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여행]
지하철 타고 러시아서 네팔까지… 세계 '맛기행'
비행기나 배를 타지 않아도 이국(異國)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지하철로 쉽게 갈 수 있는 곳에 세계의 음식과 문화가 있다.
큰돈 들이지 않고 가볍게 즐기는 ‘세계 음식 기행’이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은 174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향수병은 혀가 가장 심하게 앓는 법. 서울 동대문과 대림동, 경기도 안산처럼 외국인들이 모여 사는 곳엔 어김없이 모국의 음식점이 가장 먼저 들어선다. 지하철로 쉽게 갈 수 있는 곳에 세계의 음식과 문화가 있다. 큰돈 들이지 않고 가볍게 즐기는 ‘세계 음식 기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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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선 대림역
짜장면·짬뽕은 없다 진짜 중국만 있을 뿐

대림2동 ‘줘마양다리구이’에서는 양 앞다리와 뒷다리를 통째로 구워 낸다. 손잡이가 길쭉한 포크와 나이프로 살을 발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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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2호선 대림역 일대에는 '진짜 중국'이 있다. 대림역 8번 출구를 나오는 순간부터 한국어와 중국어가 뒤섞인 간판이 보인다. 대림2동은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중국인 거리'다. 중국 연변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이곳에는 한국인의 입맛에 맞춰진 인천 차이나타운과는 다른 본토 느낌 물씬 나는 중국 음식들이 즐비했다. 한글보다 한자 간판이 더 많고, 양꼬치·연변순대·소 힘줄 튀김 등 중국 동북 3성 음식들이 지천이다. 우리가 아는 중국 음식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짜장면·짬뽕은 당연히 없다.
■ 대륙의 기상 '양다리 구이'
양다리 통구이를 마주하면 대륙의 기상이 느껴진다. 불판을 가득 채우는 압도적인 크기의 고기를 돌려가면서 굽고 겉면부터 잘라서 먹는다. 대림역 12번 출구 근처에 있는 '줘마양다리구이'(02-831-3078)는 양의 앞다리와 뒷다리를 뼈째로 초벌구이해서 낸다. 식탁에 놓인 불판에서 '웰던'부터 '레어'까지 취향껏 조리한다. 고기를 잘게 자른 양꼬치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육즙이 가득하다.
손잡이가 길쭉한 특수 제작 포크와 나이프로 고기를 '집도'하다 보면 절로 초원의 유목민이 된 기분이다. 뼈 무게 포함해 1㎏당 3만3000원. 6만원 남짓이면 4명이 배불리 먹는다. 새콤달콤 무친 건두부와 땅콩절임을 곁들여 먹는다. 양 특유의 잡내가 거의 나지 않아 거부감이 없다. 환기 시설이 충분치 않아 옷에 냄새가 좀 배어들지만 눈도 입도 즐거우니 감수할 만하다.

한 커플이 서울지하철 2호선 대림역 12번 출구 근처 중국인 거리에서 즈란(향신료)을 얹은 오징어 구이를 사먹고 있다. 이국적인 향신료 냄새가 가득한 이 거리는 ‘서울 속 중국’이다.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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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라탕·마라샹궈
마라(麻辣)는 '혀가 얼얼하여 뻣뻣할 정도로 맵다'는 뜻. 중국 산초인 화자오를 알갱이째 넣어 얼얼한 맛을 내는데 이 알갱이를 씹는 순간 입안이 얼얼해지고 혀가 마비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대림 차이나타운에는 중국 사천식 샤브샤브 훠궈의 길거리 음식 형태인 마라탕과 마라샹궈를 파는 음식점이 늘어서 있다.

대림2동 ‘취덕연주가’의 훠궈.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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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탕은 훠궈·샤부샤부와는 달리 재료를 한꺼번에 냄비에 넣어 끓여내는 게 특징. '봉자마라탕'(02-2637-4005)은 재료를 고를 필요 없이 청경채, 콩나물, 중국 당면, 건두부 등 인기 재료를 넣은 마라탕을 6000원에 낸다. '날씬한원숭이마라탕)'에서는 마라탕에 들어갈 재료를 직접 고를 수 있다.
야채는 100g당 2500원, 고기는 100g당 3000원이다. 얼얼한 맛에 내성이 없다면 칭탕을 달라고 요청해 맑은 국물에 끓여달라고 하면 된다. 마라 맛은 웨이라(微辣), 쩡창(正常), 짜라(加辣) 순으로 맵다. 대림역 8번 출구 바로 앞에 있는 '왕기마라향과'(02-845-3888)에서는 재료를 골라 담아가면 마라맛이 가득한 볶음요리 마라샹궈를 만들어 준다.
■ 길거리 음식
길거리 음식도 빼놓을 수 없다. 중국에서 아침 식사로 즐겨 먹는다는 젠빙궈즈(5000원)는 만드는 과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겁다. 먼저 밀가루 반죽을 철판 위에 동그랗게 펴서 얇게 부쳐낸다. 마치 프랑스 크레페 같다. 그 위에 채썬 대파와 고수를 넣고 햄·달걀 등을 올려서 계란말이처럼 둘둘 말아준다. 간은 두반장으로 했다. 초고추장 맛이 나면서 고수 특유의 향이 올라온다.

중국식 크레페 ‘지엔빙궈즈’.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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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식사용 튀김빵인 요우티아오(油条)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이 빵은 숙성한 밀가루 반죽을 길게 늘여 자른 뒤 두 개의 자른 반죽을 겹쳐 튀겨낸다. 콩국물과 맛이 비슷한 또우장(豆漿)에 찍어 먹는다.
개당 1000원. 버터구이 오징어 대신 쯔란으로 양념한 오징어구이(4000원)가 매대를 채웠고 연변식 피순대와 피망 속을 순대소로 채운 고추 순대도 있다. 식료품점에서는 오리알을 낱개로 포장해 판다. 주변에서는 중국어가 압도적으로 많이 들렸다. 서울 안 진짜 중국이다.
4호선 안산역
베트남·우즈베키스탄 이곳은 맛의 '지구촌'

경기도 안산 다문화 음식거리의 맛집 중 하나인 ‘신푸팡’. 중국식으로 기름에 튀긴 꽈배기와 찹쌀도넛이 인기메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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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지구촌'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동네가 있다면 경기도 안산 원곡본동이다. 1990년대 인근 공업단지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면서 동네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인도·베트남·인도네시아·네팔·우즈베키스탄 등 주로 아시아 나라에서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안산에 몰려들었다.
원곡본동은 전국 읍·면·동 중에 가장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곳(3만3514명·2월 현재)이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하나의 생활권을 이루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고향 음식을 파는 곳도 늘어났다. 서울 지하철 4호선을 탄다. 안산역 1번 출구에서 내려 길 하나만 건너면, 10여개국 사람들로 항상 붐비는 지구촌이다.
안산시는 2009년 원곡본동을 '다문화특구'로 지정했다. 거리 초입에 '다문화 음식거리'라고 적힌 모형이 서 있었다. 언뜻 봐도 거리를 걷는 사람의 90% 이상이 외국인이었다. 일대에는 중국 등 총 14개국 음식을 파는 33개 식당이 영업 중이다. 그중 안산시청 직원과 외국인을 상대로 첩보 수집을 하는 경기지방경찰청 외사과 형사들이 추천한 맛집 4곳을 찾았다. 한국 사람 입맞에도 맞는 식당이란 뜻이다.
■ 네팔 '칸티뿌르'
시청 직원이나 형사들이 회식이나 손님을 맞을 때 종종 찾는 곳이라고 한다. 맛집으로 소문나 한양대 앞에 2호점도 열었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의 옛 이름에서 따온 상호처럼 네팔 음식을 주로 판다. 가게에 들어가니 주인 가내스 라잘씨가 웃으며 반긴다. 그는 "네팔에서 직접 공수해온 식재료로 음식을 만든다"고 했다. 네팔은 인도와 인접한 나라라서 비슷한 향신료로 맛을 낸 카레나 탄두리 치킨(닭고기 구이)을 많이 먹는다고 한다.

네팔‘칸티뿌르’의 인기메뉴 치즈카레와 볶음국수, 카레만두. /염동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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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잘씨의 추천 메뉴는 일종의 카레만두인 '사모사'(4000원)와 수제치즈와 크림으로 맛을 낸 카레(9000원)다. 치즈카레는 입에 넣는 순간 달콤한 맛이 퍼지고, 이후 익숙한 카레맛이 혀를 덮친다. 두 가지 맛의 조화가 절묘하다. 숟가락으로 계속 퍼먹게 된다. 국물 없는 라면처럼 야들야들한 면에 매콤한 양념이 어우려진 네팔식 볶음국수 '차우차우'(5000원)도 한국 사람 입맛에 맞는 별미다. (031)493-9563
■ 인도네시아 '사하밧'
인도네시아어로 친한 친구라는 뜻의 상호처럼, 아늑한 분위기다. 5년간 자카르타 주재원 생활을 했다는 오진형(43)씨는 "인도네시아 음식 생각이 날 때면 종종 들르는 곳"이라고 했다. 그가 자주 시켜먹는 것은 인도네시아식 비빔밥인 '나시짬쁠'(7000원)과 매콤한 소스를 끼얹은 생선찜 '구라미 아짜르'(1만2000원)다. 텔레지아라는 물고기를 현지에서 공수해서 만드는데, 찜으로 만들면 도미와 비슷한 맛이 난다. 밥반찬이라기보다는 맛있는 술 안주에 가깝다. 갖은 야채와 고기볶음, 오이 등 반찬을 곁들여 내는 나시짬쁠은 다 같이 비벼 먹어도 되고 백반처럼 따로 먹어도 된다. 든든한 한끼 식사다. (031)494-5734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날이 따뜻해지면 이 동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테라스 자리가 유명한 곳이다. 우즈베키스탄 음식을 파는데 양고기를 이용한 요리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최고 인기 메뉴는 한글로 '빵 속에 고기'라는 귀여운 설명이 붙어있는 '삼사'(4000원)다. 설명 그대로 크루아상 같은 식감의 바삭바삭한 빵 속에 양파를 넣고 익힌 소고기가 들어있다.
손으로 살짝 뜯은 뒤 안에 있는 고기에 소스를 쳐가며 우물우물 씹어 먹으면 일품이다. 초원지대의 음식문화라서 끓여먹는 수프 요리가 발달한 것도 우즈베키스탄 음식의 특징이라고 한다. 소고기와 양배추 등 갖은 야채를 넣고 끓인 수프 '보르쉬'(7000원)가 한국 사람 입맛에도 맞는 편이다. (031)492-6984

우즈베키스탄‘사마르칸트’의 양고기 꼬치구이와 감자튀김. /염동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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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고향식당'
방송 프로그램에서 국수 맛집으로 방영되면서 인기를 끈 곳이다. 한가한 오후 시간에도 찾는 손님이 계속 있었다. 고수와 말린 바나나꽃을 넣는 쌀국수 맛은 베트남 길거리에서 흔히 먹을 수 있는 바로 그 맛이다. 쇠고기 쌀국수(7000원) 국물 한 입만 떠 먹어봐도 맛집에 선정된 이유가 납득이 간다. 고기 국물 특유의 감칠맛이 잘 끓인 곰탕처럼 깊다. 면은 찰지고, 고명인 쇠고기는 부드러워 술 생각이 간절해진다.
베트남 사람들이 즐겨 먹는 오리알(2000원)과 베트남 순대(1만원)를 시켜본다. 종업원이 "한국 사람은 못 먹어요"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음식을 가져다준다. 돼지피를 굳혀서 만든 순대는 퍼석퍼석한 식감에 비린내가 살짝 난다. 반쯤 부화된 상태에서 삶는다는 오리알은 일단 외양이 충격적이다. 베트남 대표 보양식인 데다 삶은 달걀 맛이 난다고 해서 눈 딱 감고 삼켰다. 베트남에 온 기분이 이런 맛일까. (031)492-0865

베트남‘고향식당’의 오리알. /염동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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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DDP 구경하고 중앙아시아 맛보러 간다
"사마르칸트 5126㎞."
서울 중구 광희동 지하철 2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 5번 출구 인근에는 서울에서 중앙아시아 여러 도시까지의 거리가 적힌 조형물이 서 있다. 조형물 하단부에는 "이곳은 동대문 실크로드입니다"라고 쓰여 있다. '광희동 중앙아시아 거리'를 알리는 상징이다. 광희동에는 1990년대 러시아와 수교 이후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인들이 몰려들면서 중앙아시아 거리가 형성됐다. 길 건너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보이는 곳이다.
이곳의 터줏대감은 사마르칸트(02-2277-4267), 사마리칸트(02-2279-7780), 사마루칸트(02-2277-4261)라는 이름의 우즈베키스탄 음식점이다. 한글 이름은 서로 다르지만 알파벳은 'SAMARKANT'로 같다. 한 가족이 세 음식점을 모두 운영하는데 한국 간판업자가 간판을 만들 때마다 발음을 조금씩 다르게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즈베키스탄식 꼬치구이 '샤슬릭(1꼬치 5000원)'이 대표메뉴. 중국 양꼬치보다 고기가 두꺼워 씹는 맛이 있다. 볶음밥 플로프도 한국인 입맛에 잘 맞는다.

서울 중구 광희동에 있는‘고스티느이 드보르’의 러시아식 순무감자샐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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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티느이 드보르'(02-2275-7501)에 들어서면 찬장에 늘어서 있는 마트료시카 인형과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러시아 대중가요가 이곳이 러시아 음식점임을 알린다. 러시아 농부들이 즐겨 먹었다는 양배추말이 '고루브치'가 유명하다. 양배추말이에 올린 스메타나(러시아식 사워크림)의 신맛이 식욕을 돋웠다. 광희동 주민센터 뒤편에 있는 '차이하나'에서는 러시아식 꿀케이크 '메도빅' 등 러시아 전통빵을 낸다.
몽골타워로도 불리는 신금호타워에는 2층에 울란바타르(02-2269-3278), 3층에는 잘로스(02-2275-7948)라는 몽골 음식점이 있다. 양고기 소를 넣어 만든 몽골식 만두, 쇠고기 굴야위(굴라시) 같은 몽골 음식을 판다.
취재=양지호 기자, 안산 권승준 기자, 편집=뉴스큐레이션팀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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