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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기/북한단군릉의 주인은 5대 구을단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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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민족주의 |
날짜 : 08.09.09 11:49:17 |
조회 : 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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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문헌상으로 북한단군릉은 정확히 단군조선의 5대 구을단군이 확실하다. 그러나, 이러한 문헌적 사실을 과학적 방법으로 명확히 입증시켜주는 일 또한 역사연구의 사명이다. 역사연구는 소모적인 논쟁만 불러일으키는 차원에서 주관적 관념이 개입될 수 있는 하나의 연구방법만으로는 역사적 진실이 명확히 규명될 수 없고, 누구나가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 인식을 전제로 문헌학-고고학-유전학의 상호 유기체적인 방법을 통하여 비로소 그 역사적 진실을 규명할 수 있다.
북한의 단군릉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5세 단군 구을(丘乙)(16년간 재위) [한단고기]첫해(壬戌 - BC2099)에 명을 내려 태백산(太白山)에 단을 쌓게 하고 사자를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2년 5월에 황충(蝗 )이 크게 번져 밭과 들을 덮었다. 4년에 처음으로 갑자(甲子)를 써서 역서(曆書)를 만들었다. 8년에 신독인(身毒人)(20)이 표류하여 동해의 해변에 이르었다. 16년에 친히 장당경(藏唐京)에 행차하여 삼신단(三神壇)을 쌓고 환화(桓花)(21)를 많이 심었다. 7월에 임금이 남쪽으로 순수하여 풍류강(風流江)을 거쳐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으니 얼마 안되어 세상을 떴다. 대박산(大博山)(22)에 장사 지내고 우가(牛加)의 달문이 뽑혀서 대통을 이어 들어왔다.
- 20) 신독인(身毒人) : 인도(印度)사람.
- 21) 환화(桓花) : 무궁화
- 22) 최근 북한 강동군(江東郡)에서 발굴한 대박산(大朴山) 단군릉(檀君陵)에 대한 뒷받침으로서 이보다 정확한 기록은 없을 것이다. 강동군의 대박산에 단군릉이 있다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 또한 강동현의 옛군명이 바로 송양군(松壤郡)이었다는 것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풍류강은 대동강의 북지인 비류강으로 보아 무난할 것이다.
단군릉 유골 어떻게 측정했나? |
[자료] 과학이 만드는 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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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릉에서 발견된 유골(남자뼈(좌), 여자뼈(우) | 1993년 10월 북한은 평양시 강동군 강동읍 대박산 동남쪽 경사면 기슭에 있는 단군릉으로 알려진 무덤에서 단군과 부인의 뼈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북한측의 주장에 의하면, 단군릉은 석조로 된 고구려 양식의 무덤으로 현실은 동서로 273센티미터, 남북으로 276센티미터이며 바닥에서 1단까지의 천장의 높이는 160센티미터이다. 무덤칸의 바닥에는 3개의 관대가 남북 방향으로 놓여 있고 그 위에 뚜껑돌을 덮었다.
단군의 무덤이 고구려 무덤 양식으로 되어 있는 것은 고구려 때 무덤을 개축했기 때문으로 추정했다. 고구려에서는 시조인 동명왕을 단군의 아들로 여겼기 때문에 단군릉을 고구려식으로 개축했다는 것이다. 특히 무덤 앞에서 고려시대의 유약을 바른 기와조각도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고려시대에 단군릉 앞에 제당이 있어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추정했다.
일제 강점기에 도굴된 무덤은 특별한 유물은 나오지 않았으나 부장품으로 금동관 앞면의 세움장식과 돌림대 조각이 각각 1개, 금동뼈의 패쪽이 1개, 토기조각과 관못 6개가 수습되었다. 또한 남녀 두 사람분의 86개에 달하는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넓적다리뼈, 손뼈, 갈비뼈 외에 팔다리뼈와 골반뼈도 나왔다. 그 중 42개가 단군의 뼈이고 12개는 여자의 뼈이며 나머지 32개는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유골을 검사한 결과 5026년 전의 (2008년 기준)시신이라는 점이다. 연대 측정의 정밀을 기하기 위해 두 연구기관이 전자상자성공명 연대측정방법을 사용하여 6개월에 걸쳐 각각 54회의 측정을 했다고 발표했다. 이 경우의 측정 연대는 무덤에 묻힌 사람의 출생 연대이다.
단군의 키를 다리뼈로 추정하면 171.3센티미터, 팔뼈로 추정하면 173.2센티미터로 최소한 키가 170센티미터 이상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 키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체구였으며, 사망할 때의 나이는 70세 가량이었다고 했다. 또 단군은 허리가 곧바른 체형의 소유자였으며 같이 묻힌 부인은 젊은 여성이라고 했다. |
[고고학에서 사용하는 연대측정방법] 현재까지 알려진 연대측정방법에는 탄소연대측정법, 열형광법, 아미노산정량법, 핵분열비적법, 전자상자성공명법 등 10여가지가 있다. 가장 유명한 탄소연대측정법은 1960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리비가 제안한 c14탄소연대측정법이다. 리비라는 과학자가 개발한 C14 탄소연대측정법은 고고학과 지질학에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나무, 석탄, 천, 뼈, 조개껍질, 동식물의 조직 등 일단 한 번 살아 있었던 물질이라면 무엇이든 이 기술에 의해 처리될 수 있다. 고대 인류의 주거지나 무덤, 지질학적 암석층, 그리고 다른 많은 역사적, 고고학적, 지질학적 가치를 가진 항목들의 연대도 결정될 수 있다. 즉,리비가 착안한 원리는 간단하다. 생물이 죽으면 더 이상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지 못한다. 따라서 죽은 동물, 식물, 박테리아 안의 방사성 탄소인 C14는 붕괴되어 그 양이 점점 줄어든다. 반면 C12 또는 C13은 비방사성이므로 유기체가 죽어도 그대로 남아 있다. 다시 말하면 C14 대 C12, C13 비율은 유기체가 죽은 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감소하므로 일단 한번 살아 있던 물질이라면 이 비율을 측정하여 생명체가 언제 죽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료를 그대로 측정기에 넣는다고 곧바로 연대가 계산되어 나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측정시료는 대부분 많은 불순물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땅속에서 출토된 유물 등에는 토양에 함유되어 있는 탄소가 스며들어 있기도 하고 고문서에는 얼룩이나 손때 등이 묻어 있다. 불순물에 새로운 탄소가 포함된 시료를 그대로 측정하면 그 연대치의 오차가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결론적으로 정확한 연대측정을 하려면 다양한 시료로부터 순수한 탄소를 끄집어내는 고도의 정밀 작업을 먼저 해야만 한다.
C14 탄소연대측정법은 고고학 분야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유물들의 연대를 측정할 수 있으므로 매우 유효한 방법이지만 이 방법에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다. 즉 1회 측정에 수 그램의 탄소 시료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연대를 구하고자 하는 문화재인 경우 매우 귀중한 것이 많아서 측정을 위해 수 그램이나 되는 탄소 시료를 떼어 낸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C14탄소연대측정법의 장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귀중한 유물들을 훼손해야 하는 문제점 때문에 학자들이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획기적인 장비가 개발되었다. 1970년대 후반에 등장한 가속기질량분석기이다. 가속기질량분석기를 사용하면 불과 0.001그램의 탄소 시료로도 정확한 연대측정을 할 수 있다. 즉 귀중한 각종 유물로부터 떼어내야 하는 양이 과거에 비해 약 1000분의 1로도 가능해진 것이다. 이에 비해 전자상자성공명법은 1980년경부터 고고학과 지질학, 지리학 분야에 적용된 새로운 측정방법이다. 우주선을 포함한 자연방사성원소들에서 나오는 방사선은 물질에 결함을 만든다. 이 결함의 양이 방사선을 맞은 시간에 비례하기 때문에 연대를 측정할 수 있다.전자상자성공명법은 생물과 무생물의 연대를 모두 측정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단군릉에서 발굴된 유골에 흔히 사용되는 탄소연대측정법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북한측은 전자상자성공명법이 탄소연대측정법보다 시료가 훨씬 적게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발표했다. 수 g으로 가능한 연대 측정에 수 kg을 사용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북한이 전자상자성공명법을 수십차례 실험했다고는 발표했지만, 공개적으로 자료를 제시하지는 않고 있어 과학적으로 100% 신뢰성을 주지 못하고 있다.따라서 북한은 이러한 의심과 회의론을 일축 시키기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남북공통 조사단을 구성하여, 객관적이며 공개적으로 과학적으로 단군릉으로 추정되는 그곳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한단고기]1세 단군(檀君)(1) 왕검(王儉)(2) 고기에 말하기를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오 어머니는 웅씨(熊氏)(3)의 왕녀이다. 신묘(辛卯)년 5월 2일 인시(寅時)에 단수(檀樹) 밑에서 태어났다. 나이 14살에 웅씨의 왕이 그 신성함을 듣고 뽑아 올려 비왕(裨王)을 삼고 대읍(大邑)의 국사를 대행하게 하였다.
개천(開天 - 戊辰 BC 2333년) 1565년 10월 3일에 이르러 오가(五加)(4)의 우두머리로서 무리 800명을 거느리고 단목(檀木)있는 곳에 왔다. 천제의 화신으로 제(帝)라 하니 이분이 단군왕검(檀君王儉)이다. 신시(神市)의 옛 법을 다시 회복하며(5) 도읍을 아사달(阿斯達)(6)에 세우고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1) 단군(檀君) : '단군'이란 '박달임금'의 번역이다. 대저 신시씨가 이미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왔고 환검신인이 박달나무 아래에서 임금의 자리에 올랐기에 '단(檀)'으로 나라이름을 삼게 된 것이니, '단군'이라 함은 박달나라의 임금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말에 '단(檀)'을 '박달' 혹은 '백달'이라고 하며 '군(君)'을 '임금'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한자가 없었던 까닭에 단지 '백달임금'이라고 하였던 것을 뒤에 역사를 서술하던 자가 번역하여 '檀君(백달임금)'이라 하였고, 다시 후세에 전해지며 단지 '檀君'이라는 글자만 기록하게 되었기에 '檀君'이 '백달임금'의 번역인 줄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규원사화
- 2) 왕검(王儉) : 대감(大監)이라는 뜻으로 신시(神市)시대 한 고을을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 3) 웅씨(熊氏) : 사아라환웅(배달나라 13세 환웅)초에 웅녀군의 후손을 여(黎)라 하였는데 처음으로 단허(檀墟)에 봉(封)함을 받아 왕검(王儉)이 되었다.
- 4) 오가(五加) : 우가(牛加), 마가(馬加), 구가(狗加), 저가( 加), 양가(羊加).
- 5) 본래 환웅의 신시는 길림시였는데 치우(蚩尤)가 산동성으로 천도하여 청구국이라고 하였다. 반면에 신시는 배달국으로 남았는데 신시의 원로들이 단군을 옹립하니 단군은 신시의 규칙을 도로 찾았다는 것이다
- 6) 아사달(阿斯達) : 태백산 서남쪽 우수하(牛首河)의 벌판에 도읍을 세워 '임금성(壬儉城)'이라 하니, 지금의 만주 길림 땅에 소밀성(蘇密城)이 있어 속말강(涑沫江)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땅이다. 속말강은 또한 소밀하(蘇密河)라고도 일컬어지며 곧 옛날의 속말수(粟末水)이다. 청평이 말하기를 [속말수(粟末水)의 북쪽에 발해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의 땅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단군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한 임금성으로 곧 평양이다.'임금성'이란 것은 옛날 말로 바로 '서울'이라는 의미이다. '평양'의 의미는 비록 상세하진 않지만 이 또한 반드시 '도읍한 읍성'이란 뜻으로서 신라의 '서라벌'이나 백제의 '위례'와 같을 것이다.《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기를 [고려가 평양성에서 다스렸는데 바로 왕험성(王險城)이다]라고 하였으며,《사기》와《한서》및《통전(通典)》에도 모두 '王險城'이란 글자가 있으니 이 또한 '儉'자가 잘못쓰여진 것이다. - 규원사화
- 단군 왕검이 즉위한 곳으로서 길림 평양, 또는 길림시 아사달로서 오늘날의 길림시를 가리킨다. 길림시 동편의 동단산성(東團山城)이나 용담산성(龍潭山城), 서단산성(西團山城)이 그 유적지이다.
단군이 생명과 곡식과 병사와 형벌과 질병과 선·악과 및 지방의 일 등을 주관하는 여러 관직을 설치하였다. 아들 부루(夫婁)는 호가(虎加)로 삼아 모든 가(加)들을 통괄하게 하였으며, 신지씨(즉 옛날 신지씨의 후손이다. 다음의 모든 것도 이와 같다)는 마가(馬加)로 삼아 생명을 주관하게 하고, 고시씨는 우가(牛加)로 삼아 곡식을 주관하게 하고, 치우씨는 웅가(熊加)로 삼아 병사를 주관하게 하고, 둘째아들 부소(夫蘇)는 응가(鷹加)로 삼아 형벌을 주관하게 하고, 세째 아들 부우(夫虞)는 노가(鷺加)로 삼아 질병을 주관하게 하고, 주인씨는 학가(鶴加)로 삼아 선악을 주관하게 하고, 여수기(余守己)는 구가(狗加)로 삼아 모든 고을을 나누어 관리하게 하였다. 이를 일컬어 '단군팔가(檀君八加)'라 하고는 흰소를 잡아 태백산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7).
처음 신시씨의 말기에 치우씨의 형제가 비록 탁록으로부터 물러나서 돌아왔으나 동방의 사람으로 회대(淮岱) 지역을 차지하고 생활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한나라 땅의 백성들과 교류하며 섞여 살게 되니,《상서(尙書)》에 이른바 우이( 夷)·래이(萊夷)·회이(淮夷)·도이(島夷) (8)등이 모두 그들이다.
7) 단군세기에는 여러 관직에 대하여 이렇게 적혀있다.
- "여기에서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토지를 개척하며 궁실을 지어 일으키고 신지(臣智)에게 문자(文字)를 만들게 하고, 기성(奇省)에게 의약을 베풀게 하고, 나을(那乙)에게 판적(版籍)·희전(羲典)·괘서(卦筮)를 관리하게 하 고 우(尤)에게 병마를 맡게하였다. 비서갑(斐西岬)의 하백(河伯)의 딸을 맞아드려 황후로 삼고 누에를 치게 하 니, 지극히 순박한 다스림이 천하에 흡족히 퍼졌다."
- 8) 도이(島夷) : 일정한 지역을 차지하였던 회이(淮夷) 또는 래이(萊夷)와는 달리 도이(島夷)는 단지 '뭇 도서(島嶼)에 흩어져 살아가는, 또는 일부 해안지역으로 올라와 정착한 이족(夷族)'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이 당시만해도 회이가 차지하고 있던 지역의 남쪽인 장강의 하류 남부지역의 이족들을 '도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면, 아울러 발해 연안의 뭇 섬들에 살다가 황하의 하류 북부지역에 정착한 이족 또한 '도이'라 하였다. 그리고 심지어《명사(明史)》<일본전(日本傳)>에서는 일본을 '도이'라고 지칭하고 있기까지하다.
나라를 다스린지 40여 년만에 설유( 兪)의 난이 있었다. 설유는 험윤의 족속으로 홍수를 만났을 때는 요행히 그 해를 면하더니, 물과 흙이 겨우 안정을 되찾은 뒤 마을과 고을이 쓸쓸해진 것을 보고는 이내 그 틈을 타고 동쪽으로 침략해 오니 그 기세가 자못 맹렬하였는데, 곧 부여로 하여금 안팎의 모든 병사를 모아 그를 토벌하여 평정케 하였다(9). 이에 부여에게 북방의 땅을 더하여 봉하고 우수홀(牛首忽)(즉 먼저 번의 평양이다)에 자리잡게 하였으며, 부루로 하여금 임검성(壬儉城)에 거처하게 하고, 부소에게는 낙랑홀을 다스리게 하고, 부우는 당장경을 살펴보게 하였으며, 고시씨는 그 봉토를 고쳐 남쪽의 땅에 봉하였다.
당시에 단군의 교화는 사방에 두루 미쳐 북으로는 대황에 다다르고 서쪽은 설유(10)를 거느리며, 남쪽으로 회대의 땅에 이르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닿으니, 가르침이 퍼져 나가 물들어 감은 위대하고도 넓은 것이었다. 이에 천하의 땅을 구분하여 나누고 공훈이 있는 친족에게 주어 제후로 삼았다. 치우씨(蚩尤氏)의 후손에게는 남서쪽의 땅에 봉하니,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남국(藍國)이라 이름하고 엄려홀(奄慮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신지씨(神誌氏)의 후손에게는 북동쪽의 땅에 봉하니, 물길이 수려하고 산악이 장엄하며 바람의 기운은 굳세고 웅장하기에 속진국( 國) 또는 숙신(肅愼)이라 일컬었으니, 방언으로 호걸 장엄함을 말하며, 숙신홀(肅愼忽)에서 다스리게 하였다. 고시씨의 후손에게는 남동쪽의 땅에 봉하니, 산하가 빼어나게 수려하며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靑丘國)이라 이름하고 낙랑홀(樂浪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주인씨의 후손은 개마국(蓋馬國)에 봉하고, 여수기는 예(濊)의 임금이 되게 하였으며, 부소와 부우 및 작은 아들인 부여는 모두 나라의 서쪽 땅에 봉하니, 구려(句麗)와 진번(眞番) 및 부여(夫餘) 등의 여러 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그 후에 부루가 또 동쪽에서 온 세 사람을 각지에 봉했는데, 후세의 옥저(沃沮)와 졸본(卒本) 및 비류(沸流) 등의 명칭은 모두 이 봉함을 받은 나라의 이름에서 생겨났다. 단씨(檀氏)의 시대를 통하여 무릇 큰 나라는 아홉이요 작은 나라는 열둘로서, 나누어 천하의 모든 고을을 다스렸는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9) 설유의 침범과 부여가 이들을 토벌한 연대를《대동사강(大東史綱)》과《조선세가보(朝鮮世家譜)》에서는 단기 59년 병인년(B.C.2275)이라 하였다. 그러나《대동사강》에 의하면 단기 59년은 부여가 부소 및 부우 등과 함께 '삼랑성'을 축조하던 해로 되어 있으므로 맞지 않다. 윗글에서 단기 37년에 큰 홍수를 만나 평양이 침몰되었으며 그 뒤 부루가 물과 흙을 정리함에 주리(州里)가 쓸쓸해진 틈을 타고 설유가 침입하였다고 하였으니, 큰 홍수로부터 22년이 지난 59년의 일로는 볼 수가 없고 단지 몇 년이 지난 40여 년으로 기록한《규원사화》의 연대가 합리적이다.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
10) 설유 : 단군조선 시대에 지금의 내몽고 지방에서 유목을 하던 종족. 하(夏)나라 때는 훈육( )이라 불리었고 은(殷)나라 때는 험윤( )이라 불리었다. 진(秦)·한(漢) 때는 흉노(匈奴)가 된다.
10년만에 남이(南夷)의 환난이 있었는데, 바로 갑비고차(11) 남쪽의 이인(夷人)들이다. 이에 부여를 파견하여 병사를 인솔해 이를 진정시켰다.
50년(丁巳)에 홍수가 범람하여 백성들이 쉴 수가 없으므로 임금은 풍백(風伯) 팽우에게 치수를 명하여 큰 산과 물을 안정시키니 백성들을 편히 살게 하였다. 우수주(牛首州)에 그 비석이 있다. 51년에 임금이 운사(雲師)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혈구(穴口-강화도)에 삼랑성(三郞城)을 쌓고 제천단을 마리산(摩離山)에 쌓게 하니 지금의 참성단(塹城壇)(12)이 이것이다.
67년 임금은 태자 부루(扶婁)를 보내어 우사공(虞司空)과 도산(塗山)(13)에서 만나게 하였다. 태자로 하여금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법을 전하게 하였으며, 나라의 경계를 정하게 하였는데 유주(幽州)·영주(營州) 두 고을을 우리에게 속하게 하였다. 회대(淮垈)의 제후를 정하여 분조(分朝)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는데 우순(虞舜)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천하의 땅을 구획(區劃)하여 삼한(三韓)(14)과 더불어 땅을 나누어 다스렸는데 진한(辰韓)은 천왕이 스스로 다스렸다. 삼한은 모두 5가 64족이었다.
11) 갑비고차 : 지금의 강화도를 말한다. 12) 국내 사서에 보이는 삼랑성과 참성단에 관한 기록.
- * [檀紀 60年 丁卯(B.C.2274) ∼ 62年 己巳(B.C.2272) 條] 幸穴口摩尼山, 築壇祭天.…使三子築城, 於穴口傳燈山, 名曰三郞城.(혈구[강화도] 마니산에 행차하여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세 아들에게 혈구[강화도]의 전등산에 성을 쌓게 하고는 삼랑성이라 이름하였다.) 《동사년표》
- * 丙寅五十九年, 帝南巡至阿斯達, 封禪祭天. 至江華, 命三子築城於甲比古次[今江華傳燈山], 名三郞城, 又設祭天壇, 名塹星臺.(병인 59년 단제께서 남쪽으로 순행하며 아사달에 이르러 봉선의 의식을 행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강화에 이르러 세 아들에게 명하여 갑비고차[지금의 강화도 전등산]에 성을 쌓게 하여 삼랑성이라 이름하였으며 또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단을 설치하게 하고는 참성대라 이름하였다.) 《동사년표》
- *부소와 부우를 아울러 파견되어 갑비고차에 성을 쌓아 이로서 남쪽을 순행할 때를 대비하게 하니, 지금의 강화 삼랑성(三郞城)이 바로 그것이다. 마리산(摩利山)에는 또한 참성단(塹城壇)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단군이 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두악(頭嶽)이다. - 규원사화
- * 祭天壇, 在江華摩尼山. 檀君, 於穴口之海 摩尼之邱, 塹城爲壇, 名曰祭天壇. 壇, 十七尺而石累之, 方上圓下, 四方各六尺六寸, 下各十五尺而圍之. 或云: [摩尼, 江海之 . 地, 孤絶潔淨而 深, 神明之宅. 故立 祭上帝.] 又曰: [天好陰而地貴陽, 故爲壇必于水中之山, 方上下圓, 地天之義, 立焉.](제천단은 강화의 마니산에 있다. 단군께서 혈구의 바다이며 마니의 언덕에 성을 파고 단을 쌓아 제천단이라 이름하였다. 제단은 17척으로 돌을 쌓아 이루었는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글며 사방이 각 6척 6촌이고 아래는 각 15척으로 둘려져 있다. 혹은 이르기를 [마니는 강화의 모퉁이이다. 그 땅은 한적하고 깨끗하며 조용하고 깊어 신명이 자리하는 곳이다. 그 까닭에 제사를 지내는 터를 세워 상제께 제를 올리는 것이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하늘은 음을 좋아하고 땅은 양을 귀히 여기는 까닭에 제단을 이룰 때는 반드시 물 가운데 있는 산에 위치하게 하는 것이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글게 하는 것은 땅과 하늘의 뜻을 담아 세우는 것이다] 하였다.) 《신단실기》에 인용된《동사(東史)》와《수산집(修山集)》
- * 朝鮮仁祖十七年, 改修築.(조선 인조 17년에 개축하였다.) 《신단실기》에 인용된《문헌비고(文獻備考)》
- * 朝鮮肅宗二十六年五月, 改修築, 立碑爲記曰: [環東土數千里, 江都爲保障之重地, 環江都數百里, 摩尼爲望秩之名山. 山之西, 最高處, 累石爲臺, 卽所謂塹城壇也. 世傳, 檀君築而壇之, 爲祭天之所云. 顧, 年代 邈, 風磨雨 , 西北兩面, 太半頹 , 東偏 級, 亦多傾仄. 州之父老, 相與咨嗟歎 者久之. 不 , 居留, 來守是邦. 是年春, 因巡審之役, 試一登覽, 慨然有重修之意. 船頭浦別將金德夏, 傳燈寺摠攝僧愼默, 主其事, 改築之, 二旬而訖工. 噫! 興壞補缺, 不廢舊觀, 有官守者之所宜勉. 檀君生 唐堯之世, 實爲我東生民之祖, 壇之設, 又其 丘 祀之地, 而歷數千年, 爲遺民之所瞻敬, 則修完之擧, 烏可已乎! 愼默請記始末, 以目示後人, 書此以識之. [留守崔錫恒撰](조선 숙종 26년 5월에 고쳐 쌓고 비석을 세워 기록하여 이르기를 [동녘 땅 수천 리를 둘러보면 강도가 바로 보호하여 위해가 없도록 해야 하는 중요한 땅이며, 강도 수백 리를 둘러보면 마니가 바로 섶을 태우며 멀리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는 명산이다. 산의 서쪽 가장 높은 곳에 돌을 쌓아 단을 이루니 곧 참성단이라 일컫는 것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께서 그것을 쌓아 제단을 만들고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이라 한다. 되돌아보건대 연대는 아득하여 바람에 닳고 비에 씻겨 서쪽과 북쪽의 두 면은 태반이 헐어 무너지고 동쪽 가 편의 뜰 층계도 또한 많이 기울어졌다. 고을의 어른들이 서로 슬퍼하고 탄식한지 오래였다. 재주도 없는 내가 외람되게 이 지방의 유수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 해 봄에 순찰하며 살피던 중 한 번 올라가 보고는 개연히 거듭 수리할 뜻을 가지게 되었다. 선두포별장 김덕하와 전등사총섭승 신묵이 그 일을 주관하여 개축하니 20일만에 공사를 마쳤다. 오호라! 무너진 것을 일으키고 결손된 것을 보충하여 옛 모습이 폐기되지 않게 함은 관리되는 자로서 마땅히 힘써야 할 바이다. 하물며 단군께서는 요 임금과 같은 세대에 나셨으니 진실로 우리 동방 민족의 조상이며, 제단이 설치된 곳 또한 둥글게 에워 쌓인 언덕의 정결히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수천 년을 지내 오며 지금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우러러 공경을 받아 오는 곳이니 수리하여 보완하는 일을 어찌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 일의 시말을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게 하자고 신묵이 요청하니 이렇게 글을 써서 알리노라.) [유수 최석항 지음] 《신단실기》
- 13) 도산(塗山) : 절강성(浙江省) 소흥현(紹興縣) 서북쪽에 있다.
- 14) 삼한(三韓) : 진한(辰韓),변한(弁韓),마한(馬韓)
- 진한은 단군 왕검께서 아사달(阿斯達)에서 직접 통치하시었고 변한은 치우(蚩尤) 환웅의 후손 치두남(蚩頭男)으로 삼았는데 이는 대릉하(大凌河)를 중심으로 황하까지 다스리게 한 것이고, 마한은 웅씨의 족장인 웅백다(熊佰多)로 삼아 평안북도 영변(寧邊)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다스리게 하였다.
이 해 3월 15일에 임금이 봉정(蓬亭)에서 세상을 뜨니 교외 10리 되는 곳에 장사지냈다. 태자 부루(扶婁)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비왕(裨王)의 자리에 있은지 24년, 임금의 자리에 있은지 93년이니 수는 130세이다.
2세 단군 부루(扶婁)(58년간 재위) 첫해(辛丑 - BC2240)에 임금이 군사를 내어 유주(幽州)·영주(營州) 고을을 치고 그 우두머리를 쫓아버리고 동무(東武)·도라(道羅)등의 공로를 표하였다. 2년 임금이 소련(少連)·대련(大連)을 불러 나라 다스리는 도를 물었다, 3년 9월에 조서(詔書)를 내려 백성들은 머리를 땋아 머리를 덮으며 푸른 옷을 입게 하였다. 도량형을 통일하였다. 10년 4월 구정(邱井)을 정리하여 밭의 대장을 만들어 세금을 내게 하여 스스로 사사로운 이익이 없게 하였다. 12년 신지(神誌)의 귀기(貴己)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井圖)를 만들어 바쳤다. 58년 임금이 세상을 뜨니 이날 일식이 있었고, 만백성은 몹시 슬퍼하였다. 태자 가륵이 왕위에 올랐다. 3세 단군 가륵(45년간 재위) 첫해(己亥 - BC2182) 5월에 임금이 삼랑을보륵(三郞乙普勒)을 불러 신왕종전(神王倧佺)의 도를 물었다. 2년 이때에 풍속이 아직도 한결 같지 않아 방언이 서로 달라 상형으로 뜻을 나타낼 수 있는 진서(眞書)는 있었으나 열집만 있는 고을에서도 말이 통하지 않는 일이 많고 백리 되는 나라에서는 글자를 서로 해독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삼랑을보륵(三郞乙普勒)에게 명을 내려 정음 38자를 만들게 하니 이것이 가림토(加臨土)(15)이다.
- 15) 가림토(加臨土) : 가림은 가려낸다는 뜻으로 가림다문(加臨多文)이라고도 한다. 한글의 전신이다.
3년에 신지(神誌) 고설(高楔)에게 명을 내려 배달유기(倍達留記)를 편수하게 하였다. 6년에 열양(列陽)의 욕살(褥薩) 색정(索靖)에게 명을 내려 약수(弱水)(16)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가두었다가 뒤에 용서하여 그 땅을 봉(封)하니 이것이 흉노(凶奴)(17)의 조상이 되었다. 8년에 강거(康居)가 반란을 일으키니 임금이 이를 지백특(支伯特)에서 토벌하였다. 10년에 두지주(豆只州)의 예읍(濊邑)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餘守己)에게 명을 내려 그 우두머리 소시모리(素尸毛犁)의 목을 베었다. 이로부터 그 땅을 소시모리하고 했는데 지금은 음이 변해서 우수국(牛首國)이 되었다. 그 후손에 협야노(陜野奴)라는 자가 있었는데 해상으로 도망하여 3도(18)를 점령하고 참람하게도 천왕이라고 하였다. 37년에 하나라 왕이 덕을 잃어 그 신하 가운데 왕위를 넘보고 반역하는 자가 있으므로, 이내 식달(息達)로 하여금 남국(藍國)과 진번(眞蕃)의 백성들을 이끌고 가서 그를 정벌케 하니 나라의 위세가 더욱 빛났다(19). 45년 9월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오사구가 왕위에 올랐다.
- 16)약수(弱水) : 곤륜산(崑崙山)에서 흘러내리는 강. 부력(浮力)이 약하여 기러기의 털도 가라 앉는다고 한다.
- 17) 흉노(凶奴) : 곧 흉노(匈奴)이며, 지금 몽고 지방에서 살았다.
- 18) 3도 : 왜국(倭國), 일본을 말한다.
- 19)《후한서》<동이열전> : 夏后氏.太康失德, 夷人始畔. [太康, 啓之子也. 槃于游田, 十旬不反, 不恤人事, 爲 所逐也.] (하후씨 태강이 덕을 잃자 이인(夷人)들이 처음으로 배반하였다.[태강은 계(啓)의 아들이다. 사냥터에 머무르면 백일이 지나도록 돌아가지 않았으며 백성의 일에 신경을 쓰지 않다가 예( )에 의해 쫓겨났다.]) 태강은 하(夏) 제3세 임금이고 예에 의해 쫓겨난 그 19년은 B.C.2170년이며, 가륵 37년 즉 단기 164년에 해당한다.
4세 단군 오사구(烏斯丘)(38년간 재위) 첫해(甲申 - BC2137)에 임금의 아우 오사달(烏斯達)을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봉하였다. 혹 말하기를 지금의 몽고족이 그 후손이라고 한다. 겨울 10월에 북쪽으로 행차하였다가 태백산으로 돌아와서 삼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신령스러운 풀을 얻었다. 이것을 인삼(人蔘)이라 하고 또는 선약이라고도 한다. 5년에 둥글고 구멍 뚫린 패전(貝錢)을 만들었다. 가을 8월에 하(夏)나라 사람이 화서 방물을 바치고 신서를 구해 가지고 갔다. 10월에 조야(朝野)의 별기(別記)를 돌에싸서 백성들에게 공포하였다. 7년에 조선소(造船所)를 살수(薩水) 상류에 세웠다. 19년에 하나라 왕 상(相)이 덕을 잃어 임금이 식달(息達)에게 명을 내려 남(藍)·진(眞)·변(弁), 세 부(部)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니 천하가 이 소문을 듣고 모두 항복하였다. 38년 6월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양가(羊加)의 구을이 왕위에 올랐다. 5세 단군 구을(丘乙)(16년간 재위) 첫해(壬戌 - BC2099)에 명을 내려 태백산(太白山)에 단을 쌓게 하고 사자를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2년 5월에 황충(蝗 )이 크게 번져 밭과 들을 덮었다. 4년에 처음으로 갑자(甲子)를 써서 역서(曆書)를 만들었다. 8년에 신독인(身毒人)(20)이 표류하여 동해의 해변에 이르었다. 16년에 친히 장당경(藏唐京)에 행차하여 삼신단(三神壇)을 쌓고 환화(桓花)(21)를 많이 심었다. 7월에 임금이 남쪽으로 순수하여 풍류강(風流江)을 거쳐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으니 얼마 안되어 세상을 떴다. 대박산(大博山)(22)에 장사 지내고 우가(牛加)의 달문이 뽑혀서 대통을 이어 들어왔다.
- 20) 신독인(身毒人) : 인도(印度)사람.
- 21) 환화(桓花) : 무궁화
- 22) 최근 북한 강동군(江東郡)에서 발굴한 대박산(大朴山) 단군릉(檀君陵)에 대한 뒷받침으로서 이보다 정확한 기록은 없을 것이다. 강동군의 대박산에 단군릉이 있다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 또한 강동현의 옛군명이 바로 송양군(松壤郡)이었다는 것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풍류강은 대동강 의 북지인 비류강으로 보아 무난할 것이다.
6세 단군 달문(達門)(36년간 재위) 첫해는 무인(戊寅 - BC2083)년이다. 35년에 여러 제후들을 상춘(常春)에 모이게 하여 구월산(九月山)에서 삼신에게 제사 지냈 는데 신지(神誌)의 발리(發理)에게 서효사를 짓게 하였다. 이 때에 맹세를 맺고 폐백을 바친 자는 큰 나라가 둘이며 작은 나라가 20, 부락이 3624였다. 36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양가(羊加) 한율이 왕위에 올랐다. 7세 단군 한율(翰栗)(54년간 재위) 첫해가 갑인(甲寅 - BC2047)년이다. 54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우서한이 왕위에 올랐다. 8세 단군 우서한(于西翰)(8년간 재위) 첫해(무신(戊申) - BC1993)에 20에 1일 받는 세법을 정하고, 널리 있고 없음을 가려서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다. 2년 풍년이 들어 한줄기에 여덟 개의 이삭이 났다. 4년 임금이 남이 알아 볼 수 없게 옷을 갈아 입고 몰래 국경을 넘어 하(夏)나라의 실정을살펴 보고 돌아와 크게 관제(官制)를 고쳤다. 8년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아술이 왕위에 올랐다. 9세 단군 아술(阿述)(35년간 재위) 첫해(丙辰 - BC1985) 임금이 어진 덕이 있어 백성들 가운데 법으로 금한 것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말하기를 "땅이 똥으로 더러워질 때도 있으나 비와 이슬이 내려 씻어버리는 때도 있다."하며 내버려 두고 말하지 않았다. 2년 청해(靑海)의 욕살(褥薩) 우착(于捉)이 군사를 일으켜 궁궐을 침범하자 임금이 상춘(常春)으로 피하여 새 궁을 구월산 남쪽 기슭(23)에 세우고 우지(于支)·우속(于粟) 등을 보내어 이를 쳐서 베인 뒤 삼년만에 도읍으로 돌아왔다. 35년 임금이 세상을 뜨니 우가(牛加)의 노을이 왕위에 올랐다.
- 23) [삼국유사]의 단군 수도 궁홀산 금미달과 [단군세기]의 상춘 구월산은 같은 곳으로 추정한다.궁홀산 금미달(弓忽山 今彌達)은 개원시 위원보진(威遠堡鎭) 용담산성(龍潭山城)으로 추정한다.
10세 단군 노을(魯乙)(59년간 재위) 첫해(辛卯 - BC1950) 처음으로 큰 동산을 만들어 가축 이외의 짐승을 길렀다. 2년 친히 부락에 나아가 백성들의 안부를 묻고 야외에서 수레를 멈추니 현자들이 많이와서 귀의(歸依)하였다. 5년 궁문 밖에 신원목(申寃木)(24)을 설치하여 백성들의 사정을 들으니 안팎이 크게 기뻐하였다. 16년 동문밖 10리 되는 곳에 연꽃이 나고 불함산(不咸山)에 누웠던 돌이 저절로 일어나고 천하(天河)의 신기한 거북이가 등에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그림이 윷판과 같았다. 발해(渤海)의 연안에 금덩어리가 노출되었는데 그 수량이 13석(石)이나 되었다. 35년에 처음으로 감성(監星)(25)을 설치하였다. 59년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도해가 왕위에 올랐다.
- 24) 신원목(申寃木) :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도록 설치한 나무
- 25) 감성(監星) : 지금의 천문대.
11세 단군 도해(道奚)(57년간 재위) 첫해(庚寅 - BC1891)에 임금이 오가에게 명을 내려 열두명산중에서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서 국선(國仙)의 소도(蘇塗)를 설치하게 하였다. 박달나무를 많이 둘러심고 제일 큰 나무를 골라서 환웅의 상을 삼아 제사지내며 웅상(雄常)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28년에 장소를 만들어 각 고장의 산물을 모아 진기한 것들을 보게 하니 천하의 백성들이 다투어 물건을 가져왔는데 벌여 놓은 것이 산과 같았다. 38년에 백성들 중에 장정들을 뽑아서 모두 병사로 삼고 그 가운데서 20여명을 추려 하나라 서울에 보내어 처음으로 국훈(國訓)을 전하니 위성(威聲)을 보였다. 46년에 송화강(松花江)가에 작청(作廳)을 설치하니 배와 기물이 널리 쓰여졌다. 57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만 백성이 슬퍼하여 부모의 상을 당한 것처럼 여겨 3년 동안 상제가 되고 온세상이 노래와 춤을 그쳤다. 우가(牛加) 아한이 왕위에 올랐다. 12세 단군 아한(阿漢)(52년간 재위) 첫해가 정해(丁亥 - BC1834)년이다. 2년 여름 4월에 뿔 하나가 달린 짐승이 송화강 북쪽 변방에 나타났다. 가을 8월에 임금이 나라 안을 순수(巡狩)하다가 요하(遼河) 왼쪽에 이르러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를 세우고 역대 임금의 이름과 호(號)를 새겨 전하게 하였다. 이것이 금석문자(金石文字)로는 최초이다. 29년 명을 내리기를 청아(菁我)의 욕살(褥薩) 비신(丕信)과 서옥조(西沃阻)의 욕살 고사침(高士琛)과 맥성(貊城)의 욕살 돌개(突蓋)를 봉(封)하여 열한(列汗)을 삼았다. 52년 임금이 세상을 뜨니 우가(牛加) 흘달이 왕위에 올랐다. 13세 단군 흘달(屹達 또는 대음달(代音達))(61년간 재위) 첫해가 기묘(己卯 - BC1782)년이다. 16년 주현(州縣)을 정하고 분직(分職)의 제도를 세웠다. 관(官)은 권력을 겸할 수 없고 정치는 법을 벗어나는 일이 없게 하였다. 백성은 고향을 떠나는 일이 없이 스스로 일하는 곳에 안주하니 풍아과 노래가 나라 안을 넘쳐 흘렀다. 이해 겨울에 은(殷)나라 사람이 하(夏)를 치자 하주(夏主) 걸(桀)이 구원을 청해왔다. 임금이 읍차(邑借)의 말량(末良)으로써 구환의 근사를 이끌고 가서 전쟁을 도와주도록 하였다. 그러나 탕(湯)이 사자를 보내어 사죄하므로 곧 명을 내려 군사를 돌아오게 하였다. 이에 걸이 이를 어기고 군사를 보내어 길을 막고 전쟁을 금하기로 한 맹세를 깨려고 하였다. 이렇게 되어 은 나라 사람과 함께 걸을 치고 비밀리에 신지(臣智)를 양(亮)에 보내어 견군( 軍)을 거는리고 낙랑(樂浪)과 합세하여 나아가 관중(關中)의 빈( )(26)·기(岐)(27)의 땅을 점령하고 거기에 살면서 관제를 설치하게 하였다. 20년에 소도(蘇塗)를 많이 설치하여 천지화(天指花)를 심고 아직 결혼을 안한 자제들에게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하였으니 이를 국자랑(國子郞) 이라 하였다. 국자랑이 나와 다닐 때에는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기 때문에 그 때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天指花郞) 이라 불렀다. 50년에 다섯 별이 누성(婁星)으로 모이고 누런학이 대궐 동산 소나무에 와서 깃들었다. 61년 임금이 세상을 뜨니 만백성들이 먹지 않고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이에 명을 내려 죄수와 포로를 석방하고 죽이는 것을 금하고 산 것은 놓아 보내고 그 해를 지나 장사지냈다. 우가(牛加)의 고불이 왕위에 올랐다.
- 26) 빈( ) : 주(周)의 조상 공유(公劉)가 세운나라.
- 27) 기( ) : 주(周)의 옛읍.
14세 단군 고불(古弗)(60년간 재위) 첫해가 경진(庚辰 - BC1721)년이다. 6년 크게 가뭄이 들자 임금이 친히 하늘에 기도하여 비내리기를 빌었는데 하늘에 맹세하여 고하기를 "하늘이 비록 크다 하지만 백성이 없으면 무엇을 할 것이며 비가 비록 기름지다 하지만 곡식이 없으면 무엇이 귀하겠습니까. 백성들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은 곡식이며 하늘이 마음두는 것은 사람이니 하늘과 사람은 한몸인데 하늘이 어찌백성을 버리겠니이까. 이에 비를 내려 곡식을 자라게 하여 백성을 건지고 교화하는 것을 때에 맞게 하소서."하니 말을 마치자 큰 비가 쏟아지기를 수 천리에 이르렀다. 42년 9월에 마른 나무에서 싹이 나고 다섯가지 색깔의 닭이 성 동쪽 자촌(子村)집에서 나니 보는 사람들이 잘못 알고 봉(鳳)이라고 하였다. 56년에 관원을 사방에 보내어 호구를 조사하여 계산하니 모두 1억 8천만명이었다. 60년 임금이 세상을 뜨니 대음이 왕위에 올랐다. 15세 단군 대음(代音 또는 후흘달(後屹達)) (51년간 재위) 첫해(庚辰 - BC1661)에 은주(殷主) 소갑(小甲)이 사자를 보내와 화친을 구하였다. 이 해에 80에서 1의 세금을 받는 제도를 개정하였다. 2년에 홍수가 크게 넘쳐 민가가 해를 입었다. 임금이 몹시 불쌍히 여기고 걱정하여 곡식을 창해(蒼海) 사수(蛇水)의 땅으로 옮겨 골고루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겨울 10월에 양운(養雲)·수밀이(須密爾) 두나라 사람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10년에 임금이 서쪽 약수(弱水)에 행차하여 신지(臣智) 우속(禹粟)에게 명을 내려 금과 철 그리고 기름을 채취하게 하였다. 가을 7월에 우루(虞婁) 사람 20가구가 와서 투항하니 명을 내려 염수(鹽水)(28) 가까운 곳에 정착하도록 하였다. 28년에 임금이 태백산에 올라 비석을 세우고 열성(列聖)과 군한(郡汗)의 공적을 새겼다. 40년 임금이 아우 대심(大心)을 봉(封)하여 남선비(南鮮卑) 대인(大人)으로 삼았다. 51년 임금이 세상을 뜨니 우가(牛加) 위나가 왕위에 올랐다.
- 28) 염수(鹽水) : 내 이름, 근원은 산서성 하읍현
16세 단군 위나(尉那)(58년간 재위) 첫해가 신미(辛未 - BC1610)년이다. 28년에 구환의 제한(諸汗)을 영고탑(寧古塔)에 모아 삼신과 상제에게 제사지내고 환인· 환웅·치우 및 단군왕검도 함께 배향(配享)하였다. 58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여을이 왕위에 올랐다. 17세 단군 여을(余乙)(68년간재위) 첫해가 기사(己巳- BC1551)년이다. 52년에 임금이 오가(五加)와 함께 나라 안을 두루 돌며 살폈다. 68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동엄이 왕위에 올랐다. 18세 단군 동엄(冬奄)(49년간 재위) 첫해가 정축(丁丑 - BC1484)년이다. 20년 지백특인(支伯特人)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49년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구모서가 왕위에 올랐다. 19세 단군 구모소( 牟蘇)(55년간 재위) 첫해가 병인(丙寅 - BC1435)년이다. 24년 남상(南裳) 사람이 입조(入朝) 하였다. 54년 지리숙(支離叔)이 주천력(周天曆)과 팔괘상중론(八卦相重論)을 지었다. 55년 임금이 세상을 뜨니 우가(牛加)의 고홀이 왕위에 올랐다. 20세 단군 고홀(固忽)(43년간 재위) 첫해가 신유(辛酉 - BC1380)년이다. 11년 가을에 백일(白日)이 무지개를 뚫었다. 36년에 영고탑(寧古塔)을 수축(修築)하고 이궁(離宮)을 지었다. 40년 공공(共工)의 공홀(工忽)이 구환의 지도를 만들어 바쳤다. 43년 사해가 아직 편안하지 못한데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소태가 왕위에 올랐다. 21세 단군 소태(蘇台)(52년간 재위) 첫해(甲辰 - BC1337)에 은주(殷主) 소을(小乙)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47년에 은주(殷主) 무정(武丁)이 이미 귀방(鬼方)을 이기고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索度) ·영지(令支)(29)등의 나라를 침공하다가 우리에게 크게 패하여 화친을 청하고 공물을 보내왔다. 49년에 개사원(蓋斯原)(30)의 욕살(褥薩) 고등(高登)이 은밀히 군사를 일으켜 귀방(鬼方)을 습격하여 이를 멸하니 일군(一群)·양운(養雲)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여기에서 고등(高登)이 많은 군사들과 손을 잡고 서북쪽 땅을 침략하여 그 세력이 강성 하더니 사람을 보내어 우현왕(右賢王)이 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이를 꺼려 허락하지 않았는데 거듭 청하므로 비로소 허락하여 이름을 두막루(豆莫婁)라고 하였다. 52년에 우현왕 고등이 죽고 이어 그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우현왕이 되었다. 임금이 나라 안을 순수하다가 남쪽 해성(海城)에 이르러 부로(父老)를 모아놓고 하늘에 제사지내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이어 곧 오가를 불러 이들과 함께 왕위를 물려주는 일을 의논하고 스스로 말하기를 "늙어서 부지런히 일할수 없다."하고 정사(政事)를 서우여(徐于餘)에게 맡기려 하였다. 이에 살수(薩水) 백리를 묶어 섭주(攝主)로 삼고 호를 내려 기수(奇首)라고 하였다. 우현왕(右賢王)이 이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임금에게 권하여 중지하게 하였으니 임금이 끝내 듣지 않았다. 이에 우현왕이 좌우 신하와 엽호(獵戶) 수천을 거느리고 드디어 부여(夫餘)의 신궁에서 즉위하고 말았다. 임금이 할 수 없이 옥책국보(玉冊國寶)를 전하고 서우여(徐于餘)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임금은 아사달(阿斯達)에 숨어 살다가 세상을 떴다. 이 해에 백이(伯夷)·숙제(叔齊)도 또한 고죽군(孤竹君)의 아들로서 나라를 양보하고 도망하여 동해가에 살면서 힘써 농사지어 스스로 살아갔다.
- 29) 영지(令支) : 나라 이름, 은(殷)이 망한 뒤에 고이(高夷)·고죽(孤竹)·영지(令支)가 남아 있었다.
- 30) 개사원(蓋斯原) : 숙신족의 터전인 아사달과 같은 격으로서 부여족의 터전을 가리킨다. 내몽고 개로(開魯) 부근이 첫 번째 개사원으로 추정된다.
22세 단군 색불루(索弗婁)(48년간 재위) 첫해(丙申 - BC1285) 임금이 명을 내려 녹산(鹿山)(31)을 수축하게 하고 관제를 고쳤다. 가을 9월에 친히 장당경(藏唐京)에 행차하여 사당을 세워 고등왕(高登王)을 제사하였다. 11월에 친히 구환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번 싸워 은(殷)나라 도읍을 쳐부수고 이어 화친했다가 또 다시 크게 싸워 파멸시켰다. 이듬해 2월에 추격하여 하상(河上)에 이르러 이겼다는 하례를 받고 변(弁)의 백성들을 회대(淮垈)의 땅으로 옮겨 이들에게 가축을 기르고 농사짓게 하니 나라의 위엄을 크게 떨쳤다. 20년 이 때에 이르러 남국(南國)이 자못 강해져서 고죽군(孤竹君)과 함께 여러 적들을 쫓 아내고 남쪽으로 옮겨 엄독홀(奄讀忽)에 이르러 살았다. 이곳은 은의 국경과 가까워 여파달(黎巴達)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고 나아가 빈( )·기(岐)를 점거하고 그 유민과 서로 결합하여 나라를 세우니 여(黎)라고 하였다. 서융(西戎)과 함께 은의 제후들 사이에 섞여 사니 남씨의 위세가 매우 강성하여 임금의 교화가 멀리 항산(恒山)(32) 남쪽 지방까지 미쳤다. 36년에 변방의 장수 신독(申督)이 군사를 위지하여 난을 일으켰다. 임금이 잠시 영고탑(寧古塔)에 피하니 백성들이 많이 따라왔다. 48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아홀이 왕위에 올랐다.
- 31) 녹산(鹿山)(L sh n) : 오늘날 류산(劉山)(Li sh n)을 말하며, 한나라 장잠현인 것이다. 장잠은 아사달의 한자어 표기이다.
- 32) 항산(恒山) : 상산(常山)이라고도 한다. 산서성(山西城) 경계의 구주산(句注山)에서 시작된다.
23세 단군 아홀(阿忽)(76년간 재위) 첫해(甲申 - BC1237)에 임금의 숙부 고불가(固弗加)에게 명을 내려 낙랑홀(樂浪忽)(33)을 다스리게 하고 웅갈손(熊乫孫)을 보내어 남국(藍國)의 임금과 함께 남쪽을 치는 병사들을 돌보게 하였다. 6읍을 은(殷)의 땅에 두게 하니 은인들이 서로 다투어 결정을 내리지 않아 이에 군사를 진격시켜 쳐부쉈다. 가을 7월에 신독(申督)을 베어 버리고 도읍으로 돌아와 명을 내려 죄인과 포로를 석방하였다. 2년에 남국(藍國) 임금 금달(今達)이 청구(靑邱)의 임금과 구려(句麗)의 임금과 함께 주개(周愷)에서 만나 몽고리(蒙古里)의 병력과 합세하여 이르는 곳마다 은의 성책을 부수고 오지에까지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垈)의 땅을 평정하였다. 포고씨( 古氏)를 엄(淹)에 영고씨(盈古氏)를 서(徐)에 방고씨(邦古氏)를 회(淮)에 나누어 봉하니 은인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놀라 겁먹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5년에 이한(二韓)과 오가(五加)를 불러 모으고 영고탑(寧古塔)(34)에 도읍을 옮길 것을 정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76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연나가 왕위에 올랐다.
- 33) 낙랑홀(樂浪忽) : 후세의 낙랑국으로 철령시 동남쪽 최진보산성(催陣堡山城)이다.
- 34) 영고탑성(寧古塔城) : 모란강이 흘러가는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 부근인데 상소도(上蘇塗)라고도 칭하였음을 알 수 있다.
24세 단군 연나(延那)(11년간재위) 첫해(更子 - BC1161)에 임금의 숙부 고불가(固弗加)에게 명을 내려 섭정하게 하였다. 2년에 제한(諸汗)들이 조서를 받들어 소도(蘇塗)를 증설하고 하늘에 제사지냈다. 나라에 큰 일이나 재앙이 있을 때에는 곧 여기에 와서 기도하여 백성들의 뜻을 하나로 정하였다. 11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솔나가 왕위에 올랐다. 25세 단군 솔나(率那)(88년간 재위) 첫해는 신해(辛亥 - BC1150)년이다. 37년에 기자(箕子)가 서화(西華)로 옮겨와 살면서 인사(人事)를 사절(謝絶)하였다. 59년에 밭 곡식이 풍년이 들어 한 줄기에 다섯 이삭의 조가 있었다. 88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추로가 왕위에 올랐다. 26세 단군 추로(鄒魯)(65년간 재위) 첫해(己卯 - BC1062) 가을 7월에 백악산(白岳山) 골짜기에 흰 사슴 200마리가 떼를 지어 와서 놀았다. 65년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두밀이 왕위에 올랐다. 27세 단군 두밀(豆密)(26년간 재위) 첫해(甲申 - BC997)에 천해의 물이 넘치고 사아란산(斯阿 山)이 무너졌다. 이해에 수밀이국(須密爾國)과 양운국(養雲國)·구다천국(句茶川國)이 모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8년에 큰 가뭄 끝에 큰 비가 쏟아져 백성들이 수확이 없으므로 임금이 명을 내려 창고를 열고 두루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26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해모가 왕위에 올랐다. 28세 단군 해모(奚牟)(28년간 재위) 첫해(庚戌 - BC971)에 임금이 병이 있어 백의동자에게 하늘에 기도하게 하니 이윽고 병이 나았다. 11년 여름 4월에 회오리 바람이 크게 일고 폭우가 쏟아져 내리더니 육지 위에 고기들이 어지러이 떨어졌다. 18년에 빙해(氷海)의 제한(諸汗)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28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마휴가 왕위에 올랐다. 29세 단군 마휴(摩休)(34년간 재위) 첫해(戊寅 - BC943)에 주(周)나라 사람이 들어와 공물을 바쳤다. 8년 여름에 지진이 있었다. 9년에 남해의 조소가 석자나 물러갔다. 34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내휴가 왕위에 올랐다. 30세 단군 내휴(奈休)(35년간 재위) 첫해(壬子 - BC909)에 남쪽을 순수하여 청구(靑邱)의 정치를 보고 치우천왕의 공을 돌에 새겼다. 서쪽으로 엄독홀(奄讀忽)에 이르러 분조의 제한들과 모여서 병사를 사열하고 하늘에 제사지냈으며 주나라 사람과 수호하였다. 5년에 흉노(凶奴)가 조공을 바쳤다. 35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등올이 왕위에 올랐다. 31세 단군 등올(登 )(25년간 재위) 첫해가 정해(丁亥 - BC874)년이다. 16년에 봉(鳳)이 백악에서 울고 기린(麒麟)이 상원(上苑)에 와서 놀았다. 25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아들 추밀이 왕위에 올랐다. 32세 단군 추밀(鄒密)(30년간 재위) 첫해가 임자(壬子 - BC849)년이다. 3년에 선비산(鮮卑山)(35)의 추장 문고(們古)가 조공을 바쳤다. 12년에 초(楚)의 대부 이문기(李文起)가 입조하였다. 13년 3월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15년에 농사가 크게 흉년이 들었다. 30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감물이 왕위에 올랐다.
- 35) 선비산(鮮卑山) : 내몽고 과이심(科爾沁) 서쪽에 있는 산.
33세 단군 감물(甘勿)(24년간 재위) 첫해가 임오(壬午 - BC819)년이다. 2년에 주(周)나라 사람이 와서 범과 코끼리의 가죽을 바쳤다. 24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오루문이 왕위에 올랐다. 34세 단군 오루문(奧婁門)(23년간 재위) 첫해(丙午 - BC795)에 오곡이 풍년이 들어 만백성들이 기뻐하고 편안하여 두리(兜里)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10년에 두 해가 함께 뜨고 계속하여 누런 안개가 사방을 가리웠다. 23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사벌이 왕위에 올랐다. 35세 단군 사벌(沙伐)(68년간 재위) 첫해가 기사(己巳 - BC772)년이다. 6년에 황충과 큰물이 있었다. 14년에 범이 궁전에 들어왔다. 24년 큰물이 있어 산이 무너지고 골짜기가 메워졌다. 50년에 임금이 언파불합(彦波弗哈) 장군을 보내어 해상의 웅습(熊襲)을 평정하였다. 66년에 임금이 조을(祖乙)을 보내어 똑바로 연도(燕都)를 뚫게 하였더니 제병(齊兵)과 함께 임치(臨淄)의 남쪽들에서 싸워 이김을 알려왔다. 68년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매륵이 왕위에 올랐다. 36세 단군 매륵(買勒)(58년간 재위) 첫해가 정축(丁丑 - BC704)년이다. 28년에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 32년 서촌 민가에서 소가 발이 여덟게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 35년에 용마(龍馬)가 천하에서 나왔는데 등에 별 무늬가 있었다. 38년에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裵 命)을 보내어 가서 해상을 치게 하니 12월에 삼도가 모두 평정되었다. 52년에 임금이 군사를 보내어 수유(須臾)의 군사와 함께 연(燕)을 치게 하였다. 연인은 다급함을 제(齊)에 알리니 많은 제인 고죽(孤竹)으로 들어와서 우리 복병을 만나 싸움이 이롭지 못하므로 화친하기를 애걸하고 물러갔다. 58년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마물이 왕위에 올랐다. 37세 단군 마물(麻勿)(56년간 재위) 첫해가 을해(乙亥 - BC646)년이다. 56년에 임금이 남쪽으로 순수하다가 기수(淇水)에 이르러 세상을 뜨니 태자 다물이 왕위에 올랐다. 38세 단군 다물(多勿)(45년간 재위) 첫해가 신미(辛未- BC590)년이다. 45년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두홀이 왕위에 올랐다. 39세 단군 두홀(豆忽)(36년간 재위) 첫해가 병진(丙辰 - BC545)년이다. 36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달음이 왕위에 올랐다. 40세 단군 달음(達音)(18년간 재위) 첫해가 임진(壬辰 - BC509)년이다. 18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음차가 왕위에 올랐다. 41세 단군 음차(音次)(20년간 재위) 첫해가 경술(庚戌 - BC491)년이다. 20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을우지가 왕위에 올랐다. 42세 단군 을우지(乙于支)(10년간 재위) 첫해가 경오(庚午 - BC471)년이다. 10년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물리가 왕위에 올랐다. 43세 단군 물리(勿理)(36년간 재위) 첫해가 경진(庚辰 - BC461)년이다. 36년에 융안(隆安)의 사냥꾼 우화충(于和沖)이 스스로 장군이라 하고 무리 수만명을 모아 서북쪽 36군을 함락시켰다. 임금이 군사를 보내어 치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겨울에 적이 도성을 포위하고 급하게 공격하였다. 이에 임금이 좌우 궁인과 함께 묘사(廟社)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배를 타고 내려가 해두(海頭)에 가서 세상을 떴다. 이해에 백민성(白民城)의 욕살(褥薩) 구물(丘勿)이 명에 의하여 군사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藏唐京)을 점령하니 구지(九地)의 군사가 여기에 따르고 동서 압록(鴨綠) 18성이 모두 군사를 보내와서 도왔다. 44세 단군 구물(丘勿)(29년간 재위) 첫해(丙辰 - BC425) 3월에 큰물이 도성에 몰려 들어오니 역적이 크게 어지러웠다. 구물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자 역적은 싸우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므로 드디어 우화충(于和沖)을 베었다. 여기에서 구물이 여러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3월 16일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지내고 드디어 장당경(藏唐京)(36)에서 즉위하였다. 국호를 고쳐 대부여(大夫餘)라 하고 삼한(三韓)을 고쳐 삼조선(三朝鮮)이라 하였다(37). 이로부터 삼조선도 비록 단군을 받들어 일존임리(一尊臨理)의 제도를 만들었으니 오직 화합하고 싸우는 권리는 일존에게 있지 않앗다. 7월에 명을 내려 해성(海城)(38)을 개축하여 평양(平壤)이라 하고 이궁(離宮)을 짓게 하였다. 2년 예관이 삼신의 영고제(迎鼓祭)을 청하여 행하니 3월 16일이었다. 임금이 친히 나아가 서 삼육대례(三六大禮)하였다. 17년에 감찰관을 주(州)·군(郡)에 보내어 관리와 백성을 살피고 효성이 있고 청렴한 자를 천거하게 하였다. 23년에 연(燕)이 사신을 보내와 새해 하례를 하였다. 29년에 임금이 세상을 드니 태자 여루가 왕위에 올랐다.
- 36) 장당경 : 개원시 창도현(昌圖縣) 대영반석성이다
- 37) 대부여의 단군 구물(丘勿) 이후로 마한조선(馬韓朝鮮), 번한조선(番韓朝鮮) 진한조선(辰韓朝鮮)등 삼조선이 제각기 독립하게 되었으며 대부여도 부여조선이라고 칭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비로서 진한(辰韓)조선이 생겨났는데 그 위치는 개주시(蓋州市) 부근으로 추정된다.
- 38) 해성 : 무순시 망화구(撫順 望花區)의 옛이름 해성(海城)으로 인하여 무순시 망화구로 추정된다.
45세 단군 여루(余婁)(55년간 재위) 첫해(乙酉 - BC396)에 장령(長嶺)(39)·낭산(狼山)(40)에 성을 쌓았다. 17년에 연(燕)인이 변방 고을을 침입하므로 수장(守將) 묘장춘(苗長春)이 이를 쳐서 깨뜨렸다. 32년에 연인이 도를 어기고 쳐들어와 요서(遼西)를 빼았고 운장(雲障)을 몰아부쳤다 이에 번조선(番朝鮮)이 상장(上將) 우문언(于文言)에게 명을 내려 이를 막게 하였다. 진(眞)·막(莫) 두 조선도 군사를 보내와 도왔는데 복병을 두어 공격하여 연(燕)과 제(齊)의 군사를 오도하(五道河)에서 쳐부수니 요서(遼西)의 여러 성이 모두 회복되었다. 33년에 연인이 패하여 연운도(連雲島)에 주둔하여 배를 만들어 장차 와서 습격하려 하자 우문언(于文言)이 쫓아가 쳐부수고 장수를 쏘아 죽였다. 47년에 북막(北漠)의 추장 액니차길(厄尼車吉)이 조정에 와서 말 200필을 바치면서 연을 치기를 청하였다. 이에 번조선(番朝鮮)의 소장(少將) 신불사(申不私)에게 군사 1만을 주어 함께 연(燕)의 상곡(上谷)(41)을 쳐서 구원하고 성읍을 두었다. 54년에 상곡의 전쟁이 있은 후부터 연이 해마다 와서 침략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어 화친하기를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고 다시 조양(造陽) 서쪽으로 국경을 삼았다 55년 여름에 크게 가물이 들어 원통한 옥사가 있을 것을 걱정하여 대사령(大赦令)을 내리고 친히 거동하여 비를 빌었다. 9월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보을이 왕위에 올랐다.
- 39) 장령(長嶺) : 민주 길림성 영길현(永吉縣) 동북쪽에 있는 산.
- 40) 낭산(狼山) : 하북성(河北省) 청원현(淸苑縣) 서북쪽에 있는 산.
- 41) 상곡(上谷) : 찰합이성(察哈爾省) 연경현(延慶縣) 북쪽.
46세 단군 보을(普乙)(46년간 재위) 첫해(庚辰 - BC341) 12월에 번조선(番朝鮮)왕 해인(解仁)이 연(燕)에서 보낸 자객에게 죽고 오가가 다투어 왕위에 오르려 하였다. 19년 정월에 읍차(邑借) 기후(箕 )가 군사를 이끌고 궁에 들어와서 스스로 번조선왕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어 윤허(允許)를 청하자 임금이 이를 허락하고 굳게 연을 대비하게 하였다. 38년에 도성에 큰 불이 나서 모두 타자 임금이 피하여 해성(海城)으로 이궁(離宮)하였다. 44년에 북막(北漠)의 추장 니사(尼舍)가 음악을 바치자 이를 받고 후하게 상을 주었다. 46년에 한개(韓介)가 수유(須臾)의 군사를 이끌고 대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에 상장 고열가(高列加)가 의병을 일으켜 이를 쳐부수니 임금이 환도하여 대사령을 내렸다. 이로부터 나라 형세가 몹시 미약해지고 국가의 비용을 충당 할 수가 없더니 이윽고 임금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 고열가가 단군물리(檀君勿理)의 현손이므로 무리의 사랑을 받아 추대받고 또 공이 있으므로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47세 단군 고열가(高列加)(58년간 재위) 첫해가 병인(丙寅 - BC295)년이다. 14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사당을 백악산(白岳山)에 세우고 유사(有司)에게 사시(四時) 마다 제사 지내게 하였다. 임금도 1년에 한번씩 친히 제사지냈다. 44년에 연(燕)이 사신을 보내어 신년을 하례하였다. 48년 10월 초하루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이해 겨울에 북막의 추장 아리당부(阿里當夫) 가 군사를 내어 연(燕)을 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으니 이로부터 원망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다. 57년 4월 8일에 해모수(解慕漱)가 웅심산(熊心山)에 내려와 군사를 일으키니 그 조상은 고리국( 離國)(42) 사람이다. 58(BC238)년 임금이 어질고 유악하고 과단성이 없어 명령이 이행되지 않는 일이 많았고, 여러 장수들은 용맹을 믿고 화란(禍亂)을 자주 일으키니 국가의 비용을 충당 할 수가 없어 백성들의 기운은 더욱 쇠하여졌다. 3월에 하늘에 제사지내는 날 저녁에 오가(五加)와 더불어 의논하기를 "옛날 우리 열성(列聖)께서 나라를 열고 대를 이어내려 오면서 덕을 심은 것이 크고 원대하여 영세(永世)의 법으로 삼았다. 그러나 지금은 왕도가 쇠하고 미약해 제한(諸汗)들이 강함을 다투는데 오직 짐(朕)의 덕은 나약하여 능히 다스리지 못하니 불러서 편안히 할 방책이 없다. 이리하여 백성들이 떠나 흩어지고 있으니 너희 오가는 어진 이를 골라서 천거하라"하고 옥문을 활짝 열고 사형수 이하 모든 포로들을 석방하여 돌려보냈다. 그리고 이튿날 드디어 왕위를 버리고 산에 들어가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다. 이에 오가들이 6년 동안 함께 국사를 다스렸다. 이보다 먼저 종실 대해모수(大解慕漱)가 은밀히 수유(須臾)와 짜고 옛 도읍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 천왕랑(天王郞)이라 하니 사방 국경 안이 모두 그 명령을 들었다. 이에 여러 장수들을 봉하였는데 수유후(須臾候) 기비(箕丕)를 승진시켜 번조선(番朝鮮)왕으로 삼고 가서 상·하(上下)운장(雲障)을 지키게 하니 대개 북부여(北夫餘)가 일어난 것이 여기에서 부터 시작 되었다. 그리고 고구려(高句麗)는 곧 해모수(解慕漱)의 고향이기 때문에 또한 고구려(高句麗)(43)라고 하였다. 단군 기원 원년부터 47세를 내려와 2096(BC2333 ∼ BC238)년간 나라가 이어 왔음이다.
- 42) 고리국( 離國) : [한서지리지]의 구려국이 고리국이다.
- 고리국의 수도는 [요사지리지]에서 쌍료현 쌍산진(雙山鎭)에 있었으며 고구려의 환도성(丸都城)이었다.
- 43) 단군 왕검은 조선족이었고, 22세 단군 색불루는 부여족이었는데 이때 왕검의 조선족은 낙랑으로 불리게 된다. 뒤에 북부여를 세운 해모수는 옥저족이고 그 뒤를 이어서 졸본부여(즉 전한시대 고구려)를 세운 고두막한은 예맥족이며, 구려를 세운 고주몽의 세력은 소수맥족이다.
- 따라서 백제는 예맥족(부여족이라고도 함)이 지배층을 구성하였고 조선족을 바탕으로 하였다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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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pluskorea.net/bbs.html?Table=ins_bbs90&mode=view&uid=1649&page=1§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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