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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10월29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수원] 내 마음의 툇마루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로마 8, 18 - 25
† 복음 : 루카 13, 18 - 21
★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까지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피조물과 함께 우리는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영광의 자유를
누릴 희망을 갖게 되었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으로 비유하신다.
우리가 언뜻 보기에는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는 것이 미미하게 느껴지지만
하느님의 섭리로 온 땅 위에 펼쳐질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영국 출신의 미국 배우로 세계적 명성을 떨친 찰리 채플린은 젊은
시절 철공소에서 일했습니다. 어느 날 사장은 그에게 빵을 사다 달라는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잠시 뒤 빵을 사 온 채플린은 사장에게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그 봉투 안에는 빵과 함께 포도주 한 병이 들어
있었습니다. “여보게, 이게 웬 건가?” 하고 사장이 묻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사장님께서 일이 끝난 다음에 언제나 포도주를 드시면서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포도주가 떨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 뒤 사장은 채플린의 월급을 올려 주었을 뿐 아니라 완전히 다른
태도로 그를 대했습니다. 채플린은 남들이 무심코 지나친 것을 세심히
살피고 필요한 것을 채우는 데 성실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 일에도
충실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세계적인 배우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은 작은 일에도 충실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평화, 환경, 평등, 자유 등 인류의 구원과 관련된 문제는 무척 거창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거창한 일은 작은 일의 실천에서 비롯됩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곧 소화 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주 작은 희생을 바칠 수 있는 기회들을 놓치지 마십시오. 여기서는
웃음을 주고 저기서는 친절한 말을 하십시오. 오로지 사랑을 위하여
실천하십시오. 하느님의 눈에는 하찮은 것이 없음을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하느님께서는 하찮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그러한 일을 통하여 큰일을 해내십니다. 겨자씨에서
큰 나무를 이루는 지혜롭고 성실한 농부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소리 없는 변화/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2013년 다해 10월29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
+ 루카13,18-21
소리 없는 변화
“하느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고 하셨을까? 겨자씨는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입니다. 오늘 그 씨를 보여드립니다. 얼마나
작은지 보십시오. 그런데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고 새가
깃들만큼 우거집니다. 누룩 역시 밀가루 반죽 속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입니다. 누룩도 밀가루 양에 비해서 아주 보잘
것 없을 만큼 적은 양이지만 밀가루 반죽에 들어가서 밀가루
전체의 성질을 변화시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한 사람이 내 삶의 자리와 머무는 곳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이 겨자씨와 누룩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내가 바로서면 지금은 미약하지만 분명 큰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내가 변하면 세상도 변합니다.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입니다.
콩나물을 키울 때 콩나물에 물을 부으면 물이 다 빠져나갑니다.
하지만 콩나물은 크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성장과 변화는
드러나지 않게 이루어집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순간순간이 은총의
기회요 희망입니다. 실망과 좌절 안에서도 여전히 성장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매순간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는데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왔는데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입니다. 왜냐하면 완성에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시작과 완성 사이의 긴장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마음속을 스쳐가는 순간순간의 생각,
꿈같이 왔다 갔다 하는 우리의 상상, 마음 속 깊이 숨은 티끌 같은
비밀 하나까지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신 눈앞에 숨겨져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누룩이 반죽된 밀가루덩이를 통째로 발효시키듯, 예수님의 복음은
세상과 인류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이익을 찾는 이는 사랑을 갈망하고,
사리사욕을 찾는 마음은 희생봉사로, 교만은 겸손으로 바뀔 것이고
어둠은 밝음으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소리 없는 변화의
도구로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행실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로마2,6). 이 말씀은 믿는 이들에게는 두려움 보다는 기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 성장을,
그리고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자연스런 변화를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주님의 가르침이 마음 안에 새겨져서 자연스런
삶의 변화를 통해 증거 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17,21) 고 하셨습니다.
결국 지금 내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내 안에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든지
따지지 마십시오. 자동차 운전을 하든지, 부엌일을 하든지, 짐을
나르든지 상관없이 마치 사제가 성체를 모시고 가듯이 하십시오.
매 순간마다 이렇게 ‘천국을 위하여 일하십시오”(알베리오네). 내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나라로 만드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유대교 랍비와 신부님이 만났습니다.
신부님이 말했습니다.
“어제 밤 꿈에 유다교의 천국을 보았는데 너무 지저분해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없고 유다인들만 우글거리고 있더군요.”
그러자 랍비가 말했습니다.
“그래요? 나도 간밤 꿈에 천주교인들의 천국을 보았지요.
밝고 화사하고 꽃이 만발한 너무도 아름다운 곳이더군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사람이 눈에 띄지
않더라구요.”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십시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선택은 하느님의 기준으로
새벽 카페 공지사항에 있는 저의 일정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실 오늘부터 주말까지 휴가를 다녀올 생각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오래전부터 신부님들과 계획했던 휴가였기 때문에 기대가 많았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가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휴가를 가서 쉬는 것보다 기도해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6개월 정도 계획했던 일이기에 갈지 말지를
고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모를 후회를 만들까봐 이러한
결정을 내렸던 것이지요.
결정하지 못했을 때에는 너무나도 생각이 복잡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결정을 해버려서 모든 것을 취소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도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됩니다.
이 세상의 삶이 어쩌면 이렇지 않았나 싶습니다. 즉,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갈등 속에 있을 때에는 어떠한 선택도 못하면서도 불안하고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방향을 잡고 선택을 하면,
그 불안한 마음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도 시작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의 크고 작은 선택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그 선택을 어떻게 하십니까? 혹시 모르겠다고 계속해서 뒤로
미루고, 또 남들에게 책임전가를 시키려고만 하는 것은 아닌지요?
자그마한 선택도 후회하지 않을 시간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별 것 아니라는 안일한 마음보다는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맞춰서 또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일로서 행동한다면 분명히
옳은 선택,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아주 작은 겨자씨처럼 새들이 깃들일 정도로 큰 나무가
되는 것처럼, 또 자그마한 누룩이 빵을 크게 부풀리듯이 우리의 작은 모든
행동 하나 하나가 하느님 나라 건설에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것도 무의미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사랑, 희생, 나눔, 봉사 등등은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중요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초가 되는 일들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하루 동안에도 많은 선택의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 선택을
세상의 기준으로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준으로 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선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들이 언젠가 갈
하느님 나라에 더욱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됩니다.
보이는 잎은 보이지 않는 뿌리를 말한다. 꽃은 말라 떨어져도 뿌리는
싱싱한 물기를 간직하고 있으니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감추고
있다(이정명).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 제주도입니다.
주님의 뜻은?
성당을 열심히 다니는 아가씨가 일반 개신교에 다니는 청년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둘은 드디어 결혼을 하기로 했지요. 그런데 둘의
종교 차이로 인해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아가씨의 어머니께서
청년의 종교 때문에 분명히 큰 문제가 생긴다면서, 만약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지 않으면 절대로 결혼을 승낙하실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아가씨는
자기 남자 친구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몇 달이 지난 후, 어머니는 울고 있는 딸을 보고는 다가가 물었습니다.
“얘야, 왜 울고 있어?”
“남자 친구 때문에요.”
“왜? 그 청년이 가톨릭으로 개종해서 교리를 받고 있다며? 그리고 이제
곧 세례를 받는다고 하지 않았니?”
“그게 문제에요. 너무 성공하고 말았어요. 글쎄 그 사람이 신부가 되고
싶다고 하네요. 엉엉!”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잘 된 일일까요? 아니면 안 된 일일까요? 글쎄요.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참으로 찾기 힘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주님과 눈을 맞추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지요?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 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하느님의 나라.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훈훈한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2013년10월29일 연중 제 30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루카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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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들 중 가장 대표적인 비유이다.
그리도 많이 대했던 이야기지만, 오늘은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라는 부분이 처음으로 깊이 와 닿는다.
가지를 내주고 묵묵히 서있는 아름드리 나무를 떠올려본다.
비바람이 불던 눈보라가 치던 꿋꿋이 늘 한 자리에 서 있는 나무들.
어떤 조건에서도, 어느 누구라도 원하는 마음들에게 쉴 자리를 내어주는
나무들.그러한 나무들을 떠올리면서, 우리의 삶을 뒤돌아보게 된다.
언젠가 우리 모두는 비유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 적 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그런 비유적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마음에 마음을 빼앗긴 우리들이라면,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그려볼 수 있게 된 우리라면,
우리 역시 우리의 작지만 진실한 삶을 통해서 이웃에게 하느님 나라를
그릴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리고, 가지를 내어주기 위해서는 일단 튼튼한 아름드리 나무가 되어야
하듯이, 우리 역시 영적으로 튼튼하게 성장해야만 한다.
이 삶에서의 소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아름드리 나무와 같은 영혼을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비바람에도, 눈보라에도 견딜 수 있는 듬직한 나무,
내 의지보다는 남의 의지를 존중해주는 그런 나무,
좋음도 싫음도 문제되지 않고 자신을 내어주는 나무,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게 된다면, 천하에 둘도 없는 바보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밉지 않은, 오히려 존경스러운 바보라고 세상은 말할 것임을 믿는다.
각자의 자리에서 늘 부족하지만 열심히 살고자 하는 참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늘어날 때, 새들이 깃들어 쉴 수 있는 아름드리 나무의 아름다운
가지들처럼, 힘들고 지친 사람들, 희망을 잃은 사람들, 삶의 가치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체험하리라 믿는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2013년 다해 10월29일
어제는 동창모임이 있었습니다. 동창신부님은 개를 한 마리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개의 이름이 ‘희망’이었습니다.
10년 이상을 교정사목을 했던 동창입니다. 본인도 암 투병을
했었습니다.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은 갇힌 감옥에서
잘 지낼 수 있는 위로와 힘이 될 것입니다. 암 투병을 하는
사람에게 ‘희망’은 병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동창신부는
늘 희망을 보았고, 그래서 개의 이름도 ‘희망’으로 정한 것 같습니다.
악마가 사람들을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유혹 중에 ‘나는
안 돼’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유다와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달랐습니다. 유다는 절망
하였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버렸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용서해 주셨고, 평화를 주셨습니다.
의사들도 이야기합니다. 본인이 희망을 가지고 치료를 받는 환자와
좌절과 두려움을 가지고 치료를 받는 환자는 분명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희망을 가진 환자는 약의 효과도 더 좋고, 상태가 쉽게
호전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걱정과 두려움에 가득한 환자는 약의
효과도 적고, 치료하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의사의 처방은 희망과
함께 할 때 더 큰 효과를 낸다고 합니다.
2005년도에 캐나다에서 처음 지낼 때였습니다. 11월 4일에 갔는데
벌써 추웠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곳에서 지내는데 두려움과
걱정이 있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통풍’이 생겼습니다. 잘 걷지도 못하고,
먹는 것도 한국과는 다르고, 말도 잘 통하지 않았습니다. 하루하루 힘들게
지내던 어느 날 한국에서 잘 알던 교우를 만났습니다. 그분은 저보다
6개월 전에 캐나다로 왔었고 잘 적응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분을
만나면서 저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나도 저렇게 잘 지낼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생겼습니다. 변한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다만 ‘희망’이
생겼을 뿐입니다. 음식이 다른 것도 견딜 수 있었고, 통풍도 치료가
되었고, 말도 조금씩 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가끔씩 사진 앨범을 보곤 합니다. 30년 전의 모습, 20년 전의 모습,
10년 전의 모습, 지금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나는 예전의 나의 모습’에서 얼마나 발전했을까? 순수하고, 깨끗했던
모습은 많이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외모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30년 전의 저와 지금의 저는 별개의 사람이 아니라,
시간을 거치면서 계속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노력을 했으면 가능성은 현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하고,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는데
소홀했으면 가능성은 가능성으로 남아 있거나, 사라졌을 것입니다.
욥기 8장 7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보잘것없겠지만 나중에는
훌륭하게 될 것일세.” 작은 씨앗은 커다랗게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을
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가 자신은 물론 남을 도울 수 있을
만큼 자라는 것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도
이와 비슷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시작은 겨자씨와 같지만 자라서 큰
나무가 되고 새들이 와서 머물 정도가 된다고 하십니다. 누룩과 같아서
부풀어 오르면 맛있는 빵이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안에 감추어졌던 놀라운 가능성을 보았고,
제자들에게 믿음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비록 시작은 12명이었지만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수많은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박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인류의 역사와 문화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조건을 보시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을 배반했음에도, 다시 악의 유혹에 빠져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들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비록 현실은 작고
초라할지라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큰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제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죽어보지 않고도 영원세상을 아는 것
2013년 다해 10월29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죽어보지 않고도 영원세상을 아는 것
밀가루로 만드는 음식종류는 다양합니다. 빵 부침 튀김 국수 과자 등.
보거나 먹어본 경험이 없다면 밀가루가 어떻게 이렇게 될까 의문나지요.
특히 부피가 커지는 것은 안에 거품이 생긴다는 것 이해하기 힘들지요.
3차원 세상도 이렇게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게 사람들입니다.
죽어보지 않고도 영원세상을 아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예수님 외에 그 누구도 죽었다가 영적인 몸으로 살아난 사람 없잖아요.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루카 13,20~21)”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내 마음의 툇마루
2013년 다해 10월29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
복음 : 루카 13,18-21
< 내 마음의 툇마루 >
제가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 한 여자 후배가 저의 팔짱을 끼며 이런
말을 한 기억이 납니다.
“오빠는 틈이 없어. 들어갈 틈을 좀 줘요.”
그 때는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괜히 가까워져서
힘들어질까봐 그렇게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한 것은 내 마음에도 문이 있어서 내가 열고 닫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마음의 문’. 문이 있다면 집을 가정한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은
‘집’과도 같은 것 같습니다. 어떤 집은 크지 않으면서도 편안한 집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집은 웅장하면서도 왠지 휑한 느낌이 들어 불편한
집도 있습니다. 어떤 집은 아예 문을 열어주지도 않는 집도 있습니다.
말도 못 붙이게 냉랭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뭐 드시고 싶으세요?”
“아무 거나요.”
“...”
“요즘 술 너무 많이 드시는 거 아닌가요?”
“네가 술이라도 사줬냐?”
“...”
우리는 이렇게 누구에게 다가가려 하다가도 그 사람 앞에 커다란
벽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만 거기서 멈추고 돌아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 집이 나를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김창옥 교수의 ‘내 마음의 툇마루’란 강의에서 들은 내용입니다. 한
프랑스 건축가로부터 건축 철학에 대해 들었다고 합니다. 그 건축가가
회장님이 원하는 건축을 해 주기 위해 회장실에 들어가면 그 방의
구조와 가구 등을 보며 회장님이 원하는 건축을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는 건축은 문을 크고 높게 하거나
의자와 같은 가구를 높은 것들을 가져다놓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회장실은 매우 넓은데도 회장님 의자만 달랑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제발 할 이야기만 하고 빨리 나가달라는 무언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과연 내가 하나의 집이라면 나는 어떤 모양의
집이고 가구배치는 어떻게 되어있는지 묵상해보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를 비유말씀으로 설명하시는데
겨자나무와 같다고 합니다. 겨자씨가 땅에 떨어져 겨자나무가 되는데
새들이 그 가지들에 깃들인다고 합니다. 하느님나라를 내 안에 실현시킨
사람은 다른 이들이 모여와 쉴 수 있는 공간은 제공한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왜냐하면 행복하지도 않고 여유도 없는 사람은, 실상은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막상 사람이 들어오려고 하면 거부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더 귀찮아지고 힘들어지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내 안에 에너지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우리는 과연 힘들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내 안으로 초대할 공간이
있습니까?
우리나라 건축에는 ‘툇마루’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신을 벗지 않고 앉아 이야기 할 수 있는 휴식의 공간입니다. 만약
마음이 잘 맞으면 안방으로도 들어올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나라 방은 누구나 앉을 수 있는 온돌방입니다. 어떤 회장실처럼
의자를 준비해놓지 않아 앉을 곳이 없어 할 말만 하고 바로 나와야 하는
그런 삭막한 방과는 다릅니다. 온돌방은 누워서 뒹굴어도 됩니다.
우리나라 선조들은 어쩌면 하느님나라의 편안함을 아시는 분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집을 짓고 있는 중입니다. 내 마음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편안히 쉴 수 있고 자신도 편안히 쉴
수 있는 곳. 그것을 위한 씨앗은 이미 우리 안에 지니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 자신이 지은 집을 눈으로 보고는 깜짝 놀랄 날이 올
것입니다. 겉은 화려하나 사람이 깃들 수 없는 집이 있고, 또
소박하지만 편안하게 사람이 쉴 수 있는 집이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에는 지나가는 사람이 앉아서 쉴 수 있는 툇마루가 준비되어
있는지 살펴 보아야겠습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생명이 붙어있다는 것...
2013년 다해 10월29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
+ 루카 13,18-21
생명이 붙어있다는 것...
한 조사에 의하면 국민소득이 높아질수록, 노령화가 가속화될수록
덩달아 인기를 구가하는 시장이 있는데, 바로 애완동물 시장이랍니다.
요즘은 애완동물이라는 용어보다는 반려동물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합니다. 많은 가정에서 애완견은 더 이상 동물이 아니라 가족의
한 구성원처럼 여깁니다. 애완견의 인격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견공들도
그런 융숭한 대접에 맛이 들어 스스로를 사람으로 생각하는 녀석들도
많다는군요.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한 신자분의 눈이 빨갛게 충혈 되어 있었습니다.
무슨 큰일이라도 있었느냐? 누가 돌아가시기라도 했냐? 여쭈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자식처럼 애지중지하던 애완견이 별세하셔서 막
장례예식을 치르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강아지들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한번은 마당에서 키우던 잡견
강아지가 병에 걸려 시들시들 앓다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급성 장염이었는데,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동물병원에
데려가 엑스레이 사진도 찍어보고, 주사도 맞춰보고 그랬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생명이 붙어있다는 것과 생명이 끊어진 것이 그렇게 차이가
난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살아있을 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모습,
그렇게 생기 있고 귀여운 모습이었는데, 죽고 나니 그런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온 몸이 순식간에 뻣뻣하게 굳어버렸습니다. 바라보기도
싫었습니다.
생명이 붙어있다는 것, 이거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니더군요. 생명이
붙어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생명이 지속되어야 사랑스럽습니다. 숨을
쉬고 있어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땅위에 스스로 두 발로 서있다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정말이지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불러주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생명의 씨앗을 심으셨습니다. 최초에 심어진
그 씨앗은 겨자씨만큼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사랑이
하느님 사랑과 부모의 사랑에 힘입어 무럭무럭 성장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한 가지 있군요. 우리 안에
심어진 생명의 씨앗이 무럭무럭 우리 안에서 자라나 우리 밖으로
성장해 나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 생명도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심어진 다양한 가능성의 씨앗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충만하게
실현시킬 때 우리 생명도 커지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이라고 다 똑같은 수준의 생명이 아니더군요. 그저 자기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한 생명, 자기만 알고 자기만 챙기는 이기적 생명은
차원이 아주 낮은 생명입니다. 그에 반해 참된 생명은 육적인 생명에
영적인 생명이 추가되는 생명입니다. 다시 말해서 통합되고 완성된
생명입니다.
하느님께서 매일 우리에게 건네시는 생명의 말씀을 진지하게 묵상하면서
자신의 삶 안에 구체화시키는 인생이야말로 참 생명의 삶을 사는 모습이
아닐까요? 그 순간 우리는 지상에서 천국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생명을 위해 무상으로 건네지는 영원한 생명의 빵을
정성껏 받아 모시는 노력을 통해 매일의 삶 안에서 파스카의 신비가
지속되는 삶이 필요합니다. 매일 아침 어제의 나와 결별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참 생명의 삶을 살아봐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기타] 겨자씨를 심읍시다.
2013년 다해 10월29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루카 복음 13장 18~21절)
요즘 대림기도 소책자를 만들고 있습니다. 올 해는 다른 신부 세
명과 함께 작업을 했는데요. 지금 샘플 뽑는 작업까지 마무리를
했고, 이제 홍보하고, 주문된 부수만큼 찍어내기만 하면 될 거
같습니다. 올 해로 네 번째 작업인데요. 작업을 할 때마다 일이
조금씩 익숙해지기도 하고, 다른 작업에도 조금씩 눈길이 갑니다.
올 해는 문득 ‘책을 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웃기죠? ^^;
저도 웃깁니다. 제가 책을 낸다는 생각 자체가 웃깁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가까이 한 것도 아니고, 빼어난 문체나 문장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신부가 돼서 겨우 시작한
것인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 자체가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을
한 거 같은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책을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거를 인터넷으로
찾아보았습니다. 웃기죠? 그래도 찾아보았습니다. 지식인의 답변을
보니 대부분 기념 출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돈으로 책을 내고
돌리는 거죠. 그런데 지난 번에 아는 어른 신부님이 책을 내는데 대략
얼마가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비쌌던 거 같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접근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과 관련된 분에게 한 번 전화를 해서 물어볼까.. 하고
수화기를 들었는데.. 마음속에서 그분의 생각을 상상하더라고요.
가톨릭 관련 잡지에서 작년에 인터뷰를 오셨던 분인데요. 제가 전화를
걸면 이런 생각을 할 거 같았습니다. ‘블로그를 조금 칭찬해 줬더니
책까지 내겠다고.. 자기 글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냐..’ 그럴 분은
아니지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전화하기를 포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생각이 내가 왜 책까지 내려고 하나.. 라는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더 알려지고 싶은 거냐.. 업적을 남기고 싶은 거냐..
그런 부분의 지속적인 작업과 일이 필요하다고 정말 생각하는 거냐..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잘 모르겠습니다. 왜 책을 내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는.. 지금은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거 같은데요.
좋은 쪽으로 해석하자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섬에 와서 느낀 것
중에 하나가 복음을 전할 수단이 많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밖에서는
문자도 보내고, 전화도 하고, 인터넷으로 메일도 보내고 블로그 활동도
했는데.. 지금은 신자들이 그런 걸 잘 쓰지 않으니 활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종종 돌아다니다보면 할머님들이 돋보기안경을 쓰고
매일미사책을 읽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또 신자분들에게서
매일미사를 챙겨 본다는 이야기나, 거기에 나온 묵상글은 챙겨 본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러면 신자들이 옆에
두고 챙겨 읽을 만한 무언가를 만들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떠오른 것이 지금 대림기도와 같이 제본 형태의 책이면
어떨까.. 하는 겁니다. 만드는데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원하는
분들에게 원하는 만큼 인쇄를 해서 드리면 되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형태는 매일매일
성경공부를 할 수 있는 형태의 소책자나 묵상글을 엮는 종류의 책을
생각하고 있는데요. 그 가지에 신자들이 깃들일지 그렇지 않을지
알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생각만 하거나 부끄러움에 움츠려
드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과 같이 해야겠죠.
어떤 사람이 그것(겨자씨)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러면 언젠가 그 결실을 보게 되겠죠.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여러분
손에 든 그것으로 심고 가꾸기를 시작하고 계신가요? 아니면 내 힘과
능력과 재능은 부족해.. 부끄러워.. 하면서 감추려고만 하고 계신가요?
한 번 손에 든 그 시간과 정성과 노력과 재능으로 신앙 공동체라는 밭에
심기를 시작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내가 강론하는데 우리 복사 안드레아가 코를 곯았다.^^;
미사가 끝나고 왜 코 골았냐고 물어보았더니 예상 밖의 답이 나왔다.
운동 많이 해서 그렇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런 대답을
했다. “영어 단어 몇 개 외웠더니...”
- 밤송이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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