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후한서>에서 우북평군과 요서군이 서로 확 차이나는 것은 치소 중심으로 설명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후한 때 요서군의 치소는 양락(陽樂)현인데 난하 유역의 비여현이나 영지현과는 달리, 양락현은 훨씬 북동쪽의 대릉하 유역으로 비정됩니다. 이미 거론하신 후한서 군국지 거리기록도 그렇지만, 후한서 조포전도 중요한 근거입니다. 이에 따르면 조포가 요서태수로 부임한 이듬해에 사람을 보내 어머니와 처자식을 데려오게 하는데 그 일행이 도착하기 직전 유성을 지나다가 선비족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따라서 후한 요서군의 군치인 양락현은 유성의 바로 동쪽, 즉 지금의 조양시와 의현 사이 쯤으로 비정되며, 이는 후한서 군국지의 거리기록과도 서로 부합됩니다.
둘째, <구당서>의 경우는 평주보다 계주의 수치가 더 크다는게 조금 이상하긴 합니다만 수십리 정도는 그냥 측정상의 편차이거나 사소한 오기로 볼 수 있겠죠.
만약 오기라고 가정한다면, 장안으로부터 계주, 평주의 거리나 평주-영주의 거리를 볼 때 평주의 수치를 줄여 적으면서 생긴 오류일 가능성이 크므로(가령 ‘二千八百五十里’나 ‘二千九百五十里’를 ‘二千六百五十里’로 오기) ‘영토확장’하기 위해 날조한 것으로 의심할 사안은 아닙니다.
셋째, 청골님 글을 읽고서 <통전>을 처음 자세히 살펴봤는데 분명 이상하네요. 관련 대목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상곡군(=역주) [동] 범양군 214리. [동북] 범양현 양향현 경계 80리. / 서경(장안)과의 거리 2,297리. 동경(낙양)과의 거리 1,462리.
범양군(=유주) [동] 어양군 210리. [서] 상곡군 214리. [동북] 귀화군 80리. / 서경 2,523리. 동경 1,680리.
귀화군(=순주) [동] 어양군 215리. [남] 범양군 80리. [동남] 어양군 210리. [서남] 범양군 80리. / 서경 2,700리. 동경 1,850리.
어양군(=계주) [동] 북평군 300리 [서] 범양군 210리. [동남] 북평군 석성현 185리. [서남] 범양군 옹노현 경계 125리. [동북] 북평군 석성현 경계의 폐 노룡수(廢盧龍戍) 200리. / 서경 2,820리. 동경 2,020리
북평군(=평주) [동] 유성군 700리. [남] 바다 200리. [서] 어양군 300리. [동남] 임유관 180리. [서북] 석성현 140리. [동북] 유성군 700리. / 서경 4,320리. 동경 3,520리
유성군(=영주) [동] 요하 480리. [남] 바다 260리. [서] 북평군 700리. [북쪽] 거란 경계 50리. [동남] 안동부 270리. [서남] 북평군 700리. [서북] 거란경계 70리. [동북] 거란경계 90리. / 서경 5,000리. 동경 4,110리.
(예를 들어 ‘[동] 범양군 214리’ 는 ‘동쪽으로 214리 가면 범양군에 닿는다’ 는 뜻으로 읽으시면 됩니다. 참고로, 통전 주군전의 기술방식은 엄밀히는 지명 중심은 아니고 방위 중심의 설명입니다. 모든 군마다 동,서,남,북,동남,서남,서북,동북의 여덟 방위를 일일이 설명하고 있으나 논지와 관련된 부분만 뽑아서 정리했습니다.)
위에서 알 수 있듯 앞에서부터 쭉 일관성이 유지되다가, 북평군, 유성군의 서경(장안), 동경(낙양)과의 거리 대목에서 갑자기 엉뚱한 수치가 튀어나옵니다. 어양군 동쪽으로 300리 가면 북평군이 있는데, 어양군은 동경으로부터 2,020리이나 북평군은 느닷없이 3,520리 ?
군들이 정확히 일직선으로 늘어선 것은 아니고 또한 요즘과 같은 직선거리 개념이 아니므로 숫자가 반드시 딱 떨어질 필요는 없고 몇십 리 정도 차이나는 것은 통상적인 편차 범위 내로 볼 수 있습니다만, 그 범위를 훌쩍 벗어나서 천리 이상이 차이나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네요.
제가 보기에도 이 대목은 분명 오류가 있는 것 같고, 북평군, 유성군의 수도와의 거리 대목이 의심이 갑니다. 가령 북평군의 경우 각각 천 리를 줄여서 서경 4,320리 -> 3,320리 ; 동경 3,520리 -> 2,520리로 수정하면 쭉 이어져온 전체적인 흐름과 서로 들어맞으며 이는 유성군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오류가 있는게 맞다고 하더라도, 이를 두우나 후대의 필사자, 판각자의 의도적인 조작에 기인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수도와의 거리만 달랑 나와있다면 혹 그렇게 의심할 수도 있겠으나, 이 경우에는 그 중간과정이 일일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어서 이상하다는게 금방 드러나니까요. 청골님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의도로 조작을 하고자 했다면 앞의 수치들, 특히 어양군-북평군, 북평군-유성군의 거리도 함께 다 고쳤어야 됩니다. 이를 볼 때 어떤 경위로 생긴 오류인지 확정하기는 힘드나 적어도 의도적인 조작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첫댓글 학이님의 답변 감사합니다. 님의 말씀 중 '양락현의 위치가 대릉하 유역으로 비정된다'는 말씀은 아마도 뒤의 조포의 일화를 설명하기 위한 가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한 25사중 양락현의 위치를 이야기한 사서는 후한서 주에 나오는 "遼西,郡,故城在今平州東陽樂城是" 라는 부분이 유일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별로 인용하기는 싫지만 수경주 류수조에 "《地理風俗記》曰:陽樂, 故燕地, 遼西郡治, 秦始皇二十二年置. 《魏土地記》曰:海陽城西南有陽樂城."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두 대목 모두 양락성은 대릉하가 아니라 류수 근처에 있었다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라 생각되니다.
마지막으로 위서 지리지에 "陽樂,真君七年併令支含資屬焉"이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함자는 교치한 현이라고 볼 수 있으나, 영지는 위치가 변하지 않았죠. 또 요서군의 동쪽에는 창려현이 있었으므로 요서군의 양락은 대릉하 부근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설이 아니라 조포의 일화가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사실입니다. 문헌근거로서는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근거라 할 수 있구요. 그런데 이미 인용하셨듯 위서 지형지에 의하면 북위 때의 양략현은 분명 난하 유역입니다. 그러므로 후한때 대릉하 유역에 있다가 그 이후 위진남북조 시기, 적어도 북위 이전에 난하 유역으로 교치되었음을 알 수 있는거죠.
또한 후한서의 이현 주석이나 기타 문헌들은 그 교치된 이후의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후한 때 사정을 전하는 다른 특별한 근거(대릉하가 도저히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나 난하임을 시사해주는 기록 또는 고고학적 증거)가 없는 한, 이 정설이 가장 타당한 결론입니다.
교치만 나오면 저는 할 말이 없어집니다. 후한 요동속국에 창료, 빈도, 도하, 무려, 험독이 있고, 요서군에 양락, 해양, 영지 비려, 임유가 있습니다. 후한 요동속국의 현 중 창려와 빈도는 진나라 창려군으로 개편됩니다. 즉 소속군이 바뀔 뿐 위치의 변동은 없습니다. 계속 영토를 점유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유독 서쪽에 있던 요서군 양락만 같은 군내에서 교치하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심지어 낙랑, 현토의 현들도 그대로 있는데....
전한 때의 요서군은 대릉하 상류(서부도위), 대릉하 하류(동부도위), 난하 유역 의 3가지 권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지명으로서 '요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중 동부도위 지역이 후한 때 요동속국이 신설되어 분립되는데 이 대릉하권역은 이때부터 이미 선비족 등의 잦은 약탈을 당하였고 공손씨의 요동점거와 맞물려 후한 말이나 위,진대에 이르면 실질적으로는 오환족이나 선비족의 거점이 됩니다.
바로 이 무렵에 창려 등을 포함해 대부분의 현들이 유명무실해지거나 폐지되고 요서군의 치소 정도만 좀더 안전한 지역인 난하 유역으로 교치된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런데 삼국지를 보면 위나라 때인 244년에 '선비족이 내부하자 요동속국을 두고 창려현을 세워서 그곳에 거주하게 하였다'는 기사가 있는데, 바로 이때에 창려나 요동속국이 다시 세워졌던 것 같고, 이를 이어받아 뒤에 진나라 때에 대릉하권역의 군현들을 정비한 것으로 보이는데, 진서 지리지의 기사는 이를 반영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즉 한나라 때 창려현 등이 별탈없이 고스란히 유지, 계승된게 아니며, 양락현과 마찬가지로 우여곡절을 겪었다는 뜻입니다.
오환이 점거한 곳은 상곡, 우북평, 요서, 요동속국이지요. 난하유역은 완전 오환의 거처입니다. 조조와 답돈의 초기 전투가 무종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으로도 알 수 있지요. 학이님의 말씀대로 양락이 이동한 것이라면 이 일대의 지명은 모두 믿을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사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로 후대의 작필이라는거죠. 또, 양락이 교치되었다는 증거가 없는 한 양락은 난하하류에 있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 같습니다. (일부 중국학자도 그리보고 있습니다.) 유성의 위치를 잘못 이해하므로 양락이 이동하게 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