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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7월23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수원] 대아(大我)와 소아(小我)의 공명(共鳴)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탈출 14, 21 - 15, 1ㄴ
† 복음 : 마태 12, 46 - 50
★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바다에 이르렀을 때 이집트
군대가 그들을 뒤쫓아 왔다. 모세는 손을 뻗어 바다를 가르고 백성이
마른땅을 밟고 건너가게 하였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종살이에서
온전하게 해방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르치고 계실 때 어머니와 친척들이 찾아왔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함께 나누는 이들이 당신의 가족이라고
선언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제가 외국에서 공부할 때에는 전 세계 각 나라에서 모인 신부님들
120여 명이 함께 생활하는 기숙사에 있었습니다. 그곳에 한국
사람은 저밖에 없었으므로 많이 외로울 것이라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러나 막상 생활하며 같이 지내다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깨달음은 여러 신부님들과 함께 미사를 드릴
때 처음 찾아왔습니다. 함께 성무일도를 바치고 성가를 부르면서
이질감보다는 동질감이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더 나아가 언어,
피부, 민족, 국가가 다른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믿음
안에서 서로 공감하는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 자매, 부모’라는 말을 혈연이
아니라 신앙에 따라 사용하십니다. 곧 예수님께 가족이란
물리적인 핏줄이 아니라 영적인 핏줄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적인 핏줄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하느님의 뜻이 흐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뜻이 흐르고 있으므로
함께 미사를 드리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외국 신부님들에게서 저는
가족애를 느꼈던 것입니다. 우리가 길거리에서, 버스나 지하철에서
묵주 반지를 낀 교우를 보면 반가운 것도 우리 안에 하느님의 뜻이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의 신앙 공동체가 지금보다 더 가족적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길은 오로지 주님의 뜻을 함께 찾고,
그것을 잘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를 한 가족으로 묶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형제와 자매, 어머니를 얻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7월23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 12,46-50
형제와 자매, 어머니를 얻다.
우리나라의 인구가 지난 2012년 6월23일로 5천만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2045년에 이르면 다시 5천만명 이하로 떨어진답니다.
저출산, 고령화 문제로 이제는 혈육으로서의 형제, 자매라는 관계도
형성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하시며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12,50)하십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새로운 형제자매를, 어머니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앞서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이어서 제자들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시고 하늘나라의 가족관계를 형성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제자들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로마8,14-15).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요한 5,1). “여러분은 모두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삶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갈라3,26).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에폐5,8). “여러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답게
하느님을 닮으십시오”(에페5,1). “사람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리낌 없이 그들을 형제라 부르셨습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며 회중 가운데서 당신을 찬미
하겠습니다…….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 나와 함께 여기
있습니다”(히브2,11-13).
믿음으로 형성된 새로운 관계를 생각하며 하느님의 자녀다운 품위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 사이에 형제애의 관계도 돈독히
해야 하겠습니다. 성당에 잘 나오지 않는 분들이 가끔 “아내가 열심히
해서 치맛자락만 붙잡고 있으면 반 천당은 갈 것” 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내가 주님과 맺은 관계와 내가 맺는 관계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뜻을 열심히 실행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아내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묵주반지를 끼고 신자라고 폼 냅니다. 그것도 금으로
만들고, 때로는 보석을 박아 자랑합니다. 자동차 안에는 십자가나
묵주를 걸어놓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 것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주님을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매달고 다니며 간직하면
좋은 일이 생기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닌지요? 생각 없이 지니고
다닌다면 부적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 스승과 제자, 스승과 나의 깊은 관계는
어떤 물질적인 것이나 상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혈연이나 가정, 민족이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영적인 관계를 통해서 장차 완성될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의 가족을 미리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뜻을 사는 이들은 이미 한 가족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창조물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태양을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노래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차원을 뛰어넘어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 사는 가운데(갈라2,20) 형제자매의 관계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영적으로 하나되는 신앙공동체
2013년 다해 7월23일 연중제16주간 화요일
어제는 인천교구 대학원 1학년 학생들이 한 달 피정을 마치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주교님을 모시고 이 신학생들과 함께
파견미사를 봉헌했지요. 파견 미사를 하는데 이들이 부르는
성가 소리가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화음도 넣어가면서
부르는 성가 소리는 마치 오랫동안 입을 맞춘 중창단 같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신학생들이 한 달 피정 중에 성가
연습을 했을까요? 그럴 리가 없지요. 왜냐하면 이 한 달 피정은
대침묵 피정이기 때문에 아무리 친한 동창이라도 말 한 마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영적으로 하나를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 달 동안 신학생들이 얼마나 많은 영적 싸움을 했겠습니까?
정말로 무엇을 쫓아야 하는지, 정말로 중요한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깊은 묵상을 통해 선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더욱 더 가깝게 되었고, 모두가 주님 안에서 영적으로 하나가
된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성가 연습을 한 적도 없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성가 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성가 소리를 들으면서 함께 미사를 했던
신부들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합니다.
“성가 잘 못 부르는 것은 아마도 기도를 하지 않아서인 것
같아요. 이제 성가연습보다도 기도를 더 많이 시켜야
하겠는데요?”
영적인 일치가 이렇게 실제로도 서로를 하나로 묶어 준다는
것입니다. 이 체험은 저 역시도 한 달 피정 안에서 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때에는 피를 나눈 형제보다 영적인 일치를
보았던 동창신부들이 더 편하고 가깝게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혈연관계로 맺어지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관계로 이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영적 관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오셨음에도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라고 반문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혈연관계보다 더 중요한
관계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영적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맞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뜻을 충실하게 실행하는 영적인
관계로 똘똘 뭉쳐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또한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을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오로지 주님의 뜻을 향해서 함께 걸어갈 때에 그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운 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이렇게 영적으로 하나 되는 신앙공동체.
지금 당장 만들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한달 피정을 마친 신학생들과 함께...
무엇을 좇을 것인가?
지난주에 어느 성당에 미사를 갔다가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미사가 끝난 뒤에 신자들에게 성당 뒤에서 인사를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한 무리의 자매님들이 제 곁으로 오더니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신부님 입술 옆에 밥풀 같은 것 묻었어요.”
무슨 소리인가 했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라서 입술 옆을 만지는
순간, 자매님들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지요. 사실 제가
피곤해서인지 입술 옆이 약간 찢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조그마한 상처가 생활을 무척이나 불편하게 하더군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 상처 위에 약을 발라놓았는데, 그 바른 약의
모습이 마치 밥풀처럼 보였나 봅니다.
저는 밥풀이 아님을, 상처가 나서 약을 바른 것임을 말씀
드렸지요. 그랬더니 한 자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신부님, 저는 밥풀 붙은 줄 알고서 미사 시작하면서부터
얼마나 분심이 들었는지 몰라요. 계속 ‘신부님께서 떼셔야
하는데... 떼셔야 하는데...’ 만 생각했다고요.”
아픈 것도 제가 아픈 것이고, 또 창피를 당하는 것도 제가
당하는 것인데, 정작 미사를 제대로 봉헌하지 못한 것은 그
자매님들이었습니다. 미사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과 진정으로 하나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다른
것에 관심을 쏟고 있어서 정작 주님과 하나 되지 못했던
것이지요.
쓸데없는 것에 너무나 많은 관심 속에 살고 있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정작 중요한 것을 행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정말로 주님의 뜻을 제대로 좇을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2013년 다해 7월23일
수련장에는 함께 사는 가족들이 많습니다. 주방에서 일하시는
글라라 어머니, 27년간 수련장을 지켜 오신 베드로 실장님,
올 3월에 베드로 실장님의 뒤를 이어서 수련장의 관리를 맡게
될 프란치스코 관리장님, 여름 캠프와 겨울 복사학교를 준비하고,
저를 도와서 피정 진행을 하는 율리안나 연구원, 수련장의 모든
사무를 책임지는 말가리다가 있습니다. 이분들이 있기에 저는
수련장에서 기쁘게 지낼 수 있습니다.
눈을 돌려 주변을 보면 또 다른 가족들이 있습니다. 새끼를 13마리나
낳았던 토끼, 매일 알을 낳아주는 닭과 오리 그리고 칠면조, 수련장의
얼굴인 애니와 토니 진돗개, 오랜 동안 수련장을 지켜온 진이와
몽실이도 진돗개입니다. 성심연에는 물고기들이 있고, 테라쿠아에는
관상용 물고기들이 있습니다. 수련장에는 많은 새들이 머물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많은 나무와 꽃들이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저와 함께 사는 가족입니다. 이들이 있어서 수련장이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지난밤에 수련장을 비추었던 둥근 달도, 요즘 장마 때문에 얼굴을 자주
볼 수 없는 태양도, 흘러가는 구름도, 스쳐가는 바람도 모두 수련장의
가족입니다. 이곳을 찾는 어린이, 청소년, 어른들도 저의 가족입니다.
그분들이 이곳에서 즐겁게 지내는 것을 보는 것은 기쁨입니다. 그분들이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먹는 것을 보는 것도 행복입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군요. ‘걸’로 말을 마치는 사람은 늘
후회하거나, 불평하게 된다고 합니다. ‘자지 말고 공부할 걸, 화내지
말고 참을 걸, 교통신호를 지킬 걸,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날 걸’ 이렇게
늘 ‘걸’을 입에 달고 살면 삶의 그림자만 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루를 사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반면에 ‘다’로 말을 마치는
사람은 새로운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살 수 있다고 합니다. ‘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웬만하면
‘잘했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고맙다는 말도 자주 합니다. 그러면
기분이 나쁘다가도, 속이 상하다가도 마음이 편안해지곤 합니다.
나뭇잎은 부는 바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는 바람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더욱 지혜로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태어났습니다. 신앙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느님께로 갈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나뭇잎이 바람에 자신을
맡기듯이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에 모든 것을 맡기면 한결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도 결국은 다 지나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분열과 대립이 있습니다. 소통과 대화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타협과 존중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작은 이 나라에 ‘지역, 이념, 세대,
빈부’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이들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고, 옳다하여도 나의 편이 아니라면 무조건 반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참된 소통과 대화를 위한 원칙과
상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학연, 지연, 혈연’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세대, 이념, 빈부’의 잣대로 판단해서도 안 된다고 하십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원칙과
상식이라고 말을 하십니다.
지금은 죽고 못 살 것 같지만 그것도 다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난다면 우리 모두는 한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나태주님의 시를 하나 읽어 드리겠습니다.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 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시인은 우리 모두는 어두운 우주에 아주 작은 별인 지구에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악의 존재 이유는 선을 없애는 것입니다.
선한 마음들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2013년 다해 7월23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마태오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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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들이 말하는 것 중의 하나는 경제가 안정이 되지 않고
어수선해지면 제일 먼저 드러나는 현상이 일그러진 국수주의나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고 일어 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지
요즈음 이 나라 저 나라에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가 떠오른다. 이 두 분의 삶에는 공통점이
많다. 비운의 한 시대를 한 목적을 갖고 살다가 목숨을 소신을
위해 바친 이들이다. 그 두 분은 암울한 시대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삶의 방식에 대해 주장하셨다. 김구 선생은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를,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
(東洋平和論)을 미래의 돌파구로 선택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사해동포주의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모든 민족이 동포라는
마음을 갖고 서로 도우며 아끼며 살아가야 한다는 정신이다.
동양평화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한국, 일본, 중국 청년들이 하나의 장소에 모여 배움의
길을 걸으며 동양의 평화를 위해 공헌할 인재들을 키워내야
한다는 정신이다.
국권과 주권을 빼앗긴 시대에 독립과 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 적에 대한 증오심이 바탕이
된 민족주의나 국수주의가 아니라 평화와 화해였던 것이
더욱 놀랍기만 하다.
나는 가톨릭의 한 사제로서 역사적으로 많은 갈등을
가지고 있는 일본에서 일본에 있는 신자들을 내 가족으로
여기며 그들을 위해 사목을 하고 있다. 적지 않은 차이를
극복하면서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안에서 같은 가족이라는
마음으로 함께 살고 있다. 같은 신앙으로 묶인 서로이기에
나 역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고 사랑을 받고 있다. 분명한
것은 내가 있는 곳이 어디던지 그 사람들을 위해 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다.
시대적 상황은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끄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우리 나라 좋은 나라, 남의 나라 나쁜 나라”라는
교육을 받으면서 자란 유년시절을 갖고 있다. 심지어는
같은 민족인 남과 북을 극과 극으로 가르는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간단히 말하고 싶다.
이 나라에도 저 나라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모두를 한 색깔을 가진 사람들로
묶고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그럴 수 없다면, 국수주의와
민족주의와 같은 온갖 종류의 배타주의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게 된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편견 속에서 살
수 있는지를 의식해야 한다.
물론 나라가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나라를 튼튼하게 해야 하는 이유는 그 나라 백성들이
잘 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자국의 사람들이 잘 살기
위해서 남의 나라가 희생이 되어도 된다는 생각은 반드시
없어져야 할 악한 생각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평화는 결코 가능해지지 않으리라.
내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를 구성하는 이들도 대부분 선한
백성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옳고 선한 백성들이 하나의 힘이 되어야 한다.
나라가 엉터리가 되는 대부분의 이유는 잘못 만들어진
인간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란 어쩌면 사기성 없이는 할 수 없는 세계일 수도 있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권력을 빼앗기 위해 백성을
속일 수 있는 온갖 종류의 방법을 모색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세계라 할 수도 있다.
옳음이 기준이 아니라, 잇속이 기준이 되어 어떤 타협도
가능해 보이는 세계이다.
그렇다면 정치의 속성을 있는 대로 인정하자.
그리고 옳고 선한 백성들이 그들의 견제세력이 되어야 한다.
자신들의 욕망을 드러내려 한다면 가차없이 그러지 못하게
백성들이 가장 효과 있는 방법으로 움직여야 한다. 이러한
우리의 삶의 태도가 허락될 때, 나라가 건강해질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선한 마음과 옳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 어느 누구도
우리의 형제요 부모들이 될 수 있다.
온갖 종류의 집단 이기주의에서 해방되는 우리이기를
기도한다.
(이 글은 곧바로 일본어로도 옮겨집니다. 그리고 내 본당
신자들에게도 읽혀질 것입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수도회] 또 다른 탈출을 바라시는 하느님
2013 다해 7월23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마태 12,46-50
<또 다른 탈출을 바라시는 하느님>
전에는 ‘출애굽기’라고 불렀는데 요즘은 ‘탈출기’라고 칭하는
이 성경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놀라운
업적과 은총을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오랜 노예살이에 타성이 붙기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
이었습니다. 굴욕스런 종살이도 오래 하다보면 몸에 습성이
붙습니다.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종으로 부려먹는
대신 가끔씩 선심 쓰듯이 적당한 반대급부를 제공했습니다.
먹고살 만큼의 양식과 최소한의 거주지와 약간의 휴식 등등...
마치 가끔씩 기분 좋아진 강아지 주인이 마루 밑에 있는
강아지에게 고깃덩어리 하나 던져주듯이 그렇게 말입니다.
노예살이의 햇수가 거듭해갈수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슬슬
종이라는 신분에 적응해나갔습니다. 주인들이 던져주는
양식에 길들여져 갔습니다. 점점 노예근성과 의존성,
타성에 깊이 빠져 들어갔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모습에 드디어 하느님께서 움직이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도구로 모세를
선택하셨습니다. 그 모세의 인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숱한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홍해를 건너 이집트를 탈출하게
됩니다. 이집트 탈출과정에서 보여주신 하느님의 손길은
참으로 감동적이고도 경이롭기만 합니다.
사실 철옹성처럼 견고했던 파라오 왕국이었습니다. 이집트
군대의 규모나 수효는 실로 엄청난 것이어서 바라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기에 집단적 탈출이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사실 탈출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늘 그렇듯이 불가능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되는 일이 없습니다.
거듭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며 정말이지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탈출을 가능하게 만드셨습니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을
성공으로 인도하신 하느님께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향해서도 또 다른 탈출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제 발밑, 제 내면을 돌아봅니다. 저만해도 이뤄내야
할 탈출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오늘 내가 수행해 내야할
작업, 다시 말해서 노예살이의 땅에서 자유인의 땅으로
건너감의 작업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중년기 징후인 나태하고 무기력한 얼굴에서 생명력 있는
삶에로의 건너감, 용서하지 못함으로 인한 우울함에서 참
용서를 통한 참 기쁨의 나날에로의 건너감이 필요합니다.
불행하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이집트 땅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노예살이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종살이에
맛 들여, 그게 전부인가, 이게 내 운명인가 여기며 굴욕적인
삶을 마지못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한 가지
과제가 있습니다. 아직도 이집트 땅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
죄와 죽음의 땅인지도 모르고 거기 ‘죽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외치는 것입니다.
빨리 이쪽으로 건너오라고, 제발 노예 신분을 떨치고 자유인
증명서를 발급 받으라고, 하루라도 빨리 진흙탕에서 나와
샤워장으로 들어오라고...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대아(大我)와 소아(小我)의 공명(共鳴)
2013년 다해 7월23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복음 : 마태오 12,46-50
< 대아(大我)와 소아(小我)의 공명(共鳴) >
한 사업가가 김창옥 교수의 강의 CD를 내고 싶다고 찾아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의 얼굴을 보니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장님, 표정이
제가 한 마디만 하면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이시네요.”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그 남자 사장님이 그 자리에서 진짜 눈물을
뚝뚝 흘리더랍니다.
그 분이 교수님을 데리고 자신의 출판사 사무실로 와서는
여자 실장님을 잠깐 들어오라 하더니 교수님을 소개시켜
주고 다시 나가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또 울기
시작하여, 왜 그러시느냐고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방금 들어왔던 여자 실장님은 자신의 아내이고, 아내에게
회사를 맡기기 위해 나와서 일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고,
자녀들 교육보험도 다 들어놓고, 자신은 지금 자살을
준비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몇 개월 전부터 자살을 준비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연인 즉 이렇습니다. 이 사람은 막내였는데 아주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집이 가난했는데,
게다가 어머니가 중풍이었다고 합니다. 어머니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는데 이미 결혼한 누나들의 집에 돌아가며
1년씩 얹혀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조카들이 “왜 냄새나는 할머니가 우리랑 살아야
돼?”라고 하며 자신의 엄마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나니 조카들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고 자신도 빨리 돈을
벌어 어머니를 모시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도 기숙사와 장학금을 대 주는 곳에
합격하여 나중에는 원양어선을 타서 돈도 어느 정도 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모실만하게
성장했는데, 그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중풍 걸린
어머니가 창피하고 떠나고 싶었던 과거의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마음이 아파 그 다음부터는 어머니에게 하지 못한
효도를 다른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 주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을 이용해 먹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고
수많은 사기를 당하여 집안 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접고 한국 사람이 적은
러시아로 이민을 갔지만 거기서도 조금 남은 돈을 한국
사람에게 또 사기를 맞고 다시 한국 들어왔는데도 끊임없이
사기를 맞아서 이제는 죽기만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께 잘해 드리지 못한 죄책감이 결국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서까지 남에게 동정을 베풀게 만들었고, 결국
자신에게 해를 끼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남에게 잘해 주는 것이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어머니와 형제들은 예수님께 차가운 대접을
받습니다. 어떤 이들은 오늘 복음을 두고 예수님께서
성모님과 형제들을 존중하지 않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지금 한 여인의 아들이 아닌,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써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당신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더 이상 사람은 아니신 것일까요?
그리스도께서 사람임을 포기하고 계속 하느님의 아드님이기
만을 주장한다면 전 그 분을 믿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참
사람이기를 포기한 분이라면 사람을 참으로 사랑했던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서 우리 죄를 보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죄도 용서받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아(큰 나)는
하느님의 뜻이고, 소아(작은 나)는 사람의 뜻입니다. 그러나
땅이 없으면 하늘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없으면
누구의 하느님이 되시겠습니까? 소아만 강하다면 당연히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는 하겠지만, 소아를 무시하고 대아만
생각하는 사람도 온전한 사람은 못 되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코르반’, 즉 하느님께 바쳐진 예물이라고만
말하면 부모에 대한 의무가 사라진다고 가르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비판하셨습니다.
일본의 가미가제 자살 특공대는 자기 가족을 위하는
소아보다는 나라를 위하는 대아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9.11 테러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이들도 그렇게 믿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천황이나
알라신을 위해 소아를 희생하는 것이 올바른 삶으로
믿었지만, 소아가 없으면 대아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국기에 대한 경례나 국민교육 헌장에서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우리 존재 이유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에 대해
반대합니다. 거기엔 소아의 중요성은 들어있지 않고 대아만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대아와 소아의 ‘긴장감’을 나타내는
것이지 소아를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대아와 소아는 마치
기타 줄을 잡고 있는 처음과 끝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어느
하나라도 제 역할을 못하면 줄은 느슨해지고 그 줄에서는
어떤 음도 나오지 않습니다. 대아와 소아의 팽팽한 긴장감
위에서 만이 온전한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의 모든 행위는 대아와 소아가 함께 공명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온전히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또한 당신 자신을 위한 행위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비록 오늘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육적 어머니를
외면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다른 때, 예를 들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는 육적인 어머니의 청으로 아직 때가 이르지도
않았지만 물을 술로 만드는 첫 번째 기적을 행해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대아와 소아, 그 둘 중에 하나만 허물어지면 더 이상 예수님은
인간이 아니거나, 하느님이 아니게 되어 우리 구원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지칭할 때 꼭 ‘사람의 아들’이리고
하셨습니다. 이런 선상에서 복음을 이해해야지 한 면만 보고
그것이 그 사람의 전부라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냥 이웃을 사랑하라고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대아의 이웃사랑이 소아의 자기사랑과 함께 공명해야만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들이라고 했다면, 이는 또한 당신 육신의
어머니에 대한 인간적인 사랑도 동시에 공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셨다면, 그
어머니보다 아버지의 뜻을 따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삼용 요셉신부 -
◈ [서울] 형제 누이 아버지 어머니가 누구인지
2013년 다해 7월23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희로애락, 관혼상제 등의 일들은 누구와 함께 지내야 좋습니다.
점점 핵가족이 많아지며 이런 일에 별로 신경들 안 쓰는 것
같습니다. 실은 가족들이나 친지들이 함께 치러야 뜻 있는
행사가 될 텐데요.
여기 형제 누이 아버지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려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님이십니다.
이에 신앙인들은 자기 영혼 구하면서 동시에 많은 식구를 얻는
거지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태오 12,50)”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기타] 가족 너머
시골에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산 지 8년이 되어간다. 내가
사는 마을엔 혼자 계시는 70-80대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다.
몸이 성하실 때는 잘 모르다가 아프시면 자녀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함께 살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이웃으로
해야 할 것이 있고 가족이 해야 할 것이 있다는 나의 생각
때문일까? 아무리 가족들 관계가 소원해지는 사회풍조가
만연하다고는 하지만, 어렵고 힘든 것 앞에서는 가족밖에
없다는 생각이 내 무의식 안에 있는가 보다. 이웃의 역할,
가족의 역할을 나누는 것은 어쩌면 이웃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것을 정당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거나 ‘팔이 안으로 굽지
밖으로 굽는 것 봤느냐.’는 말이 갖는 혈연 중심의 가족관계를
뛰어넘어 계셨다.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보이는 혈연관계를 넘어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관계 안에서 만들어진 가족관계. 모두가 어머니이고,
형제고, 자매라면 이 세상은 모두가 다 사랑인 세계. 예수님처럼
이런 가족관계를 가지려면, 나는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 걸까?
마음이 묵직해진다.
‘주님, 마음이 묵직해지는 건, 아직 비워내지 못하는 것이 많은
거예요. 죄송해요.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기다려 주셔요.’
- 박후임 목사(봉곡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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