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3년 다해 4월25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청주] 복음을 선포하여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1베드 5, 5ㄴ - 14
† 복음 : 마르 16, 15 - 20
마르코 복음사가는 키프로스 섬 출신으로 베드로 사도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본디 이름이 ‘요한 마르코’(사도 12,12.25 참조)인
그는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와 함께 안티오키아와
키프로스, 로마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마르코 성인은
65년에서 70년 사이에 주로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을 기초로
삼아 마르코 복음서를 기술하였다.
★ 베드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보내는 자신의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겸손함을 잃지 않고 희망을 가지며 고난을 잘 견디라고 권고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와 마르코의 안부를
전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승천하신 뒤에도 제자들과 함께하시며 복음 선포를 이끄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를
명령하시며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많은 이가 기적이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사건’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적이 그러한 것이라면 과학이
발달할수록 점점 사라져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오늘날에는
제주에서 서울까지 한 시간 만에 하늘 위로 날아가는 것이 기적이
아니지만, 백 년 전만 해도 그것은 기적입니다. 오늘날 휴대 전화로
멀리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거나 얼굴을 볼 수 있지만, 옛날에는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기적이란 과학의 발전만 있으면
가능한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기적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적’이라는 말과 함께 ‘표징’이라는 표현이 많이 쓰입니다. 곧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기에 가능했다고 믿는 일을 두고 기적 또는 표징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여 목숨까지도 바치는 일,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지른 자가 죄를 뉘우치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일처럼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사건을 두고 그리스도교에서는
기적이라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복음에서 믿는 이들에게 놀라운 표징들이 따를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은, ‘믿는 이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현존이 강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복음을 선포하여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4월25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코 16,15-20
복음을 선포하여라.
얼굴을 보면 기쁨도 슬픔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해도 근심 걱정이 있으면 그늘진 모습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육체적 정신적 아픔이 너무 크게
보이는데도 얼굴은 환한 미소를 담고 있어 놀랬습니다. 그래서
‘아주 편안해 보이십니다’하고 인사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기쁨도 고통도 다 뜻이 있어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 하느님께 맡겨야지요. 나를
사랑하시는 분께 맡기고 나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하셨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그것은 “주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그저 입으로 전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먼저 내 자신이 믿고,
믿는 바를 생활로서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
가운데에서도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평온을
잃지 않는 모습이야 말로 복음의 선포입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는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2티모4,2) 말씀을 선포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고린1,17).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흔들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느님이 날 사랑하시는 데 왜 이런 고통과
아픔을 주느냐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그때야 말로 십자가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요, 간절히 기도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예수님께서도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 고 약속
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처지에서든지 내 자신이 복음이 되어 주님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복된 기쁨을 담고 있어야 그 기쁨을 전할 수
있는 만큼 먼저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복음의 선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주님께서는 나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필리4,13).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신앙이
더욱 확고해 지길 기원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
2013년 다해 4월25일 부활 제4주간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15-20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
강연 100도씨에 아이돌 가수에서 유명 토익 강사가 된
권영준씨 이야기가 나옵니다. 10여 년 전 아이돌 그룹
‘맨사‘의 리더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돌이라는 화려함 속에
가려진 실제 그의 생활은 초라하고 궁핍했습니다. 소속사의
횡포로 수입은 거의 없었고 팬들이 선물로 주는 김밥 한
줄로 끼니를 때울 때도 많았다고 합니다.
결국 연예계 이면에 환멸을 느끼고 그룹을 탈퇴하여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스물일곱의 늦은 나이에 군 입대를
했습니다. 무대에서 노래를 하는 것 밖에 할 줄 몰랐던
그는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고민을 했고 마침
군대 내에서 토익 시험 700점이 넘으면 외박을 보내준다는
말에 토익 공부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첫 토익
시험 점수는 395점이었지만 한 시간 늦게 자고 한 시간
일찍 일어나며 시간을 쪼개 공부에 매진한 결과 차츰
점수가 올랐고 제대를 앞두고 925점을 받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사람들의 놀림감이었지만 아이돌 연습생 때 먹지도
못하고 고생하던 것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더 열심히
했던 것입니다.
서른이 되어 종로 영어 학원 강사로 지원을 했고 합격을 했고
연수까지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40명이 들어오는 강의실에
한 명밖에 지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학생은
끊임없는 질문공세를 하였다고 합니다. 처음엔 도망치고
싶었지만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미리 대답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그것에다가 가끔 노래도 불러주고 팝송도
불러주고 자신이 아이돌 그룹이었을 때의 영상도 보여주었습니다.
그랬더니 한 명이 다섯 명이 되었고 다섯 명이 사십 명이 되었으며
지금은 한 번에 삼백 명을 앞에 앉혀놓고 강의를 하는 유명강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외국 유학을 다녀오지도 영어를 전공 하지도 않았지만 현재 유명
어학원 인기 토익 강사가 된 권영준씨는 아이돌 때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특히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무대
위에서 대중들 앞에서 노래고 춤추던 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들을 관객으로 생각하고 강의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의가 끝났을 때 학생들이 만족한 표정을 지을 때 느끼는 감정은
노래를 하고 관객이 박수를 쳐 줄 때의 희열과 감동과 똑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절대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성 마르코 복음사가와 같은 분을 보면서 ‘도대체 무슨 대단한
일을 한거지?’라는 질문도 제 스스로 던져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는 그분은 베드로를 쫓아다니며 그를 돕고 또 그가 들은
것을 적은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복음이라 전해지는
것은 성경으로 채택이 안 되고 그의 말을 듣고 적은 마르코복음은
성경으로 정해졌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어부였기 때문에 글
솜씨가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도 베드로복음을 조금 읽어본
적이 있지만 매우 간결하여 말씀의 깊은 의미를 담아내고 있지는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마르코는 그러나 글 솜씨가 있었던 것입니다. 남이 하는 말도 잘
받아 적어서 그 뜻을 손상하지 않고 전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베드로를 알기 이전에 이미 여러
경험을 통해 갖추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르실 때도 “너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냥 당신을 증거하는 사도가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는 말씀은 그가 어부생활하며 배운
모든 것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지 않겠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저도 경영학을 좀 공부했지만 사제생활을 하면서도 그 때 배웠던
것들을 많이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결국 경영학도 사람과의
관계가 제일 중요하고, 본당사제로 사는 것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지도밖으로 행진하라’라는 책으로 유명한 국제구호개발기구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인 한비야(1958~)씨는 본래 여행사
직원이었습니다. 그런데 40세에 모든 것을 접고 오지여행을
떠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그녀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떠나게 한 것은 먼저 그녀가 근무했던 여행사에서의
경험들이었습니다.
지금 힘들고 실패하며 어려움을 겪고 또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지라도 그것들은 내 안에서 무한한 잠재능력이 됩니다. 하느님은
그것들을 결코 썩혀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경험들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다면 마르코 복음사가처럼 내가 가진 경험
안에서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읍시다. 그리고 그것을
끈기 있기 발전시켜 나가고 복음전파에 사용한다면 주님은 뜻은
내 안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내가 겪은 모든 일들과 만난 모든
사람들, 하느님께서 허락하셨으니 이유가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가장 중요한 가치만을
‘자살’, ‘역경’, ‘내 힘들다’라는 말을 잘 보십시오. 이 단어들이
나의 입에서 나올 때 어떨까요? 사실 힘들어할 수밖에 없는
말입니다. 이러한 단어들이 내 입에서 제발 나오지 않기를,
또 나의 단어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들을 거꾸로 읽어보세요.
‘살자’, ‘경력’, ‘다들 힘 내’
이렇게 긍정적인 말, 힘이 되는 말이 됩니다. 단지 거꾸로 읽었을
뿐인데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삶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내 삶이 온통
부정적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온갖 고통과 시련으로
인해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 순간에 내 삶을
거꾸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히 새로운 나의 삶을 발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긍정적인 모습만이 내게 주어지고, 또 고통과 시련이 없는
행복한 삶만 내게 주어지는 똑바른 삶이 좋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 똑바른 삶만이 계속된다면 오히려 우리의 영혼은
더욱더 피폐해질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지구가 23.5도 기울어지지 않고 똑바로 있다면 어떨까요?
태양은 적도 위에만 비칠 테고 따라서 생명이 살 수 있는 면적이
절반으로 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적도 반대쪽은 항상
겨울이여서 쓸모없는 땅이 될 테니까요.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많은 생명이 살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많은 고통과 시련이 있기 때문에 더욱 더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의 삶이 어렵다고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바꿔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주님께서 가장 좋은
시간을 주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사도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그는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복음을
기술하지요. 그리고 우리들이 그 복음 말씀을 읽으면서 주님을
알게 되고, 주님과 하나 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처럼 출판과 인쇄업이
발전한 시대도 아니었지요. 더군다나 박해의 위협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마르코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예수님 말씀만을 기억하면서 복음을
기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가치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정적인
생각들을 몰아내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또한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꿋꿋하게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참된 제자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을까요? 혹시 ‘나는 할 수 없다’만을 외치면서 남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산다는 건 힘들어. 불공평하고 고통스러워. 하지만 삶은 예상치
못하게 만드는 아름다움과 기쁨, 사랑과 황홀의 순간들도 틀림없이
가져다주지(뮈리엘 바르베리).
어제의 은경축 미사입니다. 지금처럼 멋진 사제생활 하시길
기도합니다.
은경축 미사를 봉헌하면서
어제는 답동성당에서 은경축 축하 미사가 있었습니다. 사제생활
25년을 맞이하는 신부님들, 특별히 본당사목이 아닌 특수사목을
하시는 신부님들 세 분의 은경축 미사였지요. 이 미사 강론 때
한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저는 참 많은 것을 하려고만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정작 제대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후배 신부들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습니다. 한 우물만 파십시오. 그리고 기왕 파는 것,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주님과 하나 되도록 하십시오.”
저 역시 참 많은 것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하는 것은 별로 없는 것 같더군요. 특히 주님의 뜻에 맞게 얼마나
살았는가 라는 반성을 하니 마냥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사제 생활 25년. 이렇게 긴 시간을 한결같이 주님을 사랑하셨던
신부님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저 역시 한결같은 사랑을 주님께
보여드리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청해 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이제는 내가 행해야 할 기적
2013년 다해 4월25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코 16,15-20
<이제는 내가 행해야할 기적>
예수님께서 활발하게 복음 선포 사업에 매진하시던 공생활
시절,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본받아 목숨까지 바쳐가며 말씀을 선포하던 초대교회
시대 당시 한 가지 특별한 일이 있었습니다.
깜짝 놀랄 표징들, 기적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마귀를 쫒아낸다든지, 죽어가던 병자들을
치유시킨다든지, 독을 마셔도 쌩쌩하다든지 하는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전혀 배운 적이 없는 외국어를 술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외국어와 관련된 기적에서 참 부러웠습니다. 수십 년간 죽도록
공부해왔지만 아직도 걸음마 수준인데, 전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느 순간 술술 딴 나라 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기적과 표징의 강도가 그만큼 강렬하다는 반증이겠지요.
사도행전 28장 3절에 보면 바오로 사도가 탄 배가 난파되어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한 섬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 섬은 이탈리아
반도 아래에 위치한 몰타라는 섬이었습니다. 비가 내리는데다
날씨까지 추워 불을 피우게 되었는데 바오로 사도는 땔감 한
다발을 모아 불속에 넣자, 독사 한 마리가 열기 때문에 튀어나와
바오로의 손에 달라붙습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저 사람은 이제 끝장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바오로 사도는 태연한 표정으로 독사를 손에서 떼어내어 타는
불속으로 떨어트렸습니다. 사람들은 바오로 사도의 몸이 곧
부어오르거나 쓰러져 죽으려니 하고 계속해서 그의 안색을 살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예는 초대교회 시절 부지기수였습니다.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공생활 기간, 초대교회
시대는 ‘기적의 시대’ ‘표징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예수님과
사도들은 기적을 일으키며 하느님의 권능을 만방에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기적의 원동력, 출발점은 어디일까요? 정답은
명확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그 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믿음 없는 표징, 확신 없는 기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면 불가능한 것이 사라진다, 우리 인간은 약하지만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니 강건하다는 강한 믿음과 확신이 그 숱한
표징과 기적, 치유의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기적의 시대는 지나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꼭 단정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표징과 기적은 모든 시대를 통해서
이어져왔습니다.
다만 믿음이 형편없이 약해진 시대, 우리의 시선이 너무나 탁해져서
그러한 기적과 표징들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나약한 믿음, 완고한 불신으로 인해 우리 곁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기적과 표징들을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대 우리는 사랑의 기적을 펼쳐가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내 작은 선행, 내 작은 헌신, 내 작은 봉헌과 나눔을
통한 사랑의 기적은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행해야 할 기적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복음화 되어야 정상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니까 그걸 따르는 게 정상이며
맞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정해놓은 많은 것들이 사람위로
올라져 있거든요. 권력, 법, 힘, 재력 따위 같은 것들이 종종
그렇게 보이니까요.
이런 것들만이 아니고도 신앙인들에게 복음화 될 게 참 많습니다.
사람이 반려동물에게 너무 매이는 것도 자기 일에 매이는 것도요.
방대한 모든 피조물과 모든 것들을 신앙인은 복음화 시켜야 되지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코 16,15)”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서울] 복음의 힘
마르코 복음사가의 정식 이름은 ‘요한 마르코’입니다. 히브리
사람이면서도 ‘마르코’라는 로마식 이름을 가진 것을 보면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자였던 것 같습니다. 또 그는 바르나바
사도의 사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유복한 집에 태어나 나름대로
교육도 잘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가 2차 선교 여행을 할 때
마르코는 사도들과 동행했다가 선교 여행 도중에 돌아가 버립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마르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그다음 선교
여행에서 바르나바 사도가 마르코를 데리고 가자고 하자 격렬하게
싸워 결국 바르나바 사도와 결별하고 맙니다. 마르코 때문에
위대한 두 사도가 크게 다투고 결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뒤 베드로 사도는 “내가 아들로 여기는 마르코”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바오로 사도 또한 자신의 서간에서 ‘마르코’
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마르코는 변화와 성숙의 시간을
가진 것 같습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르코는 베드로의
강론을 잘 기록해 베드로 사도가 복음을 선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 기록이 바로 ‘마르코복음서’입니다. 마르코는
베드로 사도를 도와 복음을 기록하며 전하는 가운데 변화하고
성숙했습니다. 미숙하고 참을성이 없어 불화의 원인이었던 한
청년이 복음을 살고 전하려고 노력하면서 교회의 봉사자로
변했고 순교하여 성인으로 거듭났습니다.
우리도 같은 복음의 힘으로 변화하고 성숙할 수 있는 은혜를
간절히 청해야겠습니다.
- 윤종국 신부(서울대교구 동작동천주교회) -
◈ [기타]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2013년 다해 4월25일
(지인의 펜션...)
직원들과 함께 강화도에 있는 펜션으로 야유회를 다녀왔습니다.
지인이 운영하는 펜션이고, 새로이 펜션을 신축해서 축성도 할 겸
다녀왔습니다. 오랜 인연으로 지인은 숙박비를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랜만에 만나는 저를 위해서 저녁에 먹을 고기와 음식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이렇게 훈훈한
정을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직원들은 수련장의 일터를 떠나서 모처럼 바닷가의 바람도 즐기고,
함께 윷놀이도 하였습니다. 남성 팀이 여성 팀에게 패배를 했지만
윷놀이는 공동체의 단합과 화합을 위한 좋은 놀이이기에 모임이
있으면 윷놀이를 하곤 합니다. 수련장의 봉고차가 나이를 먹어서
운행 중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다행히 큰 사고 없이 수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살다보면 기분 좋은 일도 있고, 속이 상하는 일도
있기 마련입니다. 결국은 그 일을 대하는 나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기분 좋은 일에서는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속이 상하는 일에서는
더 큰 사고가 아니라는 안도의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호사다마,
새옹지마’라는 말을 다시금 생각합니다.
어제는 재 보궐 선거가 있었습니다. 자리는 하나이고, 그 자리를
원하는 사람은 여럿이기에 누군가는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누군가는 패배의 아쉬움을 달래야 합니다. 그러나 선거가 당사자들
인생의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당선된 사람들은 국민을 위한 봉사의
자세로 더욱 열심히 일해야 할 것이고, 패배한 사람들은 자신을
지지한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새로운 앞날을 준비하면 될
것입니다. 이 또한 모두 지나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고, 가치 있는
일이고, 보람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일은 결코 기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 고난이 있고, 역경이 있고, 시기와 질투가
있고, 박해와 시련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마음
자세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겸손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걱정과
불안은 주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으라고
합니다. 굳건한 믿음으로 이겨내라고 합니다.’
용문의 추운 겨울을 견디어 내고 노랗게 피어난 ‘튤립’을 보았습니다.
개울가에 핀 노란 개나리는 산새들의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바람에
날리는 분홍색의 벚꽃은 제게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아! 겨울은
가고 봄이 찾아왔습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내맡긴영혼은>
나는 '기도'를 이렇게 생각한다. - 이해욱신부
2013년 다해 4월25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나는 "기도"를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 신앙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과연 어떤 단어인가?
사랑? 나는 사랑보다 더 많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가
"기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도"라는 말이 과연 언제부터 생겨났는가가 무척
궁금했다. 우선 구약성경에서 찾아보니 "창세기 20장 7절"에
처음으로 기도라는 단어가 나온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왕에게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속였기 때문에
사라의 미모에 반한 아비멜렉이 사람을 시켜 사라를 데려왔고 그날
밤에 아비멜렉이 꿈을 꾸게 되는데 하느님이 꿈에 나타나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건드리면 그와 그에 딸린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면서, 그러니 사라를
돌려보내 주고 아브라함에게 기도를 받을 것을 지시하는 내용에
처음으로 "기도"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뒤로 가면 갈수록 "기도"
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도 기도라는 단어를 무척 많이 사용하셨고,
4복음 외에 서간경의 저자인 사도 바오로를 비롯한 다른 저자들도
기도라는 단어를 다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이후 우리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교부들을 비롯한 많은
성인들께서도 기도에 대해 많이 언급하셨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언어의 기원이 그러하듯이 기도라는 말도 그것의 "필요성"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졌을 것이고 그리고 그 다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을 것이 분명한 사실이며, 또 그렇다면 기도의
필요성이 언제부터 생겨나게 되었는가를 알아내면 될 것이다.
그러면 "기도의 필요성"이 언제부터 생기기 시작하였을까?
"필요성"이 전혀 필요 없는 "충만한 상태"가 언제였는가, 또
그 반대로 충만한 상태를 잃고 "필요를 필요로 하는 상태
(결핍상태)"가 과연 언제부터 생겨나게 되었는가를 알면
문제가 해결 되리라!
자, 이제 답이 나왔다. 하느님이 이 세상을 아름답고 거룩하게
창조하신 태초의 상태가 바로 그 상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는 "완전한 충만 상태", 소위 "에덴"의 그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의 잘못된 사용으로
그 충만한 상태를 스스로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자유의지의 잘못된 사용이 바로 "원죄"이며, 그 죄로 인해
"충만하신 하느님"을 잃고 항상 필요를 느끼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기도"는 "죄의 결과"로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일, 저의 이 글이 교리나 어떤 신학에 어긋남이 있으면
이 글을 읽는 "성서학자"나 "영성신학자"나 "교의신학자"께서 부디
저에게 한 수 가르쳐 주시기를 바란다.
반의적(역설적)으로 말하면, 기도의 필요성이 없는 상태란
곧 하느님을 잃기 전의, 전혀 기도의 필요를 느낄 필요가 없는
완전히 충만 된 태초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도는 "빌祈와 빌禱"의 글자로 이루어졌다. 뭐가 자꾸 필요해서
神에게 달라고 자꾸자꾸 빌어야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무엇을 해 달라고 비는 것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정말
많은 "지극 정성"과 거기에 또 "돈"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무당에게 찾아가서 뭘 빌어달라고 청할 때 들어가는 돈은 정말
만만찮다고 한다. 비는 일에 따라 때로는 집 한 채 값에 해당하는
거액이나 아니면 고급 승용차 한 대 값은 그냥 날아간다고 한다.
불교 신도들이 절에 가서 100일 기도나 1000일 기도를 올릴
때도 만만찮은 거액의 돈이 들어간다고 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기도의 정석"은 불교에 있다. 불교는 기도가 아주
많다. 기도하는 시간도 꼭두새벽부터이고 기도하는 종류와
방법도 무척 많다. 불교의 기도는 "하는 기도"이다.
뭘 하려고 하고, 비는 기도이다.(쬐송)
그런데, 영성이 떨어지니까(기도를 살지 못하니까) 남의 기도방법을
교회 안에 들여와 퍼뜨리는 영성가들이 가끔 계신다. 불교식으로
엄지와 검지손가락도 똥그랗게 오므리고 거기다 가부좌까지
틀고~~. 기도를 살지 못한 결과가 그런 "天+佛 짬뽕기도"를 낳은
것이다.
개신교에서도 개인의 만사형통과 천국을 빌기 위해서
성도들이 다달이 십일조의 큰돈을 바치고 있다.
천주교 신자들은 참으로 복도 많지~~~.
미사에물 쩨깨(쩨쩨하게 깨소금 넣듯이?) 갖다 바치믄서
하느님께 별걸 다 쫄라대고 있으니 말이다.
"기도하기"를 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도 말이다. 누가 이 기도의 속박에서
나를 구원해 주리오?(크~ 누구 흉내낸다.)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주일학교 수녀님으로부터,
소신학교 신부님으로부터, 그리고 대신학교 시절...
우와, 쩡말 지겹게도 들어온 말이 이 말, "기도하라!"는 말이다.
정말 지긋지긋하게 들어왔다.
기도와 부르스 댕기는 시간이 길믄 길수록 하느님의 뜻대로
거룩히 자알 살아가는 사람으로 착각하는 우리 교회 풍토를
과연 누가 만들어 왔는가?
분명히 거룩하신 성인들께서 한 몫을 하셨고 무엇보다
그 성인들을 이용해 밥 블어 먹는 싸람들이 아주 큰 몫을
거들었음을 나는 말하고 싶다. 아님말구!
기도는 '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기도가 본시 읎었던
옛날의 금잔디 동산인 에덴을 회복하여 그곳에서 하느님의
발자국 소리도 들어가며 그냥 살믄 되는 것이다.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다.
그것을 "순리"라고도 말하는 모양이다.
순리를 따를 땐 하는 일이 모두 순조롭고 물 흐르듯 하다.
순리를 역행하면 무지(無知)무지(無智)하게 힘만 들 뿐이다.
죽을 때까지 죽어라 기도를 붙들고 부르스가 아니라
싸움을 할 수밖에 읎다. 기도할 땐 잘 살고, 기도가 멈추믄
못살고... 숨 꼴깍 넘어 갈 때까지 그렇다.
순서를 모르기 때문이다. 순서를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순서를 왜곡시켰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잘못되었으면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기도가 그토록 죽을 때까지 어려운 것이라면 분명
그 방법이 잘못된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기도는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에 인내를 갖고 끈기 있게
그 어려운 과정을 무릎팍이 썩어져라 욜씸히 하다보믄
"문리"가 틀 날이 올 것이라고 거짓뿌랑을 늘어 놓는다믄
이 담에 큰 행님 앞에 나설 때 아주 큰 코 다칠 줄 알아야...
예수님께서 "가끔" 따로 한적한 곳을 가셨지 "맨 날" 가신
것은 아니다. 그리고, 당신의 최후의 가장 중요한 역사를
앞두고서 제자들과의 마지막 시간에 깨어 함께 기도하자고
하셨지 "맨 날 밤마다" 잠도 자지 않고 남편과 새끼덜
어떻게 자빠져 자고 있는지도 모리면서 밤을 붙들고
기도하라고 하지는 않으셨다. 기도로 밤부르스를 땡기면
하느님이 로또를 맞게 해 주시나, 아니믄 하느님이 내
가심 속으로 쏙 들어오셔서 영원히 내 곁에서 빠져 나가지
않기라도 하시나?
밤 도깨비가 날이 새어 낮이 되믄 낮이 무써워 밤에 했던
모든 일 다 잊어 뻔지고 하느님 뜻도 잊어 뻔지고 지
뜻대로만 살아가는 인생들... 하느님이 왜 밤과 낮을 갈라
놓으셨는지 기걸 먼저 알아야 하는디...
저, 맞아 죽어도 할 쑤 읎씸더...
회복해야 한다, 원상회복을...
기도가 필요하지 않았던 그 상태를 말이다.
그 상태를 회복하면 그때부터 "기도가 살아진다."
기도를 살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게 됨으로 그게 가능해지는 것이다.(갈라 2,20)
기도는 "하느님과의 사랑 나눔"이다.
서로 사랑을 느끼고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끊임없이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1테살 5,16)
사랑이 끊기지 않아야 되는 것이다.
무신 기도를 하루에 5~10시간씩 바쳤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가 끊길 수밖에 없다.
여기 우리의 내맡긴 형제들도 과거의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해
매일 무신 기도 무신 기도 하는 것에 얽매여 살고 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정말로 100% 다 내맡겼다면, 나날이 조금씩, 때로는
왕창 변화해 갈 것이다. 그리고, 평소에 하던 무신 기도들이
그제사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 말이 사실로
드러나게 될 날을 기다리시길... 기다릴 필요도 없다.
내맡긴 이는 그대로 살아 가면 된다, 기쁘고 즐겁게.
내맡기면 하느님이 내 안에서 영원히 빠져 나가지 않으신다.
내 안에 항상 하느님의 사랑이 충만하다. 그러니 기도
(사랑 나눔)가 끊길 수가 없는 것이며 그래서 기도를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도가 필요치 않았던 그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느님이 주신 도깨비 방망이와도
같은 "자유의지"로 "충만"의 원조, 충만 자체이신 하느님을
잃었으니, 그리하여 "필요(부족)"를 느끼게 되었으니,
그 필요한 것들을 달라고 쫄라대는 "기도"가 생겨났으니,
기도를 생겨나게 한 원흉인 "자유의지"를 다시 고스란히
하느님께 반납해 드리면 된다.
자유의지를 다른 쉬운 말로 "나의 의지, 내 뜻"이라고 한다.
나에게 "내 뜻"이 있듯이, 하느님께도 "하느님의 의지, 하느님
뜻"이 계시다. 내 뜻으로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을 망가뜨려
놨으니, 이제 내 뜻, 쓸모없는 내 뜻을 하느님의 뜻에 내맡겨
드리고 앞으로는 하느님 뜻대로만 살아갈 것을 하느님
대전에서 약속드리고 그 굳은 약속을 봉헌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끝이다.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는 나의 모든 것, 더러움까지도
몽땅 다 받아 주시고, 그때부터, 하느님 당신의 뜻대로
부족한 나를 대신 살아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타락, 즉 자유의지의 잘못된 사용으로
불 보듯 뻔한 인간의 삶에 당신이 대신 살아 주시려 구약의
이스라엘부터 역사해 내려오셨다.
"야, 느그들은 이쟈 가만히 읶그라~~. 지금까지 느그들에게
주었던 그 자유의지가 으떡케 귀한 선물이지도 모리는 느그
넘들에게 줬더니 그걸 갲고 고 모냥 고 꼴로 맹그러놔? 으이,
이 고얀 넘들~~~. 이쟈부텀 내가 느그들의 삶을 책임져
주겠다. 자, 느그들의 그 자유의지, 느그 뜻이나 나에게 쭤!"
그 이후의 역사가 다 구약성경에 쓰여 있지 않은가?
자유의지의 잘못된 사용의 첫 죄인이지만 그들의 앞길을
미리 다 보호해 주시고, 그들의 첫 아들, 즈그 동상을 작살
낸 그넘까지 다 보호해 주시고, 그 이후, 이집트에서 빼내
주시고, 전쟁까지도 당신이 다 해 주시고, 구약의 모든 역사가
다 당신이 대신해 주시는 역사 야그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교만한 머리가, 뱀의 조종을 받던 머리가
그러한 하느님의 뜻이 인간 앞에 "나섬"을 도저히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하느님은 마귀에게는 강해도, 인간에게만은
너무도 약하시다. 우리 인간을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여러분들의 자녀에게 그렇지 아니한가?
"거룩한 내맡김"은 인간의 모든 실수를 인정하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마치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완전히 쏙
들어간 상태로 회복시켜 주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다.
내맡기게 되면 나의 모든 것이 완전히 다 하느님의 것이 된다.
왜? 하느님께서 나의 모든 죄와 부족을 다 받아들여 주셨기에,
나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 됨으로 내 것이 곧 하느님의
것이 되는 것이다.
소위, "내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을 소유하는 방법은 이 방법이 가장 훌륭하고,
사실 이 보다 더 뛰어난 방법은 이 세상에 없다!
의심나면 하느님께 직접 물어 보시라!
이렇게 하느님께 내맡기고 나면, 아~ 기도가 이렇게도
감미로울 줄이야...? 아~ 기도가 이런 것인 줄 꿈에서도
몰랐는데...? 성무일도 한 장을 읽어도 하느님의 사랑이
눈에 보여 그 성무일도를 다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앞을 가려... 3천 년 전의 다윗 성왕이 지금 내 앞에
나타나 하프를 타면서 시 한 수도 읊어 주시고...!
그 전의 기도는 완전 "의무방어전"이었는데, 이제는
기도로부터 완전 해방! 아~ 해방된 민족이구나! 그때부터
기도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삶이 곧 기도"가 된다.
주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하는 것이 나의 기도요,
주님께서 보내 주시는 작은 예수님들을 만나는 것이
나의 기도요, 성무일도가 섭섭함을 느껴도 하느님의
뜻이 성무일도를 벗어나 당신이 주신 일과 사람으로
이동했음을 확신하며 어느 기도에도 얽매임 없는 삶!
특히, 기도를 살아가는 삶! 거룩한 내맡김으로 "참 자유"를
선물로 받은 이들만 누리게 되는 삶!
그것이 바로 내맡긴 영혼의 "자유기도"인 것이리라!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 [기타] 복음선포
2013년 다해 4월25일 부활 제4주간 성 마르코 복음사가
복음묵상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마르코16,20)
----
우선 복음을 선포한다는 말을 생각해보고 싶다.
우리 모두가 그분의 기쁜 소식을 전할 사명을 부여 받았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혹시 누군가가 우리의 노력에 의해,
예수님을 알게 되어 그의 새로운 삶이 열린다면 이는 상상만
해도 신나는 일이다. 그리고 그의 새로운 삶이 그 사람의
구령(救靈)으로 이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이런 기쁨을 체험하였을까?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들이 복음 선포라는 말을 어렵게 생각한다.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유들에 대하여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저는 성격이 내성적이고 남에게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이
맞지 않습니다.”
“저는 아는 것이 너무 없어서 누구에게 전할 처지가 못됩니다.”
“저는 제가 너무 신앙적으로 미흡해서 누구에게 교회에 나가자는
소리를 못합니다.”
“저는 저의 문제도 풀지 못하는 형편없는 신앙인이라 모범적인
모습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
“저는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사람들 앞에 내세울 일이 못되기에
누구를 전교한다는 것은 죄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먹고 살기에도 벅찹니다. 조금 여유가 생긴 후에 하느님의
일도 해야겠지요.”
“저희 집안은 저만 신자이고 나머지 가족은 모두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 그럴 듯 한 이야기다. 한 가지만 기억했으면 한다.
모두 완벽하게 갖춘 꼴로 복음을 전하는 이는 아무 없으며,
부족함을 안고, 어려움을 안고 많은 이들이 희생을 하여 이루어낸
것이 오늘날의 교회이다.
교회는 절대로 완벽한 인간들이 모이는 공동체가 될 수 없으며,
부족함과 나약함을 인정한 이들이 서로 한 목적을 가지고 성령의
활동을 믿으며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길을 함께 걸어가고자
하는 이들의 모임이다.
그렇다고 이 말을 옳지 못한 모습을 보이면서 해도 되는 것이
복음선포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부족하다는 말은 옳은 일을 하기에 부족함이 있다는 말이지,
옳지 못한 생활을 정당화 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편안하고 안락한 신앙생활을 원한다.
가능하다면 십자가는 나의 몫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그분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한다.
부족한 모습 안에서 부족한 모습을 보이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것이 복음선포이다. 해야 할 도리를 다하면 된다. 그
다음은 예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신다. 나의 내민 손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생각해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기타] 기도라는 겸손의 옷을 입읍시다.
2013년 다해 4월25일 성 마르코 복음 사가 축일
(베드로 1서 5장 5~14절)
<나의 아들 마르코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오늘 독서 서두에 보면,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는 말씀이 있는데요.
그것이 무엇일까.. 하다가 ‘기도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번에 냉담자 가정을 방문했었는데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지막에 ‘성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을 하셨습니다. ‘일단 지금 하는 일이 안정
될 때까지 다른 일에 신경을 못 쓸 거 같다. 그리고 성당에 안
나간다고 크게 욕심 부리고 사는 게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라...’
는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아마도 ‘혼자 힘으로 잘 살아왔고
잘 살 수 있으니 괜찮다..’ 하는 생각이 있으셨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성당에 나오시라는 이야기를 더 드리지 못하고
돌아왔는데요.
그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모습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 어떤 기도 모임을 했었는데요. 일 년에 두 번은 전국
신학생들과 지도 신부님들이 함께 모여 연수를 했었습니다.
저녁이면 보통 술자리가 있었는데요. 한 번은 부산교구 신부님
근처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시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누가 질문했는지 생각은 나지 않지만 신부님의 대답은 기억이
납니다. 왜 이모임을 하시냐.. 는 질문에 ‘모자라고 부족해서...’
라는 대답을 하시더라고요.
제가 보기에 그 신부님은 부족한 분이 아니었던 거 같습니다.
유학도 다녀오시고, 신학생들에게 존경도 받으시고, 교구에서도
인정을 받고 계신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부족하고
모자라서..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 제게는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던 거 같습니다. 아마도 신부님은 ‘나 혼자서도 사제로
잘 살아갈 수 있어~’ 가 아니라, ‘가난과 복음을 삶으로 살아가는
동료 사제들의 모임에 의지해야 사제로 잘 살아갈 수 있을
거야..’ 하는 마음이 있으셨던 거 같습니다. 혼자 힘으로가 아니라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느끼셨던 거 같은데요.
우리 삶 안에서도 비슷한 순간이 있는 거 같습니다. ‘그 동안 내
힘으로 살아온 게 아니었구나.. 그분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살
수 없겠구나...’ 하고 깨닫는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성호경을
긋고 기도하는 것도 ‘내 힘으로 살 수 없습니다.’ 하는 고백이리라
생각합니다. 내 힘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저도 사제가 된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내 힘으로가 아니다..
하는 것을 점점 더 강하게 느끼게 되는 거 같습니다. 누군가가
마음을 돌리고 변화되는 것도 그렇고, 공동체가 건강해지고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움직이는 것도 그렇습니다. 제 말이나
삶이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만들어 내기에는 그 힘이
너무 미약하다는 느낌을 점점 더 많이 받습니다. 많은 경우
‘내 힘으로가 아니다..’ 하고 인정할 때쯤 그분께서 보여주시는
변화를 보곤 했던 거 같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기도하고
의지하고 의탁해야 하는구나..’ 하게 되는 거 같은데요.
내 힘으로 할 수 있어.. 가 아니라, 그분의 도우심 없이는
안 돼.. 하고 기도하는 것이 겸손의 옷을 입는 한 가지
모습이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기도라는 겸손의 옷을 입어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손자 손녀가 다 있는 형제님들과 식사를 하는데 한 형제님에게
전화가 왔다.
통화를 하신 후에 ‘나 같은 남자 없다.’ 며 자랑을 하신다.
“나 같은 사람이 어디 있어? 내 부인한테 전화 오면, 봐~
내 사랑 OO이.. 라고 뜨잖아~” 그러자 회장님이 “그건
약과야.. 내 꺼 볼래~” 하면서 휴대폰을 보여주신다.
거기에 보니 ‘내 이쁜 반쪽’ 이라고 써있었다.
- 밤송이 신부님의 묵상 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