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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7월25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수도회] 참다운 권력은 섬김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제1독서 : 2코린 4, 7 - 15
† 복음 : 마태 20, 20 - 28
야고보 사도는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으로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 사도의 형이다. 어부인 야고보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동생 요한과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베드로
사도, 요한 사도와 더불어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세 제자 가운데
하나이다. 열두 제자에는 야고보가 둘 있는데,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 ‘작은[소] 야고보’와 구분하여 ‘큰[대]
야고보’라고도 부른다. 42년 무렵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였다.
★ 보물을 보관할 때에는 고급스러운 함을 사용하지, 질그릇 같은 것을
쓰지 않는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보물과도 같은 고귀한 사도직을
질그릇이나 다름없는 우리에게 내려 주신다(제1독서).
★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어머니를 통하여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청탁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진정으로 원해야
하는 것은 높은 자리가 아니라 낮은 자리여야 하며, 다른 이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하여 네덜란드 출신의 헨리 나웬 신부는
『이 잔을 들겠느냐』라는 자신의 책에서 깊이 통찰하였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잔’에 술을 따를 때에는 ‘건배’를 합니다. 물이나
음료수를 마실 때에는 그렇지 않은데 왜 술을 마실 때에는 건배하는
것일까요? 온 인류가 이러한 건배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은 술을 따르고
잔을 부딪치는 행위가 서로의 삶을 축복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술을 따르는 것은 그 사람이 그동안 살아오며 느낀 슬픔, 기쁨, 절망,
보람, 긍지, 각오 등을 담는 것이고, 잔을 높이 드는 것은 이 모든 삶의
내용을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는 행위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잔을 부딪친다는 것은 각자의 느낌을 서로 교감하면서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누면서 서로의 삶을 축복해 주었던 것입니다.
‘잔’에 이러한 뜻이 담겨 있다면, 예수님의 잔을 마신다는 것은 그분 삶의
방식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그분께서 사람이 되시어 느끼셨던
모든 것을 자신의 느낌으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또는 주일마다 제대 위에서 그리스도의 잔을
높이 들고 그것을 나누어 마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삶을 살아가고, 그 삶 속에서 그분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내려 놓아라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3년 다해 7월25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마태20,20-28)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저는 감곡 매괴성모순례지성당 주임신부입니다. 본당과 순례지
담당을 겸임합니다. 지구장의 직책을 가지고 있고 노인복지관 관장,
재가노인지원서비스센터장을 겸임하고 있습니다. 동료신부들은
이런 저를 보고 복이 많다고 위로 합니다. 일부 신자들은 출세하였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야말로 출세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짐을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내려놓기를 바랍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존경 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기가
내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충실하게 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존경을 권위에서
오기보다는 권력에서 오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를
차지해서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을 존경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그 권력은 10년을
못갑니다. 권력을 소유했던 우리 역대 대통령이 얼마나 존경을 받고
있나요? 성철스님이나 김수환 추기경님, 이태석 신부님이 권력을
추구했다면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을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20,21)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머니로서 아들이 잘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으나
줄서기를 잘하고, 청탁을 해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벌써 치맛바람이
불었나봅니다.
어찌 되었든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제자들도 불쾌하게 여기며
화가 나있었던 것을 보면 그들도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불공정한 경쟁으로 생각 했든, 그 형제들의
무례에 화가 났든 개의치 않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가운데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7-28)고 하시며 생각을 바꾸도록 새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모두의 속을 꿰뚫고 계셨습니다.
모든 능력을 지니신 스승예수님께서 몸소 섬기는 삶에 본을 보여주셨다면
제자는 당연히 그 삶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제자입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상대로부터 대접을 받으며 권력을 휘두르려는 마음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양다리 걸치기를 합니다. 마음은
간절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가려 하지 말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며
상대방에게 맞춰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높이 오르는 자에게 머리를 숙이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그
반대입니다. 그러므로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더 많이 낮아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자신을 낮추는 작은 사랑의 움직임
외출하기 위해 교구청 주차장에 세워진 제 차를 향해 걸어가다가
조그마한 달팽이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주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가고 있더군요. 문득 이렇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의미 없어
보였습니다. 어디를 가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렇게 느리게 가서
언제 목적지에 도달할까 싶었지요.
한 시간 정도 외출을 나갔다가 다시 교구청으로 들어왔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오는데 한 시간 전에 보았던 달팽이가
생각나더군요. 그렇게 느리게 가고 있었던 달팽이가 지금은 어디쯤
갔는지 궁금한 것입니다. 동시에 ‘한 시간 동안 달팽이가 움직이면
얼마나 움직였겠어?’라는 생각과 함께 주차장 주변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느린 달팽이의 움직이는 속도라면 분명 이 근처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이 달팽이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포기를 하고 사제관 쪽으로 걸어가는데 화단에 달팽이 하나가
보이는 것입니다. 크기며 겉모습아까 주차장에서 보았던 달팽이였습니다.
느릿느릿 움직여서 제 시선을 벗어나는 곳까지 이동한 것입니다. 그리고
느리다고 과소평가했는데 그 느린 움직임 자체가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가 행하는 작은 움직임 자체가
처음에는 별 볼 일 없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 움직임을
통해서 큰일을 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행동 하나에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또한 남들이 보고 인정하는 큰일만을 좋아하고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알아주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보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언제나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청합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십시오.”
하늘나라에서 주님의 양 옆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높은 자리를 욕심내는 것처럼, 하늘나라에서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 다른 제자들이 무척이나
불쾌하게 여기지요. 다른 제자들 역시 그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화려한 결과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바로 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움직임. 즉, 주님의 뜻에 맞춰서 움직이는 작은 움직임들을 통해서만
하늘나라의 높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분명히 이야기하시지요.
첫째가 되려는 이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자신을
낮추는 작은 사랑의 움직임을 실천하는 우리가 됩시다.
불편함을 동반하지 않는 변화는 없다. 나쁜 쪽만이 아니라 좋은 쪽으로의
변화도 마찬가지다(리처드 후커).
야고보 사도. 축일을 맞이하시는 모든 분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내려 놓으세요.
어떤 형제님이 영적으로 뛰어나다는 어느 수도원의 수사님을 찾아가
묻습니다.
“수사님, 저는 얼마나 힘든 삶을 지내는지 모릅니다.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스트레스로 인해 너무나도 불행합니다. 제발 저에게
행복해지는 비결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수사님께서는 “제가 지금 정원을 가꾸어야 하거든요.
그동안에 이 가방 좀 가지고 있어 주세요.”라고 부탁을 합니다. 가방
안에는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지요.
그는 행복의 비결을 말씀해주지 않고 가방을 가지고 있어 달라는 부탁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정원 가꾸는 일이 급해서일 것이라는 생각에 가만히
가방을 들고 있었습니다.
별로 무겁지 않다고 생각했던 가방이었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무겁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30분쯤 지나자 점점 어깨가
쑤셔옵니다. 하지만 수사님은 도대체 일을 마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지요. 참다못한 이 형제님께서는 수사님께 물었습니다.
“수사님, 이 가방 언제까지 들고 있어야 합니까?”
이 말에 수사님께서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아니, 무거우면 내려놓지 뭐 지금까지 들고 계십니까?”
바로 이 순간 형제님께서는 커다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바로 자신이 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내려놓으면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지는데, 그 무거운 것들을
꼭 움켜잡고 가지고 있으려고 해서 힘들고 어려웠던 것이지요.
우리는 어떤가요? 혹시 내가 내려놓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은 것은
아닌지요? 주님 앞에 모두 내려놓으세요. 그래야 행복이 바로 내 옆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2013년 다해 7월25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세상에는 많은 직업들이 있습니다. 자동차에 십만 개 이상의 부품이 필요한
것처럼 사회가 발전할수록 직업의 종류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고령화 사회가
되고,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사회복지와 관련된 직업이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린이 집 교사, 요양원 도움이, 가정 복지사, 간병인’과 같은
직업은 최근에 수요가 증가하는 직업입니다. 저는 지금 사제의 길을 가고
있지만 어릴 때는 ‘선생님이나 군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저를
가르치시던 담임선생님이 좋았었고, 군인들의 제복이 멋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제의 길을 가는 지금 어릴 때 가졌던 희망이 어느 정도 이루어 졌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지만 매일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전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군복은 아니지만 제의를 입고
신자들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나중에 원하는 희망을
물어보면 ‘가수’라고 대답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예전에는 대통령, 의사,
판사와 같은 희망을 이야기 했었는데 아이들도 요즘은 부모님들께서
원하는 희망이 아니라, 본인들이 원하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성서에는 여러 가지 직업이 등장합니다. ‘농부, 유목민, 사냥꾼, 왕, 군인,
율법학자, 사제, 판관, 예언자’ 와 같은 직업들이 있습니다. 모두들 구원의
역사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충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주인공이 되었고, 어떤 이들은 악역을 맡았고, 어떤 이들은 조연을
맡아서 신앙의 역사를 오늘까지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서에 나오는
여러 직책 중에 예언자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언자는 점쟁이처럼
우리들의 사주를 알려주고, 앞날의 행, 불행을 점치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전해주는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언자 중에는
어떤 분들이 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해 주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한 이사야 예언자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이야기하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한 아모스 예언자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길을 미리 준비하고, 물로 세례를 주었던 세례자 요한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낚시터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길 잠깐 하고 싶습니다. 한번은 제 옆에 50대의 남자
분이 앉으셨습니다. 저는 밤을 새워 자리를 지켰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아마도 제가 초보자인 줄 알았나 봅니다.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초보자 옆에는 잘 앉지 않는다. 초보자가 물고기를 다
쫓아낸다. 낚시 줄이 엉키기도 하고 아무튼 짜증이 난다." 저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주눅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하다가 낚시 도구를 다 챙겨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분은 낚시 기술은 뛰어날지
몰라도 낚시의 도는 잘 모르는구나.
다른 낚시터로 낚시를 갔습니다.
70대의 할아버지 옆에 앉게 되었습니다. 초보자가 낚시 대를 설치하고 또
이리저리 부산하게 준비하니 할아버지께서 조금은 신경이 쓰이셨을 것입니다.
할아버지 옆으로 낚시 줄이 던져지기도 하고, 지난번에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더욱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웃는 모습으로 저를 바라보셨고, 엉킨
줄을 풀어 주셨고, 가실 때는 잡으셨던 물고기를 나누어 주고 가셨습니다.
그분은 낚시의 기술도 좋으셨지만 낚시를 이제 막 배우는 사람에게 낚시하는
사람의 자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뭘 좀 배웠다고, 뭘 좀 안다고 난 얼마나 교만했는가! 돌아보게 됩니다.
드러내지는 않아도 이제 막 시작한 사람들을 은근히 깔보고 무시한 적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복음적 섬김이란...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복음적 섬김은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2013년 다해 7월25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마태오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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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갈릴레아 호수에서 어부생활을
하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다.
그들의 어머니가 지극히 보통 어머니다운 부탁을 예수님께 청한다.
그러자 두 아들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간접적으로 자신들의 뜻을
드러낸다. 똑 같은 기사를 다루고 있는 마르코 복음에는 이러한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다른 열 제자들이 이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고 전한다.
(마르코10,41)
처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당신을 따르라 부르셨을 때,
제자들이 응답한 이유는 예수님의 것과는 분명 달랐다.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이유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면 얻게 될 무엇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그러니, 야고보와 요한 가족이
보인 마음이나, 그들을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았던 다른 제자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제자들 역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힘의 논리에 길들여졌던 사람들이다.
자기들만의 상처를 갖고 있었고, 사람이 만든 높낮이에 둔감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세상의 기준으로 높낮이를 따질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다.
이런 모습을 바라보시던 예수님께서는 섬김에 대해 말씀하신다.
당신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섬김이라는 말을 생각해본다.
힘이 없어서 섬기는 입장과 힘이 있음에도 섬길 수 있는 것은 너무도
다르다. 힘이 없어서 섬기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아픈 일이다.
하지만 옳기에, 그래야 하기에 스스로 섬기려는 입장이 되려는 마음은
아름답다. 복음적 섬김이란 굴종이나 비굴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따르는
마음과 행동이다. 굴종의 아픔이 무엇인지를 알고, 같은 아픔을 다른
이에게는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다. 힘이 없어 짓밟히는 아픔이 어떤
것인지를 헤아릴 수 있기에 스스로 낮아지려는 마음이다. 서로가 섬기려는
마음으로 살 수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세상이 올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이다.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고 그분께서는 말씀하신다. 제자들도 부활과
성령 체험 이후에야 비로소 섬김의 의미를 깨닫고 실천하고자 했다.
복음적 섬김은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우리에게 허락된 만남들 안에 조금씩 실천해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수도회] 참다운 권력은 섬김
2013년 다해 7월25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마태 20,20-28
참다운 권력은 섬김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사도가 아직 결정적인 회심과
깨달음을 얻지 못하던 시절의 모습은 정말이지 세속적이면서도
유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나섰지만 그 동기가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됨으로 인한 반대급부를 은근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승께서 건설할 그리스도 왕국에 대해서 전혀 그릇된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스승 예수님을 여타 다른 지상적
통치권자와 동일선상에 놓고 있었으며, 곧 도래할 그리스도 왕국에서
‘물 좋은 자리’를 얻었으면 하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더 비겁한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런 야심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솔직하게 직접 스승님을 찾아와 남자답게 “스승님, 나중에 아시죠?
저 꼭 한 자리 부탁합니다!”라고 청했으면 나았겠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치사하게도 어머니를 방패삼아 예수님께 인사 청탁을 한
것입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이런 한심하고 어색한 상황을 직면한 예수님께서 얼마나 난감해
하셨을까, 생각해봅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제자 교육에 열정을
기울이셨지만 아직도 갈 길이 먼 두 제자의 모습을 보니 많이
안타까우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야고보와 요한 두 사도에게는 아직 참 깨달음의 순간이 남아있었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구원 사업 전체를 조망하는 큰 그림을 못보고 있으니,
그들의 눈을 가로막고 있는 비늘을 벗겨내는 아픔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프겠지만 껍질을 깨고 나오는 고통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의 영성은 ‘물 좋은 한 자리’를 추구하는
출세주의자들의 정신과는 거리가 멉니다. 개인적인 야심이나
이기심은 그리스도교 정신과는 어긋납니다. 교회를 이용하여
개인적인 성취나 야욕을 추구하려는 사람은 백이면 백 그리스도교를
망신시킬 것입니다.
종교는 절대로 개인의 야심을 실현시켜주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신의 계획과 개인적인 이익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계획을 맞추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헌신과 희생 없는 종교처럼 위험한 것이 다시 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과
동일시되려는 야망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욕심이 있다면
그것은 이웃을 섬기려는 욕심이어야 합니다.
“참다운 권력은 섬김임을 잊지 맙시다. 우리 교회는 가장 가난하고,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끌어안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즉위미사 강론 중에)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서울] 인간의 상하관계를 주님은 독특하게
높은 사람이 높은 사람으로 있으려면 유지비와 신경 쓸 일이 많습니다.
칭찬 들으면 ‘비행기 태우지 마.’(언제 떨어질지 모르니까.)그럽니다.
자식 앞에서 부모가 싸우면 가정문제가 생기듯 상하관계 유지도 그래요.
인간의 상하관계를 주님은 독특하게 봉사적 사랑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어느 군주나 현인도 예수님 같은 그런 설명은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만인평등은 자연 질서 운행이 이미 이행한다는 점,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오 20,26)”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기타] 종이 된다는 것
이 말씀을 대하면 늘 마음이 불편해진다. ‘으뜸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니라고요.’
하면서도 ‘종까지야…’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으뜸은 아니어도 남보다는
모자라고 싶지 않은, 남보다는 조금 더 낫고 싶은 욕구가 내 안에 있음을
거부할 수 없음에 말이다. 그러고 보면 으뜸이 되거나 종이 된다는 것은 혼자
사는 삶에는 성립되지 않고, 남과 함께 있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세계다.
그랬었다. 시골로 내려오기 전까지 나는 ‘목사’였지만 나름 민주적이고,
비권위적인 꽤 괜찮은 목회자라는 자부심이 내 안에 있었다. 하지만 섬기는
것보다는 섬김을 받는 데 익숙해져 있었음을 발견한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르신들이 “여~” “새댁~” 이렇게 부를 때, 나와 거의 동년배인
마을 아낙들이 내게 “후임 씨~” 이렇게 부를 때 엄청나게 낯설고 무시당하는
느낌마저도 들었다.
나이 서른에 들어선 목회자의 길에서 나는 섬김을 받는 것에 익숙해졌던
것이다. 섬긴다고 했던 것은 그저 생각뿐이었고 교회의 지도자로서 지시하고
지적하는 데 익숙했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곳에서
벗어나 교회가 아닌 마을 속으로, 목사가 아닌 마을 아낙으로 그저 있을 때에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 과정이
나를 살렸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한다. 섬기러 오신 그분처럼
나도 기쁨으로 섬겨야 함을 기억하며….
- 박후임 목사(봉곡교회) -
◈ [기타] 질그릇
2013년 다해 7월25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코린토 2서 4장 7~15절)
질그릇
오늘 독서 서두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읽고 보물은 뭐고.. 질그릇은 뭘까.. 하는 생각을 해봤는데요.
먼저 든 생각이.. 지금 밖에서 캠프를 하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지난
화요일부터 여름 신앙 학교 팀들이 와서 캠프를 시작했고, 앞으로 열
팀 정도 더 올 예정인데요. 그렇게 오는 아이들이 교회의 미래임을
생각해 본다면 큰 보물이고 보화임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그 보물을 담아내는 그릇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거
같은데요. 쉽지는 않은 거 같습니다. 할 일이 정말 많습니다. 손님 맞을
준비로 청소도 해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망가진 거 수리해야 하고,
필요한 시설들을 만들어 내야하고, 수영장도 설치해야 하고, 시설
관리해야 하고.. 하다보면 일할 수 있는 신자 분들이 모두 함께 해야
겨우겨우 담아낼 수 있는 준비를 마치고, 용도에 맞는 그릇이 될 수
있는 거 같은데요. 많이 힘들지만 보물을 담아낼 수 있는 의미 있고
멋진 일인 거 같습니다.
그것 말고도 저희 본당만의 독특한 그릇이 있죠. 논과 밭입니다. 본당
땅은 아니지만 농사도 삼천평 짓고 있고, 고구마도 천평 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옥수수나 호박이나 감자를 심는 밭도 있는데요. 그
밭이 가난한 이들을 섬길 수 있는 독특한 그릇의 역할을 하는 거 같습니다.
아마 직접 농사지은 걸로 가난한 이들의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본당은 없을
거 같은데요. 저희 본당은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무료급식소나 갈 곳
없는 할머님들이 계신 양로원에 쌀을 전달하고 있는데요. 많지는 않지만
직접 재배한 쌀이라 더 많은 정성과 사랑을 담아 보내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작년 가을에 보니 몇몇 본당에서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김장
김치를 하는데 쓸 무와 배추를 살 수 있는지..’ 문의를 하셨었는데요.
그 얘기를 듣고 ‘우리가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김장을 하는데 사람이
많지 않아 일손을 보탤 수는 없지만, 밭이 있으니 무와 배추를 지원해
보면 어떨까...’ 해서 사목회 분들과 얘기를 했고, 올 해는 일단 한 본당에서
쓸 무와 배추를 지원하기로 했는데요. 그 일도 우리 본당만의 독특한
그릇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저희 본당이 부지가 꽤 넓어서 한쪽에 동물들을 키우고 있는데요.
그 중에 돼지도 있습니다. 세 마리였는데, 한 마리는 제 영명축일 잔치 때
잡았고, 지금은 두 마리가 남았습니다. 아마도 그 중에 한 마리는 공소
축성식 할 때 쓸 거 같고, 다른 한 마리는 신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신학생들을 위해 잡을 거 같은데요. 돼지를 키우고 잡아다가 나누고
친교를 이루는 일도 우리 본당만의 독특한 그릇일 거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넓은 부지와 공간이 저희 본당만의 특별한 그릇일 거 같습니다.
오시는 분들이 대부분 하시는 이야기가 정말 조용하고 좋다... 풍경이
소박하고 아름답다.. 는 얘기를 많이 하십니다. 성당 안 다니시는 밑에 동네
할머님도 지팡이 짚고 힘들게 올라오시더니.. 여기 오니까 너무 좋네..
마음이 다 평화로워지네.. 하는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그 선물을 잘 살릴
수 있으면 우리 본당만의 독특한 그릇을 또 만들어 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오시는 분들이 몸과 마음을 쉬어 갈 수 있는.. 그리고 어떤 교육이나 연수나
피정을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된다면 너무나 좋지 않을까.. 하는데요.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는 거 같습니다. 정원도 조금씩 가꾸기 시작했고,
시설들을 조금씩 갖추어 가고, 십자가의 길도 만들고, 먼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신자들을 교육해서 무언가 가르치고 안내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다면 작은 프로그램을 진행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저희 본당만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독특한 그릇이 만들어 지겠죠~
저희 본당 공동체는 그렇게 나름의 독특한 그릇으로 아이들도 담고,
가난한 이들도 담고, 지치고 힘들어하는 신자들도 담고, 본당 공동체도
담고 있는 거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각자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그릇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해 보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전원신부님의 강의에서..)
어떤 부인이 어디서 퀴즈를 듣고 왔다.
가장 추운 바다는? 썰렁해
가장 뜨거운 바다는? 사랑해
라는 건데, 그 퀴즈를 남편에게 내보았다고 한다.
“여보 가장 추운 바다가 뭐야?”
“썰렁해~”
“여보, 그럼 가장 뜨거운 바다는?”
남편이 대답을 못하자,
부인이 ‘나에게 해 주고 싶은말을 생각해봐~’ 하고
힌트를 줬더니 남편이 대답했다.
“열바다(열받아)~”
- 밤송이 신부님의 묵상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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