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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9월17일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청주] 기적을 만들어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1티모 3, 1 -13
† 복음 : 루카 7, 11 - 17
★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교회 지도자의 자격에 대해서 언급한다.
곧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절제할 줄 알고, 가정에는 충실하며, 교회에서는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 여기서 언급된 ‘감독’은 훗날 주교가
되고, ‘봉사자’는 부제가 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만나신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처지가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녀의 외아들을 살려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메시아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힌 경우를 일컫는 말입니다.
무언가 선한 일을 하려는 동기는 옳지만, ‘자신’이 그것을 해야 할
주체라는 생각은 교만입니다. 사실 우리가 해결의 주체가 되는 것은
위험합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내’가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이를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외아들의 상여를 뒤따라가는 과부를 만났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관에 손을 대시며
장례 행렬을 멈추게 하십니다. 그리고 죽은 아들을 살리십니다. 이러한
행동은 당시의 사고방식으로는 상당히 파격적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죽은 시신이나 관에 손을 대는 사람은 부정하게 됩니다(민수 19,11-22
참조). 또한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장례 행렬을 가로막는 것은 상당한
결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는 전혀 다른 결과로 드러납니다.
그분께서 부정하게 되신 것이 아니라 부정함의 원천인 시신에 생명을
불어넣으셨고, 결례를 일으키신 것이 아니라 그곳의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가 주체가 되면 우리 자신이 부정하게 되기
쉽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결례를 일으키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하시면 달라집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오로지 주님께서
하시는 대로 따르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체가
되시어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고자 하실 때, 그저 그분께서 시키시는
일을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몫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기적을 만들어라.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3년 다해 9월17일 연중 24주간 화요일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루카 7,11-17
<기적을 쫓아다니는 사람들>
때때로 기적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좀 더 확실히 보여주면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또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새 생활을 하지 않을까?
그와 반대로 오히려 두려움을 가질까? 어찌 되었든 당장 내가 요구하는
기적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기적을
행하셨고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는 능력을 지니셨지만 그분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도 어디에서 신비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하면 기어이 쫓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신비한 현상을 보고 믿음이 성장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그때뿐입니다. 열심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기적을
통해서 주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알맹이에는 관심이 없고 기이한
현상에만 눈길이 머물러있습니다. 그들은 실천 없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믿고자 하는 이들에게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과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괴로움을 겪고 있는 백성을 차마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젊은이를 일으키셨습니다. 사실 주님은 능력에 찬 말씀으로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그분 안에 머물면 능력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4,14). “하느님께서 당신의 힘을 펼치시어 나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에 따라, 나는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에페3,7)하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14,1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기적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총에 힘입어 주님의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내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어려운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셨듯이
믿음으로 그들을 챙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신비한 현상은 어디에나
있어도 믿음은 어디에나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길이 기이한 현상이
아니라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께로 모아지길 바랍니다. 은총 덩어리보다
은총의 주관자를 만나는 기쁨에 감사하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이사40,31).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주님의 사랑을 너무나 자주 잊습니다.
수십 년 전, 미국의 미시간 호를 유람하던 배가 뒤집혀서 수많은 사람들이
조난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그 배 안에 수영 선수가 있었지요.
그는 목숨을 걸고 사람들을 자그마치 23명이나 살려냈고, 그 후 매스컴에
이 수영 선수의 이름이 떠들썩하게 오르내렸지요.
이제 노신사가 된 수영 선수에게 기자가 찾아와 예전의 일을 말하면서
“그 사건 이후 기억에 가장 남는 일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씁쓸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구했던 23명 가운데 아무도 저를 찾아와서 고맙다는 말을 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 사실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감사를 표시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요? 그러나 자신이 받은
그 일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면 당연히 감사를 표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잘 생각하면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내 자신도 모르게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감사하기보다는 당연히 내가 누려야
하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지요.
어제 어디를 다녀올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데,
퇴근시간이라 길이 너무나 많이 막히는 것입니다. 저는 내비게이션을
켜고, 지시하는 데로 운전을 했습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가뜩이나 길이 막히는데 더
복잡한 길로 들어선 것이지요. 스스로를 원망하면서 또 막히는 길에
대해서 화를 내면서 가고 있는데, 교통방송에서 제가 원래 가려고 했던
길에 고장차가 있어서 교통체증이 대단하니 다른 길로 우회하는 것이
낫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떠한 순간도 다 감사의 이유가 될 수
있음을 다시금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지요.
감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도 매번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단 한 번도 소홀히 하시지 않습니다. 늘 측은하게
바라보면서 따뜻한 사랑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그 감사의 마음을
잊고 있는 우리들의 짧은 기억력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얼마나 큰 사랑을 가지고 계신지 오늘 복음에서도 잘
나오지요. 주님께서는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죽은 외아들의 상여를
따르고 있는 과부를 보시지요. 과부의 힘으로 이 세상을 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신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죽은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는 하느님을 찬양하지요.
그런데 이렇게 찬양하고, 주님께 감사를 드렸던 사람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수난하시고 돌아가실 때, 변호하기
위해 앞으로 나왔을까요? 짧은 기억력 때문인지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서 십자가형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을 너무나 자주 잊습니다. 바로 감사하며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일을 찾아보십시오. 그만큼
주님의 따뜻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은 화살표만 따라가는 길이 아니다. 자기만의 방향 감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곧 내 안의 나침반이다(정진홍).
그밖에 조금 더
한 학생이 졸업 논문을 쓰기 위해 성공한 사업가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이 학생은 사업가에게 성공의 비밀이 과연 뭐냐고 물었지요. 사업가는
한 동안 그 질문을 곰곰이 생각한 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밖에 조금 더.”
“나는 어린 시절에 보통 사람과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의 차이가 그
한마디에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최고인 사람들은 자기 몫을 다하고
‘그 밖에 조금 더’했다는 사실을.”
지치고 힘들었을 때, 그래서 포기하고 싶을 때 ‘그 밖에 조금 더’ 하면
어떨까요? 또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때 ‘그 밖에 조금 더’ 한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누군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뒤에도 ‘그 밖에 조금 더’ 하면 어떨까요?
‘그 밖에 조금 더’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입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하느님을 만나십시오.
2013년 다해 9월17일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당신의 사랑이 진실하기 원한다면, 하느님을 만나십시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루카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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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고개를 들어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딸아 눈물을 멈추어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죄를 벗어날 수 없는 삶이 밉다 하는 너,
사랑도 끝내 사랑이 아니었다는 너,
등진 모습만 보이는 세상이 싫다고 하는 너,
늘 배고픈 주머니에 화가 난다는 너,
아픔에 진저리가 난다는 너,
병에 지치고 늙음이 서럽다고 하는 너,
죽음이 한없이 두렵다는 너,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거짓 사랑인지 몰랐고,
거짓 희망인지 몰랐고,
거짓 행복인지 몰랐다 하는 너,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더없이 소중하고 귀하디 귀한 아들 딸들아!
세상에서 가장 큰 하늘이 말한다.
너희를 진실로 사랑하는 내가 말한다.
내가 있다.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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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구절을 지난 6월9일에 묵상했습니다. 짧은 글이니 한 번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585177491504326&set
=pb.491783984177011.-2207520000.1379327016.&type=3&perm
Page=1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2013년 다해 9월17일
어제는 ‘은경축’ 축하 미사가 명동에서 있었습니다. 사제생활 25년을
하신 신부님들을 명동성당으로 초대해서 교구장님과 사제들이 함께
축하하는 것입니다. 신부님들에게는 교구에서 ‘영대’를 선물하였습니다.
영대는 사제가 미사를 집전하거나, 다른 성사를 집전할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은경축을 맞이하는 신부님들에게는 의미 있는 선물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은경축을 맞이하는 신부님들에게, 모든 사제들에게
들려주는 ‘덕담’입니다. “절제할 줄 알고 신중하고 단정하며 손님을
잘 대접하고 또 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 아니라, 관대하고 온순하고 돈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으며,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깨끗한 양심으로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남을
험담하지 않으며, 절제할 줄 알고 모든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운 마음을 이야기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례행렬을 보셨습니다. 슬픔에 찬 가족들을 보았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어둠에 빛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지난 주일에 종로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음식을
주문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종업원은 주문이
잘못 전달되었다고 곧 갖다 드린다고 하였습니다. 조금 있으니 주인이
왔습니다. 주인은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주문 한 것 이외의 음식을
더 주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다른 것으로 보상을
해 주었습니다. 자칫 기분이 나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의 솔직한
사과를 받은 후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주인은 모든 테이불을 주의 깊게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이상한 느낌이 들어도 곧 와서 손님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습니다. 음식도 맛이 있었지만 주인의 그런 세심한
배려가 있기에 손님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모든 신경이 아이에게 향해 있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배고 고픈지, 옷에 실례를 했는지, 자고
싶은지 알고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저는 아이가 왜 우는지 모릅니다.
엄마만큼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병든 이,
헐벗은 이, 외로운 이, 슬픔 중에 있는 이들에게 모든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가 자비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첫째는 나 자신이 중심이 되려는 교만함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많은 죄악들은 하느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욕심을 먼저 생각한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둘째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열등감입니다. 지난날의
잘못과 죄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열등감은
우리를 영성생활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우리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양털같이 희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자비의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은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예수님의 약점
2013년 다해 9월17일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루카 7,11-17
예수님의 약점
아무리 강한 사람도 약점 하나씩은 있다고 합니다. 사자 호랑이도
어른이 된 코끼리는 함부로 공격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코끼리의
천적은 덩치 큰 사자, 하마나 곰이 아니고, 또 흔히 알려져 있는
쥐가 아니라, 바로 ‘벌’이라고 합니다.
코끼리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는 아프리카 남아공에서 최근 나온
연구결과입니다. 논문을 낸 연구가 루시 킹은 “코끼리가 벌떼를
만나면 저주파 경고음을 내는 게 과학적으로 확인됐다.”며 “벌을
이용하면 코끼리를 쉽게 쫓을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코끼리가 벌을 천적(?)으로 여기는 벌집을 10m 간격으로 세워두면
코끼리가 농작물을 망치는 걸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선 수확기에 코끼리 때문에 밤을 지새우는 주민이
많습니다. 허기를 채우지 못한 코끼리가 밤에 농작물을 훔쳐 먹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민들은 여럿이 모여 밤샘 보초를 새다
코끼리가 나타나면 횃불을 켭니다. 아이들은 냄비를 두드리며
요란한 소리를 냅니다. 코끼리를 쫓아내기 위해서입니다.
겁에 질린 코끼리는 대개 발걸음을 돌리지만 때로는 코끼리가 사람을
공격하는 불상사가 벌어지기도 한답니다. 주민이 목숨을 잃는 일도
있습니다. 반대로 주민들의 공격을 받은 코끼리가 쓰러지는 일도
많다고 합니다.
논문이 밝힌 대로 코끼리의 천적이 벌이라면 이런 유혈충돌은 피할
수 있게 됩니다. 논문을 낸 킹은 “10m 간격으로 기둥을 세우고
벌집을 단 후 기둥과 기둥을 얇은 철사로 묶어 놓으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고 밝혔습니다. 코끼리가 농장에 들어갈 때 철사를 건드려
벌집이 흔들리면 벌들이 코끼리를 쫓아준다는 것입니다.
[참조: 손영식, 코끼리 천적은 쥐가 아니라 벌?, 서울신문, 2010-02-06]
누군가의 약점을 알 수 있으면 그 사람을 이기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혹은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할 때도 사람들은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도 약점이
있을까요? 그것만 안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과부가 청한 것도 아니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지나가시다가 느닷없이 그 과부에게
연민을 느껴서 그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그 과부가 우는 것을 차마
못 본채 그냥 지나치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좀 불공평해 보입니다. 과부의 아들이 죽는 경우는
매우 많을 것인데 이 경우에만 살려주시는 것은 왜일까요? 만약
예수님이 공정하시다면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다 그렇게
도와주셨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그 과부가 예수님의
마음을 특별히 잡아 흔든 원인은 무엇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 과부가 바로 당신 어머니 마리아의 처지와 같기
때문일 것이라는 결론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당신이 조금 뒤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면 어머니는 그렇게 외아들을 잃은 아픔으로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당신 어머니를 위로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어찌 보면 불공평해 보일 수 있는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 약점은 바로 어머니입니다. 그만큼 어머니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도 어머니 때문에 첫
기적을 행하게 됩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그 사람의 뜻을 따라주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장 큰 약점은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어머니인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이들은 성모님을
통한 기도가 예수님께 직접 하는 기도보다 더 힘이 크다고도 말합니다.
에스델서에 나오는 에스델 왕비는 자신의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걸고 페르시아 왕에게 간언을 합니다. 왕의 약점은 바로 에스델
왕비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기에 가장 기쁘게
해 주고 싶은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왕비는 왕의 사랑을 받는 덕분에
이스라엘 온 백성을 죽음으로부터 구하게 됩니다.
성모님께서 승천하신 이유도 바로 예수님 바로 옆에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시기 위함입니다. 성모님 옆에 바짝 붙어서 떨어지지 맙시다.
예수님은 성모님 앞에서는 어떤 힘도 쓰실 수 없는 어린이처럼 되십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성모님보다 더 빠르고 확실한 길은 없습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그래서 하늘이 안 주신 거겠지요.
2013년 다해 9월17일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그래서 하늘이 안 주신 거겠지요.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한 번 주어진다면 누굴 살릴까요.
자기나 가족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남을 위해선 안 쓸 걸요?
혹시 살릴 수 있는 능력고사나 자격시험이 있다면 대단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자격증을 땄다면 우선 돈벌이에 사용할 게 빤한 일이고요.
병원 약국 모두 망하며 세상 달라지지요. 그래서 하늘이 안 주신 거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처럼만 쓴다면 모르지요. 하늘이 우리에게 주셨을 건지요.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3~14)”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폭력과 죽음의 문화 앞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2013년 다해 9월17일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루카 7,11-17
<폭력과 죽음의 문화 앞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젊은 사제 시절 소위 ‘문제아’들과 매일 만나면서 정말 가슴 아팠던
기억 하나가 있습니다. 살벌한 경쟁체제에서 뒤처져버린 우리
아이들이, 그 상처와 수치, 좌절감을 잊기 위해 본드와 가스를
흡입하던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폐해의 심각성을 강조해도
그때뿐이었습니다. 또 다시 본드와 가스에 취해 흐느적거리다가
잡혀오곤 했습니다.
그때 참으로 고민 많이 했습니다. 이럴 때 범국민적인 운동이
필요하구나, 이럴 때 누군가가 깃발을 드는 것이 필요하구나, 생각도
많았습니다. 법 검토하고 제정하는 국회의원들 이럴 때 뭐하나? 매일
수많은 우리 아이들 영혼이 녹아내리는데...본드나 가스 유통과정에서
술이나 담배 규제하듯이 강력한 규정을 만들어야 되지 않을까?
최근에 또 한 가지 든 안타까운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종 격투기라고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종(異種), 그러니 서로 다른 유형의 격투기
고수들이 한판 붙는 것입니다. 물론 나름 룰이 있고 심판도 있고, 애써
찾아보자면 그 안에 스포츠맨십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싱이나 축구와 다를 게 뭐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경기를 보고 있노라면 해도 해도 너무 합니다. 거의 맨주먹
맨 몸으로 도망갈 곳도 없는 폐쇄된 울타리 안에서 그야말로 한판
맞장을 뜨는 것입니다. 맨 주먹으로 얼굴을 마구 가격하다보니 선혈이
낭자합니다. 어떤 때 상대방을 바닥에 눕혀놓고 위에 올라탄 사람이
있는 힘을 다해 상대방을 가격합니다. 그 과정에서 실신하는 선수,
뼈나 관절이 나간 선수도 발생하고, 경기가 끝나면 패자는 곧바로
수술실로 실려 갑니다. 승자는 짐승처럼 포효합니다. 링 바깥에
관전하고 있는 사람들은 환호성을 올립니다.
물론 이런 폭력적인 경기로 인해 관중들이 대리 만족을 느끼며,
그로 인해 인간 각자 안에 들어있는 원초적 본능인 폭력성이 어느
정도 해소된다는 논리를 펼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눈으로 바라볼 때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우리 청소년들이 이런 경기를 관전하고 또
매료되면서 야기될 악영향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행히 한 용기 있는 국회의원의 문제 제기에 따라 공중파 방송에서는
이종 격투기 프로그램 방영이 금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채널을 통해 많은 우리 청소년들이 이종격투기에 빠져들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인간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분노나, 상처 그로
인한 폭력성, 공격성들이 긍정적으로 분출되기를 기대합니다.
폭력이나 분쟁을 피하고 대화와 평화를 추구합니다.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도 폭력과 전쟁이 아니라 희생과 용서, 자기
낮춤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경계해야 하는 것이 바로 폭력성의
대중화입니다. 독재자들이 심취하고 열광했으며 백성들을 회유하기
위해 자주 이용했던 도구가 이런 종류의 스포츠였기 때문입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습니다. 작은 폭력은 큰 싸움으로 번지고
결국 국가 간의 전쟁으로 까지 확대됩니다. 결국 폭력의 끝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입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폭력의 문화, 죽음의 문화에
심하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너무나도 쉽게 탈법과 주먹을 선택합니다.
그 끝은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도 폭력이나 죽음의 문화를 배척하셨습니다.
나인 과부의 아들이 때 아닌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로 인해 과부마저
죽게 되었을 때, 그 아들을 죽음에서 되돌려주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비정상적인 죽음을 거부하시고, 그리고 자신의 부활로
죽음을 이기고 극복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폭력이나 죽음의 문화는 어떤 것입니까?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폭력성은 운동선수들의 폭력적인 경기를
통해 절대로 완화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폭력은 더 큰 폭력을
가져옵니다.
반 복음적인 것에 대해, 반 하느님 적인 것에, 결국 폭력과 죽음의
문화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그에 대응하는 노력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과제요 의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영성생활은 극적인 긴장과 흥분 속에서만 경험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비폭력 속에서, 고요와 평화 속에서도 보다
깊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기타] 신을 믿지 않아도 양심을 따르면....
2013년 다해 9월17일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신을 믿지 않아도 양심을 따르면....
신학교에서는 신학, 철학, 인문학, 어학 등을 배우고, 또 기도생활과
인성에 대하여 많이 배웁니다.
신학과목 중에 기초신학이라는 과목이 있는데 간신히 겨우 낙제를
면하고 통과한 과목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겨우 통과할 수 있었던
것조차도 그 신부님의 너그러우신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로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치쁘리아노 교부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442년 피렌체 공의회에서
이런 교의를 믿을 교리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에 대하여 칼 라너나 많은 신학자들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말하며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하느님을 믿지는 않지만 양심대로 선하게 살아가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논리를 폅니다. 저도 그렇게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강조하고
누구든지 양심대로 살아간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요지로 답을
써서 겨우 통과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없다는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역이고 하느님은 인간의 구원을 바라시고,
그러기 위해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
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구원에 대하여 말할 때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 구원에 대하여 말할 때 신중해야 합니다.
교황님께서는 “신을 믿지 않아도 자신의 양심을 따르면 신은 자비를
베풀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가 모든 인류에게 내려진다는 넓은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한편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에서 “가톨릭교회는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거룩한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양식과 행동 방식뿐 아니라
그 계율과 교리도 진심으로 존중한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교회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 다르더라도 ‘참 진리의 빛’을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 .....
그러므로 교회는 지혜와 사랑으로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과 대화하고
협력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생활을 증거하는 한편, 다른 종교인들의
정신적 도덕적 자산과 사회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고 보호하며
증진하도록 모든 자녀들에게 권고한다.” 라고 말하며 타종교를
존중하고 그들과 대화하며 협력할 것을 권고합니다.
프란치스꼬 교황님의 신을 믿지 않아도 양심을 따르면 된다는 말들에
대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은 두 손을 들고 환영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야기시킬 수 있습니다.
양심에 따라 살면 자비를 입으니 선교할 의무도 없게 되고,
주일미사나 성사생활도 양심적으로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황께서는 7월에 동성애자에 대해 “내가 누구를 심판하겠는가?”라는
말을 하여 기자들이 교황이 동성애자 사제에게도 전향적인 입장을
보였다고 기사를 작성할 빌미를 주었습니다. 또 여성 사제의 서품
문제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dongA. com 2013, 9, 13)
한편 다음 달 ‘가톨릭계의 2인자’ 자리로 불리는 교황청 국무장관에
취임하는 피에트로 파롤린 베네수엘라 주재 교황청 대사는 9월 11일
“가톨릭 사제의 의무 중 하나인 독신제(獨身制)는 시대에 뒤떨어
지는데다 가톨릭법의 교리도 아니다.” 라고 말하며 존속 여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dongA. com 2013, 9, 13)
또 교황께서 올 5월 신을 믿지 않아도 선행을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취지의 설교를 했을 때에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당시
교황청 대변인은 “구원을 위해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믿지 않는 이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궁색하게 해명했습니다.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교황님의 언행은 세상에 많은 파장을 주고
가톨릭 신자들에게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교황님은 교의와 관계된 부분에 대하여 언급할 때
더 신중하게 또 신자들의 영혼에 유익이 되도록 발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황님께서 시리아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며 단식하자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전쟁보다도 더 많이 죽어가는 낙태로 죽어가는 수천만의 생명과
낙태 없는 세상을 위해서도 단식하고 기도하자고 외쳐야하고, 동성애가
정당화되어 가는 세상에 그것은 하느님의 법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외치며 인류의 회개를 외쳐야할 것입니다.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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