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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8월12일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청주] 참 지혜가 필요하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신명 10, 12 - 22
† 복음 : 마태 17, 22 - 27
★ 모세는 이스라엘이 주님의 백성이 된 것은 오로지 하느님께서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특별히 선택하셨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백성에게 이러한 하느님을 마음을 다해 섬기고, 그분께서
내리신 계명과 규정들을 잘 지키라고 권고한다(제1독서).
★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시는지
묻는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
세금을 내실 필요가 없지만, 이 일로 하느님의 계획을 그르칠 수 없다고
여기시고 성전 세를 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 시대에 성전 세는 스무 살 이상 된 남자에 한하여 해마다
‘두 드라크마’(스타테르 반 닢), 곧 이틀 치의 품삯을 내어야 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로마의 과세에 대해서는 분개하였지만, 성전에
바치는 세금에 대해서는 민족적인 자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전 세 납부의 여부는 유다인들의 관심거리이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성전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성전 세를 내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이 없다고 하시며 성전 세를 내십니다.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정당한 권리가 있기는 하셨지만,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 일으켜 하느님의 계획이 어긋나는 것을 원치 않으신 것입니다.
그분께 중요한 것은 ‘성전 세 납부의 여부’보다도,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더
중요한 가치를 위하여 덜 중요한 가치를 희생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지혜는 우리에게도 일러 주는 바가 큽니다. 많은
부부가 사소한 일로 다투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 이기려고 인격을
무시하는 말투를 보이기도 하고, 고성을 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소한 부부 싸움에서 자신의 정당함을 증명하고 상대방이 이를
승복한다고 해서 서로 행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의 승리가 그
가정에 행복을 안겨다 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듯이, 우리도 이러한 분란을 겪을 때마다
자신의 정당함을 굳이 앞세울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기하면서 더 큰
가치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참 지혜가 필요하다/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8월12일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되살아날 것이다. 자녀들은 세금을 면제받는다.>
+ 마태오 17,22-27
참 지혜가 필요하다.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행동이
좋지 않은 사람은 서로 상종할 수 없으니 이쪽에서 삼가서 피하라는
뜻입니다. 물론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기다려야 하는 아량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전세를 거두는 이가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금은 로마 총독이 로마제국을 위해 거둬들이던
세금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징수하던 인두세였습니다. 희생제물을
봉헌하기 위해서 기부하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임금들은 관세나 인두세를
남에게서 받아내지 자기 가족에게 부여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참 주인이시고 “성전보다 더 큰 분”(마태12,6)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세금을
바치십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았던 돈으로 성전세를 내십니다. 호수의
고기를 잡아 그 입안에 있던 돈으로 베드로의 몫과 주님의 몫으로 주도록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다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는 모습에는 손상을 입지 않으면서도 하느님께는 영광이
드려지며 인간의 비위는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 모습에 참 지혜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일상 안에서도 많은 일들을 접하면서 그때 마다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지 않은지 신중히 고려해야 할 상황들이 있습니다.
아주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하거나 일관되게 행동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비굴하게 물러서는 것 같아 보이는 때 정말 참 지혜가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예기치 않은 일에 여유를 갖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주님께서 우리를 배려하시는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 나올 때부터 혼자서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계셨기에 태어났을 것이며, 또 태어나기 위해 병원의 의사나
간호사의 도움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밖에도 내가 태어나는 순간에
나를 위해 관심을 기울여주고 도움을 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리고 지금까지 성장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배려와 사랑을
받으며 살았습니까?
이 이웃들의 배려와 사랑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나 역시 하루
24시간 중에서 최소한 한 시간만이라도 이웃을 위해 사는 것이 어쩌면
사람의 도리를 행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내가
받는 것은 당연하고, 내가 남에게 베푸는 것에 대해서는 얼마나 인색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배려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데 급급합니다.
어제 내년에 신학교에 들어갈 인천교구 고3과 일반 예비신학생들의
1박 2일 피정이 끝났습니다. 제가 성소국장이라서 총 책임을 맡고
있지만, 모든 것을 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수녀님, 신학생, 성소국
직원이 모두 애를 쓰며 일했기 때문에 잘 끝날 수 있었지요. 참으로
다들 수고가 많았습니다. 더군다나 이 피정 기간 동안 얼마나 더웠는지
모릅니다. 짜증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지만,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피정에 임했기에 좋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비신학생 중에서 몇 명은 자신들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내고 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더군요.
의욕도 보이지 않고, 덥다는 이유를 들어 힘들어하는 표정을 짓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이렇게 애를 쓰고 배려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에 화가 절로 나더군요.
바로 그 순간, 어쩌면 우리 역시 주님께 그렇지 않을까 싶네요. 주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위해 배려하시고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까? 그러나
우리는 마치 내가 누려야 할 당연한 것처럼 착각합니다. 주님께 내가 드린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주님께 화를 내고 짜증을 낼 때는 얼마나
많았습니까?
오늘 복음을 보면 성전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의 유다인
남자라면 당연히 성전세를 납부해야만 했지요.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성전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자기 자신에게
세금을 내지는 않지요. 따라서 예수님께서도 세금을 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오해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그래서 사람들이
또 다른 죄를 저지르지 않게 하려고 성전세를 내시지요.
이처럼 늘 우리를 배려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거꾸로 우리는
주님을 위한 어떤 배려를 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배려하시는 것처럼, 이제 우리 역시 주님을 배려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길이 바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삶,
사랑의 삶입니다.
행복을 발견하는 첫걸음은 지친 몸과 마음에 참다운 ‘쉼표’를 선물하는
것이다(서정희).
고3, 일반 예비신학생 피정을 마치며 찍은 사진. 성소를 잘 간직하길
기도합니다.
윈스턴 처칠의 일화를 들으면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윈스턴 처칠이 탄광촌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광부 앞에서 그는 아주 유명한 연설을 하지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훗날 사람들이 전쟁 중에 뭘 했느냐고 물으면 어떤 사람들은 전함을
타고 싸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최전방에서 빗발치는 총알 앞에서
피 흘리며 싸웠다고 하겠지만 여러분들도 자랑스럽게 ‘나는 군인들을
전선으로 실어 나르는 기차를 움직이게 하고, 군인들이 언 손을 녹이고
따뜻한 막사에서 지내도록 깊은 갱 속에 들어가 석탄을 캐고 있었다.’
고 말하십니다. 당신들도 위대한 사람입니다.”
이 글을 보면서 먼 훗날 주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 이렇게
묻지 않을까 싶습니다.
“너는 내가 창조한 이 세상에 가서 뭘 했니?”
나만을 위한 삶을 살았을 때에는 이 질문에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할
것 같네요.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헌금이나 봉헌은 절대로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 다해 8월12일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여러분의 스승님께서는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마태오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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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이나 봉헌은 절대로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즉,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에 의무 봉헌금인
교무금도 당사자가 책정하고 비밀에 부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금액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순수한 신앙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면
진정한 의미의 봉헌이라 할 수 없다. 우리는 동전 두 닢밖에 안되지만
전 재산을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알고 있다. (루카21,1-4)
교회 살림을 함께 책임지려는 것은 신자들의 당연한 도리이다. .
나눔을 위해 가진 것을 봉헌하는 것 역시 교회의 이유이며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이들의 경제적 차이도 고려해주여야
하는 것은 교회의 의무이자 배려이다. 교회 안에도 사람들 사이에
경제적 차이는 당연히 존재한다. 그 경제적 힘이 신자들의 자리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면 그것은 악마의 짓이다.
돈이 없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하는 이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
돈이 없어서 교회로부터 받아야 할 신자로서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 돈이 없어서 혼배성사를 할 수 없다거나,
장례 미사를 치를 수 없다면 그것은 교회의 정신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길이다. 그리고 그런 교회는 없다고 믿고 싶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우셨다.
그런데 그것을 잊고 살아간다면 모순도 그런 모순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적으로 여유 있다는 것이 죄나 악을 의미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이 선이거나 자랑거리도 아니다.
부유함이든 가난이든 서로 나누어야 하는 것이 복음이다.
교회가 건축헌금이니 뭐니 하면서 헌금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옳지 않은 일이다. 교회의 경제적 유지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서도
교회가 헌금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어떤 명목의 헌금이나 봉헌도
자발적이어야 한다. 헌금이 왜 필요한지 교회 안의 신자들이 인식하고
십시일반의 기적을 이끌어 나아가면 된다.
때로는 경제적으로 힘든 일에 부딪힐 수도 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일행은 허기가 져서 밀이삭을
잘라먹다가 바리사이의 비난을 받은 적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마태오12,1)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머리 두실 곳조차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마태오8,20) 그 흔한 참새보다 훨씬 귀한 너희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지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루카12,6-7)
한국 가톨릭은 제법 오래 전부터 성직자들의 소득이 과세 대상일 때,
그 의무를 실천하고 있다. 개신교를 비롯한 불교계에서도 납세의
의무에 동참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는 듯 하다.
무척 고무적이고 바람직한 일이다.
교회가 속한 세상의 의무를 평등하게 함께 지어야 함은 누구보다도
모범을 보여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나온 성전세는 유대인들이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서
바친 의무적인 봉헌금과 같은 것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교무금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수도회] 어이없고 황당한 성전세
2013년 다해 8월12일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마태 17,22-27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어이없고 황당한 성전세>
탈출기는 성전세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인구 조사를 받는
스무 살 이상의 남자는 누구나 주님께 예물을 올려야 한다. 성소 세켈로
반 세켈을 내야 한다.”(탈출기 30장 13절)
그럼 반 세켈의 화폐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요? 약 두 데나리온
정도였습니다. 통상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즘 우리나라로 치면 10만원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성전세 납부 시기는 통상 과월절 전까지였습니다. 유다인들은 과월절이
되기 전에 예루살렘 성전을 직접 방문하여 납부하곤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위해서는 세리들이 방문 징수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 성전세의 용도는 유다인들 삶과 신앙의 중심인 성전의 유지, 관리,
보수 등 전반적인 운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세 수입이란 것이 당시 막대한 것이어서 로마로부터
예루살렘이 파괴되기 전까지 성전세 수입을 계속되었는데, 아무리
지출해도 남아돌다보니 나중에는 성전에 금으로 된 포도송이를 제작해
장식해 지탄을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고국 이스라엘을 떠나 해외에 나가 살던 유다인들을 ‘디아스포라’
라고 칭했는데, 그들도 1년에 한번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성전세를
꼬박꼬박 바치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이방국가의 돈을 유다 세켈로
바꾸어 바치도록 되어 있어 환전상들은 막대한 환전차익을 챙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거룩해야 할 성전이 자꾸만 훼손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당시 성전세 납부를 면제받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거지들은
납부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또한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제들도 제외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존경받는 랍비들도 제외 대상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당대 선풍적인 인기와 존경을 한 몸에 받던 큰
스승이셨기에 당연히 성전세 납부 제외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전세를 왜 바칩니까? 성전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의 주인에게 성전세를 바치라고 한다면 이처럼 웃기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 어이없고 너무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오는
경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 그리고 그 예수님과 신앙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제자들은 당연히 성전세 면제의 첫 번째 대상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겸손하십니다. 성전의 주인이셔서,
이 세상 전체, 삼라만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아들이셔서 성전세를
낼 이유가 전혀 없지만 성전세를 내라고 하십니다.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지 않으셨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
당신께서 추진하고 계시는 인류구원사업에 걸림돌이 될지도 모를
상황이었기에 아주 조심스럽고 지혜롭게 처신하신 것입니다. 성전세라는
것 필요한 것이었지만 목숨 걸고 고수해야 할 절대 진리가 아니었기에
예수님께서 큰 마음먹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리시는데, 참으로 그
내용이 의아하기 짝이 없습니다.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왜 예수님께서 당시 제자 공동체 총무였던 유다에게 한 세켈 달라고
해서 베드로에게 주면서 “옛다. 빨리 갖다 바쳐라!” 하지 않고 낚시를
하게 보내십니까? 그리고 입을 열어보게 하십니까? 또 희한하게 고기
뱃속에서 동전을 꺼내 성전세를 바치게 하십니까?
이 부분에 너무 지나친 기대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큰 의미는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전지전능하심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당신은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이자 온 세상의
주인으로서 세상만물 삼라만상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깟 성전세 몇 푼에 연연하는 분이 아니심을
명명백백히 제자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겸손하시고, 또한 코믹하시고, 더불어 지혜로우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돋보이는 복음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기타] 연중 제 19주간 월요일
2013년 다해 8월12일
2015년부터는 종교인들에게도 세금을 걷는다고 합니다. 가톨릭은
이미 성직자들이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종교인들이 가난한 모습으로
살았다면, 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모습으로 살았다면,
종교인들이 희생과 봉사의 모습으로 살았다면, 종교인들에게 세금을
걷을 것이 거의 없다면 종교인들에 대한 과세가 드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 사제가 되었을 때, 받았던 돈이 생각납니다. 대략 월 400,000원
정도였습니다. 당시 대학원을 졸업한 친구들의 연봉은 아마도 10배는
되었을 것입니다. 세금을 내려고 해도 과세 지표에도 못 미치기 때문에
낼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과세 지표에는 거의 미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교구의 방침은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고, 저도 소득이
있으면 세금을 내는 것이 국민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가톨릭의
성직자들은 독신으로 살며, 사제관이 있고, 생활비가 지원되기 때문에
생활에는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하지만 개신교의 목회자들은 결혼을
하기에 가족들이 있고, 개척교회를 이끄시는 분들은 정말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세금을 내는 문제에서도
자유로울 것입니다. 다만 문제가 된다면 소득이 큰 일부 대형 교회의
목회자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의 몸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마음 따로 몸
따로의 삶은 없습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나는 이치입니다.
종교인들의 몸이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굳이
종교인들의 과세를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종교인들의 삶이 그들에게는
등대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을 위해서 꽃동네를 세우신 신부님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꽃동네를 후원합니다. 그런 분에게 과세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마더데레사 수녀님이 있습니다. 역시 병들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평생을 사셨습니다. 그분에게는 노벨 평화상도 큰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충실하게 사셨을 뿐입니다.
우리 사회에 뜨거운 감동을 주었던 이태석 신부님이 있습니다. 멀리
아프리카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전하며, 자신의 생명이 다 할
때까지 살았습니다. 그런 분에게 누가 과세를 이야기 하겠습니까?
종교인들이 오늘 제1독서의 가르침대로 산다면 세상 사람들은 종교인들을
자신들의 짐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종교인들에게서 위로와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종교인들에게서 희망과 평화를 얻을 것입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병든 이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살아가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공짜로 주셨다면 하느님은 멍청한 분
2013년 다해 8월12일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전기세, 집세, 토지세, 상수도 하수도세, 통신비, 가스비 등 많습니다.
계속 지불하며 사는 게 세상살이, 특히 도시생활은 더욱 그렇습니다.
의식주가 모두 돈 돈 돈하며 살게 하므로 사람이 돈에 매일 수밖에요.
태양빛, 태양열, 공기, 물만해도 거저라 생각하기 쉽지만 더 많습니다.
우리 몸의 신비한 재생 및 역동적 작용을 생각하면 감탄이 절로 납니다.
이런 것들을 거저 다 공짜로 주셨다면 하느님은 멍청한 분이 아닐까요?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태오 17,27)”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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