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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원재追遠齋와 1세조 영렬공 금의 단소 |
실버신문(까치소리)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동성동본의 혼인. 간통제 폐지. 본적지 폐지 등 급변하는 윤리도덕관에 따라 근본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는 씨족의 근원을 찾아 일가친척의 혈손을 상기시키는 의미에서 영주지역에 산재. 거주하고 있는 성씨의 가문에 대한 연원을 살펴보기로 했다. 조상과 가문에 대한 고정관념을 정립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편집자 주 -
효제신양(孝悌信讓)에 따라 충신과 효자 많이 배출한 가문
◎ 본관 및 시조의 유래
奉化 琴氏는 먼 조상으로 기자가 조선에 들어올 때 琴應이라는 분이 함께 들어와 琴氏 가문을 열었다는 설과 공자의 제자 금노의 후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는 모화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신빙성이 부족한 이야기이다. 奉化 琴氏의 始祖로 고려의 개국공신이며 태사인 동원군 容式 이나 세수가 불분명해 容式 의 후손인 英烈公 의(儀)를 1세조로 하여 세를 이어오고 있는 가문이다.
英烈公 儀는 고려 명종(1170-1197) 때 大科에 급제해 벼슬을 두루 역임했으며 특히, 이규보, 이인노, 조충을 길러낸 인물이다.
奉化 琴氏의 奉化는 慶尙北道 奉化郡을 의미하며 과거 지명은 봉성(鳳城)이었으므로 鳳城 琴氏라고도 했다. 琴氏들이 세거하는 곳에 따라 계양, 안동, 강화, 평해, 금산 등을 본관으로 삼고 있으나 이들 모두 奉化 琴氏의 후예들이므로 1983년 族譜 編纂 때 奉化로 統一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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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산정孤山亭(경북유형문화재 제274호) |
◎ 역대인물소개
始祖 琴容式 이후 뚜렷한 행적을 남긴 이는 전하지 않고 중시조 儀(1153-1230)가 1184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220년 벽상공신이 됐으며 수태보문하시랑 중서문하평장사판이부사에 치사된 인물이고 시호는 영렬(英烈)이다.
英烈公이 청도의 감무로 나가 있을 때 일 처리에 있어서 굽히지 않는 강직함을 보여 백성들이 철태수(鐵太守)라 했다고 한다. 여러 차례 과거시험 총 감독관인 지공거를 역임하면서 고려조 유명인물인 이인로, 이규보, 임영령 등을 문하에 두었다.
奉化 琴氏는 英烈公 부터 고려정계에 진출하면서 명문으로 등장해 맏아들 耆는 호부원외랑, 둘째 규는 공부원외랑, 넷째 暉는 좌우위대장군, 다섯째 희는 합문부사를 지냈다. 가까운 집안의 공부시랑, 경상도 안찰사를 역임한 8세 薰은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왕명으로 원에 가서 원병을 청하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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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 금씨 군위공 종택 |
12세 淑이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낙향해 안동, 예안 등지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특히 다섯 자제가 문과, 무과에 합격해 그가 살던 집을 지금도 오자등과터(五子登科基)라 부르고 있다. 또 12세 克諧는 포은의 문인으로 우왕 때 과거에 급제해 담양군사을 지냈으며 이후 4세가 내리 문과에 급제하는 영광을 누리었다.
조선조에 들어와 금인배가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인 회안대군 방간을 사위로 삼으면서 도약의 발판을 만들었으나, 방간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원에 패하고 귀양 가게 되자 처족인 琴氏도 영향을 받아 조선조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이러한 연유로 금문들은 벼슬에 뜻을 두기보다는 儒學 정신에 입각해 향리에서 忠孝를 실천하는데 노력해 조선조 문과급제자는 14명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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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재 금난수의 묘와 성성재종택惺惺齋宗 |
◎ 봉화금씨의 세거 유래
봉화 금씨들은 경북 일대봉화를 중심으로 세거하고 있으며,충북 옥천영암, 경기도 에 터를 잡고 世居하기 시작했고 13세 琴 美 의 후손은 충북 옥천군에 옮겨가 세거했다. 14세琴元彭 이후로 안동군 풍산읍에 터를 잡고 17세 琴士龍 이 경기도 화성에 세거하기 시작했다.
1983년 통계에 의하면 경북 봉화군, 영양군, 안동군, 영주군, 문경군, 대구시, 충북 옥천군, 경기도 용인, 인천시 강화군 등지에 세거해 있다. 특히 봉화군 세거촌은 마을 터가 비봉포란(飛鳳抱卵)형으로 거문고 금(琴)과 조화를 이뤄 가문의 번성을 이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조선조에 들어와 봉화금씨는 특출하게 높은 관직이나 명예로운 관직에 오른 이는 드물고, 다만 조선 초기에 문과에 급제한 뒤 대사간을 거처 이조판서에 이르고 청백리에 녹선된 금유, 대사간을 역임한 금고, 세조 때 문무 양과에 급제해 문명을 떨친 琴徽 등이 관직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금문의 가훈인 효제신양(孝悌信讓)에 따라 충신과 효자를 많이 배출한 가문으로 잘 알려져 있다. 琴蘭洙 는 정유재란 때 의병을 모집 왜병 격퇴에 많은 공을 세워 좌승지에 추증되고 예안의 동계정사에 제향됐다.
1593년 권율 수하에서 권응수, 김응서 등과 협력해 적막사 40여동을 불사른 금윤선, 조중봉 휘하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며 금산대회전에서 순절한 금응신 등이 있다. 그 외 곽재우 장군 휘하에서 의병으로 활약한 금경, 이인좌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난적평정에 기여한 금옥,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항거하다 붙잡혀 옥사한 금달연, 향중의 추대로 의병대장이 돼 활동한 금용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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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헌집梅軒集과 태자리 수운정睡雲亭 |
▣ 科擧及第者(朝鮮時代) 琴嵩(금숭) :文科文宗1年(1450) 式年試丁科 琴尙絃(금상현)(1587 丁亥生) :文科仁祖2年(1624) 式年試丙科 琴暹(금섬)(1659 己亥生) :文科肅宗16年(1690) 式年試丙科 琴詩述(금시술)(1783 癸卯生) :文科憲宗10年(1844) 增廣試丙科 琴椅(금의)(1489 己酉生) :文科中宗14年(1519) 式年試丙科 琴愷(금개)(1562 壬戌生) :文科宣祖34年(1601) 式年試丙科 琴業(금업)(1557 丁巳生) :文科宣祖34年(1601) 式年試丙科 琴柔(금유)(1557 丁巳生) :文科太祖5年(1396) 式年試丙科 琴聖奎(금성규)(1636 丙子生) :文科肅宗4年(1678) 庭試乙科 (금충달)(1594 甲午生) :文科仁祖2年(1624) 增廣試丙科等 모두 68名의科擧及第者가 있다. (文科 14名, 武科 2名, 司馬試 52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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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선정種善亭(경북유형문화재 제264호) |
◎ 현대인물소개
봉화금씨의 대종회는 대종회장 琴億淵을 중심으로 崇祖愛族의 精神을 바탕으로 宗族間의 親睦을 圖謀하고 先祖의 遺業을 繼承시켜 奉化琴氏의 繁榮과 社會的地位向上을 目的으로 1981년 5월 개정하였고, 종보편찬위원회에서는 1984년 1호 종보로부터 2014년 60호 종보 발행까지 금문의 귀중한 기록을 정리하여 후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근세의 자랑스러운 유산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1985년 정부 통계에 의하면 봉화금씨는 전국에 2만355명이고, 2000년도 통계에 의하면 7144가구에 인구 2만3489명에 이르고 있어 희성에 속한다.
그리고 부산, 대구, 대전, 포항, 옥천,봉화, 안동, 영주, 용인, 영양, 상주, 문경,태백, 경주지역 권역별로 종친회가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봉화금씨 종손으로는 금철호(琴喆浩)(50세)현재 교직생활을 하고 있으며 그리고 봉화금씨 영주 종친회장은 금정진(琴政鎭)(76세), 총무국장 금화수(琴和洙)(67세)의 활발한 종무활동으로 타문(他門)의 칭송을 받고 있다. 금번 취재는 성균관유도회(成均館儒道會)영주지부 감사 금동률(琴東律)(70세)께서 많은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송인선 실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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