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례자 요한 -
☆ 2013년 가해 12월12일 (자)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수도회] 길이 아니라 이정표인 세례자 요한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제1독서 : 이사 41, 13 - 20
† 복음 : 마태 11, 11 - 15
★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온갖 죄로 말미암아 벌레와 구더기
같은 삶을 살아왔지만, 여전히 그들의 구원자이심을 자처하시며 당신을
신뢰하라고 말씀하신다(제1독서).
★ 요한 세례자는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다. 모든 예언자가 그러하듯이
그는 박해 속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그러나 요한 세례자마저도
신약의 시대를 온전히 깨닫지는 못하였다(복음).
◈ 오늘의 묵상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이
말씀에는, 구약의 그 어떤 인물도 요한보다 클 수가 없지만 신약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은총을 입은 이는 요한보다도 크다고 할 수 있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곧 구약에서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하느님의 사랑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다른 방식으로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이 만일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가장 작은 이’로 살아가기를 자처했다면, 그는
하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에서 그는 가장 작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반면, 일상에서
자신을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여기고 살아간다면, 그는 지상적인 삶에
머물 뿐 하늘 나라를 살아간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위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다시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내가
세속적인 삶을 산다면 모든 인간 중에 나보다 잘난 사람이 없는 줄
알고 지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 나라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이상 그
누구보다 나를 낮추고 작게 살려 한다.”
실제로 요한 세례자는 자신을 낮추며 그 누구보다도 작은 이의 삶을
택하였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하며 예수님 앞에서 작아졌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지내며 들꿀과
메뚜기를 먹고 살았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가장
작아졌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작아졌기에 그는 천상의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무슨 소리하는 것이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3년 가해 12월12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 마태오 11,11-15
무슨 소리하는 것이야
요한을 구약시대의 마지막 인물로 얘기합니다. 그런데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그의 임무에 있어서 위대한 인물일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위대한 인물입니다. 주님께서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11,11)
고 선언하였습니다. 당대의 어느 누구 보다도 뛰어난 사람, 과거에
있었던 수많은 하느님의 사람보다 더 뛰어난 인물로 요한을 칭찬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11,11)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결국 요한은 이미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며 새로운 시대를
살기 시작하였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성취되고 완성되어
거기에 속한 사람은 은총 속에 구원된다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신약의 사람들은 아무리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구약의 어떠한 위대한 예언자보다 더 높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가 그만큼 크다는 말씀입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보다도 더 크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다 주님의 덕분입니다.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세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면서 이미 미래를 준비한
인물이기에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기도 하지만 새 시대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마태11,12). 하신 것을 보면 세례자 요한 때부터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현존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외치다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목이
베어졌습니다.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마귀들의
힘을 빌어 일한다고 비난 받기도 하였으며 사람들은 언덕 위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려 하였으며 적대자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한과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으나 결국은 처참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들이 하느님 나라가 폭행을 당한
모습입니다.
유혹사화를 보면 사탄은 모든 것을 노립니다. 빵으로, 명예로,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정치적인 유혹으로 적대자들의 뒤에 숨어서 하느님의 통치권을
빼앗으려 하며 그 자리에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어둠의 세력은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함을 우습게
여기고 성을 상품화하며 물질만능주의의 노예가 되도록 만드는 세상입니다.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거짓을 합리화하는 권력에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재물 때문에, 명예 때문에 불의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권력의 힘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통제하며 기득권 유지를
위해 폭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술과 도박 때문에 패가망신을 하고
권력에 집착하다가 제 명대로 못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나라를 방해하는 세력의
유혹에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선택하는데 주저함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폭력의 힘이
크다 하더라도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분명하게 대답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지켜야합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15,5).고 하셨습니다.
사랑합니다.
12월 12일은 과달루페의 동정 마리아 축일입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에 관해 이해를 돕고자 옮겨왔습니다.
과달루페 성모님 성화 설명
1. 성모님의 손
과달루페 성모님의 오른손은 왼손보다 더 하얀색이다.
왼손의 짙은색과 오른손의 밝은색은 각각 인디언족과 스페인 백인을
뜻하며 두손을 합하며 기도하는자세인 합장은 두민족의 피가 섞인다는
뜻이다.
2. 보라색 띠
성모님 허리에 어둡고 진한 보라색 띠는 임신을 뜻한다.
그 당시 여자가 임신한 배를 보인다는 것은 임산부와 태아 모두
모독이었다. 그래서 임신한 여자들은 배로 띠를 가렸다.
3. 4. 튜닉(원피스)
튜닉은 땅을 표현 하는데 3번은 어두운밤을 4번은 대낮을 뜻한다.
4. 튜닉의 꽃무늬
장미 아홉송이가 있는데 이는 아즈텍제국을 만든 9개의 아즈텍부족을
뜻한다. 9개 아즈텍부족은 아스뜰랑이라는 곳에서 나와 떠돌이 부족으로
살다 오늘날의 멕시코씨티(테노치틀란)에 정착한후 아즈텍 제국을
만들었다.
5. 태양
아즈텍사람들의 우주관은 새 세상이 창조될 때마다 태양이 하나씩
있는데 그들은 다섯 번째 그리고 마지막 창조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여기에 새겨진 태양은 바로 이 다섯 번째 태양이다.
6. 별무늬 망토
성모님이 나타나신 날 새벽 테페약 산에서 보인 별자리가 새겨진
것이다. 그 당시의 별자리인 황소자리, 마차부자리와 북두칠성을
포함하는 큰곰자리이다.
7. 달
달의 뜻은 두 개다. 하나는 성모님이 나타나셨던 날의 초승달 모양이다.
또하나는 성모님이 멕씨코에 계신다는 뜻인데 멕씨코(MEXICO)라는
나라 이름의 뜻은 달의 배 즉 세계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이는 아즈텍
인디언 언어인 나우악(NAHUA)말로 ME는 MEXTLI(멕스뜰리) 달이라는
뜻, XI는 XICTLI(식뜰리) 배꼽, CO(꼬)는 곳 장소라는 뜻이다.
8. 세 가지 색깔을 가진 천사
천사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받은 후한 디에고를 뜻하고 세 가지 색은
멕시코에 서식하는 세 가지 새를 뜻한다. 초록색 새털은 케찰 ,
하얀색은 학, 홍색은 수컷 앵무새이다.
9. 구름
네 모서리에 흐르는 구름은 하늘을 표현
기적의 증거들
1. 과달루페 성모님 성화가 새겨진 후안디에고의 틸마(겉옷)는
아야테(AYATE)라는 식물의 작물로서 이 천의 수명은 통상 20-40년인데
470년간 그림이 유지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2. 18세기에 식물로 만들어진 이 천의 거친면에 성모님을 그린다는것은
불가능하다. 1979년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박사인 PHILIP S,
CALLAHAN 과 JODY BRANT SMITH 박사는 적외선 광선을 이용하여
성모님 성화를 조사하였는데 그림을 그린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고
이직물이 어떠한 기술적(방부처리) 처리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3. 노벨화학상 수상자 RICHARD KUHN박사는 그림의 물감을 분석한
결과 과달루페 성모님 성화에 지구상에 존재하는 식물성 또는 동물이나
광물성 물감이 전혀 없음을 발견하였다.
4. 코넬대학을 졸업하고 IBM회사에 근무하던 호세 아스테 돈스만 박사는
성모님 성화에서 고화질 영상을 스캐닝하면서 새롭고 흥미있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는 현대기술인 영상정보를 전달하는 인공위성과
우주탐측기에서 이용되는 디지털방식을 사용하였다. 어떤 기술로도
처리되지 않은 천위에 색상이 오랜시간 그대로 유지되는 사실과 보는
각도에 따라 약간씩 성화의 색상이 변하는데 이 현상은 무지개 빛과
같으며 사람의 손으로는 재현할 수 없다고 하였다.
특히 성모님의 왼쪽 눈에 나타난 영상은 즉석 사진처럼 주마라가 주교
앞에서 드러내 보여주신 모습, 그때의 그 사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틸마를 펼치는 후한디에고의 모습과 주교의 시중을 들고 있는 여종,
한손으로 턱수염을 만지고 있는 스페인 남자등 총 세 사람의 모습이다.
또한 중앙 동공에는 아기를 업고 있는 여자와 몇몇 아이들로 구성된
한가족이 있다. 로마교황청 학술원에서는 호세박사의 연구결과가
논의되었고 2500배 확대된 성모님의 동공과 홍채에서 총 13명의
사람모습을 확인 하였다.
이렇게 현대기술로만 발견할 수 있는 과달루페 성모님의 눈의 영상은
성모님이 자신의 발현을 증명하기 위한 현시대를 위해 숨겨진
메세지라고 호세 박사는 설명을 한다.
아마도 물질적인 모든 이념(理念)의 발전이 이루어짐에 따라 신앙의
보강(補强)을 바라는 열망 때문에, 그 신앙의 가시적(보여 질 수있는)
뒷받침을 바라는 갈망이 존재하게 된다. 소위 불가사의한 현상들을
열렬히 추구하는가 하면, 그러한 현상들에 대하여 성교회가 적법여부를
판정하기도 전에 많은 인파들이 너도 나도 앞 다투어 몰려들면서 그
현상들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심지어 성교회에서 적법하지 않다는
판정이 내린 경우에도 그러한 불가사의의 현상에 군중이 몰리기
일쑤이다.
루르드나 파티마의 경우는 사람들이 가라반달과 팔머 등의 지역과
비슷하게 불가사의한 기적으로 먼저 인정함으로써 성교회의 판정과
과정을 앞지른 예들이다. 가라반달과 팔머의 경우는 소위 열성 가들이
그 불가사의한 현상을 맹렬한 기세로 널리 퍼뜨렸다. 마치 가톨릭
신앙이 그 기적적인 현상들과 긴요하게-결정적으로-연계(긴밀하게
연결됨)되어 있는 것처럼 그들은 그 사건을 널리 선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교회의 추천이 있을 때까지(역자 : 성교회의 공식
인정이 있을 때까지) 관망하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정작 당혹하게 만드는 것은 기정화(旣定化)된 뒤에-기적으로 인정된
뒤에-불가사의한 현상들에 대하여 오히려 열성 가들이 보여 준 냉담한
태도이다.
명확히 그 현상들의 특수한 성분이 신기성(新奇性)에 있음이 틀림이
없다. 신기성의 비중은 진정성(眞正性:진짜)을 앞지르기 마련인가?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어느 한 성지에-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점증하는
관심을 끌고 있음에도 세계의 이쪽(역자 주: 유럽을 가리킴)에 있는
우리들에게 충분하게 알려져 있지 않은 성지-대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예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그 성지에 대한 논문이나 독립
기사도 거의 없는 형편이다. 대서양을 건너 그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없다. 그러나 내가 설명하려는 성지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지극히 위대한 초자연적인 중재가 있었던 곳이다.나는 멕시코
과달루페에 발현하신 성모님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그 성지는
어떻게 역사성(歷史性)을 띠게 되었는가? 그 성지는 우리들의
성모님이 제일차적으로-멕시코의 국민 생활의 갖가지 양상을
철저하게 뜯어고치기 위하여-멕시코의 역사 안에 들어오신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곳이다. 성모님이 역사 안에 들어오신
그 사건을 멕시코를 이단(異端)의 국가에서 완전히 천주교 국가로
개종시켰다. 또 그것은 멕시코를 분열에서 단결로, 증오에서 사랑으로
개종하게 한 의미를 띠고 있는 하나의 현상으로서, 그 성지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하 묘지에서 밖으로 끌어내어 지상에서 지극히
위대한 세력으로 만드신 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대제(大帝)의 개종처럼
획기적인 사건에 버금갈 만한 사건의 현장으로서 가치가 있는 곳이다.
그런데 분명히 과달루페의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그 성지 자체 보다
더 많은 주의와 관심을 끌고 있다.
천주교 백석동 성당 카페 게시판, 강옥중 글 <제 6 장 멕시코에
발현하신 성모 마리아>중에서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주님의 기준인 사랑으로 바라보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먼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제 아버지께서 고령의 나이(85세)시라
전신마취를 통한 수술이 쉽지는 않았는데, 많은 분들이 염려해 주시고
기도해 주셔서 무사히 잘 끝났습니다. 사실 올해 제 가족에게 좋지 않은
일들이 계속 있었답니다. 큰 병으로 힘든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교통사고도 많이 발생해서 정말로 정신없는 한 해를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가족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은 ‘그래도 신앙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겨낼 수 있지.’라는 말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렇습니다.
만약 어렵고 힘든 이러한 일들을 경험하면서 ‘왜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시련들을 왜 주시는 거야?’라고 생각했다면 아마 끊임없는 불평불만만이
입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생각하다보니
불평보다는 감사의 말이 입에서 먼저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의
어려움도 잘 이겨낼 수 있는 것 같네요.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으로만 생각하면 불평을 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을
청하라는 말씀을 단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었지요. 예수님 스스로도
돈 벌려고 노력을 하시지도 않았고, 또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시도하신
적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낮은 자리로 가시면서 오직 사랑만을 보여
주셨습니다. 며칠 전에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일컬어서 ‘사오정’이라고 하지요. 이 사오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오정이 편의점에 가서 “햄버거하고 콜라 있어요?”라고 묻습니다.
종업원은 친절하게 “콜라는 있는데, 이곳은 편의점이라 햄버거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사오정은 “그러면 햄버거하고
사이다는 있어요?”라고 말합니다. 종업원은 이번에도 친절하게
“사이다는 있어도, 햄버거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오정은
인상을 쓰면서 “그러면 햄버거하고 오렌지 주스는 있죠?”라고
묻습니다. 이제야 종업원도 인상을 쓰지요. “오렌지 주스는 있지만,
햄버거는 아까도 말했지만 없어요.” 사오정은 “이 가계에는 왜 이렇게
없는 것이 많아요?”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럼 햄버거 하나만 주세요.”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는 주님께 “세상의 부귀영화와
사랑을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세상의 부귀영화는 없고 사랑만
있단다.”라고 말씀하시지요. 하지만 우리는 다시 “그러면 부귀영화와
평화를 주세요.”라고 말하지요. 주님은 다시 “부귀영화는 없지만 평화는
있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왜 이렇게 없는 게 많아요?”라고
말하면서 청하는 것이 바로 ‘부귀영화’이지요. “그럼 딴 것은 놔두고
‘부귀영화’만 주세요.”
세상의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할 때,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나라인 하느님 나라는 제대로 세워질 수가 없습니다. 그 하느님
나라는 세상의 기준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랑으로만
올바로 세워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기준만을
앞세우기에, 예수님의 표현대로 그 나라가 폭행을 당하는 것이지요.
주님의 기준인 사랑으로 바라보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감사할 일과 행복한 일이 쏟아질 것입니다.
가벼운 것도 오래 들고 있으니 무거웠다. 마치 인생이 그런 것처럼
(류시화).
세상의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주님이 계시기에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팔씨름
특강을 나가면 사람들에게 팔씨름을 시킵니다. 지루한 강의를 듣느라
힘들 테니, 몸도 풀면서 어떤 깨달음을 전달하기 위함이지요.
“저는 힘센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팔씨름을 할 것입니다.
둘씩 짝지어 손을 잡고 상대방의 오른쪽 손등이 닿게 할 때마다 1점씩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많은 점수를 얻은 사람에게는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20~30초 정도의 시간을 드립니다. 정해진 시간이 지난
뒤에는 가장 많은 점수를 딴 사람들을 부르지요. 그런데 대부분 상대방과
힘겨루기를 하기에 그렇게 많은 점수를 얻지 못합니다. 많은 점수를
얻은 사람은 주로 상대방이 힘을 뺀 경우입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모습은 일방적인 승리가 아니기에 게임이 끝난 뒤에 이러한 설명을
드립니다.
“저는 분명히 많은 승수를 얻은 사람, 그래서 많은 점수를 얻은 사람에게
선물을 드리겠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상대방의 손을 밀지 않고 오히려
잡아당겨 상대방이 쉽게 점수를 따도록 하고, 자신 역시 이런 식으로
재빨리 점수를 따낸다면 어떨까요? 누구보다도 함께 많은 점수를 획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손을 잡은 사람이 경쟁 상대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많은 점수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손을 잡은 사람이 파트너라고 생각하면 많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경쟁자가 아닙니다. 함께 손을 마주잡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사랑의 파트너인 것입니다. 경쟁자가 많은
세상은 서로 힘만 뺄 뿐입니다. 그러나 파트너가 많은 세상은 서로에게
힘이 더해집니다.”
파트너가 많은 세상, 그래서 사랑이 가득한 세상.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2013년 가해 12월12일 대림 제 2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마태오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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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 복음 말씀에서 눈이 멈춘 곳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라는 구절이다. 오늘은 본의 아니게 조금은 어두운 이야기를 해야
할 듯 하다. 하늘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해보자.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 모상을 닮은
인간을 사랑으로 지어내신다. 그리고 커다란 결단을 하신다. 당신께서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에 책임을 지시겠다는 이야기다.
즉,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신다. 창조주 하느님을 거부할 정도의
자유의지였다. 어쩌면 하느님께는 커다란 모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께서 말씀하신 사랑이라는 말에 책임을 지셔야 했고,
그렇게 인간들에게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셨다.
하지만 인류는 처음부터 자유의지를 욕망의 수단으로 사용해왔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가 되었고,
그 안에는 늘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로 채워졌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랑이라는 말에 머뭇거림이 없으셨다.
결국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기로 결심하신다. 보내진 아들은 하느님의
뜻과 하늘나라의 모습과 우리가 영원성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알려주신다. 그리고 그 아들은 자신의 죽음이라는 십자가의
삶으로 사명을 완수한다. 그러나, 2000년이 지난 지금 역시 인류의
욕망은 그 끝을 다하지 못하고 움직여지고 있다.
결국 우리 인간의 역사는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역사였다.
그렇다면, 폭행을 당하는 하늘나라의 기분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이런 기분이 아닐까? 요즘 너무도 쉽게 신문이나 방송매체를
통해서 접하게 되는 슬프고도 아픈 소식들. 자식에게 폭행당하는 부모들,
치매로 외딴 섬에 버려진 부모들, 서로의 새로운 삶을 위해 서로 자식을
떠맡지 않겠다고 하는 젊은 부모들에게 버려진 아이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생명을 받았다가 부모의 이기심으로 그 생명을 빼앗기는
낙태아들, 목숨을 위한 최소한의 권리마저 빼앗기고 있는 힘없는 자들,
필요에 의해 취해졌다가 너무 쉽게 버려지는 동물들, 이 외에도 수없이
많은 부조리와 악행은 우리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 아마도 하느님의 마음은 폭행당하는 부모, 버려진 부모, 내던져진
자식, 생명을 빼앗긴 태아, 삶의 기반을 빼앗긴 무력한 사람들, 쓰레기처럼
길가에 내동댕이쳐진 강아지들의 기분과 비슷하지 않을까?
오늘의 복음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민족의 아픔을 생각해본다.
보속(補贖 / penance)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독일이 통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의 그리스도교의 역사에 보속이라는
개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내 민족이 지은 죄에 대한 참회의 실천으로 받아들이려는
공감대가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보속이라는
개념이 사실 없었다. 불교적 용어인 업보(業報)라는 표현은 있지만 이는
마지 못해 과거나 전생에 지은 허물에 대해 묶이는 것을 말한다. 한(恨)
으로 남을 수 있는 수동적인 개념이다.
그렇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대한 폭행의 가해자가 아니라, 그 하늘나라의
뜻을 따라 이 유한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해야 할 또 하나의 작업은
보속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모두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가해자의 한 사람으로서 보속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민족이 남과 북, 그리고 동과 서의 참된 화해와 통합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제일 먼저 요구되는 정신일지도 모르겠다.
(201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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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돌아가는 모습, 나라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께서도 마음이
많이 아프시리라 봅니다. 저 역시 복잡한 심정으로 추이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잘 살아야 합니다. 힘들더라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더욱 모범적인 삶을 만들어 나아가야 합니다. 복음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아름다울 수
있어서, 누군가에게 삶의 지표가 되어준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힘내십시오. 그분께서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지금은 이 세상에 살지만
2013년 가해 12월12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지금은 이 세상에 살지만
지금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전엔 저 세상 하늘나라에서 살았을
겁니다.
지금은 이 세상에서 살지만 이담엔 저 세상 하늘나라에서 살 겁니다.
그러니 내가 이 세상에서 작지만 저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을 거고요.
이 세상에서 어느 날은 작았다가 어느 날엔 크기도 하는 변덕쟁이지요.
예수님을 정확하게 알았다는 것만으로 요한은 대단한 인물이었다는
겁니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믿기만 해도 그리 작은 인물은 아니겠다 싶네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오 11,11)”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하느님 나라,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나라
2013년 가해 12월12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
복음 : 마태오 11,11-15
< 하느님 나라,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나라 >
우리는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늘 높이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를 부러워하던 한 애벌레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뭇잎을 먹으며 가끔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나비들을 부러워할 뿐
자신 안에 나비가 들어있다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애벌레는
커다란 기둥을 봅니다. 자신과 같은 애벌레들이 구름 위까지 서로를
밟고 기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나비처럼 날지는 못하더라도 하늘
위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중간쯤 올라가다가 자신이
밟은 한 여자 애벌레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둘은 내려와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남자 애벌레는 기둥의 꼭대기가 궁금합니다.
그래서 여자 애벌레를 떠나 빠르게 올라갑니다. 여자 애벌레는 슬픔에
빠져 길을 걷다가 나무 위에 위태롭게 걸려있는 애벌레를 봅니다.
누에고치가 되려는 것이었습니다.
늙은 애벌레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놀랐습니다. 그는 무슨 털 뭉치에 꼼짝없이 잡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무슨 사고가 생긴 것 같은데 도와 드릴까요?」 하고 그녀가 말했습니다.
「아니야, 괜찮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만 돼.」
그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나비! - 바로 그 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발 말해주세요 네, 나비가 무엇이지요?」
「그것은 네가 되어야 할 바로 그것이야. 그것은 아름다운 두 날개로
날아다니며 하늘과 땅을 연결시켜 주지. 그것은 꽃에 있는 달콤한
이슬만을 마시며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사랑의 씨앗을 운반해 준단다.」
「나비가 없으면 세상에는 곧 꽃이 없어지게 될 거란다.」「그럴 리가
없어요.」 하고 노랑 애벌레가 숨을 할딱이며 말했습니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단지 솜털투성이의 한 마리 벌레뿐인데 나의
내부에 그리고 당신의 내부에 한 마리의 나비가 들어 있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어요?」
「어떻게 나비가 될 수 있나요?」 하고 그녀는 생각에 잠겨 물었습니다.
「한 마리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절실히 날기를
원할 때 가능한 일이란다.」
「<목숨을 버리라>는 말씀인가요?」 하고 노랑 애벌레가 물었습니다.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단다. 너의 <겉모습>은 죽어 없어질
것이지만 너의 <참모습>은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란다. 삶에 변화가
온 것이지, 목숨을 앗긴 것이 아니야.」 그가 대답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큰
사람은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얼마나 크든지 하늘나라의
가장 작은 사람도 그보다는 크다고 하십니다. 이 말뜻이 무엇일까요?
애벌레가 아무리 훌륭하고 크고 대단하여 기둥 끝까지 기어 올라
가더라도 가장 약한 나비의 삶에 비길 수 있겠습니까? 사람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애벌레는 스스로 누에고치가 되어 나비가 될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누에로 만들어 죽일 수 있을 만큼 자신 안에 나비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자신을 죽인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늑대를 부모로 믿는 아이들이 사람을 부모로 둔 아이들과 같은 삶을
절대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나보다 윗 단계의 누군가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현 상태를 초월합니다. 만약 늑대를 부모로 믿는
아이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모가 늑대라고 믿는 자기
자신을 죽이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누에고치가 되는 과정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 자신을 사람의 지위에서 하느님의 지위로 높일 수
있음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저와 함께 공부했던 한 신부가 고생하시는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
백사를 잡으러 산으로 다니다가 백사를 잡지는 못했고 그냥 뱀 한
마리를 잡아왔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것을 흰 페인트 통에 넣어 빨래
줄에 널어놓았다고 합니다.
뱀에 흰 페인트를 칠하면 백사가 될까요? 백사는 일반적으로 산삼을
먹고 사는 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백사가 발견된 곳에는
산삼 밭도 함께 있다고 합니다. 산삼에 있는 성분이 뱀의 색소를 눈만
빼 놓고 다 빠져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뱀은 큰 값어치가 없지만 백사는 부르는 것이 값입니다. 존재의
변화는 무언가를 받아들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 받아들임은 내
안에 있는 모든 어두운 색소들을 벗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백사들만 있는 곳에 어떻게 값어치도 없는 뱀을 함께 넣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보석들만 넣는 상자에 어떻게 돌덩이를 넣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느님나라는 존재의 변화를 겪지 않고서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사람으로서는 세례자 요한처럼
완전해지더라도 절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지만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하느님이 된다면 하늘나라의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뜻을
양식으로 살아가는 작은 하느님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모두 신이라고 불렀다.”
(요한 10,35)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수도회] 길이 아니라 이정표인 세례자 요한
2013년 가해 12월12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마태 11,11-15
길이 아니라 이정표인 세례자 요한
구약시대의 종결을 고하는 마지막 대 예언자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척박한 광야에서 내공을 닦은 세례자
요한이 전면에 등장하자 사람들은 얼마나 박수를 치고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종래의 다른 예언자들과는 달리 극단적으로 청빈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설교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후벼 파는 듯 날카로웠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를 주제로 한 설교는 가난한 백성들에게만 향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고관대작들, 대사제들을 넘어 헤로데 왕가의
불의한 삶을 향해서도 쌍날칼처럼 날카로운 비수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세례자 요한이 시작한 세례갱신운동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엄청난 인파들이 요르단 강으로 몰려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위엄과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사람들은 ‘이분이
혹시 오시기로 한 메시아가 아닐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용기뿐만 아니라 겸손의 덕까지 갖추었습니다.
오랜 세월 양성시켜온 자신의 제자들까지 예수님께로 떠나보내면서
솔직하게 자신의 신원을 밝힙니다.
“나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저기 오시는 저분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저분을 따라가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십시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조차 묶어드릴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제 달릴 길을
다 달렸으니 아무런 미련도 없습니다. 조용히 떠나갑니다.”
예수님의 설명처럼 요한은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떻게 보면 칭찬 중의 칭찬,
극찬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자 요한의 인물
됨됨이에 대해서 잘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예수님께서는 진실을 밝히십니다. 어디까지나 세례자
요한은 길이 아니라 이정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주인공인 왕이
아니라 왕의 뜻을 전하는 사신이었음을, 그는 결론이 아니라
서막이었음을, 그는 오실 분이 아니라 길을 닦은 마지막 예언자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고 강조하십니다. 아무리 빛나는 대 예언자 세례자 요한이지만
그분께서 다스리시는 하느님 나라의 광채 앞에 빛을 잃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위대함과 영광스러움 앞에 세례자 요한의 강력하고
숭고한 모습조차 희미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누구든 하늘나라에 입국하게 되는 순간 새로운 위엄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결핍투성이의 우리 인간이지만 하느님으로 인해 존엄하고
빛나는 존재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더 은혜롭고 축복된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런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앞에 활짝 열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으로 인해 이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언자들의 예언에 따라 하느님 나라가
계획대로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활짝 열어놓으신 새로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정말 복된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이제 은총 속에 살고
있으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구원된 사람들로 과거
사람들보다 훨씬 더 높은 지위에 있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대림 제2주간 목요일
2013년 가해 12월12일
오늘부터 신학교에 지원하는 학생들의 면접을 합니다. 신학교에서는
성적을 보고 학생들을 선발하려고 합니다. 적어도 상위30% 안에
드는 학생들을 선발하려고 합니다. 저는 성적도 중요하지만 학생들의
인성을 보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사제가 되겠다는 열의, 주님을
섬기겠다는 겸손한 마음, 매일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을 보고
원서를 써주고 싶습니다. 물론 학교의 견해와 저의 견해는 다르기
때문에 제가 추천하는 학생들이 모두 신학생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많은 학생들이 신학교에 합격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를 도와주리라!’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두려움과 공포는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우리를 하느님께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어둠의 힘입니다. 코끼리를 길들일 때 쓰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어린 코끼리를 말뚝에 묶어 놓는다고 합니다.
어린 코끼리는 말뚝에서 벗어나려고 갖은 힘을 다 쓰지만 말뚝의
힘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결국 코끼리는 말뚝을 벗어나길 포기합니다.
어른이 된 코끼리는 여전히 작은 말뚝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말뚝이 자신의 힘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른이 된 코끼리가 조금만 힘을 쓰면 말뚝은 쉽게 뽑히고 말
것입니다.
코끼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도 스스로 만든 말뚝에 자신을
묶어놓고 거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중독’입니다. 처음부터 알코올 중독인 사람은 없습니다. 한두
잔씩 마시기 시작한 술은 서서히 사람의 인격을 병들게 하곤 합니다.
친구를 만나기 때문에, 비가 오기 때문에, 화가 나는 일이 있어서,
기분 좋은 일이 있어서 술을 마십니다. 술 때문에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고, 술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나고, 술 때문에 약속을 어기게 되는
사람들은 술의 말뚝에 자신을 스스로 묶어 놓은 것입니다. 담배도
그렇습니다. 담배가 몸에 나쁘다는 것을 본인도 알고, 주변에서
말해서 알고, 의사들이 말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한두
번 피운 담배가 이내 사람을 묶어 놓고 맙니다. 점점 담배를 피우는
분들이 가야 할 곳이 없어지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베란다에서, 추운
겨울에 건물 밖에서 담배를 피우는 분들이 있습니다. 정선에 있는
강원 랜드에는 도박의 중독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타고 왔던 자동차를 싼 값에 팔아서 도박을
한다고 합니다. 인터넷, 텔레비전 등과 같이 우리 주변을 보면
작은 말뚝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말뚝 때문에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그 말뚝 때문에 가족들에게 큰 상처를 주고, 그 말뚝
때문에 삶이 다 피기도 전에 시들어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시오.’ 말뚝이 우리를 풀어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술, 담배,
도박, 인터넷, 텔레비전이 우리 앞에서 사라지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이 없이는 말뚝을 뽑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체면, 자존심, 교만, 게으름’ 때문에 자기 앞에 놓인
작은 말뚝들을 뽑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생각을
바꾸십시오, 의식을 전환하십시오. 여러분을 묶어서 여러분을
억압하는 것은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 예언자들, 많은 순교자들은 과감하게 말뚝을 뽑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하늘의 별을 보고 예수님에게 경배
드리러 간 3명의 예언자들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이제 낡은
관습과 나쁜 습관들을 뽑아버리고, 주님 앞에 자유로운 영혼으로
인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나와의 싸움 - 외로움, 두려움, 그리움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3년 가해 12월12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이사41,13-20 마태11,11-15
나와의 싸움
- 외로움, 두려움, 그리움 -
언젠가 피정오신 분들과의 대화 중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수사님, 여기 수사님들은 싸우지 않아요?”
뜻밖의, 아주 실제적인 질문에 당혹스러웠지만 즉시 유머러스한
답에 저 역시 흡족했습니다.
“매일 싸웁니다.”
즉시 의아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저를 보며 물었습니다.
“그래요. 누구와 어떻게 싸웁니까?”
“저와 싸웁니다. 매일 저와 싸우고 또 하느님과 싸웁니다.
바로 이게 영적전쟁의 요체입니다. 매일 나와 싸우고 또 기도로
하느님과 싸웁니다. 죽어야 끝나는 평생 싸움입니다.
이래야 형제들과 싸우지 않습니다. 진정 싸워야 할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나입니다.”
공감하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싸워야 할 내 안의 적은 바로 외로움이요 두려움입니다.
아주 인간의 근본적 정서입니다.
외로워서 사람이고 두려워서 사람입니다.
인간 실존을 요약하는 두 단어가 외로움이요 두려움입니다.
소아과 정신과 의사(서 천석)와의 인터뷰 기사 중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내가 부모들에게 많이 하는 말이 있어요.
‘지인지살’ ‘지 인생 지가 사는 거다’ 그런 뜻이에요. 결국 지 인생
자기가 살아가는 거지 그걸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해요. 지금 내
존재를 인정하고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거죠.”
‘지인지살’ 바로 외로운 인간존재임을 상징합니다.
‘내 인생 내 어깨에 지고’라는 중학교 시절 읽었던 글귀도 생각납니다.
또 인터뷰에 곁들인 한 편의 시 같은 기도문에서도 인간존재의
외로움이 숙명처럼 들어납니다.
- 내 일은 내가 하고 /
당신 일은 당신이 하는 것. 내가 당신의 기대에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며 /
당신 또한 나의 기대에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 것.
당신은 당신, 나는 나 /
우연히 서로를 발견하는 그것은 아름다운 일 /
그렇지 못할 땐 어쩔 수 없는 일 - (프리츠 펄스 ‘게슈탈트 기도문’)
누구나 깊이 잠재해 있는 외로움입니다.
외로움에 뒤 따르는 두려움입니다.
외로움과 두려움은 한 실재의 양면입니다.
결국은 내 외로움과 두려움과의 싸움입니다.
아무도 도와 줄 수 없는 내가 직면해야 하는 평생 싸움입니다.
말 그대로 온통 끝없는 두려움에 포위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입니다.
하여 하느님은 외로움과 두려움 곁에 당신 향한 그리움을 놓아두셨습니다.
다음 이사야서의 말씀은 그대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이 너의 구원자이다.”
성서에 무려 365회나 나오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두려움과 외로움과의 싸움에 답은 하느님 향한 그리움뿐입니다.
하여 성무일도의 도입구의 청원이 참 절실합니다.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주님 어서 오사 저를 도우소서.”
두려움에서, 외로움에서 구해 달라는 청원입니다.
하느님 향한 그리움에서 하느님과의 싸움인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께 바치는, 그리움에서 샘솟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우리를 두려움과 외로움에서 해방시켜 새 하늘 새 땅을 살게 합니다.
바로 오늘 1독서 이사야서의 빛나는 구원의 현실을 살게 합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소주제도 ‘복 받은 광복의 길’(공동번역), ‘경이로운
귀향길’(새번역)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다음 말씀은 두려움과 외로움 중에 살아가는 가련하고 가난한 모든
이들이 그 대상입니다. “나 주님이 그들에게 응답하고, 나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리라. 나는 벌거숭이산들 위에 강물이,
골짜기들 가운데에 샘물이 솟아나게 하리라.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
두려움과 외로움에 대한 답은 하느님 향한 그리움에서 샘솟는
기도뿐임을, 하느님뿐임을 깨닫습니다. 끊임없이 함께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미사와 성무일도의 은총이 두려움과 외로움의 광야를
낙원으로 변화시킵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오늘 복음을 이해했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바로 찬양의 사람들인 우리가, 이미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어 지금 여기 하늘나라를 살고 있는 작은이들인 우리가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크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움에서 샘솟는 끊임없는 하느님 찬양이 두려움과 외로움에 대한
유일한 처방입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고,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 하지만
그 누구도 찬양의 사람들에게서 하늘나라를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외로움과 두려움의
자리에 당신 사랑과 생명으로 가득 채워주시어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의
기쁨을 살게 하십니다.
“너는 주님 안에서 기뻐 뛰놀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분 안에서 자랑스러워하리라.”(이사41,16ㄴ).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기타]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3년 가해 12월12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마태 11,11-15)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은 사실은
당신 자신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ㄴ)." 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이다." 라는 뜻입니다. 요한이 그렇게 위대한 것은
신약시대를(메시아를) 준비한 예언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마태 11,11ㄷ)."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을 깎아내리는 말씀이 아니라,
신약시대의 은혜가 구약시대의 은혜보다 더 크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구약시대는 율법의 시대였고, 율법을 지키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는(메시아 시대는)
복음의 시대이고, 복음의 은총을 받아서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 사람들보다 신약시대 사람들이 더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을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로 생각한다면 그는 신약시대
사람들보다 작은(위대하지 않은) 사람이 되지만, 반대로 신약시대의
첫 번째 예언자로 생각한다면 그렇게 위대한 시대를 준비한 예언자였기
때문에 요한도 역시 위대한 예언자가 됩니다. 어떻든 이 말씀은 메시아
시대의 위대함을 역설적으로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마태 11,13-14)."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준비하기 위해 미리 올 것이라고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엘리야다.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을
받아들여라." 라는 뜻이고, 이 말씀에는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을 믿어야 하고, 그래서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어라."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요한의 활동과 예수님의 활동은 분리되어 있는 두 가지 활동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의 활동이고,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됩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5)." 라는 말씀은 바로 앞의 14절에도
연결되고, 그 앞의 12절에도 연결됩니다. 14절에 연결해서 읽으면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을 믿고, 동시에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어라."
가 되고,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라는 12절에
연결해서 읽으면, "엘리야인 요한이 겪는 고난은 메시아가 겪게 될
고난을 예시한 것이다."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임금이
아니라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어린
양'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말을 다시 정리하면, 예수님께서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은 사실상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고,
요한의 고난을 언급하신 것은 당신의 고난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암시는, 메시아 시대의 은총은 그저 율법이나 잘 지킨다고
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겪으시는 예수님을 뒤따름으로써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얻게 된다는 암시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 점에서 지금 성탄절을 준비하고 맞이하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탄절은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경축하는 거룩하고 경건한 날입니다.
그런데 너무 많이 세속화되어 있고, 상업화되어 있습니다.
(발렌타인 성인의 축일인 2월 14일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성인의 성덕과 사랑 실천의 모범은 잊어버리고, 그저 초콜릿이나
주고받는 세속적이고 상업적인 날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성탄절은 메시아의 탄생이라는 점에서는 분명히 '기쁜 날'입니다.
그러나 메시아의 고난이 시작된 날이라는 점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기뻐하기만 할 수는 없는 날입니다. 더욱이 그 고난이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사실 성탄절은 다른
날보다 더 경건하게 회개해야 하는 날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성탄절을 기뻐하고 경축하는 일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너무 세속적인 모습으로 놀 생각만 하는 모습과,
실제로 그렇게 세속적으로 노는 모습을 볼 때가 많다는 점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성탄절을 서로 축하하고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마태 5,47)"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기 때문에 성탄절은 모든 사람의 잔칫날이 되어야 합니다.
성탄절 때문에 더 서러워지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성탄절 잔치를 할 자격이 없습니다.
- 송영진 모세 신부 -
◈ [기타]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2013년 가해 12월12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이사야서 41장 13~20절)
눈이 오기 시작합니다. 좋긴 하지만 눈 치울 일을 생각하면 살짝
부담이 됩니다. 저희 성당 부지가 꽤 넓거든요. 다 하지 않고 길만
한다고 해도 꽤 큰 작업입니다. 그래서 올 해는 눈이 많이 안 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벌써부터 눈이 많이 오네요...^^;
어제 오전에도 눈이 와서 공소 체험하러 오신 학사님, 그리고 다른
형제님과 눈을 치웠는데요. 오늘 점심 즈음부터 또 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꽤 많이 옵니다. ‘언제 치우나.. 미사는 할 수 있으려나..’
하는 걱정이 있었는데요. 다행이 눈도 일찍 그치고 날씨도 그렇게
춥지 않아서 길이 거의 다 녹았습니다. 그 모습이 저에게는 ‘오늘은
쉬어라~ 내가 도와줄게~’ 하고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거 같이
느껴졌는데요.
지난 주일에도 그분의 도우심을 가까이서 체험했던 거 같습니다.
본당 성지 순례를 갔었는데요. 나름대로 생각했던 주제는 그 날
제2독서에 나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그 일의 실천이 공동체가 되어가는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는 것일 텐데, 저부터가 잘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제로
정해보고 싶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도 내려놓고 무관심한
마음으로부터도 돌아서고 싶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담아.. 가는 버스 안에서 신자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쳤고요. 다른 때와 달리 신자들에게 성경을 읽어주었습니다. 마음에
말씀 한 구절이라도 담아보라..는 의도에서 그렇게 해 봤는데요.
신자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필요한 말씀들이 계속 마음에
새겨지더라고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성령께서 이루어주신 일치를 보존하려고 애쓰십시오. ... 해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서로 용서하십시오.’ 하는 말씀들인데요.
그 말씀들이 저에게 미움과 무관심으로부터 돌아서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픈 마음을 갖게 해 주더라고요. 반대방향으로 달리고 싶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이어졌는데요. 어떤 모습을
보지 못하고 성지에 도착했습니다.
미사 시간이 다 되어서 저는 바로 제의실로 들어가고 신자들은 성당으로
들어가서 미사 준비를 하였습니다. 미사가 시작되고 독서와 복음이
읽어진 뒤에 신부님 강론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성찬의 전례..
그리고 평화의 인사를 하는데 신부님이 오늘 평화의 인사는 서로서로를
꼭 안아주었으면 좋겠다..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여기 젊은 신부님은
오른쪽을, 그리고 자기는 왼쪽에 있는 신자들과 포옹으로 평화의
인사를 하시겠다고 하셨는데요.
속으로 저도 모르게 웃었습니다. 그쪽 라인에 제가 무관심하고 있던
분이 계셨거든요. 왠지 하느님이 무관심해지지 않게 해 달라는 제
기도를 들어주시고 구체적인 방법을 보여주신 거 같은데, 그 방식이
제가 예상하지 못한 거라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던 거 같습니다.
그 일로 하느님이 가까이 계시는구나.. 하는 느낌뿐만 아니라, 마음의
미움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거 같은데요. 그런 상황들을 대할 때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이 새롭게 다가오고 가까이 느껴지는 거 같습니다.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고 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오늘 하루, 가까이서 내 손을 잡아주시고 도와주시는 그분의 손길을
느껴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술을 좋아하시는 형제님이
자매님이 안 계신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신다.
“우리 아네스는 내가 술 먹는 걸 싫어하니까, 냉장고에 콩나물이
있어도 해장국을 안 해줘~ 그런데 대림이라 이상해.. 해장국을
끊여주더라고~”
- 밤송이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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