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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8월29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수원] 헤로데의 우유 부단함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예레 1, 17 - 19
† 복음 : 마르코 6, 17 - 29
“여자에게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고 준비한 위대한 예언자이다.
이러한 요한 성인은 헤로데 임금의 불륜을 책망하다가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의 간계로 순교하였다(마르 6,17-29 참조). 요한
세례자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한 것은 4세기 무렵 그의 유해가 있던
사마리아의 지하 경당에서 시작되었다.
★ 주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당신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명령하신다. 그러나 이는 온 땅과 맞서는 일이고, 유다의
권력자들뿐 아니라 백성 전체와 싸워야 하는 고난의 길이다(제1독서).
★ 요한 세례자는 헤로데 임금이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혼인한
사실에 대해 간언하다가 감옥에 갇힌다. 그리고 헤로데의 생일잔치
때 헤로디아의 간계로 목숨을 잃는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명백한 대조를 봅니다. 바로 요한 세례자와
헤로데 임금입니다. 요한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에 앞서 그분의
길을 닦으며 준비한 선구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회개를 촉구하면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들꿀과
메뚜기를 먹으면서 광야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었고, 그만큼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만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헤로데는 그 반대입니다. 그는 교활하고 야심 많은 통치자로, 동생의
아내를 차지한 탐욕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두려워하여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인
헤로데 대왕이 바로 그의 아버지이며, 자신 또한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며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였습니다.
이 두 인물이 오늘 복음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 만남을 통하여 두
사람의 대조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요한이 정의를 대변하는
사람이라면, 헤로데는 불의를 대변하는 자이며, 요한이 하느님의 진리를
세상에 전하는 사람이라면, 헤로데는 거짓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자입니다. 요한이 수난을 당하는 사람이라면, 헤로데는 폭력을 행사하는
자입니다. 결국 요한은 자신의 의로움으로 말미암아 불의한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저는 이 두 사람을 두고 ‘당당한 패자’와 ‘부끄러운 승자’라 부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전통은 바로 ‘당당한 패자’의 길을 걷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당당한 패자의 삶을 사시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당한 패자’에게 ‘참승리’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당한 패자’입니까, 아니면
‘부끄러운 승자’입니까?
- 매일 미사 -
◈ [청주] 바보가 되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8월29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 마르코 6,17-29
주님 앞에서 바보가 되라.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많으면 힘들어 집니다. 왜냐하면 자기 잘난
맛에 살기 때문입니다. 주장을 굽힐 줄 모르고 계산을 잘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우선적으로 챙깁니다. 그리고 상대를 의식하다가
얼굴이 굳어집니다. 그러나 바보와 함께하면 살기가 수월합니다.
그들은 계산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챙길 줄도 모르고 웃으며
살아갑니다. 어쩌면 그들이 진짜 똑똑한 사람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성 요한 세례자는 바보였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을
하였더라면 헤로데 왕에게 잘 보여 자기의 권세를 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산을 하지 못하고 바른 말을 했습니다. 요한은
헤로데 임금이 임금으로서 해서는 안 될 부정한 결혼을 하였다는
잘못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목이 베어져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정말 바보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목숨보다도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있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결국 요한은 빛이
되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눈에 바보가 될지언정 하느님을 놓치지 않길
희망했습니다.
헤로데 왕은 똑똑하고 잘 난 것 같았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그야말로
진짜 바보였습니다. 모든 권력을 가지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경솔한 말 한마디 때문에, 그리고 헛된 맹세와
체면 때문에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몹시 괴로웠지만
결국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위신과 체면을 선택하는 계산을
하고 말았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함부로
맹세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성공을 기대하지 말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느님을 선택하는 바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창세기26장에 보면
우물을 파는 이사악의 얘기가 나옵니다. 중동지방에서 우물은 한 부족의
운명이 달린 것이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물을 판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물길을 잡는 것도 그렇고 또 모래땅에서 우물을 파기란
어려움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사악은 일곱 개나 팠습니다. 열심히
파 놓으면 주위 사람들이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러면 조용히 자리를
옮겨 또 파고 그러다 보니 일곱 개나 파게 되었습니다.
똑똑하고 잘 난 사람은 우물을 파지 않고 파 놓은 우물을 차지하려
머리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사악은 그런 풍조에 물들지 않고 바보가
되어 우물파기에 열중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창세26,24) 하시며 이사악과 함께 하셨습니다.
결국은 바보 이사악이 승리하였습니다. 우물을 빼앗았던 사람들은
똑똑한 것 같았지만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바보처럼 우물을 빼앗기고
또 빼앗겼던 이사악은 마침내 주 하느님을 차지했습니다.
복음에 보면 죽은 이는 요한 세례자이고 살아있는 자는 헤로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죽은 자는 헤로데요, 살아있는
이는 요한 세례자입니다. 성 요한 세례자나 이사악이 바보처럼 보였지만
진짜 똑똑이입니다. 그러나 똑똑하다고 했던 사람들은 헛 똑똑이였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하느님을 선택하는 바보가 되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진짜 행복과 진짜 평화를 위해서
어제 아는 분께서 몸이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말을 듣고
병문안을 다녀왔지요. 그런데 우연히 같은 병실에 있는 다른 환자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글쎄 몸이 피곤하고 힘들어서 찜질방에
갔는데, 그곳에서 세균에 감염이 되었고 이렇게 병원에 입원한
것입니다. 하긴 얼마 전에 뉴스 기사를 보니, 찜질방이나 대중목욕탕이
워낙 따뜻하고 또 습도가 높아서 세균에 감염될 확률이 높다고 하더군요.
쉬러 갔다가 오히려 병에 걸린 것이지요.
이렇게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결과를 가져올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신의 생각만을 늘 강조하고 있지요. 뜻하지 않은
결과 그리고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는 길인데도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바로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이기심과
욕심 때문입니다. 특히 세상 것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잘못된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지요.
물론 그 순간에는 약간의 만족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잠시의 안정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진짜 평화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은 왜 그럴까요? 그들은 원한 것은 잠시의 행복,
인위적인 평화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떤가요? 더 큰 괴로움이
자신을 누를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행복과 평화를 찾고 계십니까? 한 순간만 누릴 수 있는
잠시의 행복과 억지로 만들어진 평화를 찾고 계신 것은 아니겠지요?
진짜 행복, 진짜 평화를 얻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짜 행복과 평화는 자기를 낮추고 주님을 높이는 길, 즉 자신의
뜻이 아닌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 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그래서 복음도 세례자
요한의 수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요. 헤로데 임금이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혼인한 사실에 대해 간언하다가 감옥에 갇혔고, 헤로데의
생일 때 헤로디아의 딸의 춤 값으로 목숨을 잃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바로 헤로데가 가지고 있었던
욕심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만 없으면 나쁜 말을 듣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들, 체면을 앞세워 자신이 말한 것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헛된
자존심들... 이러한 것들이 잠시의 행복을 가져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을 죽여 인위적인 평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헤로데는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후회를
하지요. 즉, 예수님 등장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면서 불안해합니다.
우리도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는 순간의 행복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억지로 만드는 인위적인 평화를 추구해서도 안 됩니다.
그보다는 진짜 행복과 진짜 평화를 위해서,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헤로데처럼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일로 힘이 들게 된다 해도 그 힘듦이 살아가는 ‘의미’가
된다(신경숙).
세례자 요한이 순교했다는 마케루스 요새.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있습니다.
새벽 다섯 시 반(‘앰블러’ 중에서)
현대 무용가이자 안무가인 트와일라 타프. 그녀는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미국 무용계의 여왕이라 불린다. 손대는 작품마다 평단의 극찬을 받아
온 그녀는 자신의 창조성이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노력을 습관화함으로써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제 작품이 성공할 확률은 잘해야 여섯 개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최종 작품을 완성할 때까지 여섯 개의 작품을 만들어요.”
그녀에게 꾸준한 노력이란 굳은살처럼 단단해진, 당연한 존재였다.
누군가 정상에 오른 비결을 묻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새벽 다섯 시 반, 택시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녀는 공연을 위해 세계 각지를 다니면서도 늘 새벽 다섯 시 반에
연습실로 향했다. 50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해 온 일이었다. 이는
연습을 게을리 할 온갖 변명으로부터 탈출하는 순간이자 그녀를 지금의
자리로 이끈 순간이었다.
빠른 결과를 추구하면서 서둘러 잠시의 행복만을 쫓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여유로운 마음을 갖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반복되는 죄''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죄는 상처에서 나오고 그 상처는 사랑에 의해서만 치유됩니다.'
2013년 다해 8월29일 연중 제21주간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목요일 복음묵상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마르코6,26)
----(오늘 복음에 관한 묵상은 지난 2월8일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반복되는 죄에 대해 생각해보렵니다.)...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53529265649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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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죄'라 함은 사실 우리 모두가 나이라는 세월의 짐을
인정할 수록 쉽게 통감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그러한 느낌은
무척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본다.
그리고 어쩌면 그 분 앞에 나아갈 때까지 우리는 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 아름다운 영의 소유자였던 프란치스코 성인 역시 늘 입에
달고 산 기도 구절이 시편의 말씀 "주여! 자비하시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애련함이 크시오니 내 죄를 없이하소서.”이었음을 보면,
올바른 죄에 대한 통찰은 남의 평가나 그 어떤 법적인 객관적
잣대를 요구하지 않는 것 같다.
반복되는 죄로부터의 해방은 사랑의 체험에서만 가능하다.
사랑에 의한 용서체험,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반복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리라 확신한다.
우리는 자신의 약함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 약함이 정당화되어서도 안 된다. 반복되는 죄라 함은
참된 통회의 결핍이나 면역되어 무디어진 양심의 결과이다.
또한 희한하리만치 빨리 돌아가는 자기 합리화라는 자기제어의
메커니즘도 한몫을 한다.
참된 뉘우침이 없다면 절대로 반복되는 죄로부터 해방될 수
없음을 체험한다. 참된 뉘우침이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징벌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고, 완덕에 이르고자 하는 초조함도
아니다. 그것은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 분, 그리고 그 사랑에 매료되어
나 역시 그분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은 그런 마음에서만
가능하다.
약함은 인정되어야 아름답다.
그럴 수 있을 때 비로소 의탁하는 마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약하다. 그리고 늘 넘어진다. 그리고 다시
것이다. 하지만 그 반복되는 죄가 신물 나게 싫다면 그 약함을
정당화하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약함 안에서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은총, 그리고 그 약함을 이겨내려는 자기 싸움
안에서 구도자의 길이 조금씩 갖추어져 간다.
비겁할 수 있다. 치졸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만큼 약한 존재이다.
하지만, 신앙은 구체적인 마음의 변화를 요구한다.
반복되는 죄로 고통스러워하는 분들께 말씀 드리고 싶다.
약함을 인정하되 그 인정이 주저앉음이나, 어쩔 수 없는 인간실존의
조건을 뜻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투자 없이 어떤 것도
불가능함을 알아야 한다.
바오로 사도의 "나는 나의 약함을 자랑한다."는 고백을 죄의 반복을
정당화시키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
참된 회개의 체험만이 그분의 뜻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고, 반복되는 죄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분의 사랑은 한이 없다는 말, 그 말이 어렴풋한 머리에서 나오거나
그리고 자신의 약함을 정당화하는 말이 아님을 깨닫고, 구체적으로
그분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듯한 열정, 바로
그런 사랑에서만 가능한 말이라는 것을 묵상해보았으면 좋겠다.
나 역시 죄 안에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나 역시 반복되는 죄
안에서 신음하고 있다. 하지만 싸우고 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이용되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주여! 자비하시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애련함이 크시오니
내 죄를 없이하소서." (시편51,1-2)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헤로데의 우유부단함
2013년 다해 8월29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
복음 : 마르코 6,17-29
< 헤로데의 우유부단함 >
어떤 분이 “죄를 계속 지으면서 고해성사를 계속 봐야 하는가요?
또 죄를 지을 텐데요. 당분간 성당을 쉬면서 죄를 짓고 나중에 나오면
안 될까요?”라고 질문하셨습니다. 고해성사는 물론 미래에 또 죄를
짓더라도 지금은 그러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머리로 자꾸 생각하다
보면 안 좋은 결론에 이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매우 논리적이고 신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매사에 신속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칸트는 한 여인과 사귀고 있었는데 도무지 구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견디다 못해 칸트에게 청혼했습니다.
“저와 결혼해주세요”
칸트의 대답은 간단했다.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칸트는 그때부터 결혼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도서관에 가서 결혼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결혼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글을 읽으며 연구에
몰입했습니다. 그리고 여인과 결혼하기로 최종결론을 내렸습니다. 칸트는
여인의 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때 여인의 아버지가 나와
말했습니다.
“너무 늦었소. 내 딸은 이미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됐다오.”
사람들은 종종 가슴으로 느낄 것을 머리로 인식하려 합니다. 가슴은
결단을 내리지만 머리는 숙고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숙고가 아니라
마음의 결단입니다. 사랑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의지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 순교 기념일입니다. 헤로데가 그의 이복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를 왕비로 맞아들이자 요한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충고합니다.
헤로데는 헤로디아와 살고 싶기도 하고 요한의 말을 따르기도 싶습니다.
마음의 결단이 없는 우유부단한 사람입니다.
또 자신의 생일 때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을 잘 추어 그에게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말합니다. 어머니의 조언을 받은 살로메는 요한의 머리를
청합니다. 헤로데는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마음은 그래서는 안 되는 줄
알지만, 머리는 약속을 지켜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통스럽지만’
요한의 머리를 베어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결정이었다고 세례자 요한의 순교에 헤로데의 책임은
없을까요? 아무리 요한을 지켜줄 마음이 있었다 하더라도 결정적인 명령을
내린 것은 헤로데 자신입니다. 우유부단함이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경감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결단이 없었었던 것에서는 핑계를
댈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단을 내리는 것은 다른 누구도 할 수
없고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했으니 자신의
책임인 것입니다.
삼국통일을 달성한 김유신이 청년시절 기녀인 천관을 만나서 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유신이 천관에게 마음을 빼앗겨 학업을 게을리 하자 이를
걱정한 어머니가 꾸짖으매, 김유신은 다시는 천관의 집에 가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활쏘기 연습에 지쳐 말 등에서 꾸벅꾸벅 졸던 김유신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말이 천관녀의 집 앞에 서있는 것을 보자 화가
솟구쳐 그만 칼을 빼어들고 말의 목을 쳐버려 두 동강을 내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유신의 모습을 보고 반갑게 뛰어나오던 천관은 그만 피가 낭자한 말의
목을 보자 혼절하였고 다시는 유신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겠노라고
맹세하여 스스로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올바른 행위만이 자신을 증명합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슨 핑계를 대던지 다 죽은 것만은 확실한 것입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땅으로 가는 것도
결단이고,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사막으로 나아가는 것도
결단이요,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에게 ‘아멘!’ 하신 것도 결단이고,
예수님께서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한 것도
결단이고, 바오로가 교회를 박해하다가 다시 교회를 위해 일하게 된
것도 그의 결단입니다. 결단 앞에서는 주저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유부단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핑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믿기로 했다면
세상과 죄를 완전히 끊기로 결심합시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세례자 요한의 수난 기념일
2013년 다해 8월29일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어제는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20년 전에 저는 용산 성당에 있었습니다.
그때 성경공부를 함께 했던 분들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분들의 세례명,
배우자의 직업, 자녀들을 기억해 냈습니다. 20년이 지난 일들을 기억하는
제게 기억력이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자매님께서 20년 전에 저에게
상담을 하셨다고 합니다. 상담한 내용이 기억이 나느냐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잘 모른다고 말씀드렸더니 약간 실망하는
눈빛이었습니다. 20년 전의 세례명, 배우자의 직업, 자녀들을 기억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상담한 내용까지 기억하는 것이 제게는 무리였나
봅니다.
강론이나 강의를 쓰고 그것을 외우는 능력이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자꾸만 하니까 어떤 것들은 사진처럼 기억이 나고, 어떤 것들은
순서가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암기력하면 배우들입니다. 배우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이해하고, 자신들이 해야 할 대사를 외우기 때문입니다. 요즘 한국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많다고 합니다. ‘설국열차, 숨바꼭질, 감기, 더 테러
라이브’와 같은 영화를 많이 본다고 합니다. 이들 영화는 훌륭한 연기자가
있어서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배우들이 처음부터 주연배우를
하고, 훌륭한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대사를
잊어버리고, 말이 잘 나오지 않고, 행동이 어색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꾸준한 연습과 노력으로 카메라 앞에서 떨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2002년부터 교구 사목국에서 일을 했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는
주일미사 강론 10분만 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목국에서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2시간씩 강의를 해야 했습니다. 내용도 문제지만,
2시간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처음 2시간 강의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한참을 이야기한 것 같은데 시간을 보니 15분밖에
지나지 않았던 적이 있습니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나고, 무슨 이야기를
계속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당황했었습니다. 3년이 지난
2005년도에는 떨지도 않으면서 2시간씩 강의를 편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자꾸 하니까 요령도 생기고, 신자들의 반응을 살필 수 있는 여유도
생겼습니다.
지금도, 다른 본당이나 단체에 가서 강의를 하려고하면 여전히 걱정은
됩니다. 막상 강의를 하면 마음이 편해지는데, 강의를 하기 전까지는
걱정을 하는 저 자신을 봅니다. 오늘 제1독서는 큰일을 앞둔 사람들에게,
평소와는 다른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함께하고 있음을 믿으면 우리는 두려움 없이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할 수 있습니다.
본당에서는 새로운 직책을 맡게 되는 분들을 봅니다. 직책을 맡기 전에는
두려워하고 걱정들을 하지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말씀의 은혜를
주시고, 분별의 지혜를 주시며, 어려움을 이겨낼 용기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세례자 요한은 주연은 아니지만, 조연의 역할을
충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생활을 했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자 요한에게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따라서
제자가 되었고, 세례자 요한을 오시기로 한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앞으로 오실분의
길을 준비하러 왔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하고, 저는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 저기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신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막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의자’를 생각합니다. 성당에 와도, 식당에 가도,
차를 타도, 집에 가도 우리는 의자를 볼 수 있고, 아무 생각 없이 의자에
앉습니다. 의자들은 우리들의 지친 몸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자리를
비워줍니다. 의자가 없다면 우리는 참으로 불편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나를 편안하게 해 주는 의자를 생각하며, 예수님을 위해서
기꺼이 ‘의자’가 되어준 세례자 요한을 생각합니다. 우리들 또한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기꺼이 남을 위한 ‘의자’가 되어 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들의 어머니, 본당의 많은 봉사들은 가족들을 위해, 하느님을
위해 사랑의 의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주님의 개입이 곧 구원의 뜻
2013년 다해 8월29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사람이 무서워지는 경우도 있고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도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잘 알기 때문에 행복과 불행의 양극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가려 사귀어야 하는 것, 잘 만나야 한다는 말 귀담아야 합니다.
모녀간도 부자간도, 친구관계는 물론 이성 관계 역시 다 그렇습니다.
아무튼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게 행복과 불행을 부르는 거지요.
그러기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주님의 개입이 곧 구원의 뜻이기도 합니다.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마르코 6,25~26)”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도회] 세례자 요한, 그 당당함의 배경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마르 6,17-29
<세례자 요한, 그 당당함의 배경>
이 땅을 거쳐 가는 모든 존재들이 한번은 마주쳐야 할,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과정이 있는데, 바로 죽음입니다. 다가온 죽음 앞에 그
누구라도 방법이 없습니다. 그저 묵묵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잠깐 잠깐 헤어지는 이별조차 그리 안타깝고
아쉬운데, 지상에서의 영원한 단절인 죽음이란 현실을 차분히
수용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죽음이 있기에 한 인생의 완결이 있습니다.
죽음이 있기에 혹독한 시련의 끝이 있습니다. 죽음이 있기에 죄의
용서가 있고, 죽음이 있기에 또 다른 희망이 있고, 또 다른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목숨을 연명해서 200살까지 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혹독한 고독과 오랜 고통, 그 많은 죄와 방황을 다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관건은 우리의 죽음을 얼마나 고상하고 품위 있게 맞이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죽음이 얼마나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죽음으로
완성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돌아보니 죽음에도 참 여러 유형의 죽음이 있습니다. 참으로 의미
없는 죽음이 있습니다. 명분도 실리도 없는 죽음, 무의미한 죽음도
많더군요. 그러나 뜻 깊고 영웅적인 죽음도 있습니다.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비명횡사하는 죽음이 있는가 하면 잘 준비된 정갈한
죽음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참으로
다양한 의미와 가치로 충만한 죽음,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주는
죽음, 하느님께서 가장 즐겨 받으실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갑작스레 다가온 것처럼 여겨지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죽음은 오래 전부터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처럼 세례자 요한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강직한
예언자였습니다. 불의 앞에서 목에 칼날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는
하느님의 투사였습니다.
당시 로마 식민통치 하에서 그리 대단치도 않은 한정된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던 헤로데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왕이었습니다. 다들 그와
아내 헤로디아가 보여준 극에 단한 타락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입을 뻥긋하지 않았습니다. 알량한 권력이나마 소유하고 있던 그가
두려웠고, 또 그 알량한 권력에 빌붙어 목숨을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직 단 한 사람,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왕을 반대하는 깃발을
높이 들어 올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에 어긋난 삶을 살았던
헤로데 왕을 향해 마음 있는 그대로의 말을 외쳤던 것입니다. 참 예언자의
당당한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그 당당함, 그 용기는 과연 어디에서 나왔을까,
생각해봅니다. ‘나는 누구인가?’ 자신의 신원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확고했습니다. 자신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한
사람임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위대했지만 겸손했고, 정녕 의로웠지만 크게 물러 설 줄
알았던 세례자 요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의 불의와 죄악 앞에
침묵하지 않고 크게 외쳤던 세례자 요한의 영성이 오늘 우리의 것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 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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