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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10월13일 연중 제28주일
[수원] 행복으로의 초대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열왕 5, 14 - 17
† 제2독서 : 2티모 2, 8 - 13
† 복음 : 루카 17, 11 - 19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28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를 ‘감사’에
대한 묵상으로 초대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지는 그의 감사의
깊이에 달려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감사할 일이
많음에도 불평을 늘어놓는 삶은 아니었는지 돌아봅시다. 아울러
우리의 삶을 지켜 주시고 풍요롭게 해 주시는 주님과 여러 은인을
기억하며 찬미와 감사의 제사를 드립시다.
★ 엘리사 시대에 시리아는 강대국이었고, 이스라엘은 시리아 앞에서
보잘것없는 약소국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시리아의 장수인 나아만이
이스라엘의 예언자 엘리사의 도움으로 나병이 낫는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진정한 주님으로 섬기게 된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자신의 복음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자신뿐 아니라 동료들이 고통을 겪는 것은 곧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며, 따라서 예수님처럼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한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낫게 하신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드린다. 다른 아홉 명은 건강을
되찾았음에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지 않았던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열 명의 나병 환자가 예수님의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태도를 보인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사마리아인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만이 구원의 은총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일상 안에서 늘 감사하고 있습니까?
‘감사’에 대한 이러한 내용의 강의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만일 제가 이 본당에 오다가 자동차 사고가 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자동차가 완전히 부서져 폐차를 해야 하는데, 저는 크게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럼 여러분은 아마도 ‘정말 기적이네요.’, ‘그나마
다행이군요.’ ‘정말 감사할 일이네요.’ 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곳에 올 때까지 다치지도 않았고, 제 자동차도 멀쩡합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더 큰 기적일까요? 자동차 사고가 났지만 조금만
다친 것이 더 큰 기적일까요, 아니면 자동차 사고도 나지 않고, 다치지도
않은 것이 더 큰 기적일까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는 감사해야 할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하루 24시간 동안 1초도
쉬지 않고 산소를 공급하는 데에는 엄청난 비용이 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생 일분일초도 거르지 않고 이 산소를 거저 받아먹으며
숨을 쉽니다. 이 역시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럽 대륙을 정복한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은 “내가 행복했던 날은
엿새도 되지 않는다.”고 한 반면, 극심한 신체장애자로 태어나 장애를
극복하며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었던 미국의 헬렌 켈러는 “내 인생에서
행복하지 않은 날은 하루도 없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누구에
더 가깝습니까?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할 수도 없는 법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간절히 원하던 은총을 받고 나면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10월13일 연중 제28주일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 루카 17,11-19
간절히 원하던 은총을 받고 나면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주십니다. 이 시간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생각하는 가운데 삶이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오로는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감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차고 넘칠 때는 물론 부족함을 느끼는 가운데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잘되면 자기가 잘했기 때문이고
잘못되면 탓을 남에게 돌리고 심지어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서운함이 앞섭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면,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또 주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순간을 참지 못하고 불평불만 할 때가 많습니다. 은혜를
입고도 전혀 아닌 양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아니 더 받아야 하는데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열
명의 나병 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부르며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카 17,13)
하고 외쳤습니다. 사실 그들은 ‘부정 탄 사람들’로 낙인 찍혀 멀리 동네
밖에 쫓겨나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법을 무시하고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즉각 고쳐 주시지 않고“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하고 이르셨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들이 믿음이 없었다면 그냥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떼를 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었으며, 사제에게 가는 동안에 완전히 병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아직 미숙한 신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외면적인
것에 집착하고 있었고 병이 나음 받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들을 고친 분이 육체적인 건강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보십시오. 그들 가운데 한 사람만이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졌는데 한 사람만이,
그것도 평상시 은총을 많이 받은 유다인이 아닌 사마리아사람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사람만이 성숙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나병을 치유 받은 것은 하느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 누려야 할 혜택을 누린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의 자녀들 가운데 들지 않는
이방인이었고 자신이 어떤 것을 내세운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비를 간구하였고 결국 얻었으며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몸이 치유되었고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갈 수 있었다는 것이 더없이 큰 기쁨입니다. 은총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언제든지 주실 수 있는 분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마리아인은 단순히 육적인 치유를 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치유 받은 것을 통해서 치유하시는 분을 차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1독서를 보면 나병환자인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일러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습니다. 그러자 어린아이
살처럼 새 살이 돋아 깨끗해졌습니다.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에게
선물을 드리고 싶어했습니다. 거듭 받아달라고 청하였지만 엘리사는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나아만은 “이 종은 이제부터 주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물이나 희생제물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엘리사를 통해서 하느님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몸이 깨끗해진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나아만도 치유를 받은
사마리아 사람도 지금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통해
무덤에서 나온 나자로를 비롯하여 치유를 받았던 많은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몸이 아무리 깨끗해도, 치유를 받았어도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 썩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몸의 가치는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깨끗해진 몸으로 예수님께로 돌아온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나아만이 주님만을 섬길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가장
크게 감사할 일입니다.
자, 여러분은 저를 만난 것이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
고맙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중요한 것은 저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하느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옆에 분을 보십시오.
만나서 감사합니까?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갈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분을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예, 그렇다면 옆에 계신 분에게 인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옆에 있어줘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느님께로 갈 수 있게 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복덩이는 복덩이대로,
골치덩이는 골치덩이대로 하느님만을 갈망하게 해줍니다. 겸손하게
더 간절히 기도하게 합니다. 그러니 골치덩이를 만난 것도 감사하십시오.
치유 받은 나병환자 아홉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은 은총을
입었음에도 하느님을 영접하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병이 나은
것을 확인 받기 위해서 사제를 찾아갔습니다. 병이 나아서 감사드리는
것보다 내가 이제는 부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 받는 것이 더
중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십니까?
무엇을 우선순위에 놓고 있는지요? ‘화장실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고 했는데 그 아홉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입는 것은 결코 마땅히 받아야 할 자격이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어진 은혜를 당연하다고 생각 말고 받은 은혜를 통해서
감사를 드리고 능력의 하느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다윗이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 내 마음 그분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으니 내 마음
기뻐 뛰놀며 나의 노래로 그분을 찬송하리라”(시편28,7). 고 노래하였듯이
매일 매순간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여러분은 무슨
말이나 무슨 일이나 모두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콜로 3,15-17).
매사에 감사해야 하겠지만 근원적인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는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죄의 용서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이며 셋째는 이 지상의 삶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
천상의 삶이 약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기쁨중 하나는
돌아갈 고향, 천국본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고
먼저 감사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느님 안에서 더 큰 감사의 마음이
생겨날 것입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먹으라고 사과를 하나 주었습니다. 아이는 사과를
받으면서 아무 말이 없어서 엄마가 ‘애야 사과를 주었는데도 왜 말이
없느냐?’고 말했습니다. 당연히 ‘엄마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리라
생각하면서. 그런데 아이의 말은 ‘껍질은 왜 안 깎아주는데요?’라고
말했습니다. 사과를 받은 것에 감사는 안 하고 껍질을 깎아 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철없는 아이라고 말하겠지만 어쩌면 우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사가 없고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작은 일이라도 감사를
하면 마음이 풍성해 집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즐거워집니다. ‘감사는
펌프에 마중물과 같다’고 합니다. 펌프를 사용하지 않다가 다시 사용하면
물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그럴 때 물 한 바가지를 붓고 펌프질을 하면
물이 올라옵니다. 물을 올라오게 하기 위해 붓는 물을 ‘마중물’이라고
합니다. 마중물을 부으므로 물이 계속 올라오는 것처럼 감사를 하면
할수록 감사할 일들이 계속 많아집니다.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섭섭하게 여겨질 때가 언제입니까?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할 때입니다. 자녀들을 키우기 위해 수고한 것은 알아주지
못하고 해 준 것이 없다면서 불평할 때 부모님들은 속상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낳아주고 키워준 것을 조금이라도 감사하는 말이라도 하면
부모님은 행복을 느낍니다. 하느님께서도 감사하는 사람에게 축복을
더해 주십니다. 담을 그릇이 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간절히 원하던 은총을 받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얼굴을
바꾸지 말고 늘 감사하는 한 주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옛말에도
남에게 베푼 것은 모래 위에 새기고, 은혜를 입은 것은 돌 판에 새겨라.”
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받은 것은 잊고, 베푼 것에 대한 위안과
보상을 기대하고 사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은혜, 그리고
부모 형제 친척, 자녀를 통하여, 또한 이웃에게 받은 많은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어느 신부님이 말을 팔려고 내어 놓았다.
... 말을 사러 온 사람이 사고 싶어 하자, 신부님이 말했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은 교회에서 쓰는 말을 써야 알아듣습니다. '가 !' 하려면
'하느님 감사합니다.' 해야 하고'서 !' 하려면 '알렐루야!' 해야
합니다." 말을 사러온 사람이 말했다.
"거 참 희한한 일이군요, 평생 말 장사를 해 왔지만
이런 말은 처음 보는 군요, 한번 타 봐도 좋겠지요?."
허락을 받은 말 장사가 말에 올라탄 후,
"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니 가기 시작 했다,
다시 한 번 "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니 더 빨리 달리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낭떠러지가 나타나 기절초풍, 대경실색'
"알렐루야, 알렐루야!"고함을 치니 아슬아슬 하게 멈춰 섰다.
이마에 땀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라고 했더니
말이...ㅎㅎㅎ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단순히 병의 치유만을 원하십니까?
며칠 동안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동안 새벽 카페를 지켜주신
많은 분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의 열심한 활동으로
마음 놓고, 네델란드에서 오신 지인분과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서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지요. 3박 4일의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참으로
감사할 분이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마음을 간직하면서 오늘의 새벽 묵상 글 시작합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대학교 재학 중에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
외무고시, 행정고시에 모두 합격했으며, 서울 법대를 수석 졸업한
뒤에 변호사, 방송인, 투자전문가, 정치인, 명강사 등으로 아주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전 국회의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사실 저는 외모 콤플렉스가 정말 심했습니다. 미팅을 나가면 머리는
크고, 키는 작고, 얼굴은 볼품없다고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무시 안 당하려고 공부했습니다. ‘고시에 합격하면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실제로 고시에 합격하니
생각보다 훨씬 더 환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교를 졸업 한 뒤에
부모님께 큰 절을 올렸습니다. 똑똑한 머리를 물려줘서가 아니라,
변변찮은 외모 덕에 그저 고시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에 감사하다는
의미로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등학교 때의 같은 반 친구가 생각납니다.
정말로 연예인과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요. 그래서 이 친구
근처에는 여자 친구가 줄을 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많았던 인기는 다 사라지고, 상당히 어렵게 살고 있다는 소문만
듣습니다.
외적인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앞선 이야기에 등장하는 정치인처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비난 덕분에 성공한 사람도 있지요. 즉, 오히려
비난도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항상 외적인 화려함만이 중요한 것처럼 착각 속에 빠집니다.
그러나 자그마한 것, 그리고 감사할 이유가 없을 곳 같은 곳에서도
감사할 이유를 찾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성공이 발견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는
나병환자 10명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병이 나았다고 감사의 인사를
드린 사람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요? 10명 모두 당연히 감사를 드려야
할 것 같지만, 단 1명만이 그것도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 사람만이
찾아와 감사를 드리지요.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자기 병의 치유뿐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구원의 은총까지 덤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병의 치유만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더 큰 구원의 은총까지
덤으로 얻겠습니까? 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매순간 감사의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장 안 좋은 상황에서도 감사할 이유를 찾는
노력들이 나를 행복의 길로 이끌어 줍니다.
매일 감사한 일을 5가지씩 찾아 기록해 보세요. 감사하면 감사할수록
감사한 일이 저절로 생기는 게 참 신기합니다.
경복궁도 다녀왔습니다. 사진은 경북궁의 경희루
감사할 이유 찾기
카네기 철강사(현 US스틸)를 세워서 강철왕이라고도 불리던
카네기가 강연할 때의 일입니다. 그가 강연을 하고 있는데, 한
여성이 벌떡 일어나 자신을 향해 거친 욕설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고 그 욕설을 다 받아들이는
것이었지요. 강연이 모두 끝난 뒤에, 한 기자가 너무나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그런 험한 말을 듣고도 끝까지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오히려 웃을 수 있으신지요?”
그러자 카네기가 말했습니다.
“사실 나는 그 여자가 내 아내가 아니란 사실이 매우 고맙고
감사했다네.”
어떻게든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 감사할 이유를 찾으면 화낼
일도 짜증낼 일도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감사할 이유보다는
화내고 짜증내는 이유부터 찾는 것이 아닐까요?
감사할 일을 찾아보세요. 세상이 달라집니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희망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희망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절대적인 희망을 살아야 하며 증거해야만 합니다.'
2013년10월13일 연중 제 28주일 복음묵상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루카17,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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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성격을 여러 가지로 묘사할 수 있지만, 그 중에 흔히 쓰는
하나의 방법은 그 사람이 ‘밝은 사람인가 아니면 어두운 사람인가?
혹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인가 아니면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인가?’ 하는 구별법일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분명한 것은 둘 중 하나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똑 같은 사물을 보고도, 똑 같은 상황에 처해 있어도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갈린다. 분명한 것은 밝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
행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긍정적인 사람에게 전제되는 것은 희망이다.
희망이 없는데 긍정적일 될 수 없음은 당연한 이치이다.
밝고 긍정적인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더불어 자신 역시
희망적이 된다. 오늘 열 사람의 나환자들이 예수님께 치유를 받는다.
하지만 돌아와서 감사의 정을 표현한 이는 이방인이었던 사마리아인
한 사람뿐이었다.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왔을까?
하늘의 저주를 받았다는 온갖 괄시와 천대 속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의
날들을 보내어야만 했을 삶이었을까?
하지만 극단적인 아픔 속에서도 반응은 둘로 갈렸다.
야훼 신앙이라는 종교적 배경하에 살아왔던 이스라엘 사람 아홉은
치유를 받았음에도 감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방인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천한 사람으로 여겨졌던
사마리아 사람은 하느님을 찬미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러 이미
지나친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왔다.
우리의 신앙적 삶을 뒤돌아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감사하고 있는가?
그리스도교를 희망의 종교라 일컫는다.
이는 어떤 처지에서도 변할 수 없는 절대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희망적인 사람이 긍정적일 수밖에 없음은 긍정적인
사람이 희망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과 상통한다.
매사에 긍정적이었으면 한다. 밝았으면 한다. 적극적이었으면 한다.
감사하는 마음은 이러한 마음의 밭이 준비되었을 때 저절로 열리는
하나의 열매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데 행복한 마음이 생길 리가 없다.
신앙의 시작과 끝은 감사라는 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마음을 지녀야 한다. 긍정, 감사, 희망, 이 단어는
하나의 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같은 내용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희망은 옳은 것에 대한 희망이어야 한다.
그 식별은 기도를 통해서 가능하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그 희망이 옳은 희망이기를 청한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연중 제28주일
2013년 다해 10월13일
지난 11일에 성소후원회 회원들을 위한 하루 피정이 있었습니다.
강의는 전주교구 가정사목국장께서 해 주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가정, 신앙, 성소, 신앙인의 길에 대한 주제로 강의를 해 주셨습니다.
가정은 모든 성소의 뿌리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정에서 사제성소,
수도성소, 혼인성소가 자란다고 하셨습니다. 가정에서 그와 같은
성소가 자라기 위해서는 신앙이라는 토양이 비옥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신부님의 강의를 요약해서 전해 드리겠습니다.
신앙인의 가정은 멈출 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잠시 나의 이야기를 멈출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행동을 잠시 멈출 필요가
있습니다. 혜민 스님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을 통해서
깨달음에는 멈춤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흙탕물은
흔들면 계속 흙탕물이 됩니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흙탕물이 맑은
물로 변하는 것을 봅니다. 신앙인의 가정은 함께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릴 때 기억이 있습니다. 매일 아침, 저녁 가족들이 초를 켜고 주님 앞에
멈추어서 기도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간이 저를 영적으로
풍요롭게 하였습니다. 가족들이 함께 서로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적당한 시간에 잠시 쉬어 가듯이
신앙인의 가정은 주님 앞에 잠시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의 가정은 세상의 것들로 채우려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시니 참 좋더라!’
우리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굳이 세상의 것들로 채우려 하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명품을 소유하려 합니다. 더 좋은 것들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정말 소중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화려한 집은 화목한 가정을 만들지 못합니다. 명품 가방이 나를 성당에로
이끄는 것도 아닙니다. 비싼 침대가 단잠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나 자신이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임을 알 수 있다면, 우리가 더불어 만나는 모든
이웃들이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임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낼 수 있고, 진흙 탕 속에서도 예쁜 꽃을 피울 수 있으며,
넘어지면서도 다시 일어 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의 가정은 비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 예전 보다는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금 행복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상대적인 빈곤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본당에서도
크기와 헌금, 신자의 숫자를 가지고 비교를 하려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본당에 하느님을 믿는 신앙 공동체가 있는 것입니다. 꽃들은
스스로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꽃들이 다른 꽃들과 비교해서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사람만이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해서
낙담하고, 절망하고, 삶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저는 서울교구에서
가장 작은 본당에서 3년 동안 지냈습니다. 다른 성당들과 비교를
했을 때는 재미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비교하지 않고, 지금 있는 그
성당에서 즐겁게 지내면서 즐거운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그 모든 것도 함부로 하시지 않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적성 성당에서의 시간은 제게는 큰 축복이고, 은총이었습니다.
신앙인의 가정은 거짓 행복을 찾지 않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세상을 떠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 교황님께서는 세상이 주는
행복을 갖지는 못 했습니다. 저격을 받아서 목숨이 위태롭기도
했습니다. 노년에는 파킨슨병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교황님께서는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인으로 사셨고,
신앙인으로 하느님께로 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돈은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아닙니다. 돈은 삶을 편안하게 하거나 불편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건강은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아닙니다. 장애가
있다는 것은 세상을 사는데 약간의 불편이 있는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이 세상에
사는지, 나는 어디로 가는지, 나는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행복입니다. 행복은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행복은 가치와
의미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잃어도 행복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얻어도 불행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의 가정은 삶의 가치와 기준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몸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세상 사람들도 나름대로의 가치와 기준이 있습니다. 남을 도울 줄
알고, 불쌍히 여길 줄 알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자신을 낮출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고, 죄가 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의 가치와 기준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단식을 하시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3가지 유혹을
받았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드는 것,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것,
세상의 권력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치와 판단의 기준은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는 것이 신앙인의
가정입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바로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이런
가정에서 사제성소, 수도성소, 혼인성소가 자라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가정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신앙인의 가정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매일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나의 영혼이
비타민을 복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 몸을 위해서 운동을 하고, 음식을
먹는 것만큼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나의 삶 안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신앙인의 가정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은 고통의 바다라고 합니다.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놓아 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세상은 ‘은총의 바다’입니다. 그런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넘어서면 부활의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셔지고 깨어지지 않는 씨앗은 결코 싹을 틔울 수 없습니다. 결코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결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신앙인의 가정은 종교인이 아닌 신앙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종교인은 신앙이 액세서리와 같습니다. 필요하면 찾고 필요 없으면
서랍에 넣어두는 액세서리와 같습니다. 러시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30년 동안 독방에서 갇혀 지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시간이 견디기 어려웠고, 죽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방의 벽에 십자가를
하나 그렸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대화를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계신 예수님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감옥의 작은
독방이 마치 편안한 호텔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30년 시간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십자가는 희망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삶의
의미였습니다. 출소해서 아들을 보니 아들의 목에 십자가 목걸이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면서 기뻤습니다. 아들이 십자가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아들아! 너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이니? 그러자 아들이 말을
하였습니다. ‘이거 요즘 유행하는 십자가입니다.’ 종교인은 자신의
편리와 자신의 뜻에 따라서 하느님을 찾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질 수
있고, 그러기에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행복으로의 초대
2013년 다해 10월13일 연중 제28주일
<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
복음 : 루카 17,11-19
< 행복으로의 초대 >
제가 어렸을 때 저나 저희 집은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전기도 안 들어왔고, 유치원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그저 개구리잡고
물놀이하며 지냈습니다. 불편한 것도 없었고 있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어떤 아이는 이미 유치원을 나와 글을
쓸 줄 알았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동네는 우리 동네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이
보는 TV 프로그램을 보아야 행복할 것 같았고, 전깃불이 있으면 더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몇몇의 아이들은 우유를 먹는데 우리는
돈이 없어서 그것을 먹지도 못하는 상황이 오자 삶은 더 비관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함께 개구리 잡던 친구들이 공부에서는 경쟁자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중 2때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컬러 TV를 처음 보았을 때의 놀라움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부모님도 좋아하셨습니다. 전기밥솥과 세탁기가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전기밥솥에서 저절로 밥이 되는 것을 온 가족이
둘러보며 환희에 찼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쁨은 아주아주 조금밖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 개인용 컴퓨터라는 것이 처음 나올
때였는데, 그것으로 게임을 하는 얼마 안 되는 부러운 친구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를 수원으로 가니 이 시골에 살던 아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개구리 잡던 소년이 그들을 따라가기는
불가능했습니다. 겨울 잠바가 없어 어머니 잠바만 입고 다녔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과외를 받아 벌써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이미
수학과 영어를 다 배우고 들어온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공부도
나름대로 노력해보았지만 3시간을 통학해야 하는 저로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에 학력고사 보기 두 달 동안은 신경안정제를
먹으면서 버텨야 했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가니 더 대단한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쟁쟁한 부모님들을
둔 아이들이 친구가 되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점심 값도 내기 힘든
처지였습니다.
그러면서 가만히 생각해보았습니다. 가만히 보니 앞으로 나아갈수록
내가 살아야 할 세상은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회사에 취직하게 되겠고,
결혼도 하게 될 것입니다. 자녀도 낳아 다른 아이들처럼 키워야하고 ...
결국 이 세상 속에서 ‘만족’이라는 단어를 나의 것으로 삼고 살기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조금 더 넓은 세상에서 조금 더 많이 가지게 되면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하지만, 저의 경험으로 본다면, 아니 모두가 그럴
것이겠지만, 실제로는 더 편하고 더 발전하고 더 가질 수 있는
세상으로 갈수록 덜 행복해지게 됩니다.
저도 귀가 한 쪽이 잘 들리지 않게 되기 전까지는 귀가 잘 들리는
것에 대한 감사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쪽 귀가 잘 들리지
않고 이명까지 나게 되자 두 귀가 다 그렇지 않은 것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한쪽 귀라도 잘 들리는 것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법정 스님이 ‘무소유’를 쓰게 된 계기가 작은 화분 하나 선물 받아서
그 마음의 평화가 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걱정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못 가져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가져서
불행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지선씨가 화재로 인해 자신의 모든 아름다운 모습을 잃고도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싫다는 이유는 지금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행복을 알기에, 가지게 되면서 더 가지고 싶어지는 부족을
경험하고 싶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마존의 눈물에 나온 부족들은 사냥을 해도 그날 먹을 것만을
잡습니다. 저장하기도 그렇게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삶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살인이나 도둑질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의
물질문명에 물들게 된다면 이제 행복은 깨어지고 범죄가 들끓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에 먹혀버린 불쌍한 부족들도 볼
수 있었습니다. 행복하게 살던 그들이 도시의 빈민촌을 형성하고
집에서 화려한 삶만 나오는 TV를 보지만 실제 삶은 길에서 구걸을
하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감사’하러 온 사마리아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감사가 곧 믿음을
통해서만 올 수 있는 것이고, 구원은 감사를 통해서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무엇을
믿어야 감사가 흘러나오는 것일까요?
우리는 아빌라의 데레사의 고백에서 그 해답을 있을 것입니다.
Nada te turbe 아무 것에도 흔들리지 말라
nada te espante 무엇에든 걱정하지 말라
todo se pasa 모든 것은 헛되이 지나가나
Dios no se muda 하느님은 결코 변치 않으시나니
La paciencia 인내함으로
todo lo alcanza 모든 것에 이르라
Quien a Dios tiene 하느님을 지닌 자
nada le falta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Solo Dios basta” 오직 하느님으로 만족하리로다
그렇습니다. 그 믿음이란 바로 “Solo Dios basta”, 즉 하느님만으로
충분할 수 있음을 아는 믿음인 것입니다. 오늘 돌아오지 않은 9명은
세상으로 나간 이들입니다. 세상에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음에도
말입니다. 감사하는 사마리아 사람은 하느님을 받아들인 것이고,
나머지는 세상을 받아들였습니다.
지금부터는 왜 같은 것을 얻어도 어떤 사람은 감사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감사하게 되는지 그 원리를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조 때 유한준이라는 문인이 석농 김광국 수장품에 붙였다고
하는데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써서 유명해진
글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온 세상이 변하는 것을 느껴보셨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살맛이 납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는 세상도 어두워지고 살 수 없는 곳이 되고 맙니다.
정말 희한한 일인데, 사람은 무엇을, 혹은 누군가를 받아들이면 그
사람의 영향 때문에, 아니 어쩌면 그 사람이 만들어놓은 세상에서
살게 됩니다. 돈을 받아들인 사람은 세상을 돈으로 보고, 쾌락을
받아들인 사람은 쾌락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인 사람은 또 다른 세상에
살게 됩니다.
우리 첫 조상은 뱀을 바라보았습니다. 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뱀이 만든 세상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뱀은 자아를 상징하고 그
자아는 불만족입니다. 불만족스럽게 만들어 세상을 향해 손을 뻗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불만족은 갈수록 커지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뜻만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에 사셨습니다. 만족하셨기에 세상 어떤
것도, 심지어 목숨까지도 아깝지 않게 내어주셨습니다. 봉헌하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만족하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또 하느님의 세계에
속한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
(1요한 3,6)
두 세계의 차이점은 여기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한 여인이 일어나
메시아를 잉태하고 낳으신 어머니가 행복하다고 소리 지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의
뜻을 따랐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즉 외적으로 당신을
낳으셨다고 보는 것은 뱀의 세계이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행복한
것은 내적인 하느님의 세계인 것입니다. 행복을 찾되 내적인 세계,
즉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얻게 되는 양심의 자유와 행복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결국 감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뱀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와가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만으로 충분했다면
선악과에 손댈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담도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당당하게 거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가져야 행복하다고 믿었기에 죄가 들어온 것입니다.
‘하느님만으로 충분함을 믿읍시다.’ 그러면 그 믿음에서 감사가
흘러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았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 박사의 환자 중에 루시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아주 똑똑한 여성이었는데 갑자가 하반신 마비가
왔습니다. 신경학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형부에 대한 사랑이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언니가 병으로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서 언니의 시신 곁에 서 있는
형부를 보며 속으로 ‘이제 형부는 자유인이야. 나와 결혼할 수도
있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다리가 감전되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습니다. 이때부터 마비가 시작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시는
자신의 마비와 형부에 대한 사랑의 관계를 몰랐습니다. 프로이트
박사가 루시의 숨겨진 마음 즉, 형부에 대한 사랑과 언니에 대한
죄책감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의식 아래 숨어 있던 감정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루시는 극적으로 치료되었습니다.
프로이트 박사는 이런 환자들을 보면서 인간의 마음에는 자신도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마음의 지하실을
비의식이라 불렀습니다. 모든 병과 마음의 문제들이 여기서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출처: 이무석, 친밀함, 13]
프로이트는 비의식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고 하는데, 저는
비의식에 있는 ‘양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심이란 것이 있어서
하느님 뜻에 맞으면 기쁨을, 그것에 맞지 않으면 고통을 줍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하느님께 벌을 받기 전에 이미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고, 숨고, 가리고, 서로를 탓하였습니다.
이는 그 내면의 양심이 이미 그들을 죄인으로 판결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행복은 무엇이 되거나 무엇을 가지거나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양심의 법에 어긋나게 살거나, 그렇지 않거나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하느님 뜻에 맞게 살거나 자신의 뜻대로 살거나에
달렸습니다. 당신을 낳으신 어머니가 행복하겠다고 말하는 여인에게,
참 행복의 원천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즉 당신을 낳으셨더라도 그것이 하느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면
절대 성모님도 행복하실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받아
들였다는 뜻은 하느님 뜻에 따라, 양심에 어긋나지 않아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셔서 하느님 뜻을 따라
행복하여 마니피캇을 노래하셨던 성모님을 본받아, 세상 것에
가난하고 하느님만으로 충분한 그분 뜻에서만 행복을 찾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하늘을 보고 감사하고 땅을 보고 감사하고
2013년 다해 10월13일 연중 제28주일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루카 17,11-19
하늘을 보고 감사하고 땅을 보고 감사하고
95세 되신 전직 대통령께서 위중하다는 소식에 전 국민과 그리고
전 세계가 안타까워하면서 그의 쾌유를 비는 모습에 정말이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병실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켜들고
릴레이 기도를 했습니다. 눈물어린 감사의 편지가 줄을 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현존해계신 여러 ‘전직 대통령’들과 너무 비교가 되어
조금은 서글프기도 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오랜
숙원이었던 흑백갈등을 해소한 넬슨 만델라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세기 위대한 영혼으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있었다면,
이 시대에는 남아프리카의 넬슨 만델라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은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위대하고 고결한
영혼의 숨결이 좀 더 지속되기를...
넬슨 만델라, 한 인간이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지, 한 인간이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사람입니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였는지는 리처드
스텐절이라는 한 기자의 증언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타임지의
편집장으로 재직하던 그는 넬슨 만델라에 매료된 나머지 3년간 넬슨
만델라와 동고동락하면서 그의 자서전 집필에 참여합니다. 3년간의
기간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지요.
“만델라를 만나면서 제 자신이 좀 더 커진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를 떠나오자 제 삶에서 태양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는 정녕 태양 같은 존재, 큰 산 같은 존재였습니다. 얼마나 관대하고
넉넉한 인품의 소유자였는지 모릅니다.
그가 남긴 어록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역사에 길이 남을
내용들이었습니다. 출옥 후 대통령에 당선된 그가 백인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들끓는 흑인들을 향해 던진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용서하되 잊지 말자(Forgive without Forgetting).”
대통령이 된 넬슨 만델라가 첫 번째로 시도한 작업이 있습니다.
복수와 응징이 아니었습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진실을 고백하라. 그러면 용서하겠다.” 이것이 만델라가 풀어낸
‘사랑과 정의의 방정식’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솔직히 고백하고
참회하는 백인들에게 대사면을 선포한 것입니다.
유엔은 넬슨 만델라의 생일인 7월 18일을 ‘만델라의 날’로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만델라가 67년 동안 사회에 공헌한 점을
기려 국제사회가 이날 하루만큼은 67분 동안 개인 시간을 할애해
지역사회나 불우 이웃, 장애인을 돕는 등의 봉사활동을 하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바다처럼 관대하고 산처럼 든든한 넬슨 만델라, 항상 여유
있는 미소를 잃지 않은 만델라였지만 젊은 시절 그의 생애는 참으로
혹독했습니다.
백인 정부는 될성부른 떡잎이었던 젊은 만델라를 어떻게 알아보고
그를 일찌감치 투옥시킵니다. 그리고 28년 동안이나 가둬놓았습니다.
군대생활 2년, 혹은 3년 얼마나 길었습니까? 10년 징역 살고 밖으로
나오면 거의 폐인처럼 됩니다.
무엇보다도 아무런 죄도 없이 똑똑한 인재라는 이유로, 흑인이라는
이유로 투옥되었습니다. 투옥기간 동안 가족들도 모진 박해를 받으며
뿔뿔이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 와중에 사랑하는 아버지를 비롯해
여러 식구들이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드디어 그 역사적인 날, 1990년 2월 11일 넬슨 만델라는 자유의
몸이 됩니다. 1962년 평화시위를 주도한 죄목으로 수감되었다가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해오던 중 28년 만에 출옥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일제히 넬슨 만델라의 얼굴에 쏠렸습니다. 그리고
많이들 궁금해 했습니다. 장장 28년 동안이나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났으니 분노와 화로 암에라도 걸리지 않았을까? 혹시라도
폐인처럼 되지 않았을까? 휠체어나 구급차를 타고 출감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 모든 걱정들은 기우였습니다. 그는 아주 밝고 건강한
얼굴로 당당히 교도소 문을 걸어 나왔습니다.
취재기자들이 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5년만 수감생활해도 폐인이 되어서 나오는데 28년 동안이나 그
안에 사셨는데, 어찌 이렇게 건강하십니까?”
환한 머금은 넬슨 만델라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교도소에서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늘을 보고 감사하고,
땅을 보고 감사하고,
물을 마시며 감사하고,
음식을 먹으며 감사하고,
강제노동을 할 때도 감사하고,
늘 감사했기 때문에
건강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제게 있어 교도소는 저주의 장소가 아니라
성장을 위한 소중한 장소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감사입니다. 치유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가운데
한명만 예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하러 달려왔습니다. 우리 인간들
대체로 그런 것 같습니다. 절박할 때는 한없이 졸라대지만 문제가
해소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배은망덕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들의 모습 앞에 많이 서글프고 쓸쓸하셨을 예수님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하느님 앞에 선 한 인간 존재가 취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감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원래 아무 것도 아닌 존재, 티끌이요
먼지 같은 존재들이었던 우리들이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크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셔서 이 땅위에
두 발로 서 있게 하셨습니다. 그분의 지속적인 은총이 아니라면 단
한순간도 스스로 설 수 없는 나약한 우리 인간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분 앞에 취해야 할 태도는 지속적인 감사와 찬미, 영광을
드리는 일입니다.
그 오랜 고통 속에서도 늘 감사꺼리를 찾았던 넬슨 만델라였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열심히 감사꺼리를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믿음은 최고신께 귀속하는 힘
2013년 다해 10월13일 연중 제28주일
믿는 것은 이해하는 것 아는 것 듬직한 것 자신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회에서 사용하는 믿는다는 것과 종교의 믿음과는 다른 뜻이지요.
그러니 종교의 믿음세계는 종교를 모르면 알 수 없습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신념 이상으로 목숨보다 상위에 있습니다.
그 믿음의 힘은 하늘 초월의 힘이며 최고신께 귀속한 힘입니다.
믿음은 자신이 구원될 수 있는 힘을 자기 것으로 하는 변신입니다.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19)”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기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습
2013년 다해 10월13일 연중 제28주일(루카 복음 17장 11~19절)
예전에 이은결 씨가 하는 마술쇼를 본적이 있습니다. 재미있게
잘 보았는데요. 인상 깊었던 장명이 있었습니다. 뭐였냐면 그가
아프리카에 가서 아이들에게 마술을 보여주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었습니다. 보통 우리에게 마술을 보여주면 그 안에 숨겨진
속임수를 찾으려고 안간힘을 쓰죠. ‘너가 왼손 봐 내가 오른 손
볼게..’ 하면서 ‘마술이 아니라 눈속임이다..’ 하는 것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프리카 아이들은 전혀 달랐습니다. 대단한 마술을 보여준
것도 아니고, 초등학교 때 우리들이 많이 써 먹었던 것들 있잖아요.
예를 들어 엄지손가락 두 개를 붙였다 뗐다.. 하면서 엄지손가락이
떨어졌다.. 하는 거랑, 한손을 움켜쥐고 그 안에 다른 손 손가락이
있는 거처럼 보여줬다가 다른 손을 빼면서 손가락이 그대로 있네..
하는 그런 단순한 것만 보여줘도, 아프리카 아이들의 눈은 뭔가
대단한 걸 봤다는 듯이 놀라며 신기 해 합니다. 그 눈빛이 너무나도
순수하고 맑았던 거 같은데요. 우리와는 다른 그 눈빛에서 느껴지는
것은 정말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인 거 같습니다.
선교를 나간 신부님들도 그런 눈빛을 보며 발전된 나라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어떤 행복을 느끼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태석
신부님도 수단 톤즈 사람들에게 더 내어주고 싶었던 이유 중에 하나도
그들의 눈에는 감사함이 있어서 그러지 않았을까.. 합니다. 예를 들어
이태석 신부님이 고심해서 만든 나병환자들의 신발과 그것을 받았을
때의 그들의 감사함을 담은 눈빛, 학교를 짓고 음악을 가르쳐 주고
함께 미사를 봉헌할 때 그들이 전에는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것을 체험하는 데서 오는 기쁨과 감사함을 담은 눈빛과 모습.. 그러한
것들이 이태석 신부님에게 더 나누어주고 베풀고 싶은 원동력이
되어주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가는 거 같습니다. 지난
번에 사제 평생 교육 때 어떤 분의 강의를 듣는데 공무원들의 자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이런 거가 아닐까.. 추측을
하시더라고요. 복지에 관련된 공무원들이 일하면서 업무에 부담을 많이
느끼는데 업무의 부담보다 더 힘든 것은 사람들에게서 ‘감사하다..’ 는
인사조차 받지 못할 때 일의 보람도 없고 기쁨도 없고 의기소침함으로
일의 무게에 더 짓눌리게 된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라에서
주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왜 더 주지 않느냐.. 이 번에
이게 뭐냐..’ 하면서 불평의 소리를 할 때가 더 많다는 겁니다. 그런데서
오는 스트레스와 업무의 부담이 그들을 피로하게 만드는 거겠죠.
저도 보좌 1년차 때 그런 느낌을 청년들에게서 받았던 거 같습니다.
2년차 때는 청년들이 알아서 술값이나 밥값을 걷어서 돈을 거의 안
썼었는데요. 1년차 때는 모이면 제가 내는 경우가 많았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아쉬웠던 것 중에 하나는 처음에 제가 계산을 하면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인사를 하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당연한 것이 되어 버리니까 잘 먹었다는 사람도 감사하다는 사람도
없어지기 시작한 거 같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월급으로 술값이나
밥값을 내려면 그래도 나름 큰 결심을 해야 하는 건데 그걸 알아주지
않으니 조금 서운했던 거 같습니다. 감사하다.. 는 말 한 마디면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아이가 감사한 마음과 그
마음을 어버이날이나 다른 날에 기억해 주고 표현해 줄 때 ‘아이들에게
한 없이 퍼줘도 아깝지 않다..’ 하는 느낌을 받으실 겁니다. 그 동안의
희생이 희생처럼 여겨지지 않는 그런 기쁨과 보람이 있을 텐데요.
그러한 모습을 하느님께서도 보기를 바라시는 거 같습니다.
테살로니카 1서 5장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대로 우리가 받은 선물에 대해서 감사하기를
바라십니다. 또 그 모습을 보시고 흐뭇 해 하시리라 생각하는데요.
때로 우리는 받은 게 뭔지도 모를 때가 있는 거 같습니다. 어제 놀러
오신 자매님 중에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잘 사는
동네에 사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훈계할 일이
있어서 이런 말을 했다. ‘너네 부모님이 열심히 벌어서 학비 내
주는데 열심히 해야지...’ 하는데, 그 중에는 자기 부모님이 그 동안
돈을 내 준 사실 조차 모르는 아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 돈을 직접
계좌이체인가... 지로인가.. 하는 걸로 보내다보니 아이는 부모가
돈을 내주고 있는 것 조차 모르고, 알지 못하니 감사도 못하고
있었다는데요.
우리도 그와 같은 모습이 될 수 있는 거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 의지적으로 들여다보고 되돌아보지
않으면, 금새 감사보다는 불평을 늘어놓거나, 은혜를 모르는 교만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가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감사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그것을 베풀어 주신
분께 감사한 마음을 표현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한 형제님이 오래 전에 면허 실기 시험을 보는데,
그 감독관이 실기보러온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여러분 열심히 돈 벌어서 운전하지 마세요~”
- 밤송이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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