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례자 요한의 탄생 -
☆ 2013년 가해 12월23일 (자) 대림 제4주간 월요일
[청주] 아기의 이름은 요한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말라 3, 1 - 4. 23 - 24
† 복음 : 루카 1, 57 - 66
★ 하느님께서는 말라키 예언자를 통하여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신다. 이 말씀은 신약의 요한
세례자에게서 실현된다(제1독서).
★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엘리사벳이 하느님의 섭리로 아기를
낳았다. 본디 하느님의 이러한 섭리에 의심을 품었던 남편 즈카르야는
잉태 기간에 벙어리로 지내야 했지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고 난 뒤에 혀가 풀린다(복음).
◈ 오늘의 묵상
성경에서는 그 사람 이름의 뜻이 그의 특징이나 미래를 암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빼앗는 자)과
에사우(붉은 털투성이)의 경우에는 그들이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를 잘 드러냅니다. 모세(물에서 건지다)의 경우에는 그의
탄생 배경뿐 아니라 앞으로 수행해야 할 사명을 잘 드러내는
이름입니다. 예언자 미카(누가 하느님과 같으랴.)나 나훔(위로받은
이)의 이름은 그들이 전하는 예언이 어떤 내용인지를 암시합니다.
때로는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사라이가 사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시몬이 베드로로 이름이 바뀌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그들에 대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새로운 삶을 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즈카르야는 늘그막에 얻은 아기의 이름을
무엇으로 지어야 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상식에 따르면, ‘즈카르야’
라고 해야 합니다. 당시 관행으로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그대로 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친척들 가운데에는
아무도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는, ‘요한’이라는 전혀 엉뚱한
이름을 짓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이미 그에게 아기의 이름을 그렇게
지으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루카 1,13 참조). 곧 ‘즈카르야’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상식에 따른 것이라면,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느님의
뜻에 따른 이름입니다. 즈카르야라는 이름을 통하여 이 아기가
아버지처럼 사제로 살아갈 수도 있지만,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예언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믿지 않는 다른 이들과 달리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명과 세례명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에게
없는 또 다른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매일 미사 -
◈ [청주] 아기의 이름은 요한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3년 가해 12월23일 대림4주간 월요일
<세례자 요한의 탄생>
(루카1,57-66)
아기의 이름은 요한
요한의 탄생은 그 기쁨이 남달랐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돌계집'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던 이미 나이가 많은 여인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알게 되었고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이라는 이름은 즈카르야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입니다. 친지들은 아기의 이름을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로우심을 보여주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묵은 이름이 아니라 새 이름으로 태어난
요한은 그 이름값을 하게 될 것입니다. 혈육을 떠나 더 넓은
의미의 형제자매를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요(루가3,4; 요한1,27),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분의
길잡이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고 구세주의 오심을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어서 자기의
이름을 남기려 하는 법인데 역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남달랐습니다.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는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하겠느냐?’
고 묻는 이웃들과 친척들의 물음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함으로써 천사의 말대로 입이 풀렸습니다. 그리고 즈가르야가
한 첫 말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였습니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선포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1,66).
하고 말했습니다. 그 아기는 결국 주님을 드러내는 주님의 일꾼일
뿐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을 통하여 주님의 이름이 돋보였습니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이름을 통하여
주님을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로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준비하였습니다. 그는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자 자기 제자들에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요한1,36).하며 외쳤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라는
뜻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이 요한에게 몰렸지만 이제 새로운 주인공인
예수님께로 몰려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허락해 주신 달랜트만큼 최선을
다해서 일할 뿐입니다. 요한은 그야말로 분수를 아는 사람이요,
주제파악을 잘 하여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확실히 지켰습니다.
아마도 그가 자기가 뿌린 씨앗이 자라나 열매 맺는 것을 보고 그
열매까지 먹으려 했다면 오늘 우리가 기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파견된 사람은 물러설 때를 알고 구원사업은 하느님께서 내 도움이
없이도 언제든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내 방법,
내 방식을 고집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관리하는 사람이지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각자의 몫이 있습니다. 파견을 받은 사람임을 자각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성탄이 코앞에 왔네요! 주님을 낳아드릴 마음의 방은 활짝 열렸나요?
아직도 잠겨있어요? 저런….. 열어주세요! 열어주세요!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주님의 뜻에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젊은 청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한 청년이 이상한 말투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말에 다른 사람들 모두 크게 웃습니다. 솔직히
저는 ‘바보처럼 왜 저런 말을 하지?’라고 생각했고, 또 왜 웃는지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약간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
“신부님, ** 안 보세요?”라고 묻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본다는 텔레비전 개그 프로그램에서 유행되는 말이라면서, “신부님,
이 정도 프로그램은 봐 줘야 대화가 됩니다.”라고 합니다.
저도 이제는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어야겠다 싶어서 드디어 어제
저녁 이 프로를 봤습니다. 재미있는 부분도 있었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너무나 많더군요. 그러다보니 보다가 그냥 잠들고 말았네요.
만약 꾸준히 봤다면 장면 하나하나를 다 이해했을 것이고, 잠들지
않고 끝까지 다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심도 없고, 또
이해하기도 힘들었기에 결국 중간에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잠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 새벽, 주님과의 관계도 이렇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즉, 기도와 묵상 등으로 주님과 자주 만나고 대화를 나눴던 사람은
신앙생활을 지루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시간을 더욱
더 즐기고 행복해 합니다. 하지만 겉으로만 신앙인이라 말할 뿐, 기도와
묵상 등을 거의 생활화하지 않는 사람은 약간의 신앙생활에도 지루함과
힘듦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어제 청년들과의 독서모임이 있었는데, 한 청년이 이런 말을 합니다.
“본당 11시 미사 중에 세례식이 있었는데요. 미사가 2시간 이상 진행되자
제 앞에 앉아 있던 어떤 자매님은 지루해서 쓰러지기 직전이더라고요.”
세례식이 자주 있는 것도 아니고, 그 특별한 전례에 집중하면 또 다른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과의 만남이 자주 있지
않았기에 지루하고 그 시간이 힘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할례식 장면입니다. 그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아기 잉태소식에 의심을 품었다가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지요. 그러나
10달 동안 침묵 속에 하느님의 뜻에 집중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그분의
뜻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기의 이름을 정하는 곳에서
‘요한’이라는 정하자 혀가 풀려 하느님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평소에 주님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기도,
묵상, 성경읽기, 자선과 희생 나눔 등을 통해 우리는 분명 주님을 만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어렵고 힘들어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큰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혜안도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기쁜 성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더 잘 준비해서 가장
큰 기쁨의 성탄이 되시길 바랍니다.
벌이 꿀을 딸 때는 꽃을 가리지 않는다(정민).
작년 사제서품식장. 거룩한 사제 한 명이 탄생하기 위해 참 많은 노력이
필요한데....
좋은 점 바라보기
며칠 전에 있었던 인사이동 발표 이후에 이러쿵저러쿵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좋은 신부님 오신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반면에,
무섭고 어려운 신부님이 오신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 본당 신부님이 바뀌지 않는다고 화를 내기도
하더군요.
전에 본당신부로 있을 때, 가정방문을 가서 한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할머니는 본당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다니셨던
할머니로, 모든 본당신부님을 다 접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할머니, 어떤 신부님이 제일 좋았어요?”
그러자 이 할머니께서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은 다 좋죠. 이 신부님은 이런 점이 좋고, 또 저 신부님은 저런
점이 좋고. 특히 미사를 해주시니 무조건 좋죠.”
좋은 점만 바라보면 무조건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안 좋은 점만 보려고 하지요. 그러다보니 좋은 점을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어떤 수녀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신부님, 저는 전에 많은 성인 수녀들이 세상에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제가 사제가 없는 시골에서 소임을 맡다보니,
성인 수녀 10명보다도 못된 신부 1명 있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성인 수녀가 10명이나 있어도 미사를 할 수 없잖아요.”
좋은 신부님, 나쁜 신부님. 그런 구분은 우리들이 만들어낸 세속적인
구분이겠지요. 거룩한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님이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좋을 수 있음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가치가 없다면 그것은 행복일 수 없습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가치가 없다면 그것은 행복일 수 없습니다.'
2013년 가해 12월23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1,65)
---
우리 모두에게는 어린 아이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훗날 나는 어떤
어른이 되어있을까 하고 궁금해 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기대했던 삶의 모습을 살고 있을까?
예상한 대로 살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어떤 의미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혹은 꿈이 실현되었느냐 그렇지 않느냐 역시 그리
중요하지 않다. 대부분의 우리는 어렸을 때의 꿈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가치 있게 살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일 것이다.
가치 있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지는
순간부터 하느님께 받은 가치를 깨닫고, 그 가치에 걸맞게 사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께서 주신 가치이니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한 가치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우리 모두는 그 가치를 지키고 살릴 수 있는 힘을
하느님께 받고 세상에 나왔다. 만약 우리가 제대로 살지 못하거나,
우리 안에 악한 모습을 발견할 때, 그것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악이
아니라, 우리의 나약한 의지로 본능과 타협한 결과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당신께서 주신 가치대로 살기를
원하신다. 사실 그것이 복음의 핵심 메시지이기도 하다.
지금의 자신의 모습을 둘러보자.
겉에 두르고 있는 옷은 중요하지 않다.
앉아 있는 자리의 높낮이도 유치한 판단 기준이다.
행복한가?
열심히 살고 있는가?
그리운 사람들이 많은가?
최선을 다해서 옳음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고 있는가?
지금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도 행복하다 할 수 있는가?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이 아기의 미래를 우리는 알고 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되었고, 결국 욕망에 사로잡힌 한
인간의 어리석음에 의해 목이 잘려나가는 삶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세례자 요한을 훌륭한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예수님 역시 세례자 요한에 견줄 인물을 없다
하셨다. (마태오11,11)
가치 있게 산다는 것, 그것은 복음을 사는 것 그 이상의 것도 그
이하의 것도 아님을 믿는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대림 제4주간 월요일
2013년 가해 12월23일
<세례자 요한의 탄생>
루카 1,57-66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적성성당의 본당신부로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운동화에 잠바를 걸친 분께서 성당엘 찾아오셨습니다.
서울에서 변호사로 개업을 하고 있는데, 아는 분의 소개로
적성성당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시골의 신자들을 위해서 무료로
법률 상담을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동네
음식점에서 소주한잔을 함께 했습니다. 주보에 공지를 하고,
법률상담을 받을 분들은 주일미사 후에 남으시라고 했습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상담을 받았습니다. ‘토지문제, 상속문제,
세금문제, 자녀문제, 이웃과의 다툼, 전세와 월세를 사는 분들의
고민’들을 들어주시고, 자문해 주셨습니다. 시골 사람들은 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워했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은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에 쉽게 변호사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서울에서 적성까지 버스를 타고 와 주셨던 김 변호사님이
생각납니다.
어제, ‘변호인’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저녁 9시 15분에 영화를
보았는데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줄거리는 편하고 쉬운 길이
있는데,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는 변호사의 이야기였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 무모한 일인 줄 알지만, 그래도 그
무호한 일을 하려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데모하고,
대자보를 쓰고, 파업을 한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상은
그런 사람들의 노력이 있고, 그런 사람들의 희생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아름다운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국가는 그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들의 기억 속에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는지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그런 무모한 일을 하시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의 어머니를 잠시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무척 힘이 세셨습니다. 어릴 때 이사를 자주 다녔는데, 어머니는
이삿짐을 거의 혼자서 날랐습니다. 아버님은 이사 가는 날도 어딜
나가셨고, 이사를 다 마친 후에 돌아오곤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식구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쌀가게, 연탄가게를 하셨고, 나중에는
밥장사도 하셨습니다. 작은 집이라도 장만 하신 것도 어머니셨습니다.
어머니는 식구들을 위해서 빨래를 다 하셨고, 식사 준비와 설거지도
혼자서 다 하셨습니다. 아무리 아프셔도 하루 누워있으면 거뜬하게
일어나셨습니다. 저는 기억을 잘 못해서 잊을 때가 있는데 어머니는
식구들의 생일은 꼭 기억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진실한 신앙인
이셨습니다. 많이 배우지는 못하셨지만 성당에서 봉사를 많이
하셨고, 평생 주일은 물론 평일미사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매일
기도 하셨고, 대녀들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저의
어머니만 그러신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은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주는 족보에도 여성이 등장합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 올수 있도록 도움을 준
여성입니다. 롯은 남편이 죽었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시어머니를 충실하게 섬겼고,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됩니다. 바쎄바는
다윗의 아내가 되었고 솔로몬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이들 여성들의
특징은 모두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이렇게 여성들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큰 나무는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리기 마련입니다. 우리 눈에 뿌리는
보이지 않지만 뿌리가 없다면 큰 나무는 바람에 쓰러지고, 가뭄에
말라 버릴 것입니다. 가정이라는 집은 뿌리와 같은 어머니가 있기에
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려도 안전하게 지켜지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바로 그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뿌리와 같은 삶입니다. 생명을
잉태하면서 산고의 아픔을 겪는 어머니의 삶입니다.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입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세례자 요한의 탄생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3년 가해 12월23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
<세례자 요한의 탄생>
루카 1장 57-66절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즈카르야의 인생은 정녕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배경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탄탄한 사제 가문의 후손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습니다. 신앙심이 깊었을 뿐만 아니라 인품 역시
탁월했습니다. 복음사가의 표현에 따르면 즈카르야는 모든 율법
계명을 철저히 준수했으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의로운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이렇게 덕망 높고 훌륭한 사제
즈카르야를 백성들은 무척이나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즈카르야에게 모든 것을 다 허락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다 갖췄지만 예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부분 후손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했었지만 야속하게도 세월은 순식간에
흘러버렸고, 이제 즈카르야뿐만 아니라 아내 엘리사벳도 노년에
접어들어 자녀를 얻을 가능성은 사실상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훌륭한 사제 즈카리야는 결코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으며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제 직무를 묵묵히 수행해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전에서 분향하고 있던 즈카르야에게 주님의 천사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건네는 말씀이 참으로 어이없고 기가 막혔습니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예언도 어느 정도라야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호호백발이 된
아내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니... 즈카르야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라고, 천사가 내막을 잘 모르고
한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즈카르야가 자기도 모르게 던진 불신과 의혹이 서린 대답에 대한
천사의 벌칙은 매섭기가 그지없습니다.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즈카르야는 순식간에 벙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즈카르야 입장에서
보면 너무도 어이없고 기가 막힌 상황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너무나 억울하고 이해하기 힘든 ‘황당한 시추에이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참으로 납득 못할 상황, 결코 원치 않았던 기이한 상황 앞에서
즈카르야가 받았던 충격과 상처는 컸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도
아니고 사제가 갑자기 벙어리가 되었으니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즉시 마음을 정리합니다. 자신의 경솔함과 불신을
뉘우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특별한 상황을 침묵 속에, 깊은
기도 속에 조명해봅니다. 참으로 수용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머지않아 모든 것을 설명해주실 것임을 굳게 믿었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뜻밖의 상황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회복시켜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마음 깊숙이 간직했습니다. 즈카르야는 10달간의
길고도 집중적인 대침묵 피정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 오랜 침묵과 기도가 오늘은 아름다운 결실을 맺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대로 즈카르야에게 아들을 선물로 주셨고,
여드레째 되는 날 할례식을 거향하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들 세례자 요한의 할례식장에서 즈카르야의 명예를 완전히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에 힘입어 즈카르야의 말문이 활짝
열렸으며, 그의 입은 즉시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보십시오. 비록 더디게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보면 하느님의 구원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아서 조금 늦을 뿐입니다.
우리도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즈카르야 같은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조금도 원치 않은 이해하지 못할 황당한 사건을 체험합니다. 정말
억울하고 난감한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하는 기가 막힌 일도 경험합니다.
그 순간 우리가 기억할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즈카르야입니다. 이해
못할 상황, 납득하기 힘든 현실 앞에서도 꾸준히 하느님을 믿고
희망했던 즈카르야, 오랜 침묵 속에서 최선을 다한 기도를 계속 바쳤던
즈카르야, 비록 한 템포 늦었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굳게 믿은 즈카르야였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랑과 기대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3년 가해 12월23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
< 세례자 요한의 탄생 >
복음 : 루카 1,57-66
< 사랑과 기대 >
‘연탄길 2’에 ‘오랜 기다림’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이야기입니다.
중국 허난성 루오양 시 교외의 구어판조 씨와 마음씨 착한 그의 아내
주원샤 씨가 살고 있었습니다. 농부인 구어팡조 씨는 우물에서 일을
하다가 깊이가 18미터나 되는 우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급하게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뇌를 다친 그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식물인간
판정을 받았습니다.
결혼한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또 뱃속에 아기를 잉태한 그의
아내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남편을 극진히 간호했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남편의 몸을 매일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마사지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원샤 씨가 방에 들어갔을 때 놀랍게도 남편이 두
눈을 뜨고 해바라기처럼 웃고 있었습니다. 의사조차 이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의식이 돌아온 구어팡조 씨는 오래 전에 불렀던
노래들을 아내와 함께 불렀고 의사가 물어보는 간단한 산수문제도
풀었습니다.
그런데 구어팡조 씨가 얼마 만에 깨어났는지 아십니까? 23년 만에
깨어난 것입니다. 20대의 푸르른 시절에 잠이 든 구어팡조 씨는
50살이 돼서야 긴 잠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아내 주원샤 씨의 곱던
얼굴에도 세월이 나무 등걸처럼 주름져 있었습니다.
사랑의 두 날개는 믿음과 희망이라고 합니다. 주원샤 씨는 남편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 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식물인간으로
깨어날 기약이 없는 남편 앞에서 23년간이나 매일같이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언젠가는 깨어날 수 있다는 믿음과 기대(희망)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은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기대하지 않지 않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은 이미 세례자 요한의 운명을 정한 듯이
보입니다. 그의 이름 또한 요한이라고 정하셨고 메시아의 길을 닦는
예언자로 정하셨습니다. 결국 그의 아버지 즈카리야도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며 자신 아들의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이미 정해진 운명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즈카리야가 거부해 벙어리가 된 것처럼, 또 예수님도
겟세마니에서 그 뜻을 받아들이기 힘겨워 피땀을 흘리며 그 뜻을
철회해 줄 것을 기도한 것처럼, 하느님은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있지만 그 기대가 이미 강요된 ‘운명’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자유는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중요한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가시밭길의 힘겨운 삶을 기대하신다고
불평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나에게 아무런 기대도 해주지 않는 것에
화를 내야하지 않을까요? 사실 살아가면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삶의 방향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매 순간 살아가면서
선택의 순간에 직면할 때 더 이상 갈등할 필요가 없다는 축복입니다.
얼마 전에 급하게 어떤 분이 상담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상담해 드리지는 못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전에 성당을 열심히
다니던 어떤 분이 무언지 모를 병에 걸려서 병원에 가 봐도 명확한
병명이 나오지 않아 결국 비싼 돈을 지불하고 굿까지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조금 좋아지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니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 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굿을 하지 않으면 올 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저에게 묻고 싶었던 것입니다.
굿을 하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하지 말라고 했다가 정말 큰일이라도
나면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까요? 결국 그것은 본인의 결정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지금 어떻게 해야 옳은지 알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결국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라며
올해 죽더라도 굿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나에게 바라는 뜻이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면서 자녀가 안 좋게 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세례자 요한의 삶은 분명히 가시밭길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을 위한
가장 영광스러운 길을 가기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
그분의 뜻 또한 항상 좋은 결과를 낼 것을 믿어야합니다.
오늘 네비게이션을 켜지 않고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길은 잘 알았지만
교구청으로 이사 온 후 처음 내려가는 것이라 자주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나?’를 고민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길이 막히고 많은 신호등을
거쳐야 하는 길로 들어섰을 때는 ‘왜 네비게이션을 켜지 않았나?’하며
후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네비게이션이 길만 가르쳐 주었던
것이 아니라 고민을 덜어주며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르쳐주는 길로만 가면 다른 갈등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하는 기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기대를 따르는
것이 속편하고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매번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니까 좋은 기대를
하십니다. 자녀가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니 내가 잘되기만을 바란다는
것을 믿듯이, 우리 또한 하느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뜻이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하기 위한 기대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수원 교구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담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무엇을 따라 살아야할찌
2013년 가해 12월23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
무엇을 따라 살아야할찌
무엇을 따르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인생들이 전개되게 마련입니다.
또 자녀들을 어디에 기준을 두고 기르느냐에 따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생각해서 결론을 내리고 따르는 것도 역시 다 같은 맥락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처녀로 잉태하여 예수님을 낳으셨습니다.
하느님 뜻을 따른 결과란 용서와 해방임을 예언자 즈카르아가 보증합니다.
이쯤 하면 우리는 무엇을 따라 살아야할찌 다 알 수 있다고 봅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루카 1,63~64)”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도회] 운명이다. - 삶의 의미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3년 가해 12월23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
말라3,1-4.23-24 루카1,57-66
<세례자 요한의 탄생>
운명이다. - 삶의 의미 -
운명입니다. 사람마다 다 다른 운명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많아도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 다 그만의 고유한 운명이듯이 다 다른
성인들입니다. 공동체에 똑같이 몸담아 살고 있어도 다 다른 고유한
삶이듯 말입니다.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란 말도 있듯이 죽음을 포함해 삶 전체가
운명이란 생각이 듭니다. 지난 후 ‘만약…했더라면’ 이런 저런 생각도
해보지만 다 부질없는 상상일 뿐입니다. 자유로운 것 같지만 우리는
얼마나 많은 한계 내에서 부자유하게 살아가는 지요..
친지를 비롯하여 가까이 살다가 떠난 많은 분들을 대하면 ‘아, 그분의
운명이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 그만의 운명의 십자가
같기도 합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온통 고생하며 힘들게 살다가 불행하게 세상을
떠난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앞으로 인간 수명은 늘어나면서 불우한
노년 인생은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삶을 깊이 들여다보면 저절로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운명론자가 되는
기분입니다. 정말 힘든 것은 살아가면서 욥이 의문을 제기했던 것처럼
알 수 없는 삶의 부조리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기가, 삶의 의미를 찾기가 참 힘들다는 것입니다.
올해 희수(77세)를 맞는 '우리 시대의 현자'라 일컫는 어느 석학과의
인터뷰 한 대목입니다.
-올해로 희수(77세)를 맞았다. 나이 듦에 대한 생각은?-
“인생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느낌이다.
다시 한 번 릴케를 인용하자면, 릴케는 삶과 죽음 중 죽음이 진짜이고
삶이란 죽음의 바다 위에 일어나는 작은 파동에 불과하다고 했다.
아주 깊은 의미를 담은 이야기다.
조심스럽게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자는 아니지만 깨달음의 수준이 상당한 분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 역시 늘 눈앞에 죽음을 환히 두고 살라 했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저절로 하느님을 찾게 되며 삶 역시 조심스럽고
겸손해 질 것입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이자 성덕의 잣대가 겸손입니다.
겸손할 때 삶의 의미인 주님도 계시됩니다.
내가 삶의 의미가 아니라 주님이 내 삶의 의미임을 깨닫습니다.
‘운명이다’가 ‘하느님 뜻이다’로 바뀝니다. 숙명론적 비관주의의
삶에서 해방되어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늘나라를 삽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세례자 요한의 삶이 좋은 본보기입니다.
인간적 눈으로 볼 때 얼마나 불우한 운명의 세례자 요한의
생애였는지요.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이미 말라키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운명이 점지된
세례자 요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작명과정 중 의견이
분분했지만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쓰는 순간 즈카르야는 즉시
혀가 풀리고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고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말합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뿐 아니라 우리 역시 타고난 고유한 운명입니다.
요한의 이름 뜻은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신다.’입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또 하나의 요한입니다.
주님이 세례자 요한의 운명이자 삶의 의미였듯이 주님은 또한
우리의 운명이자 삶의 의미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운명이지만 믿는 우리들에겐 하느님의
부르심, 성소입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우리를 보살핍니다.
이런 깨달음이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는 숙명론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합니다. 이래서 하느님 찬미입니다.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한 즈카르야가
운명론에 대한 유일한 답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가 우리의
운명을 바꿉니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오로 사도의 권고처럼
항상 기뻐하면서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늘 감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양 날개를 달고 끊임없이 하느님 창공을 비상할
때 참 자유요 기쁨입니다.
이래서 평생, 매일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미사와 성무일도의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주님은 매일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시어
운명론에서 벗어나 각자의 성소에 항구할 수 있게 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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