속들, 부모와 자녀, 이웃과의 신의를 지키지 못하면서도
유다를 쉽게 비난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천상을
갈망하면서도 세상의 애착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입니다.
“주님, 저는 아니지요?” 하고 물을 때 “아니 너 맞아”라는
답변을 들을까 두렵다고 고백한 한상봉씨의 말씀이 크게
들려옵니다.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오늘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5-17) 죽은 믿음을 살리는 부활을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영적 배고픔과 육적 배고픔
2013년 다해 3월27일 성주간 수요일
<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
복음 : 마태오 26,14-25
< 영적 배고픔과 육적 배고픔 >
최근 2010년 바이올리니스트 김민진씨가 영국에서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을 도난당했는데, 최근
불가리아에서 집시가 팔려고 했던 바이올린이 김민진씨가
잃어버렸던 바이올린일 것이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영국 신문에 이 도난이 기사로 났는데 그
제목이 이랬습니다.
“5000원짜리 샌드위치를 사려다 21억 원을 잃어버렸다.”
스트라디바리우스는 17~18세기 이탈리아의 바이올린
제작자 스트라디바리(Stradivari) 일가족이 만든 것으로
세계적으로 400여 대가 남아 있고 악기 보관 상태와
음질 등에 따라 10억~30억 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
바이올린 가격이 무려 21억 원이나 하는 것이었던
것이고, 그것을 도난당하게 된 원인은 영국 지하철에서
샌드위치를 사려고 잠깐 바닥에 두었던 바이올린을
도둑들이 훔쳐간 것이었습니다. 바이올린을 훔친
도둑들도 그 바이올린이 그렇게 큰 가치가 나가는
것인지 몰랐다고 합니다.
에사우가 배가 고파서 장자의 권리를 붉은 콩죽과 바꾼
것이 생각나게 합니다. 배가 고프면 당장 아무리 가치
있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라면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배고플 때 먹는
것이라는 말과 같을 것입니다. 만약 당장 배고파 죽을
지경이라면 황금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당장 빵 한
조각이 가장 필요할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겨 받은 돈은 은화 30전입니다.
그렇게 큰돈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돈을 밝히는
도둑이었기 때문에 세상의 것들은 등한시하고 영적인
나라만 선포하는 그리스도보다는 당장 은화 30전이 더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잊거나 모르는
척 하거나 외면하며 그분을 팔아넘기는 원인들은 모두가
다 지금의 배고픔을 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배반할 사람이 유다라는 것을 빵을
찍어 알려준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하느님을 팔아먹는
이유가 당장 육체적인 즐거움을 채우려고 하는데서
비롯되지만 육체를 이기면 죄를 이길 수 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유다는 육체적인 배고픔은
채우려하면서도 영적인 배고픔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은 마치 숟가락 위에 올려놓은
기름과도 같습니다. 그것에 집중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흘러버립니다. 샌드위치 때문에 21억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순간적인 배고픔이 사라지고
나면 아주 오랜 고통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마치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 것과 같습니다. 짧은 배부름과 오랜 배고픔을 택할
것인지, 짧은 배고픔과 오랜 배부름을 택할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에사우가
되느니보다는 야곱이 되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아버님은 건설업을 해서 크게 성공한
적이 있으셨습니다. 그 분은 십자성호의 큰 체험으로
언제 어디서나 식사 전후기도나 삼종기도를 바치시는데,
30년 전 초창기 규모가 작은 회사였음에도 100억이 넘는
입찰에 도전해 보셨을 때도 그랬다고 하십니다.
아버님은 입찰이 이루어지는 동안 계속 묵주기도를
바치셨고 점심때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성호를
긋고 삼종기도를 먼저 바치시고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다가오더니 서류를 좀 보여 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서류를 주었는데 결과적으로
아버님의 회사가 그 일을 따내게 되었습니다.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방금 전에 서류를
달라고 하셨던 분이 중앙에 앉아계셨다고 합니다. 그
분은 누구도 그런 곳에서 성호를 긋고 식사를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하며 그렇게 신앙이 있는
분이라면 반드시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하여 그
분께 일을 맡기기로 결정 한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팔아야 세상 것으로 배를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기 전에도 은전 30냥은 수없이
만져볼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에 써 달라고 많은 기부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도 산다는 것은 영적으로 배부르고 육체적으로는
배고프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당신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보수를 받고 먹을 권리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제가 굶어 죽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은 영혼 ‘먼저’ 채워주고 육체를 나중에 채워주십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먼저 채우고 영혼을 채우려하기 때문에 다 잃게 되는
것입니다. 배가 부르면 영적인 배고픔은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았다면 밥을 굶고라도 기도할 수
있을 정도로 영적인 배고픔을 채우기를 갈구할 때
육체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육체도 당연히
음식을 먹어야 삽니다. 그러나 영혼도 양식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할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쓰고 있던 컴퓨터의 화면이 갑자기 어둡게 변했습니다.
깜짝 놀랐지요. 지금 현재 쓰고 있는 글이 혹시라도
잘못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얼른 저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두워진 화면이 잠시 뒤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원을 끄고 잠시 뒤에
다시 켜보았지요. 소리를 봐서는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것 같지만, 화면상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전의 지식을 떠올렸습니다. 한때 저는 컴퓨터를 직접
조립하고, 교구의 모든 신부님들이 컴퓨터에 이상이
생기면 제게 연락을 할 정도로 컴퓨터에 대해서 박식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러나 이제 컴퓨터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또 신경을 쓰지 않다보니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모르게 된 것입니다.
컴퓨터 본체를 열어 그 안을 유심히 쳐다보았습니다. 특별히
모니터와 연결하는 부분에 해당하는 그래픽 카드를 더욱 더
관심 있게 쳐다보았지요. 그러던 중에 그래픽 카드가 약간
빠져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카드를
빼었다가 다시 끼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전원을 켜는 순간,
다시 정상적으로 화면이 보입니다. 만약 대충 보았다면
빠져있는 그래픽 카드를 볼 수 없겠지요. 그러나 잘 몰라도
유심히 쳐다보니 전과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의를 기울여 바라보는 시선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특히 주님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주의를 기울여서 바라보려고 합니까? 내게 다가온 어떤
문제를 주의 깊게 바라보지도 않으면서 주님을 향해 쉽게
판단하고 불평불만을 던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만찬을 드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시지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유다 이스카리웃을 꾸짖기 위함일까요? 아닙니다.
그보다는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려서 주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참된 제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신 말씀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아니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갖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주님을 주의 깊게 바라보지 못했던 제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만 아니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을 뿐이었지요. 따라서
자기 안에만 갇혀 있었던 이천 년 전의 제자 모습이 아니라,
주님을 제대로 바라보고 그래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주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길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수많은 갈등의 순간. 우리는 그
속에서 양 갈래 길을 앞에 둔 사람처럼 고민한다. 하지만
인생이 어디 두 가지 중 하나만 정답이랴. 어느 것을
선택해도 나쁘지 않다(법륜).
어제 아침,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바라 본 송도국제도시.
주님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시간.
비통한 경험을 하게 되면 영적인 세계로 발을 들여놓기
쉽다고 하지요. 즉,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을 때에 영적인 세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학생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당시 저는
테니스에 푹 빠져 있었지요. 휴일에 외출도 하지 않고
친구들과 테니스장에서 하루 종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리한 것일까요? 서브를 넣는 순간 허리가 너무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오후 시간에 동네 목욕탕을 갔습니다.
목욕탕에서 허리를 지지면 금방 나을 것만 같았지요. 그런데
사우나실에 누워있던 제게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글쎄 누운
상태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일어나야 하는데
허리가 아파서 일어날 수가 없었지요.
사우나실 안에 있으니 점점 답답해지고 힘이 빠졌습니다.
저는 밖에 있는 사람들이 들으라고 “여기 좀 도와주세요.”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저를 돕기 위해 사우나실 안으로
들어오지 않더군요.
절망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나약하고 힘이 없는
존재인 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절망적인
순간에 나오는 말은 “주님, 도와주세요.”라는 것이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잘 찾지 않습니다. 혹시 이를 위해
주님께서 종종 우리에게 이러한 절망적인 순간을 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결국 절망의 순간을 피하고 싶지만, 그 순간
역시 주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소중한 시간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고통과 시련이 가득한 절망의 순간. 너무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순간이 오히려 멀리만 계신 것처럼 느꼈던
주님을 더욱 더 가까이에서 만나는 시간이 되니까요.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성주간 우리의 영적생활
2013년 다해 3월27일 성주간 수요일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마태 26,14-25
성주간 우리의 영적생활
지금 우리는 교회 전례력에서 가장 정점이자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성주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성주간
동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잘 묘사하고 있는 예수
수난 복음을 깊이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지난 성지주일 수난 복음을 낭독하면서 예수님의
‘특별한 생애’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되더군요.
첫 번째 시기는 예수님 일생 가운데 가장 긴 시기
-약 30년-에 해당되는 나자렛에서의 숨은 생활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이 시기는 아무래도 본격적인 인류
구원 사업 시기를 준비하는 기다림의 시기, 침묵의
시기, 수동의 때였습니다. 이 수동의 시기 예수님께서는
양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께 순종하면서 침묵과 기도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아나가셨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3년간의 공생활 기간입니다. 적극적인
능동의 시기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오랜 침묵을
깨고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부여해 주신 힘과 능력, 그간 갈고 닦은 내공에 힘입어
힘차게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정말이지 하루하루 신명나는 나날이었습니다. 직접
선택하신 제자들과 함께 이스라엘 전역을 활발하게
다니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당대 내놓으라는 대학자들과
맞서 토론을 벌이시는데 논리가 얼마나 정연하고 그
말씀에 힘이 있는지 사람들이 다들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오랜 고질병 환자들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마귀 들린 사람을 해방시키십니다. 죽은 사람조차도
생명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통해 오늘 여기서 구원이 이루어졌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짧은 공생활 기간이 끝나고 드디어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때, 수난의 때가 왔습니다. 이 시기
예수님께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신의 태도를 180도
바꾸십니다. 더 이상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순순히 적들의 손에 포위되십니다. 무장한 병사들 앞에
스스로 무장해제를 하십니다. 대사제 앞으로 빌라도
앞으로 헤로데 앞으로 이리저리 힘없이 끌려 다니십니다.
이윽고 순순히 기둥에 묶이십니다. 그 끔찍한 채찍질을
고스란히 받으십니다. 십자가를 등에 지우니 그냥
지십니다.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아무 말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수난의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은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셨습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권능을 고스란히 지니고 계셨던 능력의
주님이셨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한 고을을 완전히
쓸어버릴 수 있는 주님이셨습니다. 생각 한번으로 골고타
언덕의 판을 완전히 뒤집어 놓을 수 있는 기적의
주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수난의 시기 예수님은 더 이상 힘이 없습니다.
능력도 없습니다. 철저하게도 수동적입니다. 무자비한
폭력 앞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으시고 그저 무기력한
사형수의 모습으로 최후를 맞이하십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수난의
시기 예수님께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이거 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대체 왜 이러시는 걸까요?
그러나 좀 더 깊이,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수난의 시기
예수님께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안에서 제 3단계인 수난의 시기, 비록 외적,
육체적 사도직은 멈추셨지만 내적, 영적 사도직은 더욱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수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철저하게 순명하시는 순명의 사도직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실 골고타 언덕 위까지 끌려오신 예수님께서는 마음먹기에
따라 당시 벌어진 판을 순식간에 뒤집어 놓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더 큰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기
위해 끝까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않았습니다. 극도로
자신을 통제하였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십자가 상 그 혹독한 고통 속에서도 우도에게
구원을 선포하시는 사랑의 사도직을 실천하셨습니다. 십자가
주변에 둘러서 있는 많은 사람들 정말이지 도저히 용서 못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청하십니다. 용서의 사도직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십자가상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스런 가운데서도
수많은 사도직을 실천하셨습니다. 인내의 사도직, 침묵의
사도직, 겸손의 사도직...
이 성주간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생활은 어떠해야 할까요?
십자가상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 실천하신 사도직을
헤아려보니 즉시 답이 나오는군요. 순명, 사랑, 인내, 침묵,
겸손...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성주간 수요일
2013년 다해 3월27일 성주간 수요일
중견사제 연수를 하고, 용문 수련장에 있으면서 남는
시간에 ‘드라마’를 자주 보았습니다. ‘ 마의, 야왕, 아이리스,
내 딸 서영이, 백년의 유산, 그 겨울 바람이 분다.’ 드라마를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온갖 시련을 겪지만
나중에는 그 시련을 극복하고 행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악역을 맡은 사람은 처음에는 이기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모든 것을 잃고 비극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주인공이 시련을 겪으면 겪을수록 드라마는 더욱 긴장감을
줍니다. 더러는 악역을 맡은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주인공을 도와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치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배반하였지만 나중에 회개하여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반면에 유다는
끝까지 악역을 맡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합니다.
우리들의 삶이 드라마처럼 화려하거나, 긴장감이 넘치지는
않지만 때로 우리들의 삶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 더
재미있고, 실감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30년 전에 저는 드라마와 같은 경험을 했었습니다.
1983년도에 신학생인 저는 주일학교 교사들과
보좌신부님과 함께 안면도엘 갔었습니다. 30여명이 함께
갔습니다. 안면도 해안가에서 조개를 줍고 있었습니다.
한참 놀고 있다가 차로 돌아가려는데 차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와 다른 두 명의 교사만 남았습니다.
그때는 핸드폰도 없던 때였고, 이미 가버린 버스를
기다릴 수도 없고, 우리는 돈을 모아 수박을 하나 사서
먹고, 길을 걸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잘 모르지만
길을 따라서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 버스가
논두렁에 멈추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타고 온 버스였고,
버스가 길을 가다가 그만 바퀴가 논두렁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다른 교사들도 우리가 없는 것을 그때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반가운 마음에 원망도, 서운함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지금도 가끔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돌보셔서 버스의 바퀴가 논두렁에 빠진 것이
아니었을까!’
그날 민박에서 또 하나 잊지 못할 일이 있었습니다. 저녁이
되어 랜턴을 켰는데 약이 없는 것이 몇 개 있었습니다. 저는
낮에 함께 수박을 먹으면서 걸어왔던 교사들과 함께 건전지를
사러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해변으로 가서 랜턴의 약도 사고,
아이스크림도 사서 먹으면서 밤길을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동네의 청년들이 저희들 앞을 막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왔냐! 왜 밤에 다니느냐!’ 이런 것들을
물어보는데 겁이 났습니다. 교사 중에 한명이 성모송을
외우니까 청년들은 무슨 주문을 외우는 것으로 알았는지
우리보고 그냥 가라고 했습니다. 급박한 순간에 기도를
하던 교사가 아직도 생각이 납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해안가에서 버스가 떠나버렸어도 하느님께서는
다시 버스를 만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낯선 밤길에 무서운
청년들을 만났어도 하느님께서는 안전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우리도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어야 하겠습니다.
그 길이 우리를 모든 유혹으로부터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2000년 전
팔아넘기는 것들이 많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보험 든 후
살인하는 것. 아내가 남편을, 자식이 부모를 돈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고요. 앞으로 인간이 진화하면 아마
방법도 더 묘하게 변할 찌 모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2000년 전도
그래요. 그런가 하면 자기 자신을 명예나 재물 때문에 파는
경우도 있지요. 청문회에서 털어 먼지 나는 걸 보면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마태오 26,21)”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정제천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장엄하고 무거운 분위기에서 파스카 축제가 치러지고 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은돈 서른 닢에 스승을 팔아넘기기로
하고 돌아왔다. 나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이다. 작은 이익을 위해서 큰 나를 버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해 마련해 두신 길을 걷지 않는 것은
큰 죄다. 생명의 길을 버리고 죽음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내 안에 있는 유다와 싸울 것이다. 예수님의
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유다의 길을 따를 것인가? 내가
예수님을 따르면 생명의 길을 걷게 되고, 유다와 같이
죽음의 길에 들어서면 예수님도 죽음의 길을 걸으실 것이다.
스승을 팔아넘길 사람이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는다. 다른 제자들이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자 자기도 안 그런 척 묻는 것이다. 다른 제자들이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는 물음은 자기 자신도 못
믿는다는 극도의 나약함의 표현인 반면에 유다 이스카리옷의
질문은 위선적인 두 얼굴의 모습이다. 배신은 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안 보이는 데에서 배신이 이루어진다. 햇빛
아래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이 배신자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누구나 “저는 아니겠지요?” 한다. 그러므로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으로는 부족하다.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탑이고 질그릇에 담긴 보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다면 우쭐댈 일이 아니라
감사해야 한다. 누구나 죄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벗어났다면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늘 하루 유다가 등대이다. 어느 쪽으로 기수를
틀 것인가!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 정제천 신부(예수회) -
◈ [기타]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 다해 3월27일 성주간 수요일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
(마태오26,21)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오2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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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렸을 때부터 복음서에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12제자 중 예수를 배반한 이스카리옷 유다의
존재였고, 가장 참혹한 저주를 받은 듯 한 그의 삶이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위해서 유다의 삶을
그렇게 의도적으로 이끄셨단 말인가?”
“그렇다면, 유다처럼 불쌍한 존재가 더 이상 있을 수
없지 않은가?”
“모두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어찌 한 인간의 삶을
그토록 비참하게 만드셨단 말인가?”
“구원의 역사를 위해 유다는 하나의 중요한 소모품일
수밖에 없었던가?”
이외에도 여러 의문점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자신을 힘들게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사실 성서에도 유다에 관한
이야기는 몇 자 되지도 않고, 그저 악한 사람이기에
예수님을 배반한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여러분께 오늘 그 의문을 조금은 조심스럽게 풀어드리고자
시도해본다. 하지만, 성서학적이고 역사학적이고 신학적인
상세한 설명은 이야기가 길어지므로 피하고자 한다. 누구나
상식 선에서 이해했으면 하는 부분만 나누고자 한다.
(그래도 이야기는 길어질 것 같다.)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남부 유다 출신이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북부 이스라엘에 위치한 갈릴레아 호수의
서쪽에 위치한 갈릴레아 출신이다. 갈릴레아는 지정학적으로
외세의 침략을 자주 받은 곳이기에 이방인과 섞여 사는
환경이었으므로 혼혈의 문제로 남부 유다 사람들에게는
“깨끗한 혈통이 아닌 사람들”로 경멸의 대상이었다. 반면
남부 유다는 여러모로 북부 이스라엘에 비해 비교적 안정되고
교육여건도 좋은 환경이었다 한다. 그러한 남부 출신이 바로
유다였다. 이처럼 유다는 갈릴레아에서 어부로 살던 배우지
못한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을 확률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12제자들 중에서 유다가 맡은
일이 재정을 관리하는 역이라는 것을 보아도 안다. 그리고
예수님께 논리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이 역시 유다라는
것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왜 남부 출신이면서 갈릴레아까지 오게 된
것일까? 갈릴레아에는 앞에 말한 것처럼 외세의 침략이
오랜 세월 동안 이루어진 곳이기에 자연스럽게 몇 개의
저항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세력이 성서에
나오는 열성당원들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이들은 무장세력을
갖추고 로마제국에 저항을 하던 세력이다. 따라서 이스카리옷
유다는 남부 유다 지방에 속해있던 열성당원이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성서학자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다. 그리고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께 선택되어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 그러면 간략하게 지금까지 이야기 한 내용을 토대로
그림을 하나 그려보자.
유다는 배운 사람이었다. 자기 민족이 외세에 침략을 당하고
있는 것에 민감한 울분을 느끼던 사람이었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로 살고 있던 조국에 대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마음이 강했기에 열성당원이 된다. 열성당의 본거지는
갈릴레아였다. 그래서 그는 갈릴레아로 올라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문이 돌고 있다. 어떤 사람이 나타났는데
지금까지의 예언자들 하고는 전혀 다른 새로운 예언자라는
것이다. 자유를 이야기하고 억압받은 자들의 해방을
이야기하며, 여러 가지 이적조차 보인다는 소문이었다.
유다는 생각한다.
“설마 그런 사람이 나타나다니? 그렇다면, 외세로 억압받고
있는 이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뛰어난 지도자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분이 나타난다는 곳을 찾아가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핀다. 그리고 결심한다.
“선생님, 저를 당신의 제자로 삼아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를 제자로 받아주신다. 그분과의 삶이
시작된다. 모든 것을 그분께 걸고 따라가겠다고 결심한다.
그분에 의해서 온 민족이 봉기를 하고 외세를 이 땅으로부터
쫓아낼 것을 기대하며 희망에 부푼다.
시간이 흐른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선생님의 입에서 이상한 말씀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원수를
사랑하라. 왼뺨을 맞거든 오른뺨을 내놓아라. 오리를 가지고
하면 십 리를 가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꾸려는
이의 청을 거절하지 마라.”(마태오5,39-42) 그뿐인가?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르코9,31)라는 알아 들을 수도 없는 말씀마저 하신다.
분명한 것은 유다가 기대했던 말씀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걸고 따라가고자 했던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자신이
지금까지 생각해온 민족을 위해 걸으려 했던 길과 정반대의
말이었다. 민족을 계몽해서 로마 제국을 물리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더욱 로마의 사슬에 묶여 지내라는 말로 들린다.
오늘 복음에서는 유다가 은화 서른 닢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것처럼 나온다. 하지만, 은화 서른 닢이라는 것이
자신의 선생을 팔아 넘길 정도의 큰돈일 수는 없다.
결국 그가 예수를 배신한 이유는 자신의 믿음이 깨진 아픔이었다.
유다는 자신이 예수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느꼈을 지도 모른다.
차라리 이런 사람은 민족해방에 장애가 된다는 확신까지 하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따라서 하루빨리 제거해야 할 존재라고
느꼈을 지도 모른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을 수 있었다. 운명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결국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만 것이다.
나는 유다를 묵상할 때마다, 우리의 잘못된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판단을 불러오며, 그러한 판단이 하느님을 죽이는
죄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제대로 알아야
한다. 특히 옳고 그름에 대한 지식은 정말로 제대로 알아야만
한다. 우리 역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거짓 때문에 자신을
파멸시킬 수 있음을 늘 경계해야 한다. ..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기타] <거룩한내맡김영성>반드시式을올려야 합니다.
- 이해욱신부
반드시 式(ceremony)을 올려야 합니다.
우리 생활 속에는 많은 "식(式, ceremony)"이 존재합니다.
"식"은 격식, 의례, 의식, 형식 등을 말하는데
백일, 돌, 생일, 입학식, 졸업식, 약혼식, 결혼식, 장례식,
여러 기념식 등등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식"을 치르고 또 참여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구약의 제사도 하나의 "식"이고,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들도
"식"입니다. 우리 교회의 세례식을 비롯한 7성사와 준성사들도
"식"입니다.
신학생 때도 "수단"을 입는 "착복식"이 있는데 요즘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날은 아주 죽어나는 날입니다.
수단을 입은 사람을 때리면 죄가 되고 또 어렵게 입은 수단을
절대 벗지 말라는 뜻으로 수단을 입기 전에 많은 선배들로부터
대걸레 방망이로 엄청나게 엉덩이를 두들겨 맞습니다.
사랑하고 아끼는 후배는 더 세게 두들겨 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때리는 매에 정말 곤욕을 치뤄야 하는데 이 의식을
소위 "성타식(聖打式)"이라고 합니다.
신약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예수님도 제자를 뽑으신 다음에
제자들과 함께 어떤 의식을 치루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제자들과 헤어질 때 최후의 만찬을 치루셨듯이 말입니다.
어떠한 의식은 그 일의 의미가 클수록 성대하게 치뤄집니다.
오직 믿음만으로, 성경만으로, 은총만으로를 외치며
모든 형식을 배제하던 개신교에서도 요즘은 외적인 형식을
하나하나 다시 들여오고 있는 듯합니다.
과거에는 부활절이나 추수감사절에만 거행하던 성찬식도
요즘 대형교회의 주일예배를 보면 매주일 빠뜨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력을 무시하거나 강조하지 않던 분위기에서
점점 교회력을 따라 가려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 목사님들의 예배 복장도 점점 가톨릭을 닮아갑니다.
지나치게 복잡하고 화려하여 짐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어떤 의미 있는 일에 있어서 "의식"은 필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해 드리고 자신의 소중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겨 드리는 "거룩한 내맡김의
봉헌"에 있어서도 반드시 "식"이 필요합니다.
어떤 열심한 신앙인의 삶의 모습이 "내맡김의 삶"의 모습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어떤 의식을 통한 "하느님과의 서약"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삶"을 살아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 분명합니다.
만일, 외적인 의식을 통한 "서약"없이도 혼자만의 굳은
결의로 많은 이들이 늘 변함없이 한결같은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다면 오늘날처럼 그렇게 수많은 수도공동체가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거룩한 내맡김의 삶(영성)을 살아가려는 우리 하덧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떤 "규약"에 얽혀 있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단지 "하느님을 더욱 더 사랑"하기 위하여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을 함께 공유하며 저마다의 분야에서 오로지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려 노력하는 평범한 신앙인일 뿐입니다.
하느님을 더욱 더 사랑하기 위해서 "무형의 성전
(카페 <마리아처럼>)"에서 서로 만나고, 하느님에 대한
서로의 체험을 나누며, 말씀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이끌어 주며,
영적성장을 위하여 1년에 한두 번 기도모임을 가질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맡김의 삶(영성)"을 살아가려 개인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을 한다 해도 "거룩한 내맡김의 봉헌식"을 올린
분과 그렇지 않은 분과의 차이는 분명할 것입니다.
"거룩한 내맡김의 봉헌식"은 다음과 같이 간단히 이루어집니다.
1)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삶을 살 것을 굳게
결심한 사람은 자신의 뜻대로 살아온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뜻으로 "고해성사"를 봅니다.
2) 내맡김(봉헌)의 최고 모범이신 예수님이 세우신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길 것을
서약하는 "봉헌문"을 낭독한 후 봉헌문을 사제에게 봉헌합니다.
3) 하느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 것을 몸으로 표현하는 "성호경 몸기도"를 바칩니다.
4) 내맡김의 영성의 한식구가 되었다는 표시로 사제와
"왼 볼맞춤"을 한 후 내맡김의 봉헌자 서로와 또
기봉헌자들과의 왼 볼맞춤을 합니다.
이렇게 간단한 의식이지만, 이 의식으로 "하느님과의
서약"이 이루어지며, 내맡김의 봉헌자들은 이 서약에 따라
자신의 분야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아직, "거룩한 내맡김의 봉헌식"을 올리지 않으신
하덧사들께서는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 [기타] 그대는 아는가?
2013년 다해 3월27일 성주간 수요일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마태 26, 14-25)
그대는 아는가?(마태 26, 14-25)
흥얼거려집니다. 그대는 아는가? 라는 작자미상의 노래가사
중에 “그대는 아는가? 그대 몸은 주님이 살아계신 성전이요.
내 몸은 내 몸은 성전이요. 주님이 살아계신 성전이요. 당신은,
당신은 성전이요. 주님이 살아계신 성전이요.”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은 주님의 성전이고 주님의 지체이고 주님의 교회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희생으로, 주님의 거룩한
성혈로 죄 많은 우리 몸과 우리 영혼은 깨끗해졌습니다. 주님의
희생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인류를 위한 희생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의 생각으로 짓는 죄를 대신하여 가시관을
쓰셨으며, 우리의 마음으로 짓는 죄를 대신해서 창으로 심장이
찔렸으며, 손과 발로 짓는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그분의 그 크신 사랑에 무한한 감사를
드려야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우리 자신이 죄를
짓는다면 우리는 또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고, 가시관을 씌우고 채찍질을 하는 것이며, 고통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당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전율하지 않을 수 없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으며, 죄와 사탄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자신이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이고,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가 머무시는 성전이고, 우리자신이 곧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주님은 그렇게 고통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거룩한 우리 몸을 함부로 대하게 하고 함부로
대죄를 짓게 만들어 모든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죽어가게
만듭니다.
죄 없으신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또한 죄 많은
인간이 하느님처럼 거룩하고 완전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처럼 사랑으로 가득 차 세상의 사랑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네게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십니다.
나 자신은 어느 때 유다가 되어서 내 자신을 죄에 던져버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기는가? 자주 죄에 떨어지는 경우는 언제인가?
사랑의 주님, 제 자신이 유다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용서하여주시옵소서. 이제 베드로의 눈물을 흘리며 다시는
죄에 떨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서서.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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