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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9월11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청주] 천상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콜로 3, 1 - 11
† 복음 : 루카 6, 20 - 26
★ 바오로 사도는 콜로새의 신자들에게 현세적인 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천상적인 것을 추구하여, 온갖 죄의 허물들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이 되라고 권고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행복과 불행의 길을 말씀하신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불행하게 보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은 행복할 것이고, 지상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불행할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어느 날 프란치스코 성인은 동료 레오 형제와 천사의 성 마리아 성당을
향해 걸어가면서 참된 기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성인은
동료 형제들이 모범적인 성덕을 보여 준다 해도, 기적을 일으킨다고
해도, 온갖 지식을 섭렵했다 해도, 사람들을 회심으로 이끈다고 해도
그것이 완전한 기쁨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레오 형제는
몹시 놀라면서 “그렇다면 참된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청했습니다. 이에 대한 성인의 대답은 이러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비에 젖고, 추위에 얼고, 진창에 빠져 형편없이 되고, 배고파
기진맥진하여 천사의 성 마리아 성당에 겨우 도착해 수도원 문을
두드렸다고 합시다. 그런데 문지기가 화를 내며 (중략) 바깥 쏟아지는
빗속에 우리를 밤중까지 내버려 둘 때, 그러한 욕설, 인정 없는 무자비한
대우, 매정한 거절도 우리가 인내로써 달게 받고 (중략) 복되신 그리스도의
가난을 생각하고 즐거워한다면, 그런 것이 완전한 기쁨이라고 기록해
놓으시오. (중략) 레오 형제! 자, 이제 결론을 들어 보시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친구들에게 베푸시는 성령의 온갖 은총과 선물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바로 자기를 눌러 이기고, 고통, 모욕, 수치, 불쾌한 감정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달게 참아 받는 그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잔꽃송이』 참조).
프란치스코 성인은 참되고 완전한 기쁨이란 온갖 고통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불행할 만한 상황을 가장
기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참되고 완전한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행복도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닐는지요?
우리는 과연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라지지 않을 참되고 완전한 기쁨,
그 참행복을 갈망하고 있는지요?
- 매일 미사 -
◈ [청주] 천상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2013년 다해 9월11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 루카 6,20-26
천상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
남보다 머리가 좀 뒤떨어진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머리가 좋지
않다고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고 무시를 당해서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를 하였더니 어느 날 하느님께서 나타나셔서 소원 한 가지를
청하면 꼭 들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젊은이는 얼른 똑똑한 머리를
달라고 청했습니다. 청하고 나서 가만히 생각하니 머리보다는 돈이
좋을 듯 했습니다. 돈이 많으면 머리 좋은 사람을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청을 바꾸었습니다. 또 청을 바꾸고 생각하니 돈보다는
아리따운 여자와 함께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느님께 청했습니다. 청하고 나니 다시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시 간절히 청했습니다. 세 가지를 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참다못해 말씀하셨습니다. ‘자꾸 이랬다. 저랬다 하지
말고 한마디로 말 하여라.’ 그래서 큰 소리로 외쳤답니다. ‘머리 돈
여자!’ 하느님께서는 그의 청을 들어 주셨고 그는 지금 많은 어려움
속에 산답니다.
‘머리 돈 여자 !’ 정신없는 여자와 살려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행복은 똑똑한 머리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많은 돈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리따운 여인에게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골로3,2).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은’사람다운 생활을 하는 데 있습니다.
(골로3,9-10)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미움을
사고 쫓겨나고 모욕을 당하고 누명을 쓴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하시고
오히려 부유한 사람들, 배부르고 웃고 칭찬 받는 사람들을 불행하다고
하시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부유한 사람은 부 때문에 위험합니다. 그들은 자기 삶의 확고한 기반을
하느님에게서가 아니라 자신의 부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에게서 얻으려 하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말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성 베르나르도는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 뿐입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행복하다.’, ‘불행하다’를 말하지
말고 “우리 마음에 열성을 기르고 믿는 바에 관심을 일깨우며 천상사물을
갈망하십시오. 어떠한 불행 중이라도 천상 것을 추구하는 이 행복을 스스로
포기하지 마십시오.”(성 대그레고리오 교황) 시편의 말씀으로 마무리 합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시편1,1-3) 사랑합니다. 행복하십시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진정한 행복의 길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어제 아침이었습니다.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아침운동을 위해 자전거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사제관으로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사거리에서 교통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중에 제가 잠깐 딴 짓을 하느라고
신호 바뀐 것을 못 본 것입니다. 그래서 제 바로 뒤에 있는 차에서 경적을
울려줍니다. 저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서 곧바로 출발하지 못하고 약간
주춤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제 앞으로 쌩 지나가는 차 한 대가 있었지요.
신호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빠서 속도를 높여 사거리를 지나가는
차였습니다.
만약 제가 신호를 제대로 보고 길을 건넜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니
제 바로 뒤에 있었던 차의 경적소리를 듣고서 주춤하지 않고 곧바로
출발했어도 큰 일 날 뻔 했습니다. 딱 1초의 시간입니다. ‘똑 딱’하는
시간으로,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시간이 사람의 미래를 결정지을 수도 있습니다.
쓸데없는 일에 서두르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또한 다른 이들에게
쓸데없는 것을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두 가지에
그다지 자유롭지 못합니다. 소홀히 하고 있는 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이기적인 내 생각을 내세워서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많이 강요를
하고 있습니까? 바로 그러한 모습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행복이 아닌 불행의 길로 갈 수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은 어떠한 곳에서 발견될 수 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어떤 이들이 행복하고, 또 어떤 이들이
불행한 지를 말씀하십니다. 우선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거꾸로 말씀하셔야 정답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기준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바로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의
손길을 따를 수밖에 없는 가난하고 굶주리며 울고 있는 사람들이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기준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은 어떨까요? 세상의 기준
속에서 풍요와 만족을 누리고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손길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삶, 하느님이 배제된 쓸데없는
일에만 집착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의 길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바로 하느님 안에서만
있음을 오늘 분명히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하는 삶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쓸데없는 일에 대한 관심은
이제 버리고요.....
목에 걸린 말 한마디, 잘 다스리면 온종일 행복하고, 잘못 다스리면
온종일 불행하다. 지금 그대가 던지는 말은 결국 그대에게 돌아온다
(허당당).
이스라엘의 행복선언 성당.
열려있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 (이정하의 '돌아가고 싶은
날들의 풍경' 중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젊은 시절에 무척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피카소는 자기의 일, 그러니까 그림 그리는
일에만은 언제나 열정적이었습니다. 피카소는 자기 아내를 모델로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매일 보는 아내지만 그림을 그릴 때는 늘 새로운
눈으로 바라봤다고 합니다.
나무는 봄이 되면 꽃과 잎이 피고, 여름이면 그 잎이 무성해지고,
가을이면 그 잎이 떨어지고, 겨울에는 그저 앙상한 빈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나무의 모습은 사계절 동안 볼 수 있는
겉모습이지만 결코 나무의 본질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겉모습이 아닌 다른 어떤 모습, 카메라로 찍을 수 없는 그
어떤 모습, 우리의 삶도 그러하리라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이 아닌 그 너머의 다른 모습, 눈에 보이는 것뿐만이
아닌 또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눈, 즉 세상의 볼 수 있는 눈, 그 열려
있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비로소 그 진정한 값어치를 우리는
깨달을 수 있겠지요.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진정 행복한 길을 선택하십시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진정 행복한 길을 선택하십시오.
그것이 제일 잘 사는 길입니다.'
2013년 다해 9월11일 연중 제23주일 수요일 복음묵상
“너희는 행복하다!” (루카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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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이 구분한 두 부류의 사람들을 열거해보자.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미움 받는 사람들, 쫓겨나고 모욕당하는
사람들이 한 부류이고, 배부른 사람들, 웃는 사람들, 칭찬받는 사람들이
또 다른 부류이다. 전자의 사람들은 행복하다 했고, 후자의 사람들은
불행하다 했다.
여기서 우리가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미움 받는 사람들은 모두 선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배부르고 웃고 칭찬 받는 사람들이 모두 악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구분의 기준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가난하다는 것과 부유하다는
것이 행복과 불행의 기준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그 기준은 “무엇 때문에 가난하고 무엇 때문에 배부르냐”에 있다.
선한 마음 때문에, 옳은 마음 때문에, 신념에 대한 양심 때문에 얻어진
배고픔과 고통의 당사자들이라면 그들은 행복하다는 것이다. 남의 것을
빼앗고, 구조악(構造惡)에 편승하고, 권력으로 얻어진 부유함과 위세의
수혜자라면 그들은 불행하다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 때문에 쫓겨나고 모욕당하고 비방을 듣는 이들은 행복하다.”
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즉, ‘옳음 때문’이라는 것이 행복의 전제조건임을 기억해야 한다.
사회적 경제적 소외된 이들을 생각해본다.
소외되었다는 그 자체가 천상의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들 사이에도 악은 존재하고 죄도 존재한다. 결국 선하게 그리고
올바르게 살아야만 행복한 주인공들이 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음은 이 세상에서 여러 면으로 부유한 혜택을 누리는 이들을
생각해보자. 정당하게 일해서 그 결과로 정당하게 부를 벌어들였다고
하자. (불의하게 벌어서 배부른 자들은 이 자리에서 이야기할 일고의
가치도 없다.)
그렇다면 옳지 않은 짓을 하지 않았기에 행복한 부류에 들 수 있을까?
복음적 해석은 그렇지 않다. 최소한 어딘가에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누군가가 존재하는 이상 그 아픔을 분담해야 하는 것이 가진 자들에게
주어진 행복으로의 유일한 기회이다. 이런 의미로 가진 자가 그렇지
못한 자들보다 하느님 나라에 대해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진정으로 행복했으면 좋겠다. 구조적인 악과 모순이 없는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인간의 생리 자체가 허락하지를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각자가 서있는 곳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희망하며
구체인 행동을 보여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가 가르쳐주신 길이고 진정한
행복의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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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0일 복음묵상으로 같은 주제의 마태오가 전하는 복음이 읽혀졌었다.
읽어보시기 바란다. (마태오5,1)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585547074800701&set=
pb.491783984177011.-2207520000.1378781321.&type=3&theater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2013년 다해 9월11일
지난 월요일에 ‘힐링캠프’를 보았습니다. 13년 전에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서 온 몸에 화상을 입은 ‘이지선’씨가 출연했습니다. 40번을 넘게
수술을 했고, 지금도 계속 수술을 받아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참 불행해 보였습니다. 아무런 잘못 없이 사고를 당했고,
아름다운 얼굴은 화상으로 일그러졌고, 손과 발도 성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참고 견디었던 지선 씨가 딱 한 벌 울었다고 합니다. 언제나
곁에서 힘을 주시고, 간호를 하셨던 어머니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엄마! 만약에 엄마가 나의 이 고통을 바꿀 수 있다면 바꿔
주시겠어요?’ 어머니는 딸에게 말했습니다. ‘바꿀 수 만 있다면 수천만
아니 수만 번이라도 내가 너의 고통을 바꾸고 싶구나!’ 지선 씨는 엄마의
지극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고, 그때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지선 씨는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더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좋은 직장을 얻고, 좋은
집을 구하고, 자녀들이 잘 자라고, 건강하게 지내는 것은 만족이지
행복은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만족은 그것들이 채워지지 않을 때,
그것들이 사라질 때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고,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채우는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려오는 삶이고,
나누는 삶이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사람은
언제, 어떤 처지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신학생 때는 사제가 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보좌신부 때는 본당신부가
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본당신부 때는 보좌신부가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작은 본당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이 갖추어진 성당에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20년이 지나서 안식년을 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행복은 내가 원하는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어진 순간을 감사드리고, 그 시간에 충실한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하느님나라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니듯이 행복은
결코 내가 원하는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행복 역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우리가 늘 추구하지만 그것으로는 얻을 수 없는 행복의
조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현실의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마음은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 진리에 이르게 됩니다.
‘욕심, 욕망, 출세, 성공, 권력, 명예’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불꽃 속으로 날아드는 불나방처럼 모든 것을 불태우려
합니다. 하지만 그 끝은 ‘허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이야기 하십니다. 그것은 진흙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연꽃’과 같습니다. 시련 속에서도, 절망 중에서도, 고통의 한 가운데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감사하는 마음이 가난한 마음
2013년 다해 9월11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
복음 : 루카 6,20-26
< 감사하는 마음이 가난한 마음 >
이번 SBS 힐링캠프에서 차 사고로 몸 55%에 3도 화상을 입고도
살아나 얼굴과 온 몸이 성치 못함에도 ‘지금이 행복해서 과거의
예쁜 얼굴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당당하고 유머도 있는
이지선씨가 나왔습니다. 정말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부끄러워 머리를
숙이게 하는 마음 예쁜 자매입니다.
이지선씨는 대학교 4학년 때 오빠와 차를 타고 신호대기를 하던 중
뒤에서 음주뺑소니 차량에 사고를 당해 온 몸에 화상을 입었고 의사도
포기한 상태였지만 어머니의 사랑과 격려로 기적적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살 수 있었다는 것에 얼마나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 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습니다.
매일 온 몸을 소독해야 했는데 진통제의 효과가 떨어지는 몇 시간
동안은 극도의 고통을 당해야 했고, 살이 오그라들어 눈과 입을 몇
달 동안 깜빡이거나 다물 수 없었으며, 목의 살이 오그라들어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볼 수 없어서 목과 척추까지 휘어져야 했는데, 더 힘든
것은 손가락이 곪아 8개를 잘라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울고 있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엄마, 더 많이 자르지 않아서 감사하지?”
자신도 어떻게 그런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아마
연습되었던 것이 아닐까요? 물론 40번 가량 수술을 하면서 절망에도
빠졌었지만 그를 살고 싶게 했던 것은 목사님이 기도하면서 반드시
살게 될 것이고, 또 세상에 희망을 전하는 큰일을 하게 될 것이라며
기도 해 주었는데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 들리는 음성처럼 느껴져
힘을 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어려움을 극복한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감사를 찾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사고를 낸 사람의
차가 보험에 들어 있어서 감사했고, 몇 달 만에 눈을 깜빡거릴 수 있게
되었을 때 감사했고, 손가락으로 글을 쓰고 숟가락을 들 수 있는 것에
감사했으며, 환자복의 단추를 혼자 힘으로 끼울 수 있어서 감사했고,
문을 열수 있어서 감사했으며, 무엇보다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한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지금은 매우 행복해서, ‘진심으로’
과거의 예뻤던 얼굴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당당히 말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무언가 불만이 있고 열등감을 지니고 있어서 당당하지
못할 때가 많은데 이 자매는 그 울퉁불퉁한 얼굴로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짧아진 손을 들어 하느님을 당당하게 찬미하고, 연예인과
자신이 10가지나 닮은 것이 있다고 하며, 지금 자신의 모습에 매우
감사해 하고 있습니다.
물론 처음 CD케이스에 비친 외계인 같은 자신의 얼굴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이건 내가 아니야’라며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살 수 없음을 알기에 처음엔
거울 아주 멀리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낯선
자신의 모습에 인사하며 말을 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엔
조금 더 가까이, 그 다음엔 아주 가까이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렇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이지선씨는 자신의 이런 마음이 ‘가난’이라고 말합니다. 아무 것도
없지만 감사하는 마음, 이것이 가난한 마음이라 하고 하느님은
그 마음의 그릇에 행복이라는 것으로 채워주셨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
이라고 한 것처럼, 결국 가난이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지금
그대로의 모습에 감사할 줄 아는 모습인 것 같습니다.
전에 얼굴에 모반을 지니고 태어나 부모로부터 버려져 고아원에서
자라다가 다시 얼굴 한 쪽에 암이 생겨 한 쪽 얼굴의 뼈를 다
깎아냈지만, 그래도 매순간 감사하며 살아가던 김희아씨가
생각났습니다. 이 분도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불평하기 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부터 감사하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마찬가지로
이지선씨도 잃은 것에 대한 불만이 아닌 살아있다는 것에서부터
감사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불평과 화를 많이 내는 이경규씨도 감사를 하고 싶은데 자신은 원채
습관이 안 돼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지선씨는 감사도 연습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절망적일 때 감사할 힘도 없었지만 억지로라도
찾아내려 힘썼다고 합니다. 저도 지금까지 감사 일기를 너무 성의
없게 썼는데, 오늘부터라도 더 감사하는 마음으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a로 ''영원한''을 붙여서 마무리
2013년 다해 9월11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a로 ‘영원한’을 붙여서 마무리
먹을 것이 부족해 굶주리거나 슬퍼하는 사람들을 불행하다고 봅니다.
입맛을 잃어 굶거나 자식을 잃어 슬퍼하는 사람들도 불행하고요.
어쩔 수 없는 세상이기에 불행은 행복을, 행복은 불행을 부르나 봅니다.
산과 골짜기가 있고 하늘이 있고 땅이 있어 어우러진 자연세상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뭔가 의미를 주네요.
그런데 기왕이면 +a로 ‘영원한’을 붙여서 마무리할 줄 알면 좋겠지요.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루카 6,21)”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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