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탄 -
☆ 2013년 가해 12월18일 (자)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청주] 우리와 함께 계시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예레 23, 5- 8
† 복음 : 마태 1, 18 - 24
★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공정과 정의를 이룰 임금이 태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되었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까지는 하느님의 섭리와 동시에 인간의 협조가
있었다. 곧 하느님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게
하셨지만, 이를 받아들인 요셉의 순명도 뒤따랐던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는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의로운 사람일까요? 요셉의 경우를 보면, 아마도 하느님을 먼저
바라보고 나서 세상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첫 번째로, 그는 마리아가 잉태하였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세상일만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마리아를 길거리로 내몰고서
“이 약혼녀가 나와 같이 살기도 전에 아기를 가졌소.” 하고
고발하며 돌에 맞아 죽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세상일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생명을 존중하였습니다.
그래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결심합니다.
두 번째로, 그는 꿈에서 천사를 만났을 때에 그 꿈을 믿었습니다.
꿈에서 천사는 마리아의 잉태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일만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이러한 꿈은
개꿈입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느님 안에서는 불가능이란 없으며,
그래서 자신과 약혼한 여인이 성령으로 잉태할 수도, 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그 아기가 구세주가 될 것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그는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구세주의 양부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본디 꿈꾸던 미래는 사라지고 새로운 앞날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일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바로 이러할 때에 주님의 천사가 한 말을
무시한 채 자기의 본디 생각대로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구세주의 양부로서의 부르심을 받아들였고, 그로 말미암아 겪게 될
미래의 몫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일을 닥치는 대로 그냥 처리하고 맙니까, 아니면 잠시라도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헤아려 봅니까?
- 매일 미사 -
◈ [청주] 우리와 함께 계시다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3년 가해 12월18일 대림 3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마태1,18-24)
우리와 함께 계시다.
오늘은 ‘예수’라는 이름의 뜻과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본래 히브리어로 ‘예슈아
(ישוע)’로써 ‘야훼는 구원이시다’(신명3,21)라는 의미입니다.
예수(ihsouς)는 ‘예슈아’(ישוע)를 그리스어로 음역한 신약성경에
나오는 발음입니다.‘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세주시다’ 라는 뜻을 갖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1,21).라는 말로 그
뜻을 암시하였습니다. 죄에서 구원 된다는 것은 우상 숭배나
이단뿐 아니라 노예살이로부터의 해방이며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포괄 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로마3,23). 바로 ‘하느님의 영광’,하느님께서 주셨던‘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렇게 보면
‘죄’라는 말은 인간이 구원 받아야 할 모든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삽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쁨이요, 희망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구원에로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악으로부터 해방시켜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임마누엘”(אמנוּאל) 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임마누(אמנוּ)
라는 말과 엘(אל)이라는 말이 합쳐진 단어로 ‘임마누’는 ‘우리와 함께
있다’라는 뜻이고 ‘엘’은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두 말을
합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 됩니다.
이 이름은 이사야서 7장14절에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할 것입니다.”하고 예언되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항상 함께 계신다는 지식은
이스라엘의 신앙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것이었고, 그것은 이스라엘의
특징이자 영광이었습니다. 과거에 그러하였듯이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미래의 삶에도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성조들이 전쟁 중에 있을 때, 판관들의 시대에 제사당에 모인 군중 속에,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기름을 부을 때, 예언자들이 사명을 수행할 때,
그리고 당신 약속을 지키시어 구원을 베푸실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생활을 할 때에도 여전히 함께
하셨고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를 통한 구세주의 잉태를 알려
주었을 때도 함께 하셨으며 그 예언의 성취를 이룬 오늘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 삶의 여정에 함께하십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한가운데를 지난다 해도 나 너와 함께 있고
강을 지난다 해도 너를 덮치지 않게 하리라. 네가 불 한가운데를 걷는다
해도 너는 타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 나는 주 너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너의 구원자이다”(이사431-2). 하신 하느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또한 내일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우리와 함께하시는 구원자 예수님과 더불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사랑을 항상 첬째 자리에 두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얼마 전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마트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모르겠더군요. 그리고 아침 시간이라
분주하게 일하는 직원들에게 제가 찾는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도 좀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마침 시간 여유도 있으니까
천천히 둘러보면서 필요한 물건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천천히 둘러보니 생각 외로 필요한 물건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래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들을 제가 끄는 가트 안으로 집어넣기
시작했지요.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가트 안에는 꽤 많은
물건으로 가득 찼습니다. 특히 저를 계속해서 유혹했던 ‘원 플러스
원’ 상품은 거의 다 구입한 것 같더군요.
과소비를 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했지만, ‘언제 또 이렇게 쇼핑을
하겠어? 시간 날 때 이렇게 구입하는 것도 괜찮아.’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안했지요. 그런데 정작 제가 구입하고자 했던 것들은
깜빡 잊고서 그냥 마트를 나온 것입니다. 다른 것들에 대한 지나친
관심으로 인해서 정작 원래 마트에 갔던 목적을 채우지 못했던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계명이 바로 ‘사랑’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랑으로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하셨고, 이 사랑의
힘으로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음을 계속해서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사랑보다 다른 것에 더 큰 관심을 보이다보니,
정작 사랑을 내 안에 간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마치 필요한 물건은 빼고 다른 것만 잔뜩 구입한 저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셉 성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마리아와 약혼한
사이였지요. 그런데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리아의 잉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철저히 율법을 지키려 했기에 마리아를
고발해서 공개적으로 돌에 맞아 죽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했기에 남모르게 파혼하려 하지요.
여기에 또 한 가지 유심히 보아야 하는 것은 그가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말을 듣고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꿈을
믿습니까? 꿈에서 하라는 대로 그대로 따라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 성인은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말을 받아들여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율법을 뛰어넘어 우리 모두의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무엇에 가장 많은
관심을 쏟고 있습니까? 그러한 생각과 관심으로 정작 첫 번째에
두어야 할 사랑을 잊어버렸던 것은 아닐까요?
사랑을 가장 첫째 자리에 두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이 사랑 안에서
우리 구원은 시작됩니다.
의식주를 비롯한 모든 인생살이가 이웃이 있음으로써 가능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이웃은 고마운 존재다. 내게만 고마운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고마운 존재다(이용복).
서품을 얼마남겨두지 않은 서품자들. 얼마나 많은 긴장을 할까요?
사랑으로 기도해주십시오.
사랑의 시작은 대화입니다.
어느 장성한 아들이 어버이날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절실해져서, 오랜만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큰 소리로
말했지요. 그러자 아버지는 대뜸 “이 자식아! 또 무슨 사고를 쳤냐?”고
호통을 쳤다고 하네요.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들과 대화를 자주 해야 한다는 강의를 듣고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대화’라는 것을 해보려고 아들을 앉혀놓고 말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한참동안 서로 멀뚱멀뚱 얼굴만 바라보다가 겨우 한마디를 했다고
하지요.
“너 요즘 몇 등 하냐?”
물론 말없이 사랑을 실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마음을 더욱
더 애틋하게 만들고 친밀함을 깊이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이 ‘말’입니다.
그래서 서로 많은 대화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대화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대화도 끊임없이 필요하지요.
대화를 전혀 나누지 않으면서 가까운 사이라고, 또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주님과 나의 관계가 가깝고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대화를 해야 합니다. 주님과는 진실한 기도를 통해서, 나의 이웃과는
따뜻한 대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랑을 키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사랑을 통해서 참 행복의 길이 열립니다.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신앙안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십시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신앙안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십시오.'
2013년 가해 12월18일 대림 제 3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마태오 1,24)
---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약혼을 했고 드디어 행복한 가정을 꾸밀 생각에 요셉의 마음은
바쁘다. 열심히 일을 하면 충분히 사랑하는 여인과 보금자리를
꾸려 나아갈 수 있으리라. 그런데,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사랑하는 마리아가 임신을 했다는 소문이 들려온 것이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머리 속 혈관이 모두 터질 듯한
고통과 분노를 느낀다.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모든 일을 제쳐놓고 마리아의 집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간다. 그렇게도 소문으로 끝나기를 바랬건만, 그녀는 임신했음을
숨김없이 인정한다. 요셉은 아무 말 없이 뒤로 돌아서서 온 길로
되돌아간다.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너무 가슴이 아프다. 그렇게 믿었던 여인이었는데…...
결국 원치 않던 결심을 하고 만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 아닌가? 파혼밖에는……“
몇 날을 잠을 설쳤던 터라, 모르는 사이 잠이 들고 말았다.
천사가 나타나 그녀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눈이 떠졌다.
지금까지의 모든 고통이 일순 사라지고 환희로 바뀐다.
“그러면 그렇지.” 그리고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인다.
잠시 요셉이 되어 보았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요셉은 단지 꿈 속에서 만난 천사의 말을 듣고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여러분이 그의 입장이었다면 가능했다고 보는가?
구세사에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 예수님의 양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음에도 성서 어디에도
한 마디의 대사도 허락되지 않는다.
늘 배경 같은 존재로 나타나는 요셉.
신앙이라는 말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모든 것이 불가능해진다.
그렇다. 한평생 사랑하는 여자를 품지 못하고 오로지 신앙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했던 운명.
그렇게 지킨 아들을 처참하게 보내야 했던 마음.
우리는 그를 성가정의 아버지의 모델로 삼는다.
성서에는 기술되어 있지 않지만, 확신하건 데, 그의 삶은 기도의
삶이었으리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힘이 없었다면 이 엄청난 일이
과연 가능하겠는가?(20121218)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서울] 세상 상식 보다 하늘 상식은
2013년 가해 12월18일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세상 상식 보다 하늘 상식은
세상의 방식과 하늘의 방식이 있다면 세상방식을 대개 따르겠지요?
왜 하늘의 방식은 무시당하는지 안타깝지만 대개가 그리들 하지요.
눈앞에 있는 세상방식은 알기 쉽지만 하늘방식은 알기 힘든 가 봅니다.
요셉성인은 하늘방식 앞에 세상방식을 포기하고 묵묵히 사신 분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말씀님이 자라시도록 평생을 봉사하신 거지요.
우리도 세상 상식 보다 하늘 상식은 힘들지만 묵묵히 따르면 좋겠건만.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오 1,19 ; 24)”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서울] 대림 제3주간 수요일
2013년 가해 12월18일
마태 1,18-24
오늘은 서품식 관계자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서품식이 있기 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사무처에서는 1년 전에 미리
장소를 섭외합니다. 매년 올림픽 체조 경기장에서 서품식을 하고
있습니다. 관리국에서는 서품식에 관련된 제반 경비를 지원합니다.
경기장 대여, 무대설치, 장비 운반 등에 소요되는 비용이 있습니다.
명동 성당에서는 서품식과 관련된 전례를 담당합니다. 미사 준비를
담당합니다. 신학생들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선배들의
서품식을 돕기 위해서 방학 중에 성소국으로 와서 회의를 하고
준비합니다. 안내와 성가를 맡게 됩니다. 서품식에 필요한 유인물들을
제작합니다. 무대장치를 맡은 분은 서품식이 거행될 수 있는 아름다운
무대를 제작합니다. 디자인을 맡은 분은 서품식과 관련된 모든
유인물과 무대를 디자인 합니다. 평화방송은 서품식을 방송으로
중계합니다. 성소후원회원들은 몇 번의 답사를 거쳐서 봉헌,
성찬예식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안내합니다. 가톨릭 전례
꽃꽂이 회원들은 서품식 제대의 꽃꽂이를 맡아서 해 줍니다. 전례와
성가 그리고 해설을 담당하시는 신부님들께서는 서품식 전례가 물
흐르듯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진행을 해 주십니다. 이 모든 분들은
‘서품식’이라는 하나의 큰 전례를 위해서 함께 일을 합니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2014년 서울대교구의
서품식이 예전처럼 잘 마쳐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 하시니, 잘 될 것이라 믿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에 등장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친척인
즈가리야와 엘리사벳 부부가 있습니다. 이분들은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가질 수 없었지만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듣고 아이를 갖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것처럼, 즈가리야와
엘리사벳 부부도 요셉과 마리아 부부에 앞서서 아이를 잉태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는
말로 하느님께 대한 순명을 보여 주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었던
요셉은 이제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되어 구원의 역사에 한
역할을 당당하게 수행하였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멀리서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선물을 준비하였습니다. 목동들은 구유에 태어나신
예수님의 탄생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능력과 재능이
아니라, 깨어 있는 사람들의 몫이었습니다. 시메온과 안나는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까지 이렇게 많은 준비를 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2013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성탄도 곧 다가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 각자에게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 수 있도록 소중한
역할을 주셨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각자 다를 것입니다. 능력, 재능이
다를 것입니다. 배움이 다를 것입니다. 직업도 다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자리에서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후회 없는 한 해가 될 수 있도록
남은 시간들 하느님의 뜻이 나의 삶에서 드러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우리 각자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키는 일
2013년 가해 12월18일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마태 1,18-24
우리 각자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키는 일
새벽미사를 다녀오는 길에 평화방송을 틀었더니 왠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귀 기울여 들어보니 서울 시립 동부 아동
상담소에서 고생하고 계시는 김보애 안나 수녀님의 목소리였습니다.
올해 명동성당 대림특강 두 번째 강사로 하신 말씀들이 재방송되고
있었습니다.
25년간 줄곧 상처입고 마음 아픈 아이들을 위해 헌신해 오신 수녀님의
노고를 손에 잡힐 듯이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언젠가 심리·정서적으로
힘든 아이들 치료를 부탁드리면 어떤 아이든 따지지 않고 흔쾌히
받아주시던 기억도 떠올랐습니다.
수녀님께서 처음 그 일을 시작하실 때를 회고하셨습니다. 당시 많은
아이들이 본드와 가스를 많이 했었는데, 안타깝게도 한 아이가 세상을
뜨고 말았답니다. 그 아이를 땅에 묻으면서 미안함과 죄책감에
대성통곡을 하셨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한 가지 결심을
하셨답니다.
“너처럼 힘든 청소년이 오면 죽을힘을 다해서 일할게.”
또 다시 목전으로 다가온 이번 성탄 아기 예수님은 어느 다른 하늘
아래서 태어나실 일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서, 우리의
가정 안에서, 무척이나 각박해진, 그래서 상처입고 소외받으며
죽어가는 이웃들이 줄을 선 우리 사회 안에서 다시 태어나셔야
합니다.
수녀님께서 심한 학대에 시달리다 못해 쉼터까지 오게 된 6살짜리
여자 아이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정말이지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밤에 잠을 재우는데, 수녀님 손을 꼭 잡으면서 제발 어디 가지마시라고,
자기 옆에 앉아 옛날이야기를 해주시라고... 잠 들었나 해서 살며시
손을 빼내려면 꼭 쥔 손을 절대 놓지 않더라는...
우리 각자가 부모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한 아이를 따뜻이 안아줄
때 아기 예수님은 우리 품에서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심연의 바닥에서 울고 있는 한 이웃에게 손을 내밀어줄 때 아기
예수님은 우리 사이에 탄생하시는 것입니다. 죽어도 용서하기 힘든
한 이웃을 큰마음으로 용서할 때 아기 예수님은 내 안에서 탄생하시는
것입니다.
어제 선포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마지막 부분이 기억나실 것입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이전까지만 해도 족보의 이름이 남성에게서 남성으로 전해지다가
요셉에 이르러 갑자기 남성은 무대 뒤로 물러나고 여성, 즉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태어나셨다.’고 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도구 역할을 했었지만 이제는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때로 우리 인간을
당신 구원 역사의 도구로 사용하실 수도 있지만 때로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직접 행동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 순간은 아주 중요한 결정적인 순간이며 그 일은 하느님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일이 바로 기적중의 기적, 인류 역사상 가장
불가사의한 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인 일입니다.
이 특별한 대사건, 예수님의 탄생 앞에 보여준 요셉의 태도를 우리는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요셉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대충 분위기를
파악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요셉은 크게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호기심으로 접근하지도
않았습니다. 고민 고민하며 강생의 신비를 해석하려고도 애쓰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경외하는 마음, 존경하는 마음, 기도하는 마음으로
침묵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강생 사건을 바라봤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 손길에 맡겼습니다. 그저 묵묵히 주님의 천사의 명령에 따라
순종했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참 메시아 - 예수 그리스도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2013년 가해 12월18일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레23,5-8 마태1,18-24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참 메시아 - 예수 그리스도 -
메시아를 찾는 사람입니다.
메시아가 상징하는바 우리의 진정한 꿈이자 비전입니다.
현 시국이 참 위중합니다.
비단 국내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과연 인류에게 희망은 있는지 묻게 됩니다.
자본주의의 해악이 참으로 큽니다.
생존에만 급급하다보니 영혼 없는 사람들만 양산하는 현실입니다.
날로 거칠어지고 사나워지는 사람들입니다.
외관상은 자유로워보여도 내적으로는 계급사회요 노예사회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연 정치와 종교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인지
심각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진정 가난하고 약한 민초들을 안아주고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는 정치는 불가능한지 묻게 됩니다.
묵상 중 화두처럼 떠오른 여러 사실을 나눕니다.
“영혼 구제에만 애쓰는 교회는 골동품으로 남는다.”
예전 지 학순 주교님의 한 말씀이 화두처럼 생각됩니다.
얼마 전 메모해둔 전 김종필 총리의 말도 저에겐 화두입니다.
“맹자의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이란 말이 있듯이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민주주의와 자유는
그것을 지탱할 수 있는 경제력이 없으면 누릴 수 없다. 민주주의를
먼저 깔아야 된다는 말은 옳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자유를 얻기
위해선 그걸 지탱할 수 있는 경제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배고픈데 무슨 민주주의가 있고 자유가 있느냐?”
백번 지당한 말입니다.
구체적 생존 조건인 ‘집’ ‘밥’ ‘돈’ ‘일’이 받쳐 주지 않으면
민주주의와 자유는 물론 존엄한 품위의 삶은 사상누각입니다.
새삼 공정한 분배가 얼마나 중요한 지 깨닫습니다.
정의와 평화는, 정의와 사랑은 한 한 실재의 양면입니다.
정의 없는 평화는 공허하고 평화 없는 정의는 맹목입니다. 역시
정의 없는 사랑은 공허하고 사랑 없는 정의는 맹목일 수 있습니다.
정의의 실현이 참으로 화급한 시대입니다.
아무리 재화가 풍부해도 극심한 빈부의 격차로 그 재화가 정의롭게
분배되지 않으면 평화는 난망입니다. 요즘 열풍처럼 번져 회자되고
있는 말마디 ‘안녕들 하십니까?’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안녕치 못한 아주 심각한 현실을 반영합니다.
안철수 씨의 말에 공감합니다.
“모든 분야에서 격차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고, 이대로 가다가는
대한민국 사회가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많은 국민이
본능적으로 갖고 느끼고 있다.
이런 위기의식이 학생들의 대자보로 분출된 것이다.
우리 사회가 가진 심각한 격차의 문제들, 더 근본적으로 보면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풍토, 승자 독식의 구조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해결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힘들 수뿐이
없을 것이다.”
이런 현실을 배경으로 한 오늘 말씀 묵상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엄중하고 위중할수록 꿈이, 비전이 중요합니다.
지도자의 양대 덕목이 비전과 신뢰라 하는데 우리의 영원한
비전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현실에 살되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영적 고공비행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는 빛나는 비전인 메시아 그리스도입니다.
이런 빛나는 비전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잊어버려 방황이요
혼란입니다. 존엄한 인간 품위의 상실이요 내적으로 속절없이
무너지고 망가져가는 사람들입니다. 하여 심신의 병인 자살자들이
그처럼 많은 것입니다.
21년 전 본원에서의 종신서원 미사 시 나눈 강론 일부 내용입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수도원에 비전(vision)이 없다’고. 당연합니다.
비전이 있다면 그리스도뿐이고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하느님을
찾는 단순한 삶’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 밖의 모두는 환상이요, 우상일 뿐입니다. 결과는 환멸입니다.
그 무엇도 자기(Ego)를 충족시켜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참 비전은 하느님이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한분 뿐입니다.
예레미야가 고난으로 점철된 삶 중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메시아 비전임을 깨닫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백성들에게
빛나는 메시아 비전을, 꿈을 선사하는 예레미야입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공정과 정의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비전이자
꿈이요, 이런 메시아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입니다.
이런 메시아의 비전을 지닌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바로 복음의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이의 모범입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의 인품이, 의로움이 환히 드러나는 묘사입니다. 참으로 속이
깊은 침묵의 사람, 배려의 사람, 의로운 사람 요셉입니다. 성경의
의로움, 또는 정의는 법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충실함을 뜻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물론 마리아와의 인간관계에
충실했던 의인 요셉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을 영원한 비전으로 삼을 때 이런 요셉 같은 인품에
신앙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하느님의 요셉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순종하여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하느님은 요셉의 순종이 참으로 고마웠을 것입니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메시아의 꿈은, 비전은 절대적입니다.
매일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에게 오시는 영원한 비전이신 메시아
주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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