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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10월31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수원] 순교로 가는 길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로마 8, 31ㄴ - 39
† 복음 : 루카 13, 31 - 35
★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기꺼이 내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어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낼 수 있다(제1독서).
★ 예루살렘은 ‘평화의 터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지만, 그
도시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죽여 왔다. 예수님께서는
참예언자로서 예루살렘에 가시어 죽임을 당하시기로 다짐하신다.
이로써 참평화를 실현하시려는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철없는 자식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이야기하였습니다.
“얘야, 너는 왜 이렇게 나쁜 짓만 골라서 하니? 네가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할 때마다 이 기둥에 못을 하나씩 박으려무나.” 그는 재미있을
것으로 여기고 일부러 나쁜 짓을 저지르며 기둥에 못을 박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더 이상 기력조차 없게 된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네가
나쁜 짓을 할 때마다 기둥에 못을 박았지만, 사실 그것은 내 가슴에
박은 것이나 다름없었단다. 이제 네가 지난날을 반성하고 착한 일을
많이 한다면 어미로서 여한이 없겠구나. 이제부터는 착한 일을 할
때마다 그 못을 하나씩 빼내 주려무나.”
그제야 철이 든 자식은 눈물을 흘리며 지난날을 뉘우치고 착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기둥에 박혀 있던 못도 다 사라졌습니다.
그렇지만 그 기둥에 남아 있는 못 자국, 그 상처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예루살렘, 이곳은 주님의 가슴과도 같은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 숭배를 하였습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예언자들을 죽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예수님께서 굳이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셔야만 했을까요? 그곳에
박힌 못을 빼내시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마저도 죽이는 죄를 저지르지만, 바로 그곳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 23,34) 하고 기도하십니다. 곧 무엇보다도 큰
죄까지 용서하시는 그 사랑으로 예루살렘 곳곳에 박힌 죄의 못을 빼내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로 그곳에서 부활하심으로써 못 자국의 상처까지도 모두
아물게 하십니다. 그럼으로써 예루살렘에 참된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하시며 상처를 낫게 하신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한 마리 여우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2013년 다해 10월31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
+ 루카 13,31-35
한 마리 여우
여우는 밤에만 은밀하게 활동하고 낮이 되어 위험할 때면 굴속에
숨는다고 합니다. 겉으로는 온순한 것처럼 보이나 속으로는 간교하고
음흉한 것이 특성입니다. 제가 머물고 있는 사제관 뒤뜰에는 매괴동산에
사는 고라니가 내려오기도 합니다. 가끔은 너구리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여우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밤중 바스락,
바스락 소리에 또 왔구나 하며 사진에 담으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를 왜‘여우’라고 칭했을까요? 헤로데에게는 예수님의
전도활동이 골칫거리였습니다(루가 9,7이하). 그는 예수께서 자기 제자들을
선동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기 영토 밖으로 내쫓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드러내 놓고 그 표현을 하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어떠한 찬성이나 반대의 입장을 전혀 취하지 않고 예수님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야말로 교활함과 비열함을 모두 갖춘 한 마리 여우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가끔 ‘너는 하는 짓이 여우같다’는 소리를 하는데 정말 좋은
말이 아닙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이 여우와 맞서서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며
당당하게 당신의 일을 계속 하셨습니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고 하시며(루가13,33)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12,50).
하시며 고통을 감당 하셨지만 마침내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하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구원자로서
활동하셨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처형을 당할
정도로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사랑과 예언자들의 눈물로 세워진 도시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어미’를 배척 하는 불효를 저지른 것입니다.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루가13,34).하시는 탄식에 등 돌린 자식에 대한 아픔이 배여 있습니다.
그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어미의 사랑은 끝내
그를 품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약속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하고 너희가 말할 날이 오리라(13,36). 하시며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다시금 보게 되리라는 희망을 줍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을 얻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했는지요?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어미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내가 겪는 어렵고
힘든 일이 자초했든 다른 사람에 의해왔든 주님께서는 그 안에 함께
하십니다. 완고한 마음 안에도 여전히 계시고 그 마음이 풀어지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고 항변하는 그 안에도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의 영광 안에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분명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2,4). 그럼에도 그분을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것은 내 눈이 가려진 탓입니다. 내 마음이 여우인 까닭입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품고 계신 주님을 찬미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과거 예루살렘을 탄식하시는 모습으로 또 다시 슬픔을
지상의 동물 중에서 가장 빠른 동물은 치타라고 합니다. 글쎄 시속
113Km의 속도라고 하네요.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무서운
동물로는 사자, 호랑이, 코끼리 등을 들지요. 또 갈라파고스거북이는
180~200세를 산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인간과 비교할 때, 이
동물들의 능력은 정말로 뛰어나지 않습니까? 그 능력들에 비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초라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기준을 들어서 비교를 하면 너무나 형편없는
위치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이러한 동물들을 지배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지식이 뛰어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족한 능력을 뛰어넘어 동물들을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식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입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지배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너무나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복을 위해 눈에 보이는 부와 명예만을 끊임없이
추구합니다. 그런데 정작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는 오히려
자신의 부족을 드러낼 뿐입니다. 우리의 능력이란 앞선 동물들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도 미약하기 때문이지요. 결국 우리들이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눈이 보이는 가치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의 사용에서 가능합니다.
실제로 돈을 많이 모아서 행복하다는 사람보다는 봉사와 희생 등의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행복해졌다는 사람을 더 많이 보지 않습니까?
그래서 진정한 부자는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남에게 줄 것이 많은
사람 그리고 잘 나누어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내 자신은 과연 행복한
사람일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탄식하십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성전이 있는 곳, 하느님의 집이라고 칭해지는 곳이지요. 이렇게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정작 안에는 썩을 대로 썩어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를 죽이고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는 곳이 된 것이지요.
이렇게 겉으로만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정작 하느님의 뜻이 실천되지
않음에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시며 이 집이 버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 몸은 바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성전인 내 몸이 과연
주님께서 보시기에 좋아할 성전의 모습일까요? 진정으로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아름답고 화려한 성전으로 내 몸을 꾸미고 있습니까? 혹시
예루살렘의 성전이 버려지는 것처럼, 우리의 몸 역시 주님으로부터
버려지는 것은 아닐까요?
과거 예루살렘을 탄식하시는 모습으로 또 다시 슬픔을 안겨 드리지
않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눈에 보이는 가치를 쫓는 것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 주님의 뜻에 따라 사는 가치를 쫓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몸을 진정한 주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랑은 나중에 하는 게 아니라 지금 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위지안).
올리브산에서 바라본 예루살렘 전경입니다.
명품 구분법
오랜 기간 동안 기도와 명상의 수도생활을 하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참 진리를 위해 애쓰고 있는 이 남자의 모습을 가상히
여긴 하느님께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마고 약속하셨지요. 그런데
이 남자는 욕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와 명상을
하며 느낀 것들을 모두 잊고, 대신 세상의 기준만이 떠올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지상에서 최고의 자동차를 주세요.”
그러자 과연 한 번도 구경한 적이 없는 멋진 자동차가 남자 옆에
나타났습니다.
“세상에서 최고의 집을 주세요.”
이 말에 두 번째 소원으로 역시 으리으리하게 멋진 저택이 나타났지요.
이제 마지막 소원입니다. 이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음흉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여자를 주세요.”
그러자 복자 데레사 수녀님께서 나타났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최고의 여자와 이 남자가 바라보는 최고의 여자
기준은 이렇게 다릅니다. 그 다른 기준이 바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진정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할 수 있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 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무엇인가 움직여야만 한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항상 끝을 생각할 줄 아는 우리여야 합니다.'
2013년10월31일 연중 제 30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루카13,34) ---
과거를 제대로 읽으려 했고, 그리하여 미래를 예상하며 오늘을
살려고 했던 것이 과거 예언자적 삶을 살았던 이들의 공통된 모습이
아닐까? 역사 안에서 인류는 늘 어리석었다.
따라서 인류는 변함없이 예언자들을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무척 복잡한 함수관계를 따지며 영리한척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지만,
결과는 그렇게 아름다운 것 같지는 않다.
희생이 늘 함께 했던 세상, 그 희생의 몫은 보통 착한 이들의 것이었다.
이 세상의 역사를 보고 계실 하느님의 마음은 어떠실까?
이천 년 전 예수를 못박아 죽였던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는 아직도
평화가 요원해 보인다.
하느님의 희생으로도 이스라엘의 땅에는 평화가 찾아오지 못한 것
같다. 참 희화적이지 않은가?
우리의 어리석음이여! 너의 끝은 어디 있느냐?
더 이상 하느님의 이름을 걸고 서로 죽이려 하지 말아야 한다.
언제까지 예루살렘을 악의 소굴로 만들어야만 하겠는가?
예루살렘은 하나의 상징적 의미로 우리 가슴 안에 있다.
우리의 적나라한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는 예루살렘.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닌 내 안에서 내 이웃에서 내 조국에서도 똑같은
일은 반복되고 있다.
예루살렘 안에서 피맺힌 하느님의 절규를 과거에도 현재에도 우리는
못들은 척 하고 만다. 우리의 가슴 안에 참다운 예루살렘 도성을 쌓아야
한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고백이 참이기를 바란다면 예루살렘을 보아야
한다. 내 안의 예루살렘, 이웃의 예루살렘, 내 나라의 예루살렘, 내 나라
아닌 다른 나라 안의 예루살렘.
우리의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을 전하고자
한다면 무엇인가 움직여야만 한다. 우리 각자가 있는 그 자리에서부터
그분께서 원하시는 그 세상을 위해서 무엇인가 움직여야만 한다.
정말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알고 있는가?
정말 우리는 무엇이 그분의 뜻인지를 알고 있는가?
정말 우리는 아름답게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지금 당장 움직이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기 때문이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2013년 다해 10월31일
오늘은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낙엽이 떨어지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낙엽이 떨어지지 않으면 새로운 잎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낙엽이 떨어지는 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추운 겨울이 다가 올 때 낙엽이 되어 떨어지지 않으면 나무는 얼어붙은
대지위에서 양분을 얻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낙엽이
떨어지는 것은 긴 겨울을 이겨내려는 나무의 지혜이기도 합니다.
지난 주 평화신문과 가톨릭 신문은 같은 주제를 보도하였습니다. 신자들의
냉담과 청년들의 냉담을 주제로 보도를 하면서 그 원인을 찾아보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냉담의 원인은 ‘환난, 박해, 위험, 칼, 굶주림,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악의 세력은 또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예전에는 없었던 ‘신문과 방송’은 제2의 신처럼 사람들의
의식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하나의 종교에 익숙해 있었지만
지금은 다양한 종교와 더불어 살아가게 됩니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자칫 상대주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열쇠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요즘 십자가는 하나의 장식품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성당에 나오지 않는 이유도 참 다양합니다. 학교 공부 때문에, 회사일이
바빠서, 오랫동안 안 나가니까 두려워서라고 말들을 합니다. 또 많은
분들이 나중에는 성당에 나오겠다고 하십니다. 천천히 나오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저의 마음도 안타깝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 건강,
재산 모두 다 언젠가는 놓고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의 일정을 생각합니다. 아침 7시에는 서울성모병원에서 아는
분을 위한 장례미사가 있습니다. 10시 50분에는 신학교에서 수업이
있습니다. 오후 1시 20분에는 예비신학생들 담임선생님들과의 모임이
있습니다. 오후 8시에는 신도림동 성당에서 견진교리를 합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을 분주하게 보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저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지 않습니다. 일을 통해서 보람을 느낄 수 있고,
저를 도구로 써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무척 바빴다고 생각을 했는데, 세상 사람들은 정말
분주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실패해서
2억여 원의 빚이 있었는데 10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모두 갚았다고
합니다. 10년 동안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7가지의 일을 했다고
합니다. 신문에 광고지 넣는 일, 신문 배달하는 일, 학원버스 운전하는
일, 길에 버려진 폐지 줍는 일, 목욕탕 청소 하는 일, 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정말 바쁘게 하루를 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남들은 월급날이
한 달에 한번인데 자신은 여러 번이라 더 기쁘다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제부터 자신을 위해서 저금도 하고, 가족들과 함께 여행도 가겠다는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주어진 시간에 충실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루에 7가지의 일을 하면서도 누굴 원망하지 않고, 주어진 일에
충실한 분이 신앙인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은
더 기쁜 마음으로 주어진 일에 충실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벌써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내가 헛되이 버린 시간들은 없는지, 내가
나의 영혼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하루 남은 10월입니다. 의미 있는 일에, 보람 있는
일에,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에 나의 정성과 마음을 담아내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제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길 진리 생명이 한탄합니다.
2013년 다해 10월31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길 진리 생명이 한탄합니다.
잘났다고 대드는 자녀들이 많은 시대에 부모님들도 생각할 문제입니다.
자녀들에게 참된 삶의 모범을 보였는지, 자녀들도 자기 자신을 말입니다.
무시하는 풍조, 시각 감각 속물에 휘말려 내면 정서 영원을 무시하지요.
일종의 시대적 정신병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의외로 심각합니다.
어른의 말이나 성현의 말들을 무시하는가하면 영의 세계까지 무시하기에.
지도자들을 보시며 눈물까지 흘리며 한탄하셨던 예수님 모습이 생각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카 13,34)”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순교로 가는 길
2013년 다해 10월31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
복음 : 루카 13,31-35
< 순교로 가는 길 >
이승아씨가 ‘화니하니’란 자신의 블로그에 ‘내 것이 아닙니다...’
란 제목으로 2013년 10월 1일에 올린 글입니다. 사진을 보니 매우
큰 집에 남부럽지 않게 사는 젊은 자매님입니다. 개신교 신자이지만
몇 단어는 천주교식으로 바꾸었습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한 때는 이 아름다운 집이 제 가장 큰 자랑이었습니다....
심혈을 기울여 꾸민 아름다운 우리 집.....
잡지에 여러 번 나왔다고 내심 자랑스러워했던 우리 집....
행여나 때가 탈까.... 혹여나 먼지 탈까....
닦고 쓸고 했던 우리 집....
하지만 남편이 아프고 보니 제가 있을 곳은
궁궐 같던 우리 집이 아니라 몇 평 안 되는 비좁은 병실이더군요....
피곤한 내 한 몸 누일 곳은 푹신하고 안락한 라텍스 침대가 아니라
딱딱하고 좁은 보조 침상이더군요.....
내 꺼라 믿었던.... 남편과 공동명의로 되어있던 자랑스럽던 내
집도 알고 보니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라만 봐도 뿌듯했던... 참으로 고운 접시들.... 참으로 이쁜
그릇들.... 난 왜 이렇게 꽂히는 게 많지?
남들은 그릇이면 그릇... 가구면 가구.... 옷이면 옷....
하나만 꽂힌다는데 난 왜 이 모든 것을 다 갖고 싶지? 라며
투덜대게 만들었던 내 못 말리던 그릇 사랑.....
그 수많은 이쁜 그릇들도
남편과 함께 하는 병실에선 아무 소용이 없더이다!
제가 황량한 병실에서 쓸 수 있는 건....
보잘 것 없는 플라스틱 접시와 종이컵뿐이더군요....
15자 붙박이장에 가득한 수많은 옷들과 제가 사랑해 마지않던
명품 백들.... 이 또한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하는 병실에선 편한 츄리닝과 레깅스면 족하더이다....
귀히 여기던 명품백도 필요 없더이다....
어디 그 뿐인가요?
이십년 넘게 나의 자랑이었던....
나를 빛나게 해준다고... 나를 완전케 해준다고 믿었던 내 남편도...
제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의사들은 말합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이 또한 내 것이 아니라고.....
이젠 압니다.... 내 분신.... 내 생명.... 내 사랑하는 아이들조차 제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이 아이들 또한 그 분이 제게 잠시 맡기셨던 선물임을 제가 잊고
있었네요!
이와 같은 이유로.... 근심, 염려 또한 제 것이 아닙니다....
적혈구 수치가 모자라 수혈을 해도... 의사가 제 아무리 무서운 말을
해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 아버지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1베드 5:7)
근심, 염려는 다 주께 맡기고 내 남편 또한 주께 맡기고....
저는 이 밤 또 기다립니다....
죽은 나자로를 살렸던 예수님이.... 베짜타 연못의 38년 된 병자를
찾아가셨던 예수님이.... 친히 내 남편을 찾아오셔서 살려주시길
기다립니다....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말씀해 주시길 기다립니다....
그 분의 피값으로 살리셨던 내 남편을
또 다시 살려주시길 애타게 기도합니다....
내 것이 아닌 걸 내 것인 양 소유하며 자랑하며 욕심내었던
제 무지를, 제 교만을, 제 과거를 회개하며 눈물로 기도합니다....
의사의 권유로 내일 호스피스로 옮기는 울 화니가
무덤에서 걸어 나온 나자로처럼
그 곳을 건강하게 걸어 나온 최초의 증인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하느님이 함께 하시면 불가능한 일이 없을 줄 믿습니다!!!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인생은 늘 선택의 연속입니다....
저는 오늘도 희망을 선택합니다.... 절망을 거부합니다....
내 남편이 살아서 하느님을 자랑하고 증거할 수 있도록 그 분께
매달립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평생 그 분을 사랑하고 섬기겠지만....
오늘은 꼭 그리 해주시길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내 기도가....여러분의 기도가....
오늘 밤 하늘 보좌를 흔들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의 오른손이 드높이 들리시고 주님의 오른손이 위업을 이루셨다!
나는 정녕 죽지 않고 살리라. 주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
(시편 118 :16-17)
이 자매는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줄도 알고 희망할 줄도 아는 훌륭한
신앙인 같습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는 이 세상에서 지키려고 하는
모든 것이 무의미해 진다는 것을 진솔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와서 헤로데 왕이 예수님을 죽이려한다고
겁을 줍니다. 이렇게 말하면 겁을 먹을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서 예수님은 왕을 여우라고 하며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갈
것이니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겁을 먹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가 없다.”
당신의 목적이 바로 예루살렘에서 순교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차피 죽어야 하는데 죽음으로 위협한들 겁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죽기를 각오한 사람 앞에서 이 세상 모든 위협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겁을 먹는 이유는 아직도 이
세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생기는 것이 바로 ‘저항’입니다. 그 저항을 원치
않는다면 그냥 멈추어서면 됩니다. 그러나 나를 미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은 더 큰 저항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은 버려야합니다.
우리는 왜 남이 나를 미워하는 것을 두려워할까요?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예수님은 우리도 당신 길을 따라
순교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가장 두려움 없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 않도록 힘쓰며 사는 삶이 더 두려움 가득한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 필요도 없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 수도 없습니다. 잃을 것이 없어야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자신의 목적지가 순교임을 명확히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잃을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죽음 앞에서 결국은 하나도 나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초는 태워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소금은 녹여지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랑으로 소진되어 순교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믿음은 이 뜻을 명확히 내 마음에 새겨줄
것이고 다 잃어도 두렵지 않은 마음을 가지게 할 것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 주시는 것에 관심을 가집시다.
2013년 다해 10월31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루카 복음 13장 31~35절)
예전에 어떤 신부님의 글에서 이런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제들에
대한 존경이 없으면 사제 성소도 감소할 수밖에 없다.. 유럽 교회의
성소자가 주는 이유 중에 하나도 그런 데 있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를
하셨던 거 같은데요. 우리 나라에 성소자가 많은 걸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좌보다는 주임신부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예전에 신학생 때 본당에서 출강을 하시던 교수
신부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신부들이 본당에 있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 거 같다.. 신학교에서는 내가 목이 아파서 겨우
겨우 미사를 봉헌해도 관심 가지는 신학생이 아무도 없는데, 본당에서는
기침 한 번만 해도 홍삼에 보약에.. 몸에 좋다는 온갖 것들이 수북이
쌓인다... 아마 그런 관심과 사랑 때문에 본당 신부로 살기를 더 바라는
게 아닐까...’ 하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런 일이 생기나.. 하고 유심히 본 적이 있는데요. 보좌
때는 그런 일이 안 생기는 거 같습니다. 보좌 2년 차 때 목이 꽤 오랫동안
원래 상태로 돌아오지 않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피로한 것도 있었고,
목이 약해서 그런 것도 있었는데요. 당시에 은근히 ‘내가 이렇게 목이
아프니까 신자들이 용각산이라도 사 줄려나..’ 했는데 아무 것도
없더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다른 거 같습니다. 제 몸이 조금 안 좋아 보인다 싶으면,
신자들이 걱정해 주시고, 목에 좋은 거 갖다 주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해 주십니다. ‘본당 신부에게 참 잘해 주시고 많은 관심과 사랑을
주신다..’ 하는 느낌을 많이 받는 거 같은데요. 아마도 그런 모습들이
알게 모르게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 보니 신자들 가운데도 감기나 몸살에 걸리신 분들이 있는 거
같은데요. 그런 분들에게 다른 신자 분들이 관심도 가져주시고, 기도
해 주시고, 몸에 좋은 것도 갖다 주시면, 그 모습을 보고 따뜻한
공동체구나.. 하면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과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만 모인다고 되는 것이 아닌 거 같습니다. 더 중요한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오늘 복음에서와 같은 말씀을 듣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정말 중요한 분에게 시선을 두지 못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모습.. 종종 보게 되는 거 같습니다. 큰 본당에서는 잘 느끼지
못했던 건데요. 여기서는 작은 공동체라 다 보입니다. 고해성사도
안 보고 성체도 안 모시는 분, 그 상태를 오래 지속하시는 분, 주일에
일이 생기면 성당에 안 나오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분들, 그리고
주일 미사만 간신히 지키고 주님의 날에 그분의 일은 생각도 않고,
공동체와의 친교도 생각하지 않는 분들.. 그분들을 보고 있으면
10년 뒤의 공동체의 모습이 그리 밝지 않은 거 같습니다. 신자들
연령대가 높은 것이 걱정이 아니라 더 중요한 분과 일에 시선을
두지 않고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더 큰 걱정인 거 같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시선과 관심을 주님께 두고, 그분께서 교회를 통해
주시는 것들을 기쁘게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공동 작업을 할 때 신자들이 나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하신다.
아침 시작할 때는 몇 명 안 보이시다가 조금 후면 많이 나오셔서
감사하게 하는데, 다음 날 아침에 보면 또 아무도 안 보여서 원망하게
하고 조금 후에 또 많이 나오셔서 감사하게 하고..
신자들이 나를 들었다 놨다 하신다~^^;
- 밤송이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글 -
◈ [기타]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2013년 다해 10월31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루카 13, 31-35)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굴뚝 청소한 두 사람 중 한명이
얼굴에 검정이 묻었는데, 세수를 한 사람은 얼굴에 검정이 묻지 않은
사람이다.’ 세수를 한 사람은 남의 얼굴을 보고 자신도 얼굴에 검정이
묻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하고 얼굴을 닦았습니다.
반면교사라는 말처럼 세상의 부정적인 모습을 바라보면서 교회도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아야하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세상은
과학문명과 화려한 전자, 전파, 영상 등 다양한 문화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화의 많은 부분들이 하느님의 계명에 반하는
그런 현상으로 급격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교회도 하느님의 계명에서 멀리 떠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많은 세상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이 반 생명문화에 빠져있을 때, 교회는 얼마나 안타깝고 열절한
마음으로 지키려 했는지, 또 주님의 자녀들에게 세상의 누룩을
조심하도록 얼마나 최선을 다하여 돌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르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계명에서 멀어져가는 교회를 위해서
끊임없이 성인들을 보내주셨고, 어머니 마리아를 보내주십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러한 사자들의 말씀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많은
박해를 하고, 조롱하기도 하고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조금이라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현재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지 알 수 있으련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약 2천 년간 버려졌었고, 이제 다시 모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또 성모님을 통해서 말씀해주신 대로
주님의 오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성서에 예고된 대로 많은 고난과 박해와 기근과
지진과 전쟁이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죽음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성모님의 메시지대로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여라!” 라는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하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될 것이고 하느님의 이끄심을 느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 희망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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