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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10월27일 연중 제30주일
[수원] 겸손은 포용력이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집회 35, 15ㄴ - 17. 20 22ㄴ
† 제2독서 : 2티모 4, 6 - 8. 16 - 18
† 복음 : 루카 18, 9 - 14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30주일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고 판단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보십니다(1사무 16,7 참조). 그래서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능력, 재산, 신분 등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과 달리, 오늘
복음처럼 예수님께서는 내면의 겸손을 강조하십니다. 10월의 마지막 주일
미사를 봉헌하며 하느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겸손한지 돌아봅시다.
★ 세상은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처럼 보잘것없는 이들을 차별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의로우신 심판자로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그의 겸손과
의로움을 보신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재판을 받으며 변론해야 할 때 아무도 자신을 거들지 않고
저버렸지만 실망하지 않는다. 의로우신 하느님께서 자신을 끝까지 돌보아
주신다고 믿기 때문이다(제2독서).
★ 의롭다고 여겨지는 바리사이는 자신을 높이는 기도를 하였고, 죄인으로
취급되는 세리는 자신을 낮추는 기도를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사람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어떤 이를 의인으로 여기시는지 밝히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중국 춘추 시대 제나라의 유명한 재상 안영의 마부와 관련된 일화입니다.
이 마부는 마차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길을 비키고 예를 표하는 모습에
마치 자신이 재상이나 된 듯이 착각하며 말을 몰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부의 아내는 그러한 남편의 모습이 영 못마땅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주인은 키가 여섯 자도 못 되는 분이지만
제나라의 정승이 되어 이름이 천하에 높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항상
스스로 몸을 낮추고 계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키가 팔 척이나 되지만 남의
마차나 끄는 마부이면서도 스스로 우쭐하여 거만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과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마부는 곧바로 아내에게 백배사죄하고 다시는 거만을 떨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마부의 태도가 달라진 것을 안 재상 안영이 그 까닭을 마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마부는 아내의 따끔한 충고에 따른 것이라 이야기하였고,
재상은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큰 벼슬을 주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재상은,
아내의 말에 공감하고 겸손하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마부의 품성을
보고 벼슬을 내렸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두 사람의 기도 내용이 나옵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을 높이는
기도를 한 반면, 세리는 자신을 낮추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곧 바리사이는
자신의 눈으로만 자신을 바라보았기에 잘난 것만 생각났던 것이고, 세리는
하느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기에 부족한 면을 생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을 자신의 눈으로만 바라보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들의 말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주님을 첫자리에 모셔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성모성당 신부님
2013년 다해 10월27일 연중 제30주일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루카 18,9-14
주님을 첫 자리에 모셔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늘 행복하시기
빕니다.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가 대조적으로 나타나는데 주님께서
무엇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당시의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경건주의자들이었습니다.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나라를 걱정하면서 자기들이 식민지 생활을
하는 것은 하느님의 듯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 스스로 엄격하게 율법과 그 해설 조문을 지켰고
이들의 열심한 삶은 사람들에게 모범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반면 세리는 로마에 빌붙어 관직을 유지하고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그들에게 상납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동족을
착취하여 부를 쌓고 반역자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일제강점기에 친일파나 다름없었습니다. 당시의 세리는 하느님보다
돈을 더 소중히 여기는 세속인의 대표 격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세리들 보다는 바리사이들이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훨씬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반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예수님의 판결은 가히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18,14).
예수님께서는 왜 당시의 상식을 뒤집어 놓는 판결을 내리셨을까요?
바리사이의 기도를 보면,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18,11-12).하고 기도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기도를 하면서도 자기 자랑에, 남을 무시하고 판단하며
자기를 내세웠습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자기만 옳은 줄 믿는 것은
무지에서 나오는 과오입니다. 남을 업신여기는 것은 교만에서 나오는
범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보고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마태5,27)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남을 업신여길
자격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의인이다.’ ‘불의한 사람이다’
판단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중심, 속마음을 보십니다. 자기를 높이면
남들이 낮아지고, 낮아진 사람들이 또한 그를 또한 끌어내립니다.
자기를 낮추면 남들이 높아지고 높아진 사람들이 그를 더욱 높여
줍니다. 주는 대로 받는 것이 세상의 어김없는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기도를 하고 미사참례를 하며, 봉사를 한다고 해도
남을 무시한다면, 흉보고, 험담하며 남을 깎아 내려야 자기가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한 아무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허영과 자만이 모든 것을
파괴하고 맙니다. 그야말로 ‘잘난 사람이 잘난 척’하면 그야말로
밥맛입니다. 자기만 의인인척 교만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못난 사람이 잘난척하는 것도 꼴불견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어디가 아픕니까? 배가 아프죠. 배가 아파 괴로워하고만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더 넓은 땅을 사야죠. 더 큰 노력과 정성으로 땅을
살 생각은 않고 상대를 흔들어 떨어뜨리려 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입니다.
존 포엘신부는 말합니다.“힘써 조심할 일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
특히 남보다 낫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은 들어오기가 무섭게 끊어
버려야지 머물게 하거나 입 밖에 내기만 하면 페스트나 마찬가지요,
무서운 독입니다.”교만은 인간을 눈멀게 합니다. 무엇인가를 할 때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 되는 줄 믿습니다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 알베리오네).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먼저 하느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고
주신 것을 가지고 인간이 활용하고 관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향해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루카18,13)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알았습니다. 자기 민족에게 따돌림
받고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은 죄를 지어버렸다는 것을! 이제는
무조건 용서를 빌고 은총을 간구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마음을 귀하게 여기시고 세리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1독서의 말씀처럼 “겸손한 사람의 기도가
구름을 꿰뚫고 하느님께 전달된 것입니다”(집회35,21).
하느님 앞에 겸손의 마음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교만은 버림받은 자의 표시이고,
겸손은 선택된 사람의 표시입니다”(성 그레고리오).“교만은 천사를 악마로
만들었으나 겸손은 인간을 천사로 만들었습니다.”“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하느님을 자랑”(성 아우구스티노).해야 하겠습니다.
내 자랑하지 말고 하느님을 첫 자리에 모셔야 하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남을 인정하고 칭찬하며 상대를 높여주는 삶을 통해 기뻐하고
주님께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누가 보내준 글입니다.
어느 날 묵주에 달린 예수님들이 한자리에 모이셨답니다.
그런데 묵주에 달린 예수님들의 모습과 표정과 건강상태는 다
달라 보였습니다.
한 예수님은 늘 차에 매달려 있어 멀미로 얼굴이 노랗고 어지럼증에
시달려 괴로워하고 계셨고, 또 한 예수님은 주머니 속에 갇혀있어
오랫동안 먼지와 함께 있다. 보니 편도선과 가래로 고생하고 계셨고,
또 다른 예수님은 묵주 통에 긴 시간 담겨 있어서 온 몸이 녹슬어
계셨습니다.
또 한 예수님은 서랍 속에 다른 물건과 엉켜있는 바람에 제대로 몸을
움직이질 못해 근육마비로 고생하고 계셨습니다.
심지어 어떤 예수님은 팅팅 불어 계셨는데 그 예수님은 주머니 속에
담긴 채 세탁기에 돌려져 온 몸이 불으신 것 입니다.
그런데 한 예수님은 얼굴이 뭉그러져 형상조차 알 수 없는데도 왠지
모를 빛을 발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궁금하여 물었더니 이
예수님은 어느 할머니의 묵주로 늘 매일같이 아주 열심히 기도
하시면서 예수님의 얼굴을 하도 매만지는 바람에 얼굴이 다 닳아
형태가 없어졌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이 묵주의 예수님은 너무도 행복해 하고 계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묵주에 계신 예수님은 어떤 모습 입니까?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자기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얼마 전에 전철을 탔다가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아이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의 활기찬 모습을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무척이나
예쁘고 귀여웠습니다. 그러다보니 계속해서 이 아이들을 향해서
눈길이 갔고,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하는 말이 제 귀에도 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말끝마다 계속해서 욕이
들어갑니다. 저렇게 예쁘고 귀여운 얼굴에서 듣기 거북한 욕이
나온다는 사실이 오히려 신기할 따름이었지요.
솔직히 욕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그래서 엔도르핀이 마구 솟아나는
사람이 있을까요? 좋은 욕이란 있을 수가 없지요. 아무리 친구들 사이에
허물이 없어서 욕을 한다고 해도, 그 욕을 통해 더 가까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일부러 센 척 보이려고 욕을 한다고 하지만, 그 모습이 결코
멋져 보이지도 또 아름답게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존경받고 사랑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힘 센
사람이 아닙니다. 또 돈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그리고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자신도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자기보다 남을 배려하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 사람들 위에 설 수 있는
지위를 가지고서도 오히려 자신을 낮춰서 어렵고 힘든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람 등등이 이 세상 안에서 존경받고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좋아하실까요? 남보다 자기를 먼저
사랑하는 사람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자기 과시에만 급급한 사람 역시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사람도
당연히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사랑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더더구나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진정으로 좋아하고 따뜻하게 받아주는 사람은 앞서 우리들이
존경하고 사랑받는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잘
알면서도 늘 내 자신만을 바라보기에 당연히 주님께서 싫어하는 모습으로만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가 나옵니다. 바리사이는 자기
과시에만 급급하지요. 세리처럼 죄인도 아니고, 단식도 하고, 십일조도
바친다면서 이렇게 옳은 자기이니 많은 축복을 내려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앞에서 드러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내가 어떤 일을
한다고 한들 하느님의 사랑에 비교할 때 너무나도 초라한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러한 자기 과시의 기도가 아닌, 세리와 같이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칭하면서 겸손할 수 있는 즉,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낮추는 기도를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행복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상대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을 때, 서로 행복한 사회,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어
갈 것입니다.
고통은 끌어안아야 비로소 누그러드는 것이다(타네다 산토카).
수능이 얼마 남지 않다보니 이러한 상품도 나오는군요.
멀리 가려면(문요한, ‘문요한의 마음 청진기’ 중에서)
세상은 나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닙니다. 내가 아닌 너 그리고 우리가
있기 때문에 나도 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내가
아닌 누군가와의 연결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러주는 좋은 글을 발견해서
그대로 옮겨 봅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세계적인 건강식품 회사 ‘웨이트 와처스’ 창업자인 진 니데치는 어릴
때부터 과체중이었습니다. 살 빼려는 노력을 기울인 적 없던 그녀는
서른여덟 살에 몸무게가 96킬로그램에 달했습니다. 어느 날 오랜만에
마주친 이웃에게 “해산일이 언제인가요?”라는 말을 들은 그녀는 심한
모멸감을 느꼈지만, 누구를 미워할 게 아니라 자신의 탓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다이어트에 매달렸으나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그녀는 숱한 시행착오와 고민 끝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다이어트의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 이야기하며 이겨 나갈 수 있는 모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우선 여섯 명의 비만 친구를 모았습니다. 체중
조절을 위한 자조 모임이 만들어진 셈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면서 위로받았고, 경험을 공유하면서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찾았습니다. 온통 먹는 것에 집중했던 입에 ‘말하기’라는 새로운 재미를
선사한 것입니다.
모임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지지하고 함께 배우면서 점점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진 니데치는 회사까지
차렸습니다. 혼자 할 때는 너무 힘들어서 실패를 반복했던 일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할 때는 오래 하고,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었습니다.
유방암 수술 받은 여성들이 집단 치유 모임에 참가한 경우 비참가자들에
비해 생존 기간이 두 배가량 연장됩니다. 또한 미국의 알라메다 지역에
사는 7천여 명의 남녀를 9년간 조사한 결과, 인간관계나 공동체 유대가
결여된 사람들의 사망률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1.9~3.1배 더 높다고
발표되었습니다.
이렇듯 사람은 누군가와 연결되었을 때 치유력과 건강이 좋아집니다.
같은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는 사람과의 연결이든, 성향이 다른 사람과의
깊은 연결이든, 더 큰 존재와의 연결이든, 함께 하면 건강해지고 더 멀리
갈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 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보속과 감사의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야 한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하느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그래야만 참된 통회가 가능해집니다.'
2013년 다해 10월27일 연중 제30주일 복음묵상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루카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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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이 간단한 비유에는 가장 중요한 복음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 한 사람과 자신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세리 한 사람이 각각 보여준 기도의 내용을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옳음과 틀림을 구별해주신다.
먼저,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를 살펴보자.
정말 의로운 사람은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부족함을 느낀다.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사랑할수록, 이웃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커질수록
자신의 모자란 부분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때로는 스스로 찾아낸
모순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에 마음 아파하고 용서를 청한다. 그리고
의롭다는 생각보다는 죄송스럽다는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고개를 숙인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 사람은 영혼이
병든 사람이라 볼 수 있다. 사실 그는 율법과 관습과 규범에 충실하게
산 사람일 수 있다. 정해진 시간에 기도와 단식을 통해서 자신을 정화하려고
시간을 보낸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기도를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는 자신이 지켜왔다고 하는 선한 행위들의 이유조차도 깨닫지
못한 자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죄인이라고 여기며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가슴을
치며 기도하던 세리를 살펴보자.
현실적으로 옳지 않은 삶을 사는 이들은 늘 존재해왔다.
하지만 그들 중 모두가 옳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며 괴로워하며 힘들어하는
것은 아니다. 즉, 모든 세리나 창녀가 뉘우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소수의 사람들만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용서받는 길을 걷는 것 같다.
이 비유의 메시지를 ‘죄를 지은 자가 참된 기도를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오해를 해서는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은 죄에 기울어져 있으니
죄는 지어도 되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회개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오해를
해서도 안 된다.
모르긴 해도, 가슴을 치며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를 청하던 비유 속의 인물
세리는 평상시 자신의 삶의 옳지 못함에 가슴 아파하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토록 진실한 통회의 기도와 태도가 자연스럽게 나왔음이다.
정리해보자.
가능하면 우리는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
가능하면 죄를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는 비유에 기본적으로 전제된 내용이다.
죄는 모든 이가 짓게 되어있다.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더 큰 죄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구원의 열쇠는 죄에 대한 인정과 통회의 여부에 달려있다.
잘 살았다고 하는 삶이든, 못 살았다고 하는 삶이든,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 삶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고, 진심으로 자신의 부족함과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하는 마음에 이르렀느냐 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리 커다란 죄일지언정 참된 통회와 참된 회심의 모습을
보이는 영혼을 받아주신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보여주셨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보속과 감사의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야 한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연중 제30주일
2013년 다해 10월27일
어느덧 10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예전에 ‘잊혀진 계절’이란
노래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이 노래가 1982년도에 발표되었으니
벌써 31년이 되었습니다.
10월의 마지막 주일에 우리가 잊고 지내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합니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를 드린 것이 3개월도
넘었을지도 모릅니다. 여유가 생기면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헌을
하기로 했는데 미루다 보니 벌써 10월의 마지막 주일인지도
모릅니다. 친한 이웃의 가족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벌써 퇴원할 때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올해부터는
꼭 운동을 해야지 했는데 사다 놓은 운동화는 아직도 신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평일미사를 참례하고, 매일 묵주기도를 하기로
했는데 주일 미사에 참례하기도 바쁜 생활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늘 기억하고 계시는데, 우리를 늘 기다리고
계시는데 우리가 하느님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지난주에 성소국 직원들과 용문사를 다녀왔습니다. 용문사에는 10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산에는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었습니다. 천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주변의 작은 나무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 같았습니다. 꽃밭의 꽃들도 각자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꽃밭을 환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장미가 코스모스에게 ‘넌 왜 그렇게
가냘프냐.’라고 하지 않습니다. 코스모스가 제비꽃에서 ‘넌 왜 그렇게
작으냐.’라고 하지 않습니다. 채송화가 할미꽃에게 ‘넌 이름이 그게
머냐.’라고 하지 않습니다. 화려하면 화려한대로, 소박하면 소박한대로,
가냘프면 가냘픈 대로 그렇게 꽃밭을 일구어 가고 있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평가하고, 비교하고 순서를 정하려고 합니다. 아파트의
평수로 삶의 질을 구분하려고 합니다. 학력과 직업으로 사람을 평가하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소유한 차량을 보고 그 사람의 인격을 따지려고 합니다.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쪼금만 기다려 봐 다 똑같다니까! 60쯤
되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똑같고, 70쯤 되면 마누라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다 똑같고, 80쯤 되면 돈 많은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똑 같고, 90쯤 되면 죽은 사람이나 살아있는 사람이나 똑같다.’
저는 아직 50이라 실감을 하지 못하지만 그 정도 나이가 되면 다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교구청에도 부서가 있습니다. 사무처는 다른 모든 부서의 일을 조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교구의 공식적인 공문을 발송하며, 본당 사목에 대한
협조를 하고, 사제들의 인사와 생활에 대한 도움을 줍니다. 사목국은
교구장의 사목 방침이 사목의 현장에서 드러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지침을 만들어 줍니다. 선교 문화 봉사국은 해외 선교를 하는 사제들을
지원하고, 교구의 주보를 제작합니다. 청소년국은 교회의 미래인
청소년들의 사목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회사목부는 교회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며,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관리국은 교구의 전반적인 재정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통합 사목 연구소는 교구의 현안에 대한 연구를 하며,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합니다. 제가 있는 성소국은 사제 양성을 위해서 성소를
개발하는 일을 합니다. 예비신학생들을 지원하고, 성소후원회 모임을
도와줍니다.
어떤 부서는 직원과 신부님들이 많고 규모도 큽니다. 어떤 부서는
직원도 적고 규모도 적습니다. 하지만 하는 일들은 모두가 소중합니다.
만일 인원과 일의 크기로 비교를 해서 평가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몸의 각 지체가 모두 소중하며 한 몸을 이루듯이 교구의
부서들도 교구장님의 사목 정책이 교구에 반영되도록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노력할 따름입니다.
참된 신앙은 곁으로 드러난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숨겨진 진실 속에 있는 것이며, 참된 신앙은 내가 한 공적에
대해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한 후에 겸손하게
결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자신보다 못한 이를
경멸하기보다는 자신 안에 있는 숨겨진 허물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제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하늘을 움직이는 겸손한 기도
2013년 다해 10월27일 연중 제30주일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루카 18,9-14
하늘을 움직이는 겸손한 기도
옛날 한 수녀원에 너무나 겸손하고 순수해서 하느님께서 수시로 그
수녀님을 찾아주신다는 수녀님이 한 분 계셨답니다. 하루는 그 소문을
전해들은 그 지역 담당 주교님께서 그 수녀원을 방문하셨습니다.
주교님께서 대문을 두드리자 젊은 문지기 수녀님이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주교님임을 확인한 수녀님은 깜짝 놀라 밖으로 뛰어나왔습니다.
웬일이냐고 여쭙자 주교님께서 이러저러해서 찾아왔는데, 그 겸손하신
수녀님 좀 만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문지기 수녀님, 지체
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 주교님, 제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아셨어요? 바로 저예요. 진작부터 저를 찾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철없어 보이는 문지기 수녀님을 보고 주교님께서는 ‘쯧쯧’ 혀를
차셨습니다. 그리고는 원장 수녀님을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뛰어나온 원장 수녀님, 겉만 봐도 원장수녀님이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적이고, 고상하고, 자신감 넘치고, 그래서 약간은
도도한 분위기도 풍겼습니다. 조금 주눅이 드셨던 주교님, ‘이러저러해서
왔다’는 말씀을 전하자 원장 수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교님, 주교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희 수녀회 수녀들, 다들 수준이
높습니다. 누구나 겸손할 뿐만 아니라 영성이 뛰어나서 하느님과 직접
통교를 하지요. 멀리서 찾을 필요 없습니다. 저만 봐도 아실 것입니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저에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너무 자신감에 넘치는 원장 수녀님, 그래서 겸손과는 약간 거리가
먼 원장 수녀님을 보고 주교님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모든 수녀님들을 한 자리에 모아주실 수 있냐.”
고 부탁했습니다.
모든 수녀님들이 대회의실로 집합하게 되었습니다. 영적독서나
수업, 기도, 묵상에 여념 없던 고상하고 지적인 수녀님들께서 하나
둘 대회의실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한 분 한 분 수녀님들 얼굴을
관찰하시던 주교님 얼굴은 여전히 실망이 가득했습니다. 아직 그
수녀님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때였습니다. 요즘 말로 ‘각기도’
수녀님이었습니다. 수녀님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수녀님
한분이 투덜거리며 회의실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친구 수녀님: “일단 빨리 와보라니까! 주교님이 모두 다 모이라
그랬어.”
‘각기도’ 수녀님: “너나 빨리 가. 적어도 나는 해당사항 없다니까
그래!”
주방 담당 수녀님이었습니다. 입고 있는 수녀복도 여기 저기 낡고
닳았습니다. 그것을 꿰맨 자리가 또 터져나가고 있었습니다. 좁고
더운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느라 온몸이 땀으로 다 젖었습니다.
성덕이 뛰어나셨던 주교님이셨기에, 즉시 성덕이 탁월한 상대방을
알아보셨습니다. 주교님 얼굴에 비로소 환한 미소가 감돌았습니다.
주교님께서 찾던 바로 그 수녀님이었습니다.
비록 배운 것은 없었지만, 그래서 늘 수녀원의 하찮은 일만 골라서
하였지만, 그 수녀님의 얼굴과 몸 전체에서는 성덕의 향기가 풍겨
나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면회실에 마주 앉아 그녀의 일상생활을
전해들은 주교님은 ‘바로 이 수녀님이었구나!’하고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녀의 소임은 따로 없었습니다. 수녀원 내 굳은 일은 다 그녀의
몫이었습니다. 동료들을 위한 식사준비, 빨래, 하수구 청소, 잡초
뽑기... 그녀의 하루해는 너무나 짧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일상을
늘 기도와 연결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틈나는 데로 성체 앞에
나아갔습니다. 스프를 올려놓고는 끓기를 기다리며 재빨리 소성당으로
달려가서 기도했습니다. 빨래를 하는 중에도 입에서는 성모송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음식 맛이 이게 뭐냐’고 동료들이 투덜거릴 때 마다 ‘앞으로
더 잘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주님께 청했습니다. 맛있게 먹은
동료들의 환한 얼굴을 보며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성당에 있든 주방에 있든 하루 24시간 모두를 기도 속에 보내는
수녀님을 향해 하느님께서도 빙긋이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그토록
겸손한 수녀님으로 인해 흐뭇해지신 하느님께서는 그 보답으로 자주
수녀님 앞에 나타나셔서 큰 위로와 기쁨을 선사하셨습니다. 그 수녀님은
다름 아닌 ‘활동하는 관상가’였습니다. 일을 ‘기도화’할 줄 알던
수녀님이었습니다. 삶 전체를 기도로 봉헌할 줄 아는 수녀님이었습니다.
기도의 기본, 겸손의 덕
그리스도교 여러 덕행가운데 가장 으뜸이자 기본인 덕행이라면
겸손의 덕을 꼽을 수 있습니다. 오랜 교회 역사 안에 수많은 성인성녀들이
탄생했는데, 그들 가운데 겸손의 덕을 갖추지 못했던 분은 단 한분도
없습니다. 이처럼 겸손은 성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기본적인
덕행이었습니다. 성인(聖人)이 되고 싶습니까? 성화(聖化)의 길을 걷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가장 먼저 겸손의 덕을 갖추셔야 합니다.
겸손의 덕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 겸손의 의미는 더욱
심오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겸손의 덕을 쌓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 또 나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은 얼마나 큰 것인가,
그분의 업적은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크신 하느님에 비해 나란 존재는 얼마나 작은가를 파악해야
합니다. 삼라만상을 좌지우지하시는 그분 앞에 나의 힘, 나의 능력,
나의 지식은 참으로 보잘 것 없구나, 참으로 초라하구나, 하는 사실을
온 몸으로 체득해야 합니다. 그 결과 결국 내가 아무리 뛰어봐야 그분
손바닥 안이로구나, 결국 내가 살길은 그분 자비의 품안에 안기는
일이로구나, 하며 철부지 어린이처럼 그분께로 다가서는 것이 겸손의
참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겸손하지 못할 때, 우리 신앙의 눈은 멀어버립니다. 내 능력만 믿습니다.
내 건강만을 믿습니다. 내가 지니고 있는 통장 잔고만을 믿습니다. 내가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빽’만 믿습니다. 겸손하지 못할 때 우리의
기도가 아무리 그럴듯하고 ‘있어보일지라도’ 그 기도는 예수님께서
신랄하게 비판하시던 바리사이의 기도로 전락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만만하던 바리사이의 기도를 완전히 깔아뭉개시고
너무나 부끄러워 얼굴도 들지 못한 채 성전 기둥 뒤에 숨어 서서 바치던
세리의 겸손한 기도 “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를 높이
평가하셨음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겸손의 덕을 지닌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이 뒤따르는데,
그것은 아무리 짓눌려도 다시 일어설 힘이 생깁니다. 아무리 무거운
십자가가 따라 다닌다 하더라도 기쁘게 십자가를 지고 갈 용기가
생깁니다. 아무리 직면하기 어려운 사건, 대하기 이웃이라 할지라도
미소 지으며 맞이할 여유가 생깁니다.
이렇게 겸손의 덕을 지닌 사람에게는 기적까지 일어납니다. 원수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거듭되는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네 삶이 아무리 비호의적이며
고통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Yes라고 응답할 수 있습니다
(생활성서 기도레슨 2012년 9월호 게재분).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겸손은 포용력이다
2013년 다해 10월27일 연중 제30주일
<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복음 : 루카 18,9-14
< 겸손은 포용력이다 >
한 잘 생긴 20대의 총각 선생님이 이무석 교수를 찾아왔습니다.
그 선생님은 신앙인이었고, 그래서인지 늘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고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안신경증이 발병된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유모를 불안이 엄습한 것입니다.
안절부절 못하고, 누가 쫓아오는 것 같고, 금방이라도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조절이 되지 않는 불안입니다. 너무 불안해 자살위험이
있다고 판단되어 입원을 시켰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불안증의 원인은 성적 욕구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가파른 육교를 올라가다가 고개를 들자 미니스커트를 입은
젊은 여인의 속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황급히 눈을 돌렸지만 그
장면은 계속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길을 걸을 때도, 수업시간에도,
잠자리에서는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더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는 누나 집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무심코 안방 문을 열었을 때 누나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보았는데, 특히 겨드랑이 장면이 자신을 자극했습니다. 그의 마음
안에서는 “누나를 두고도 이런 생각을 하니, 나는 변태고 죽일 놈이야”
라는 양심의 엄한 심판의 소리가 울렸습니다. 그러면서 며칠 잠을 못
자고 자책하고 또 자책하다가 불안신경증이란 병이 걸려버리게 된
것입니다.
입원이 도움이 되었는지 증상이 호전되어 퇴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면담을 하였습니다. 퇴원 후에는 음란한
세상에서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1년간 세상과 소식을 단절하여 신앙의 힘으로 이제는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고, 능력이 있으니 바로 취직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교수와 상담하러 올 때 이제는 죄책감과 함께 분노와
미움의 마음을 가지고 왔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묵는 하숙집
옆방의 군인들이 너무나 혐오스런 음담패설을 많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찬송가만 듣고 싶은데 세속 유행가를 크게
틀어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성적 유혹을 이기지
못하게 하는 이유를 이제는 세상 탓으로 돌리게 된 것입니다. 그는
결국 그러한 세상을 등지고 다시 산으로 들어가겠다며 짐을 싸서
사라지고는 30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참조: 이무석, 친밀함, 212-214]
오늘 복음에 두 명이 나옵니다. 하나는 바리사이고 하나는
세리입니다. 하나는 누가 봐도 성인처럼 사는 사람이고 하나는
누가 봐도 죄인일 수밖에 없는 인물입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이
하느님께 인정받을만한 일을 많이 했다고 믿었지만 하느님께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리는 하느님께 기도드릴만한 자격도
없다고 믿었지만 하느님께 인정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이 인정을 받았다는 말을 성경에서는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라고 합니다. 즉 마음이 편안해 졌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고도 마음이 불편하면 바리사이일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위의 청년도 누구보다 거룩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고 또 자신이 아는 대로
살아가는데 아주 죄가 될 수도 없는 정도 가지고도 자신을 질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청년은 바리사이와 세리 중에 어느 부류에 속하는
사람일까요? 당연히 바리사이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지킬 것은
다 지키려고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교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교만한 사람의 특징이 나옵니다.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나, 양심의 심판이나 같은 것입니다. 즉 마음의 평화가
깨진다는 것입니다. 일단 마음에 평화가 없다는 것이 교만의 증거입니다.
오늘 세리는 죄는 많이 짓는 사람이지만 겸손했습니다. 그래서 의롭게
되어 돌아갔습니다. 하느님께서 인정하는 것은 마음의 겸손이지 외적인
행위들이 아닙니다. 남편이 원하는 것은 아내의 순결한 사랑이지, 음식
잘하고 청소 잘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기도를 많이 해도 마음이
평화롭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그런 때는 내가 세리의 모습이 아닌
바리사이의 교만을 지니고 기도하지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힐링 캠프’에 패티김이 자신이 우울증을 어떻게 극복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가장 잘 나가던 4-50대 나이 때 갱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때까지 패티김은 인기를 얻고 자신만 믿으며
살아왔습니다. 사람들이 인사해도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고, 팬들과
악수를 하고도 손에 묻은 땀이 더럽게 느껴져 자신의 바지에
닦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사는 게 의미 없게 느껴지고
노래하면서도 왠지 모를 눈물이 자주 흘렀다고 합니다. 결국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불안함과 공허함에 자살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종교가 없었던 그녀는 신부님과 수녀님을 찾아다녔고, 스님도
만났었는데, 어떤 노스님의 한 마디에 우울증이 극복되었다고 합니다.
“보살님은 너무너무 높이 있습니다. 이제 내려놓고 내려오세요.
조금 겸손해지세요. 높이 있으면 불안하기 마련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겸손으로
우울증을 극복하였다고 합니다. 내가 인정하려 하지 않을 뿐이지
알고 보면 답은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두 번째 교만의 특징은 남을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가
세리를 심판했듯이, 신앙심만 깊었던 청년도 옆방 군인들을
끊임없이 심판하고 있었습니다. 교만함의 명확한 확증은 바로
남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뒤
서로 핑계를 대게 되었음은 그 안에 교만이 들어왔다는 확증입니다.
마찬가지로 위의 청년도 군인을 판단했기에, 하느님 앞에서는
죄인임을 아는 군인들이 자신이 거룩해야만 한다고 믿는 청년보다도
더 정당하게 판단을 받을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루는 제자가 아우구스티노에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덕목들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성인은 대답했습니다.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
그런 아우구스티노가 하루는 볼일이 있어서 한 제자를 불렀습니다.
“이보게, 레이나.” 스승이 부르는데도 레이나는 대답이 없습니다.
옆방에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해
불러보았지만 여전히 응답이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슬며시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이 녀석이...” 그는 옆방 문을 신경질적으로
열어젖혔습니다. 순간 그는 “아차.” 하고 뉘우쳤습니다. 레이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하느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도 간절히 기도에 몰두하고 있다 보니 스승의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는 제자에게
간청했습니다.
“너의 발로 내 목을 밟고 서서 ‘교만한 아우구스티노야, 교만한
아우구스티노야, 교만한 아우구스티노야’ 이렇게 세 번 소리쳐다오.”
겸손은 머리를 숙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허공 높이 올라가
있으면서 머리를 숙여봐야 밑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발밑에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머리만 숙이는 거짓 겸손이 판을
치는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우리가 선거철에 정치인들에게서
많이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참다운 겸손은 마음의 겸손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낮출 필요가 없이
낮은 존재임을 마음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하셨지, 육체나 생각이 겸손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머리로 낮추려고 하는 것은 이미 자신이 높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겸손은 낮아짐이기 때문에 받아들임과 관계가 있습니다. 가장 낮은
땅은 바로 바다입니다. 바다와 같이 겸손하셨던 분은 성모님이고
성모님은 세상 모든 것뿐만 아니라 세상보다 크신 하느님까지
받아들이셨습니다. ‘왜 이건 따먹으면 안 돼?’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첫 조상들과는 완전히 다른 겸손입니다. 따라서 마음으로 겸손한
사람은 모든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다까지도 당신 제자로 받아들일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내 마음이
바다처럼 넓지 못하다면 교만이 차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제가 모든 것 다 버리고 신학교 들어가서 예수님을 위해 일생을
바친다고 생각했을 때는 매우 교만했고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신학교에 사는 것이 불만이었고, 선배 신학생이나 교수 신부님들도
많이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이틀 단식하고 너무 배가 고파 성체를
영했을 때, “너는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느냐?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라는 것을 느끼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때
알았습니다. 내가 누구를 판단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며,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하는 그분이 아니시면 전혀 쓸모없는 존재임을. 그 때부터
저의 성소와 신학교, 주위 사람들까지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무엇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낮아지려고 해도 이미
공중에 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 것도 아님을 안다면 그 때서야
땅에 닿은 것입니다. 내려가다 내려가다 보면 가장 편안한 자리가
나오는데 그 자리가 바다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평화롭게, 그리고
모두를 품을 수 있는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하느님께 더 가까이 있는 마음...
2013년 다해 10월27일 연중 제30주일(루카 복음 18장 9~14절)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하느님께 더 가까이 있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몇 가지 떠오른 것이 있는데요.
첫 번째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리와 같이 정말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전능하시고 완전하시며 선 자체이신 하느님께
나아가 정말 그분 앞에 서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요..
바리사이와 같이 자기 업적을 늘어놓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세리와
같이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자비를 청할 수밖에 없을까요.. 아마도 세리와
같은 모습이 당연한 모습 아닐까.. 합니다.
이런 거랑 비슷할 거 같습니다. 지나가는 소리로 들은 이야기들인데요.
제가 농사짓는 자매님 손을 보고 다 트고 갈라지고 빠지지 않는 까만
때가 살 속에 끼어서 어떻하냐.. 고 물었더니 이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시골에 있을 때는 괜찮은데 도시에 나가면 창피하다는 겁니다. 도시
사람들은 손이 그렇지 않으니 그런 느낌을 받으시는 거 같습니다.
어떤 형제님도 바다에 나가 일하실 때 자외선으로부터 얼굴을 보호하지
않으셔서 그런지 얼굴이 까마십니다. 그 형제님도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여기선 괜찮은데 결혼식이나 다른 잔치 갈 때 너무
까마니까 조금 창피하다고.. 언젠가 잔치 갔다 오실 때 만났던 거 같은데,
‘이제 다 끝났다.. 나갈 일 없다..’ 하고 어떤 부담에서 해방된 그런 느낌을
표현하시더라고요.
시골에 살면서 그런 모습을 가지게 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부분은 그분들이 도시에 나갔을 때 자기의 까만 얼굴과 갈라진 손
사이에 낀 까만 때를 더 잘 인식하게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더 세련된
곳으로 간다면 그런 느낌은 더 강해지겠죠.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일 거 같습니다. 완전무결하시고 선하신
하느님께 나아간다면 우리의 더러움과 추함과 죄악이 더 잘 보일 수밖에
없겠죠.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아간다고 하면서도 죄인이라는 자각이 없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진실로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이라는
태양을 피해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는 인간인지도 모릅니다.
‘그분 앞에 진실되이 서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을 알고 싶다면,
내가 죄인임을 얼마나 자각하고 있나..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될 거
같습니다. 그분 앞에 나아간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 한 없이
부끄러워할 것이고, 어찌해 볼 수 없는 죄스런 상황에서 그분의 자비를
구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리와 같은
모습..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당연한 모습이고, 죄를 고백하고 자비를
청하는 그 마음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 있는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내적체험이 있는 마음입니다. 예전에 트랜스포머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 보니까 어떤 자동차가 주인공과 나누는 대화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른 로봇들은 인간처럼 자연스럽게 말하는데 그
로봇은 라디오에 나오는 노래나 말이나 광고 등을 써서 대답을
하더라고요. 신기했는데요. 그 신기한 일을 우리도 일상 안에서 체험하게
되는 거 같습니다.
예를 들면 아주 오랜 전 있었던 일인데요. 제천에서 부산까지 도보여행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참을 걸으면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나..’ 하고 걷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개신교 차가 지나가더라고요. 그런데
그 뒷 유리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그 말씀을
보고 답을 주시는 거 같아서 혼자 피식 웃었던 적이 있는데요.
비슷한 일들이 종종 일어나는 거 같습니다. 한 번은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서
미운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막 나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작은 돌멩이인지
나무 열매인지가 날라 와서 제 머리를 딱.. 하고 때리더라고요. 아야..
하면서 나쁜 생각을 멈췄는데요. 순간 하느님을 떠올리게 되더라고요.
나쁜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시나보다.. 하면서 또 피식 웃었죠.
또 작년엔가 청년들이 와서 베란다에서 고기를 구워먹는데 문득 그 모습이
몇 달 전에 내가 부러워하던 모습이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몇 달
전에 동기 신부가 청년 몇 명을 데리고 본당에 와서 잔잔한 노래를 틀어놓고,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 속에서 달빛을 보면서 술을 한잔 했는데요. 분위기가
참 좋았습니다. 나도 진작 이런 걸 할 걸..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몇 달
후에 청년들이 놀러 와서 비슷한 분위기에서 고기를 먹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 작은 바람까지 놓치지 않고 담아 두셨다가
보여주시는구나.. 하면서 그분의 현존을 아주 가까이 느꼈던 적이 있는데요.
일상의 작은 일들을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진
하느님의 말씀과 신호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 마음이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되는 거 같습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어 봅시다. 또 하느님이 일상에서
보여주시는 신호에 관심을 가져봅시다. 하느님께 내 마음이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겁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생선타는 냄새가 나자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부탁했다.
“어머니 제가 바빠서 그러는데, 생선 좀 뒤집어 주세요!”
그러자 시어머니가 대답했다.
“놔둬라! 지가 뜨거우면 뒤집겠지.”
- 밤송이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글 -
◈ [서울] 참 아름다운 자연을 입은 것
2013년 다해 10월26일 연중 제30주일
참 아름다운 자연을 입은 것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체 하는 사랑을 보면 별로 정이 가질 않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자기를 잘 난 사람으로 보이기를 은근히 바라지요.
이런 게 버릇되어 하느님 앞에서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건 그렇다 치고 하느님 앞에서 잘난 체 하다니요.
겸손하고 솔직하고 뉘우치는 자세는 참 아름다운 자연을 입은 것 같아요.
그런 사람을 보면 실은 우리도 정이 가게 마련 아닙니까?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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