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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9월13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청주] 너나 잘해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1티모 1, 1 - 2. 12 - 14
† 복음 : 루카 6, 39 - 42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4세기 중반 터키의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나
독실한 어머니의 신앙을 물려받았다. 수도자들과 함께 엄격한 극기
생활을 하던 그는 또한 은수자를 본받아 광야에서 기도와 고행의
시간을 보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자선과 저술 활동에 전념하다가
사제품을 받고 주로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로
임명된 그는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악습에 젖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심지어 황제나 황후에게도 잘못된 점을 거침없이 지적하였다. 그
때문에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는 유배 생활을 하다가 407년 무렵에
선종하였다. 탁월한 설교로 ‘금구’(金口: 황금의 입)라고도 불리는
그는 설교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 바오로 사도는 아들처럼 여기는 동료 티모테오에게 편지를 쓰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난날 죄인이었던 자신을 부르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신 사실을 떠올린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의 잘못만을 책망하며 그를 가르치려 하지 말라고 이르신다
(복음).
◈ 오늘의 묵상
인도에서 전해진 교훈적인 내용 하나를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그가 일을 끝내지 않았다면 그를 게으르다 하고, 내가 일을 끝내지
않았다면 나는 너무 바쁘고 많은 일에 눌려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가
다른 사람에 관해서 말하면 수다쟁이라 하고, 내가 다른 이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건설적인 비판을 한다고 한다. 그가 자기 관점을 주장하면
고집쟁이라 하고, 내가 그렇게 하면 개성이 뚜렷하기 때문이라 한다.
그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콧대가 높다 하고, 내가 그렇게 하면 그
순간에 복잡한 다른 많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가 친절하면
나에게서 무엇을 얻고자 그렇다 하고, 내가 친절하면 그것은 유쾌하고
좋은 내 성격의 한 부분이라 한다. 그와 내가 이렇게도 다르다니 얼마나
딱한 일인가!’
다른 사람을 보는 눈과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이토록 다르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잘 드러내는 내용인 듯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다른 이에게는 엄격하려는 것이 인간 대부분의 심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바로 이러한 모습을 호되게 지적하십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은 다른 이에게
충고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충고 한마디라도
하려면 그보다 먼저 두세 차례 자기 자신을 반성하라는 뜻입니다.
진정한 자기 성찰 없이는 참된 충고나 가르침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되풀이하는 “제 탓이오.”라는 고백이 일상생활에서도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너나 잘해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9월13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 루카 6,39-42
너나 잘해
살아가면서 말은 청산유수인데 삶이 뒷받침 되지 못하여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자신의 큰 허물은 보지 못하면서도 남의
작은 허물만 보고는 나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삶의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서 대접받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방귀뀐 놈이 성낸다.’라는 말을
합니다. 남의 잘못은 잘 찾아내고 자기 잘못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의 지극히 하찮은 잘못은 크게 보이지만 자신의 잘못은 대단히
중대한 것일지라도 작게 보이는 것은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내 눈에 들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가6,42)는 주님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하겠습니다.
“철저한 자기성찰만이 우리에게 이웃의 잘못 앞에서 자비롭고 인정 있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노랫 말에 ‘너나 잘해, 내 걱정 하지마!’ ‘너나 잘해, 잘난 체 하지 마’ 하는
가사가 있습니다. 삶의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 속으로는 그런 감정을 갖게
되는가봅니다. 삶이 풍요롭지 못할 때 하는 말이나 행동은 헛소리요,
위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으로 말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신이 아는
대로 살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이 안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어미게와 아기게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어미게가 아기게의 걷는
모습을 보니 걷는 보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미게가 말합니다.
“제발 옆으로 걷지 마라. 의젓하게 똑바로 걸어라.”그러자 아기게가
말합니다. “네, 엄마. 그러면 엄마가 걷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어미게는
“그래. 따라서 하렴”하고 걷는데 자꾸 옆으로 옆으로 걷습니다. 아기게가
뒤따라 옆으로 옆으로 걸었습니다. 교훈을 늘어놓기 전에 자신부터 똑바로
살고, 똑바로 걸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라고
하며 가슴을 펑펑 칩니다. 입으로가 아니라 온 몸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용서를 할 수 있고 화해를 이루며 화목해지고 행복해 집니다.
남의 탓하지 않는 하루의 삶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끝맺음
역시 주님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우리 스승일 수 있습니다.
세상은 노력한 만큼 잘 살게 되고, 사랑하는 만큼 아름다워지며
가슴을 여는 만큼 풍족해 집니다. 주님께 마음을 열고 내 자신을 바꾸고
쇄신시키는 일부터 시작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어떻게 하면 제
눈의 들보를 빼낼 수 있을까요?”“우선 네 눈에 들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부터 하여라.”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위선의 삶이 아닌, 주님의 뜻을
어떤 화가가 있었는데 그는 돈도 없으면서 사람들 앞에서는 늘
부자인 척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화가가 엄청난
부자인 줄 알았지요. 그리고 그러한 소문을 듣고 도둑이 어느
날 밤 몰래 이 화가의 집을 침입했습니다. 하지만 부자라는 소문에
비해 집에는 값나가는 물건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
집을 털기 위해 애썼던 그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었다는 생각에,
도둑은 화를 내며 화가에게 말합니다.
“그림이 그렇게 잘 팔려서 돈이 많다고 큰 소리 치더니 알고 보니
거지 중에 상거지구만!”
그러자 화가가 도독에게 이렇게 사정합니다.
“평소에는 돈이 많이 있었는데 요 며칠 사이 공교롭게도 돈을 벌지
못했네. 미안하지만 오늘 본 일을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말아 주게.” 그러면서 자신의 주머니를 툭툭 털어 그나마 남아 있는
잔돈까지 모두 도둑에게 내주었다고 합니다.
그냥 이야기인 것 같지만, 이 이야기는 프랑스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하네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싸구려 자존심이
강한 점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겉으로 보이는
싸구려 자존심이 중요할까요? 사실 우리는 자신의 체면이 제일 중요한
것처럼 착각하지만, 이 체면은 약간의 시간만 지나도 별 것 아님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에 우리의 내면이 아름답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은 굳은
마음으로 무장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겉으로만 행복한 척 한 것이
아니라, 진실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겉으로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위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사람은 눈 뜬 장님과 같습니다.
마음의 눈이 감겨 있기 때문에, 주님의 뜻을 볼 수도 없고 또 따를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고, 판단하며
단죄합니다. 그 결과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위선자의 길을 가게 됩니다. 따라서 위선자의 길을 가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이 아닌, 보이지 않는 내 내면을 더욱 더 튼튼하고
아름답게 만드십시오. 나의 내면이 이렇게 튼튼하고 아름다울수록
남의 이목은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행하고자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힘도 저절로 얻게
됩니다.
우리 모두 위선자의 삶이 아닌, 주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따를 수 있는
아름답고 튼튼한 마음을 가진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그 길이 내 곁에서 그리 멀리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세계로 받아들인 것은 가슴 아픈 일이 되고 자기 세계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 받아들이기 싫은 것은 골치 아픈 것이 된다.
(김용신)
군인신학생 피정에 다녀왔습니다. 사진은 저녁 아가페시간의 모습.
내 내면에 울리는 주님 목소리 듣기
보지도 듣지도 또 말하지도 못하는 헬렌 켈러가 발명왕 에디슨을 만났을
때 수화로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만약에 제가 선생님 같은 위대한 발명가라면, 전 세계의 청각장애인이
잘 들을 수 있는 기계를 발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디슨은 고개를 저으며 그러한 기계는 필요 없다고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좋은 말보다는 남의 허물이나 약점, 실수에 대한
이야기를 훨씬 더 많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말이라면 굳이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에디슨은 바로 겉으로 들리는 소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가요? 나의 내면에 울리는 주님의 목소리, 특히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으며 실천하고 있었을까요?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기도라는 거울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비판을 위한 비판처럼 한심한 비판은 없습니다.'
2013년 다해 9월13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루카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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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질책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아마 대부분의 우리는 정곡을 찔리는 아픔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질책이 늘 비난의 대상이었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이 아닌
당신의 제자들을 향한 것이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부분의 우리는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보다는 남의 눈의 티가
더 거슬려 보이나 보다.
재미난 이야기 하나 하고 싶다.
우리는 보통 자기가 저질렀던 경험이 있는 과실이나 죄를 타인이
저지르는 경우에는 비교적 관대한 반응과 함께,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인다. 반면 자기가 경험한 적 없는 과실이나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는 무척 엄격해지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서슴없이
비난을 한다. 모든 것에 대한 기준이 자기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에서 기인된 아픔이다.
역사적으로 잘 살았다고 하는 이들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스스로에게는
엄격했고 타인에게는 관대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현대 정신의학은
자신에게 너무 지나치게 엄격하면 병으로 이어진다는 진단을 내린다.
하지만 요즘 우리의 모습을 보면 지나칠 정도로 자신에게 관대한 경향이
있는 듯 하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낼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만 다른
이들의 티를 빼줄 수 있다고.
여기서 희망 하나를 만들어보자.
자신의 눈 안에 있는 들보를 볼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커다란
은총이다. 문제는 보지 못한다는 데 있다.
만약 우리가 그 들보를 볼 수 있어 힘들어할 수 있다면 빼낼 수 있는
가능성은 열린다.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것, 그것에는 꾸준한 의식적
연습이 필요하다. 누군가를 비난하고자 하는 충동이 일면 먼저 기도라는
거울을 앞에 놓고 자신을 들여다보자. 그리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그
비난이 순수한지에 대해 살펴보는 식별의 시간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런 후에도, 그 비난이 긍정을 위한 부정이거나, 상대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려는 질책이나 비판이라는 확신을 가진다면, 기도와 함께 자신의
마음을 지혜롭게 내보이자.
쉽게 자신을 들여다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 끊임없는 자기성찰이 필요하리라.
모든 판단에 앞서, 특히 타인에 대한 비난이 일어날 때,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 그것은 하느님께 식별의 지혜를 청하는 마음이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성 크리소스토모 주교학자 기념일
2013년 다해 9월13일
교구청 신부님들과 환영 회식을 하였습니다. 청계천을 따라 한 시간을
걸어서 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장소를 말씀드렸기 때문에
지난주에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어제 걸어서 가려했는데 비가 와서
차량을 이용해서 갔습니다. 다행히 식사를 마칠 때는 비가 오지 않아서
몇몇 분은 걸어서 왔습니다. 저는 교구의 여러 부서에서 일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목국, 청소년국 그리고 지금은 성소국에서 일을 합니다.
교구청의 부서에서는 많은 신부님들과 함께 일을 할 기회가 있습니다.
본당에서는 대부분의 일을 혼자서 결정하지만 교구에서는 함께 논의를
하고, 결정을 할 일들이 많습니다.
함께 일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입니다. 서로 틀린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남을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리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신앙인의 사랑은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인간의 사랑이 조건적이요 불완전한 사랑이라면 신앙의
사랑은 무조건적이요 완전한 사랑인 것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려면 인간의
사랑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우리들의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에서 출발해서
이타적인 사랑으로 끝나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절제하고,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2003년도에 사목국에 있을 때의
기억입니다. 사목국에는 신부님들이 10명 있었습니다. 신부님들은 단합을
위해서 강화도로 1박2일 여행을 갔었습니다. 차를 두 대로 나누어서
출발했습니다. 저는 1호차에 탑승을 했습니다. 1호차에 있던 신부님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은근히 2호차의 신부님들을 평가하였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말은 많은데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고 평가했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술자리에 가자고 하지만 계산은 거의 하지 않는다고
평가했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자기 부서의 일은 자주 부탁하면서 다른
부서의 부탁은 잘 들어주지 않는다고 평가했습니다. 저도 제 마음에
걸리는 신부님에 대해서 평가를 했습니다.’ 우리는 중간에 휴게소엘
들렸습니다. 휴게소에서 차를 마시던 중에 저는 2호차에 탑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호차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1호차에 있는 신부님들에 대한 평가가 있었습니다. 말이 평가지, 내용은
험담이었습니다. ‘국장신부님은 우리를 대변해주지 않는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사무실 출근을 게을리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침 미사에도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남의 이야기를
하니, 시간은 금세 지나갔고, 강화도의 식당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화장실에 가야하는데 저에 대해서 평가를 할 것 같아서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너의 눈에 있는 들보를 빼내어라, 다음에 다른 사람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많이 배운 사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더욱 솔선수범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전에
우리 조상들은 높은 관직에 있을수록 더욱 몸가짐을 조심했다고 합니다.
가족들 또한 아버지의 관직에 누가 되지 않도록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에 머물러서는
하느님께로 나가기 어렵습니다. 먼저 나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내면의 드라큘라
2013년 다해 9월15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느냐? >
복음 : 루카 6,39-42
< 내면의 드라큘라 >
군대 있을 때 사고를 낸 적이 있었습니다. 8개월 만에 전방에서 내려와
춘천으로 군견 수송을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옆에 지나가는 유치원
아이들과 유치원 선생님을 보다가 신호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트럭에
받힌 작은 프라이드 자동차는 산산조각 났습니다. 그 때 들었던 생각은
그 자리를 뜨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인정하지 못하고 회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뺑소니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그럴 사람이 아닌데...’
그러나 그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끊임없이 부정하고 회피하고
그래서 더 큰 어려움에 부딪히게 됩니다.
사람 안엔 누구나 보여지기 원치 않는 수치스러운 면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수치스러운 것들이 드러나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기제들이
존재하는데,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자기방어기제’라고 합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들어 자신을 합리화 한다든가, 내가 그랬을 리가 없다고 현실을
부정한다든가, 남의 탓을 한다든가,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 더 잘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든가, 그런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을 공격한다든가,
그냥 울어버린다든가 하는 등의 수많은 기제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런 기제들을 만드는 이유는 자신이 그런 존재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회피하고 부정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에서는
현실자아와 이상자아를 말하는데, 내가 이상적으로 만들어 낸 자아와
현실적인 그에 못 미치는 자아의 갭이 큰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려는
인간 심리가 작용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만 잘 보는 사람들을 질책하시는데 실제로 이는 우리 모습인 것입니다.
내 눈에 들보가 있어도 인정하지 않으면 그만이고, 남의 눈에도 티가
있는 것을 보려하는 것이 곧 자신의 들보를 보지 않으려는 자기
합리화이고 방어 기제 중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절대 내 자신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안의 부끄러운 상처나 열등감을 내가 밝게 바라보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그것인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게 됩니다.
마더 데레사가 젊으셨을 때의 일입니다. 그녀는 어느 빈민굴을 방문했습니다.
한 청년을 만났는데 씻지도 않고 방도 청소하지 않아 돼지우리 저리가라 할
만한 방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방엔 램프가 있었지만 그 청년은 그
램프를 켜지 않았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램프가 있는데 왜 켜지 않느냐며 그 램프를 켰습니다. 그
청년은 왜 남의 물건에 손을 대냐며 화를 내고 다시 램프를 껐습니다.
데레사 수녀님은 지지 않고 다시 램프를 켰습니다. 그렇게 옥신각신
하다가 마침내 화가 난 청년은 램프를 밖으로 내던져 깨 버렸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집으로 돌아가 새 램프를 사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방에 불을 밝혀주고 돌아갔습니다.
10년 정도가 지나 우연찮게 그 청년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같은 빈민굴에
살고 있지만 깨끗하게 정돈된 집에서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알려주는 수녀에게 데레사 수녀를 보면
이렇게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키 작은 수녀님께 전해 주시오. 당신의 등불이 지금도 내 생활 속에
불타고 있다고 (Your light is still burning in my life)”
이렇게 내 안에 있는 부끄러움, 그것을 밝히 보고 인정할 용기만 있다면
나는 변하게 됩니다. 먼저 내 눈에 들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즉시
그것은 녹아내리기 시작합니다. 나의 차가운 외면이 그것을 계속 얼어붙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엔 드라큘라가 있습니다. 자신의 실체를 절대 보여주기를 원치
않는 자아가 바로 혐오스럽고 나를 물어 자신의 제물로 만들어버리는
드라큘라입니다. 그런데 이 드라큘라는 빛을 보면 바로 타버리고 맙니다.
어쩌면 눈물을 흘리며 고해성사를 볼 때가 내 안의 드라큘라를 인정하는
가장 큰 순간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 들보를 인정하고 제거합시다. 빛으로
내 자신을 비추어보아야만 내 안의 혐오스런 자아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부끄럽고 혐오스러운 모습과 대면할 용기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그 자아는 빛에 의해 조금씩 재가 되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2013년 다해 9월1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내 잘못이나 약점을 감추기 위해 남에게 전가하는 하는 경우가 있지요.
소도둑이 바늘 도둑에게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주의 줍니다.
별것도 아닌데 화를 갑자기 내며 과잉반응하면 그거 좀 이상합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우리 속담이 생각납니다.
이런 경향이 정치나 개인 생활 저변에 널리 깔려있어 살기 힘듭니다.
예수님은 적절한 말씀을 참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루카 6,42)”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도회] 맑은 샘물 같은 강론
2013년 다해 9월15일 성 요한크리소스토모주교 학자 기념일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 루카 6,39-42
맑은 샘물 같은 강론
전통적으로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은 명 강론가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그의 말씀이 얼마나 감동적이고 생명력이 있었으면
사람들은 그에게 ‘황금의 입을 가진 사람’이란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그가 강론을 펼칠 때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죽이고 그의 입만
바라봤답니다. 그리고 마치 금실처럼 술술 그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에 감명을 받고 눈물을 흘리곤
했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벌써 이십년 가까이 강론대에
서고 있지만 설 때 마다 늘 고민되고 부담스러우며 언제나 두렵고
떨립니다. 무엇보다도 자신감이 없습니다.
대체 왜 그럴까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준비가 덜 돼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더 큰 문제는 아직도 하느님께 대한 확신이 부족해서
그렇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펼치려는 강론과
내 삶 사이의 큰 괴리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의 강론이 그토록 감동적이고 생명력이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다른 무엇에 앞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강한 확신과 믿음이 있었겠지요. 그리고
당신이 선포하는 말씀을 온 몸으로 살아내셨겠지요. 그리고 늘
기도하면서 묵상하면서 강론을 열심히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그
결과 그렇게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며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명 강론을 선포하셨을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사제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강론대에 섭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도 참 어려운 것이 강론입니다. 길면 길다고
뭐라 하십니다. 짧으면 준비 안했는가보다고 수군댑니다. 살짝
양념이라도 치려면 또 삼천포로 빠진다고 걱정들 하십니다. 강론을
듣는 대상은 너무나도 천차만별입니다. 누구에게 수준을 맞춰야할지
언제나 걱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론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성당을 찾아오면서 가장 바라는 것 중에 하나가
피곤에 지친 일상에 위로와 힘을 건네주는 맑은 샘물 같은 신부님의
한 말씀입니다. 그 한 말씀에 큰 위로를 받고 다시금 열심히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합니다. 간결하면서도 감동적인, 재미있으면서도 의미로
충만한 신부님들의 한 말씀에 신자들의 한 주간이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하니 강론 더 잘 준비해야겠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께서는 얼마나 강론 준비에 철저했는지
모릅니다. 강론에 앞서 깊은 묵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라면
지금, 이 시대, 이 사람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고민하고
성찰했습니다.
그리고 제2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람들 앞에 서서 다시
한 번 육화되고 또 다시 자신의 삶을 통해 걸러낸 순금 같은 강론을
사람들에게 건넸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분의 강론 말씀에 매료될
수밖에요. 많은 사람들이 그가 강론하는 동안 회개의 눈물을 흘렸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강론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났답니다.
“그리스도의 제대가 금으로 된 잔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이 시대
또 다른 그리스도이신 가난한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돌아가신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먼저 배고픈 이들을 충족히
채워 주고 난 다음 그 나머지 것으로 제단을 장식 하십시오. 여러분은
성전을 장식할 때 고통 받는 형제들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살로 된
성전이 돌로 된 성전보다 훨씬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는 기도 중에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그 하느님의 음성을 세상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 대상이 절대 권력을 지닌 황제라 할지라도 두려움
없이 말씀을 전했고, 언제나 꿋꿋하고 떳떳했습니다. 그야말로 쌍날칼
같았습니다.
“지금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모든 통치자들이 하느님께서 뽑아 세운
자들입니까? 많은 통치자들이 주어진 권력을 남용하여 거대한 재산을
모으느라 백성을 착취하고, 저들의 악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부당하게
처벌하며, 이웃나라와 불의한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저들의 법이 그릇되었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것에 불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는 최고의 권위는 땅의 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법입니다. 만일 이 두 법이 서로 충돌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하느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의 기도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죽음입니까?
아닙니다. 내 생명은 하느님께 감추어져 있습니다.
내가 사는 땅에서 쫓겨나는 것이 두렵겠습니까?
아닙니다.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내 소유물을 잃어버리는 것이 두렵겠습니까?
아닙니다. 나의 보화는 하늘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저들이 나를 쫓아내면 나는 엘리야처럼 될 것이고
구덩이에 던져 넣으면 예레미야처럼 될 것입니다.
굴에 던져 넣으면 다니엘처럼 될 것이요
바다에 던지면 요나처럼 될 것입니다.
돌로 친다면 스테파노처럼 될 것이고
목을 벤다면 세례자 요한처럼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매질한다면 사도 바오로처럼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의지하고 믿으니 아무런 두려움도 없습니다.
내가 당하는 모든 고난과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은 높임을 받을
것이며, 나는 환난 중에 주시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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