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3년 다해 9월24일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청주] 형제 자매 관계의 형성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에즈 6, 7 - 8. 12ㄴ. 14 - 20
† 복음 : 루카 8, 19 - 21
★ 유배지에서 돌아온 이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을 다시 지으려고
했지만, 유배를 가지 않았던 이들의 방해로 공사가 지체되었다. 페르시아
임금 다리우스는 선왕 키루스의 뜻에 따라 성전을 짓는 데에 그 누구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내린다(제1독서).
★ 예수님의 어머니와 친척들이 예수님을 찾아오자,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께 이를 알린다. 예수님께서는 혈연보다도 하느님의 뜻
안에서 맺어진 관계가 더 깊다고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제3대 제주교구장을 거쳐 지금은 원로 사목자로 지내는 김창렬 주교님은
예수님을 ‘형님’이라고 자주 부릅니다. 어느 잡지의 인터뷰에서 그 까닭을
밝힌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을 조금 다듬어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철이 나고 배울 걸 거의 다 배우고 섭렵했다 하더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늘 어린애라는 생각이지요. 저는 그냥 발가벗은 어린애처럼 거리낌 없이
예수님하고 함께 지내려고 해요. 그분께서는 마음이 아주 넓으시고 저를
위해 모든 걸 다 하시는 형님으로 느껴져요.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까지
드네요. ‘예수님께서는 저를 당신의 동생으로 삼으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지.
’ 제가 죽은 뒤에도 하느님 아버지께 저를 데리고 가시어 ‘아버님, 이놈이
제 동생인데 아버님 아들로 좀 삼아 주십시오.’ 하실 것 같아요.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저를 기다리고 계셨다가 ‘그래, 너 이놈아! 내가 아빠다.
그래, 아빠야. 넌 내 아들이라니까.’ 하시며 반기실 것 같고요.
성부 하느님과 저는 부자지간, 또 성자 예수님과 저는 형제지간, 이렇게
한 가족이 되는 겁니다. 그게 성령 안에서 이루어져요. 제 마음속에는
하느님의 가족이라는 생각이 늘 떠나지를 않아요. 이 세상에서는
그림자이지만 죽은 다음에는 완전한 가족이 되지요. 죽음을 잘 맞이하는
사람들도 이러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주교님의 이러한 말씀은 오늘 복음을 근거로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 주위를 둘러싼 군중을 보시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하고 이르십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예수님을 무서운 심판자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의 형님이시고 오라버니이십니다. 동생이 불 속에서 헤매고
있다면 곧장 그 안에 뛰어드시어 꺼내 주시는, 그러한 분이십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형제자매 관계의 형성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3년 다해 9월24일 연중 25주간 화요일(루카8,19-21)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
복음 : 루카 8,19-21
형제자매의 관계형성
가끔 신자 분들께서 신부님은 형제가 어떻게 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아들 딸, 아들 딸, 아들’입니다. 남녀의 밸런스도 좋고 3년
터울도 좋습니다” 하고 말씀 드립니다. 그러면서 우리 신자공동체를
생각합니다. 미사 때마다 “형제 여러분” 이라고 하면서 진정 형제로
살아가고 있는가?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가 진정 형제자매로서의 끈끈한 정을 누리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아쉬움이 많습니다. ‘손이 안으로 굽는다’고 영적으로 맺어진 형제의
관계가 육적으로 맺은 관계보다 결코 더 낫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루카8,2)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를 중요시 하셨지만 영적인 형제를 우선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태10,37). 따라서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19,29)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혈연의 관계보다도 믿음의 관계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부모 형제를 멀리하라는 것이 아니라 억매이지 말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투신하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다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 형제, 자매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 주님께서 우리 혈연의 부모나 형제에게도 새 형제, 자매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행함으로써 주님의
형제자매가 된다는 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자, 옆 사람보고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하고 인사하겠습니다.
히브리서 2장 12절에서 13절 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또 나는 그분을 신뢰하리라.” 하시고 ‘보라, 나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다.”
사실 영적으로 형제인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마태12,50),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요한1,12),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로마8,14),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갈라3,26),
거룩하게 된 사람(히브2,11-12)입니다. 심지어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해를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말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함이
없이 살았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형제애를 새롭게 해야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한 신부님께서 누드촌에 와달라는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모두가 다 벗고 있을 터인데 나는 어찌해야 하나? 고민을 하시다가
결정을 내렸습니다. 신부님은 모두가 다 옷을 벗었는데 혼자만 옷을
입는 것도 어색할 뿐더러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옷을 벗기로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사람들이
헌금을 어떻게 하지? 걱정을 했답니다.
누드촌에서도 역시 고민이 생겼습니다. 누드회원이 아닌 신부님을 초대해
놓고 모두 벗고 있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우리가 옷이 없는 것도 아니고,
밖에 나갈 때는 옷을 입지 않는가? 결국 누드 촌 회원들은 모두 옷을
입기로 결정했습니다.
서로를 위한 배려가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형제, 자매 라고 하면서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함을 안타까워 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필요 없는 것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2013년 다해 9월24일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여행가기 전에 꼭 해야 할 것은 여행 가방을 챙기는 것이지요. 여행 가방을
어떻게 챙기는 데에 따라 여행에서 고생을 할 수도 있고, 또 반대로 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행 가방을 쌀 때, 이곳도 필요할 것 같고 또 저것도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방의 부피가 점점 커지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정작 가지고 가야 할 짐을 넣지 못해서 여행지에서 후회하고 말지요.
따라서 어떻게 가방의 짐을 싸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더군다나 가방의
짐을 가방 한 가득 채워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행지에 가면 구입해야
할 것들이 꼭 생기거든요. 따라서 여행지에서 구입할 것들을 채울 가방의
빈 여백도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여행 가방을 생각하다보니 우리가 장차 하느님 나라에 갈 때에도 이러한
가방을 싸서 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필요한
가방, 그래서 정말로 필요한 것들을 차곡차곡 챙겨 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내용물에 이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자리할 수 있을까요?
아니지요. 그러한 것들은 하느님 나라에서는 필요 없습니다. 어쩌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에도 그 가방에 빈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채울 수 있는 여백, 그래야 먼 훗날 기쁘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챙기고 있는 가방의 내용물을 잘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그 안에
쓸모없는 것들이 많아서 정말로 중요한 것들을 챙길 수 없게 된다면, 모든
짐을 다 꺼내놓고 다시 짐을 싸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특히 그 안에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서는 필요 없는 것들이 가득하다면 더욱 더 하루빨리 짐을
다시 풀고 다시 싸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어느 정도로 짐을 다시 싸야 하는지를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정보다도, 심지어는 가족보다도 가장 중요한
짐은 하느님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지요. 그래서 가족이 찾아왔다는
말에 군중들을 가리키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의외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즉, 세상의
기준으로 싸는 짐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준으로 싸는 짐이 가득할 때에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짐을 다시 싸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필요 없는 것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를 위해 내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십시오. 내게 정말, 정말,
정말로 필요하지 않은 것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오늘 하루 내게 필요
없는 이 한 가지를 과감하게 버려보십시오. 나를 가장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그 한 가지에서 해방될 때, 참으로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모두 스승이다.(앤드류 매튜스)
어떤 분이 주신 인상 깊은 십자가. 예수님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행복한 인부(‘앰블러’ 중에서)
1924년, 영국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러셀이 중국 사천성을 방문했다.
그는 인부들이 드는 의자를 타고 어메이 산에 올랐다. 험한 산길을 오르는
그들의 옷이 금세 땀으로 젖었다. 러셀은 인부들이 더운 날씨에 산에 오르는
자신의 일행을 미워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산 중턱에 도착할 즈음 잠시
쉬어 가자고 했다.
러셀은 의자에서 내려 인부들의 표정을 관찰했다. 그런데 그들은 나란히
앉아 재미있게 이야기할 뿐 더운 날씨나 고된 일을 원망하지 않았다.
러셀은 깨달았다.
자신이 있는 곳이 행복의 땅이라는 것을.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는
사실을.
지금의 내 자리는 어떻습니까? 내 마음에 따라 행복의 땅으로 들어갈
수도, 그 행복의 나라에서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어머니 마리아..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 다해 9월24일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루카8,19)
---
오늘은 어머니 마리아의 관점에서 묵상해보고 싶다.
아들 예수에 대한 소문이 예사롭지 않다.
아들이 무리를 만들어 끌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다닌다고 한다.
상종해서는 안 될 창녀들과 매국노인 세리들과 어울린다고 한다.
마귀의 힘을 빌어 요술을 부리기까지 한다고 한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모두 하나같이 밥벌이도 제대로 하는 이들이 없다 한다.
더욱이 나라를 다스리는 권력자들에 반대되는 이야기를 서슴지 않고
대중들 앞에서 떠들어댄다고 한다.
이러한 소문을 듣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편할 수가 없다.
물론, 아들 예수를 몸에 가질 때부터 커가는 과정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크게 쓰실 인물이 될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신앙으로 아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확신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들리는 험한 소문에 어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마음에 간직하고 또 간직해도 편치 못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엄마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가까운 친척들, 특히 아들 예수의 사촌 형제들이 찾아와서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
직접 한 번 찾아가서 예수를 끌고 오던지 아니면 상황이라도 파악하자고
한다.
결국, 아들의 사촌 형제들과 집을 나선다.
몇 날을 발걸음 재촉하여 아들 예수가 있다는 곳에 다다른다.
소문대로 아들이 머물고 있다는 집 문전에는 군중들로 꽉 차있었다.
아낙네로서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보다 못한 누군가가 사람들 사이를 뚫고 들어가 아들 예수에게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고 전한다. (루카8,21)
아들을 볼 수 있다는 마음에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설렌다.
잠시 후, 담장 안에서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아들의 음성이 귀에 들어온 순간, 어머니 마리아의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
아들의 삶에서 죽음까지의 여정을 바라보아야 했던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분명 기쁨과 슬픔과
혼돈과 확신, 고통과 희망이 순서 없이 교차하는 세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 마리아가 포기하지 않은 선택은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었다.
세상의 어머니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자식들에게 옳음을 가르쳐주기를
바란다. 그 옳음 때문에 어떤 역경이 찾아온다고 해도 감사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오늘 복음의 전후 상황은 알 수 없다. 어머니 마리아가 왜 아들을
찾아 왔는지에 대해서 복음서는 설명하고 있지 않다. 다만 떠오르는
느낌만을 옮겨보았을 뿐이다.)
--
지난 7월23일 마태오 복음(마태오12,48)이 전하는 같은 내용이
읽혀져 묵상한 적이 있다.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604146749607400&set
=pb.491783984177011.-2207520000.1379939129.&type=3&permPage
=1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2013년 다해 9월24일
어제는 아버님을 모신 ‘비봉추모관’엘 다녀왔습니다. 추석이 지나서인지
추모관에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가는 길도 막히지 않았습니다. 작년에는
추석 당일에 갔었는데 길도 많이 막히고, 사람들도 많아서 조용히
기도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추석 당일에는 가족들과 함께 어머니가 계신
집에서 미사와 연도를 드리고, 며칠 후에 추모관에 가서 기도를 드리니
그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았습니다. 길가에 핀 빨간 코스모스와 어느덧
노랗게 익어가는 벼를 보니 가을은 이미 곁에 와 있었습니다.
며칠 전에 읽은 글이 떠오릅니다.
“가을에는 풀잎도 떨고 있습니다.
끝내 말없이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바람은 텅 빈 들에서 붉은 휘파람을 불며 떠나는 연습을 합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가을을 좋아합니다.
누군가 따뜻한 손을 잡아줄 사람을
만날 것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로 지내면서 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잘나고, 능력이 있어서 도와주신 것이 아닙니다.
제가 불쌍하고 가난해서 도와주신 것도 아닙니다. 제가 가는 길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 같았기 때문에 도와주신 것입니다.
꾸르실료를 함께하신 동기 분들은 21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씩 만나고
있습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를 해 주시는 분들입니다. 캐나다에 있을
때는 교포 신자 분들이 도움을 많이 주셨습니다. 차량도 마련해 주셨고,
한국 음식도 만들어 주셨습니다. 본당에서 사목을 할 때는 정말 많은
분들이 자발적으로 제게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런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행복했고, 즐거웠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모두들 제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안 도현님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또 다른 말도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는 거라네
해야 할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 것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군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누군가를 위해서 연탄 한 장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가 될 것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대자연 기의 원천인 최초 에너지님
2013년 다해 9월24일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대자연 기의 원천인 최초 에너지님
학교동창, 동문, 군대동기, 입사동기 등 이러 저리 엮기를 좋아합니다.
옆집에 산다고 이웃사촌이란 말은 먼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더구나 한 가족인데도 형제간 갈등내지 부부간 부모자녀 간 그렇군요.
인간사회는 그저 이득위주로만 진행하지 하나로 묶으려 들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을 중심으로 만물의 생(生)이 유지된다는 점 거부 못합니다..
그러니 대자연 기의 원천인 최초 에너지(하느님)와는 말 할 나위 없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남자는 제 부모를 떠나"
2013년 다해 9월24일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
복음 : 루카 8,19-21
< "남자는 제 부모를 떠나" >
이무석 교수는 자신의 책 ‘30년만의 휴식’(231-232)에서 자신이 썼던
논문 주제인 천재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을 분석해 놓았습니다.
고흐는 스물일곱 살에 미술을 시작해서 서른일곱 살에 자살하기까지
불과 10년 동안 850여 점의 창조적인 미술 작품을 그린 천재화가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불행했고 정신이상으로 귀를 자르더니 2년 후에는
가슴에 권총을 쏘고 자살했습니다. 이 교수는 고흐의 이런 삶 이면에는
아버지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고흐는 엄격한 칼빈주의 목사인 아버지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엄격함에 고흐는 죄책감을 많이 느꼈고 그것을 씻기 위해서는 자신을
학대하거나 혹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에 대한 지나친 연민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거 누예넨의 광산에서 전도사 생활을 할 때는 불쌍한 광부들을 위해
자기 빵과 매트리스까지 주고, 자신은 2년 동안 거의 거지처럼 살았습니다.
헤이그에서 그림 공부를 할 때는 늙은 창녀와 그녀의 딸을 먹여 살려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가난한 농부들을 그렸고 그들의 거친 손을 예찬했습니다.
이런 동정심은 바로 아버지에게 짓눌려 고통 받아온 불쌍한 자신의 모습을
그들에게서 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면서
무의식적으로는 자신이 위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약한 자들을
돕는 선한 행동을 한 것이므로 죗값을 치르는 속죄 행위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고흐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5년쯤 되었을 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그 사건 이후 그의 그림은 극적으로 발전했고, 대작이
쏟아져 나왔으며, 색채도 화려해 졌습니다. 아마 그를 괴롭히던 엄한
아버지로부터의 해방 덕일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안에서 아버지의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아버지처럼 남을 비난하고 폭발적으로 화를 자주 냈기 때문에
대인관계가 아주 안 좋았다고 합니다. 보통은 미워하는 사람을 자신도
모르게 닮아간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보고 자란 아이는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않는 이상 자신도 결혼하여 아내에게
폭력을 행할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귀를 자르던 날 밤도 동거하던 고갱과 싸운 끝에 귀를 잘라 고갱의 단골
창녀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영향 때문에 생겨난 분노와 죄책감,
자학성과 보복의 마음에 순종한 것뿐인 것입니다.
고흐를 도와 준 사람은 그와 네 살 터울인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림 매매업자였는데 고흐에게 생활비를 대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마저 결혼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사업도 잘
되지 않아 수입도 시원치 않게 되어 형이 부담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자살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더 이상 짐이 되기 싫어서?
죄책감 때문에? 외로워서? 그건 본인만 알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때까지도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귀를 잘랐던 것과 마찬가지로 동생에게까지 부담이
되어버린 자신을 그렇게라도 혼내고 벌줘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저는 사제가 될 때 이 말씀을 조금이나마 이해했고, 이번 추석에 어머니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어머니는 사랑으로 아들을 보고 싶어 성당에
찾아오시기도 하고 또 아들을 자주 보고 싶어 하지만 가끔은 ‘신자가
먼저냐 어머니가 먼저냐’를 놓고 선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차피 사제가 된 이상 신자를 우선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저를 낳으신 이유는 하느님께서 저를 사제로 만들어 신자들을
돌보라는 궁극적 소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가 되려거든 부모나, 아내, 형제, 친구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 말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남자는 제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여자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를 떠나지 않으시고, 또 과부가 된 불쌍한
어머니를 떠나지 않으시면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의 머리요
신랑으로서 교회와 하나 되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좀 이상하지만 마마보이는 한 여자와 온전한 혼인생활을 하기 힘든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성인은 더 넓은 세계로 향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나에게 사랑을 주고, 혹은 상처도 주었던 부모를 떠나야만합니다.
부모를 떠나지 못하고 그 영향 하에 있다 보면 고흐처럼 누구와도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영원한 아이로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어머니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던 한
형제가 결혼했는데 결국 며느리가 시어머니 등살에 견디지 못하여
가정이 파괴되는 일도 있었던 것입니다.
개신교에서 이 복음이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외면하는 근거로
제시하기도 하지만, 사실 당신을 믿는 이들을 제쳐놓고 어머니와
형제들을 만나러 나가셨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어머니와 형제들을 외면하는 듯한 오늘
복음은 30이 넘어 아버지로부터 받은 공적인 소명을 위해 세상에 나온
성인으로서 제 부모를 떠나 교회와 한 몸을 이루려는 그리스도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모습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음미하고 되새김질해야할 예수님 말씀
2013년 다해 9월23일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루카 8, 19 - 21
<음미하고 되새김질해야할 예수님 말씀>
강의나 강론을 위해 사람들 앞에 설 때 마다 절실히 느끼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말의 한계입니다. 말로는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말에 뒤따르는 진정성, 실효성, 육화된 말, 삶에
녹아든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리 멋들어진 말이라 할지라도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사람들을 감동시키거나 변화시키기에 부족합니다. 때로 많은
말들은 공허한 메아리, 공염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 영혼을 진정으로 감동시키고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두 인격, 두
영혼의 진실한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과 어부 베드로와의
만남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과 세리 마태오의 만남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과 마리아 막달레나 사이의 만남은 또 어떻습니까?
사람을 만나는 예수님의 눈빛은 더없이 따뜻했습니다. 인간을
향해 펼치는 예수님의 손길은 한없이 부드러웠습니다.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태도는 진실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을
향해 던지는 그분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심오한 의미로 충만했고,
동시에 힘과 생명력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런 예수님 말씀에 힘입어
사람들은 회개의 길로 접어들었고 새 삶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를 향해 던지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그냥
흘려버릴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마음 깊이 새겨서 들어야 합니다.
말이나 소가 곡물을 천천치 씹고 또 씹고 거기다 되새김질하듯이
천천히 음미해야할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정녕 보물처럼 대하고 음미하고 또 음미할 때
그 말씀은 우리 내면 깊숙한 영혼에 와 닿을 것입니다. 그 안에
차곡차곡 쌓인 깊은 상처와 아픔을 치유시킬 것입니다. 좌절과
고통을 딛고 일어서게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을 대하는 제 태도를 돌아봅니다.
‘쇠귀에 경 읽기’란 말처럼 건성건성 듣습니다. 많은 경우 형식적이고
의무적입니다. 소극적이고 폐쇄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을 대하는데 있어서 진실한 마음,
성의 있는 태도, 진정성 있는 자세로 대하는 사람들은 삶이 통째로
바뀌는 은총, 삶이 크게 한 단계 성장하는 은총을 체험하곤 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서 진지하게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하고 알려 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표면적으로 꽤 의아하고 특별한 예수님의 말씀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어김없이 수군거렸을 것입니다. “저것 보세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계명인데, 예수님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가 찾아왔는데도 나가서 인사도 않는군요. 정말 너무한 것
아닙니까? 인류 구원 사업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기본이 먼저 되어
있어야지요. 기본이!”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정성껏, 진지하고 성의 있게 귀담아 들은
사람은 단번에 이해했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기도 하지만 인류 전체를
구원해야 할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이십니다. 물론 어머니 마리아에게
극진한 효심을 표해야 마땅하지만 예수님은 그보다 훨씬 더 큰 사명을
안고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자렛이나 이스라엘만 구원하실 분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구원하셔야 할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새로운 주인, 새로운 왕으로 모신 우리 모든 인류는 이제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가족들입니다. 피를 나눈 혈연도 중요하지만 영혼과
사랑을 나눈 영적 가족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기타] 성전 건축이 끝이 아닙니다.
2013년 다해 9월24일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에즈라기 6장 7~8.12.14~20절)
오늘 독서에 말씀들을 읽으면서 우리의 상황과 비슷하다.. 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먼저 서두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집 공사가 계속되게 하여라.’ 지금 축성식을 앞두고 있는
공소 공사는 제가 시작한 게 아닙니다. 본당에 와 보니 어느 정도
진행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이어받아서 계속 하느냐,
마느냐.. 였던 거 같은데요. 여러 가지 상황들과 공동체의 열망이
‘공사가 계속되게 하라..’ 는 목소리처럼 들렸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선배 신부님들께 조언을 얻기 위해 다니다보니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건축한다고 돈 모으는 일에만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신자들이 지치지 않을 수 있도록, 또 영적으로 메마르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한다..’ 라는 이야기인데요. 아마도 독서 중간에 나오는
말씀을 염두 한 이야기가 아닌가.. 합니다. ‘유다의 원로들은 하까이
예언자와 이또의 아들 즈카르야가 선포하는 예언에 힙 입어 건축
공사를 순조롭게 진행하였다.’
‘성전 건축이라는 일이 영적인 양식 없이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인 거 같은데요. 저에게는 그 일이 매 주
공소에 가서 미사를 봉헌하고 한 달에 한 번 가정 미사를 봉헌하러
가는 것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 일이 ‘순조롭게...’ 해 주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공동체가 모일 수 있는 구심점은 되어 준 거 같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 나온 대로 저희도 건축 공사를 마쳤고,
‘하느님의 집 봉헌식을 올렸다.’ 라는 말씀을 남겨두고 있는데요.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소와 양은 아니지만 돼지를 잡아 잔치를 할
예정입니다. 그 과정이 참 비슷한데요.
조금 더 반복해서 읽으면서 한 가지 생각이 더 들었습니다. 말씀에
보면 ‘공사가 계속 되게 하여라.’ 라는 임금이 있었고, 일을 진행하는
유다의 원로들이 있었고, 말씀을 전한 예언자들이 있었는데.. 공동체
구성원들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는 표현되어 있지 않은 거 같습니다.
문득 ‘성전 건축이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바라는 일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런 생각이 든 이유가 아마도 제가 공소를 지어야 할지 말지 고민할
때 ‘정말 모두가 바라는 일일까.. 한 두 사람이 원해서 진행되는 일은
아닌가..’ 하는 고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소 신자들에게
정말 공소를 짓길 원하는지 한 분 한 분 찾아다니면서 물어봤었는데요..
여러 가지였던 거 같습니다. 대체로 원하지만 모두가 지어야 한다..
는 강한 의지를 표현한 건 아니었던 거 같습니다.
아마 당시 유다 백성들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 일에
따라가지만 온전히 마음을 주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을 겁니다.
또 봉헌식이 어떤 이들에게는 더 할 수 없는 기쁨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저 무덤덤한 행사로 여겨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성전 건축하는 과정과 달리 그들 모두의 반응이 보여지는
장면이 있습니다. 모두가 기뻐하고 모두가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인데요. 그 내용에 관한 말씀이 이렇습니다.
에즈라 사제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이로 이루어진 회중 앞에 율법서를 가져왔다. ... 그는 ‘물 문’ 앞
광장에서, 해 뜰 때부터 한낮이 되기까지 남자와 여자와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에게 그것을 읽어 주었다. 백성은 모두 율법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느헤미야 총독과 율법 학자며 사제인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이 온 백성에게 타일렀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온 백성이 울었기 때문이다.
에즈라가 다시 그들에게 말하였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시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 미처 마련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의 몫을 보내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온 백성은 자기들에게
선포된 말씀을 알아들었으므로, 가서 먹고 마시고 몫을 나누어 보내며
크게 기뻐하였다.
에즈라가 읽은 하느님의 말씀이 온 백성의 눈물, 참회, 변화, 그리고
기쁨을 만들어 내는데요. 그 모습을 보면서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되는 거 같습니다. 외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공동체 안의 구성원들이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변화하고
성장하며 참 기쁨을 느끼는 일이겠다.. 하는 겁니다.
성전 건축이 끝이 아닙니다. ‘성전 짓느라 고생했으니 이제 좀
쉬자..’ 가 아니라, ‘그 동안 소홀했던 말씀에 더 충실하자.. 관계와
일 안에서 지치고 틀어진 이들을 다시 공동체 안으로 불러 들여
하느님 안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하자.. 우리가 가진 공간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나의 은사를 사용해보자..’
하는 것이 정말 더 중요한 것에 마음을 쓰고 삶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그 일에 마음을 쓰고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오늘 순교자 현양 대회에 갔다 왔는데,
가까이 있던 분이 많이 피곤했던 거 같다.
성지 순례 가는 버스 안에서도 자고, 미사 시간에도 졸았는데,
미사 시간에는 살짝 코를 골았다고 한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그 얘길 했더니 그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 “예수님이 너무 편안 했나봐요~”
- 밤송이 신부님의 묵상 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