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밧모섬 사도요한의 요한 묵시록 -
☆ 2013년 가해 12월27일 (백)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청주] 사랑받는 제자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1요한 1, 1 - 4
† 복음 : 마태 10, 17 - 22
요한 사도는 열두 사도의 하나이다. 어부 출신의 그는 제베대오의
아들로, 야고보 사도의 동생이다. 두 형제는 호숫가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되었다. 요한 사도는
성경에서 여러 차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 표현되며,
예수님의 주요 사건에 동참한 제자이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성모님을 맡기셨다. 전승에 따르면, 요한 사도는
스승을 증언한 탓으로 유배 생활을 한 뒤 에페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 요한 사도는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가 체험한 참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한다. 이로써 이 편지를 읽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기를 바란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무덤이 비어 있다고 시몬 베드로와 요한 사도에게
전한다. 이에 두 사도는 무덤을 찾아가 빈 무덤을 확인하고 그분의
부활을 믿는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은 요한 사도의 축일입니다. 교회의 오랜 전통에 따라, 요한
사도는 요한 복음서를 쓴 복음사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오늘 복음에서도 보듯이, 자신을 가리킬 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실 요한 사도가 자신을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했다는
것은 감동적인 대목입니다. 그는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가 사랑받을 일을 많이
해서 그런 확신을 가졌던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을 때, 요한과 야고보
사도는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예수님께 말씀드렸다가 꾸지람을
듣기도 하였습니다(루카 9,54-55 참조).
그만큼 인간적으로 부족한 사람이며 자신이 사랑받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예수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때때로 자호(自號)를 지어 부르곤 하였습니다. 곧
자신의 의지나 취향, 인생관을 담아 자신의 칭호를 스스로 지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요한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자호를 지은
셈입니다.
신학생 때 피정을 지도한 어느 노사제의 당부가 기억납니다. “사제
생활 40년 동안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깨달았습니다. 신학생
여러분,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만큼은 결코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우리 각자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요한 사도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사랑받는 제자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3년 가해 12월27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요한20,2-8)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품고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또한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어디선가 그 속내를 드러내게 됩니다. 사랑을 받는 것도
행복이지만 사랑할 수 있다면 더 큰 행복입니다.
주간 첫날, 마리아 막달레나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갔습니다. 주님의 빈 무덤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릅니다”(요한20,2)하고 말하였습니다. 막달레나는 왜 무덤에
갔을까요? 사랑하는 이를 보고 싶어서입니다. 이른 새벽 두려움을
마다하고 무덤에 갔는데 무덤이 비어 있었습니다. 너무 놀라 제자들에게
달려왔습니다. 빈 무덤에 관한 얘기를 들은 베드로와 제자는 무덤을
향해 함께 달렸습니다. 듣자마자, 그것도 달려갔다는 것이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 줍니다. 스승을 사랑하는 마음이 거기 있습니다. 역시
주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아닌 다른 제자가 먼저 무덤에 다다랐습니다.
젊어서이든 주님을 더 사랑해서 빨리 달렸든 이유는 모르겠으나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덤을 들여다 볼 뿐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들어가서 본 후에야
들어가서 보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던 제자는 주님을
배반했던 베드로이지만 그를 받아들이고 베드로를 여전히 으뜸제자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지만 여전히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이고, 죄를 범했지만 그는 여전히 제자들의 맏형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던 제자는 그것을 알기에 그에게 자리를 내어준 것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제자는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기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압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기를 사랑해 주신 것(요한13,23; 19,26; 20,2; 21,7.20)처럼 베드로를
사랑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상대방의 어떤 과거를 알게 되면 그것이
우리를 끌고 다닙니다. 그래서 그는 낙인이 찍히고 미래가 없는
것처럼 취급합니다. 그러나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은
없습니다.”주님의 사랑을 받는 만큼,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의
마음도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마음! 심판을
이기는 자비에 귀를 기울이며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기다리고 양보하는 모습에서
어떤 책을 보다가 이런 구절을 보게 되었습니다.
“늘 바쁘다고 하는 사람들을 수첩에 잘 적어 두었다가 연말에 살펴보게.
그런 사람들은 대게 1년 내내 별로 한 일이 없다네.”
사실 저 역시 작년에는 정말로 입에 ‘바쁘다’는 말을 달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강의와 일들로 인해서 바쁘기도 했습니다.
제 다이어리를 보면 더 이상 일정을 적을 수 없을 정도로 항상 일정이
꽉 차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항상 쫓기는 생활을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올 초에 스스로 다짐했지요. ‘한 해 동안은 바쁘다는 말
대신에 한가하다는 말을 달고 살자’고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한가했습니다. 강의도 잘 들어오지 않고, 제가 맡은
일의 양도 많이 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에 다이어리 수첩을
정리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작년이나 올해의 강의 다닌 숫자가 거의
똑같습니다. 또한 제가 한 일도 늘었으면 늘었지 결코 줄지 않았습니다.
저의 이 체험을 통해서 느낀 것은 자신이 생각한데로 그대로 이루어
진다는 사실입니다. 바쁘다고 생각하면 바쁜 몸이 되는 것이고,
한가하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일이 많아도 한가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야 더 많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도 생긴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며칠 전에 어떤 수녀님께서 수도원 성탄 미사를 부탁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께서는 바쁘셔서 그 동안 차마 부탁도 하지 못했어요.”
얼마나 바쁘다는 표시를 하고 살았으면 수녀님이 그런 생각을 했을까
라는 반성을 하게 되더군요. ‘바쁘다’라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은
그만큼 다가서기 힘듭니다. 그러나 ‘한가하다’라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도 다가서기 쉽고 그 만큼 사랑을 실천할 기회도 생길 것입니다.
오늘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을 맞이해서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둘은 부활
소식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지요. 요한이 먼저 무덤에 도착하지만,
무덤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수장인 베드로가 먼저
들어간 뒤에야 그도 따라 들어가지요. 요한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셨던 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사랑을 받았던 그가 왜 부활
소식을 듣고서 먼저 무덤으로 들어가 확인해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제자들의 수장인 베드로에게 그 첫 자리를 양보하는,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았던 이유가 바로 이러한 여유 있는 기다림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자신이 독차지 하려는 욕심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양보하고 첫째 자리를 넘겨주는 모습에서 주님의 사랑을 받는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쁘다고 서두르는 모습에서는 주님을 받아들일 여유조차 생기지
않습니다. 요한 사도처럼 기다리고 양보하는 모습에서 주님의 사랑도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바쁘다면서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 여유를
가지고 주님의 사랑에만 집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가족과 친구, 소중한 이웃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사랑의 빚을
지며 살고 있다. 그러니까 행복한 것은, 언젠가 갚아야 할 빚이다(위지안).
사도 성 요한 복음사가와 그의 상징인 독수리.
못생긴 강아지(‘좋은생각’ 중에서)
영국의 로리 가족에게 기쁜 일이 생겼다. 집에서 기르던 개가 강아지를
아홉 마리나 낳은 것이다. 하지만 강아지들은 어미와 달리 못생겼다.
그래도 로리 가족은 튼튼하게 태어났다는 데 감사했다.
그들은 아홉 마리를 모두 키울 수 없어 신문에 광고를 냈다. 그러나
전화 한 통 걸려 오지 않았다.
이번엔 무료로 나누어 주겠다는 광고를 냈다. 그런데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막내가 말했다.
“아빠, 아무 연락도 없는데, 제일 못생긴 이 강아지는 제가 키울래요.
나머지는 한스 삼촌에게 주면 어떨까요?”
아버지는 “왜 하필 제일 못생긴 강아지니?”라고 물었다. 막내가 답했다.
“몰라요. 절망적으로 못생긴 이 강아지한테 왠지 마음이 더 끌려요.”
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이런 광고를 냈다.
“절망적으로 못생긴 강아지 아홉 마리를 나누어 드립니다.”
그러자 전화가 쇄도했다.
“저에게 절망적으로 못생긴 강아지 보내 주세요.”
누구나 연약함을 보면 보듬고 싶은 마음이 드는 모양이었다. 결국 로리
가족은 강아지 아홉 마리를 모두 나누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의 무관심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들이 돌보아야 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향한 기도와 보살핌이
필요한 요즘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믿기 위해서는 사랑해아 합니다.'
2013년 가해 12월27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복음묵상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요한 20,2)
---
1.
믿지 못한다는 것.
정말 힘들고 아픈 일이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 건너기 힘든 강이 흐른다.
믿음이란 가까움 안에서만 가능한 언어이듯이,
못 믿는 것 역시 가까움 안에서만 만들어진다.
하여 아플 수밖에 없는 상처를 만들어낸다.
믿지 못한다는 것.
정말 외로운 일이다.
내 안에도 네 안에도 진실은 뒤틀리고 만다.
실타래는 꼬여만 간다.
유치한 외로움만 고개를 든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 부수기 힘든 벽이 가로막는다.
무엇이 믿지 못하게 만드는가?
그것은 아직 사랑을 모르는 것이다.
누구나 실수는 한다.
누구나 거짓을 살 수 있다.
모자람이 없어 만들어지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사랑하기에, 사랑해야 하기에 바보 소리를 마다 않고
어느 한 쪽이 먼저 믿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기다리는 거다.
너 때문이라는 말은 하지 말자.
내 안에 모든 것이 있다.
우리가 믿고자 한다는 것은
우리가 믿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2013.12.27)
---
2.
함께 했음이 믿음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믿고자 하는 마음에 허락되는 것도 아니다.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렇다. 사랑이어야 한다.
그저 이기심에서 나온 눈먼 사랑이 아니라,
옳기 때문에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그런 사랑이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2012.12.27)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많이 사랑할수록 더 많이 보입니다.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3년 가해 12월27일 금요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요한 20장 2-8절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많이 사랑할수록 더 많이 보입니다.>
누군가가 너무 보고 싶어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본 적이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요즘 ‘마이카 시대’이니만큼 누군가를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 엑셀레이터를 최대한 밟아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이 깊어 가면 갈수록 생기는 특별한 현상 하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와 함께 있고 싶어 합니다. 한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 합니다.
좋은 것을 보면 그가 생각납니다. 맛난 것을 먹으면 어김없이 그가
떠오릅니다. 시공을 초월해서 매사가 그와 연결됩니다. 결국 그와
내가 영원히 하나 되고 싶어 합니다.
오늘 축일은 맞는 요한 사도 복음사가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그랬습니다. 요한은 얼마나 스승님을 사랑했던지 언제나 스승님을
독차지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깊었던 만큼 요한은
어디 가나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자리를 잡으려고 기를
썼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를 기억해보십시오. 그는 마치 예수님의
연인이라도 되는 듯이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어 앉아있었습니다.
이런 요한이었기에 복음서 안에 자신을 지칭할 때도 ‘요한’이라고
쓰지 않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후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 사건’을
전했을 때 요한의 모습을 보십시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속력으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달려갑니다. 요한이
얼마나 빨리 달렸던지 베드로 사도는 한참 후에야 빈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실 때,
십자가 밑에 서 있던 유일한 제자가 바로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드립니다.
그날 이후 요한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으며, 어머니 모시듯
지극정성으로 마리아를 봉양했습니다.
이렇게 요한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했습니다.
사도들 가운데서도 가장 열렬히 예수님을 존경했고 추종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성경구절들이 타당성을 입증합니다.
‘많이 사랑할수록 많이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극진히 그리고 꾸준히, 지속적으로
사랑했던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사랑했던 만큼 예수님의
신비, 예수님의 실체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스승으로 모셨던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분이심을 믿게 됩니다.
요한은 다른 누가 아닌 바로 자신을 구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으며, 바로 자신을 위해 수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음을,
그리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머리와 심장이 함께 있는 이유
2013년 가해 12월27일 성 요한 사도 축일
<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복음 : 요한 20,2-8
<머리와 심장이 함께 있는 이유>
‘단숨에 독자의 심장에까지 도달하는 작가’라는 평을 받은 로버트
제임스 월러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실화에 바탕을 둔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메디슨 카운티의 밤의 장막이 내렸다. 이 날은 1987년 그녀의
예순일곱 번째 생일이었다. 그녀는 추억했다. 추억하고 또 추억했다.
그리고 소설은 프란체스카의 회상으로 이어집니다.
1965년 미국의 어느 작은 마을. 교사 출신인 프란체스카는 농부의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로 무료하고 권태로운 전업주부의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런 어느 날 남편과 두 아이가 박람회에 참가하기
위해 4일간 여행을 떠나고 프란체스카는 홀로 집에 남겨집니다.
그때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기자 로버트가 메디슨 카운티 다리를
촬영하기 위해 마을을 찾아옵니다. 프란체스카와 로버트는 우연히
만나고, 짧은 기간이지만 애틋한 사랑을 나눕니다.
곧 가족들이 돌아올 시간이 다가오고... 그들은 이별해야 했습니다.
헤어져야 하는 시간, 로버트는 프란체스카에게 말합니다.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단 한 번만
오는 거요.”
로버트는 남은 인생을 함께 살자고 하지만 프란체스카는 대답합니다.
“당신은 낡은 배낭이고, 해리라는 이름의 트럭이고, 아시아까지
날아가는 제트 여객기예요. 나를 데리고서도 당신이 그렇게 살 수
있다고 확신할 수가 없어요. 당신이라는 멋진 야생동물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프란체스카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열정을 이성의 차가움으로
진정시켰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이별을 맞아야
했습니다. 그 후 그들은 평생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이 살았습니다.
그렇게 가슴속에 꼭꼭 묻어 두었던 사랑. 프란체스카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자녀들에게 말합니다. 그와의 추억이 있는 매디슨
카운티 다리 주변에 자신의 잔해를 뿌려 달라고....
평생 그녀를 그리워하다가 먼저 죽어 간 로버트. 그가 죽기 전에
프란체스카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나도 결국 사람이오. 아무리 철학적인 이성을 끌어대도 매일
매순간 당신을 원하는 마음까지 막을 수는 없소. 자비심도
없이 시간이, 당신과 함께 보낼 수 없는 시간의 통곡 소리가,
내 머릿속 깊은 곳으로 흘러들고 있소.’
[출처: 내 인생의 화양연화, 28-30]
프란체스카와 로버트와의 짧은 사랑은 단순한 육체적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할 정도의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은 가슴으로 한 사랑입니다. 그러면
프란체스카는 로버트를 따라가야 했을까요? 가족과 아이들까지
버리고 로버트와 떠났다면 이런 아름다운 - 물론 슬프기도
하지만 - 사랑이야기늘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삼류
불륜드라마가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가슴도 뜨거워야하지만
그 가슴의 뜨거움을 제어할 수 있는 차가운 머리도 함께 지녀야
인생이 고장 나지 않습니다.
오늘 사도 요한 축일을 지내는데, 사도요한은 열정과 이성이
조화를 이룬 인물로 보입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다는
말을 듣자 단숨에 무덤에 도착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애절한
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보다
먼저 무덤에 들어가 그것을 확인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조급해도 무덤 앞에서 베드로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갑니다. 이렇게 위대함은 열정과 이성이 조화를
이룰 때야만 완성되는 것 같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도 열정만
뛰어나서 대단한 기적을 행했더라도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겸손이 없어서 제 영혼도 구원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요한은 어떤 복음보다도 깊이 있는 복음을 저술하였지만 그 안에
자신의 이름은 쏙 빼고 다른 사도들을 돋보이게 하면서 또한
겸손이 자신을 제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가슴과
머리가 함께하는 균형 잡힌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어제는 어르신 신부님들과 송년모임을 하며 술을 좀 마셨습니다.
방에 들어와서 생각해보니 조금 친해졌다고 해서 제가 어른
신부님들이 약간은 기분 나빠 할 만한 말도 한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친해지는 것도 좋지만 그분들에게 대한 예의는
지켜야 하는 것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이렇게 마음과 이성이 함께
조화를 이루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겸손이 바탕이 되지
않는 어떤 위대함도 위대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머리를 심장 위에 두신 이유는 열정을 제어하게 하기
위해서 였을 것입니다. 성체성사를 세우기 전까지 가르치시기만
했던 이유는 그 뜨거움을 머리로 이해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차가운 심장도 문제지만 절제되지 않는 뜨거움도 문제입니다. 뜨거운
심장과 냉철한 이성, 이것이 함께 몸을 지탱해 주는 것입니다.
- 수원 교구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담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부활증언의 세부 상황
2013년 가해 12월27일 사도 성 요한 축일
부활증언의 세부 상황
무덤이 열려있고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예수님은 안 계신다니,
나이 많은 베드로와 가장 어린 사도요한이 달려갔던 겁니다.
형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린 막내 제자의 태도에서 배울 점이 있습니다.
아무리 급한 일을 당해도 어른 모시는 태도에서 요한의 마음을 느낍니다.
순서 질서 존경 양보의 마음이 늘 몸에 배어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증언의 세부 상황을 드라마틱하게 서술한 사도 요한님께 감사합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요한 20,3~4)”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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