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락눈으로 속삭여봐야 알아듣지도 못하니까 진눈깨비로 질척여봐야 고샅길도 못 막으니까 저렇게 주먹을 부르쥐고 온몸을 떨며 오는 거다. 국밥에 덤벼봐야 표도 안 나니까 하우스를 덮고, 양조장 트럭을 덮는 거다.
낯모르는 얼굴이나 간지럽혀봐야 대꾸도 없으니까 저렇게 머리채를 흔들며 집집을 때리는 거다. 점, 점......으론 어림도 없으니까 삽시에, 일순에! 때로 몰려와 그리운 이름 소리쳐 부르는 거다.
어른 아이 모다 눈길에 굴리고 자빠뜨리며 그리운 이의 발목을 잡는 거다. 전화를 끊고 우체국을 파묻는 거다. 철길을 끊고 정거장을 파묻는 거다. 다른 세상으론, 비행기 한 대 못 뜨게 하는 거다.
눈오는 지도
윤동주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 것처럼 창(窓)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地圖) 위에 덮힌다. 방(房) 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壁)이나 천정(天井)이 하얗다. 방(房) 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이냐, 떠나기 전(前)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그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나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일 년(一年)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겨울바다
김사랑
철지난 바다가엔 밀물과 썰물만 교차되었지 인연의 밧줄을 끌고 당기다가 거품만 쏟아놓은 자리 하얀 소금꽃이 피었네
수평선은 침몰되고 그 바다의 가슴에 수없이 흔적을 만들었다 지우는 돌아누운 그 섬엔 괭이 갈매기만 울었네
겨울바다는 눈물을 삼켜도 아무런 흔적이 없고 지난 추억의 그림자만 내 가슴에 묻고 말았네
겨울바다
이해인
내 쓸모없는 생각들이 모두 겨울바다 속으로 침몰해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도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일 때 바다를 본다
누구도 사랑하기 어려운 마음일 때 기도가 되지 않는 답답한 때 아무도 이해 못 받는 혼자임을 느낄 때 나는 바다를 본다
참 아름다운 바다빛 하늘빛 하느님의 빛 그 푸르디푸른 빛을 보면 누군가에게 꼭 편지를 쓰고 싶다
사랑이 길게 물 흐르는 바다에 나는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다
겨울바다
오경옥
무슨 말이든 전할 수 없을 때 어떻게든 주어진 상황과 마음을 표현할 수 없을 때 기다림에 가슴 먹먹하도록 그리워질 때 침묵해야 한다고 생각될 때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다름과 차이 앞에서 혼란스러울 때 존재에 대한 정체성 앞에서 갈등과 번민에 휩싸일 때 그래도 견디어야 한다고 생각될 때 달려가곤 했었지 무작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