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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고조선,부여,발해 등 고대사토론방 Re:후한서,구당서,통전
학이 추천 0 조회 312 09.03.01 00:43 댓글 9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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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3.01 14:30

    첫댓글 학이님의 답변 감사합니다. 님의 말씀 중 '양락현의 위치가 대릉하 유역으로 비정된다'는 말씀은 아마도 뒤의 조포의 일화를 설명하기 위한 가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한 25사중 양락현의 위치를 이야기한 사서는 후한서 주에 나오는 "遼西,郡,故城在今平州東陽樂城是" 라는 부분이 유일한 것 같습니다.

  • 09.03.01 14:32

    그리고 별로 인용하기는 싫지만 수경주 류수조에 "《地理風俗記》曰:陽樂, 故燕地, 遼西郡治, 秦始皇二十二年置. 《魏土地記》曰:海陽城西南有陽樂城."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두 대목 모두 양락성은 대릉하가 아니라 류수 근처에 있었다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라 생각되니다.

  • 09.03.01 14:37

    마지막으로 위서 지리지에 "陽樂,真君七年併令支含資屬焉"이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함자는 교치한 현이라고 볼 수 있으나, 영지는 위치가 변하지 않았죠. 또 요서군의 동쪽에는 창려현이 있었으므로 요서군의 양락은 대릉하 부근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작성자 09.03.01 17:00

    가설이 아니라 조포의 일화가 직접적으로 말해주는 사실입니다. 문헌근거로서는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근거라 할 수 있구요. 그런데 이미 인용하셨듯 위서 지형지에 의하면 북위 때의 양략현은 분명 난하 유역입니다. 그러므로 후한때 대릉하 유역에 있다가 그 이후 위진남북조 시기, 적어도 북위 이전에 난하 유역으로 교치되었음을 알 수 있는거죠.

  • 작성자 09.03.01 17:15

    또한 후한서의 이현 주석이나 기타 문헌들은 그 교치된 이후의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후한 때 사정을 전하는 다른 특별한 근거(대릉하가 도저히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나 난하임을 시사해주는 기록 또는 고고학적 증거)가 없는 한, 이 정설이 가장 타당한 결론입니다.

  • 09.03.02 14:21

    교치만 나오면 저는 할 말이 없어집니다. 후한 요동속국에 창료, 빈도, 도하, 무려, 험독이 있고, 요서군에 양락, 해양, 영지 비려, 임유가 있습니다. 후한 요동속국의 현 중 창려와 빈도는 진나라 창려군으로 개편됩니다. 즉 소속군이 바뀔 뿐 위치의 변동은 없습니다. 계속 영토를 점유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유독 서쪽에 있던 요서군 양락만 같은 군내에서 교치하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심지어 낙랑, 현토의 현들도 그대로 있는데....

  • 작성자 09.03.02 18:58

    전한 때의 요서군은 대릉하 상류(서부도위), 대릉하 하류(동부도위), 난하 유역 의 3가지 권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지명으로서 '요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중 동부도위 지역이 후한 때 요동속국이 신설되어 분립되는데 이 대릉하권역은 이때부터 이미 선비족 등의 잦은 약탈을 당하였고 공손씨의 요동점거와 맞물려 후한 말이나 위,진대에 이르면 실질적으로는 오환족이나 선비족의 거점이 됩니다.

  • 작성자 09.03.02 19:12

    바로 이 무렵에 창려 등을 포함해 대부분의 현들이 유명무실해지거나 폐지되고 요서군의 치소 정도만 좀더 안전한 지역인 난하 유역으로 교치된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런데 삼국지를 보면 위나라 때인 244년에 '선비족이 내부하자 요동속국을 두고 창려현을 세워서 그곳에 거주하게 하였다'는 기사가 있는데, 바로 이때에 창려나 요동속국이 다시 세워졌던 것 같고, 이를 이어받아 뒤에 진나라 때에 대릉하권역의 군현들을 정비한 것으로 보이는데, 진서 지리지의 기사는 이를 반영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즉 한나라 때 창려현 등이 별탈없이 고스란히 유지, 계승된게 아니며, 양락현과 마찬가지로 우여곡절을 겪었다는 뜻입니다.

  • 09.03.03 09:50

    오환이 점거한 곳은 상곡, 우북평, 요서, 요동속국이지요. 난하유역은 완전 오환의 거처입니다. 조조와 답돈의 초기 전투가 무종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으로도 알 수 있지요. 학이님의 말씀대로 양락이 이동한 것이라면 이 일대의 지명은 모두 믿을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사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로 후대의 작필이라는거죠. 또, 양락이 교치되었다는 증거가 없는 한 양락은 난하하류에 있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 같습니다. (일부 중국학자도 그리보고 있습니다.) 유성의 위치를 잘못 이해하므로 양락이 이동하게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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