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3년 다해 5월9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청주] 넘어야 할 산이 많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사도 18, 1 - 8
† 복음 : 요한 16, 16 - 20
★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에서 선교할 때 많은 사람이 그의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이탈리아 출신 아퀼라와는 생업이 같아 함께 일하였고,
실라스와 티모테오가 그를 돕게 되면서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포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유다인 회당장 크리스포스를 비롯하여
다른 민족인 티티우스 유스투스까지 많은 이가 바오로의 설교를
듣고 신앙을 갖게 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표현은 ‘조금 있으면’과 ‘조금
더 있으면’입니다. ‘조금 있으면’ 예수님을 보지 못하나 ‘조금
더 있으면’ 예수님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이 표현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두 번이나 나오고, 제자들의 입에서도 한 번 나옵니다.
‘조금 있으면’과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어서
든든하고 행복하며 은혜롭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은
잠깐입니다. ‘조금 있으면’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든든함 대신에 불안을, 행복 대신에 불행을,
은혜 대신에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불안과 불행, 고통도 역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더 있으면’ 예수님을 다시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불안과 불행, 고통은 사라지고 든든함이, 행복이, 은혜가 이어질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가운데 지금 행복한 삶을 누린다고 느끼는 사람은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고, 반대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 또한 그것이 조금 더 있으면 사라지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조금 있으면’ 사라지게 될 것을 두고 행복감에 젖을 필요도
없고, ‘조금 더 있으면’ 사라지게 될 것을 두고 절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좋은 일이라고 항상 좋은 것으로 남지 않고, 나쁜
일이라고 항상 나쁘게만 남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체험을 통하여 결국에는 우리를 영원한 행복으로 부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넘어야 할 산이 많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5월9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 요한 16,16-20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합니다. 평생 이별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아무리
사랑하고 좋아한다 할지라도 때가 되면 이별을 감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사랑의 관계가 참되었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잠시잠깐의 만남을 기뻐하고 어떤 이는 좀 더 오랜 만남을 기대하고
희망합니다. 기왕이면 떠날 때 떠나더라도 가슴에 남는 만남을 이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16,20). 하고 말씀하시며 세상을 떠나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게
됨을 제자들에게 거듭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권력자들은 십자가에 무참하게 처형된 예수를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직접 겪은 후에야 그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씀을 체험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이 다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인 것처럼 생각하고 편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모든 것을 다 이해한 다음에 수용하겠다는 것도 꼭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은 머리가 아니라 먼저 가슴으로 따르고 비로소
논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지금 알아듣지 못해도 때가 되면 알게 됩니다.
그때 아는 것은 이미 있었던 진리를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때가
오기까지 제자들은 함께 해산의 진통을 겪어야 합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그러므로 스승과의 깊은 신뢰를 쌓고 스승의 모든 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스승이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때 참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스승은 많이 알아서 스승이
아니라 모든 것을 품을 수 있어서 스승입니다. 지금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동행하여 주심을
믿고 여기서 기쁨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매 순간 그분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선택하게 될 때 주님의 뜻을 새롭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기쁨을 희망하는 만큼 아픔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묵상 -
어둔 밤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
2013년 다해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 요한 16,16-20
어둔 밤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
‘세상을 바꾸는 15분’이란 강연 프로그램에서 전직 프로복서 한국랭킹
7위까지 했다가 27살에 성악에 도전하여 국제콩쿠르 20회 이상 우승,
오페라 300회 공연 등을 소화한 엄청난 경력의 소유자가 된 조용갑
테너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가 권투를 그만둔 이유는 얼굴이 너무 크고 키와 팔이 짧아서
권투에는 매우 불리한 몸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집이
너무 가난하여 했던 운동도 제대로 되지 않자 그 스트레스를 노래로
풀었습니다. 그러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집에서도, 동네에서도,
약수터에서도, 다리 밑에서도 사람들에게 쫓겨나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공부하고 싶어도 돈은 안 모이는데 어떤 누가 성악을 하려면 이태리로
가라고 해서 그 이후로 이태리로 유학가고 싶은 꿈은 포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노래를 한 지 10년 만에 동네에서 하도 노래를
부르고 다녀서 유명해 졌었는데 그 동네 분이 1억을 기증하여
이태리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 들어가기 어렵다는 조수미씨가 나온
쌍타 체칠리아를 1년 만에 입학여 지금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페라에서는 누구나 테너를 하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항상
주인공이고 여배우와 손도 잡고 포옹도 할 수 있고 돈도 제일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권투할 때 그렇게 콤플렉스였던 모든 것이
성악에는 가장 좋은 조건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얼굴이 커서 멀리
있는 관객들에게도 눈에 잘 띄고 또한 몸통이 작아서 고음에 유리하여
테너를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높은 음을 내는 악기는 그래서 다
작은 것이랍니다.
힘든 삶 때문에 자살도 생각해 보았고 실제로 절벽 위에도 서
보았었지만 포기하지 않으니 그 어둠이 빛으로 변하는 날이 왔다며
결코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한 인디언 부족의 기우제는 실패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조금 있으면 다시 떠나서 제자들이 비통해
하겠지만 또 조금 있으면 당신이 오셔서 그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밤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밤은
반드시 지나가게 마련이고 터널도 언젠가는 끝나게 마련이고 모든
시련엔 끝이 있기 마련입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기쁨의
날이 옵니다. 이것에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이 오지 않을
것처럼 보여도 어김없이 해가 뜨고 봄이 오지 않을 것처럼 추워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꽃이 핍니다.
마더 데레사의 시성 조사를 맡으셨던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분은 거의 전 생애가 어둔 밤이었습니다. 마지막 30년간은 영적으로
특별한 것을 체험한 것이 없으셨고 매우 메마른 기도생활을 하셨습니다.”
‘어둔 밤’이란 내면에 있던 하느님의 빛을 잃어버리는 때입니다. 즉, 그
전까지 기도할 때 많은 것을 깨달아 기쁘기도 하고, 그 분께서 함께
계심을 느끼며 기도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지만 어둔 밤이 찾아오면,
기도의 맛도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사막을 걷는 것과 같게 됩니다.
예수님도 분명히 어둔 밤을 거치셨습니다. 그분께서 어둔 밤일 때가
언제였는가는 그 분이 부르짖은 말씀 때문에 너무나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도 한 인간으로서 하느님을 잃어버린 고통을 겪으시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죄를 지을 때 하느님을 외면하기 위해 스스로 눈을 감아버려
그 분을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에 대한 보속이었습니다. 인간이 먼저
죄를 위해 하느님을 외면하였기에 하느님도 인간을 외면하시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지옥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그 지옥의 어두운 고통을
우리를 대신해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어둔 밤’이 한 편으로는 ‘믿음을 증거하는 시험대’가 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버리셨다는 고통에 어찌할 바를 모르시지만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아버지, 제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
그렇습니다. 힘든 시기를 이겨내는 방법은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분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마치 어둠 속에 있다가
빛으로 나왔을 때 컴컴해져 잘 보이지 않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차차 잘
보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태양도 아침이 되어야 뜨고 꽃도 봄이 되어야
핍니다. 서두른다고 씨앗이 바로 싹이 나서 나무가 되고 열매가 맺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갑자기 임신하여 온 마리아를 보고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어둔 밤을 잘 참아내고 결국
마리아가 성령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한 것을 알고는 또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요셉의 고통이 기쁨으로 바뀐 이유는 하느님이 천사를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수 없다면 그저 힘들게 발버둥치는 것보다 될 대로 되라고
몸을 맡기는 것이 그 시간을 덜 힘들게 넘기는 방법입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하느님을 만나는 공부
사람은 학교 다닐 때만 공부하는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합니다. 그런데 공부는 특별히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에
일어나 성경책을 읽고 묵상하는 것도 공부요,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뉴스를 보고 듣는 것도 공부입니다. 책을 사서 읽는
공부고, 어른들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것도 공부이지요. 생각해보면
공부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고, 또 마땅히 해야 할 것들입니다. 이렇게
지금 내 삶 구석구석은 공부해야 할 목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공부는 학창시절에만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국영수만 공부고 다른 것은 쓸데없는 것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요즘 학생들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쾌락적인 것만을 추구하고,
쉬운 것만을 선택하려는 모습, 이웃보다는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기적인 모습에 잘못된 공부의 결과란 이런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국영수만이 공부라는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대신 삶 전체가
하나의 공부임을 깨달아야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히 중요한 공부가 있습니다. 신학생
때, 제 영성지도 신부님께서는 항상 이런 말씀으로 영성면담을
시작하셨습니다.
“기도하고 왔어?”
이 질문에 저는 “기도하고 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면담을 하지 않고, “그러면 나가서 기도하고
와.”라고 말씀하실 것 같아서였지요. 또 기도시간에 기도했으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도 들어서 솔직히 거짓말로 기도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신부님께서 왜 그런 질문을 던졌을까
라는 생각을 이제야 해보게 되네요.
어쩌면 먼저 하느님을 만나고 당신을 찾아오라는 말씀이 아니었을까요?
하느님을 만나야 영성면담도 하느님 안에서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스스로 잘못된 생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맙니다.
하느님을 만나지 않으면서도 하느님 이야기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나를 또 하나의 우상으로 만들어 하느님의 말씀처럼 흉내 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기도하고 묵상하는 것, 이것 역시 하느님을 만나는 가장 중요한
공부입니다. 그런데 이 공부를 가장 뒷전에 놓고 있었을까요?
하느님을 만나는 공부에 충실한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맞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은 항상 하느님 안에서
큰 기쁨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하느님 만나는 공부에 충실한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안에서 살 수 있으며, 그때 어떤 시련 속에서도 기쁨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떠나고 싶어 하는 것들을 붙들 방법은 없단다. 알겠니? 곁에 있을 때
사랑해 주는 수밖에 없어(케이트 디카밀로).
공부해야 할 책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글씨를 잘 쓰고 싶어요.
솔직히 ‘글씨 잘 쓴다.’는 소리를 좀 듣고 싶습니다. 사실 제가 초등학교,
중학교 까지는 반에서 서기였습니다. 칠판 글씨, 학급일지, 회의록...
모든 글을 제가 썼지요. 그때는 한 번도 글을 못 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서기도 안 하다 보니, 글
쓸 일이 거의 없어졌지요. 더군다나 신학교에 들어와 타자기, 워드,
컴퓨터 등을 쓰다 보니 직접 펜을 잡고 글을 쓸 일이 더 줄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 너무나도 글을 못 쓰는 내 모습입니다.
학창시절에 악필인 친구들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그렇게 글을 못 쓸
수 있니?” 라고 물었는데... 이제 제가 악필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예전의 모습을 떠올리며 잘 쓰려고 노력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빨리 쓰면 저 스스로도 무슨 글씨인지 알아보기 힘듭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글씨를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좋은 펜을 쓰면 글씨가 잘 써질까
싶어서 비싼 펜을 구입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글씨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계속 쓰지 않으면 비싼 펜을 쓴다고 해도 글씨체가 좋아지지
않습니다.
글씨를 많이 써야 글씨체가 좋아지는 것처럼, 주님과의 만남도 많이
가져야 그 관계가 좋아집니다. 그런데 그 만남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좋아지기만을 바란다면 어떨까요? 기도나 묵상, 희생과 봉사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 주님과의 관계가 좋아질 수 있을까요?
나와 주님과의 관계. 어떤 관계인지를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황량한 들판에 홀로 서서
2013년 다해 5월9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것이다."
요한 16, 16-20
<황량한 들판에 홀로 서서>
바오로 사도의 전도 여행이 항상 활기차고 승승장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사도행전은 생생히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바오로 사도는
현자들의 도시 아테네에서 쓰라린 실패를 체험합니다.
당시 아테네는 석학들의 도시였습니다. 내놓으라는 현자들이
각자의 전문분야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가방끈이
긴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를
바오로 사도는 처절하게 깨달았습니다.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느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쳐
봐도 타락한 이방도시 아테네 사람들은 냉랭하기만 했습니다.
아테네에서 바오로 사도는 진하게 느꼈습니다. 인간의 힘만으로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자신이 너무나도 부족하고
나약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더 간절히 저 열렬히 기도하면서
성령의 도움을 청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아테네에서 얼마나 힘겨운 나날을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코린토 전서 2장 3절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사실(아테네를 떠나)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아테네에서의 쓰디쓴 실패의 기억을 뒤로하고 바오로 사도는
드디어 코린토에 도착합니다. 당시 아테네에서 코린토로 가는
길은 두 가지 방법이 가능했습니다. 육로를 이용하면 꽤나
돌아가야 했으며 이동거리가 약 100Km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배로 지중해를 건너가면 훨씬 거리가 단축되어 하루면
충분했습니다.
코린토는 정말이지 특별한 도시였습니다.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음으로 인해 흥망성쇠를 거듭했습니다. 코린토는
기원전 146년 도시 전체가 완전히 파괴되는 아픔을 겪습니다.
그러다가 약 100년 후인 기원전 45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다시 재건되어 번영의 시대를 맞이합니다.
당시 로마에서 에페소로 가는 최단거리에 코린토가 있었기에
이 도시는 수많은 여행자들이 지나다녔으며 대대적인 유통구조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인구 면에서나 경제면에서 융성했습니다.
3세기말경 얼마나 인구가 많았던지 노예숫자만 46만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당시 코린토에는 로마인, 그리스인, 에집트인, 시리아인, 소아시아의
여러 나라 사람이 뒤섞여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도시 전체 분위기는 너무나도 당연했습니다. 소비향락의 도시,
유흥의 도시, 도박과 매춘의 도시였습니다. 각 민족의 좋지 않는
풍습들의 총집합소가 코린토였습니다. 얼마나 코린토가 타락한
도시였나 하는 것은 다음의 격언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코린토 식으로 생활한다.” 이 말은 “형편없이 살아간다.” “게을리
놀아난다.” “사치향락에 빠져 산다.”는 말과 동의어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코린토에서는 페니키아인들의 여신 아스타르데
우상 숭배, 그리고 그리이스인들의 신 아프로디테, 판테모스 신에
대한 우상숭배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종합해볼 때 당시 코린토는 거대한 유곽(遊廓)과도 같았습니다.
한 마디로 타락한 도시, 희망이 없는 도시였습니다.
전도 여행길에 나선 바오로 사도는 아예 작정하고 사악한 도시
코린토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민 것입니다. 그런데 아테네에서
쓰라린 실패를 경험한 바오로였기에 거대한 악의 도시 코린토
앞에서 얼마나 두렵고 떨렸겠습니까?
코린토에 도착한 바오로 사도는 그냥 복음만 전하지 않았습니다.
천막 짜는 일을 하며 자신의 생계는 스스로 책임졌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아무에게도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코린토에 도착한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에서 받은 깊은 마음의
상처를 추스르면서 또다시 전열을 재정비합니다. 전번의 실패를
경험삼아 더욱 신중하게 복음 선포를 위한 계획을 짜고 또 다시
고독한 복음 선포의 길을 나섭니다. 바오로 사도는 약 1년 반가량
코린토에 체류합니다.
물론 코린토에서의 복음 선포도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회당에서
복음 선포를 시도했지만 동족들의 반대로 회당에서 쫓겨나 지인의
집에 머뭅니다. 쫓겨나는 바오로 사도의 마음이 얼마나 참담했으면
옷의 먼지까지 털었습니다. 소아시아 지방에서 옷의 먼지를 턴다는
말은 인연을 끊는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말까지 그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여러분의 멸망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민족들에게로 갑니다.”
보십시오. 바오로 사도의 여행길은 낭만과 설렘으로 가득한 행복한
여행길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실패와 문전박대와 야유와 죽음의
위협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위를 걷는 아슬아슬한
날이었습니다. 코린토에 막 도착한 바오로 사도는 마치 황량한
들판에 외롭게 서있는 한 마리 들개 같았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절대로 바닥에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기도에 기도를 거듭하면서, 연구에
연구를 되풀이하면서 복음 선포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코린토 사람들이 바오로 사도의 설교를 통해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거의 모든 주민들이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코린토
교회는 바오로 사도가 세운 교회 가운데 가장 열심하고 왕성한 교회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2013년5월9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16,20)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어떤 근심이 기쁨으로 바뀐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문맥상, 예수님께서는 예정된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시기 위해 고통의 시간을 맞이해야 하며, 당신을
잃은 제자들은 온갖 근심과 두려움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지만 당신께서는 곧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날
것이니 그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씀이다. 사실
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안다.
오늘은 근심 혹은 걱정이라는 말에 대해 함께 묵상해보고 싶다.
근심 걱정 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답은 “누구도 그럴 수 없다”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다양한
근심거리는 우리 앞에 항상 주어진다. 걱정거리가 있는 한, 걱정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우리의 반응이다. 피하려고 해서 피해지는
것도 아니고, 잊으려고 해서 잊혀지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걱정한다는 것은 하나의 생존 조건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근심거리를 만났을 때, 그저 근심하면서 어두운
시간을 보내며 살아야만 하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정말로 많은 시간을 필요 없거나 소용 없는 걱정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먼저 근심할만한 것에 근심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걱정할만한 것을 가지고 걱정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즉, 걱정에도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일단 어느 것이든 근심거리가 되면 어쩔 수 없이 근심을 해야만
한다. 그러니, 먼저 내 눈 앞에 있는 근심거리가 정말로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근심거리인지를 식별해야 한다. 이런 작업이
있어야만 의미 없는 걱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치가 있는 걱정이고 무엇이 가치가 없는
걱정인가? 여러 표현이 가능하겠지만, 내 스타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걱정의 이유가 그리고 목적이 아름답다면 가치가 있다.
걱정의 이유가 우리의 부정적인 약함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벗어나야 한다.
자연스러운 늙음을 타인에게 보이기 싫어하는 걱정은 어리석은
걱정이다. 누군가가 미워서 힘들어 하는 걱정은 자신을 더욱
피폐하게 만드는 걱정이다. 이런 걱정에서는 가능하면 자유로워져야
한다. 삶과 죽음 그리고 영원에 관한 걱정은 아름다운 걱정이다.
삶의 가치나 선과 사랑을 위한 걱정은 아름다운 걱정이다. 올바른
생존을 위한 걱정도 아름다운 걱정이다. 이런 걱정은 아프더라도
반드시 해야만 한다.
사람에 따라 늘 걱정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긍정적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사람들이 있다. 가치가 있는 걱정거리라면 정면 승부하는 거다.
하지만 가치가 없는 걱정거리라면 자유로워지려는 연습이 필요하다.
여기서 정면 승부라는 것은 복음적인 눈으로 그 어려움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이겨낼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스스로 할 수 있는 힘을 다한 후에는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것이다. ----
(근심이라는 우리말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다. ‘근심’은 ‘해결되지
않은 일 때문에 속을 태우고 우울해 함’이라고 나와 있고,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걱정’은 ‘어떤 일이 잘못될까 불안해하며 속을 태움.’
이라고 나와 있다. 그래서 다른 언어 번역본들도 찾아보았다. 일본어는
悲しみ(까나시미; 슬픔), 영어는 Grief(비탄, 비통),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는 Tristeza(슬픔), 이탈리어는 Afflizione(고뇌), 라틴어는
Tristitia(슬픔, 우울, 침체)라는 단어를 각각 사용하고 있었다. 모두가
대동소이하고, 반가운 단어는 아님에 분명하다. 하여 오늘 묵상에서
나온 근심과 걱정은 같은 의미로 사용했음을 알려드린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오늘 근심의 무게에 눌려도
억울함 비통함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는 순간이 세상엔 많습니다.
이민 간 한국인들이 겪은 수난과 성공의 이야기를 가끔 들었습니다.
6.25전란 그 이후에 한국의 생활, 역사적 상황도 그랬습니다.
이런 모든 것은 미래를 확신하고 꾸준하게 지켜온 신념 덕이라 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을 믿었었기에 부활을 보았습니다.
오늘 근심의 무게에 눌려도 예수님과 함께라면 기쁨을 얻게 될 거고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기타] 부활 제6주간 목요일
2013년 다해 5월9일
봉건시대와 왕조시대에는 엄격한 신분과 질서가 있었습니다.
귀족과 양반은 천민과 양민들에게 나이가 많아도 반말을 하였습니다.
법과 제도로 보장된 것들이 있었지만 천민과 양민들은 그들의 횡포와
권력에 맞서지 못하였습니다. 법과 제도는 멀고 돈과 주먹은 가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시대에는 그런 것들이 대부분
사라졌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갑과을’의 관계가 존재합니다.
갑은 고삐를 잡은 손이고, 을은 고삐에 끌려야하는 소나 말일 수
있습니다. 계약과 절차가 있지만 갑의 입장에서는 관행적으로 권한을
과도하게 행사하고, 을의 입장에서는 알아서 갑에게 맞추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주인집의 아들과 나이가 같았습니다. 평소에는
친하게 지내지만 아이들이 그렇듯이 가끔씩 서로 싸우기도 했습니다.
제가 잘못을 했을 때도 저는 책망을 들었고, 제가 잘못을 하지 않을
때도 책망을 들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그 이유를 대충은 알 것
같았습니다. 주인집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목의 현장에서 때로 불편한 일들이 생기는 것을 봅니다. 본당
신부와 수녀님, 본당 신부와 보좌신부님, 본당 신부와 사목위원들과의
관계입니다. 대부분은 사랑, 나눔, 친절 그리고 봉사의 삶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한쪽의 지나친 요구가 있는 경우, 다른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이 있는 경우 문제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직분이 있고,
권한이 있고, 재정과 관련된 관계에서 ‘갑과을’의 관계는 생기기
마련입니다. 사회도 교회도 그런 조직과 제도 속에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갑과을’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모기업의 임원이
과도한 기내 서비스를 요구한 것과, 모기업에서 있었던 관행적인 요구가
언론에 노출되면서입니다. 언론에 노출이 되어서 논란이 되는 것이지
우리 사회의 곳곳에는 불편한 진실이 많이 있습니다.
바람직한 ‘갑과을’의 관계는 예수님으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 사람이 되신 그분의 겸손입니다. 섬김을 받을 수 있지만
섬기로 오셨다는 그분의 희생입니다. 자신의 역할이 끝났지만 협조자를
보내시려는 그분의 책임감입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가난하고, 헐벗고,
병든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라는 그분의 열린
마음입니다. 힘든 일, 어려운 일은 앞장서서 하시고 영광은 하느님께
돌리는 그분의 양보입니다.
우리는 모두 가족, 친구, 이웃, 직장, 성당에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웃음이 꽃핀다면, 그곳에서 사랑이 열매 맺는다면, 그곳에서
더 오래 머물고 싶다면 그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곳에서 원망과 불신이 자라난다면, 분열과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면, 그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 공동체는
세상의 가치와 질서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주님을 믿고 의지하여
제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감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복음을 구현하는 길은 참으로 매혹적이고
현세적인 온갖 갈등과 긴장을 동반할 정도의 설렘을 가져다줍니다.
복음을 읽고 깨닫게 되는 그때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성령께서는 순간적으로 깨달음을 안겨주시고, 마치 몸 전체에 전율을
가져오듯 짜릿하고 감격적이며 감사의 정을 발하게 해줍니다. 또한
깨달은 복음 말씀을 구현하려고 고안하는 순간부터 일사천리로
기획이 떠오르며 참으로 주님께서 도와주시고 함께해 주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복음을 구현하는 그 날 그 시간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그
긴장감은 극도로 예민해집니다. 심지어는 ‘그만두고 포기해야 하는가?’
라는 유혹마저 가져올 정도로 불안케까지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구현하는 것은 내 어설픈 기획과 노력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믿음으로 주님께 의지하면, 주님께서는 위로를 안겨주시고 결실을
맺으십니다. 어쩌면 마지막까지 내 모든 생각과 의지와 노력을 주님께
온전히 봉헌할 때 주님께서는 나를 주님의 도구로 써주시고 주님의
일을 이루신다는 고백을 감히 해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16,20)라고 말씀하십니다. 간혹 함께하는
분들이, 협조하는 분들이, 심지어는 스스로도 불안하고 자신 없고
나약해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주님의 말씀은 마침내 이루어지고
그 말씀은 우리를 통해 주님의 열매를 맺으신다는 것을 믿으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 심흥보 신부(서울 대 교구 삼성동 천주교회) -
◈ [기타] <내맡긴영혼은>나는믿나이다!마귀의존재를!-이해욱신부
2013년 다해 5월9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나는 믿나이다! 마귀(사탄,악마)의 존재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마리아님!
성모 마리아님!
도대체 이 세상에 마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열심하다는 당신의 자녀들마저 마귀의 존재를 믿지 않고,
믿는다 하더라도 "마귀"라는 단어조차 듣기 싫어하는 것이
오늘의 실정입니다.
그러나 어머니, 당신은 어떤 그 누구보다도 마귀의 존재를
확신하고 계시며, 하느님께서 당신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삼으시며
당신께 주신 당신의 역할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나는 너와 그 여자의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15)
뱀, 마귀, 사탄, 악마가 없다면 그들 머리에 상처를 입히는 역할이
당신께 주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어머니!,
과거에는 제 안에 마귀의 세력이 남아 있다는
제 어머니의 소리가 너무도 듣기 싫었습니다.
그러나, 듣기가 좋든 싫든 간에 분명히 마귀는 존재합니다.
마귀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존재를 굳이 믿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마귀가 없는 세상이 바로 천국이며,
이 세상에서조차도 마귀가 없다면 천국을 얻기 위해 그 누가
과연 어떤 노력을 필요로 하겠습니까?
어린 시절부터 저에게 형성된 신앙대로,
저는 "마귀의 존재"를 확실히 믿습니다.
"마귀"라는 단어가 구약성경에 10번, 신약성경에 83번,
"사탄"이라는 단어가 구약에 18번, 신약에 43번,
"악마"라는 단어가 구약에 1번, 신약에 42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귀(사탄, 악마)가 없다면 왜 굳이 이러한 단어가 성경에
기록되었겠습니까?
평범한 영혼이 단순히 자신을 위해 회개할 때 마귀 한 두 마귀로
그 역할을 다한다면,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정도"의 회개라면, 마귀의 부대가 달려들 정도입니다.
주님께 내맡기는 영성이 그토록 뛰어난 영성임을 인식하게 되어도
쉽사리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도
바로 자신 안에 있는 마귀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디, 마귀의 지배를 벗어나십시오!
벗어나는 것도 주님께 향한 자신의 사랑뿐입니다.
하느님을 누구보다 사랑하십시오!
하느님을 사랑하시더라도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것, 바로 그것이 마귀의 어떤 세력도
뛰어 넘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힘입니다!
하느님을 뜨겁게 싸랑하시길 간절히 빕니다.
(무엇보다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마리아님께 자비를
구하십시오. 마귀 퇴치 기도에 있어서 정말 최고입니다.)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 [기타] 협력자
2013년 다해 5월9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사도행전 18장 1~8절)
<바오로는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고, 회당에서 토론을
하였다.>
오늘 독서 중간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실라스와 티모테오가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온 뒤로, 바오로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고 증언하면서 말씀 전파에만
전념하였다.
사도 바오로는 실라스와 티모테오, 그리고 여러 협력자들의 도움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데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는데요. 그 비슷한 느낌을
저도 주변 분들로부터 받는 거 같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꽃 선생님이
오셔서 이런저런 좋은 이야기들을 해 주셔서, 그 동안 막막하고
공부하려면 한참이 걸릴 일들이 해결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희 본당 재정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소박한 풍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돈을 들여 할 수 있는 거창하거나 세련된 느낌보다는 은은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의 조경을 만들어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요. 그
선생님 전공이 야생화이시고, 기본적으로 가지고 계신 생각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잘 가꾸고 자연스럽게 조금씩 퍼져 나가게 하는 것이 좋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계셔서, 아마 그분이 조언해 주는 대로 심으면
소박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매년 큰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조경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또 저희가 올 해 관상용 박을
심어보려고 했는데 시기가 조금 늦었는지 많이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분께 부탁을 드려봤는데요. 여기저기 아는 지인 분들에게
부탁하셔서 관상용 박도 20여 가지 가져다 주실 수 있을 거 같다고
하셔서 ‘올 해 본당이 참 풍요로워지겠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관상용 닭을 또 가져왔는데요. 선배 신부님이 알아봐
주신 덕분에 동물농장(?)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가고 있는 거
같습니다. 이제 공작만 구하면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 공작을 구하려고 하냐면요.
사진으로 어떤 별장 베란다에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공작을 봤는데,
너무 예쁘더라고요. 그 모습이 우리 본당에도 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신부님께 입양을 부탁드렸습니다. 아마 공작이
들어오면 본당에 오는 신자 분들이나 손님들이 또 다른 재미와
아름다움을 느끼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나무를 가져다주신 신부님 덕분에 좋은 반송을
예쁘게 심을 수 있어서 본당에 쓸쓸한 느낌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또 성가를 가르쳐 주고 계신 로사 자매님 덕분에 본당 성가가 한층
업그레이드 되었고, 형제님들 덕분에 본당 건물을 쓰는 데에 불편함들을
조금씩 없애나가고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나갈 수 있게 되었고,
자매님들 덕분에 본당이 깨끗해지고 함께 식사하고 잔치를 벌일 수
있는 거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례를 준비해주시고, 예비자들을 모아주시고, 연도해
주시고, 본당 농사를 지어 주시고, 기도해주시는 분들 덕분에, 제가
성경공부나 교리 준비, 그리고 냉담자들을 방문 하는 데에 시간을 쓸
수 있는 거 같습니다. 지금 계신 분들이 없다면 아마 본당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제한 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변 분들에게
감사함을 많이 느끼고, 우리가 주님을 머리로 하는 한 몸이고 그
지체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오늘 하루, 공동체 안에서 나의 역할을 찾아 수행해 봅시다.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다른 지체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어 줄 수 있을 겁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형제님들이 2층 베란다 샤시 공사를 하셨다.
간식 시간에 회장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2층에서 치수를 재 갖고 내려오면 까먹고..
치수를 재 갖고 내려오면 까먹고.. 아~”
- 밤송이 신부님의 묵상 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