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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7월7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청주] 사제 김 대건 안드레아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역대하 24, 18 - 22
† 제2독서 : 로마 5, 1 - 5
† 복음 : 마태 10, 17 - 22
한국인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
충남 솔뫼에서 태어났다. 양반 가문이었으나 그의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집안이 몰락하였다.
김대건은 열여섯 살인 1836년 사제가 되고자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떠났다.
1844년 부제품을 받은 그는 선교 사제의 입국을 돕고자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1845년 8월 17일
상하이의 금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고국에 돌아온
김대건 신부는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 사제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려다가 1846년 6월에 체포되어 여러 차례 문초를
받고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서울에서 한국
순교자 103위를 시성하면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정하상 바오로와 함께 한국의 대표 성인으로 삼았다.
오늘은 한국인 첫 사제로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한국 교회는
김 신부님의 순교 정신, 곧 하느님을 위하여 젊음도, 지식도,
가족도, 부귀영화도 포기하신 채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신
용기와 열정 위에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성직자들이 김대건 신부님의 모범을 충실히
따르도록 마음 모아 기도합시다.
★ 유다의 요아스 임금과 대신들이 예언자들의 경고에도
우상 숭배를 멈추지 않자, 하느님께서는 즈카르야를 통하여
심판의 선포를 내리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임금의 명령에
따라 그에게 돌을 던져 죽인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하여 평화를 누린다고
말한다. 이 평화는 환난이 닥치더라도 인내와 수양과 희망으로
이겨 내는 데에서 오는 것이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을 믿고 따르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고 말씀하신다. 의회에 넘겨지거나 채찍질을 당할 것이고,
다른 민족들 앞에서도 증언해야 하며, 때로는
미움을 사게 된다(복음).
◈ 오늘의 묵상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열여섯 살 때 위험을 무릅쓰고
중국으로 건너가셔서 모진 이국 생활 끝에 사제가 되시어
돌아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 체포되시어 여러 차례
문초를 받으시고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사제 생활 1년에 불과합니다. 어떻게 신부님께서는
배교하라는 회유와 온갖 고난을 이겨 내시고 죽음마저 기꺼이
받아들이실 수 있었을까요?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오로지 사랑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어떠한 고난도 이겨 내게 합니다.
‘사막의 교부’라고 불리는 안토니오 성인의 제자들이 성인에게
어찌 그렇게 단식을 자주 하고, 밤새워 기도하며, 온갖 극기
행위를 잘 이겨 내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성인의 대답은
이러하였습니다. “토끼를 쫓는 개들이 여러 마리여도, 대부분은
쫓아가다가 장애물 따위를 만나면 도중에 포기해 버린다.
마지막에 그 토끼를 붙잡아 입에 무는 놈은 꼭 한 마리뿐이다.
토끼 맛을 본 놈만이 마지막까지 토끼를 쫓아간다. 수도승도
바로 이러하다.”
수도승의 여러 극기 행위는 억지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맛보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억하며 무엇을 새겨 보아야 하겠습니까?
‘얼마나 영웅적으로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는가?’라기보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사랑을 맛보았고,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가?’라는 점일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7월7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 마태오10,17-22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1784년 최초의 영세자를 탄생시킨 한국천주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1794년 12월23일 비로소 한국 땅에 처음으로
주문모 신부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그후 1835년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님은 방인 성직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1836년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세 소년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최방제는 그곳에서 병사하였고 김대건과 최양업은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은 서양학문을
정식으로 익힌 첫 조선인으로서 최고의 지성인답게 당시 조선
왕국의 국가 정세와 교회 사정 및 민생상태에 관하여 예리하게
관찰하였습니다. 두 분은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을 유창한
라틴어로 써서 스승 신부님들께 보고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 1845년 8월17일에 상해근교의 김가항에서 사제
서품을 받으셨습니다. 이때는 서품식이 요즘처럼 성대하지
않았습니다. 쪽배를 타고 그곳까지 간 11명만이 참석한 조촐한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한국천주교 사상 가장 뜻깊은
날입니다.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사제품에 오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날이 진정 빛나는 이유는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될 만큼
명실 공히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사제였기 때문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서품을 받으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15세에 영세 입교하시고 신학생으로 뽑혀 멀리 산 설고 물 설은
마카오로 떠난 그날부터 겪은 고초를 생각하며 감개무량했을
것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겼겠습니까?
우리는 상상할 뿐이지 말로써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서품을 받으면서 그날 모든 감사를 하느님께
드리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신부님이 사제가 되어 고향에 돌아가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금의 환양이요. 개선장군같은 환영입니까? 아닙니다.
박해의 칼, 체포와 죽음뿐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사제가
된다는 것은 어려움도 있지만 교회 내에서는 영광스럽고, 소중한
품위에 오르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신분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께서 사제가 되었을 때는 사회적으로는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목숨을 바치는 순교정신, 곧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없이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을 안겨다 주는
일이었습니다. 명실 공히 십자가를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그것을 잘 아시면서도 바로 그 믿음과 순교정신으로 사제품을
받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목숨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한국 신자공동체가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한국당의 복음화와
구원이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라면 당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쳐도 좋다고 생각하신 분입니다.
신부님은 자신을 위해 사제가 되신 분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 사제가 되신 분이 아닙니다. 동포를 위해, 조국을
위해 세상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잘 살기 위해서 사제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해 1845년 10월에 배를 타고 조선의
충청도 해안에 상륙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846년 5월12일 순위도에서 잡혀 9월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처럼 양들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셨습니다. 정말 어렵고 힘든 가운데 수품을 받고
조선에 입국하였지만 아깝게도 겨우 13개월 동안만 사제로
살았습니다. 그나마 2개월은 조선에 입국하기위해 황해 바다
위에서 보냈고 또 4개월은 감옥에서 지내다가 순교하셨으니
사목활동은 거의 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한국 땅에 천주교가 들어온 것은 1784년, 지금부터 약
229년 전입니다. 당시 사회는 유교 사회였고 양반과 상놈이
구별되는 철저한 계급사회였습니다. 그리고 조상 제사에 대한
관습과 예절이 철저했던 시절입니다. 이때 천주교회의 기본
교리는 신분 계급과 조상제사라는 두 부분에 큰 충돌을
가져왔습니다.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양반 상놈 구분을 거부하며
우상 숭배의 제사를 거부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큰
죄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103년 동안(신유1801, 기해1839,
병오1846, 병인1866) 산발적인 박해 속에 살아야 했고 그
와중에 한국인 첫 사제가 나왔지만 13개월 만에 목자를 잃고
만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생각은
분명 다릅니다. 지나고 보니 신부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신앙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출생하신 솔뫼, 순교하신
새남터, 묻히신 미리내는 오늘도 우리에게 신앙의 표징이 되고
있습니다. 당시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신부님께서는 더 많은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몫을
여전히 하고 계십니다. 신부님께서는 죽음을 앞두고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상에 대한 희망이 신부님을
지켜주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1842년부터 1846년까지 21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중 한문과 한글로 쓴 편지가 각각 한 통씩이고
그 외에는 모두 라틴어로 썼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1842년부터
1860년까지 19통의 편지를 전부 라틴어로 썼습니다. 그런데
김대건 신부님의 편지는 대부분 사제 서품 전에 쓴 것입니다.
반면 최양업 신부님의 편지는 사제 서품 후에 쓴 것입니다.
오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편지를 한 통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편지를 통해 그분의 믿음과 하느님과 그 백성을 위한 사랑이
얼마나 간절하였는지 묵상하고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스물한 번째 편지는 옥중에서 쓴 것입니다.
옥중에서 쓰신 마지막 회유문(1846년 8월말)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하느님)을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비록 주님의
은총으로 세상에 나고 주님의 은총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님의
제자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을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의 은혜를 배반하니 주님의 은혜만 입고 주님께
죄를 더하면 아니 남만 못하리.
이러한 어려운 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 같이 하여 싸워 이길지어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걷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이런 군난 때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공덕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성녀의 자취를 가르쳐
성교회의 영광을 더하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의로운
아들)됨을 증거하고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다) 하실 때를
기다리라.” 하시며 주님께 대한 믿음을 더하기를 촉구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큰 어려움도 역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니
너희가 감수 인내하여 주님을 위하고 오직 주님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하느님께서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주실 것이니
부디 설워 말고 큰 사랑을 이뤄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천만
바란다”. 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렇게 큰 사랑과 믿음을 지키라는 간곡한 호소를 담았습니다.
혹 우리에게도 힘에 겨운 일이 생긴다면 더 큰 믿음으로 주님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농부가 수확을 기다리며 온갖 수고와 땀을
아끼지 않듯이 우리도 참고 견디며 천상 것에서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 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태10,17-2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뿐만 아니라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5,1-4)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삶의 여정을 보면,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 어려운
일이 생기기도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실망과 좌절이 올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계획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고
그 안에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따라서 다가오는 예기치
않은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 주님의 안배와 섭리를 찾기 위해
기도하고 간구할 때 새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김 대건
신부님의 삶은 하느님의 뜻과 세상의 일이 서로를 거스를
때 우리가 택해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련 속에서, 억울함 안에서, 생각하지
못한 난관 앞에서 끝까지 견디며 하느님을 먼저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더 좋은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만하면 됐지’ ‘나도 사람인데’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 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는
이에게는 이것이 유혹입니다. 사실 천상을 바라보고 사는
이에게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견디는” 인내가 행복입니다.
언젠가 천국에서 누릴 영광스러운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 흘리는
수고의 땀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주님께서도
눈물과 피로써 십자가를 짊어지고 세 번씩이나 넘어지면서
걸어가셨는데 우리가 아무런 수고 없이 공짜로 천국을 얻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인내에 인내를 더할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기뻐하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죽을 수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2013년 다해 7월7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대축일
<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
복음: 마태오 10,17-22
< 죽을 수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
어떤 자매님이 거의 년 전에 저에게 하신 질문이 계속
머릿속에 남습니다.
“저는 가족도 다 성당 열심히 다니고 돈도 부족하지 않고
어려운 일도 없는데 왠지 새벽에 일어나 혼자 우는 때가
있어요.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공허하고 행복한 것
같지 않아요.”
그 땐 저도 어찌 답을 드려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오늘
김대건 신부님의 열정과 순교를 생각하면서 이젠 대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바시 회 때 오지레이서 유지성씨가 나와 자신의 도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처음엔 낙타를 타고 사막을 여행하고 싶다는
꿈으로 시작했는데, 이젠 어떤 때는 까지 자급자족하며
마라톤으로 완주하는 ‘사서 고생하는 일’을 전문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처음엔 평범한 직장인이었지만 여행을 좋아해서 사막을 뛰어서
횡단해보겠다는 호기심에 시작한 것이 직장도 접고 이제는
다른 사람들을 이 레이싱에 연계해주는 일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가 모래와 더위만 있는 사막을 횡단하거나 영하 도 이하의
남극을 목숨을 걸고 횡단하던 이야기를 할 때, 그러니까 뱀과
추위와 죽음의 위협이 있는 ‘오지’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눈이
빛나고 목소리가 힘이 있었지만, 오히려 직장생활 할 때의
우리나라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경쟁과 시기, 질투 등의
부정적인 면 때문에 말하는 것이 힘들어보였습니다. 사실
그에게 참으로 행복한 천국은 우리가 볼 때 매우 힘들어 보이는
‘오지’이고, 실제로 한국이 그에게는 불편한 ‘오지’인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곳이 가장 행복한 곳’이라고
말하고, 이 경쟁사회 속 보다는 그 자연 안에서 죽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처음엔 자신의 행복을 위해 달렸지만,
지금은 다른 이들에게도 행복을 찾아주는 기쁨으로 달린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위해서 죽는 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데레사
효과(마더 데레사가 봉사하는 장면만 보여주어도 타액에
면역성분이 증가한다는 실험)에서도 나타나듯이 참 행복은
남을 위해서 죽어 줄 수 있을 때 찾아옵니다.
만약 이런 사람이 이 넘는 몸무게를 지니고(이 일을 하기 전에
나갔던 몸무게) 직장에서 평범하게 일하며 세상에 휩쓸려
살았다면 지금의 살아있음을 느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을 거스르는 열정, 이것이 자신을 태워 고통스럽게도
하지만 그에게 삶의 쾌감을 안겨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의욕과 활기가 있을 때 행복합니까, 아니면 무기력하게
아무 것도 하기 싫을 때 행복합니까? 혹은 밖에 나가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 행복합니까, 아니면 남이 던져주는 것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합니까?
정말 아이러니 한 것은 ‘내가 가장 살아있고 행복하다고 느꼈을
때는 누군가를 위해 죽어줄 수 있을 때’였다는 것입니다. 처음
제가 좋아했던 여자에게 사랑 고백을 받았을 때 저절로 입에서
나왔던 말이, “이젠 사는 것 같다!”였습니다. 지금까지 죽어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찾지 못했다가
삶의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는 것 같이 느낄 때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죽을 수 있을 때 가장 살아있음을
느끼고 행복한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도 죽을 수 없는 때가
진정 죽은 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죽은 이들의 장례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나를 따라라”, 혹은 “가서 복음을 전하여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혹은 이웃을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죽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다고 해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열정(passion)’이 없기 때문입니다. ‘열정(passion)’이란 삶의
의욕과 활기를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수난(passion)’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열정’이 있는 사람은 자기를 ‘소진’시키며
그 열정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까지 합니다. 열정은 그 마음
안에서 불처럼 타올라 자신을 태웁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때는 이렇게 무언가를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소진시킬
때입니다.
오늘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분이
왜 그렇게 어린 나이에 출세도 다 포기하고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나들며 배를 타기도 하고 모진 수난을 받기를 원하셨을까요?
그분에겐 자신의 목숨을 버릴만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열정이 수난이 되어 자신을 소진시킨 사람입니다. 우리는
진정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대로
흘러가는 그런 삶이 아니라 세상과 맞서고 자신의 열정을
불태워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삶을 찾아야합니다.
김대건 신부님도 이런 의미에서 ‘열정’을 가지신 분이셨고,
물론 그래서 박해받고 죽으셨지만, 그래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사신 분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런
의미에서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세상을 이겼다는
열정의 상징이요, 살아있음의 상징일 것입니다. 십자가는
진정 이 세상에서 죽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참 행복의 진리를
보여주는 영원한 상징입니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생각하여라.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루카)
롯의 아내는 세상에 미련은 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을 거스르지
못했기에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세상을
거스르는 열정이 있어야합니다. 물론 그 열정이 세상에서
우리가 멸망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그 열정이
없는 세상이 멸망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연어가 물살을 거스르며 자신의 고향으로 갈 때 얼마나
많은 위험을 만나게 됩니까? 세상은 그저 편하게 자신의 물살에
몸을 맡기라고 하고 우리가 굳이 고생할 필요가 없다고 유혹합니다.
유지성씨와 함께 오지레이스를 하는 김경수씨는, 인도에서
서바이벌 레이스를 할 때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이 오토바이처럼
생긴 인도 택시 ‘오토릭샤’라고 말합니다. 지쳐있는 자신에게
자꾸 옆으로 와서 타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보는 사람이
없어서 잠깐 타고 어느 정도 가서 내려서 걸으면 되지만 결코
그것을 탈 수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다 완주했을 때의
행복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우리의
열정을 꺾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혹합니다.
김대건 신부님에게도 서양 학문과 언어, 지도를 그리는 등의
여러 재능 때문에 호강시켜준다는 회유도 있었지만 신부님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실제로는 죽는 것임을 잘 아시고 계셨기에
그 회유에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살을
거스르지만 죽은 물고기는 그 물살에 떠다닐 뿐입니다. 무기력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면야 그럴 수 있겠지만, 열정과 활력이
행복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 그저 떠다니는 것이 결코 행복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열정은 불과 같습니다. 나를 불사르고 소진시키고 결국 나를
죽입니다. 이렇게 사는 방법이 있고, 또 열정을 버리고 그냥
세상 조류에 휩쓸려 살 수도 있습니다. 열정이 없음이 곧
무기력입니다. 남들 하는 대로 세상에 휩쓸려 무기력하게
살든가, 아니면 세상을 거슬러 내 자신을 소진시키든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김대건 신부님과 모든 순교자분들은 참다운
열정, 참다운 행복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주신 분들입니다.
저는 강론을 쓰는 것이 가장 힘이 듭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강론을 쓰려고 인터넷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강론을 쓰지
않으면 몸은 편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불편합니다. 강론을
준비하면서 머리를 쥐어뜯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낳는 고통 뒤에 아기를 보는 행복이 오는 것처럼, 강론을
쓰는 것이 훨씬 행복합니다. 강론이 제일 힘들지만, 강론을
빼면 사제생활의 보람을 거의 찾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내
행복을 위해서라도 목숨을 내놓을 열정, 우리에겐 이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처럼 우리도 열정으로 우리 자신을 소진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행복이고 영생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 사정으로 다음 한 주는 강론이 없겠습니다. ^ ^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최선을 다해서 사는 삶
제 방에서 급하게 종이를 자를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문구용 커터 칼이 없는 것입니다. 빨리
종이를 잘라야 한다는 급한 마음에 주방에 있는 주방용
큰 식칼을 가지고 왔습니다. 식칼도 자르는 것이고, 커터
칼도 자르는 것이니까 당연히 종이를 자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쉽지 않더군요. 식칼의
날이 무뎌서 그런지 종이는 좀처럼 잘리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주방용 식칼이 훨씬 두껍고 튼튼합니다. 그런데도
종이를 자를 때에는 식칼보다는 문구용 커터 칼이 더
유리합니다. 즉, 상황에 따라서 써야 할 것들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모습도 그렇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은 튼튼한 반면,
다른 사람은 병약합니다. 어떤 사람은 갖은 재주를 가지고
있지만, 다른 사람은 못하는 것투성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기준일 뿐 하느님께서 쓰시는 용도는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스스로를 평가절하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은 능력도
없고, 재주도 없다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쓰고자
하는 나의 모습을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가장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가지고도 크게 쓰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스스로 할 수 없는 것들을 찾아나서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일할 수 있음에도 일할 수 없다고
누워서 떼를 씁니다. 이 몸으로 무엇을 하겠냐고, 자기보다
능력 많은 사람들이 많다면서, 가진 것이 없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사제, 수도자 성소가 부족할 것을 미리 예견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지 못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인간적이고 세상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일꾼으로 주님의 일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돈을 가지고 있고, 높은 지위와 명예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이를 자르는
데에는 두껍고 튼튼한 식칼보다는 얇은 문구용 커터 칼이
더 필요한 것처럼, 우리를 쓰고자 하시는 주님의 뜻에 맞춰서
최선을 다해서 사는 삶이 바로 주님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삶은 서너 가지 이유 때문에 살 만한 거고, 나머지는
들판의 비료 같은 거야.(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축성받는 새사제의 거룩한 손. 이 손으로 할 일이 많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
유대인 교육학자들은 “신은 인간에게 삼천 가지의 재능을
지니고 태어나게 한다.”고 합니다. 아무런 재능 없이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재능을 미래에 어떻게
꽃피우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미래를 두려워한다면 재능을
한 가지도 꽃피우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잘 생각해보면, 지금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사람들은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는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미래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신의 재능을 절대로 펼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주님께서 만들어주신 자기 자신을 믿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숨어 있는 재능까지도 찾아서 쓰게 됩니다.
어쩌면 삼천 가지 이상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내가 아닐까요?
단지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 재능들이
하나둘씩 숨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 재능들을 찾아보시면
어떨까요? 나를 위해 배려하신 주님의 사랑을 분명히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수도회] 오늘의 순교
2013년 다해 7월7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마태 10,17-22
<오늘의 순교>
언젠가 그리스도교가 우리나라 땅에 도입되는 과정을 같이
공부하던 형제들에게 설명했었는데, 다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깜짝 놀랐습니다. 가만히 따져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유래가 드물게 우리 한국 교회는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연구하면서 꽃을 피워나갔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교가 우리나라에 정착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수차례에 걸친 대대적 박해가 있었고, 그 박해를 꿋꿋이 이겨낸
순교자들의 용기 있는 증거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순교라는 말을 떼어놓고 우리 한국 교회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잘 실감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모두는
자랑스러운 순교자들의 후손입니다. 우리의 피 안에는 순교자들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순교 영성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토록 큰 은총이요 영예인 이 순교영성을 어떻게 우리
일상 안에서 실현시켜나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주변을 둘러보면 그 옛날 신유박해나 기해박해 때처럼
순교할 기회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 어떤 제약도 없이 너무나
자유롭고 떳떳하게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다는 것 참으로 큰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피와 땀을 흘리고
목숨을 바쳐 신앙의 토양을 일궈낸 우리 신앙의 선조들
덕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지금 우리 시대는 그 옛날 우리
순교자들이 지니셨던 바로 그 순교 영성을 간절히 요구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와 영성의 결핍의 결과인 다양한 형태의 소외와
불평등, 불의와 차별이 만연하는 이 시대는 우리 교회가 희생과
헌신을 통한 순교의 영성을 온 몸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대 꽃다운 나이의 사제, 거의 새 사제나 다를 바 없는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순교를 생각합니다. 때로 너무 아깝다는 생각도
많이 듭니다. 어찌 그리 시대를 잘못 타고 나셨을까, 하는 측은한
마음도 앞섭니다. 한국인 첫 사제로서 좀 더 연명하면서
한국교회의 기틀을 다지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봅니다.
그러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순교의 기회가 왔을 때 결코
단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당당하게 용감하게 자신에게
닥쳐온 영광스런 기회를 뒤로 연기하지 않고 즉석에서
수용했습니다.
이런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죽음이 무의미한 죽음이었을까요?
우리 모두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장 고결한 죽음,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죽음으로 다들 평가하며 칭송합니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은 제한된 시간 안에 서 있으면서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인류 모두는 단
한명의 예외도 없이 죽음 앞에 섰고 죽음을 넘어갔습니다. 따지고
보니 죽음이 있다는 것, 여간 큰 은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음 앞에서 겸손해집니다. 겸손 앞에서 본래의
자신을, 진정한 ‘나’를 찾습니다. 결국 죽음은 무의미한 인간의
삶을 의미 있는 삶으로 바꿉니다. 결국 인간은 죽음 앞에서
비본질적인 요소들을 떨치며 하느님께로 회심합니다.
따지고 보니 이렇게 중요하고 의미로 충만한 죽음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는 정말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냥
애완용 동물처럼 죽을 것인가? 화초가 시들어 말라죽듯이 죽을
것인가? 아니면 정말 의미 있고 보람되게 죽을 것인가? 그렇다면
의미 있는 죽음이란 과연 어떤 죽음일까?
가장 의미 있는 죽음은 아무래도 하느님을 위한 죽음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죽음처럼
말입니다.
오늘 내 삶의 자리에서 순교영성을 실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각해봅니다. 대단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특별한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매일 우리가 겪는 작은 불편들을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기쁘게, 기꺼이 수용하는 일이 아닐까요? 견디기 힘든 고통이나
십가가가 다가올 때 순교하는 마음으로 견뎌내는 일이 아닐까요?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기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축일
2013년 다해 7월7일 연중 제14주일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를 특별히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태어나신 ‘솔뫼’와 순교하신 ‘새남터’ 그리고 묻히신 ‘미리내’는
많은 사람들이 순례하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축일을 지내면서 성지순례를 한번 다녀오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서양의 철학과 신학을 배우셨습니다. 당시
세계에 대한 탁월한 안목과 판단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김대건 신부님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달콤한 유혹을
받았습니다. 파격적인 대우와 높은 자리를 약속하는 관리의
말은 어쩌면 참을 수 없는 유혹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잠시의 편안함과 육신의 자유보다는
영원한 삶과 그 영원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참된 신앙을
선택하였고 그래서 오늘 우리 한국 천주교회 성직자의 수호성인이
되셨고 전 세계 가톨릭교회가 존경하는 성인이 되셨으며 천국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저는 부모님께 많은 것들을 받았습니다. 어머님의 체질과
아버님의 성격을 닮았으면 좋았을 텐데 저는 아버님의 체질과
어머님의 성격을 닮았습니다. 아버님은 세상을 바라보는 식견이
뛰어나셨습니다. 어떤 사건의 의미와 배경을 정확하게
분석하셨습니다. 어머님은 건강한 치아를 지니셨고, 검은 머리를
간직하셨고, 혈압도 정상이셨습니다. 아버님은 치아가 좋지를
않았고, 머리도 젊으신 나이에 희게 변하셨고, 혈압도 높았습니다.
어머님은 세상을 명철하게 분석하기 보다는 부드럽게 사셨습니다.
예전에는 아버님의 체질을 닮고, 어머님의 성격을 닮은 것이
불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제 생활을 하면서 부드러운
어머님의 성격을 닮은 것이 도움이 될 때가 많습니다. 조금 부족한
저를 도와주려는 분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판단하고,
분석하고, 결정하는 것보다는 그저 조용히 들어 주는 것이 문제를
더 쉽게 해결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혈압이 있기에 더욱 건강에
신경을 쓰면서 살았고, 담배도 끊었습니다. 하얗게 변한
머리카락을 염색하고 있지만 언젠가 그렇게 하얀 머리카락으로
사는 것도 멋있을 것 같습니다. 치아가 좋지 않기에 자주 치과를
다녔고, 아직은 상한 이는 하나도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주변을 보면 모든 것을 다 갖춘 완벽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재산이 많은 사람은 그 재산 때문에 고독하기도 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을 과신하다 큰 병으로 병원에 가기도 합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듣지 못하기도
합니다. 재산은 별로 없지만 가족들과 웃음꽃을 피우며 사는
분도 있습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분이 사제가 되어서 장애인들을 위한 사목을 하기도 합니다.
배움이 크지 않지만 매일 새벽미사에 참례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세상의 큰 지혜를 가진 사람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가끔씩 신자들과 어려움을 겪는 신부님들을 봅니다. 대부분은
앞에 말씀 드린 원칙들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있었던 권위는 ‘힘, 재산, 능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권위는 ‘봉사, 희생, 사랑’에서 나와야 합니다. 옛말에 “형만 한
아우가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한국 교회의
성직자들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선배 사제들의
삶을 대할 때 늘 부끄러움이 죄송한 마음이 앞섭니다. 그분들의
깊은 영성, 사목에 대한 열정, 복음 선포에 대한 투신, 교회에
대한 사랑을 저는 도저히 쫓아갈 수 없습니다. 특히 한국 교회
최초의 사제이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삶을 대할 때,
저는 그분의 그림자도 밟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 교우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부님들은 결혼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직업으로 치면 정말
좋은 직업입니다. 존경 받지요, 먹고 살 걱정 하지 않지요,
여행도 편하게 다니지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 신자들의 눈에 사제들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
지는지 생각을 했습니다. 단적이 예이지만, 사제들이 겸손하지
못했음을 반성합니다. 사제들이 가난하게 살지 못했음을
반성합니다. 사제들이 자신들의 직무에 헌신하지 못했음을
반성합니다. 순교자들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마음과
행동이 늘 같았습니다. 그래서 목숨까지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신앙은 나의 삶은 어떠한가? 돌아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편안하고 쉬운 길보다는 어렵고 힘든 길
그러나 보람되고 가치 있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길은 때로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줍니다.
하지만 그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고 그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키워주고 그러한 끈기는 영원한 삶을
갈망하는 희망을 낳습니다. 또한 그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께서 걸어가신 신앙의 길, 희생의 길,
순교의 길을 끝까지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내가 아닌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것이
복음입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 다해 7월7일 연중14주일 복음묵상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루카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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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72명의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양들 같다고 하셨다.
이리와 양의 관계는 ‘싸움이라는 말이 허락되는 관계’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먹고 먹히는 관계’이다.
그런 곳으로 양들과 같은 제자들을 보내신다고 한다.
무슨 의미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또한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 하신다.
이 말씀이 전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세상의 악과 부딪히고 싸워야 할 상황이 주어졌을 때, 스스로의
힘을 과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스스로의 능력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말씀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옳음을 위한 용기와 하느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믿음이다.
따라서 시작도 과정도 끝도 기도가 절대적이다.
돈주머니와 여행보따리와 신발을 지니고 말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상의 기준, 세상의 방법에 의지하지 말고 하느님께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하느님께서는 옳음을 위해 사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방법이 아닌
당신의 방법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만일 사목자가 자신의 얄팍한 능력이나 재주가 중심이 된 사목을
꿈꾸고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실패한다.
교만하지 말고 자신은 하느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겸손한
마음을 지니라는 메시지가 들어있음을 이해해야만 한다.
길에서 아무에게 인사하지 말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자신의 생각보다 하느님의 뜻에 따르라는 말씀이다.
무엇이 가장 시급한 것인지를 알고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이다.
악마는 교활하고 잔인하다. 그리고 똑똑하다.
쓰러뜨리려는데 주저함이 없고 폭력적이다.
우리의 능력으로 상대할 존재가 아니다.
양이 이리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이리보다 강한 힘이 양을
지켜 주어야만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주님은 참 종교로 세상 사람을 구원
2013년 다해 7월7일 연중 제14주일
사람을 생물학적인 고등 동물이라고만 생각하면 인간설명의 끝인가.
더 나아가 영물이며 혼의 가치까지 생각하는 게 인간설명의 끝인가.
이 두 관점에서 전자는 동물영역, 후자는 영혼영역의 존재라 봅니다.
동물영역의 인간들은 보고 듣고 감각하며 사는 고등동물일 뿐입니다.
인간이라면 근본적(宗)으로 배워야할(敎) 것이라는 종교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참 종교로 세상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시급성을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기타]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2013년 다해 7월7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김대건 신부님에 관한 글 서두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1836년 열여섯 살 때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최양업 토마스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그 이듬해 마카오에 도착해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라는 내용인데요. 그 가운데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라는 글을 읽으면서 조규만 주교님이
신학교에 어떻게 들어가게 되었는지.. 평화방송에서 얘기하신
게 떠올랐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시골 공소에 외국 신부님이 오셔서, 아이들 교리를 가르치고,
어느 날 찰고를 하신 거 같은데요. 외국 신부님이 다른 아이들에게는
이런저런 질문을 했던 거 같은데, 주교님에게는 한 마디만 하셨다고
합니다. “너 신학교 가~” 신부님이 뭐라고 했을까요? “네~” 라고
대답하고 나와서 놀았다고 하는데요. 그 분위기가 지금과는 다른
거 같아서 놀랍기도 하고 특별하기도 했던 거 같습니다. 신부님이
신학교 가라는 한 마디에 ‘네..’ 할 수 있는 분위기. 지금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인 거 같기도 합니다.
어제 몬시뇰님이 오셔서 복사 안드레아에게 “너 신부될 마음있어?”
하고 물어보니, 놀랍게도 “네~” 라고 대답합니다. 제가 물어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그런 마음이 있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신학교에 관심도 없는 루치오에게 ‘너 신학교 가~’ 하면
어떨까요? 아마 황당한 표정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을까.. 합니다. 지금의 분위기는 ‘순종’ 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기 보다는 이런저런 이유를 늘어놓으며 어떻게든 빠져나가려는
분위기가 더 많이 느껴지는 거 같은데요.
우리가 배우기를 피하는 그 순종이라는 단어를 거치지 않고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도, 또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도 나갈 수
없는 거 같습니다. 그분께 대한 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먼저
필요한 것이 ‘순종’ 일 거 같습니다. 왜냐하면 순종으로 나아가야
그분이 나에게 얼마나 큰 선물을 마련해 두셨는지, 또 바른 길로
이끄시는지 알고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독서에서 만나게 되는 아브라함을 보면 어떻습니까? 그가
체험한 하느님은 야훼이레 하느님이었습니다. 살 곳을 마련해
주시고, 먹여 주시고, 어려움을 헤쳐 나가게 도와주시고, 손수
번제물을 마련해 주신 하느님을 체험하는데, 그 모든 체험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떠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아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지 않았다면
아무런 일도 체험하지 못했을 겁니다.
성모님도 마찬가지죠. 구세주를 낳으리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까지 내어
주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그분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랐고, 하느님이
인간을 얼마나 생각하고 돌보시고 사랑하는지 느끼고 깨달았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인 거 같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가진
것을 나눌 때도 있었고, 빌려줄 때도 있었고, 화해를 시도한 일도
있었고, 냉담자들에 대한 열정을 품게 될 때도 있었고, 누군가를
찾아가 볼 때도 있었습니다. 또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인사를 시작한 일도 있었고, 자존심을 꺾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로부터 돌아서고 싶을 때도.. 성령께서 이루어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하는 말씀들이 저의 등을 떠 밀어 다시 공동체에
대한 성실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는데요.
지금은 그분의 말씀에 등 떠밀려 겨우겨우 살아가는 정도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이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
거구나..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더 좋은 것을 마련해 두셨구나..
나에게 더 많은 풍요로움을 주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거 같습니다. 그런 과정과 열매들이 그분의 사랑을 조금씩
알게 해 주고, 그분을 위해 살고 싶은 열정도 크게 만들어 주는
거 같습니다.
이거저거 따지고 계산하기보다 먼저 순종하는 법을 배웁시다.
그러면 그분의 사랑도 알게 되고,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되면
가까운 이웃도 사랑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부부의 세례명이 안토니아, 안토니오 인데,
끝자만 다른 게 어떤 분에게 신기했나보다..
세례명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시며 이러신다.
“아~ 안토니..아! 안토니..오!
아! 오! 아! 오!”
- 밤송이 신부님을 묵상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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