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더프의 생애와 활동
프랭크 더프의 영성
이 모든 것들은 프랭크의 고유한 영성의 빠른 성장과 나란히 함께 갔다. 1913년에 빈센치오 아 바오로회에 입회한 다음 해인
1914년 사순절에 프랭크는 매일미사에 참례하기로 결심을 하였는데, 이를 부활 주일까지만 하고 중단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서, 그 뒤로부터 매일미사에 참석하는 것을 계속하였다. 사실, 핀놀라 케네디 자매는 자신의 저서에서 프랭크는 1914년부터
1980년에 그가 선종하는 날까지 계속해서 매일 2회 미사에 참례하였다고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프랭크는 1913년 빈센치오 아 바오로회에서 자신의 첫 번째 봉쇄피정에 참가하여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이후 그는
(브레드쇼 신부의 프랭크 더프 책자 27, 28페이지에 의하면) 매년 2회의 피정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여행길에 나서는 것이 불가능하게 될 때까지, 48년간에 걸쳐 매년 마운트 멜라리 수도원에서 연중 피정을
가졌다.
1964년 프랭크는 자신이 직접 교황 바오로 6세께 써 보낸 서한에서, 1914년 이래 자신은 한 번도 매일 묵주기도를 거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프랭크는 1914년에 파이오니어즈 (개척차)에도 가입하였다. 그는 공공의 종교적인 표장을 착용하는 아이디어를 아주 싫어
하였으며, 처음에는 그 아이디어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자신의 자부심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됨에 따라, 그는
다시 돌아와 선서를 하였으며, 그 후 절대 주저함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배지를 착용하고 개척자의 기도문을 바쳤다.
이미 언급이 된 바와 같이 영적인 독서는 그의 매일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의 하나였는데, 그는 이와 함께 정기적인 고해성사와
영적인 관리를 병행하였다. 로버트 브레드쇼 신부는 프랭크가 1915년부터 1922년까지 매일 4시간을 기도하는데 사용했다고 말해
주었다. 그는 직장에 있는 동안 점심시간을 성시간으로 만들었으며, 이 시기의 그의 모든 것은 예수회 사제인 마이클 브라운 신부
의 지도하에 있었다.
시복 청원
미스터 더프에 대한 시복을 제안하는 공식적인 청원이 받아들여졌으며, 1996년 7월 데스몬드 콘넬 대주교님께서 서명을 하셨다.
프랭크 더프는 현재 주님의 종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한 사람이 성인으로 선포되기 위한 과정에서의 주요단계들 중 하나는
영웅적인 거룩함에 대한 확인으로, 이는 로마에 있는 적절한 사무소를 통하여 실시되는 세부적인 조사를 통해 이루어지며,
신성한 포고의 공시를 통해 공식화 된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가경자, 즉 예를 들자면 에델 퀸과 같은 경외의 대상으로 간주된
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가경자에서 복자로 선포하기 위해 진정하면서 논박할 여지가 없는 기적 한 건(또는 두 건)이 요구된다.
최종적으로 시성 그 자체는 선종한 분이 제단의 온전한 존경을 받는 사람, 즉 성인품에 올랐다는 것을 교황께서 선포하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성인의 영웅적인 미덕을 입증하는 시성을 하기 이전에 복자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게 해주는 두 건의 기적이 요구된다.
시복은 복자로서의 존경을 허용하는 것이며, 시성을 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요구된다. 시성에 대한 기념식은 보통 성 베드로 대성
당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이 단계가 프랭크 더프의 삶과 활동에 대한 부분에 다다르게 되면, 그에게 가경자 지위가 합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의 삶과 미덕의 진실성에 대해 판결을 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 단계는 미스터 더프의 삶이 영웅적인 거룩함의 한 종류였는지를 판정하는 절차에서의 첫째 단계이다.
우호적이거나 비우호적인 증인들이 선서를 하고 인터뷰와 질의를 받게 되며, 그의 저작물들이 신앙과 교회의 도덕적인 가르침에
충실한지 여부를 점검하기 위해 이론가들이 그의 저작물들을 평가하게 된다. 프랭크를 알았던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해야 하고,
그의 많은 저작물들이 조심스럽게 평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 단계는 아주 긴 과정의 하나가 될 것이다.
프랭크는 장수를 하였는데, 1889년 6월 7일에 출생하여 1980년 11월 7일 91세로 선종하였으며,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살았다.
그는 나이 32세가 되어서야 레지오 마리애를 설립하였다. 그 후 59년간 그는 약 20만 건으로 추측되는 서한들을 썼다.
짧은 서한들만이 아니었다(이러한 활동을 계산해 보면 그의 전생애 동안 매일 약 10건의 서한을 쓴 셈이다).
그는 205건의 다른 글들도 저술했는데 여러 저서들에 인용이 되었으며, 그와 인터뷰를 녹화한 약 9시간 분량의 비디오가 있는데,
이 비디오는 (복사본의 형태로) 가용하며, 최근에 꼰칠리움에서는 인터뷰를 녹음한 음성 테이프 약 140개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 중 50% 정도를 이 단계에서 복사해 두었다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바꿔 말하면, 아주 방대한 양의 기본 저작물 관련 자료들을
읽고 분석할 것이다.
출처: Center for the Promotion of Legion of Mary Saint 레지오 마리애 성인 추진본부
이재호 스테파노 대구 Se. 국제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