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루카 5,27ㄴ-32
죄의 신비
수도생활의 연륜이 더해갈수록 ‘죄’로부터 자유로워지겠지 생각했는데,
웬걸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죄의 사슬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여전히 여기저기 제 삶의 주변에는 갖은 죄의 유혹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명절을 맞아 오랜만에 모인 가족이나 친지들 사이에 화사한 웃음꽃이 피어나면 좋으련만
사건사고 소식에는 참혹한 사건으로 얼룩져있습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사건 당사자들인 어른뿐만 아니라
꽃잎 같은 어린 자녀들까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모습을 보며,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는지 하는 생각에 하루 온 종일 마음이 울적했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당사자도 밉지만
그들을 그렇게 방치한 비정하고 무관심한 우리 사회도 미웠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제 자신도 미웠습니다.
한 가정을 절벽 끝까지 몰고 가는 이 비정한 시대의 집단적인 죄가 참으로 무섭습니다.
죄라는 것, 참으로 무서운 것 같습니다.
한 인간을 극단적 비참함에로 몰고 갑니다.
한 인간을 빛과 생명에로가 아니라 참혹한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그런데 왜 이 세상에는 이토록 죄가 무성할까요?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왜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죄’를
뿌리 채 뽑아버리지 않으실까요?
하느님께서는 또 그 극악무도한 죄인들, 상습적 죄인들인 우리를 쓸어버리지 않으시고
아직까지 살게 놔두는 것일까요?
왜 죄는 끝도 없이 우리를 유혹하고
왜 우리는 또 깊은 죄의 수렁 속으로 자주 빠져 들어가는 것일까요?
사실 죄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명확하게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많은 성인들도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혹자들은 죄를 가리켜 신비라고 말했습니다.
죄의 신비!
인간으로 이 땅 위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그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3분 전까지만 해도 성인군자가 따로 없다가도 죄의 광풍이 한바탕 휘몰아치면
순식간에 죄의 포로가 되고 마는 나약한 인간 존재입니다.
이렇게 죄는 늘 우리들의 일상적 삶 안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호시탐탐 우리의 안색을 살피며 유혹의 덫을 던지려고 기회를 살피고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잘 나가던 우리였는데 순식간에 깊은 죄의 나락에서 통곡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 존재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 누구도 죄의 비참함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역설적인 표현이겠지만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듯이
죄의 그늘로부터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은 죄인입니다.
결핍된 인간, 부족한 인간, 불완전한 인간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이 시작됩니다.
이토록 죄투성이 존재임을 자각하는 순간
완전한 존재이며 무죄한 존재이며 절대자이신 하느님에 대한 동경, 갈망, 그리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한 인간 존재가 스스로의 한계, 스스로의 비참함, 근본적 죄인임을 깨닫는 순간
무죄하신 하느님, 자비와 측은지심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그 고통스런 죄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아름다운 죄의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우리 죄인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를 주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복음 5장 31~32절)
결국 그토록 괴로워하고 부담스러워하던 우리들의 죄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눈이 밝아집니다.
우리 자신의 비참함과 죄의 실상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완전체이자 절대자이신 하느님을 향한 눈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