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화과 나무 -
☆ 2013년 다해 11월29일 (녹)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수원] 그분께서 더 가까이 오실 때 -
수원교구 오산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다니 7, 2ㄴ - 14
† 복음 : 루카 21, 29 - 33
★ 다니엘 예언자는 환시를 통하여 네 마리의 짐승을 본다. 이는 네
강대국의 역사를 말해 주는 것이다. 환시 안에서 짐승들은 강력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지만, 하느님께서 그들을 물리치시고 영원한
나라를 세우신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에 잎이 돋으면 여름이 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세상의 위기를 볼 때에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깨달으라고 이르신다. 하느님의 나라는 평화 안이 아니라 고통 안에서
싹트는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그림자가 있습니다. 너무나 짙은 그림자도
있고, 옅은 그림자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삶에도 참으로 많은 그림자가
있습니다. 슬픔의 그림자, 분노의 그림자, 견딜 수 없는 아픔의 그림자
등입니다. 때로는 그림자가 너무나 짙어서 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림자는 항상 빛을 전제로 합니다. 그림자가 짙다는
것은 그만큼 빛이 강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짙으면 짙을수록 더
강한 빛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삶에 드리워진 그림자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그림자의 어둠이 짙을수록 사실은 구원의 빛이 더 강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사람들 대부분은 그림자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고 자기 안의 그림자를 없게 해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모든 일’은 온갖 피조물의 파괴, 피조물과 피조물
간의 관계 파괴입니다. 곧 세상의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림자를 보거든 그 너머의 빛을 보라고 이르십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어제 우리는 세상 끝 날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질 때에 온다는
사실을 묵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교회와 세상은 어려움을
겪을 것임을 되새겼습니다. 성전의 시대가 끝나고 예수님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종말의 시기를 이미 겪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시기 안에 드리워진 그림자 너머의 참빛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미래를 볼 수 있는 눈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2013년 다해 11월29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너희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 루카 21,29-33
미래를 볼 수 있는 눈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새로운 싹이 트면
계절의 변화를 느끼듯 세상의 여러 혼돈과 징표를 보거든 그것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나의 혼돈은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데 꼭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하나의 풍파가 몰아치면
그것을 계기로 새로운 틀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혼돈과 어둠
속에서 움터 오르는 새 하늘, 새 땅의 창조와 광명을 내다보는 눈”
(이현주목사), 혜안을 가진 이는 행복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혼돈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나라가 우뚝
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또한 구원 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마음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마음 한구석엔
두려움이 있습니다.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 ‘각자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성직자나 수도자를
떠 바쳐 위하고 거룩하게 보지만 그들 또한 부끄러움이 있고 자비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신분을 떠나서 모두가 맑고 깨끗한 주님을 닮은
마음의 소유자로 부끄러움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들은 언제나 살아있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그에 걸
맞는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가슴에 남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 것은 사라지지만 주님의
말씀을 차지한 사람은 영원합니다. 은혜를 풍요롭게 하는 것은 담을
그릇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19,26).
하셨습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 뻔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서도 걸려 넘어지고 나서야 후회를 하고 새로운
다짐과 시작을 합니다. 마지막 날이 언제 올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명한 것은 “그 날이 오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 날이 오늘 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때에 바로 지금 주님을 떳떳이 만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어떤 이는 건강을 자신했는데 생각하지도 못한 사고로
주님 앞에 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삶의 주관자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앞에서 언제나 당당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말씀 안에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청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내 마음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살아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가슴이 벅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당신
말씀은 제 발의 등불, 저의 길에 빛”(시편 119,105)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야고1,22).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우리의 준비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2013년 다해 11월29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언젠가 신부님들을 태우고 어느 곳으로 차를 운전해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퇴근 시간에 걸려서 차들이 꽤 많더군요.
그래서 동승하신 신부님들에게 어느 길로 가야 빠를 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다들 “알아서 가세요.”라고 말하는데, 한 신부님이
“** 길로 가. 그 길이 그래도 훨씬 빠르다니까.”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신부님의 말을 듣고 그 길로 향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길은 빠른 길이 아니라, 더욱 더 막히는 길이었습니다.
평상시보다도 2배 이상의 시간이 소비되었으니까요.
더 빨리 가려고 했다가 이 신부님의 말을 들어서 더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괜히 말을 들었다는 생각과 함께, ‘저 신부님은 늘 잘
모르면서도 아는 체 한다니까.’ 등등의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지요.
저녁에 성찰을 하던 중에 문득 낮에 있었던 이 일이 떠올려졌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지요. 그 길은
제 부모님 집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잘 아는 길이었습니다.
따라서 길이 막힌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도 길을 묻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겉으로는 혹시라도 더 빠른 길이 있을까 하고 물어
보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책임을
대신 다른 신부에게 돌리면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알면서도 아는 체 하지 않고 또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 행동들. 어쩌면
길을 말했던 그 신부님 탓을 할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탓을 말해야 할
것이지요. 부정적인 시각을 다른 신부에게 돌릴 것이 아니라, 내 안으로
가져와서 스스로의 부정적이고 이기적인 시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책임감이 있는 행동을 가져야 하며, 또한 긍정적이고 사랑 가득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삶이 이 세상의
마지막 순간, 주님 앞에 심판을 받을 때를 잘 준비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잎이 돋는 나무들을 보면서 여름이 가까이
온 것을 아는 것처럼, 각종 표징들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들을
깨달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날은 분명히 오고 있으며 점점
가까워지고 있으니, 다가올 하느님 나라에 대비하기 위한 노력들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준비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나만 잘 사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마음들? 각종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의 축적만을 갖는 것?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은 자신이 취하고, 나쁜 것들은 남들에게 돌리는
행동들? 잘 한 것은 자기 탓이고, 못한 것은 남 탓이라는 책임 전가?
이러한 것들이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가 아니지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책임감 있는 행동과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그 나라에 들어갈 거룩한 준비가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그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철저히 행하는 우리가 됩시다.
친절한 말 한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
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지는 않습니다.
(찰스 해돈 스펄전)
강화지구 성소후원회 회장님들과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사진은 모임이
있었던 강화성당.
방 청소
얼마 전에 하루 잡아서 방 청소를 신나게 했었습니다. 힘들게 청소한 뒤에
깨끗해진 방을 보면서 얼마나 흐뭇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제 늦게 제
방에 들어와서 들은 생각은 ‘청소해야겠다.’라는 것입니다. 청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정리 정돈을 잘 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청소 한 번 했다고 계속 깨끗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기적으로
청소를 해야지만 깨끗함이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정기적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방은 더욱 더 지저분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지요.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고해성사 한 번 봤다고 영원히 깨끗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주 성찰을 하면서 마음의 때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깨끗한 마음을 계속해서 간직할 수 있습니다.
방 청소하듯이 내 마음의 청소도 자주 하십시오. 한꺼번에 몰아서 하기에는
너무나 벅차지 않습니까?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 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2013년 다해 11월29일
방에는 ‘러닝머신’이 있습니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추우면 방에
있는 러닝머신으로 운동을 합니다. 그냥 운동을 하면 지루하지만
앞에 놓인 텔레비전을 보면서 운동을 하면 시간가는 줄을 모르고
운동을 하게 됩니다. 여러 가지 프로가 있지만 집중을 잘 할 수 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운동을 하는 것은 ‘드라마’입니다. 드라마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삶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드라마는 그 시대의 문화와
삶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기억나는 드라마들이 있습니다. ‘아씨, 여로,
임금님의 첫사랑, 사랑과 야망, 여명의 눈동자, 사랑이 머길래, 모래시계,
용의 눈물, 다모, 대장금, 빛과 그림자, 골든타임, 굿 닥터, 오로라 공주’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참 많은 드라마를 보면서 살았습니다. 한국
사람은 드라마를 좋아하기도 하고, 잘 만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드라마는 배우가 있고, 그 배우들을 연출하는 감독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만들어가는 작가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만드시는 한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세상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무대입니다. 태양, 구름, 바람, 꽃, 새와 나비, 바다와
물고기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만드신 소품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사울, 다윗, 솔로몬, 에스텔, 롯,
요셉, 마리아, 빌라도, 베드로, 바오로 이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만드시는 ‘구원의 역사’라는 드라마의 출연진들입니다. 물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주어진 사명과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 세상에 드러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좋은 배우는 어떤 사람일까요? 젊고 매력 있는 외모의 배우도 있습니다.
뚱뚱하고 나이든 배우도 있습니다. 악역을 맡는 배우고 있고, 선한 역을
맡는 배우도 있습니다. 좋은 배우는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배우입니다. 감독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표현하는
배우입니다. 외모, 체력, 나이, 성별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래
동안 출연하는 것도, 짧은 시간 출연하는 것도 큰 문제는 아닙니다.
얼마나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는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다섯 가지 특징을 지닌 존재라고 합니다.
첫째, 인간은 욕망을 지닌 존재이지만, 그 욕망은 절제되어야 합니다.
둘째, 인간은 모순된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 모순된 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랑하니까 헤어지는 것’도 인간이고,
남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것도 인간이고, 자신의 욕심 때문에
타인을 죽이는 것도 인간입니다.
셋째, 인간은 사이에 있는 존재입니다. 선과 악 사이에 있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는 존재입니다. 혼자서 살 수 없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넷째, 인간은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 영원을 생각하는 초월적 존재입니다.
명상과 묵상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존재입니다.
다섯째, 그래서 인간은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나그네가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듯이, 인간은 삶의 여정을 통해서
죽음이라는 문을 넘어서야 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유전자의 전달기계가 아니고, 인간은 이기적이거나 이타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시편 8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천사보다는
못하게 만들어졌어도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귀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고, 선과 악 사이에 있으며 중간자입니다. 또한
인간은 천성을 따르는 존재입니다. 천성을 따르는 사람은 인성을 갖는
것이고, 이 인성을 잘 닦는 것이 道입니다. 이 도를 알아 과는 과정은
敎라고 말을 합니다. 인간은 단순히 유전자를 전달하는 유기체가 아니라,
하늘의 뜻을 따라서 도를 공부하는 성품을 지닌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그분께서 더 가까이 오실 때
2013년 다해 11월29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 너희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
복음 : 루카 21,29-33
< 그분께서 더 가까이 오실 때 >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에 실린 ‘아내의 겨울’이란 이야기입니다.
정호는 인력시장에서 그날그날 돈을 벌어가며 가정을 꾸려가는
가장입니다. 그러나 요즘 경기침체로 공사장 일을 못한 지 벌써 넉
달이 되어갑니다. 집세도 널 달 동안 내지 못해 밀려있습니다. 정호의
아내는 지난달부터 시내에 있는 큰 음식점에서 일을 다니며 정호 대신
힘겹게 가장을 꾸려나가고 있었습니다.
정호는 그날 저녁도 친구에게 일자리를 부탁하기 위해 오후가 되어
나갔습니다. 친구는 일자리 대신 삼겹살과 소주를 샀습니다. 술에
취에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집으로 들어설 무렵 귀여운 딸아이가
그에게 달려와 안겼습니다.
“아빠, 엄마가 오늘 고기 사왔어. 아빠 오면 해먹는다고 그래서
아까부터 아빠 기다렸어.”
일을 나갔던 아내는 늦은 시간 저녁 준비로 분주했습니다.
“사장님이 애들 갖다 주라고 고기를 싸주셨어요. 그렇지 않아도
영준이가 며칠 전부터 고기반찬 해달라고 했는데 어찌나 고맙던지요.”
“집세도 못 내면서 고개 냄새 풍기면 주인 볼 낯이 없잖아.”
“저도 그게 마음에 걸려서 지금에야 저녁 준비한 거예요. 열한 시
넘었으니까 다들 주무시겠죠, 뭐.”
아이들은 불고기를 맛있게 먹었고 그것을 보는 아내의 얼굴도 행복해
보였습니다. 아내는 정호 쪽으로 고기 몇 점을 옮겨놓으며 말했습니다.
“당신도 어서 드세요.”
“나는 아까 친구 만나서 저녁 먹었어. 당신이 배고프겠다. 어서 먹어.”
정호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고기 몇 점을 입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마당으로 나왔습니다. 정호는 달빛 내려앉은 수돗가에 쪼그려 앉아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습니다.
가엾은 아내..., 아내가 가져온 고기는 음식점 주인이 준 게 아니었습니다.
숫기 없는 아내는 손님들이 남기고 간 쟁반의 고기를 비닐봉지에 서둘러
담았을 것입니다. 아내가 구워준 고기 속에는 누군가 씹던 껌이 노란
종이에 싸인 채 섞여 있었습니다. 아내가 볼까 봐, 정호는 얼른 그것을
집어서 삼켜버렸습니다. 아픈 마음을 꼭꼭 감추고 행복하게 웃고 있는
아내의 마음이 찢어질까봐...
정호는 늦은 밤, 아내의 구두를 닦습니다. 별빛보다 총총히 아내의
낡은 구두를 닦으며 내일의 발걸음은 오늘보다 가벼울 거라고 희망을
가져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박해도 당하고 고난도 당하고 무서운 일들도
일어날 것인데 그 때 절망하지 말고 고개를 들라고 하십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바닥을 치면 이제는 오르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아이가 아프면 건강할
때보다도 신경이 더 쓰이게 마련입니다. 정호는 아내가 힘들고 어려운
처지를 잘 받아들이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아내에 대한 사랑이 극도로
증가하였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하느님은 당신 자녀들이 당하는
고통을 보며 더 신경을 쓰십니다.
일본의 가톨릭 작가인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은 포르투갈, 로마,
일본의 사료를 정밀히 조사한 실화 역사소설입니다.
페레라(Christopher Ferreira) 신부는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유럽에서
가장 존경받던 국제적 인물이었는데, 그가 고문에 못 이겨 배교했다는
보고가 포르투갈에 전해졌습니다. 격분한 그의 제자 세 명이 소식의
진위를 확인하고자 생명을 걸고 일본으로 잠적해 들어갑니다.
그 중 한 명인 로드리고(Sebastian Rodrigues)가 이 소설의
주인공입니다. 그도 결국은 체포되어 ‘후미에’ 앞으로 끌려갑니다.
‘후미에’는 예수 상이 새겨진 동판을 나무판에 붙인 것인데, 그것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은 예수를 버린 것으로 간주하여 살려주었던
것입니다.
로드리고 신부가 후미에 앞에 섰을 때, 그것은 너무나 많이 밟혀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그러진 얼굴이 로드리고 신부에게는
울고 계신 것 같기도 하고 몹시 고통스러워하시는 모습 같이 보였습니다.
그가 유럽에서 보던 왕관을 쓴 예수, 백인들이 편안하게 믿는 승리자
예수의 모습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고통 받고 함께 울고 함께
괴로워하는 예수였습니다. 주저하는 로드리고 신부에게 후미에의
예수가 말합니다.
“나를 밟아라. 나는 본래 밟히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냐? 나를
밟을 때 네 마음이 아플 것이다. 마음으로 아파해 주는 그 사랑만으로
충분하다.”
“주여, 저는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있는 것을 원망했습니다.”
“나는 침묵한 것이 아니다.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드리고가 예수 상을 밟는 순간 새벽닭이 웁니다. 그 옛날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할 때 베드로의 괴로움을 예수께서 이해하시고 용서하시며
함께 괴로워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당신을 밟아야만 하는 어려운 때에도 그 사람을 이해하시며
그 사람과 함께 계십니다. 침묵하실지라도 시선을 떼지 않으십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 절망하지 말고 고개를 드십시오. 내가
땅만 바라보아야 할 때 하느님께서 더 가까이에서 우리를 지키시고
계십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십자가 없는 소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옳음을 선택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식별과 용기입니다.'
2013년11월29일 연중 제 34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루카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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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이라는 말을 생각해 본다. 소명(召命), 사명(使命), 성소(聖召).
이 말은 모두 ‘부르심’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 아빠이신
성부의 부르심에 응답하셨다. 그 응답에는 엄청난 고통이 함께했지만
의연하게 그 모든 소명을 이루셨다.
사람들은 폼 나게 살기를 원한다.
폼 나면서 좋은 역할을 맡고 싶어한다.
훌륭한 평가를 받으면서도 고통이 없는 그런 역할, 좋은 일이면서도
갈등이 없고 신나는 역할, 하느님의 뜻이면서도 어렵지 않은 역할을
말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소명에는 십자가가 따른다.
십자가 없는 소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은 모두 십자가를 요구한다.
그 십자가를 피해서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다.
이는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에서 자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여기서 하나의 결론이 나온다.
어차피 주어진 고통이라면 그 고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
앞이 보이지 않는 듯한 절망과 고통이 주어진다면
그때가 비로소 하느님을 제대로 뵐 수 있는 은총의 시간임을 확신하자.
묶인 이들에게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이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이들에게는 자유를 준다. 말 그대로 기쁜 소식, 복음이 아닐 수 없다.
정말 신나는 일이 아닌가? 우리 모두에게 예외 없이 주어진 하느님의
부르심임을 명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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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이병호 주교님께서 며칠 전 문제화된 시국미사를 함께 봉헌했던
갓 서품 받은 사제들과 그 다음 날 도보 성지 순례를 하시면서 하셨다는
말씀이 내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게 한다.
"지금 이 세대가 우리에게 또 다른 순교를 요구하고 있다. 사제는 소모품임을
기억해라. 소모품이기에 아낌없이 사용하라. 싸워야 한다면 싸우고 죽어야
한다면 기꺼이 죽어야 한다. 사제에게 두려울 것이 무엇이냐? 예수님도
그렇게 가장 쓸모 있는 소모품으로 세상 안에서 살다가 돌아가셨다. 사제도
그렇게 소모품으로 살아야 한다. 다만 그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에페소서
6장에 나오는 방어장비 뿐 만 아니라 공격무기도 준비해라. 그 공격무기는
성령의 칼을 쥐는 것 곧, 하느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불의와 맞서는 길이며 이 박해를 이겨낼 힘이다."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예수님은 인간이며 신이시기에
2013년 다해 11월29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예수님은 인간이며 신이시기에
세상살이는 어쩌면 아날로그가 차지하는 영역이 대부분이란 생각입니다.
그러나 프로그램이나 기계들은 디지털식 작동이 대부분이라 봅니다.
어쩌면 세상을 벗어나면 정확한 디지털 세상이 아닐까 생각 됩니다.
인간의 감정이나 물질의 열량이 아날로그방식이니 동작이 그렇다 봐요.
비 물질의 세계에서는 질량 무게라는 게 없으니 디지털식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인간이며 신이시기에 아날로그와 디지털 표현을 다 쓰셨네요.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루카 21,33)”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기타] 종말
2013년 다해 11월29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 송영진 모세 신부
종말
<너희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루카 21,29-33)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 21,29-33)."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지역은 여름이 추수철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름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추수철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추수'는
종말과 심판을 상징합니다. 지금의 우리 상황으로 바꾸면, "잎이 시들어서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 가을이(추수철이) 가까이 온 줄을 알게
된다."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러한
일들'은 앞에서 말씀하신 '전 우주적인 어떤 표징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루카 21,25-26)."
'전 우주적인 표징들'이 나타나는 때는 종말, 재림, 심판의 때입니다.
(루카복음 21장 8절-17절의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 전쟁, 반란, 지진,
기근, 전염병, 하늘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 박해 등은
종말 전의 재난들일 뿐이고, 종말의 표징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라는 말씀은"종말의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가 되었음을 알아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복음 선포를 시작하실 때에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라고
하셨는데, 그때 말씀하신 '가까이 왔다.' 라는 말과 지금 종말을
말씀하시는 상황에서 '가까이 왔다.' 라는 말은 다릅니다.
복음 선포를 시작하실 때에는 '이미 시작되어서 진행 중이다.' 라는
뜻이었고, 지금의 상황에서는 '완성될 때가 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종말과 재림은 신앙인들에게는 구원을 받는 때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그러나 구원받을
자격을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심판을 받고 멸망하게 되는 때입니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라는 말은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말이 어떤 특정한 시기를 가리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이 강조하는 것은 종말의 '시기'가 아니라, 종말의
'확실성'입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마태 24,36), 그 일은
분명히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종말과 재림을 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이
종말의 때가 아니라고 해서 내일도 아닐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루카 21,34)."
회개하지 않고 대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날이 멸망의 '덫'에
사로잡히는 날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지뢰밭을 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발 앞에 지뢰가
없다고 해서 방심하면 걸음을 옮기는 순간에 지뢰를 밟을 수 있습니다.
또 권력이 있고 돈이 많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무슨 지하
벙커 같은 피난처를 마련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루카 21,35)."
하느님의 심판은 '모든 사람'이 대상입니다.
'2012' 라는 영화를 보면, 대재난이 닥치자 노아의 방주 비슷한 것을
만들어서 일부 사람들이 살아남는 것으로 되어 있고, 어떤 영화를 보면,
지구의 재난을 피하기 위해서 다른 별로 피난을 가는 내용도 있는데,
일부라도 살아남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재난은 하느님의 종말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든 멸망을 당하든 하느님의 종말은 전 우주적인 일이고, 모든
생명체를 대상으로 한 일입니다. 그러니 피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피난처가 될 수 있는 별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늘 깨어 기도하여라.' 라는 말씀은 '기도만' 강조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항상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 회개하면서 구원과 생명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일은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지금부터
당장 시작해 할 일입니다. 종말이 좀 늦게 오더라도(살아 있는 동안에
안 오더라도)
우리의 수명은 언젠가는 끝날 것이고, 누구나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송 영진 모세 신부 -
◈ [기타] 시대의 징표(루카 21,29-33)
2013년 다해 11월29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시대의 징표(루카 21,29-33)
오늘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잎을 보고 계절을 알듯이 시대의
징표를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노아의 홍수 시대에도 하느님께서는 ‘왜 인간을 만드셨던가?’ 라며
마음 아파하셨고, 소돔과 고모라 시대에도 천사들을 보냈지만 그들과
재미를 보자고 젊은이에서 노인까지 모여들어 천사들을 내어 놓으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사람들이 어느 날 부터인가 세상 돌아가는 모습들을 보고 말세라는
말을 했지만, 정작 교회는 말세에 대하여 얘기를 하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세는 그 세대가 얼마나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 있는지
아닌지를 통해서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얼마나
윤리적으로 타락했는지, 얼마나 악한 마음을 먹고 살아가는지 등을 볼
수 있고, 하느님을 얼마나 경배하며 하느님의 법을 지키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먼저 신자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많이
떠났다는 것입니다. 주일 미사 참례율은 30%도 안됩니다. 고육지책으로
평일 중 하루를 대체하자는 주교님들의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주일의
개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사들에 대한 존경의 의미와 거룩함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고해성사나 모령성체가 너무 빈번하다는 것입니다. 대죄
중에 있을 때는 분명히 고해성사를 보고 성체를 모셔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고, 또 10계명과 같이 중요한 계명들을 어겼을 때는 고해성사를
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순결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죄책감도 갖지 않습니다.
세상을 바라본다면 더욱 비참합니다. 자주 말씀드렸지만 동성혼인법이나
낙태법 등이 만연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 전환 수술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런 것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윤리적으로 무감각해집니다.
또 자살을 비롯하여, 어린이들이나 나약한 사람들을 납치하여 장기를
적출하여 매매하는 일들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서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징표는 하느님께서 직접 사자를 보내시어 이 시대에 대하여
경고를 주시는 것들입니다. 이미 여러 성인들을 통해서 자비의 하느님을
알려 주셨고, 성모 마리아를 통해서 회개를 호소하셨습니다. 성모님은
곱비 신부님을 통해서 표범같이 생긴 짐승(성모님께서 사랑하시는
사제들에게 405번)과 어린양같이 생긴 짐승(406번) 등 묵시록에 대한
해석까지 해주셨습니다.
모든 어머니들이 자녀들이 위험에 처할 때 대처하거나 경고하듯이
인류의 어머니께서는 세상에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말씀해주십니다.
더 나아가서 자비의 하느님께서는 누구든지 자비의 기도를 바치고
자비를 청하면 임종의 순간에 구원에 필요한 은총을 내려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기적적이고 영적인 불혀가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을
정화시키리니, 그들은 ‘하느님의 빛’ 안에서 자신들을 보고 그분의 ‘신적
진리’의 날카로운 칼에 꿰뚫릴 것이다.”(574번) 라고 성모님은 말씀해
주시며 제2의 성령강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믿든 믿지 안 믿든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거룩한 사랑으로 인간 마음의 문을 여시고, 모든 이의 양심을
비추어 주시리라. 그리하여 사람마다 하느님 진리의 타오르는 불꽃 안에
있는 자신을 보게 되리라. 그것은 흡사 최후 심판의 축소판 같을 것인데,
그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화로운 왕국을 세상에 세우시리라.”
(383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끝까지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의 손길을 뻗어
주십니다. 그 때가 오면 겸허히 주님의 자비를 청하며 받아들일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하며 기다려야할 것입니다.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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