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013년 다해 10월20일 민족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주일)
[청주] 믿고 감당하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이사 2, 1 - 5
† 제2독서 : 로마 10, 9 - 18
† 복음 : 마태 28, 16 - 20
★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환시로 평화에 관한 하느님의 말씀을 받는다.
언젠가 주님께서 몸소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어 그들끼리
전쟁을 하지도 않고 모두가 하느님을 경배할 때가 온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마음을 다해 주님을 믿는다면 의로움을 얻고
구원받는다고 선포한다. 그러나 이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많은 사람의
노력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데에서
오기 때문이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지상 사명을 마치시고 하늘로 오르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하신다.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전교’라 하면 길거리나 지하철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외치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부 개신교
신자들의 협박성 외침을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교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어렸을 때에 피부가 좋지 않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동네 약국들
가운데 피부약이 좋기로 소문난 약국에서 지은 약을 발랐더니 며칠 만에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그 뒤로 저는 피부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그 약국을
자주 추천하였습니다. 전교도 바로 이러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시는 하느님, 살아가는 데 뿌리가 되어 주시는 하느님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에게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어느 본당 신부님이 예비 신자 환영식에서 경험한 일입니다. 신부님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떻게 성당에 오게 되었는지 들어 보는데, 한 예비
신자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이 성당 앞에서 10년째 슈퍼마켓을
운영해 온 사람입니다. 그만큼 이 성당에 다니는 분들이 우리 가게를
많이 찾아왔지요.” 여기까지 이야기할 때만 해도 신부님은 ‘아, 우리
교우들의 모범적인 모습에 감동받았거나 누구의 권면으로 오게 된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그의 말은 뜻밖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신자가 10년
동안 우리 가게를 찾아 주었는데, 단 한 사람도 저에게 성당 가자고 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기가 생겨 직접 제 발로 온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본당 신부님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기쁜 마음으로 전하고
있습니까?
- 매일 미사 -
◈ [청주] 믿고 감당하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2013년 다해 10월20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 주일)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 마태오 28,16-20
믿고 감당하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모두가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당신께서 명령한 것을 가르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시간 전교의 사명에 대해서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전교의 사명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께서 명한
것을 지키고 가르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에 말씀은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듣게 되고 들음으로써
주님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 각자의 능력에 따라 구원의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나는 말을 잘 못한다. 아는 게 없다고 하면서 개신교 신자들의
전교열정과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 말 잘하는 것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축구를 잘하려면 늘 축구를 해야 합니다. 피아노를 잘 치려면
그만한 연습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를 잘 하려면 자꾸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됩니다. 주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더 전할 수 있는
용기, 잘 전할 수 있는 지혜도 얻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수고 없이
잘하려고 하니 문제입니다.
솔직히 여러분이 말씀을 잘 못하십니까? 남 얘기하는 데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정보를 어디서 그리 자세히 파악했는지 의문이 갈 정도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게 없습니까?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에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 내용은 꿰뚫고 있고 배우나 연예인의 신상에
대해서도 자세히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실 쓸데없는 것으로 가득
채우면 꼭 필요한 것이 들어갈 데가 없습니다. 주님을 전하는 것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코린1,17).
말씀을 그저 귀로 듣는 것 뿐 아니라 행함으로써 더 큰 믿음을 얻게
됩니다. 믿음이 있어야 따를 수 있기도 하지만 따름으로써 믿음을
다지게 됩니다.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더 큰 믿음을 얻게 됩니다. 어느
구역은 초대교회공동체의 삶을 살기로 하고 노력했습니다. 서로가
어려운 환경에서도 더 힘든 사람을 생각했고 도왔습니다. 어떤 구역은
릴레이 성경 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반응도 아주 좋습니다. 큰 감동이
있다고 했습니다. 선한 일을 하고자 하면 우리가 감히 상상하지 못한
은총으로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할 때 이윽고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됩니다. 사도행전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다락방에 숨어 지내던 사도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1코린2장 4절에 보면 “내가 말을 하거나 설교를 할 때에도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성령과 그의 능력만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을
믿고 전교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실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는 늦춰진 성공일 뿐입니다. 더 큰 결실을 위한 믿음의 단련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반응 여하에 실망하지 말고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뜻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 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십시오. 우리의 신앙이 어떤지는 ‘복음’을 얼마나 열정적으로
선포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10,15). 여러분의
발걸음이 늘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베드로 전서 3장 15절의 말씀을 보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우러러 모시고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십시오.” 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
되어 있어야 주님을 제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주
읽고 또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깊이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신 예수님, 오늘도 성체성사를 통하여
영적양식을 주시는 예수님을 잘 모심으로써 힘을 얻고 위로를 받으며
희망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개신교신자가 줄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사회봉사 및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인색하고, 전도활동이 지나쳐서
혐오감을 주며 헌금을 너무 강조한다. 진리 추구보다 교세 확장에
집착하고 너무 시끄럽고 요란하다. 물량 주의에 물들어 있다. 도덕적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이원규. 감신대.종교사회학교수.)
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
천주교에서도 경계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천주교인들이 개인화 하고
있고, 부유해 지고 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점점 보수화, 권력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거리홍보나 공연, 작품 활동을
통한 문화 선교를 개신교에서 배우는 것은 긍정적인데 기존의 좋은 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반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통한 새 삶을 살아감으로써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교주일을 보내면서 무엇보다는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하시길 빕니다.
영세 받은 지 몇 년이 되었든 나를 통해서 성당을 찾아 영세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되었으면서도 나의 영향으로 하느님을
찾게 된 사람이 아직 없다면 나는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들판의
꽃들, 과일 나무도 일 년에 한번은 열매를 맺는데 우리가 일 년에 한번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은혜를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가운데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길 바랍니다. 우리 성당 안내지를 한부 이상 이웃에게 전하시기
바랍니다. 남편도 좋고, 아내도 좋고, 친구에게도 좋고 누구에게든
전해서 하느님에 관해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성당 초대신부이신 임가밀로 신부님께서는 프랑스 파리외방
전교회 소속사제로 1893년 5월27일 화창한 성모성월에 사제품을 받고
1893년7월19일 프랑스 파리를 거쳐 스페인에서 한국으로 향하게
됩니다. 배를 타고 수에즈 운하를 거쳐 인도양을 지나 베트남, 홍콩을
지나 기나긴 항해 끝에 인천항 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때가 1893년
9월12일 이었습니다. 신부님의 입에는 늘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라는 말씀을 달고 사셨습니다. 신부님께서
한국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부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았고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구원받기를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의 아름다운 발길이 우리에게
신앙을 전해주었고 여기서 많은 사람이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고 많은 성직자 수도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발길이 이웃을 향해야 함은 당연합니다. 구원을 허락하신
신앙의 삶이 복되다면 그것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부모와 함께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네 살짜리 꼬마가
말했습니다. “엄마, 저는 나중에 신부가 되고 싶어요!”.“그래? 좋지!
그런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성당에서
지루하게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다는 서서 떠드는 것이 훨씬 재미있을
것 같아요!” @@
이렇게 하면 나도 전교할 수 있다.
전교 잘하는 법 10가지
“전교는 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전교는 잘하는 사람만 잘되더라.”
모범적 크리스천 중에서도 전도만 하려면 몸이 움츠러드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런 한편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됐으면서도 무서운 기세로 전교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잘 전할 수 있을까?
①자신이 하려고 말라.
“저는 내성적이라…”“성경을 잘 몰라서…” “교회 다닌지 얼마
안돼서…” 등 변명은 모두 ‘전교를 자신이 한다는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교의 도구가 될 뿐 그 과정은 100% 하느님께서
책임지신다는 것. 이를 깨달으면 담대하게 나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쓰고자 하십니다.
②등잔 밑에서 우는 영혼 발견하기
가까운 데서부터 대상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전교의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아는 사람부터 전교해야 하는 이유는 “전교는 만나서
복음을 전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노상전교도 좋지만
한 사람이 제대로 복음을 받아들일 때까지 가까이서‘멘토(영적 스승)’
가 되어주는 것이 진정한 전교입니다.
③보고 또 보고
전교에 있어 자주 대면하는 것 만한 지름길은 없습니다. ‘전교왕’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 끈질기다는 것이다. 어떤이는
출근시간마다 집 앞에서 기다리다가 마주칠 때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어떤 선생님은 출근해서 자기가 맡고
있는 학생을 위해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한답니다. 그리고 아이들한테
기도해 주고 있다고 말해준대요. 말썽피우는 사람이 확실히 줄어든대요.
기도하며 얼굴을 익힐수록 마음의 벽은 쉽게 허물어집니다.
④칭찬으로 시작하라.
“한결 젊어 보이십니다.” “이 식당 물맛이 끝내줍니다.” 등 칭찬으로
대화를 열어야 합니다. “칭찬은 젓가락이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말랑말랑하게 만든다.”물론 마음속으로는 흉을 보면서 겉으로만
칭찬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칭찬거리를 찾다보면 결국 그 사람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그럴 때 진심으로 전교하려는 열의도
생깁니다.
⑤겸손은 유일한 밑천
“전교한다는 사람이 뭐 그렇게 거만해? 맨 날 자기 잘사는 얘기만
하고…” 전교를 하다보면 ‘당신이나 잘하세요’라는 눈길을 주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상대에게는 자세를 더 낮추는 것이
방법입니다.
⑥성격과 기질을 알자.
막무가내식 돌진이 예상외의 결과를 내기도 하지만 상대를 알고
접근하는 것이 한결 효과적입니다. “사람들이 일단 예수님을 믿을
때는 자신의 성격이나 기질대로 믿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파악하면
좋습니다.‘뜨겁게 믿을 사람’을 위해서는 소리 내어 기도해주는 등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꼼꼼하고 합리적인 사람에게는 사실적으로
접근하는 등 전략을 세웁니다.
⑦교회와 상호 협력하라.
대상자를 교회에 자리 잡도록 도와주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신앙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례에 참여하고
신심단체를 소개해 주고 활동의 모습도 보여주어야 합니다. 혼자보다는
함께입니다.
⑧전교자는 곧 그리스도의 거울
그리스도인이 모두 ‘성인’(聖人)이 될 수는 없지만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눈에 그리스도인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비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전교하는 사람이 푸념을 늘어놓거나 다른 이의 흉만
본다면 복음이 전해질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니 너무 좋습니다.”
를 반복하며 자신의 긍정적인 가치관과 변화된 삶을 먼저 제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⑨내가 먼저 성령을 체험해야
전교를 왜 하는지 모르고 신앙에도 확신이 없는 사람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입니다. 전교에 있어 어떤 노하우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복음을 통해 거듭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성령을 꼭 체험하겠다는 열정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그때는 삶 자체가
전교가 됩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성령이 담긴 그릇’이 되도록 기도와
말씀 읽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미사 참례하여 자주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⑩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라.
나는 물론 “대상자가 천국의 생명책에 기록되게 하겠다.”고 결심하고
전교하려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끊임없이 관심을 가진다면 그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한 채 남겨지는 것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전교에 나서면 중도 포기란 있을 수 없고 실패도 없습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마십시오.
공지사항 한 가지 말씀드립니다. 신학생 모임과 직원 연수로 인해
2박 3일 동안 자리를 비웁니다. 10월에는 자주 자리를 비워서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왜냐하면 다음 주에도 또 자리를
비우거든요. 아무튼 새벽님들의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라면서
잘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의 새벽 묵상 글 시작합니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잠재능력의 10퍼센트만 쓸 수 있다면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답니다. 그리고 7퍼센트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다면
위대한 역사적 인물이 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이 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잠재능력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나는 못해. 나는 재주가 없어. 이것이 나의 한계야.’ 등등의 말로서 자신의
한계를 만들어 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잠재능력의 1퍼센트도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네요.
여러분은 자신의 잠재력을 어느 정도 활용하고 계십니까? 혹시 자신의
잠재능력 1퍼센트도 활용하지 못하는 힘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은 더욱 더 그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그 능력을 발휘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언젠가 어떤 부모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애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해요. 어렸을 때에 천재 소리까지
들은 애라니까요.”
이 부모가 보기에는 자신의 자녀가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 공부만 열심히 하면 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자녀의
생각입니다. 제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신부님, 제가 제 몸은 제일 잘 알지요. 저는 아무리 공부를 해도 안돼요.”
누가 맞는 것일까요? 갓난아기 때부터 보아 온 부모의 생각이 맞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기 몸은 자신이 제일 안다고 스스로 말하는 자녀의 말이 맞을까요?
부모가 보는 것처럼 분명히 이 아이에게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안 된다고 말하면서 포기하는 이 아이의 모습에 부모는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우리 신앙인들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게 주님의 일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할
수 없다면서 가만히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전교주일을 맞이해서 어떻게 전교 활동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복음 말씀처럼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주님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우리들은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항상
남의 일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능력이 없어서 도저히 할 수
없다면서 발뺌을 빼지요. 특히 예수님께서 이 세상 안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명령인데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한계를 지어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보면서 주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시지 않을까요?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마십시오. 우리는 충분히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으며,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커다란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란 맛이나 돈, 장소의 호화로움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사람이
거기에 쏟은 애정에 의해 움직인다(요시모토 바나나).
어떤 분이 보내주신 옛날 사진. 23년 사진이네요. 옛날 모습 보니
반갑네요.
행복하세요.
언젠가 순간적으로 발목을 겹질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겹질린 것을
대단한 것처럼 생각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전에 골절상을 심하게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의 상황은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됩니다.
실제로 큰 수술의 경험이 있는 분들은 웬만한 고통을 잘 이겨낸다고
합니다. 지금의 고통이 예전에 수술 받았을 때의 고통과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내가 겪고 있는 고통과 시련의 무게가 크더라도 그것이 바로
나를 불행하게 하는 조건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오히려 지금의 상황을
더욱 더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 희망을 버리는 것은 죄악이다.”
그 어렵고 힘든 순간 역시 주님께서 주신 시간이기 때문에 언제나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서도 감사하며
사는 삶, 가장 행복한 사람이고 주님께서도 기뻐하실 모습이 아닐까요?
그 모습을 쫓는 나를 만들어 보시길 바랍니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복음이란..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최고의 선교는 아름다운 당신의 삶입니다.'
2013년 아해 10월20일 전교주일 복음묵상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마태오19,20)
---
원론적인 이야기를 해야만 할 것 같다.
복음이란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게 된 기쁜 소식을 말한다.
우리가 어디서 왔고, 삶의 의미가 무엇이고,
삶과 죽음의 경계와 그 경계를 넘어선 세계는 무엇이고,
하느님은 어떤 분이시고, 우리는 누구이고,
하여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이냐에 대한 답을 담은 기쁜 소식이다.
그리고 복음화란 바로 이 기쁜 소식이 몸과 마음에 물드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으로 나아가 기쁜 소식을 전하라 하신다.
결국, 복음화는 복음을 전해야 할 이들이 먼저 복음화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내가 그 기쁨의 의미를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기쁨을 남에게
전할 수 있겠는가?
오늘은 전교 주일이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가 전세계적으로 봉헌되는 날이다.
일명 전교주일이라고도 한다.
잊어서는 안 된다.
전교주일의 의미나 목적은 많은 사람들을 세례 받게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많은 이들이 세례성사에 참여하고 함께 신앙을 고백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바랄 일이 있겠는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함께 떠올려보고, 복음화의
참된 의미에 대해 서로 나누고, 그 복음화를 위한 우리의 자세나 태도가
무엇인지 재확인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그 어느 것에도 양보할 수 없는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면, 그리고 그 기쁜 소식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복음화된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우리 안에서 반드시 그리스도의
향기가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것이다.
그렇다.
복음화를 위해서 우리가 먼저 복음화가 되는 수밖에는 없다.
교회가 복음화되어야 하고, 그 구성원들이 복음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엉터리 예수님을 전하지 않고, 엉터리 삶을 가르치지 않고,
엉터리 사랑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화는 나팔을 불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지금의 교회가 있기까지 셀 수 없는 거룩한 영혼들이 흘린 순교의 피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수많은 맑은 영혼들이 보여준 모범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진정한 복음화는 복음을 전해야 할 이들이 먼저 복음을 살고자 하는
진정성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기타] 선교..
2013년 다해 10월20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 주일)
우리가 할 수 있는 선교에 대해서 생각해 보다가 몇 가지 떠오른 것이
있습니다. 이런 걸 잘 해 보면 좋을 거 같다.. 는 생각이 들어서 적어
봅니다.
첫 번째는 인사하는 겁니다. 지난 번에 어떤 형제 자매님이 강화도에
가서 미사를 하시고 좋은 느낌을 받으셨던 거 같습니다. 왜 그런가 하고
물어보았더니 거기에 있는 신자들이 낯선 자기들에게 모두 인사를 건네
오셨다는 겁니다. 봉사하는 분이나 사목회 분들이 조금 적극성을 가지고
인사한 거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라 거의 모든 신자들이 인사를 건네
온 거 같습니다.
원래 강화도 사람이 인사를 그렇게 잘 할까요? 아닐 거란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강화도 보다는 우리 섬사람이 인사를 더 잘하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여기는 작은 섬이라 누가 인사를 안 하면 금방 안 좋은 소문이
나거든요.
그런데 본당에서 보면 낯선 손님들이 왔을 때 먼저 인사하는 신자들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수줍어서 그러는지, 아니면 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러시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멀뚱히 계시지 말고
인사하는 게 몸에 배일 수 있도록 노력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별 거
아닌 거 같지만 그 작은 일이 좋은 느낌과 관계를 만들어 주리라
생각합니다.
작년에 옆 섬에 캠프를 온 본당에서 저에게 미사를 부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인 펜션에 갔었는데 제 복장이 신부인지
잘 모를 그런 복장이었습니다. 당연히 아이들이 지나가는 아저씨인 줄
알고 인사를 안 하겠지.. 하고 복도를 지나가는데 어느 남학생 아이가
인사를 하는 겁니다. 본당에서 여름 캠프 손님들을 한 달 내내 맞이해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그 아이를 보면서 참 기특하다는 생각도 들고, 그
본당 전체에게도 좋은 감정을 가졌던 적이 있는데요. 우리도 본당에 온
이들에게 그런 좋은 느낌을 주고, 관계를 시작할 수 있는 인사를 건네
봅시다.
두 번째로 마을 안에 골칫거리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봅시다. 예전에
시골 교회들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취재한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거기 보니 시골 교회지만 활기차고 꾸준히 신자가 늘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요. 왜 그랬을까요? 그들 대부분이 마을의
문제를 내 문제로 여기고 관심을 가졌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예를 들어 교육의 기회가 부족한 듯 하면 공부방을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만들어 주고, 어르신들에게 한글교실을 열기도 합니다.
또 마을에 소를 키우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 분뇨가 골칫거리인 어느
마을에서는 그걸 가지고 연료를 만드는 일을 해서 마을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있더라고요.
또 어떤 교회에서는 수입의 삼분의 일을 무조건 마을 위해서 쓰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연탄을 나누어 주기도 하고, 고쳐주기도
하고, 보태어 주기도 했는데요. 그 교회에 새 신자들과 젊은 일꾼들이
가장 많이 모였던 거 같습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 선교하기 위해서
마을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겠다.. 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우리 마을에는 어떤 골칫거리들이 있나요? 어떤 부족함이 있나요? 관심
없으신가요? 주님의 말씀대로 선교의 사명을 잘 수행해 내기 위해서는
그 일이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한 번 찾아봅시다.
세 번째는 가까운 이들과의 관계 안에서 복음적인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이웃입니다.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신자의
이야기인데 자기 옆집에 이사 온 사람이 청소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나
봅니다. 마당이 늘 어지럽혀져 있었고, 화단에는 잡풀이 무성하고, 나무들은
관리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그걸 보고 매일 화가 났죠. 그 사람이 지저분하게
해 놓으니 쓰레기도 날라오고 보기도 안 좋고 해서 청소 좀 하라고 이야기를
한 거 같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더러웠는데요.
알고보니 사연이 있었습니다. 최근에 배우자와 흙탕물 싸움 끝에 이혼을
하게 되었고, 먹고 살기 위해 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먹고 살기에 바빠서 정리하고 청소할 겨를도 없었던 겁니다. 사연을 알게
된 그는 어느 날 사람들을 모아 옆 집 마당을 정리해 주었고, 그 일이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던 거 같습니다. 입주자들의 모임에서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너무 따뜻하고 감사하다..’ 는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는 옆집의 문제를 문제로만 보지 않고 어떤 선행의 기회로 삼았던 거
같은데요. 우리는 옆 집 사람을 볼 때 어떤가요? 저 집은 너무 시끄러워..
저 집은 불친절해.. 저 집은 너무 이기적이야.. 하면서 불평. 불만만
늘어놓지는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복음적인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러한 문제가 선행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고, 그 일이 작은 선교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가까운 이웃을 향한 복음적인 마음을 잃지 않는 게 필요할 거
같고요. 더 가까운 사람.. 가족에 대한 마음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약에 보면 바오로 사도가 나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다가 어느
날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는데요. 부르심이 있던 날 그는 앞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며칠 동안 그렇게 있었는데요. 예수님께서는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부르시어 바오로에게 다가가 기도해 주라고 하십니다. 아나니아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그에게 기도라니.. 이해할
수 없었을 겁니다. 어쩌면 겁이 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는 바오로에게
다가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그에게 ‘형제여...’ 하고 부르며 기도해
줍니다. 아나니아가 주님의 말씀대로 그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대한
선교사가 나올 수 있었던 거 같은데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아나니아와 같은 역할을 맡기실 때가 있습니다.
말 안 듣는 아이들과 구제불능에 큰 상처까지 주는 배우자.. 그분들에게
아나니아와 같이 다가가 기도하고 힘이 되어주길 하느님께서는 바라십니다.
그 일이 복음이 되어 그들의 마음에 스며들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선교의 삶을 살아볼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갑곳 성지에 ‘천국으로 가는 길’이 있다.
그날 순교자 현양 대회 미사를 마치고 우르르 나가는데 신자들은 그
천국으로 가는 길로 몰려 들어가는데 신부님들은 좀 한가한 다른 길로
대부분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옆에 있던 신부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신부님들은 천국에 가기 싫으신가 봐요~”^^;
- 밤송이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정체성과 선교
2013년 다해 10월20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주일)
<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 >
복음 : 마태오 28,16-20
< 정체성과 선교 >
2006년 나와서 큰 히트를 쳤던 ‘미녀는 괴로워’란 영화를 보셨을 것입니다.
너무나 뚱뚱하고 예쁘지 않은 ‘강한나’란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는 외모
때문에 사랑도 못해보고 무대 뒤에서 가수 대신으로 노래를 불러주는
얼굴 없는 여자가수입니다. 그녀는 감독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감독은
그를 이용합니다. 둘이 함께 있을 때 우연히 한나의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한나의 아버지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를
외면합니다. 모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좋아하던
감독에게 이용당한 것을 우연히 알게 되어, 그녀는 죽음을 각오한
성형수술로 예뻐지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진짜 고통은 그 때부터 시작됩니다. 가수가 되어 인기도 올라가고
감독의 사랑도 받게 되었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유명해진 ‘제니’는
사람들 앞에서 정신병이 있는 아버지를 나 몰라라 해야 하고, 친구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은 강한나인데 감독이 좋아하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제니란 이름의 가수인 것입니다. 한나는 감독이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그런데 첫 콘서트 때 한나의 아빠가 또 사람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봅니다.
더 이상 아빠를 외면할 수 없었던 한나는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
“전 제니가 아니에요. 저는 한나에요, 강한나. 강한나는 되게 못생기고
뚱뚱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저 뒤에서 다른 사람의 노래를 대신
불러주곤 했어요. 그래서 저 수술했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그렇게
해서 이뻐지니까, 이렇게 노래도 하고 사랑도 해보고 제니가 돼서 정말
행복했었는데. 근데 미안해요. 내가 망쳐버렸어요. 내 친구도 버렸구요.
아빠도 버렸구요. 나도 버렸어요. 지금은 진짜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나, 하나도요. 강한나, 보고싶다.”
그러면서 정말 보잘 것 없이 되어버린 아빠를 품에 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것입니다. 정체성은 나의 원천을 찾음으로써 세워집니다.
이제 사람들은 제니를 잊고 강한나를 사랑해줍니다. 물론 감독도 강한나를
더 사랑하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 명확히 알아야 사랑할 수도 사랑받을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정신분석가 에릭 에릭슨(Erick Erickson)은 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한 사람은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합니다. ‘나’가 확실해야
‘너’가 확실해지고 ‘나와 너’가 확실해야 두 사람 사이에 인간관계가
이루어지고 친밀한 관계도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가 애매하면
상대방과의 관계도 애매해지는 것입니다.
이무석 교수가 군의관으로 있을 때 자해를 하는 한 청년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는 툭하면 면도칼 같은 것으로 자신의 배를 그었는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문득 어두운 우주에 혼자 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너무 두려워서 면도칼로 배를 그어요. 통증이 오고 새빨간 피가
팍 솟으면 그 순간에 마음이 진정돼요.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오면서요.”
정체성이 온전히 성립되지 못한 사람은 이렇게 우주공간에 홀로 떠 있는
듯한 느낌, 죽은 건지 살아있는 건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너무 힘들어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인도에서 동물에게 키워진 늑대인간 아이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늑대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부모가 늑대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정체성을 지닌 아이들을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몇 년 새에 둘 다 죽어버렸습니다. 늑대가 인간과의
통교를 강요받는 상황에서 오는 정체성의 갈등을 견뎌 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자해를 하는 것도 내가 사람임을 확인하려는 노력입니다. 그러나
내가 진정 사람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제니가 한 것처럼 자신의 부모님을
받아들여야합니다. 자신의 원천을 인정하지 않으면 영원히 정체성의 방황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동물이 자신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면, 육체적으로만 살아갈 것이고 그러면
세상에서 짐승 취급을 받습니다. 부모님을 인정하면 비로소 인간이 되지만,
이 사람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정하는 사람들과는 같은 수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고, 우리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이는 인간 수준에서 관계 맺자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오셨듯이, 우리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관계 맺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요즘 개봉한 ‘그래비티(중력)’란 영화가 있습니다. 딸을 잃은 아픔으로
지구에서 아무 의미도 없이 살아오던 주인공, 그 여인은 공기도 없고
중력도 없는 지구 밖 세상에서 사고로 인하여 우주미아가 되어 우주
속으로 사라져갑니다. 이것이 지구에 살고 있더라도 아무 의미 없이 누구
한 사람과도 친밀한 관계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 때 한
사람이 목숨을 걸고 그를 도우러 옵니다. 물론 그녀를 돕다가 그는 죽고
맙니다. 그러나 적어도 참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죽어서도 그녀의
꿈에 나타나 끝까지 포기하지 말도록 힘을 줍니다. 결국 그녀는 온 힘을
다하여 지구로 돌아오게 되고, 그 때 처음 딛는 발걸음은 예전의 무의미한
걸음이 아닙니다. 비로소 중력을 느끼고 발이 땅에 닿는 기쁨을 느낍니다.
그리고 땅에 키스를 하며, ‘고맙습니다.’라고 합니다.
나의 근원이 지구입니다. 지구를 떠나서는 참 내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가끔은 부정하고 싶기도 하지만 나의 원천인 하느님과 부모를 인정하지
않으면 누구와도 온전히 관계 맺을 수 없는 무중력 상태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제니가 정신병을 앓고 있는 부끄러운 아버지를 끌어안을 때 비로소 온전한
강한나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끌림을 받아들임이 곧 중력이고,
그 중력을 벗어나서는 어떤 온전한 관계도 맺고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무중력 상태에서도 어떤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줄 알았던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비록 무중력 상태에 있지만 실제는
뿌리가 확실한 사람이고, 그 사람만이 누군가를 다시 하느님 품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한 사람의 삶의 이유를
가르쳐 준 것이고, 이것이 곧 선교인 것입니다.
따라서 선교란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구인지 온전히 밝히기 위해서는 나의 원천을 부정하지 말아야합니다.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육신을 받고, 영혼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제니가 자신의 아버지를
인정하고 사람들 앞에서 끌어안을 때 비로소 강한나의 정체성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이 누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안다고 해야 온전한
내가 되는 것인데, 그 과정이 바로 선교인 것입니다. 즉 선교하지 않으면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선교왕이 두 분 계십니다. 한 분은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한 뒤
항상 성호를 긋고 식사전후 기도를 잘 하십니다. 그분은 그것만 제대로
해도 많은 이들에게 선교를 할 수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한 분은 옷가게를 운영하시는데 들어오는 손님 누구에게나 ‘찬미예수님!’
으로 인사한다고 합니다. 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그분들이 성당에 대해
물어보고 그렇게 입교시키는 분이 일 년에 적으면 10명, 많으면 30명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묵주반지를 끼고 경기에 출전했던 김연아 선수나, 자신이 성당
다니는 것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김태희, 또 오진혁과 기보배 양궁 커플
들. 이들은 밖에 나가 선교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두고 있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드러낼 뿐입니다.
이것이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고, 이것이 곧 선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부끄럽게 여기면, 당신도 하느님
앞에서 그를 부끄럽게 여기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은 아직도 내 뿌리를 온전히 내리지
못한 무중력 상태에 있는 불편한 두려움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선교는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하느님을 나의 원천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곧 선교입니다. 그분으로부터 와서 그분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명확히
아는 사람임을 떳떳이 드러내는 것이 선교인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곧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전교주일
2013년 다해 10월20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마카오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 최방제 신학생께서 공부를 하신 곳입니다. 마카오에는
파리 외방 전교회의 지부가 있었습니다. 많은 신부님들이 이곳에서
말을 배웠고 아시아를 향해 선교의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려는 이들의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입니다. ‘복음화’란 무엇일까요? 모든
사람들이 세례를 받아서 신자가 되는 것일까요? 모든 사람들이
성당에 나오는 것일까요? 물론 모든 사람들이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되고, 성당에 나오는 것이 ‘복음화’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음화란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루가 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5장에서 무엇이 참된 행복인지를
말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에 앞서 참된 복음화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확신을 갖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이는
낚시하는 사람들의 자세와 비슷하기도 합니다.
첫째는, 밑밥을 꾸준히 주어야 합니다. 밑밥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고기들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교를 할 때도 비슷합니다.
상대방을 위해서 기도의 밑밥을 주어야 합니다. 나눔의 밑밥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닫혀있던 상대방의 마음이 열리게 됩니다.
예전에 체험사례를 발표하셨던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매님은 아직 신앙을 갖지 않았던 새댁에게 자주 찾아가서 살림살이의
요령을 알려주고, 바쁘면 시장에 가서 장을 봐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꾸준하게 도움을 주니까, 결국 새댁은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둘째는, 같은 장소에 ‘찌’를 던져야 합니다. 밑밥이 쌓인 곳에 정확하게
찌를 던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손맛’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선교를 할
때도 비슷합니다. 선교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꾸준히 해야
합니다. 조금 선교를 하다가, 어려우면 포기해서는 선교를 잘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용산 성당에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형제님은
냉담하는 분들의 주소를 찾았습니다. 매 주일 주보를 보내고, 이사를
가신 분들은 이사 간 주소로 주보를 보냈습니다. 결국 그분의 노력으로
냉담 중인 많은 분들이 다시 신앙을 찾았습니다.
셋째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밤을 새워도 고기를 잡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그물을 던졌지만 밤새 한 마리도 못 잡았던
적이 있습니다. 찌를 바라보면서 끈기 있게 기다리면 찌가 높이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꾸준히 인내를 가지고 선교를 하면,
결코 마음을 열 것 같지 않았던 사람들도 성당에 나오는 것을 봅니다.
제가 알던 화양동 성당의 자매님은 결혼 생활 17년 동안 시부모님과
남편을 극진하게 섬겼다고 합니다. 신앙을 갖지 않았던 남편이 결혼
17주년 선물로 가져 온 것은 ‘예비자 교리 신청서’였다고 합니다.
남편은 극진한 마음으로 시부모님과 남편을 섬기고 자녀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아내가 고마웠고, 아내가 가장 좋아할 것 같은 선물은 같은
신앙을 갖는 것이라고 하면서 ‘예비자 교리 신청서’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자매님은 남편의 말을 듣고 하느님께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천년도 주님의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다고 합니다.
우리가 충실하게 살면, 언젠가는 축복이 찾아 올 것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 이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응답을 합니다. ‘또한 사제와 함께!’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들과 함께 계셨는지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 장애인, 죄인,
이방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은 주님께 대접을 할 것도 별로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들에게 보답을 받으신 것도 없었습니다.
사제들도 바로 주님께서 함께 했던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
신자들도 바로 주님께서 함께 했던 사람들과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민족들의 복음화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책임있는 말씀 또한 멋지십니다.
2013년 다해 10월18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주일)
책임있는 말씀 또한 멋지십니다.
돈으로 연결된 회사의 조직, 권력이나 힘으로 맺어진 조직 등 많습니다.
선생 교수 교사와 학생들과의 배움 관계로 이뤄진 시한부 조직도 있고요.
인간들이 조직하고 꾸며온 모든 관계는 세상살이에 사족이 아닐까요?
인간관계로 엮어진 이 세상의 삶이 오염 독주 다툼 장으로 변해 갑니다.
하느님관계로 사람들을 엮어 인생을 재생하라는 주님의 말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뒤를 끝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책임 있는 말씀 또한 멋지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오 28,19~20)'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