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다해 4월3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청주] 먼저 그 분이 알려주셔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신부
† 독서 : 사도 3, 1 - 10
† 복음 : 루카 24, 13 - 35
★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활동하다가
성전 문 앞에서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을 만났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를 일으켜 세운다
(제1독서).
★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으나, 성경 말씀을 해석해
주시는 그분께 큰 감화를 받는다. 이윽고 저녁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자기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순간에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보면, 엠마오로 가던 예수님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까지는 ‘말함, 들음, 머무름’의
세 단계를 거쳤습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려면
이 세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첫 번째는 ‘말함’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동행하시자, 비록 그분을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걸음을 잠시
멈추고 자신들의 상황을 먼저 이야기하였습니다
(루카 24,17-24 참조). 이처럼 우리도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기도하면서 자신의 삶을 주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두 번째는 ‘들음’입니다.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전체에 나오는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루카 24,25-27 참조). 우리 또한 우리의 삶을
예수님께 말씀드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과정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준비를 갖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머무름’입니다. 저녁때가 되어도 더 멀리 가시려는
듯한 예수님께 제자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며
붙듭니다. 제자들의 청을 받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식탁에서
빵을 들어 올려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고, 그때서야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루카 24,28-31 참조). ‘말함’과 ‘들음’의 단계를 거쳐
마지막으로 성찬례의 신비 안에 머무르게 되자, 마침내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면서 그분께 우리의 삶을
말씀드리고,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시는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성찬례 안에서 그분께 머무르게 될
때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그분이 먼저 알려주셔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4월3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루카 24.13-35
그분이 먼저 알려주셔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은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무슨 특별한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를 위한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할 뿐입니다. 마음에 있는
얘기는 기회가 되면 할 것이고 지금은 묵묵히 있는 것이 좋습니다.
큰 일을 치루고 난 후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침묵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지금은 입을 다물
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오늘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죽었으니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히 돌아가시고 더더욱 그 시신까지 없어졌으니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늘과 같은 스승이 힘없이 사라졌으니 거기에
있다가는 어떤 불똥이 튀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서둘러
그 자리를 떠야 했습니다. 사실 무덤이 비었다는 것은 ‘고난을
겪은 다음에 자기 영광 속에 들어가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었지만 그것을 알기까지는 아직
눈이 뜨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큰 실망과 좌절만이
더하였습니다. 실망이 큰 만큼 기쁨이 크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일으키고 결정적으로 제자들은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자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습니다. 지금 당장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깨우침이
남아있었는가 봅니다. 나그네를 묵어가라고 붙들었으니
말입니다. 일찍이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창세18,1-15)하는 기쁨을 차지했습니다.
제자들은 마침내 나그네와 함께 식탁에 앉게 되었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알아보기가 무섭게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이 알 것을 알았으니 더 이상
거기 남아계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또한 제자들도 가던 길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고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먼저 알려 주셔야 그분을 알 수 있고, 우리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눈이 뜨인다는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또한 나그네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 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삶의 절망 한가운데에서도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였던 제자들처럼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의
어두움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우리와 동행 하십니다. 다만 내
아픔이 커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면서 마음을 열어 주시고 뜨겁게
해주시지만 지금 당장은 눈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꼭 붙잡으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절망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붙잡기만 하면 언제든지 함께 묵으십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1,8)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시작했으면 끝을 보아라.
2013년 다해 부활 팔부축제 내 수요일
<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복음 : 루카 24,13-35
< 시작했으면 끝을 보아라 >
저는 송탄성당 출신 사제입니다. 명절 때마다 송탄성당 출신
사제들이 고향이 모여 옛 이야기들을 나누곤 합니다. 지난 설
때도 만나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제가 초등학교 때
담배를 펴 보았다고 했더니 믿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냥
입담배(목으로 연기를 넘기지 않고 입으로만 빨았다가 내뱉는
것)나 호기심으로 펴 본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 도너츠(담배 연기로 도너츠 모양을 만들어 연속으로 내뱉는
것)까지 만들 줄 알았다고 했더니 믿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담배를 하나 붙여서 도너츠 묘기(?)를 선보여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모두들 놀랐습니다.
물론 저는 초등학교 때 그 며칠 펴 본 것을 제외하고는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습니다. 보통은 군대에서 힘이 들어서 많이 피우게
되는데 저에게도 담배를 권하는 선임이 있었습니다. 저는 담배를
안 피우겠다고 했는데, 선임이 피우라는데 거부했다고 하며 한
달 내에 피우게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즉 군대용어로 갈굼을
당하면 결국엔 피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선임은 제대
할 때까지 저를 싫어했지만, 저는 맞을 각오를 하고 끝까지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되었지만 피워보았고,
군대에서는 피우면 편했을 텐데 끝까지 피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도 참 고집이 있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격이 크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내 인생이 다른 누구 때문에 좌지우지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초등학교 때 피워보고 ‘별로 이롭지도 않은
담배를 뭐하러들 피우나?’라는 마음을 갖지 않았다면, 군대에서
선임의 괴롭힘을 피하기 위해 피우게 되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담배가 백해무익 하다는 것을 몸으로 느껴보았기
때문에 또 그만큼 안 피우는 데도 고집스러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누군가가 무언가를 고치고 싶어 하지만 잘
안 될 때는 그것 때문에 고민하지 말고 그 안 좋은 것이 정말 안
좋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때까지 해 보라고 권하기도 합니다.
술을 끊고 싶다면 술이 얼마나 안 좋은지 알아야 합니다. 저도
술로 많은 실수를 해 본 후에야 지나치면 나만 고생이라는 것을
깨닫고 사제가 되어서는 과음을 절제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차례 끊어보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고, 지금은 다시 마시기는
하지만 예전에 술 때문에 고생한 것을 몸이 기억하고 있기에
즐길 정도만 마십니다.
무언가를 해 보려거든 다시 되돌아 올 수 있는 한계 내에서
끝까지 가 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다시 돌아왔을 때
아무 문제가 없는 구 수준까지만 가 보십시오. 왜냐하면 그
끝을 보지 못하면 되돌아 설 때 항상 미련이 남기 때문입니다.
사실 누가 어떤 길을 가다가 되돌아 올 때는 그 길이 맞나
틀리나를 고민할 때가 아닙니다. 틀렸다는 확신이 섰을 때
다시 돌아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맞는지 틀리는지 모를
때는 갔다가 왔다가를 반복할 뿐 한 길을 선택해서 되돌아오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밥을 매일 먹고 잠을 매일 자는 이유는
그래야 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머리로 알기 때문이
아니라 온 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뜨거운 것에
손을 대려 할 때 말로 해서 안 들으면 손을 살짝 대게 해서
뜨거움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 상책입니다. 온 몸으로 알아야
비로소 알게 되고 변하게 됩니다. 산을 오를 때 길을 잃었거든
정상까지 가 보십시오. 그렇게 그 산이 틀린 줄 알아야 우왕좌왕
하지 않고 다른 산까지 앞만 보며 곧바로 갈 수 있습니다.
오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무엇이 옳은지 깊이 체험할 수
있는 꾸준함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분명히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는데도 그것에 대해 더
알아보지도 않고 그냥 실망하여 고향으로 내려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성경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연구해
보려고 노력했다면 그 여인들의 말을 믿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끈기가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고는 했지만 끝을 낼 줄은 모르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당을 떠나는 사람들은 가톨릭 신앙에 대해 갈
때까지 가보고 혹은 공부해보고 가톨릭 신앙을 떠나는
것일까요, 아니면 조금 다녀보고 특별히 느껴지는 것이
없어서 금방 포기하고 마는 것일까요? 갈 때까지 가본다는
마음으로 신앙을 시작한 사람들은 결코 교회를 떠날 수
없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율법서와 예언서,
그 밖의 성경 전체를 다만 길에서나마 가슴 뜨겁게 배우지
않았다면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알아 뵈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심장)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렇습니다. 지금까지는 성경을 읽어도 가슴이 뜨거워 질
때까지는 배워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를 하더라도 끝장을
보겠다는 마음이 없으면 항상 이도저도 아닌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도 대단히 위대한 성인이지만 그 전에는
마니교의 교주가 될 정도로 이단에 심취해 있었고 아들과
부인이 있었을 뿐 아니라 삶 자체도 매우 문란하였습니다.
이는 프란치스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당신들이 그렇게 살아온 것이 당신들을 망치고 있음을 가슴
뜨겁게 체험한 분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
할 때는 오늘의 엠마오 제자들처럼 바로 길을 바꿀 줄 아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전의 삶으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는 분들입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에서 남자 애벌레는 여자 애벌레를
만나 올라가던 중간에서 내려옵니다. 그러나 이내 버티지
못하고 여자 애벌레와 헤어집니다. 왜냐하면 그 정상에 대한
미련이 나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끝까지 올라가보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아쉬움 없이 내려와 나비가
될 것을 결심합니다.
이것이다 싶으면 온 몸으로 자신을 내던질 줄 아는 사람들이
큰일을 해 낼 수 있습니다. 벽에 부딪혀 보아야 더 이상은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엇이든 시작하기로 결심했다면
심장이 타오를 정도의 열정을 지닐 줄 알아야겠습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부활은 건너갑니다.
2013년 다해 4월3일
부활은 건너갑니다.
그 유명한 엠마오 복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한때 예수님으로
인해 잘 나가던 제자들, 예수님과 함께 하는 행복한 미래를
꿈꾸던 제자들이었는데, 다들 ‘이제 뭐해먹고 살아야 되나?’
하며 낙담해 있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엠마오라는
마을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말마디 그대로 잘 나가다가 미끄러져
낙향하고 있었습니다. 믿었던 예수님, 그래서 자신들의 미래를
걸었던 예수님, 마지막 보루이자 희망이었던 예수님께서 저리도
맥없이 돌아가셨습니다.
귀향길에 나선 제자들의 발걸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깨에 힘이 완전히 빠졌습니다. 터덜터덜 맥없이 걷고 있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 표현에 따르면 침통한 표정으로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두 제자 사이로 예수님께서 슬쩍 끼어드십니다. 그리고
자상하게 인생 상담을 시작하십니다. 갑작스레 끼어드신
예수님의 출현에 두 제자는 꽤나 당혹스러웠습니다. 물론 아직
그분이 예수님이신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두 사람 사이에 들어오신
예수님이셨기에 두 제자는 별 거부감 없이 스스로를 무장해제
시킵니다. 일말의 경계심도 의구심도 없이 오랜 친구처럼,
편안한 스승처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최대한 거부감이나 부작용이 없도록 그들에게 당신
자신을 열어 보이십니다.
이윽고 날이 저물어 어느 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성목요일 만찬석상에서 하신 똑같은
모습으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그러자 그제야 제자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 우리의 귀향길에 함께
걸으시는 예수님, 우리의 인생길에 슬그머니 끼어드시는 예수님,
우리 구차스런 살림살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예수님,
참으로 은혜롭고 마음 따스한 풍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심하고 낙담한 두 제자들 사이로 끼어드심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건너가게 만드십니다. 무지에서 깨달음에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흐릿함에서 명료함으로, 오류에서 진리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가게 만드십니다.
우리에게도 보다 확실한 부활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건너감입니다. 건너가기 위해
또한 필요한 작업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깨달음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걷은 인생 여정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어느새
끼어드십니다. 그리고 적극 개입하십니다. 그리고 초대하십니다.
보다 큰 사랑에로, 보다 깊은 깨달음에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매일의 삶이 부담이요 스트레스가 아니라 매순간이 은총이요
꽃봉오리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부활을 통해 가능합니다.
내 형제와 이웃이 고통과 십자가가 아니라 날 성장시키는 은총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은 바로 부활을 통해 가능합니다.
수도원의 높은 담이 나를 가두는 장벽이 아니라 내게 날개를
달아주고 나에게 참 해방을 주는 성벽임을 깨닫는 것, 그것은
바로 부활을 통해 가능합니다.
“부활은 건너갑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재물을 섬기는 삶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이기적인 사람에서 베푸는 사람으로,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에서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건너갑니다.
이 건너감의 끝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 부활입니다.”
(선종하신 의정부 교구 전숭규 아우구스티누스 신부님 묵상
중에서)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하늘과 신과 척하면 척
이심전심(以心傳心), 척하면 척 알아듣고 잘 통한다는
말이지요. 사람들과 이러면 좋지요. 더구나 신과 인간이
그렇다면 더 좋고요. 자연과 하늘과 신과 척하면 척하는
게 인간진화의 최종목적이겠지요.
진화의 노력 1단계로 인간들의 이심전심을 목표로 놓아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반려동물, 동물식물, 광물들로
방향을 잡으려 하네요. 더구나 무형의 실력 권력과 재물과
통하려 노력하니 참 한심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루카 24,25)”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정제천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두 제자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푸념하듯이 얘기를 나누며 터덜터덜
걷고 있다. 인간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슬쩍 다가와 말을 걸어오신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일을 사실 대로 말했다. 그러나 육안으로 본
그 일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예수님의 말씀과 설명으로
그들의 심안과 영안이 뜨였다.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던’
제자들이 마침내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서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는 진리는 인간이
스스로 깨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은 식탁에서 빵을 나누는
가운데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보았다. 말씀과 성찬으로 이루어지는
성체성사를 보는 것 같다. 우리들의 가정 식탁도 말씀과 빵의 나눔이
함께 이루어질 때 일치와 사랑의 힘을 발휘한다. 아내가 음식을
준비하고 남편이 말씀을 준비하면 식사가 하느님을 만나는 잔치로
변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주목하고 싶다. 그분은 어깨가
늘어진 사람들과 함께하시며 말을 걸고, 삶의 의미를 되살려 주시고
위안을 주셨다. 가정과 공동체에서 내가 대화를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대화를 통해 늘어진 어깨, 축 처진 어깨를 다시 펴주는 사람인가?
말로써 사람을 살리는 사람인가, 죽이는 사람인가? 기운을 북돋는
사람인가, 가라앉히는 사람인가?
- 정제천 신부(예수회) -
◈ [기타] <내맡긴영혼은>하루의'첫순간'과'첫행위'를
- 이해욱신부
내맡긴 영혼들은 매일매일 하루의 "첫 순간"과 "첫 행위"를
주님께 봉헌해 드려야 합니다
내맡긴 영혼들은 자신의 모든 것, 생각도 마음도 몸도 모두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송두리째 주님께 맡겨
드렸음으로 매일매일 새로이 주어지는 하루의 "첫 순간"과
"첫 행위"를 주님께 봉헌해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봉헌의 서약"을 매일 아침 잊지 않고 기억하며,
그 봉헌을 늘 새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첫 순간의 봉헌이 "아침 기상 전 기도"이며,
첫 행위의 봉헌이 "하루의 첫 성호경기도"입니다.
이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의 모든 시간들을 소중히
사용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특히, 이마를 땅에 대고 바치는 하루의 첫 성호경 기도는
매우 거룩한 기도이며,
이 기도를 1분 이상 바치면 주님께서 정말 좋아하십니다.
한 순간도 잡념이나 무심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일할 때나 걸을 때나 운전할 때나 모든 시간을
화살기도나 성가를 통하여 주님을 내 마음 안에서 모시고
항상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루를 마감하는 잠자리에서는 "취침 전 기도"를
바치면서, 오늘 하루 동안 주님께서 나와 모든 피조물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내일은 오늘보다 주님께
더 내맡기고 살 것을 결심하며 잠이 들어야 하겠습니다.
이 세 가지의 기도, 아침 기상 전 기도, 하루의 첫 성호경
기도, 취침 전 기도는 내맡긴 영혼들에게는 "의무"와도
같은 기도이며, 이 기도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더욱 당신께
가까이 이끌어 주십니다.
< 아침 기상 전 기도 >
사랑하올 주인님,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저의 모든 것을 당신께 맡기오니
저를 이끌어 주시고, 저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이 당신께
찬미 드리오니 당신 홀로 찬미 영광 받으소서.
우리 주인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
< 하루의 첫 성호경 기도 >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는
저의 모든 것을 당신 뜻대로 이끌어 주시고
부족한 저를 통하여 당신 마음껏 찬미영광 받으소서.
< 취침 전 기도 >
사랑하올 주인님,
오늘 하루도 저와 모든 피조물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오늘 저의 모든 것을 당신께 전적으로 맡기고 따르려
하였으나, 저의 부족함으로 그러하지 못하였음을 당신께
고백하며 용서를 청합니다. 이제 내일은, 당신의 도우심으로
저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기고 따르는 오늘보다 더 나은
새로운 하루가 되도록 저를 이끌어 주시며, 죽음과 같은 이
잠 속에서도 제 영혼이 당신을 한없이 찬미하게 하소서!
우리 주인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 [기타] 부활 8일 축제 내 수요일
2013년 다해 4월3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이번 성삼일은 동창신부가 있는 성당에서 지냈습니다. 작년
8월부터 신자분들과의 미사를 통한 만남은 별로 없었습니다.
중견사제 연수를 하였고, 지금은 용문 청소년 수련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살아야 하듯이, 사제는
신자분들의 기도와 사랑을 받으면서 살 때가 행복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있는 동안 따뜻하게 저를 대해 주셨던
‘호평동’ 본당의 교우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사제는 복음 3덕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제2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3덕은
정결, 가난, 순명입니다.
독신은 단순히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있는 것입니다. 혼사 살면서 권위적이고
교만하며 자신 밖에 모른다면 그것은 참된 독신이 아닙니다.
가정을 가졌어도 하느님이 삶의 중심에 있다면 정결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혼자 사느냐가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가난은 영혼을 맑게 만드는 ‘향기’와 같습니다. 교회가
부유해지면, 사제의 삶이 부유해지면 그리스도의 향기는
사라지게 됩니다. 사제는 병든 이, 가난한 이, 외로운 이, 장애인,
독거노인, 냉담자를 우선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모든 것을
가지셨지만 스스로 가난함을 선택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순명은 좋은 것만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 가셨듯이,
고난의 잔을 마셨듯이 나쁜 것도 괴로운 것도 주님을 위해서
따르는 것이 참된 순명입니다. 신자들 때문에, 주교님 때문에,
시간을 잘못 만나서, 친구들 때문에 핑계를 대는 것은 참된
순명이 아닙니다. 사제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해야 합니다.
저는 이제 이곳 ‘용문 수련장’에서 제게 주어진 소임을 충실히
수행할 것입니다. 이곳을 찾는 분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이곳에서 기도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려 합니다. 겨울과 여름은 청소년들을 위한 ‘수련회’
장소로, 봄과 가을에는 피정을 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
가려합니다.
마치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벅찬 감동을 얻어서 주님과 함께 지냈듯이, 이곳을 찾는 분들이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고, 주님과 함께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사시도록 하려고 합니다. 오늘 엠마오로 가는 길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길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에게 엠마오는 더 이상 의미도 가치도 없어졌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예수님께서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그곳이 언제 어디서이든지 엠마오가 되는 것입니다.
본당 신부로 있어도, 학교 교수 신부로 있어도, 교구청에 있어도,
병원의 원목으로 있어도, 교포사목을 해도, 저같이 수련장에
있어도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곳은 엠마오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된 삶을 살아간다면 그곳은
바로 엠마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하느님 나라도 어쩌면 그와 같을 것입니다.
돈으로, 명예로, 권력으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된 삶을 산다면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사도시대 뿐만 아니라 오늘 날에도
2013년 다해 4월3일 부활 팔일 축제내 수요일
사도시대 뿐만 아니라 오늘 날에도(루카 24, 13-35)
일반대학 다닐 때 천국의 열쇠를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밤을 새우다시피 하여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의 영향이 커서 그런지 그때부터
조금씩 사제직에 대한 열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엔가는 성경을 읽기 시작했는데 성경말씀이 그렇게
감동을 주어서 또 성경을 밤을 새우다시피 하여 읽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이 뜨겁게 감동을 느끼며 그렇게
읽었습니다.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가 되어서 성경을 읽는데
기적 부분이나 치유부분을 읽을 때 그 의미만을 생각하는
자신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감성적인 부분이 많이 정화되고
이성적인 부분이 많이 성장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직자들 성령묵상회를 다녀오고 나서 성경 말씀을
읽으니 성경이 또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도시대
뿐만 아니라 오늘 날에도 믿는 이들에게는 같은 기적이
일어나고 같은 치유가 일어난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하니까 정말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내 자신이 끊임없이, 아니 죽을 때까지
회개해야하고, 죽을 때까지 치유를 받으면서 살아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성령의 은사와 열매를 청하며 주님의
능력으로 살아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 잘 아시기에 성령을 선물로 주셨고
바오로 사도를 통해서 성령의 은사를 간절히 청하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님께서 옆에 계셔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조금씩 감동을 받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주실 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눈이 가리어져 있다면 아무리 예수님께서 많은
말씀을 주시고 기적을 일으키시고, 세상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하실 일들에 대하여 싸인을 주셔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감실 앞에 앉아서 꾸준히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일치하려
노력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살아계심을 알게 되어 그분께로
부터 감동을 받고, 자신의 일이 아닌 주님의 일을 하게 되기
시작합니다.
‘아름다운 문’ 이라는 성전 문 곁에서 불구자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자선을 청할 때, 베드로 사도는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는 사도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합니다.
이성적이고 인간적인 방법들도 존중받아야하고 또 그렇게
우리는 노력해야합니다. 한편으로 우리 자신만의 힘이 아닌
주님께서도 우리 자신을 통해서 일하시도록 그렇게 우리는
주님께 청해야합니다.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 [기타] 엠마오로 가는 길
2013년 다해 4월3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화요일 복음묵상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루카2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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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로 가던 길에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
한참을 함께 걸으면서 그분과 이야기를 주고 받았지만
그분이 자신들이 따르던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전한다. 그러다가 목적지인 엠마오에 도착할
즈음, 날이 저물고 있으니 자신들과 함께 머물러달라
예수님께 부탁을 드린다. 그리고 함께 식탁에 앉는다. 그리고
그분께서 빵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자 그들의 눈이 열려
그분이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이야기다. (신학자들은
왜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는가에
대하여 여러 의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소개하게
될 기회가 주어지리라 봅니다.)
오늘은 엠마오로 가는 길이 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이 두 제자는 자신들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엠마오로
왜 돌아가려고 했을까? 간단한 이유다. 메시아라고 믿었던
분이, 그래서 모든 것을 걸고자 했던 분이, 너무도 어이없이
무능하게 권력자들의 손에 처참히 세상을 떠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복음서의 전후 문맥상, 예수를 따르던 모든
무리들, 특히 제자라고 하던 이들은 표현 불가능한 절망을
체험했을 것이다. 구심점이 무너졌을 때 겪을 수밖에 없는
혼란이었을 것이다. 그들 중 엠마오 출신의 두 제자도 있었다.
그렇다. 엠마오로 가는 길이 상징하는 것은 절망이다. 앞이
보이지 않고, 무슨 생각을 해야 할 지조차 모르는, 모든 사고가
멎어버리는 그런 상태를 의미한다. 낙향 후, 무엇을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런 사고의 붕괴를
체험했을 것이다.
그 안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몸소 들어오신다. 두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살아생전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상기시켜 주시려 한다. 희망을 주시려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식탁에
함께 앉으셨고 빵을 떼어주시며 그들의 눈을 뜨게 해주신다.
우리 역시 각자의 삶 속에서 수없이 많은 예측할 수조차
없는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들을 만난다. 그리고 희망을
잃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영적 광야가 오늘 복음에서
소개된 엠마오로 가는 길일지도 모르겠다. 그 안으로
예수님께서 수없이 들어오셔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건네주시고 계신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오늘의 이야기에는 정말로 중요한 메시지가 하나 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루카24,29)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머무시기를 청해야 한다. 우리의 청함에 응답하시는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청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그분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정말 힘이 들
때,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은 그분을 떠올리는 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엠마오가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을 말하는지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예루살렘에서 12킬로가 안 되는 거리에
있던 어느 시골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입니다.
1스타디온은 191.27미터라 합니다.)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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