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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4월30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청주] 평화를 갈망하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사도 14, 19 - 28
† 복음 : 요한 14, 27 - 31ㄱ
★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첫 번째 선교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그러나 활동 중에 유다인들의 주도로 군중의 돌에 맞아 죽을
위험까지 겪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여기며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한 가운데 자신들의 선교 활동을 완수하였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시며 그들에게 평화를 남기신다.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달리 고난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그 고난을 이겨 내는 삶의 태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마음이 산란해지거나 겁을 내서는 안 된다
(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그런데 그다음 구절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하시니,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다르다는 것입니까?
프란치스코 성인이 어느 날 우물에서 물을 긷는 여인을 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운 뒤 작은 나뭇조각을 물에 띄우고
어깨에 메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왜 물통에 나뭇조각을 띄우고
갑니까?” 하고 프란치스코가 묻자 그녀는 “물통이 흔들려도 물이
넘쳐흐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죠.”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에서
성인은 ‘마음의 동요가 일 때,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띄우면 되겠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십자가를 전제로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고 하셨지만, 이후
제자들의 삶은 평화롭지 않았고 십자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박해를
받았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결코 평화롭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의 평화를 잃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평화를 위해서는 돈, 무기, 강력한 통치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가 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평화를 위해서는 오직 하나,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필요합니다. 그 안에서 온갖 고통을 이겨 낼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평화를 갈망하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4월30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 요한 14,27-31ㄱ
평화를 갈망하라.
10년 공들인 북한의 개성공단에서 노동자들을 철수시키고 있습니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 안에서도 개성공단은 평화지대였는데
이제 공장이 문을 닫을 처지에 놓였습니다. 남북이 하루라도 빨리
협상력을 발휘하여 개성공단이 재가동되기를 희망합니다. 평화에
공헌하는 공단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세계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전쟁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를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자기 국가의
안위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국방비를 증가 시킵니다. 평화를 갈망하면서도
평화를 방해하는 물리적인 환경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먼저 마음의
평온가운데 머물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에게 평화를 줄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평화는 외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같지않다”(요한14,27).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는 것은 바로 평화가 ‘밖’으로부터 오는 평화가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7).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1,20).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시지만 제자들이나
우리가 곧장 평화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행할 수 있는 믿음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먼저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해야 하겠습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평화를
수확하게 되는 것은 자비로움을 뿌리내릴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세상이 시끄러운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평온하지 못한
것입니다. 평화를 갈망하는 만큼 내 자신이 맑아져야 하고 고요해져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평화라고 생각하는 것을 사랑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당신 생각에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미워하기 보다는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미워하십시오! 그것들이 전쟁의 원인입니다. 평화를 사랑한다면
불의를 미워하고 폭군을 미워하며 욕심을 미워하십시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 안에 있는 그것들을 먼저 미워하십시오”
(제네시스 수도회 토마스 머튼).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예수님이 곧 평화다
2013년 다해 4월30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복음 : 요한 14,27-31ㄱ
< 예수님이 곧 평화다 >
오늘 뉴스에 ‘실적 스트레스에 인턴 자살 ... 회사는 등을
돌렸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왔습니다.
그 내용은 최모(29)씨가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 경영학과를
나와서 유명 금융회사 인턴사원으로 들어갔는데 1년 동안의
성과를 보고 정규직으로 뽑아준다는 회사의 뜻에 따라 한 달
100만원 받으며 열심히 일을 했는데 실적이 좋다가 중간에
몸이 아파 수술을 하는 바람에 다른 동기들보다 뒤처지게 되었고
그 스트레스로 목을 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매일 이런 기사들이 쏟아집니다. 또 요즘은 중간고사 기간인데
한 학생이 중간고사 스트레스로 아무 관심도 못 받은 채 한 달
동안 혼자 끙끙 앓다가 자살한 기사도 나왔습니다. 요즘 시대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해서 뉴스거리도 안 되고 또 약한 정신 상태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겠지만 사람을 불안해 하도록 만들어서
자신들의 이득을 챙기려는 세상에 속해있다는 죄 하나 때문에
매일 이렇게 희생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현대를 ‘염려의 시대’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걱정하게 만드는
시대라는 뜻일 것입니다. 인간의 두려움을 연구한 휴 미실딘
박사는 인간의 두려움은 영아기의 3대 기초적 두려움의
연장이라고 말합니다. 즉 떨어지는 두려움(Fear of falling),
큰 소리에 대한 두려움(Fear of loud noise), 버려지는 두려움
(Fear of being abandoned)이 그것입니다. 영아기의 ‘떨어지는
두려움’은 성인이 되면서 실패의 두려움, 뜻하지 않게 찾아오는
사고·사건에 대한 두려움이 됩니다. ‘큰 소리에 대한 두려움’은
어른이 되어도 비판에 대한 두려움, 폭력이나 침범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이어집니다. ‘버려지는 두려움’은 인간 최대의
내적 두려움입니다. 고독과 불안이 주는 두려움, 헤어지는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죽음의 두려움 등으로 연결됩니다.
결국 아기 때부터의 기본적 두려움이 평생 계속된다는 얘깁니다.
세상은 이 두려움을 이용해 자신의 평화를 준다고 사람을 속입니다.
다시 말해 떨어지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꼭 성공해야 하고
실패하지 않기 위해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만듭니다. 또한 큰
소리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려면 남들에게 비판받지 않도록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강하게 보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버려지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버려지기 전에 자신이 먼저 버리든가
버려지기 싫으면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에
세상이 주려는 평화입니다. 평화를 위장한 긴장과 구속과 두려움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평화를 우리에게 주고 가신다고 하십니다.
당신의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말씀하시고, 그러니
당신을 믿고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 자동차가 나왔을 때 포드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고장이 났습니다. 그는 길가에 자동차를 세워놓고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디가 어떻게 고장이 난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마침 뒤따라오던 같은 포드 자동차가 멈추어 섰습니다.
그리고 신사 한 사람이 내렸습니다. 신사는 다가오더니 자신이 그
고장 난 곳을 좀 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잠시 자동차 엔진의 한
곳을 만지더니 다시금 시동이 걸릴 수 있도록 고쳐 놓았습니다.
고장 난 차주인은 너무도 놀라며 당신은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그 신사가 건네준 명함에는 “헨리 포드”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신사는 다름 아닌 포드자동차를 만들어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자동차에 대해 잘 알 수밖에요.
사람도 하느님이 만드셨습니다. 하느님만큼 사람을 잘 아시는 분도
없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옆에 계시면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우물에서 물을 긷는 여인이 물을 길을 때마다 물동이 안에 나뭇조각
하나를 넣는 것을 보고서는 어느 날 그 부인에게 “왜 그렇게
하십니까?”하니까 부인이 당연하다는 태도로 “그래야 물을 흘리지
않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은 이 사연을 쓰면서 덧붙이기를, “그러니 그대의 마음이
근심에 싸이고 흔들리면 그대의 마음 가운데 십자가를 놓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라고 썼습니다.
물이 흔들려도 나뭇조각이 떠 있으면 물이 흘러내리지 않는 것처럼
우리 마음에도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면 평화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 마음 안에 평화가 있다면 곧 예수님이
함께 계신 것입니다.
수요일과 목요일은 복음묵상이 없겠습니다. ^.~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어쩌면 내 안에 있는 안일한 마음이
저는 평소에 메모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책에서 좋은 내용을
볼 때 또 문득 생각들이 떠오를 때에 포스트잇이나 수첩 등을
이용해서 메모를 합니다. 이런 메모의 생활화가 솔직히 제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지요. 메모로 적어 놓은 것들이 이렇게 매일
쓰고 있는 새벽 묵상 글의 주요 소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메모의 생활화가 항상 좋은 점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오늘 새벽에 그런 체험을 할 수 있었지요. 즉, 메모 때문에 안일한
마음을 품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보통 새벽 3~4시에 일어나는 저입니다. 하지만 일이 있어서 늦게
잠자리에 들었을 때에는 이 시간에 일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습관이 되어서 그 시간에 눈이 떠지기는 하지만 곧바로 ‘10분만
더 자자’라는 생각을 하고 다시 잠이 들고 말지요. 바로 이때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전에 써놓았던 메모입니다.
‘어제 써 놓은 메모가 있으니까 금방 새벽 묵상 글을 쓸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조금만 더 자자.’
이러한 생각 때문에 오늘도 늦잠을 자고 말았지요. 사실 메모는
완성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순간의 생각을 적은 그냥 말 그대로
메모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적어 놓았다는 안일한 생각에 당장
해야 할 것들을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어쩌면 내 안에 있는 안일한 마음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진정
나의 것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주신 이
세상은 분명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더
열심히 그리고 더 치열하게 이 세상 안에서 노력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안일한
마음에 그러한 노력을 게을리 합니다. 따라서 안일한 마음은
과감하게 벗어 던지고 적극적인 자세로서 주님의 뜻을 찾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평화를 우리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고
하시지요. 왜 그럴까요? 자기 자신만의 평화가 아니기 때문에,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 쉽게 얻을 수 있는 평화가 아닙니다.
평화를 얻은 다음의 제자들의 삶을 기억해보세요. 고통과 시련이
없을 때 우리는 평화롭다고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오히려
그 뒤에 커다란 박해와 시련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 놓아야 했습니다. 이 점을 보았을 때, 주님께서 주신
평화는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떠한 고통과 시련도 굳건하게 이겨낼 수
있는 평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는 평화인 것입니다. 이
커다란 평화를 어떻게 안일한 마음으로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겉으로만 좋아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는 안일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대신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향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진정한 평화를
주님으로부터 우리 역시 얻게 될 것입니다.
가시덤불 속에 가시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만, 그래도 손 내밀어
꽃을 발견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습니다.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조르주 상드).
쌍용차 사태의 조속한 해결과 이 땅의 노동자들을 위한 미사에
다녀왔습니다.
야구를 보면서...
저는 야구를 너무나도 좋아합니다. 그래서 프로야구가 한창인 요즘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특히 좋아하는 야구팀을 응원하면서
보는 경기는 더욱더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야구를 보다보면 결정적인
찬스의 순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투아웃에 만루와 같은 상황
말이지요. 이때 안타만 쳐도 몇 점을 얻을 수 있으니까 응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기대를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스윙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그냥 삼진 아웃 당하면 어떨까요? 응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욕을 퍼 붙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노력
없이 가만히 있기만 했다는 이유 때문이지요.
물론 타자가 타석에 섰을 때 삼진에서 홈런까지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아웃이 되었다고 무조건 잘못했다고 할 수 없지요.
그러나 조금의 노력도 보이지 않는 모습에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문득 우리의 모습에 주님께서는 어떤 모습을 보이실까 싶습니다.
혹시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 아무런 노력도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에, 그래서 그냥 가만히 삼진 아웃 당하는 우리의 모습에
화내시는 주님은 아닐까요?
좀 더 적극적으로, 좀 더 신나게 살아봅시다. 그 결과가 나쁘더라도
이렇게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에 주님께서는 힘찬 응원의 박수를
보내주실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잔잔한 호숫가에서
2013년 다해 4월30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요한 14,27-31ㄱ
<잔잔한 호숫가에서>
오래 전 일이 기억납니다. 자연과 접하기를 좋아했던 저는 주말만
되면 여기 저기 많이도 쏘다녔습니다. 그것도 혼자서. 틈만 나면
산이나 강, 바다나 계곡, 호수...많이도 다녔습니다.
한번은 혼자서 깊은 산속인데도 기가 막히게 자리 잡은 멋진 호수로
낚시를 갔습니다. 워낙 깊은 산속인지라 주말 오후인데도 그 호수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해가 떨어지기 전 미리 텐트를 쳤습니다. 그리고
슬슬 낚싯대를 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버너에 불을 붙이고,
코펠에 쌀을 씻어 얹었습니다.
준비해간 간단한 반찬을 꺼내 흐뭇한 마음으로 밥 한 술 뜨는 순간,
호수 건너편으로 커다란 해가 떨어지지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수백 마리나 되는 물오리떼가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하느님께서 저만을 위한 멋진 무대를 꾸며주신 것 같아 잠시 동안이나마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던 그 적막감, 그 고요함, 그 아름다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완벽한 평화로움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
머릿속에 명확히 남아있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꿈꾸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잔잔한 호수 같은 마음의 평화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한 불완전한
우리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우리네 삶이란 것이 늘 흔들립니다. 때로
크게 요동칩니다. 수시로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참된 마음의 평화, 참으로
요원한 목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때로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하루를 맞이하지만, 아주 작은 흔들림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크게 요동치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 내면의 상태를 너무나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오늘 복음에서 우리 각자에게 꼭 필요한 한 말씀을 던지고 계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결국 우리가 최종적으로 추구할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가 결코
아닙니다. 그 평화는 우리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화입니다. 그런데
그 평화는 가만히 앉아있는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쉬운 평화가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평화는 우리 안에 있는 그릇된 개념과의
치열한 투쟁에서 얻어지는 내적 정복입니다.
우리가 참 평화를 추구한다면, 가장 먼저 행할 일은 세상의 평화,
사회의 평화, 인류의 평화를 추구하기에 앞에 내 마음의 평화를
먼저 추구해야 합니다.
내가 평화롭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이웃과의 평화, 공동체의 평화,
세상의 평화를 쟁취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과 나 사이에 평화를 누리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의 평화, 내 내면 안에서의 평화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결국 우리가 평화롭고 싶다면,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평화를 유지하고
싶다면, 우선적으로 노력해야 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때로 바보같이 보일지 모르겠지만 먼저
화해를 청하는 일입니다. 큰마음 먹고 크게 한번 뒤로 물러서는
일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일입니다. 결국 바보같이
되는 일입니다.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겠지만 크게 마음 한번 먹고 조금은 무리한
요구처럼 여겨지는 예수님 사랑의 계명을 목숨 걸고 한번 실천해보십시오.
기적 같은 일이 생깁니다. 이 세상 그 어디서도 찾지 못했던 참된 마음의
평화가 선물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자식들에게 평화를 주려면
부모가 자식들에게 무엇을 남기고 가야하는건지 답이 다릅니다.
부모가 겪은 고생은 자식에게만큼은 안 남겨야 된다는 말도 듣습니다.
부모는 그래도 자식들에게 재산을 남겨주면 된다는 말 곧잘 합니다.
자식을 위해 모든 재산을 다 써버린 부모들은 어찌하나요.
주님은 평화를 남겨주셨는데 이 점을 명심해야 될 거라 생각합니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평화를 주려면 평화롭게 살았어야 된다는 거지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요한 14,27)”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기타] 평화는 믿음입니다.
2013년 다해 4월30일 부활 제5주일 화요일 복음묵상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요한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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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그분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신 주제는
평화였다. 즉, 부활의 삶은 평화의 삶과 연결되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평화란 무엇일까?
어떤 상태를 평화라고 하는 것일까?
우리가 원하는 평화는 어떤 모습일까?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분명한 것은 조건과 환경을 뛰어넘는 평화를 말씀하고 계시다.
총칼을 들고 쟁취하거나 지켜야 하는 그런 평화는 아님이
분명하다. 당신께서는 평화를 노래하셨고 우리에게 평화가 있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당신께서 보여주신 그 삶이 결코 평화로운 삶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평화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우리가 이해하는 평화는
조건과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조건이나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평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가 있을까? 몸이 아파도, 고통 속에 있어도,
가진 것이 없어도, 두려움 속에서조차 유지될 수 있는 평화란
무엇인가?
그 답의 열쇠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다.
죽음을 넘어선 믿음,
희망과 나뉠 수 없는 믿음,
사랑으로 하나가 된 믿음.
바로 이러한 믿음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평화를 가져다 준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평화가 너희에게
있기를!”이란 말씀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가져라!”라는 그분의
간절한 뜻이 들어있음을 이해해야만 한다.
참된 신앙 안에서만 참된 평화가 허락된다. 바로 그 평화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1970년대에 제작된 <스타워즈>라는 영화의 내용은 소수의 선한
사람들이 거대한 악의 세력과 맞서 싸운다는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이 영화를 보았는데 기억에 남은 대목이 있습니다.
주인공의 스승이 강한 적과 상대하다가 칼을 맞고 죽어 그 형체가
사라졌으나 오히려 그 스승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남아 주인공이
위기에 빠진 순간에 조언해 주며 위기를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부분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시어 육신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떠나 당신 제자들과 당신을
믿는 신자들과 언제, 어디서나 함께 계시는 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아버지께 가신 것은 제자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함께 계시고자 함이었고,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새롭게 태어나,
생활하고, 죽고, 묻히고, 부활해 당신께서 먼저 가 계신 하느님 곁으로
초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곧 예수님은 제자들을 언제까지나 당신
곁에 붙들어 놓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당신 학교에서 졸업해
당당한 한 인격체로 독립하도록 떠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곁을 떠나시면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미사 때 평화의 인사를 나누기
전에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그분이 남기신 평화를 서로에게 기원합니다. 이
평화의 인사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현존하신다는 표징입니다.
- 윤종국 신부(서울대교구 동작동천주교회) -
◈ [기타] <내맡긴영혼은>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 이해욱신부
2013년 다해 4월30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자세는?
인간의 여러 행동 모습에서 어떤 모습이 가장 아름다울까요?
편안히 잠잘 때, 열심히 땀 흘려 일할 때, 밥 먹을 때,
아름다운 춤을 출 때, 기도할 때 등등...
여러 모습 중에서 "기도할 때"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지 않을까요?
오늘 아침도 이불 속에서 아침을 여는 화살기도를 마치고
바로 일어나 땅에 머리를 박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의 이름으로 하루를
시작하오니 저를 이끌어 주시고, 오늘도 저에게 맡겨진 여러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당신께 맡겨 드리오니,
그들을 당신 뜻대로 이끌어 주소서!"
아침의 이 시간이 저에게 있어서 너무도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자신의 두 발로 꼿꼿이 서 있을 수 있는 인간이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추고 온몸을 쪼그려 몸을 가장 작게 만들고 거기에다
그 잘난 인간의 대가리를 완전히 땅에 박는 그 모습이 제가 제
자신의 모습을 바라 볼 수는 없지만 남이 나를 바라 볼 때,
얼마나 아름답게 보여지겠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몸을 가장 낮추고 가장 작게 움추린 모습!
그 모습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생명지음을 받았을 때,
엄마 태속의 바로 그 모습이 아닐까요?
정말 그 모습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입니다.
세상에 나와 자기 힘으로 걸어 다니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모습 중에서 가장 겸손 되이 자기의 시작을 되돌아보는
아주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입니다.
겉으로는, 그 모습을 취하며 마음으로는, 자신을 이 세상에
있게끔 해 주신 자신의 주인님을 인정하여 오늘도 하느님이
자신의 주인이심을 절대로 잊지 않고 살아갈 것을 굳게
결심하며, 또한 하느님이 만드신 소중한 다른 영혼 중에서
지금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영육으로 아파하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의 섭리 속에 그들에게 자비를 빌어 드리는
"하루의 첫 성호경기도"는 정말 기도 중의 기도,
가장 아름다운 "몸기도"라고 생각합니다.
하루를 허락해 주신 창조주 하느님의 사랑을 "영혼" 속에 깊이
느끼며, "육신"의 행동으로 그 하느님을 찬양하는 참으로 거룩한
영육의 율동입니다.
내맡긴 영혼들은 서로 떨어져 있지만,
아침의 이 시간에 이 기도로써 하느님 안에서 서로 만나
아침 인사를 나누게 됩니다.
이제 많이들 이 기도에 익숙해지셨으니 앞으로는
"성부와 성자와~~~ " 하면서 성호를 그으시던 모습을 바꾸어서
제가 하는 식으로 미사시작 때의 사제가 하는 인사로 성호를
그으시며 이 기도(하루의 첫 성호경)를 바치시기 바랍니다.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의 이름으로 오늘 하루를
시작하오니 저를 이끌어 주시고, 오늘도 저에게 맡겨진 여러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당신께 맡겨 드리오니,
그들을 당신 뜻대로 이끌어 주소서!"
거룩하고 은혜로운 주님의 날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많이많이!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 [기타] 주님이 주시는 평화로 내 마음을 채워봅시다.
2013년 다해 4월30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요한 복음 14장 27~31절)
오늘 복음 서두에 보면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요. 그 말씀을
읽고 묵상을 하면서 ‘언제 내 마음이 산란해 지나...’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몇 가지가 떠올랐는데요.
첫 번째는 신자들이 참여하지 않는 모습을 볼 때입니다. 저 번
주일 미사부터 매년 반복되는 바지락과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바지락을 캐는 분들이 주일 미사 안 나오시고 다 바다에
나가셨더라고요. 제가 신자들에게 바라는 것이 한 가지가 있다면,
주일 미사 나오는 것만이라도 잘 지키는 것인데 그것이 또 무너지기
시작한 겁니다.
그 날은 미사 빠지는 분도 많았지만, 오후에 있는 작업도 거의
참여를 안 하셨습니다. 성당 고구마 밭 거름 피는 작업을 하는데
5명 나오셨더라고요. 많이 나오면 잠깐 하고 끝낼 일이었는데
대부분이 참여를 안 하시니 나오신 몇 분만 고생을 많이 하신 거
같습니다.
그리고 성경공부도 세 달 만에 인원이 반토막이 났습니다. 물론
‘신부님이 강의를 잘 하시면 되지요...’ 하는 것도 일리 있는
말이겠지만, 제가 생각할 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신자들의
무관심과 ‘성경은 알아서 뭐하나..’ 하는 냉랭한 반응인 거 같습니다.
그렇게 무관심하고 함께 하지 않는 신자들의 모습을 볼 때 마음이
산란해 지는 거 같습니다.
두 번째는 앞으로 할 일들을 생각할 때입니다. 본당이나 공소나
조금 들여다보면 할 일들이 많이 보이는 거 같습니다.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도움을 주어야 할 것들도 있고, 준비해야 할 것들도
있고, 해야 할 작업들도 많은데요. 몸이 피곤할 때는 그 무게에 조금
눌려 마음이 산란해 지는 거 같습니다.
세 번째는 본당 공동체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바라보고
고민할 때입니다. 지난 번에 공소에 가서 신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고민할 게 참 많구나..’ 하는 느낌을 받고 왔었습니다. 공소를
잘 지키고 보호하고 관리하는 문제에서부터 구성원들 간의 갈등과
관계문제.. 등 여러 가지를 펼쳐놓고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펼쳐만
놓고 모아지는 느낌이 없을 때 올바른 방향이 보이지 않을 때 마음이
산란해지는 거 같습니다.
그렇게 제 마음이 산란해지는 때가 종종 있는데요. 산란함을 느끼면
느낄수록 더 많이 하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기도입니다. 주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침묵 기도를
하는데요. 그 침묵 기도를 하는 동안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많은
고민과 산란함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공간이 있구나..’ 하는 겁니다.
그 고요한 공간에는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평화와 안식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곤 하는데요. 그 발견과 머무름이 산란함을 몰아내고 작은
평화를 맛보게 하는 거 같습니다.
두 번째는 산책입니다. 주로 오후에 1시간 정도 산이나 마을을 걷는데요.
걷다보면 마음에 어그러지고 틀어진 것들이 자연스럽게 맞춰지고 제
자리를 찾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세 번째는 소수의 열심한 분들의 동참에 집중하는 겁니다. 본당이나
공소나 보면 ‘이분들은 정말 열심하구나...’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이 하는 일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에 감사함, 존경, 배움 같은
것들이 생기고, 그것들이 마음에 산란함을 몰아내 주는 거 같습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산란함이 없을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남겨주신 평화는 기도 안에서, 또 자연 안에서, 또 공동체 구성원들
안에서 발견되어질 수 있는 거 같습니다. 오늘 하루, 산란함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마음에 채워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하루는 여기 사는 아이(지금은 아저씨지만)가 엄마랑 도시에 나갔던
거 같다. 그리고 처음 자동차를 보고 놀라면서 엄마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엄마! 엄마! 저기 돼지들이 굴러다녀~”
- 밤송이 신부님의 묵상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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