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수(徐浩修, 1736년∼1799년) 천문학자
서호수(徐浩修, 1736년∼1799년)는 조선 후기의 천문학자이자 실학자이다. 본관은 대구, 호는 학산(鶴山)이다. 《임원경제지》를 지은 서유구의 아버지이며, 서명응의 아들이다. 정조의 신임을 받아 임종할 때까지 왕의 측근으로 활약하였고 규장각의 설립에도 관여하였다.
정조가 즉위한 1776년 음력 9월 24일 청나라의 사신 중 부사로 임명되었다. 이때,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 황인점(黃仁點)과 서장관(書狀官) 김이희(金履禧)가 일행이었다.
세종대왕이 조선 전기 과학기술 문화의 부흥을 이끌었다면 조선 후기의 과학기술 부흥기는 영·정조 때였다. 이 두 시기는 과학 부흥기를 맞았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성격적인 면에서는 약간의 차이를 지닌다.
세종 때는 주로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체적인 과학기술 문화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영·정조 때에는 중국에 유입된 서양 과학을 적극 수용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조선 전기 때는 주로 성리학 관련서 위주의 책이 중국으로부터 수입되고 편찬된 반면 조선 후기에는 서구의 과학기술서 및 천주교 서적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들이 유입돼 지식인들을 자극했다.
조선 후기 때 서지학자로서 각종 서적을 중국으로부터 유입해 편찬하는 한편 천문역산 프로젝트 대부분을 맡아서 수행한 대표적인 과학자 중 한 명이 바로 서호수이다. 그는 정부의 공식적인 천문역산학을 정리하고, 중국을 통해서 들어온 서양의 수학 및 천문학 이론을 연구 검토함으로써 조선 후기 천문역산의 기반을 탄탄하게 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서호수는 1736년(영조 12) 9월 25일 북학파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서명응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인 서명응은 영조 때 왕세손을 교육을 담당하면서 맺은 인연으로 정조 즉위 후 규장각 설립에 깊숙이 관여했을 뿐 아니라 규장각에서 이루어진 대부분을 편찬 사업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이다.
서호수의 가문은 부친 서명응과 아들 서유구 등 3대에 걸쳐 과학과 농학 등의 서적 편찬을 비롯한 학문적 업적을 공유한 과학기술자 집안이다.
학문에 있어서 개방적이고 실증적인 자세를 보인 소론계의 명문이었던 서명응은 수리 및 천문, 농학, 악률, 행정제도를 포괄하는 학자였으며, 평안감사로 재직할 때는 구리로 만든 활자인 임진자와 정유자를 주조하는 일을 주관하기도 했다.
서호수는 한산 이씨와 결혼하여 4남 2녀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이 바로 ‘임원경제지’를 편찬해 농학에 큰 업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 서유구이다. 이처럼 서호수의 가문은 부친 서명응과 아들 서유구 등 3대에 걸쳐 과학과 농학 등의 서적 편찬을 비롯한 학문적 업적을 공유한 과학기술자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동국문헌비고 상위고’ 집필 맡아
1765년(영조 41)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함으로써 본격적인 관직생활을 시작한 서호수는 1770년 채제공, 홍봉한, 서명응 등과 함께 ‘동국문헌비고’의 편찬에 참여했다. 동국문헌비고는 지금도 널리 애용되는 조선시대 최고의 백과사전으로서, 조선의 정치·경제·문화 등 각종 제도와 문물을 분류, 정리한 책이다.
서호수는 동국문헌비고를 편찬할 때 천문학 분야의 ‘상위고’ 집필을 맡았는데, 그는 이 책에 고대 이래 조선에서의 역상의 연혁, 우주의 형체와 구조에 대한 역대 이론들, 천체 운행에 대한 천문학 이론, 중요한 천문학의 상수들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1798년에는 정조의 명에 따라 ‘해동농서’를 지어 올렸다. 그는 이 책에서 중국과 우리나라는 기후, 풍토, 관습이 다르므로 중국 농업기술을 수용해 우리 농업을 개량하려면 우리에게 적합한 것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농사에 있어서 관개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수차의 제조 보급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해동농서’의 수리편에서는 정밀 기하학에 기반을 둔 수리 기술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는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진하겸사은부사로 청나라 연경(지금의 북경)에 다녀왔으며, 1790년에도 청나라 건륭제의 팔순을 축하하기 위해 다시 진하겸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두 번째의 연행에서 기존 경로와 달리 새로운 경로로 연경에 도착했는데, 그 과정에서 몽골 지역을 거쳐 열하를 방문했다.
조선의 230여 년 연경행 역사 중 열하를 다녀온 것은 1780년과 1790년의 단 두 번뿐이다. 열하란 지금 중국 허베이성 북부 러허강 서쪽 기슭에 있는 도시인 청더의 옛 지명으로서,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장이 있던 곳이다.
박지원은 1780년 열하를 다녀온 후 ‘열하일기’를 저술했으며, 서호수는 1790년 열하를 다녀온 후 ‘열하기유’라는 저서를 남겼다. ‘열하기유’는 ‘연행기’라는 제목의 이본이 존재한다. 당시 서학에 대한 수준이 높았던 학자가 남긴 연행록인 ‘열하기유’에는 서호수의 청나라 및 주변국에 대한 냉철한 시각이 나타나 있는 게 특징이다.
조선 후기 천문역산 프로젝트 총괄
관상감 제조로서 정조 시대의 천문역산 활동을 총괄했던 서호수는 1777년 혼천의 중수를, 1789년에는 국가 표준 시간체제 정비를 주도했다. 또한 1791년에는 측우기를 통한 강우량 측정 및 보고를 정식화하는 등 강화했다. 그리고 정밀지도를 바탕으로 전국 주요 도시의 위도를 계산함으로써, 전국의 밤낮 시각과 절기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게 했다.
1796년에는 조선시대 천문역산학의 역사를 기술한 ‘국조역상고’를 편찬했다. 서호수가 당시의 대표적 천문학자였던 성주덕, 김영 등과 함께 지은 이 책은 총 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은 천문학의 역사, 위도 계산, 낮밤의 시각, 일식의 계산, 2권은 서울을 기준으로 한 전국의 동서 편도 및 월식 계산법, 3권은 천문기구의 발달사, 4권은 물시계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천문역산 분야의 총서인 ‘율력연원’을 구성하는 세 문헌인 ‘역상고성’, ‘수리정온’, ‘율려정의’에 대한 설명서들도 모두 서호수가 집필했다. 그가 펴낸 이 같은 서적에 의해 조선의 천문역산가들은 당시의 최신 천문역산 이론들을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1776년 경모궁악기조성청의 설립을 임금께 청원하여 악기도감제조에 신득린, 임성주를 임명하는 등 경모궁에서 사용할 여러 악기 제작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런데 서호수는 부친인 서명응의 다양한 학문적 스펙트럼을 이어받아 발전시키기도 했지만, 천문역산에 대한 학문관에서는 부친과 견해를 약간 달리했다.
서명응의 학문적 바탕은 기본적으로 ‘선천역(先天易)’에 기반해 있다. 즉, 그는 서학이 고대 중국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서양으로부터 중국에 유입된 천체운행의 계산은 고대 중국의 천문산술서를 위주로 했으며, 서양의 역법 역시 중국의 고대 역법이 서양에 전해진 것이라고 보았던 것.
그러나 서호수는 열하 방문 당시 중국의 대학자 옹방강을 만난 자리에서 서양의 새 역법이 옛날 중국의 역법보다 우월하다면서, 서양 역법은 높이 평가한 반면 중국 역법은 낮게 평가했다. 서호수의 이 같은 학문적 사상은 그의 활약으로 인해 18세기 말경 조선의 천문역산이 크게 발전해 중국에의 의존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는 64세이던 1799년 1월 10일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