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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4월22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수원] 낯선 사람의 목소리는 달콤하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독서 : 사도 11, 1 - 18
† 복음 : 요한 10, 1 - 10
★ 복음이 다른 민족들에게도 전해지면서 할례 받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에게 할례 받지 않은 신자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두고 따졌다. 그러자 베드로는 하느님께 받은 환시를 전하며
할례와 상관없이 성령께서 다른 민족들에게도 내리셨음을 선포한다
(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착한 목자로 계시하신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사랑하여 그들을 알고 그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는다
(복음).
◈ 오늘의 묵상
이스라엘의 기후는 크게 두 시기, 곧 우기와 건기로 구분됩니다.
우기는 보통 11월부터 그다음 해 3월까지, 건기는 나머지 7개월
동안 계속됩니다. 건기에는 비가 거의 오지 않기 때문에 풀이 무척
귀합니다. 그래서 양들의 주인은 목자들이 양들을 몰고서 여기저기
풀을 찾아 떠돌도록 내맡깁니다. 결국 목자들은 주인의 지시에 따라
일곱 달 동안이나 양들을 몰고 다니며 풀을 뜯게 합니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오늘 복음과 에제키엘서 34장을 통하여
엿볼 수 있는 착한 목자와 악한 목자의 구분을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착한 목자는 주인의 뜻에 따라 양들을 잘 몰고 다니며 풀을 먹이지만,
악한 목자는 주인의 뜻을 무시합니다. 착한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 헤매지만, 악한 목자는 잃어버린 양이 있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에게서 털과 우유만을 얻는 데 반해, 악한 목자는 양을
잡아먹습니다. 착한 목자는 사나운 짐승들에게서 양들을 보호하지만,
악한 목자는 오히려 양들을 위협합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만, 악한 목자는 양들을 야단치며 큰 소리만 질러
댑니다. 착한 목자는 일곱 달의 여정 끝에 반드시 돌아오지만, 악한
목자는 양들을 데리고 도망갈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착한 목자는
양들을 사랑하지만, 악한 목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양들은 목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조차 힘듭니다. 목자 덕분에 양들은 안전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풀을 뜯어 먹으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께서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이어 갈 수 있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넘치게 하려고 왔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4월22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나는 양들의 문이다.>
+ 요한 10,1-10
넘치게 하려고 왔다.
한 신부님이 많은 돈과 귀한 보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재물이 생겨서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우선
보관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무리 궁리해도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러다 ‘성체를 모시는 감실에
두면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리라’는 기발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래도 불안하여
감실 앞에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시느니라.”하고 써
붙였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아침에
나와 보니 누군가 감실 문을 열고 보석을 몽땅 가져간
것입니다. 그리고 종이쪽지에다가 “예수님은 부활하시어
이곳에 안 계시는 도다”하고 써 놓았더랍니다.
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고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 놓으면 주님께서
더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 놓기까지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담을 그릇을 준비하지 않으면
그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공것이라면 비상도 먹는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공것이라면 매우 좋아하여 가리지 않고
덤빈다는 말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상으로
은총을 주십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 달아 들지 않는지
안타깝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풀밭을 얻으려 한다면 먼저 예수님을 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방법이며,
충만한 생명을 체험하는 지름길입니다. 따라서 감실 앞으로
가서 쉴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만들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성체 조배는 예수님과 살기 위한, 예수님 안에서 참된 인격을
형성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알베리오네 신부).이 됩니다.
성체 조배를 통하여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신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게 되기 바랍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 말씀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들음은 행동, 곧 실천으로
옮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기존의 삶에
안주하고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스승은 항상 당당하고 참된 제자는 그를 따릅니다. 스승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저 따를 뿐입니다. 따름으로써 스승을
완전하게 알게 됩니다. 우리의 스승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는
가운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낯선 사람의 목소리는 달콤하다
2013년 다해 4월22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낯선 사람의 목소리는 달콤하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요한복음 : 10,1-10
한 고등학교의 축구감독인 마이크 슬러터 감독은 2002년
시즌 때 그가 ‘평생 단 한 번뿐인 팀’이라고 부르던 축구
부원들을 데리고 주 우승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밤 주전 선수들을 비롯한 16명의 선수들이
미성년자로서 음주한 사실이 적발되어 체포되었습니다.
평소 슬러터 감독은 선수들에게 술이나 담배, 마약으로
문제를 일으키면 팀에서 제명시킬 것이라고 말해 왔기
때문에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선수들을 모두
제명시켰습니다. 슬러터 감독은 그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결국은 책임의 문제입니다. 선수들은 규칙을
어겼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나는 언제나 너희를 사랑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너희가 여기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단다.”
그날 팀은 63대 0으로 패했습니다.
선수들은 슬러터 감독의 결정에 불만을 가졌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장하고 나서는 감독을 참 고마워
할 것입니다. 더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슬러터 감독은 누가 봐도 참 좋은 수장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선택에서 자신의 명예가 아닌 선수들의 미래를 더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나를 위하는 목소리는 어떤 때는 듣기 싫거나 거북할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짜증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소리를 하시는 분들이 오히려 나를
사랑하고 내가 믿을 분들인 것입니다.
반대로 달콤한 것부터 먼저 제시하는 사람들은 나를 속이거나
이용하려는 강도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솝우화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창고에
꿀이 흘려져 있었습니다. 이 꿀 냄새를 맡고 파리들이 몰려와
핥아 먹었습니다. 그런데 꿀맛이 어찌나 좋던지 파리들은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가 그만 날개며 발이 꿀이
묻게 되어 영영 헤어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또 CS 루이스의 우화 ‘사자와 마녀와 옷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악한 마녀가 아주 똑똑한 소년 에드먼드를 죽이려고 사용한
도구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터키 사탕’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향기로운 사탕인데 한번
먹어본 사람은 그 달콤함에 빠져 그것을 먹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탕 속에는 사람이 느끼지 못할 만큼
아주 적은 양의 치명적인 독약이 들어있습니다. 터키 사탕은
달콤한 맛으로 사람을 서서히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가는
무서운 독약인 것입니다.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낯선 사람의
목소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피해 달아납니다.
우리는 목자의 목소리와 낯선 자의 목소리를 구별해 낼 수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처음엔 거칠고 나중엔 부드러운 목소리가 참 목자의
목소리입니다. 그러나 처음엔 달고 나중엔 쓴 목소리는 낯선
자의 목소리이고 우리를 파괴시키려는 도둑이며 강도의
목소리인 것입니다. 악의 유혹은 언제나 달콤함과 화려함으로
치장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듣기 좋은 소리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진정
나를 사랑하는가를 먼저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송현이라는 사람이 쓴 <어느 쥐의 유언>이라는 시를 마지막으로
읽어보며 우리도 참 목자가 아닌 강도들의 목소리에 따라가는
일이 없도록 결심합니다.
“내 말 귀담아 듣거라.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들은 저마다 다른
무서움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 중에서 무서움의 형식을
감추고 있는 무서움이 가장 무서운 무서움이다. 내 말 잘
알아듣거라. 고양이와 쥐덫이 가장 무서운 것이 아니다.
고양이는 언제나 고양이로 있고, 쥐덫은 언제나 쥐덫으로
있으니, 내 나이가 되면 고양이쯤이야 차라리 같이 늙어가는
이웃일 수도 있고, 쥐덫쯤이야 내 슬기의 시험대 정도로 그친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고양이도 아니고 쥐덫도 아니고,
무서움을 다채롭게 위장한 쥐약이다. 쥐약의 외형은 탐욕의
혀끝과 코끝을 유혹하기 위해 자연스럽고 믿음직스럽고
우호적이고 헌신적이다. 그러나 쥐약의 외형이 어떻거나
간에 쥐약은 쥐약이다. 이 바보들아.”
화요일과 수요일 묵상은 제가 연수에 들어가는 관계로 없겠습니다. ^ ^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는
어제는 성소주일이었습니다. 인천교구는 강화도에 있는
인천 신학교에서 성소주일 행사를 했지요. 사실 전날의
날씨 때문에 걱정이 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날 큰
행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비가 꽤 많이 왔기 때문이었지요.
더군다나 날씨가 너무나 추워서 과연 성소주일 행사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주관하는
행사는 이상하게도 대부분 ‘비’를 몰고 왔었기 때문에 또
비가 오지 않을까 싶었지요.
하지만 저의 걱정은 쓸데없는 걱정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좋은 날씨였지요. 햇볕은 따뜻했고, 바람은 시원했으며,
공기는 상쾌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많은 것을 주셨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던 어제였습니다.
그리고 행사를 준비했던 신학생들도 신자들을 위해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매년 했던 행사를 또 반복하면 행사 준비하는데
그리 어려움이 없겠지요. 그러나 이번에는 신자들이 보다
즐거운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고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공부하고 기도하느라 시간도 부족한데 말입니다.
여기에 신자들도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어제 인천 신학교를
찾아주신 신자들의 숫자는 거의 7,000명이 됩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하루라는 시간을 온전히 주셨습니다. 주일이라
길이 막힐 수도 있는데 또 신학교에서 준비하는 프로그램에
대해 실망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러한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많은 분들이 시간을 내어 찾아주신 것이지요. 바로 성소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성소자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자기를 내어 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어떤 할머니를 만났는데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신부님. 전에 왔을 때에는 그렇게 지루하기만 했는데, 오늘
너무나 즐거워요. 고맙습니다.”
행사에 참여하는 신자들도 그리고 행사를 주관하는 신학생들도
모두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내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 20,35)고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목자이고 우리들은 목자를 따르는 양들이지요.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따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할까요?
받는 것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닌, 주는 사랑을 실천하시고
또 이를 명령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우리도 적극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는 우리가 되도록 합시다. 그래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내용은 같아도 사람들이 사랑하는 방식은 하나도
같지 않다. 백 명의 사람은 백 가지 방식으로 사랑한다. 그러니까
특별하지 않는 사랑은 하나도 없다(이승우).
성소주일 미사 중입니다. 약 7,000명이 참석한 미사.
감동이었습니다.
기억할 것들을 만들기
어제 성소주일 행사를 둘러보고 있는데, 한 자매님이 제
앞으로 다가와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어~ 나 모르겠어? 나 초등학교 동창, 스텔라야.”
그런데 저는 반갑게 인사하지 못했습니다.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이 아는 척 한다고 “어~ 맞아. 잘 알지.”
라면서 인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죄송합니다. 누군지
잘 기억이 안 나네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제게 초등학교 때의 기억을 이야기 해주었다면 어떻게든
기억을 해보겠는데, 사실 지금으로부터 30년도 훨씬 넘은
시간의 기억을 떠올린다는 것이 쉽지 않았겠지요. 그리고 당시
저는 여자에게는 말 한 마디도 건네지 못할 정도로 숙맥이었기
때문에 여자 친구들과의 추억이 거의 없습니다.
이 친구에게 정말로 미안했습니다. 그러면서 살면서 기억할
것들을 만들어야 함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과거의 추억을
통해 현재의 큰 힘을 얻기 위해서는 서로 기억할 것들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는 나쁜
기억이 아닌, 좋은 기억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큰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좋은 기억을 만들어, 먼 훗날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아친남
2013년 다해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요한 10,1-10
<아친남>
언젠가 데이비드 베컴이란 멋진 축구선수로 인해 영국의 남편들이
수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축구선수는
너무나 갖출 것을 다 갖췄습니다. 무엇보다도 잘생겼습니다. 축구도
얼마나 잘 하는지 모릅니다. 당연히 돈도 엄청나게 벌어옵니다.
거기다가 또 자상하고 가정적입니다. 영국 부부들이 9시 저녁뉴스
같이 보고 있다가 베컴과 관련된 뉴스만 나오면 부인들이 남편들을
향해 쏘아붙이기 시작한답니다.
“당신, 베컴 좀 봐라! 당신은 도대체 뭐냐? 반의 반 만이라도
해봐라!”
그런 말을 듣는 순간, 남편들은 요즘 아이들이 많이 쓰는
‘열폭’한답니다. ‘열등감 폭발.’
지난 동계 올림픽 때는 우리 자랑스런 김연아 선수 때문에 많은
어린 딸들이 수난을 당했답니다. 가족끼리 김연아 선수의 선전
장면을 함께 시청하면서, 함께 뿌듯해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끝나고 나면 어머님들이 딸들을 향해 한 마디씩
던졌습니다.
“애야, 김연아 선수 좀 봐라! 실력 좋지, 착하지, 마음씀씀이
좋지, 그 어려운 시절 꿋꿋이 이겨냈지...너는 도대체 뭐냐?
요즘 우리 아버님들께서는 ‘아친남’이란 단어 때문에 고생하시는
분들이 많답니다. ‘아친남’이란 ‘아내 친구 남편’을 줄인 말인데,
이 말은 다름이 아니라 어른 ‘엄친아’입니다. ‘아친남’ 자격은
상황에 따라 바뀌는데,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답니다. “또래 남자보다 적어도 10살은 젊어 보일 것, 연봉이
적어도 5천 이상일 것, 퇴근하는 대로 바로 귀가해서 부인을
위해 요리도 할 것, 그 외에도 부인이 연속극 볼 때 아이들과
놀아줄 것, 친정 부모님들 잘 챙길 것 등등.
‘아친남’의 조건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배려’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결국 아친남이란 부인의 마음을 알뜰살뜰하게
잘 챙겨주는 사람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요즘 계속해서 ‘착한 목자’에 관련된 복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착한 목자로 소개되고 있는 예수님 역시 둘도 없는 ‘아친남’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양들을 한 마리 한 마리 챙겨주고, 배려해주고, 보살펴주는
모습이 정말 각별하고 극진합니다. 그 착한 목자의 머릿속은
온통 양들 생각뿐입니다. 늘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떤 녀석이 컨디션이 안 좋은지 어떤 녀석과 어떤
녀석이 자주 다투는지, 어떤 녀석이 문제아인지, 어떤 어려움을
갖고 있는지 샅샅이 다 파악하고, 각각의 양들에게 맞는 개별적
서비스를 해주고 계십니다.
이런 착한 목자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양들이기에 늘 안심합니다.
고분고분 목자의 지시에 충실하게 따릅니다. 목자와 양이
일심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는 아이의 눈빛 하나만 봐도 아이의
상황을 다 파악합니다. 지금 아이가 어떤 마음을 먹고 있는지,
뭔가 켕기거나 속이는 것이 있는지, 기분이 좋은 지 별로인지
즉시 파악하고 적절히 대처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엄마는 자신의 모든 촉각이
아이를 향해 쏠려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모든 에너지가 아이를
향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엄마와 아이가
일심동체 상태가 됩니다. 아이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고 아이의
슬픔이 내 슬픔이 되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마음이 그렇습니다. 그분의 모든
촉각은 우리를 향해 쏠려있습니다. 그분의 모든 삶의 에너지는
우리를 향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분의 마음은 오직 한 가지
염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직 우리가 잘 되기만을, 우리의
행복과 구원만을 바로고 계십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예수님은 노크하실 겁니다.
검은 차가 오면 문을 열어주고 소형차가 오면 본체만체,
호텔이었지요. 딩동 하면 렌즈로 내다보고 확인하고서
열든 말든, 고급 아파트고요. 부부가 서로 다투더니
본체만체하는 걸 보니 마음의 문을 닫았네요.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한 집안에 살면 참 답답하고 미칠 것
같지요. 예수님은 닫힌 문을 열고 용서하고 화해하라고
노크하실 겁니다. 불쌍한 모습 소박한 마음으로 오늘도
오셔서 열라고 노크하실 겁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요한 10,9)”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기타] 부활 제4주간 월요일
2013년 다해 4월22일
지난주에는 행사가 많았습니다. 수요일에는 의정부 성모병원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가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분들에게 강의를 하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긴장이 되었습니다.
한 시간 강의를 어떻게 했는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교구청 직원들의 연수가 있었습니다. 예전에
교구청에서 근무를 했었기 때문에 반가운 얼굴들도 있었고,
역시 같은 가족이라서 편안한 만남이었습니다. 토요일과 주일에는
복음화 학교의 공동체 피정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기획한
첫 번째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복음화 학교의 공동체 회원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피정에 참가 하였습니다. 부족한 저의 강의도
기쁘게 들어주셨고, 모두들 주님을 찬양하며 돌아가셨습니다.
수련장을 찾는 분들을 정성껏 맞이하는 직원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수련장은 자연환경은 좋은데 시설이 조금 낙후되었습니다. 건물이
20년 정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사무실을 새롭게 단장하고,
내년부터는 한 마을씩 단장을 하려고 합니다. 화장실, 벽지, 등,
창문, 바닥을 새롭게 꾸미려고 합니다. 예전에 들었던 광고문구가
생각납니다.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객
만족을 넘어 고객 감동을 실현하겠습니다.’ 부족한 시설은 친절과
정성껏 준비한 음식으로 보완하려고 합니다.
유대인들과 사도들은 서로 생각이 많이 달랐습니다. 같은
유대인이었고, 같은 전통과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지만
유대인들은 사도들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체험한 ‘예수님’을 전하려고 하였고, 유대인들은 사도들의 말을
알아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전통과 자신들의 신념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 대화를 하지만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남과 북’의 대화도 그렇고, 거의 모든 일에 합의를 보지 못하는
정치인들도 그렇습니다. 저도 동료들과 대화를 할 때 듣기는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선입견
때문에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대화를 위한 자세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경청’입니다. 엄마는 말을 못하는 아이의
표정과 몸짓만을 보고서도 아이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해서 아이의 눈에 맞추기 때문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눈높이를 맞추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지만 우리들을 위해서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언어로
눈높이를 맞추셨습니다.
대화가 되지 않을 때, 혹시 내가 나의 기준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자존심과 욕심으로
나의 귀를 막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했으면 합니다. 나의
선입견으로 내가 듣고 싶은 것들만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지요?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내맡긴영혼은>'마목정'에서 맺은 굳은
결의!-이해욱신부
"마목정"에서 맺은 굳은 결의!
이 지리산으로 내려와 살면서 가장 먼저 저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대나무 숲"입니다. 이 산 저 산의 군데군데 눈에
띄는 푸른 녹색의 대나무 숲이 저의 눈에 매우 인상적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다음이 "정자"입니다.
마을을 지날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마을의 정자를 바라보면
왠지 마음의 한구석에 평화로움이 찾아들곤 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집 바로 옆 계곡에는 전 주인이 지어 놓은
정자가 하나 있는데 그 정자의 현판에는 "붕락정(朋樂亭)"
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벗(친구)" 朋, "풍류" 樂, "정자" 亭이니
"친구들과 함께 풍류를 즐기는 정자"라는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정한 모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의 첫 제자로
지난 해(2009년) 10월 18일, 25세의 "이끌림(율리안나)"을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아니, 율리안나의 모든 것을 하느님
대전에 온전히 봉헌해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와 율리안나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는 봉헌미사를
통하여 하느님과 맺은 약속을 굳게 지켜나갈 것을 약속하였고,
그 약속을 소위, "청학동의 결의"라 말했던 것입니다.
율리안나는 그 청학동의 결의대로 저의 모든 영적지도를 정말
한 가지도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다 잘 실천해 왔습니다.
아마 처음에는 무척 힘이 들었을 것이 너무나도 뻔합니다.
그런데 율리안나는 제가 하라는 대로 그저 "묵묵히" 잘 따라
주었습니다.
율리안나의 그 "묵묵히"가 오늘의 율리안나를 있게 한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율리안나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저의
지도를 통한 "하느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면서 친구 하나 없는
타국 땅에서 오늘을 "담담히"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율리안나를 이끌어 가시고, 율리안나는 그
이끄심에 따라 흘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율리안나는 그
이끄심을 굳게 신뢰합니다. 그 이끄심이 "선(善)"을 지향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짧은 10개월의
경험을 통해서 율리안나가 하느님 뜻을 깊이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들은 누구나 내맡길 때의
"마목정의 결의"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목정"이 어디에 있는 무신 정자의 이름이냐고요?
아니, 벌써 잊으셨단 말입니까?
아이고~~~ 그 마목저엉~~ 마목저엉~~~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만을 사랑할
것을 굳게 다짐했던 그 "마목정"을 말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여러분의 내맡김의 굳은 결심은 곧 "마.목.정의 결의"
입니다. 내맡김의 길을 온 "마음"을 다하여 따라야
합니다. 때로는 "목숨"까지 걸어야 합니다.
온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 사랑에만 몰두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100% 다
완전히 내맡기셨다면, 처음에만 좀 힘들지 나중에는
힘이 들더라도 수월해집니다.
하느님이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내맡김의 길에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밖에
다른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잊지 맙시다, "마목정에서 맺은 굳은 결의"를!!!
그리고, "하덧사"여러분~~!
여러분도 "마목정"에 많이 놀러 오세요오~~~~.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 [서울] 나를 아시는 주님
오늘 복음을 읽을 때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는 구절이 늘 새롭습니다.
알프스 산 속에서 양 떼를 치던 소녀가 도시로 나왔는데, 사람들
얼굴을 통 기억하지 못하더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도대체 왜
그렇게 사람 얼굴을 못 알아보냐고 했더니, 그 소녀는 “양들은
다 서로 다르게 생겨서 구분하기 쉬운데, 사람들은 다 똑같이
생겨서 통 분간할 수가 없다.”고 했답니다.
우리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도 소녀가 양을 알아보듯 우리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 부르며 이끄십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동시에 바로 ‘나의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친히 우리 이름을 불러 구원으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내가 악에서 해방되는 길을
가르치시다가 바로 나의 구원을 위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오늘도 순간마다 “베드로야, 바오로야, 마르코야, 마리아야…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부르십니다. 이렇게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께
우리도 토마스 사도처럼 예수님을 올바로 알아보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대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윤종국 신부(서울대교구 동작동천주교회) -
◈ [기타]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2013년 다해 4월22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요한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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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모두 알려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길을 따르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걸어가야
할 길에서 자주 넘어지고 이탈을 경험한다.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의식할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그분은 목자이시고 우리는 양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말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우리는 양들처럼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알아보지 못하며 자주 헤매고 있는
것일까? 왜 목자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갖지 못하고 방황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여기서 떠오르는 그분의 말씀이 하나 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마르코10,25) 여기서 부자가 의미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돈에
마음을 빼앗겨 하느님께서 계실 자리가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런데 부자라는 말의 의미를 좀 더 넓은 각도로 본다면,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겨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고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차피 우리는 이 세상에 산다.
세상의 것을 보지 않고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
떠오르는 말씀이 또 하나 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르코 10,15) 그렇다. 바로 이 말씀이 해법일 수 있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그분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어린이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존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린이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리고 그것이 잘못임을
알았을 때 커다란 아픔과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온전히
부모의 모든 것에 의탁한다. 어렸을 적, 잠에서 깨어 눈을 떴는데,
곁에 아무도 없었을 때의 무서움을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힘의 미약함을 인정하고, 자신을 지켜줄 사랑하는 존재에
의탁하려는 그 마음이 어린이의 마음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 물가에 내놓은 어린 아이들이다. 아마도 우리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우리의 인생일지도 모른다. 그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헤매는
목자, 그리고 찾은 후 누구보다도 기뻐하는 목자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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