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3년 다해 7월21일 연중 제16주일(농민주일)
[청주] 밥보다 말씀이 먼저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창세 18, 1 - 10ㄴ
† 제2독서 :콜로 1, 24 - 28
† 복음 : 루카 10, 38 - 42
한국 교회는 주교회의 1995년 추계 정기 총회의 결정에 따라
해마다 7월 셋째 주일을 농민 주일로 지내고 있다. 이날 교회는
농민들의 노력과 수고를 기억하면서 도시와 농촌이 한마음으로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맞갖게 살도록 이끈다. 각 교구에서는
농민 주일에 여러 가지 행사를 마련하여 농업과 농민의
소중함과 창조 질서 보전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16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발치에
앉아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듣는 마리아에게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지금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많은 염려와 걱정을 뒤로한 채 여기 모였습니다. 우리가 받은
좋은 몫이 온전히 구원의 열매로 성장하도록 주님의 뜻을
실천해야겠습니다. 또한 농민 주일로 지내는 오늘, 농민들의
수고를 주님께서 헤아려 주시기를 마음 모아 청합시다.
★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그네 세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가신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들을 보자 마치 그들의 하인인 양 정성껏
대접한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 부부에게서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교회의 일꾼이라고 전한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특히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도 선포되게 하시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굳건히 서 있게 하시려는
것이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의 집을 방문하신다.
마르타는, 예수님에 대한 시중은 뒷전인 채 예수님의 발치에서
그분의 말씀만 듣는 동생 마리아를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오히려 좋은 몫을 선택했다고 하신다
(복음).
◈ 오늘의 묵상
한 청년이 매일같이 빵집을 들러 식빵을 사 갔습니다. 얼굴이
창백한 그는 늘 식빵만 찾았습니다. 빵집 여주인은 영양가가
부족한 빵만 사 먹는 그 청년을 볼 때마다 측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청년도 모르게 빵에 버터를 듬뿍
발라서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청년은 빵집을
찾아와 불같이 화내다가 마침내는 좌절한 표정으로 맥없이
주저앉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도시 계획의 설계 공모에 제출하려고 오랫동안
설계도 작업을 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설계도의 지우개로
사용하려고 지금까지 식빵을 사 갔는데, 하필 마무리 작업을
하던 그날 저녁 그 버터 빵 때문에 설계도를 모두 망쳐 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이러한 일이 적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처지는 전혀 모르는 채 그를 위하여 무언가를 해 준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이해하고
그를 중심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사랑에 필요한 것은
헤아림입니다. 이것이 없는 사랑은 상대방을 힘들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향한 두 가지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사랑입니다. 마르타의 사랑은 예수님께서
지금 바라시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드리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고 싶어
하시는데, 그녀는 그것에 대해서는 듣는 둥 마는 둥 시중만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자기중심적인 사랑으로 오히려
상대방을 힘들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매일 미사 -
◈ [청주] 밥보다 말씀이 먼저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7월21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 루카 10,38-42
밥보다 말씀이 먼저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양식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먼저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8,3)고
하셨고, 실제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
(요한1,14). 오늘도 성체성사를 통해 아주 가깝게 오셔서 영적인
양식을 주십니다.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는 가운데 복을 받고 영성체를 통해서 주님과의 만남의
깊이를 더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간은 영육의 합일체로 인간입니다. 그런데 굳이
영과 육으로 구분해 본다면 ‘영을 지닌 육이 아니라 육을
가진 영’입니다. 그렇다면 밥도 먹고 말씀도 먹어야 산다고
할 때, 말씀이 먼저 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살기 위해서 밥을 먹는 것이지, 밥을 먹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6장25절이하에서 주님께서는 세상걱정과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무엇을 먹고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6,33)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히브리서
4장12절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말씀이 우선입니다. 근본을 택하면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다 채워주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르타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마르타는 열심히 음식준비를 하였습니다.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타가
참다못해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활동으로 예수님을 섬기는 마르타와 말씀을 경청하는
마리아의 역할이 다 필요하지만 무엇이 근본적인 선택이고
우선이냐를 생각하면 마리아의 몫이 먼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마르타도
자기가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으면 그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사랑을 담아 준비하였으면
그것으로 행복해야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와 비교하여 시기나 질투, 얄미운 마음을 갖는
것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처신입니다.
마르타는 깜박 잊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받으려
하시는 분이 아니라 주고 싶어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파견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섬기는 최상의 방법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마르타는 자신의 일에만
너무 집착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간과해 버렸습니다. 그녀에게는 말씀을 듣는 것보다 활동이
더 중요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르타의 유형으로
삽니다. 가끔 신부가 가정 방문을 가면 텔레비전을 켜
놓고는 ‘잠깐 보고 계십시오’ 하고 말한 다음 차나 과일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신자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과일이나
음식보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하지만 그래도
체면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모습이 꼭
마르타의 모습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활동에만 매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온 동네
다 쫓아다니며 봉사한다고 합니다. 음식도 만들고, 청소도
하고, 단체 활동을 많이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모든 것이 기도 안에서 나온 활동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기도 없이 자기만족으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반대로 마리아 유형을 흉내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서서
하는 활동은 아예 외면하고 성체조배를 한다. 무슨 기도회를
한다. 신심활동을 한다면서 자신의 기도 생활에만 열심입니다.
사실 기도를 제대로 하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2,26). 그렇다면
기도와 실천이 어우러진 삶이 필요합니다. 기도하고 실천하는
신앙생활이 조화를 이뤄야 풍요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이 따로따로 분리되어
이중생활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활동과 기도의 조화는 꼭 필요합니다. 사실 활동은 기도
안에서 나와야 바른 활동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는 활동이 되려면 기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활동을
아무리 많이 한다 하더라도 기도가 없었다면 그 일은 주님의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쁠수록 더 기도해야 하고 기도하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기도 없이 이루어지는
활동은 힘을 잃게 됩니다. “활동은 창조사업의 연장이요
구원사업의 하나이지만 거기에는 항상 기도가 병행되어야
합니다.”(성 줄리 빌리아르)
기도를 뒷전으로 미루고 활동을 앞세우는 것은 아무래도
내세우고 싶은 교만함이 쌓여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잡수실 겨를이 없이 바쁘셨지만 한적한 곳을 찾으셨고
이른 새벽에, 한 밤중에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사업이 바쁘다고 주일을 소홀히 하는 분이 계십니다. 한 주간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 ‘주일 하루는 쉬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주일을 거룩히
보내기 위해서 한 주간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날인
주일에 주님과 함께 쉬기 위해 한 주간을 정성껏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한 주간이 즐겁습니다. 사업뿐
아니라 모든 것이 잘되어 복으로 돌아옵니다. 주님을 만나는
기쁨으로 일하십시오. 그리하면 분명히 주님의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인간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기쁨과 평화의 영적인
축복과 경제적인 물질의 축복도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느 때이든 근본을 바로 세우십시오. 길이 열립니다. 사실
마리아가 선택한 몫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16,26)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세상 것에 앞서 하느님을
알고 차지하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주관하시고 모든 것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면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한 주간 밥보다 말씀을 우선 선택하여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행하는 가운데 복을 짓고 주님과의 만남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 ***
신앙생활
“십자가 없이 나아가고, 십자가 없이 교회를 세우고, 십자가
없이 그리스도를 고백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는다면 세속적으로 우리는 주교요,
사제요, 추기경이요, 그리고 교황들일 수는 있지만 주님의
진정한 제자들은 될 수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중요한 것은 한가지 뿐입니다.
2013년 다해 7월21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독일의 유명한 시인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그대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모든 것을 인내하라. 잠겨 있는
방 같고, 어려운 외국어로 쓰인 책 같은 그 문제들 자체를
사랑하도록 노력하라. 지금 그 문제를 살아라.”
침묵 속에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너무나 급하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 활동하실 시간도 드리지 않으면서 세상의 관점으로만
급하게 결론짓고 있지는 않습니까?
언젠가 외적으로 어려운 일을 겪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일들이 풀릴 것 같으면서도 계속 문제가 꼬여서 보통 머리가
아픈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의 문제들이 어떻게 풀렸을까요?
실제로 어떤 특별한 해결책이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 기도하면서 커다란 힘을 얻을 수 있었고, 이 힘을
통해서 새롭게 문제를 풀어나갈 수가 있었지요.
만약 그때 세상의 관점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인내하지 못하고 서둘러서
해결하려고만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대부분이 더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되지요. 반대로 침묵 속에서 주님께서
활동하실 시간을 드리는 사람들은, 비록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평화 속에서 좋은 해결을 갖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모습일까요?
물론 무조건 세상의 것들을 무시하면서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세상의 관점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아무리 기쁘고 행복할 수 있는 순간도 부정적인 마음과
함께 가장 불행한 순간으로 만들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르타라는 여자의 집을
방문하십니다.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설레는
순간이었겠습니까? 그리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타는 시간이 지날수록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자신의
동생인 마리아 때문이었지요. 자신은 예수님을 시중드느라
너무나 바쁜데, 동생은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조용히 말씀만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느라 분주한 그 마음이 외적인 판단을
계속하게 만든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어도
기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쁘지 않을 때, 누군가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이 들었을 때, 세상의 관점을 내세우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순간 조용히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귀를 쫑긋 세워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항상 분주한 마르타의 모습과 조용히 주님 말씀을 들으려
침묵 속에 있는 마리아의 모습 중에서 어떤 모습을 따르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한 가지
뿐입니다.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 그 하루하루의 차이가
기적을 만든다(정진홍).
얀 베르메르 -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
참 다행이다(‘좋은생각’ 중에서)
영국 심리학자 브레이저 박사는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주 하는 것을
알아냈다.
“나한테 딱 1억 원만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아이도 남들처럼 공부를 잘하면 얼마나 좋을까?”
“잘사는 사람과 결혼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미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은 주로 ‘내가 ~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가정형
질문에 매달려 스스로를 괴롭혔다. 브레이저 박사는
그들에게 ‘나는 ~가 아니라서 다행이야.’라는 문장을 매일
네 개씩 만들어 보라고 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부러운 이들을
떠올리며 불평하던 때와 달리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문장을
완성했다.
“난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어 다행이야.”
“난 오늘도 먹을 수 있고, 잠잘 곳이 있어 다행이야.”
“난 두 눈으로 볼 수 있어 다행이야.”
브레이저 박사는 이 훈련을 한 지 6개월 뒤 “여러분은
지금 행복합니까?”라고 물었다. 사람들은 환한 얼굴로
고래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살아 있음 그 자체가 참 다행입니다.”
이 글을 보면서 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여러분 역시 한 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십시오.
행복한지를....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연중 제16주일(농민주일)
2013년 다해 7월21일
‘제주 강정 마을 해군 기지 건설, 밀양 송전탑 건설, 쌍용 자동차
노동자 문제, 국정원 대선개입 문제’ 이런 일들은 신문과
방송에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일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변을 보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름에는
휴가를 가고, 새로운 차를 마련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의
가족들이 행복하면 됩니다. 길가에 버려진 휴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비정규직 노동자, 탈북자, 갈 곳을 마련하지 못한
철거민들은 보이지 않고,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눈을 뜨고
있지만 이런 사람들에게 도시는 눈먼 이들의 도시가 될 것입니다.
가톨릭 정의 평화 위원회에서 거리의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밀양의 송전탑 건설에 항의하는 사람, 제주도 강정 마을의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사람, 복직을 원하는 해고 노동자,
부정과 불의에 맞서는 사람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이분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하지 않았습니다. 신문과
방송에는 나오지 않지만 우리 주변의 불편한 진실들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결해 주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그들의 편에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은 낯선 사람들을 맞이해서
후한 대접을 하였습니다. 먹을 것을 주었고,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은 자녀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선을 베푸는 사람에게는 좋은
일들이 생긴다는 간단한 진실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하지 않았습니다. 보아야
할 것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끄는 길은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나의 모든 것을 절대자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이고, 우리의 존재는 환영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불이 있어야 불빛이
있듯이, 환영에 불과한 이 세상의 존재는 그 근원인
절대자를 찾아야만 비로소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가 이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깨달은
많은 사람들이 절대자에게 의지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이성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성은 철학, 문학, 과학, 이념, 조직을 낳았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이성은 무한한 발전과 성장을 할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이성의 발달, 과학의 발달이 아직까지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알려 주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세 번째는 사랑의 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고,
사람의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 사랑으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랑의 길은 현재를 살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시작할 수 있고, 죽음 후에도 영원한 생명의 길을 갈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절대자에게 맡기는
것도, 우리의 이성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길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길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그 길이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마리아의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지 않고,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찬양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청원입니다.
기도는 나의 가족과 이웃들의 행복과 평화를 위한 전구입니다.
기도는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입니다.
기도는 나의 모든 것들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언젠가 식당에서 읽은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생각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두십시오.
그것은 힘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읽는 시간을 따로 떼어 두십시오.
그것은 지혜의 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사랑 받는 시간을 따로 떼어 두십시오.
그것은 신이 부여한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웃는 시간을 따로 떼어 두십시오.
그것은 영혼의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시간을 따로 떼어 두십시오.
그것은 이기적 이기엔 우리의 하루가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두십시오.
그것은 지상 최대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좋은 몫이란 무엇일까?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아무리 좋은 명분이라도 그 동기가 옳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 명분입니다.'
2013년 다해 7월21일 연중 제16주일 복음묵상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루카10,41-42)
----
누구나 상대의 마음이 딱딱한 것보다는 부드럽기를 바란다.
더욱이 관계가 가까울수록 그러하다. 그러면서도 대부분의
우리는 자신의 마음은 딱딱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한가? 부드러운가? 아니면 딱딱한가?
최소한 딱딱하고 고집스럽고 꽉 막혔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 또 다른 우리의 아픔이 있다.
성당에서 신자들 사이의 갈등을 자주 보아왔다. 그리고
이는 어느 나라 어느 성당을 가도 흔한 일이다.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잣대로 재면서 가르치고 충고하고 비판 하려는 이들이
많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키지 않거나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무척 매섭게 냉정한 칼을 휘두른다.
참 답답하고 아픈 일이다. 왜 그래야만 할까?
우리가 남을 비판하거나 비난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격이
필요하다. 여기서의 자격은 감투나 대학졸업장이나 전문가의
면허증이나 심지어 연령도 아니다. 우선 내가 비판하려는
마음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자아성찰이 가능한 사람이어야
한다. 진정으로 상대를 생각하고 걱정해서 하는 비판인지,
아니면 잡스러운 감정에 의한 것인지를 식별하려는 노력이
늘 함께 하는 이들만이 그 자격이 주어진다.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에 대한 분노는 무척 상식적이고
당연한 분노처럼 보인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우리의 눈에는 분명 마르타의 요구는 정당해 보였고,
마리아는 철없는, 정말 얌체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아마 나였어도 그런 상황에 부딪힌다면 최소한 속으로라도
욕을 해댔을 것이다. “형편없는 놈!”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답을 하신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좋은 몫이란 무엇일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는 그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 모두는 착각하면서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정말로
쓸데없는 생각들로 마음을 다 쓰고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누가 그랬던가? 가짜가 세상에서 진짜와 제일 비슷하다고.
사건이나 사물에 대한 어떤 감정이 일어날 때 그 감정의
원인을 성찰 할 줄 알아야 한다. 마르타가 화를 낸 것은
마리아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마리에게 느끼는 질투
때문이었다. 그 질투심이 도덕이라는 칼로 둔갑을 하여
마르타의 입을 열게 하였다고 보는 것이 제대로 된 파악일
것이다. 물론 마리아도 잘못이 크다면 크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의 복음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마리아의 잘못이 아니라 마리아의 선택이었고,
그 것에 대한 마르타의 상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상식이라고 하는 것들, 옳다고 믿는 것들이 거짓일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옳게 선택했다고 하는 것들,
옳다고 생각하는 말들과 행동, 남에 대한 판단, 비난마저도
감추어진 자기 상처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결론은 간단하다. 좋은 몫을 택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기도가 정말 제대로 된
기도라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답변을 주시리라 확신한다.
부드러워져야 한다. 딱딱하게 굳은 가슴을 부드럽게 만들어야
한다. 슬퍼해야 할 것에 슬퍼할 줄 알고, 웃어야 할 것에 웃을
줄 아는 그런 마음이어야 한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수도회] 고기 뷔페집에서
7월21일 다해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루카 10,38-42
고기 뷔페집에서
언젠가 식욕이 왕성한 아이들, 젊은 수사님들과 고기뷔페
집에 간적이 있습니다. 종업원들이 차려놓는 즉시 그야말로
‘싹쓸이’였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갖다놓은 즉시 초토화니
종업원들은 물론 사장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 졌습니다.
급기야 사장님은 ‘해도 해도 너무하다’며 ‘여기 계산하실
분 누구냐’고 저를 찾았습니다. 저는 정중히 사과를 드렸고
일인당 얼마씩 더 추가로 계산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고을 저 고을 전도여행 다니느라 허기진 장정들이 한 두
명도 아니고 우르르 떼거리로 몰려들었습니다. 그간 얼마나
쫄쫄 굶었던지 다들 차려놓기가 무섭게 싹쓸이였습니다.
주방 총 책임자격인 언니 마르타는 그야말로 손이 열 개라도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를 한번 보십시오. 언니는 걸신들린
제자들 때문에 바빠 죽겠는데 마리아는 손 하나 꼼짝하지
않고 화사한 얼굴로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르타 입장에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겠지요. 생각 같아서는
“마리아, 너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거여? 나 바빠
죽겠는거 안보여?” 하며 당장 주방으로 끌고 갔을 텐데,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예수님께 볼 맨 목소리로 따집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
그때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너무나 당연히 이랬을 것입니다.
“그래, 마리아. 이제 좀 일어나서 언니 좀 도와주지. 사람이
눈치가 좀 있어야지. 빨리 일어나서 부엌으로 달려간다,
실시!”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것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제 삶을 돌아볼 때 마다 예수님의 말씀이 백번 지당하다는
것을 온 몸으로 실감합니다. 일에만 빠져 있을 때, 일중독주의에
파묻혀있을 때와 영적생활에 우선권을 두면서 일을 할 때와는
천지차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살 때,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의 활동은 더 의미와 기치를 지니고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생활에 우선권을 둘 때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사도직 활동은 훨씬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 일에만 목숨걸때 우리는 쉽게 지칩니다. 불평불만은
쌓여만 갑니다. 마르타처럼 다른 사람을 탓합니다. 그리고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일만을 위해서 일을 할 때, 일 중독자들의 끝은 결국 허탈함이며
공허함이며 허무입니다. 플러스알파를 찾아야 할 순간입니다.
바로 마리아처럼 하느님께 나아가는 일입니다. 하느님 발치에
앉은 일입니다. 하느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일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똑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서울] 기기보다 사용하는 인품이
2013년 다해 7월21일 연중 제16주일
외형보다 내형, 겉보다 속을 봐야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요 근래는 물질이나 과학 발달로 반대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바로 옆 사람이 의심가고 두렵고 그런 기분이 절로
듭니다.
그러면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말이 점점 힘을 갖게 되는 거지요.
발달하는 기기보다 사용하는 인품이 더 발달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컴퓨터나 스마트폰 속에 인품에 관한 여러 진품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41~42)”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