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셉의 꿈 -
☆ 2013년 가해 12월22일 (자) 대림 제4주일
[청주] 천명도 인간을 도구삼는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이사 7, 10 - 14
† 제2독서 : 로마 1, 1 - 7
† 복음 : 마태 1, 18 - 24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대림초 네 개의 촛불이 모두
밝혀졌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오실 때가 찬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드러나는 요셉처럼 주님께 순명하고자 하는 믿음이
없다면, 그분께서 오신다고 해도 우리에게 큰 기쁨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며칠 남지 않은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면서, 우리의
말과 행동의 기준을 인간의 상식보다 하느님의 뜻에 두기로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유다의 임금 아하즈에게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예고이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로마의 신자들에게 축복의 인사를 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소개한다.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예고되었던 메시아이시며, 그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드러나셨다(제2독서).
★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는 마리아와 요셉의 순명이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아기를 낳고 키우기를 강요하시지 않고,
믿음으로 당신의 명령을 따르기를 원하셨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가 만일 백 년을 살다 죽으면 평생 몇 끼니를 먹을까요? 하루
세 끼로 계산해 보았더니 십만 번이 넘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
우리가 직접 농사짓거나 낚시해서, 또는 가축을 키워 일일이
먹거리를 마련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입는
여러 벌의 옷도 직접 바느질해서 마련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이러한 점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면 우리는 결코 혼자의 힘으로
살아온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이게 바로
공동체의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와 공동체를 이루시어 살아가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우리를 도우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도움을
바라기도 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이를 잘 보여 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는데,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요셉의 협조를 바라신 것입니다. 사실 요셉의 협조가 굳이 없더라도
그분께서는 아드님을 이 세상에 다른 방식으로도 보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요셉과의 공동체를 원하셨기에 도움을 구하시는
것입니다.
어쩌면 구세주께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의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지신 것도 같은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 그래서 우리가 그분의
돌보심을 받고 우리 또한 그분의 일을 하는 것이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를 잘 깨달아 기꺼이 그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었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천명도 인간을 도구 삼는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3년 가해 12월22일 대림 제4주일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 마태오 1,18-24
우리를 도구삼아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함께하신 다는 것을 좀 더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도록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눈높이를 맞춰주시기
위해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준비된 마음 안에
하느님을 잘 모셔드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대림초 4개가 환히 빛을
밝히는 그만큼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음을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간 순명하는 삶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얻기를 바랍니다.
아빌라의 성녀 대데레사는 우리에게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그대의 몸을 지니고 있을 뿐 지상에서 그리스도는 더 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손과 발을 지니고 있을 뿐 그리스도는 손도 발도
없습니다. 그대의 눈은 이 세상을 자비로 바라보시는 바로 그분의
눈이요, 그대의 두 발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려 걸음을 내딛는 바로
그분의 발이며 그대의 두 손은 세상을 강복하시려 펼쳐 드신 바로
그분의 손입니다. 그리스도는 더 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몸이
바로 그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잘 표현해 놓은 곳이 있습니다. 미국 샌디에고 한인성당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1729년에 지어진 미션성당에는 양 팔이 없는 십자고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손이 되어드려야 한다는 간절한 호소를 듣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도구삼아 당신의 뜻을 펼치십니다.
주님의 뜻은 인간의 선한 응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가운데에도
하느님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다만 내가 힘들 때는 그 고통에 가려서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시련과 역경 안에서 하느님을 결정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기적은 문제가 있는 곳에서 믿음을 바탕으로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직면할 때 양다리 걸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주님의 능력은 만날 수 없게
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언제나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임마누엘”(אמנוּאל) 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임마누(אמנוּ)라는 말과
엘(אל)이라는 말이 합쳐진 단어로 ‘임마누’는 ‘우리와 함께 있다’라는
뜻이고 ‘엘’은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두 말을 합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 됩니다.
오늘 복음은 신비로운 예수님의 탄생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서있던 요셉의 처신을 통해 순명의 역사를, 믿음의 응답의
결과를 보게 됩니다. 요셉을 바라보면 정말 너무도 기가 막힌 일을
당했습니다. 마리아와 약혼을 하고 잠자리를 한 적이 없는데 마리아가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요셉으로서는 황당한 일입니다.
결혼을 앞두고 얼마나 마음이 설레였겠습니까? 그런데 약혼한 처녀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임신을 했다는 사실에 접하게 됩니다. 실망, 또
실망,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놀랍고 분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냥 결혼을 하자니 남의 여자를 데리고 사는 것이 되고, 파혼을 하자니
한 사람을 돌팔매질을 당해 죽게 만드는 것이고……
따지고 소문내고, 소란을 피울 수도 있었으나 요셉은 고민하였습니다.
법을 어기지도 않고 마리아를 죽음에로 몰아넣지 않으면서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그래서 결국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시대 상황으로 봐서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하셨습니다. “예수”라는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ihsouς)는
‘예슈아’(ישוע)를 그리스어로 음역한 신약성경에 나오는 발음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세주시다’ 라는
뜻을 갖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예언된 말씀이었습니다. 1독서 이사야
7장 14절을 보면,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요셉은 자기 삶의 상식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요셉에게 닥친 일은 믿음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고, 믿음이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사의 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에 대한 해명도 설명도 없습니다. ‘믿겠으면 믿고,
말겠으면 말라.’는 식입니다. 사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렇게 보통사람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물론 마리아의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한 순명도
기억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모든 것 다 설명해 주고 다 보여준 다음에
믿으라고 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사실 확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그 빛을 발하게 됩니다. 내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인간의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인간의 협력을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인간과 더불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 편에서의 응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응답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구원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믿음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응답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응답의 역사를 보면 아브람은 일가친척을 떠나 하느님께서 보여줄
낯선 땅으로 떠날 것을 요청 받았고 또 떠났습니다. 그리고 늘그막에
얻은 아들을 기꺼이 하느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15,6).
탈출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이끌어내었던
모세의 삶의 여정을 보면 인간적인 정의감에 불탔던 그가 온전히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대로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
가운데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여호11,15).
불과 삼백 명으로 십오만 병사에 대항해 싸우는 기드온,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메시지를 순명으로 받아들인 마리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믿음에 따르는 순명이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마땅하고 옳은 일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비상식적이고 비논리적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이기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고통과 시련이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 큰 사람이 되려면 이러한 단련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갈등과 상처를 가슴에 담고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한 요셉의
태도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사방에 소문을
내고, 따지고 망신을 주며 보복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상대를 철저하게 배려하는 큰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남의 허물을 일삼아 찾아다니고 들추어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없는지요. 이웃의 잘못만이 눈에 띄는 사람이라면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주변에는
진실한 사람이 없고 하느님께서도 함께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삶이라면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격려해 주는 사람입니다.
힘겹고 어려워하는 이들과 마음을 나누는 사람, 만나면 위로와 기쁨이
되고 하느님의 축복이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궁지에 몰린 마리아를
감싸주고 품어주려 했던 요셉의 모습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뜻 앞에 요셉이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최선책으로 결정한 것은 다 소용이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혼자 고민하기 전에 하느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계산을 하고 이해득실을
따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한가운데서 나의 응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응답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는 하지만 현실적인 이익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세상 것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바르고 정직한 마음을 지녀야
하고 아주 사소한 것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관계 안에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 안에서 응답을 요구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순간 신앙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주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더더욱 상식에 어긋나고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울 때 그때야말로 그 안에서 주님의
뜻에 맞는 응답의 소명을 받고 있는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편안하고 안락한 길에 있지만, 우리의 관심은 그
길이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인가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멋있게 보이는 길이라 해도 그 길이 우리의 목적지인 하늘나라와 연결되지
않은 길이라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반면에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목적지를
향한 길이라면 그 길을 가야합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어려운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가? 내가 이것을
감당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 들 때 응답의 소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게 여겨지는 일, 궂은 일, 곤란한 일에 직면해서 피하려 하지
말고 주님의 부르심을 생각하십시오. 길의 상태가 아니라, 그 길의 끝이
어딘가를 생각하십시오. 바로 그 마음 안에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 응답 안에 완성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길 청하며 매일 매 순간 우리 마음속에 아기 예수님을 탄생
시켜 드려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모든것이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2013년 가해 12월22일 대림 제4주일
이제 대림초의 모든 불이 켜졌습니다. 4개의 켜진 대림초를 보면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나의 준비는 어떠했는가를 다시금
반성했으면 합니다.
성탄을 위한 준비로 많은 이들이 꼽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첫째는 판공성사이지요. 또 이웃을 위한 나눔의 실천도 있겠습니다.
이제까지 하지 못했던 화해와 용서를 실천하는 것 역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는 준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잘 생각해보세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사실은 결국 내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게요. 운동을 해서 온 몸이 땀범벅입니다. 찝찝하고
약간의 냄새도 납니다. 그때 “내가 너를 위해서 목욕할게.”라고
말씀하시나요? 물론 목욕함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목욕을 하면 일차적으로 내 자신이
개운하고 기분이 좋아지지 않습니까?
이웃을 향한 나눔의 실천과 용서와 화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근본적으로 내 마음이 편안해지고 큰 기쁨을 간직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결코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렇게 주님께는
돌아가는 그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가 기쁘고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랍니다. 결국은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인데도, 주님께서는 ‘너만 좋으면 나는 너무나
기쁘다.’라면서 내 자신을 위한 행동들을 끊임없이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이 이 대림의 시기, 우리가 성탄을 준비하면서
행하는 모든 것(판공, 나눔, 용서, 화해, 사랑의 실천 등)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위한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지기에, 전혀 행동하지 않기도 하고
또 하더라도 억지로 행하고 마지못해서 실천합니다. 또 자신이
하는 모든 일들을 세상에 드러내려고 애를 쓰기도 하지요. 주님이
아닌 나를 드러내려고 하고, 주님의 뜻보다는 내 뜻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결코 주님과 함께 할 수 없으며, 진정한 행복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부모님을 보십시오. 성모님은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가졌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함이 없음을
기억하면서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맡깁니다. 요셉 성인은 예수님의
양부가 되어야 한다는 커다란 짐 앞에서 주저하지 않고 기쁘게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십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느님께서
이 가정 안에 오실 수 있었습니다. 즉,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쩌면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나를 드러내려는 세상의 법칙보다는 주님을 드러내려는 사랑의
법칙을 따를 수 있는 넓은 마음도 필요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
안에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다른 이에게 상처 주지만 그 마음의 상처를 낫게 하는
것도 역시 사람밖에 없습니다(가모시타 이치로).
대림초의 모든 불이 켜졌습니다. 그만큼 예수님 오실 날이
가까웠다는 증거지요.
성소국에 계속 남아 있으면서....
그저께 인사이동 발표를 보면서, 성소국에 있었던 지난 시간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2010년 6월에 왔으니, 벌써 만 3년을 넘어서
4년째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 동안의 시간들을 생각해보니
너무나도 감사하고 행복한 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제 주변에
너무나도 좋은 사람들이 가득했거든요.
우선 주교님 두 분과 많은 신부님들이 성소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도움을 주십니다. 교구의 어떤 단체도 성소국처럼 관심과 사랑을
받는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지요. 또한 사무실에는 수녀님과
여직원이 성심을 다해 열심히 일합니다(수녀님께서는 너무 열심히
일하셔서 병도 얻으셨어요. 산재인가?). 그리고 교구와 본당
성소후원회 임원들이 싫은 소리 하나 하지 않고 열심히 봉사하고
계시지요. 신학생들과 예비신학생들도 자신의 소중한 성소를 잘
지키기 위해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천교구의 역대 성소국장 신부님들의 평균 임기는 2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제일 오랫동안 성소국장으로 계셨던 분이 만
3년이었지요. 아마도 너무나도 행복하고 좋은 자리이기에, 다른
신부도 이 혜택을 누리라고 임기가 짧았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임기를 훨씬 뛰어넘었지요. 이렇게 너무 오랫동안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분에 넘치는 이 자리에 계속 있게 되면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데에도 소홀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해봅니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받은 것이 많았는데, 왜 받지 않은 것만을
생각했을까요? 이제는 받은 만큼 더 나누고 베풀겠습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소나우 신부와 함께하는 마음의 산책
'당신은 아름다워야 하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2013년 가해 12월22일 대림 제4주일 복음묵상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루카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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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산골 마을의 처녀의 입에서 나온 엄청난 노래다.
여기에는 우리가 지나칠 수 있는 진실 하나가 있다.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에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기뻐
뛰논다는 것은
마리아의 입장이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입장이다. 그리고
바람직한 자세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입장에서 “굽어본다”는 의미는
창조된 참된 존재의 이유를 망각하고,
스스로를 비하 하는 삶으로 인해 잃어버린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주시겠다는 뜻이 숨겨 있다.
시골의 처녀를 통해서 일어나게 될 구원의 역사. 그 구원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께 받은 고귀함을 되살리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그토록 삶을 던져 외쳐댄 사랑이라는 말은 결국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가라는 뜻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고귀한 척하지만 결과적으로 비하하는 어리석은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름다운 구절이 있어 옮겨본다.
“You were created in God’s image.
God makes no mistakes.
To put yourself down for the way you are is to insult God’s handiwork.
You are beautiful.”
“당신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실수하시지 않습니다.
당신 자신을 비하하는 것은 손수 지으신 하느님의 작품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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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말씀은 지난 주 수요일(12월18일)의 복음말씀과 같습니다.
그래서 어제 복음 말씀에 이어지는 루카 1장47절의 말씀을 간단히
묵상해 보았습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대림 제4주일
2013년 가해 12월22일
제단 앞에 있는 대림초 4개가 모두 밝혀졌습니다. 이른 새벽 멀리서
동이 터오면 곧 붉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4개의 불이 모두 켜졌습니다. 곧 주님의 성탄이 다가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면서, 주님의 성탄을 기다려야 할까요? 우리는 무엇을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께 선물로 봉헌해야 할까요? 며칠남지
않았습니다. 차분한 마음으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탄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기차를 타거나 자동차를 타고 여행을 다닐 때 터널을 통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잠시 어둡고 밖을 볼 수 없지만 곧 밝은 빛이
보이고 하늘의 구름과 산의 나무들을 볼 수 있습니다. 대림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을 찾아가는 터널과 같습니다. 터널을 지나다
보면 저 멀리 흰빛이 보이기 시작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곧 밝은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대림 제 4주에서 바로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 주시리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이야길 듣고,
복음에서는 요셉의 꿈에 나타나는 천사 가브리엘의 이야길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제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삶의 중심에 바로 그분 ”임마누엘“이신 그분이 늘 함께 하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동차는 운전하는 사람에 따라서 우리를 빠른 시간에 원하는
목적지까지 갈 수 있도록 해 주는 운송수단이 되기도 하고, 5분
빨리 가려다고 50년 먼저 갈 수 있도록 하는 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자동차는 그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에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고는 교통법규를 위반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나쁜 운전습관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편리하고 즐거운 운전이
되기 위해서는 좋은 운전습관이 중요합니다.
좋은 운전습관 중에는 준법운전이 있습니다. 이렇게 준법 운전만
하여도 대부분의 교통사고는 예방할 수 있습니다. 신호등을 잘 지키고,
규정 속도를 지키기만 해도 잘하는 운전입니다. 두 번째로 좋은
운전습관은 안전운전입니다. 비가 오는 날은 속도를 더 줄이는
것입니다. 운전을 하기 전에는 미리 충분히 휴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2시간 정도 운전을 하면 잠시 쉬는 것입니다. 앞에 큰 차가 있으면
거리를 충분히 두는 것입니다. 앞에 있는 차량의 흐름, 뒤에 따라오는
차량을 살펴보면서 운전을 하는 것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운전습관은
양보운전입니다. 운전을 하다가 고장 난 차가 있으면 내려서 도와주는
운전입니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짐을 들고 힘들게 걸어가는 노인을
태워주는 운전입니다. 우리 모두가 양보운전을 한다면 우리 사회는
한층 밝고 아름다워 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겸손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겸손에도 3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 번째 겸손은 십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주일미사에 꼭 참여하고, 교무금도
정성껏 준비하고, 성당의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겸손은
십계명은 물론 작은 신앙의 의무까지도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주일미사는 물론 평일미사도 자주 참례하고, 본당에 있는 여러
신심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겸손의 가장 큰 단계는
이제 십계명과 신앙의 의무는 물론이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희생과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큰 영광으로 아는 것입니다.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가고, 그분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때로 모함을 당하고, 때로 비난을 받아도 화를 내지 않고,
그런 상처 때문에 봉사하는 자리를 떠나지도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말을 합니다. 요셉은 겸손의 두 번째 단계까지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운전으로 말을 한다면 안전운전까지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요셉에게 또 다른 차원의 겸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나에게 주어지는 고난과 고통까지도 감수하는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라면 함께 자리를 하지 않았음에도
아이를 가진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는 겸손입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깨어서 기다리는 사람은 이웃과 형제를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며, 이런 이들은 형제의 고통과 절망, 괴로움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그런 자신의 행동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임을
깨닫게 되며, 이런 사람들에게 “임마누엘”주님은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은 임마누엘 주님을 굳이 찾으러 멀리 가지도 않고, 그분이
오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도 않으며, 매년 다가오는 “성탄”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감사하는 시간으로 찬양하는 시간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동방박사들이 황금, 유향 그리고 몰약을 준비했듯이 우리들도 기도와
희생 나눔을 준비해서 주님의 성탄을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생각만 해도 든든한 성채 같던 사람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3년 가해 12월22일 대림 제4주일
마태 1,18 - 24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생각만 해도 든든한 성채 같던 사람>
올봄 새로 옮겨온 공동체는 야산을 등진, 숲속에 위치한 적막한
곳입니다. 도심의 불빛과 소음을 떠나오니 평소에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솔바람소리, 까치울음 소리,
‘똑똑’ 물 떨어지는 소리, 산 건너편에서 넘어오는 개 짖는 소리,
아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 거기다 수도원 처마 밑에서 들려오는
풍경소리…
하루에도 몇 번씩 스쳐지나가는 바람이 풍경에 닿을 때마다
‘땡그렁 , 땡그렁’거리는 소리에 놀라는데, 그럴 때 마다 마치도
절간에 와 있는 착각에 빠집니다.
요즘 조용한 곳에서 지내면서 느끼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하도
많이 써먹어서 약간은 진부하면서도 통속적이기도 한 ‘깨달음’을
다시금 체험합니다.
하루 온종일 쇠를 깎아대는 부품가공공장에서 작업하는 분들은
소음의 정도가 너무 커서 청각보호용 귀마개를 따로 착용해야 할
정도입니다. 그런 요란한 소음 가운데서, 풍경소리, 솔바람소리,
클래식음악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침묵이란 자연의 배경이 없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라 할지라도
그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요셉성인은 성모님과 더불어 하느님의 구세사에
크게 일조한 ‘조용한 배경’으로서의 인물이었습니다. 요셉성인은
예수님의 청아한 음성이 만방에 널리 울려 퍼지도록 한 평생 침묵으로
일관했던 침묵의 성인이셨습니다.
요셉성인에 대한 행적은 복음서 전체를 아무리 훑어봐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요셉성인은 마리아와 더불어 예수님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중요한 인물입니다. 베드로나 요한만큼은 아니더라도
요셉성인의 일화나 그분의 직접적인 목소리가 조금이나마 복음서에
소개될 만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사가 모두는 요셉성인에 대해서
철저하게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만큼 요셉성인은 실제 삶에 있어서도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저 묵묵히 순명하셨던 요셉성인의 생애였습니다.
마리아와의 실제적 혼인을 포기하라면 포기했습니다. 아기 예수를
안고 길을 떠나라면 떠났습니다. 나자렛으로 돌아오라면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을 위해 한평생 자신의 삶을 봉헌하셨습니다.
요셉성인이 구세주 탄생 예고 앞에 침묵하지 않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더라면 하느님의 구속 사업은 큰 타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요셉성인이라는 과묵한 존재가 없었더라면 헤로데라는 커다란
장애물을 넘기가 힘겨웠을 것입니다. 요셉성인은 마리아와 예수님에게
있어 생각만 해도 든든한 성채 같던 사람, 언제 보아도 믿음직한 보루
같던 사람이었습니다.
저희 같은 활동수도자들에게 있어 큰 취약점 가운데 하나는 ‘침묵의
어려움’입니다. 저도 잘 못 지키면서 형제들에게 틈만 나면 침묵하라고
부르짖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침묵해야 주변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자연의 소리, 형제의
요구,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침묵해야 자신의 내면을
조용히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침묵을 통해서 영적인 삶이 시작됩니다.
침묵해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그분의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랑 받은 행복의 힘
2013년 가해 12월22일 대림 제4주일
<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복음 : 마태 1,18-24
<사랑받는 행복의 힘>
[회복탄력성]의 저자 ‘김주환’교수가 KBS 아침마당에 나와 강연한
것을 들었습니다. 그 내용을 옮겨봅니다.
우리의 삶은 온갖 역경과 어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러한 역경을 이겨낼 잠재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데 몸이
힘을 발휘하려면 강한 근육이 필요한 것처럼, 마음이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마음의 근육이 필요합니다. 이 마음의 근육이
단단하면 단단할수록 어떤 어려움과 역경이 닥쳐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데 바로 이 마음의 힘을 “회복탄력성(resilience)”
이라 합니다.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들은 역경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도약의 기회로 삼음으로써 예전보다 높은
성취와 자기발전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회복탄력성을
누구나 다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고무공처럼 강하게
되튀어 오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유리공처럼 바닥에 떨어지는
즉시 산산조각 나서 부서져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한 개인의 성공과 실패에 중요한 요인인 회복탄력성의
발견은 1950년대 중반 하와이 카우아이 섬에서 행해진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950년대까지 카우아이
섬 주민들은 대대로 지독한 가난과 질병에 시달렸고, 주민
대다수가 범죄자나 알코올 중독자 혹은 정신질환자였습니다.
연구자들은 1955년에 이 섬에서 태어난 모든 신생아 833명을
대상으로 이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가정환경과 사회 환경이
그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추적 조사하는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에
착수했습니다. 그 후 20여 년간에 걸쳐 추적 조사한 연구 성과들이
책으로 출간되었지만 그 결과는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대부분 가족 구성원들이 가정불화, 이혼,
알코올 중독, 정신질환 등으로 시달렸습니다. 그들은 일찍부터
학습부진에 시달렸으며, 약물중독에 빠지거나 정신질환을 앓았고,
범죄에 빠지거나 사회부적응자가 되었습니다. 18세가 되었을
때에는 많은 아이들이 전과자나 미혼모가 됐습니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자녀들 또한 온전한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는 당연한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연구에 참여한 심리학자 에미 워너는 예외적인 사례들을
발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이클과 메리(이상 가명)는 매우 열악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났다. 마이클이 미숙아로 태어났을 때 그의 엄마는
10대 소녀였습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주먹다짐을 할 정도로
매일 싸웠고, 결국 엄마는 8세 된 마이클과 세 명의 동생을 버리고
섬을 떠났습니다. 메리 역시 5세부터 10세 사이에 여러 차례
신체적ㆍ정신적 학대를 받으며 자랐고, 그의 엄마는 심한
정신병으로 입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마이클과
메리는 성공적인 청년들로 성장했습니다. 그들은 18세 무렵
높은 도덕성과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대단히 낙관적이었으며 학교에서 매우 인기 있는 학생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는 동시에 좋은
대인관계를 통해 학생회장을 하고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워너 박사가 쓰기를 이들은 어떤 부모가 자녀를
키우든지 자신의 자녀가 닮았으면 하는 모범적인 삶을 살아가는
청년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에미 워너 박사는 이 예외적인 현상에서 무언가 배울 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전체 연구대상자 중에서 가장
열악한 환경에 놓였던 201명의 성장과정에 대한 자료를 다시
분석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 대부분이 문제아로 성장했을
거란 기대와 달리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72명은 별다른 문제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강한 자신감과 긍정성을 지닌 훌륭한 젊은이로
성장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오래 고심한
끝에 그들에게는 삶의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공통된 속성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에미 워너는 이것을
‘회복탄력성’이라 불렀는데, 잊혀져갈 뻔했던 연구에서 그녀는
전혀 의도치 않았던 엄청난 발견이었습니다.
이렇게 에미 워너 교수가 40년에 걸친 연구성과들을 정리하면서
터득한 회복탄력성의 핵심적인 요인은 결국 ‘인간관계’였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성장한 아이들은 예외 없이 ‘자신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하고 받아준 어른이 적어도 한 명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될 수도 있고 할머니가 될 수가 있어도
누군가 자신을 온전히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부모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부모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로부터 참다운 인정을 받아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세상 많은 고난을 잘 받아
들이고 오히려 그 고난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해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작은 고난에도 쓰러져
버리는 약한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조: 김주환 저, 『회복탄력성』, 위즈덤하우스,
2011/ KBS 120209 아침마당. 행복의 비밀]
카인과 아벨은 하느님께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카인의 제물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 인정받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인정받지 못한 카인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다닙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동생 아벨을 살해합니다.
인정받지 못하면 인정받지 못한 대로 살아가고 인정받으면
인정받은 대로 살아갑니다. 죄를 저질러서 행복을 잃는 것이
아니라 이미 행복을 잃었기 때문에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그렇게라도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은 하느님에게
보복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통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행동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행복해야만 좋은 행동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카인이
하느님께 인정받아 행복했다면 절대 아벨을 살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자신들의 처지에서 만족하고 행복
하였다면 절대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는 신창원이 한 말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 나를 잡으려고 군대까지 동원하고 엄청난 돈을 쓰는데, 나
같은 놈이 태어나지 않는 방법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너 착한 놈이다’ 하고 머리 한번만 쓸어주었으면 여기까지 안 왔을
거다. 5학년 때 선생님이 ‘새끼야, 돈 안 가져왔는데 뭐 하러 학교
왔어 빨리 꺼져’ 라고 소리쳤는데 그때부터 마음속에 악마가 생겼다.”
결국 나에게 닥쳐오는 모든 어려움들을 잘 받아들이고 빗나가게
하지 않는 방법은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아 행복해지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사람은 나를 믿어주는 사람의 기대치대로 행동합니다.
우리나라 중학생 많은 아이들이 게임에 정신이 팔려있습니다. 왜
공부는 하기 싫어하고 게임만 하기를 원할까요? 김주환 교수가
제안하는 이 방법을 쓰면 아이들이 절대 게임을 하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바로 게임을 공부 과목에 넣어서 똑같이 시험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 교육은 공부에 맛들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맛을 잃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즉 이런
교육으로는 공부에 대한 맛을 잃게 만들기 때문에 절대 노벨상을
타는 사람은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김 교수는 다른 나라에서 실험한
창의력 높이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한 반 아이들에게는 사탕을 주고
한 반 아이들에게는 그냥 문제를 풀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사탕을 먹은 아이들이 창의력에 매우 좋게 나왔다고 합니다. 또
웃긴 프로그램을 잠깐 보여주고 문제를 풀게 했더니 심각한 것을
본 아이들보다 문제를 더 잘 풀었다고 합니다. 즉 행복하게 만들면
창의력도 성적도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우리 인간에게
많은 일을 시키기 위해 그만큼 행복하게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요셉도 성모님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기대를 잔뜩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만큼이나 모든 어려움을 인내와
사랑으로 잘 받아들입니다. 자신과 약혼한 여인이 잉태한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에 보복하지 않고 덮어주려 했고, 또 천사가 꿈에서
일러준 대로 자신의 육정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모든 것을 잘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뜻은 그만큼 하느님도 인정하시고
자신도 인정받고 있음을 잘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받는
사람은 그 사랑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인정받는 행복을
잃기를 원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모든 죄는 불만족하는 인간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또 구원은
행복한 이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내 주위의 구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떤 CF에서 “가장 가까이 두고 싶은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만큼
자신을 받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 이
세상을 위해서도 가장 큰 유익인 것입니다.
- 수원 교구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담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주님의 닉네임은 임마누엘
2013년 가해 12월22일 대림 제4주일
주님의 닉네임은 임마누엘
이심전심(以心傳心)인 인간관계로 척하면 알아듣는 사이라면
행복합니다. 부부는 당연히 그래야하고 자녀와도 그렇고 이웃과도
그래야 하지요. 그러나 자신을 튀게 보이려고 들 신경 꽤나 쓰는
사람들이 좀 많습니다.
구분은 구분일 뿐이라야 하는 데 평등 깨고 미워하고 질까지 다르게
보네요. 예수님은 우리와 구분되시려고 않으시고 인간으로 오신
점, 중요하답니다. 그의 닉네임이 임마누엘이란 점,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 아닙니까.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오 1,23)”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도회] 임마누엘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3년 가해 12월22일 대림 제4주일,
이사7,10-14 로마1,1-7 마태1,18-24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임마누엘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참 좋은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이름 뜻이 참 은혜롭습니다. 예수님만 아니라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우리들 또한 임마누엘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복음을 요약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 삶의 허무는 충만으로 바뀝니다.
두려움과 불안의 어두움도 하느님 현존의 빛 앞에 사라집니다.
맑고 밝고 평화와 기쁨이 우리 내면을 가득 채웁니다.
바로 4개의 밝게 빛나는 대림초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또 임마누엘 예수님의 탄생이 임박했음을 알립니다.
오늘 아침 기도의 세 후렴 역시 얼마나 우리 마음을 흥겹고 기쁘게
하였는지요.
“주님의 날이 가까웠으니 시온 산에서 나팔을 불라.
보라, 주께서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리라. 알렐루야.”
“주께서 오시나니, 마중 나가 노래하라. 알렐루야.”
“천주여, 당신의 전능하신 말씀은 당신의 어좌로부터 오시겠나이다.
알렐루야”
모두가 주님 오심을 고대하는, 주님 오심이 임박했음을 찬양하는
후렴들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우리를 찾아오시는 겸손과 사랑의 임마누엘
예수임입니다.
다음 말로 시작되는 대림 2부, 7개의 성모후렴 또한 얼마나
은혜로웠는지요.
‘오! 지혜(O Sapientia)여’ ‘오! 하느님이여(O Adonai)’
‘오! 옛세의 뿌리여(O radix Jesse)’ ‘오! 다윗의 열쇠요
(O clavis Dabid)’
‘오! 샛별이요(O oriens)’ ‘오! 만민의 임금이시여(O genitum)’
‘오! 임마누엘(O Emmanuel)이여’
모두가 주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우리의 소망이 녹아있는
탄원 기도입니다. 바로 이런 임마누엘 예수님 탄생이 임박한
대림 4주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임마누엘 이름 뜻대로 살 수
있겠는지요. 바로 오늘 복음의 주인공인 요셉 성인이 그 답을
줍니다.
첫째, 침묵입니다.
침묵의 사람, 사랑의 사람 요셉입니다.
침묵은 배려의 사랑입니다.
침묵은 인내입니다.
침묵은 깊이입니다.
침묵은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침묵은 깨어있음입니다.
침묵은 개방입니다.
진공 상태의 닫혀있는 침묵이 아니라 하느님 향해 활짝 열려
있는 침묵입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침묵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침묵을 사랑할 때 침묵은 우리 삶의 일부가 되고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이 됩니다. 침묵을 배워가면서 저절로 하느님을 닮아갑니다.
침묵의 깊이에서 샘솟는 생명을 주는 참 말입니다.
침묵을 잃어버려 날로 천박해지는 현대인의 삶입니다.
밤의 어둠은 영육이 침묵 안에 쉬라고 주어진 시간입니다.
‘쉼(休)’을 잃어버려 온갖 파생되는 질병들입니다.
침묵의 수행이 참으로 절실한 시대입니다.
침묵 중에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지혜로운 생각도 떠오릅니다.
진정 침묵의 사람만이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다음 복음 서두에서 요셉의 진면목이 잘 들어납니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다.’
요셉의 침묵은 그대로 배려의 사랑입니다. 한량없이 깊고 넓은
요셉의 마음은 그대로 하느님 사랑을 닮았습니다.
코린도 1서 13장 7절 말씀이 떠오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바로 의인 요셉의 사랑을 대변합니다.
눈 밝은 하느님은 이런 요셉을 당신의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둘째, 기도입니다.
기도의 사람, 희망의 사람 요셉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만이 희망하고 희망하는 사람만이 기도합니다.
절망하며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기도해서 사람이고 기도해서 의인입니다.
영혼이 살기위해 기도는 필수입니다.
침묵은 저절로 기도로 연결되기 마련입니다.
아니 침묵자체가 이미 기도입니다.
막연한 침묵이 아니라 주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잘 듣기 위한
침묵입니다. 침묵 중에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대화의 소통이 기도요 침묵할 때 비로소 대화의 기도가 시작됩니다.
밤의 침묵은 하느님 꿈꾸는 시간이자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위기의 순간 당신 천사를 통한 하느님의 개입입니다. 하느님은
요셉에게 당신 천사를 통해 은밀한 비밀을 다 털어 놓습니다.
그처럼 요셉을 신뢰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신뢰보다 더 큰 자산은 없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을 구원하실 것이다.”
침묵의 기도 중에 주님의 응답을 듣는 요셉입니다. 새삼 모든
문제는 내 안에 있고 답은 하느님 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둔 이들은 본능적으로 기도합니다.
기도하면서 주님 안에 있는 답을 찾아냅니다.
오늘 1독서의 아하즈 역시 기도 중에 답을 찾아냅니다.
1독서는 주님과 아하즈가 대화의 기도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겠습니다.”
자신의 약한 믿음의 치부가 발견되자 표징을 청하지 않겠다며
그 치부를 가리기에 급급한 아하즈의 심중을 꿰뚫어 본,
주님의 이사야를 통한 통쾌한 답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이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기도 중에 임마누엘 답을 받아 낸 아하즈 임금입니다.
셋째, 순종입니다.
순종의 사람, 믿음의 사람 요셉입니다.
영적성숙의 잣대가 바로 순종입니다.
진정 성숙한 사람만이 순종할 수 있습니다.
억지로 순종이 아니라 자발적 사랑의 순종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 일하십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에서 순종의 사람 요셉의 진면목이 잘 들어납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요셉의 지체 없는 순종으로 하느님의 구원역사도 차질 없이 펼쳐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정작 우리에게 고마워하는 것은 찬양과
감사의 제물이 아닌 이런 순종입니다.
순종의 응답보다 더 좋은 주님께 드리는 선물은 없습니다.
순종을 통한 봉헌입니다.
순종을 통해 하느님께 이르고 순종을 통해 축복도 받습니다.
요셉의 순종을 통해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도 성취됩니다.
몰라서 불순종이지 하느님을 알면 알수록 순종하기 마련입니다.
순종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머리나 마음만이 아니라 온 존재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항상 순종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요셉처럼 순종의 사람이자 믿음의 사람이었음은 다음
대목이 입증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분을 통하여 사도직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믿음의 순종을 일깨우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에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성도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믿음의 순종을 일깨우기
위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믿음의 순종을 통해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인품이 우리를 매료시킵니다.
대림 제4주일의 주인공은 요셉입니다. 요셉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침묵의 사람, 사랑의 사람 요셉입니다.
기도의 사람, 희망의 사람 요셉입니다.
순종의 사람, 믿음의 사람 요셉입니다.
그대로 임마누엘 의인 요셉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를 임마누엘로 변모시켜
주시고, 이런 우리 안에 당신의 거처를 마련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기타] 기쁨을 주는 환희의 한주간이 되길
2013년 가해 12월22일 대림 제4주일
기쁨을 주는 환희의 한주간이 되길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마태 1, 18-24)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라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선포된 이 말씀은 이제 나자렛의 시골처녀
마리아에게서 이루어집니다. 요셉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는 같이 살기
전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를 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구세주의
어머니가 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구약에 예언된 여인이 된다는 것에
대하여 대단히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인 다음 “어떻게
구세주의 어머니가 될까?” 무척이나 궁금하였을 것입니다. 중간 중간
문득 자신이 “꿈을 꾼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나며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통해서 자신이 아기를 가졌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천사의 말씀이 정말로 자신의 몸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에 대한
경이로움과 구세주의 어머니가 된다는 기쁨, 또 자신의 태 안에 구세주가
계시다는 것에 대한 기쁨을 어찌 표현할 수 있었겠습니까?
마리아는 이 기쁜 소식을 부모나 혹은 약혼한 요셉에게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단숨에 요셉에게 달려갑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아내가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고 자신이 그 아빠가 된다는 것이
기쁜 소식이긴 하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리아, 나는 그대가 거짓말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믿어요. 그렇지만
당신이 구세주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과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에 대하여
‘진정 가능한 일일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의 하느님, 제가 어찌 해야 합니까? 나의 사랑스런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였다고 하는데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제가 구세주의 아빠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학벌도 없고, 건강하지도 않고, 부자도 아니고,
똑똑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적당한 남자를 찾아보셔요. 저는 구세주를
위해서라면 기쁜 마음으로 파혼하겠습니다.” 라며 고뇌에 찬 기도를
바쳤을 것입니다.
마리아 입장에서는 자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사실과 요셉이
구세주의 아빠가 된다는 사실을 함께 기뻐하며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반응에 대하여 당황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시작하신일 하느님께서 이루어나가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 저에게 천사를 보내주셔서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셨듯이 요셉에게도 당신의 천사를 보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기도가 통했는지 요셉은 뜻밖의 천사의 방문을 접하고,
놀라워하고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처럼 부족하고 가난한 사람이
구세주의 아빠가 된다는 것이, 주님께서 자신을 구세주의 아빠로
선택했다는 것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기뻤을 것입니다.
“아, 진정 나의 배우자가 구세주의 어머니라니, 내가 구세주의 아빠로
선택되었다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느님은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라고 찬미의 기도를 바쳤을 것입니다.
이제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이고 함께 구원 사업을 위해
힘차게 나갑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간택을 받은 기쁨은 초라한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님을 낳는 것도, 헤로데의 학살을 피해 죽음을
무릎 쓴 이집트의 피난길도 전혀 고되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두 사람은 한 마음이 되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기쁘게
살아갑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모든 부부에게 최고의 배우자를 보내 주십니다.
그리고 가정을 이루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부부들이 혼인하기 전부터 혼수문제나 예식장문제, 가구나 살림집
문제, 기타 문제 등으로 마음의 상처를 주고받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또 혼인 생활을 통해서는 더 힘들고 더 위험한 경우도 많이 겪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짝 지워 주신 배우자라고 믿고 간절히 기도하며
서로를 위해서 배려하고 노력한다면 행복한 혼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환희의 삶을 살았습니까? 처음 서로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을 때입니까? 혼인하기로 결심을 하였을 때입니까?
임신을 하였을 때입니까? 아기의 출산을 설레임으로 기다렸을
때입니까? 아기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며 행복했을 때입니까? 처음에
가졌던 사랑의 마음으로 존경하고 사랑한다면 현실이 아무리 어려워도
환희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마리아와 요셉의 환희를
보았습니다. 우리 부부는, 하느님께서 계획한 우리 가정은 언제
그렇게 기뻤는가를 회상하며 다시금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환희의
한주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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