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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7월27일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수도회] 복된 죄(Felix culpa)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제1독서 : 탈출 24, 3 - 8
† 복음 : 마태 13, 24 - 30
★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다. 모세는
주님에게서 받은 계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 준 뒤 이를 잘 따르겠다는
백성의 약속을 듣고 계약의 예식을 거행한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의 노예에서 하느님을 임금으로 모시는 자유의 백성이 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를 밀밭에 비유하신다. 이 밭에는 가라지도 섞여
있다. 열매를 맺기 전에 가라지를 거두면 밀까지 뽑힐 수 있다. 그래서
밀밭의 주인은 인내한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도 추수 때까지 이 세상의
죄악을 그대로 두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의 밀밭에 그의 원수가
몰래 가라지를 뿌려 버립니다. 밀이 한창 자라기 전에는 무엇이 밀이고
가라지인지 몰라서 주인은 가라지를 뽑지 않고 기다립니다. 수확 때에
밀과 가라지가 확실히 구별되면 그때 뽑아 버릴 생각입니다.
사제품을 받고 꼭 10년이 되던 날, 지난 사제 생활을 가만히 성찰해
보았더니 ‘밀’도 있었고 ‘가라지’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교회를 더욱 사랑하고,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가며, 다른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면에서 하느님께서는 ‘밀’의 선물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 반면, 순수했던 열정이 다소 식어 가고, 좋지 않은
습관들이 쌓여 가며, 기도를 소홀히 하는 면에서는 ‘가라지’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찰 뒤에 성체 조배를 하는데, 하느님께서 제 가슴속 깊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가라지가 있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라. 모두 나에게 맡겨라. 농부는 네가
아니라 나다. 너는 내가 이끄는 대로 자라기만 하여라. 네 안에 있는
가라지를 나는 그대로 두겠다. 그렇다고 네 밭이 밀밭에서 가라지밭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만 맡기면 된다. 내가 농부이다.’
사제의 길에는 수많은 가라지가 있습니다. 사제의 길뿐 아니라 부부의
길에도, 젊은이들의 길에도, 아니 모든 삶에는 수많은 가라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농부이신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그저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분께서 하시고자 하는 뜻에 따르십시오.
밀의 성장에 필요한 햇빛과 수분과 양분이 그분께 있고, 가라지의
성장을 가로막을 제초제 또한 그분께 있기 때문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끝이 좋아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7월27일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 마태오 13,24-30
끝이 좋아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윤동주-
하늘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고, 원인대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하늘에 순종하는 사람은 살고, 하늘을 거역하는
사람은 망하는 법입니다. 수확 때에 가라지는 거두어서 태워버리고
밀은 곳간에 모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알곡이 되어야 합니다.
농사일을 하는 종이 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뿌린 씨는 좋은
것이었는데 어찌 가라지가 생겼습니까? 가라지를 거두어낼까요?’
하고 묻자 주인은 말합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우리는 내 맘에 들지 않는 것을 뽑아버리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추수
때까지 두어서 기회를 주십니다. 결정적으로 알곡은 곳간에 모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수 전에 밀과 가라지를 판별하여 골라내려는 노력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인의 계획을 간섭하는 일이 됩니다. 판단의 권리는
주인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로마12,19) 주인은 가라지와 그로인한 피해를
참아주며 기다립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잡으십시오.
가라지 같은 인생이라면 서둘러 밀과 같은 인생으로 바꿔야 합니다.
방황을 끝내고 과거에 안주하지 않으며 하늘을 보고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성경인물 중에 훌륭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모세, 다윗, 베드로, 바오로도
한때 방황의 삶을 살았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렇고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방탕한 삶을 끝내고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5,20)
선과 악은 밀과 가라지가 추수 때 구분되듯이 세상 종말에 분명하게
구분될 것입니다. 가라지와 같은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영원히 살 것 같지만 추수 때 따로 베어져 불태워지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련 속에서도 좋은 열매를 맺었던 밀과 같은
선한 사람들은 하늘의 곳간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겪게 되는 시련이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나를 견고케 하는
귀한 은총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끝날을
아름답게 맞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더 우리를 소중하게 대하십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만 해도 정전될 때가 종종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래서 집에 항상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 양초였지요. 그리고 어두운
저녁시간에 정전이 되었을 때 이 양초만 켜면 아무런 불편 없이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요즘에 정전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도 잠깐 정전이
아니라 몇 시간씩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아마 커다란 난리가 날
것입니다. 24시간 쉬지 않고 계속 돌아가고 있는 냉장고는 어떻게 할
것이며, 습관적으로 보는 텔레비전이 켜지지 않으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복잡한 도로 역시 신호등이 켜지지 않아 교통대란이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물건을 구입하고 싶어도 카드를 인식하는
기계가 작동하지 않으니 물건을 살 수도 없습니다.
생각해보니 전기를 정말로 많이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긴 현재
서울시에서만 소비하는 에너지의 양이 100년 전 전 세계 인구가 사용했던
에너지의 양보다도 더 많다고 하더군요. 그러다보니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커다란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전기 없이는 잠시도 살기 힘든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중요하기에 혹시라도 부족한 상황에 놓여 지면 안 되기
때문에 ‘에너지를 아껴 쓰자.’라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캠페인으로만 끝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생활 안에서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에너지를 낭비하는 경우가 있지는 않나요?
정말로 중요하다면 아끼고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데, ‘나 하나쯤이야’라는
안일한 생각과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마음이 소중하게 대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삶 안에서 얼마나
중요하십니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또한 지금의 삶 안을 더욱 더
풍요롭게 살기 위해 주님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소중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나 하나쯤이야’라는 안일한 생각과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마음이 주님을 소중하게 대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소중하신 분이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더 우리를
소중하게 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많은 죄를 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기회를 주시면서 당신 곁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가라지를
뽑다가 멀쩡한 밀을 뽑을까봐 수확 때까지 기다리시지요. 이처럼 마지막
날까지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날이 아직도 멀었을까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소중하게 대해주시는 주님의 뜻에
맞춰서 지금 당장 안일한 마음과 이기적인 마음을 내 안에서 몰아내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나중에 뽑혀 사라질 가라지가 아닌, 좋은 밀의
모습으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운이 오는 것도 혹은 떠나는 것도 다 마음 때문이다. 그러니 고칠 것은
마음 뿐이다.(김승호)
순서대로 밀, 가라지, 보리 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길 바라며...
어떤 집이 흔들리며 무너질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얼른 집밖으로 뛰쳐나가겠지요.
그런데 이 집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무너지는
이 집이 너무나 아까워서 이 집을 버리고 나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그 마음 때문에 무너질 집이 무너지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렇게 집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손가락질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똑같이 취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아 점점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만을
쫓으며 삽니다. 이는 세상 안에서 잘 사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파묻히는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애착
때문에 세상에 묶여 있는 한, 세상의 파멸로부터 우리를 구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우리가 함께 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 참으로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밀과 가라지의 비유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 다해 7월27일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마태오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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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지의 비유다.
이 이야기는 선과 악의 공존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전지전능하시고 선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왜 애초부터 악을 허락하셨을까
하는 질문부터 시작하여, 우리는 적지 않은 질문을 하느님께 던질 수 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하느님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답변을 내놓을 수는 없다.
다만 가장 옳은 답변에 접근하고자 하는 노력을 2천 년의 교회의 역사는
해 왔음이다. 그리고 그 답변의 실마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통해서였다.
분명한 것은 완전한 선이 지배하는 세상은 하느님의 나라일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세는 선과 악의 공존하는 세상일 수밖에 없고,
그러한 세상을 탄식하고 있는 우리 자신 안에서조차도 선과 악의 공존을
체험하면서 살아가야만 한다. 단지 어느 쪽의 삶을 희망하며, 자신의 삶을
이끌어갈 것인가를 선택해야만 한다. 밀과 가라지로 비유하셨다.
밀까지 다칠 수 있으니 타작 때, 밀과 가라지를 가르시겠다고 하신다.
그렇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밀이 되어야 한다.
이 비유에서의 말하는 밀과 가라지는 생겨날 때부터 밀과 가라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의 희망과 선택 그리고 삶에 의해서 마지막을 밀로 맞이할 지,
아니면 가라지로 맞이할 지가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땅은 잡초도 받아들이고 꽃도 받아들인다는 것을 우리도 받아들여야 한다.
가라지와 잡초를 없애려는 노력보다는 밀과 꽃을 더욱 튼튼히 키우려는 삶이
복음적 삶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음이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수도회] 복된 죄(Felix culpa)
2013년 다해 7월27일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ㅐ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마태 13,24-30
복된 죄(Felix culpa)
“밀농사에 도움이 안 되는 ‘가라지’들을 보는 족족 솎아낼까요?”라는
질문에 “수확 때 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처음에는
섬뜩한 느낌과 함께 ‘와 무서운 분이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릇된 길을 걷고 있는 자녀에게 호통을 치면서 빨리 그 길에서
벗어나라고 말해주는 것이 바람직한 아버지의 모습일 텐데, 잘못을
저지르는 그 순간에는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모아서
‘대박’으로, ‘보란 듯이’ 크게 손 좀 봐주겠다는 의도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보니 ‘뱁새가 봉황의 뜻을 어찌 알리오?’
였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확 때 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정말이지
큰 뜻, 엄청난 배려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교육 현장에 몸담고 있다 보면 자주 느끼는 바입니다. 한 청소년의
인생을 동반해주는 데 있어 ‘기다림’ ‘인내’처럼 중요한 것은 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때의 실수를 기다려준 것이 나중에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낳게 하는지 모릅니다. 부족함과 미숙함 앞에 인내하고
또 인내한 결과가 ‘큰 인물’이라는 결실로 열매 맺기도 합니다.
정말이지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태 모범생들이 있습니다.
잔소리 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자기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에 대고 외쳐도 듣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한동안 오류에 빠져 속고 나서 나중에 진리의 진가를 깨닫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가면 뒤에 숨어있는 악 실체를 확인한 뒤에야 참
아름다움을 깨닫습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지어서는 안 될 죄를 짓고, 죄의 악함을 깨달은
뒤에야 하느님의 은총을 겸허하게 수용합니다. 이런 연유로 어떤 죄에
한해 ‘복된 죄(Felix culpa)라고 까지 이야기했습니다.
때로 아닌 것에 대해서 애초부터 원천을 근절시키기 위한 노력도
중요합니다. 잘 짜인 모범 정답 틀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불어 필요한 노력이 있습니다.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우리 각자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당신 의도대로 우리 인간 역사를 하나하나
끌고 가지 않으십니다. 모범 답안을 제시하고 무조건 그 길을 걷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각자의 판단, 가치관, 인생관, 결정을 존중해
주십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깨닫도록 우리에게 모두 맡겨주십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의 모든 죄나 실수 앞에서 한없이
기다려주십니다. 참 가치를 깨달을 때 까지, 당신께로 돌아설 때
까지 무조건 인내하십니다.
많은 경우 우리 인간들은 이런 기대를 합니다. 정의의 하느님께서
세상 안에 존재하는 악의 원천들, 그릇된 지도자들을 지체 없이
공격하여 하루 빨리 진리와 정의가 승리하는 날을 오게 하라는
기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은 보다 깊게 호흡하시며 보다 큰 걸음을
옮기시는 분입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신자들의 바램도 너무 기대치가 높습니다. 천사 같은
교황님의 얼굴만을 추구합니다. 착한 목자의 화신과도 같은 주교님을
찾습니다. 제2의 예수 그리스도 같은 사제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합니다. 교황님도 주교님도 사제들도 육을 지닌
한 나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정신으로는 분명히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지만 구체적인 삶 안에서는 방황하고 괴로워하는 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노력이 기다림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방관이 절대로 아닙니다. 인내의 한계에
도달해 포기해 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무관심의 표현도 아닙니다.
기다림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종교적인 표현입니다. 기다림은
가장 그리스도적인 삶의 방법입니다.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
언젠가 분명히 우리에게 주실 구원을 기다리며 오늘 우리의 이 고통,
이 부족함, 때로는 참혹함을 견뎌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기타] 잠을 자고 있는 동안에 …
2013년 다해 7월27일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김매기 약을 일체하지 않는 우리 논과 밭은 해마다 풀과의 전쟁을 치른다.
심어놓은 작물보다도 더 잘 자라는 풀을 보면서 ‘도대체 누가 와서 풀씨를
뿌리는 거야?’ 하며 투덜거렸는데, 오늘 말씀에서 원수가 와서 뿌렸다고
하니 눈이 번쩍 뜨인다. ‘누가’ 뿌렸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잠들어
있는 동안’에 와서 뿌렸다는 것이 내 가슴에 다가온다. 잠들지 않고 깨어
있었더라면 원수가 뿌려놓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잠들어
있다.’는 것은 눈을 감고 있고, 귀도 닫고 있고, 가슴도 닫혀 있어 움직이지
않는 상태다. 곧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생각도 멈춰 있는 상태. 결국
잠들어 있는 내가 가라지를 뿌리도록 한 셈이다.
가라지를 뽑으려 하는 종에게 내버려두라 하신다. 하나의 밀조차 다치는
것을 염려하시는 사랑이 듬뿍 담긴 말씀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내 안에
주님의 좋은 씨앗과 함께 원수가 뿌려놓은 가라지도 있음을 안다. 내가
잠든 틈을 타서 뿌려놓은 가라지 씨앗. 이것을 제거하는 데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호미로, 낫으로, 나중에는 예초기로 해도 사실
잡기가 쉽지 않다. 내가 집중해야 할 것은 가라지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뿌려진 좋은 씨앗이 열매 맺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가라지는
맥을 못 춘다. 밀이 튼실하게 자리를 잡고 쑥쑥 크면 가라지는 그림자에
눌려 잘 자라지 않고, 영양 공급도 잘 안 되어 세력을 펴지 못한다. 내가
잠들어서 뿌려진 것이니 내 잘못임을 받아들이고, 늘 깨어 있으려
노력하면서 내 안에 뿌려진 좋은 씨앗을 잘 살펴 나가는 것이 내가 지금
해야 할 것임을 다짐해 본다.
- 박 후임 목사(봉곡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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