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3년 다해 9월28일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청주] 때가 되면 알리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즈카 2, 5 - 9. 14 - 15ㄷ
† 복음 : 루카 9, 43ㄴ - 45
★ 즈카르야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위한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그는 주님께서
새 성전을 통하여 당신 백성 안에 머무르시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제1독서).
★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 놀라워 하지만, 정작
예수님께서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돌을 던질 때가 있고 돌을 모을 때가 있으며, 껴안을 때가 있고 떨어질
때가 있다.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간직할 때가 있고 던져
버릴 때가 있다.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코헬 3,1-8).
구약 성경 코헬렛의 말씀을 길게 인용한 대로, 정말 그러한 것 같습니다.
좋은 때가 있으면 나쁜 때도 있기 마련입니다. 나쁜 때를 우리 삶에서
결코 제외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때는 오지 않고 웃을 때만 오기를,
싸움은 일어나지 않고 평화만 누리기를, 죽을 때는 오지 않고 늘
생명력을 느끼기를, 나쁜 때는 오지 않고 좋은 때만 오기를 기도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좋은 때’를 맞이하셨습니다. 당신께서 하신 일에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그분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이 제대로 전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이에 연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수난의 때’를 예고하시며
미리 염두에 두십니다. 곧 그분께서는 좋은 때라고 마냥 좋아하지
않으시고, 나쁜 때라고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어떠한
때이든, 곧 그것이 좋은 때이든 나쁜 때이든 그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십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때가 되면 알리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2013년 다해 9월28일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 루카 9,43ㄴ-45
때가 되면 알리라.
학창시절에 시험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것입니다. 잘 모르던 것이
시험을 코앞에 두어서야 이해되는 것이 많았습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당장에 이해되지 않더라도 들어놓으면 때가 되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일에 놀라 감탄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가9,44). 이 말씀은 당신의 수난에 대한 예고였습니다.
헛된 이상에 사로잡히거나 허망한 희망에 들떠 있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에 대해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아직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주님의 수난을 목격한
후에야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는 작업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말합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때가
되면 부모는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아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제자들도 때늦은 후회를 하게 되었고 오늘 우리도 그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명심하면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그분과의 통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야고1,21). 말씀을 귀담아 들으면 때가 되면 그 의미를
알아듣게 되고 그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보1,22).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야고1,25).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루가10,38-43)을 보면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가10,42). 참으로 들음은 소중한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근본이 섭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10,17). 말씀 안에 풍요로움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제가 당신의 가르침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온종일 그것을
묵상합니다. 당신의 계명이 저를 원수들보다 슬기롭게 만들었으니
그것이 영원히 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시편119,97).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주님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려고 노력할 때
어린이들을 빼고 나이 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나이가
들면 노안도 오고, 잘 들리지도 않습니다. 또 몸 전체가 점점
약해진다는 것을 느끼게 되며, 심지어 기억력도 좋아지지 않게
되니까요. 그래서 활기가 넘치는 젊은이들을 보면 어르신들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참 좋을 때다.”
이처럼 나이 드는 것을 신나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책을 보니까 나이 들면서 생기는 그 모든 단점들이
어르신들을 위한 하느님의 배려라고 말하더군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시력이 나빠지는 것은 큰 것만 보고, 멀리만 보고
살라는 뜻입니다.
귀가 잘 안 들리게 되는 것은 필요 없는 작은 소리는 듣지 말고,
필요한 큰 소리만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가 시리고, 약해지는 것은 따뜻하고 연한 음식만 먹어서
소화불량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운 것은 매사에 조심하고, 멀리 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머리가 하얗게 세는 것은 멀리 있어도 연세 드신 분이라는 것을
알아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정신이 깜빡깜빡하는 것은 살아온 복잡한 세월을 기억하지 않고,
다가올 하느님 나라만 바라보라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모든 것들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안에
하느님의 숨겨진 배려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기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이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도록 숨겨져 있어서 그럴까요?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하느님의 잣대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잣대만을 내세워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미리 예고하십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 이를 미리 준비시키고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하도록
미리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심지어 그 말씀에 관해 묻는 것조차 두려워 침묵하고 말지요.
지금까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만 보아왔던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 영광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세상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관점으로만
생각하면 거부하고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세상의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행동만이 삶에 힘을 주고, 절제만이 삶에 매력을 준다(장 폴 리히터).
신학생이 제게 준 선물.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입니다.
잘 그렸죠?
하느님의 배려
재미있는 유머 하나를 소개합니다.
하느님과 아담이 에덴동산을 거닐 때 문득 아담이 하느님께
묻습니다.
“하느님, 하와는 정말이지 무척 예뻐요. 그런데 왜 그렇게 예쁘게
만드셨어요?”
“그래야 네가 늘 그 애만 바라보지 않겠니?”
그러자 아담이 다시 하느님께 여쭙습니다.
“하와의 피부는 정말로 부드러워요. 왜 그렇게 만드셨어요?”
“그래야 네가 늘 그 애를 쓰다듬어 주지 않겠니?”
“그런데 하느님, 하와는 조금 멍청한 것 같아요. 도대체 왜
그렇게 만드신 거죠?”
“이 바보야, 그래야 그 애가 널 좋아할 거 아니냐?”
어때요? 정말로 그런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이를 통해 나와 연관된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해봅니다. 어쩌면 없어야 한다는 그 모든
것들이 어쩌면 나를 위한 하느님의 배려는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그 모든 것들에 감사하면서 숨어 있는 하느님의 뜻을
찾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합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진실 앞에 서야 한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진실 앞에 서는 것이 하느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2013년9월28일 연중 제 25주일 토요일 복음묵상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루카9,45)
---
예수님께서 당신 수난에 대한 예고를 하신 것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었다.
그 말씀의 의미를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너무 엄청난 일이기에
물어보려는 것조차 두려워했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다.
제자들은 이러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했기에, 예수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었을 때 준비 없이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뿔뿔이 도망쳤고,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에 대해서도
의심과 혼란을 피하지 못한다.
가끔 우리는 진실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한다.
특히 두려움을 동반하는 진실 앞에 서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물론 긍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좋은 방향으로 바뀌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긍정적’이라는 말의 의미다.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진실을 외면하면서까지 피하고 싶은
상황을 달리 해석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진실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희망을 찾는다는 말이다.
불편을 느끼게 하는 진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없이 만난다.
불편한 진실을 피하고자 하는 우리의 움직임은 긍정적인 태도가
아니라 미봉책으로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될 것이다.
진실만이 우리가 옳게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허락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두려운 진실일수록 용기를 내어 그 앞에 서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틀렸다면 고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고, 숨겨진 참된 뜻을 신앙 안에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도 두려워 진실을 외면하려는 이들이 많아 보이는 세상이다.
기득권을 잃고 싶지 않아서 진실을 거짓으로 이해하려는 이들도
많아 보이는 세상이다.
최소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는 신앙 안에 살고 있다면,
진실 앞에 서야 한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2013년 다해 9월28일
오늘 ‘최 인호 베드로’ 형제를 위한 장례미사가 명동 성당에서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고인을 만난 적은 없지만 고인의 글을 통해서
고인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서울 대교구 주보에 쓰신 고인의 글은
제가 준비한 강론 보다 훨씬 영적인 깊이가 있었습니다. 저는
공지사항 시간에 주보에 실린 고인의 글을 꼭 읽어 보시도록 말씀을
드리곤 했습니다. 교구청에 함께 사시는 신부님께서는 최근까지
고인의 본당 신부로 계셨습니다. 신부님을 통해서 고인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겸손하셨다고 합니다. 어느 날 성당에
오셔서 신부님께 이렇게 말씀 드렸다고 합니다. ‘신부님 성체가
너무나 고픕니다.’ 신부님께서는 고인의 이야기를 듣고 성체를
모셔 드렸다고 합니다. 병중에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청하면 성체를
모셔다 드리겠다고 하셨답니다. 도시인들의 목마름에 시원한 샘물
같은 소설을 쓰셨던 작가였습니다. 가톨릭에 귀의 한 이후에는
영적으로 목마른 이들에게 귀한 생명의 말씀을 선물했던
신앙인이었습니다. 삼가 고인께서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영적식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성서에서
식별이란 말은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저울로 재 본다는
뜻입니다. 우리 어르신들은 예전에 손으로 들어 보면서 물건이
좋은지 아닌지를 판별하였습니다. 수박도 들어보고, 두들겨 보고
맛있는지를 살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씩 쪼개 본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분석을 한다는 뜻입니다. 식약안전청에서는 물건의 성분을
분석할 때 잘게 쪼개 봅니다. 그것도 부족하면 분쇄해서 갈아 봅니다.
그러면 물건의 성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식별이란 전체적으로
올바른 방향이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고, 식별이란 구체적으로
하나의 행동이 올바른 것인지를 따져 보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고를 때, 차를 살 때, 집을 살 때 우리는 꼼꼼히
따져보고, 신중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잘못 판단을 하면 커다란
손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하느님은 어떤 것을 원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식별’입니다. 처음에는 올바른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한번
써보고, 살아봐야 안다.’ 겉보기와는 다른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식별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식별의 결과입니다.
결과가 좋고, 결실이 있으면 영적식별을 잘 한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가 나쁘고, 결실이 없으면 그것은 악의 유혹을 따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위로와 고독’이 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면 결과는 늘 기쁨과 평화입니다. 악의 유혹을
따를 때도 ‘위로와 고독’이 있습니다. 악의 유혹을 따를 때 결과는
늘 불평과 불만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늘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이것은 영적식별을 잘 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영적식별을 잘 하는 사람은 3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겸손입니다.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남의
의견도 충분히 듣습니다. 누군가 영적 식별을 잘 했는데, 교만하다면
그것은 악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둘째는 진중함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쉽게 하지 않습니다. 남의
허물과 탓을 이웃에게 전하지 않습니다. 깊은 바다와 같아서 사람들을
품어 줄 수 있습니다.
셋째는 순종입니다. 비록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할지라도
교회의 가르침에 순명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의 의견이
교회의 가르침과 다를 때, 교회를 비판하고 순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영적식별이 아닙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왜 저러는지 이해가 안 돼!
2013년 다해 9월28일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루카 9,43ㄴ-45
<왜 저러는지 이해가 안 돼!>
얼마 전에 시집을 하나 선물 받았는데, 그 안에 있는 손택수 시인의
‘아버지의 등을 밀며’란 시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 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
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 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고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 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영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이적들에 놀라워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강길웅 신부님의 책 제목처럼, ‘낭만에 초 처먹는 소리’입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것인데, 그들은 지금의 황홀경에서
빠져나오기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또 묻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진실을
알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손택수 시인 자신의 이야기를 쓴 듯한 이 시를 읽으며 이해가
안 된다고 투정만 하면서 실제로는 이해하고 싶어 하지 않는 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시인은 아버지의 등짝이 자신을 위해
저렇게까지 지게자국으로 죽어있기를 원치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죄송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제가 되면 행복하다고 주위에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믿지
않았습니다. ‘결혼도 못하는데 무엇이 행복하겠는가?’ 생각했습니다.
사실 결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믿기 싫었던 것입니다. 믿기 위해서는
결국 믿음으로써 내가 포기해야 하는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를 이해 못하겠다고 하고 실제로 이해 못하는
것은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이해하려고만 한다면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이 수난 받고 돌아가시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기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해 못하는 것이 상대가 아닌 나의 탓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이해되는 것이 나에겐 두려운 일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을 때, 그것은 상대가 아닌
내 탓이라고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