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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죄와 악의 습관들이 시간이라는 신성한 바퀴에 의해 갈려질 때에야 비로소 주의 거룩함의 광채는 더욱 더 선명하게 빛을 발하게 된다. 만일 당신이 금생(今生)에 있어서 "잘 갈려서 윤이 나는" 상태로 된다면 하나님의 "귀한 보배들" 중의 하나로서 귀하게 쓰임 받게됬음을 감사하라.
잠 17:3
성경: 왕상 17:1-7 제목 : 작전상 후퇴
( 서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엘리자 선지자 하면 윌 머리속에 먼저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 1) 갈멜산 산상에서 바알 선지자 450과 아세라 신상을 섬기던 아세라 선지자 400명, 합하여 850명을 멋지게 불을 내리는 기도의 사람으로 이긴 능력의 기도자 2) 3년 6개월을 오지않던 비를 내리게 한 선지자 3) 불말을 타고 하나님의 나라로 승천한 선지자
우리는 엘리야 선지자하면 대단히 화려한 부분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는 늘 어떤 성공한 사람들을 만날때마다 그 사람들의 현제의 화려한 부분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이 성공하기까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두운 그늘을 통과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속의 죽인공인 엘이애는 화려한 모습속에 등장하지 않고 초라히 도피하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왜일까요 ?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왜 하나님이 엘리애를 그렇게 하셨는가를 의미깊게 살펴 보아야 합니다. 저는 이 본문의 제목을 작전상 후퇴라고 정해 봤습니다. 엘리야를 왜 하나님은 작전상의 후퇴를 시키셔야 했는지를 우리는 함께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 본 론) 이를 위해 성경을 한 분씩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1절 : “길르앗에 우거하는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로 그를 소개 합니다. 이스라엘 관습으로 사람을 소개시는 부친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상례인데 성경은 엘리야를 소개하면서 “디셉 사람”이라고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드러낼만한 족보가 없는 경력이 없는자 였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17장에 들어서 헤성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과연 그는 그동안 무엇을 하고 지냈을까요
“길르앗에 우거하는자”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가 길르앗이라는 광야에서 훈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길르앗은 이런곳)
길르앗 - '길르앗'( )은 '증거의 돌무더기'라는 뜻으로 여겨진다(GuthrieJr.). 그렇다면 신앙의 암흑기인 아합 시대에 여호와 신앙의 증거자 엘리야가 이 지방에서 배출된 점은 의미가 있다 하겠다. 한편 길르앗(Gilead)이라는 지명은 넓게는 남쪽 아르논 강에서 북쪽 야르묵 강에 이르는 요단 동편 일대를 가리킨다(Cohen). 이곳은 곡창 지대와 목축지로 유명하였는바 일찍이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이곳을 자신들의 기업(基業)으로 요구할 정도였다(민 32:1-5).
디셉 - 디셉(Tisheb)은 엘리야의 고향으로 여섯번이나 언급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길이 없다(21:17, 28; 왕하 1:3, 8; 9:36). 다만 길르앗 북방 산악 지대에 위치한 현재의 리스팁(Listib)일 가능성이 있다(Cohen). 한편 외경 토빗서 1:2에는 납달리에있는 게데스(Kedesh)의 남쪽 한 지역이 '디셉'으로 언급되고 있다. 만일 '디셉 사람'이란 말이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라면 엘리야는 디셉에서 출생하여 길르앗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N. Glueck, 'Explorations in Eastern Palestine IV).
엘리야 - '엘리야'( 또는 , 엘리야후)는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는 뜻이다. 실제로 엘리야의 생애는 그 같은 이름의 뜻을 구현하는 데 바쳐진다. 한편 성경에는 엘리야(Elijah)의 가계(家系)가 언급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는 B.C. 9세기의 유명한 선지자로서 아합 왕(B.C. 874-853) 때부터 아하시야 왕(B.C. 853-852) 때까지 북왕국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예언 활동을 하였다. 특히 그는 모세에 버금가는 인물로서 유대인들의 추앙을 받았는데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세례 요한의 정체를 확인하면서 그가 엘리야인지 물어 볼 정도였다(요 1:21).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 이 짧은 어구에 함축된 의미는 대단히 크다. 즉 본절은 크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1)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는 뜻이다. 이말은 새삼스러운 것 같지만 실상은 바알 숭배가 만연한 당시의 상황에 대해 강한 거부의 뜻을 담고 있는 말이다. 즉 이는 이스라엘의 참 신은 여호와이지 바알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말이다. (2) 그리고 그 여호와가 바로 '나의 섬기는' 하나님이시다는 뜻이다. 이 말에는 바알을 섬기는 무리가 다수인 당시의 형편이 잘 반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는 그 속에서 자신의 현주소와 입장을 밝히는 신앙 고백인 동시에 자신이 여호와께로부터 보냄 받은 대사(大使)의 자격임을 밝히는 말이라 하겠다.
이런 그 지형이 산악지대 였으며 그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뜻, 이 두가지를 가지고 종합해 볼때에 그는 이 산악지대에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이방신, 우상을 섬기는 자들 앞에서 장차 드러낼 인물로 하나님의 훈련을 받고 있었던 것이라고 볼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나를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르켜 맹세하노니 내말이 없을면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는 말을 당시의 이스라엘중의 가장 악덕한 왕이요, 우상을 많이 섬기기로 유명한 왕인 아합왕 앞에서 담대히 선포할 수 있었던 사실에서 확인 될 수 있는 것이다.
( 엘리야의 그런 선포가 주는 의미) 1. 왕에 대한 질라요 책망이다. “ 당신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어찌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숭배하느냐”는 질라요 책망이다. 2. “여호와의 사심을 가르켜” 이것은 “당신이 섬기는 바알은 죽은 신이며 거짓 신이며 여호와 만이 살아계신 참 신이라는 선포요 확신속에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3. “내 말이 없으면 수년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바알은 사게절을 통제하며 비를 내려 곡식, 포도주, 수확토록하는 신인데 이러한 기상신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여러분 훈련을 받지 못한자가 어떻게 이렇게 담대히 외칠수 있었겠습니까 ? 당시에 알려지지도 않은 시골뜨기 선지자가 감히 당대의 왕앞에서 그것도 바알신을 섬기는 왕 앞에서 말입니다. 그가 이렇게 외칠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이름의 뜻과 같이 광야에서 “하나님은 살아게시다‘는 철처한 훈련을 받았기에 이와같이 담대히 외칠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그동안 훈련을 시켰던 엘리야를 통하여 이런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개입을 갈망하며 날마다 의로운 심령이 상하던 참다운 언약의 백성들에게는 장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랜 침묵을 개고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서 구원의 대 사역을 시작했다고 생각하며 기뻐했을 것입니다. 엘리야 자신도 마침내 이스라엘을 바알의 장중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자신으로 하여금 아합왕 앞에 담대히 서게하시고 가뭄의 메시지를 선언하도록 하셨다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크나큰 희망속에서 이스라엘의 지축을 위흔들 수 있는 또 하나의 엄청난 폭탄 선언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다음으로 명하신 일은 3절의 말씀이셨습니다.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앞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기대와는 정 반대의 대답이었습니다. 이러한 중대한 상황속에서 그에게 명하신 말씀은 그보고 휴양지에 가서 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휴양지는 그릿 시냇가요 사르밧 과부의 집이었습니다. 그곳은 먹고 입을것이 풍부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왜 그를 이곳으로 보내셨을 까요 ? 1. 하나님의 메시지인 가뭄의 의미를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화) 변화산상에서 기적을 보며 “초막셋을 짓겠다”는 엉뚱한 대답을 한 베드로의 영적부지를 범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 메시지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분명히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2. 하나님은 그곳에서 그 가뭄의 메시지가 실현되도록 건절히 기도하는 훈련을 시키시기 위함이었다. ▶ 엘리야는 그곳에서 숨어서 살았다. ※ '숨고'는 문자 그대로 '피하다', '감추다'는 뜻의 '사타르'( )에서 온말이다. 그러므로 이 동사에서 엘리야의 심판 예언(1절)이 있은 후 아합과 이세벧의 즉각적인 위협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찾아오는 이 없고, 밖으로 나갈수도 없었다. ▶ 외부와 차단된 삶속에서 하나님만 바라고 매일매일 위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무인도에서의 삶을 언상해 보라 그런 상황속에서의 그에게는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는 그의 절실한 기도가 되었을 것이다. 6절에 보면 하나님은 그를 까마귀를 통하여 먹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주는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 1.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심을 가르치기 위한 게획을 말해줍니다. 까마귀는 개보다도 충실치 못합니다. 가마귀는 율법에서 부정한 짐승으로 취급되는 짐승으로 식욕이 왕성한 새입니다. 그런 까마귀를 통해서 음식을 가져다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국민학교 6학년짜리 동생을 길도 모르는 부산에 심부름 보냈다고 생각해 봅시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도착하고자 하는 시간에 전화 확인을 하고 들어갈 시간에 도착을 하지 않으면 걱정을 태산같이 할 것입니다. 그런데 국민학교에 다니는 동생과 같이 이성도 없는 그런 부정한 동물을 통해서 음식을 가져다 주겠다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를 갖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은 아닐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그런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2. 그 식사는 1일 2끼 뿐이었고 빵과 고기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절제의 생활을 요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채소와 양념이 없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고충을 겪었습니다. 양념이 없는 음식을 어떻게 하르 이틀도 아니고 매일 먹을수 있겠습니까? 전기도 없고 여름에 시원한 아이스크림도 못먹고 냉장고도 없이 산다면 여름에 우리는 하루도 살수가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그러한 자신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먹는 것에 조차 절제를 하는 요구를 하셨습니다. 3. 그것은 겸손의 자세를 익혀주기 위함이았습니다. 까마귀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부정한 짐승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합왕앞에서 당당하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온 엘리야 하나님이 그에게 준 봉사의 대가가 부정한 짐승인 까마귀가 가져다주는 밥 뿐이었습니다. 좋은 음식으로 주어도 불평할수 있는데 그것도 고작 밥분인 하루 2끼뿐인 식사였습니다. 이런 음식을 그가 받아 먹기 위해서는 자신이 낯아지지 않고서는 불간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그러한 것을 훈련시키시기 위하여 이러한 어려운 일들을 당하시게 하셨습니다. (예화) 하박국 선지자는 죄악이 혼탁한 이스라엘에서 목숨을 걸고 회개의 메시지를 열씸히 전한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하나님이 주신 대가는 바벨론에게 멸망한 이스라엘의 비극의 모습과 [HAN 합 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라는 처참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는 [HAN 합 3:17,18] 에서 다음과 같은 위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
4. 혼자사는 생활을 익히시게 함이었다. 인간의 범죄는 혼자서 있을시 짓게되는 수가 많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혼자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자신을 이기며 사는 인내속에 경건을 이루는 훈련을 받은 것이다. 5. 기다리는 훈련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5절 :머물매 얼마간을 머물라는 그 기간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것도 적을 피하여 숨어있는 상황속에서... (예화) 사울왕이 제사장만이 드릴수 있는 제사를 조급함 때문에 자신이 제사를 드림 위대한 신앙은 아무리 어려운 현실속에서도 조급함이 있는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의 명령과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를 부르심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자기를 비우는자 상대를 신뢰하지 못하는자는 기다릴 수 없다. (예화) 모세가 율법을 받을시 산상에서 40일을 기다리고 받음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에게 왜 그런 명령을 내리셨습니까 ? 그것은 작전상의 후퇴였던 것입니다. 갈멜산의 격전을 위한 작전상 후퇴였던 것입니다. 그 격전지에서의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도록 한 엘리야의 재 훈련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의 삶속에서도 우리에게 작전상 후퇴를 하나님은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내 마음의 욕구대로 나갈려고 하는때가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날림공사를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멧돌은 서서히 돌아갑니다. 그래서 잘고 곱게 빻아집니다. 그 맷돌 밑에 내가 놓여질때만 고운 가루가 되어 주님의 제단에 올려 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거운 멧돌이 나를 짓누르기 때문에 그 밑에서 금방 뛰쳐 나오고 십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뛰어나와 버린다면 나는 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자아가 으깨지고 아픔과 인고의 시간이 지나야만 주께서 나를 통하여 그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얼마후에 시내가 마르니라” 그는 자기가 마시는 물이 점점 없어지는 마르는 고통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위해서 기도하며 그것을 감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훈련을 잘 마친후 갈멜산에서 850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적해 승리하는 종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5절 :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무매” 우리가 가장 신앙생활속에서 중요시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 순종에는 아픔과 고통이 따르지만 그 후에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매일매일 순종하는 속에서 우리 자신의 자아를 하나하나 죽이며 하나님의 능력의 조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결 론) 현대인들의 병은 문제점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정체의식에 있습니다. 너무나 분주한 생활속에서 본 자신의 모습을 잃어 버리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연의 삶을 잃어 버리고 있습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자신이 어떠한 모습속에 처해 있는지를 살펴 볼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도 그릿 시냇가를 찾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 그릿 시냇가 하나님과 만난 자리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찾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능력의 종 엘리야가 받은 훈련을 잘 받으시고 하나님의 능력의 종으로서 쓰임 받으시는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