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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1월3일 (백) 주님 공현 전 금요일
[수원]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 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1요한 2, 29 - 3, 6
† 복음 : 요한 1, 29 - 34
★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큰 사랑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불리게
되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께서 나타나시면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자신을 순결하게 하려고 애쓸 것이다(제1독서).
★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다가오시는 것을 바라보며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게 된다. 그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복음).
◈ 오늘의 묵상
‘희망’이라는 두 글자는 참으로 큰 뜻을 담은 낱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움켜쥔 그 무엇보다 더 크고 위대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이만이 희망이라는 말을 뜻있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희망은 현재의 욕망을 키워 미래를 소유하고자 하는 바람이
아닙니다. 현재 이루지 못한 세속적 염원을 투사시킨 장밋빛 약속에
기웃거리는 것은, 그저 자신의 마음을 허황된 바람으로 채우고
소진시키며, 마침내 진정한 자기 자신을 잃게 합니다. 반골 기질이
넘쳤던 20세기의 뛰어난 사상가 이반 일리치는 이러한 위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습니다. “미래는 삶을 잡아먹는 우상입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오직 희망만이 있을 뿐입니다.”
진정한 희망이 무엇인지 분별하고자 중세의 그리스도교 철학은
희망을 거스르는 두 가지 죄를 지적하곤 하였습니다. 하나는 슬픔에
지쳐 무기력하게 주저앉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의 가치가
전부인 것처럼 여기며 하느님 나라에 관심을 갖지 앉는 타산적이고
오만한 자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무엇보다도 진정한 희망을 지닌 이들입니다.
제1독서에서 말하는, ‘그분을 있는 그대로’ 보는 순결한 마음은
희망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지닌 신앙인은 이 세상의
가치로만 삶을 가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고 걸어가신 모범에서
자신의 인생길을 새로이 발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하느님의 어린양|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1월3일 주님공현 전 금요일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1,29-34)
하느님의 어린 양
성경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주님, 그리스도, 메시아,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어린양 등등 다양하게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이름이 담고 있는 의미가 저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어느
이름도 그 모든 의미를 다 포함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1,2).하며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질 속죄물,
희생양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사야 예언서의 ‘주님의 종’을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종은 하느님의 마음에 들어서 뽑아 세운 종이며 하느님의 영을
받고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줄 종이며…공정을 세우도록
선택된 사람이며 ….민족들의 빛이 될 자입니다(이사42장). 그러나
그는 고난을 받을 주님의 종입니다. 학대 받고 천대받았지만 입 한
번 열지도 않고 참으며 온갖 굴욕을 받을 종입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을 당할 주님의 종입니다
(이사53장).
이렇게 ‘하느님의 어린 양’은 고통을 받다가 죽임을 당하는 억울한
모습과, 세상에 새 활력을 일으킬 하느님의 종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은
신앙이 없는 자들에게는 하나의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종은 뭇 사람들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지고 세상의 악의 세력을 꺾고
승리자로 오신 것입니다.
묵시록7장17은 이렇게 표현 하고 있습니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어린 양과 전투를 벌이지만, 어린양이 그들을 무찌르고
승리하실 것이다. 그분은 주님들의 주님이시며 임금들의 임금이시다.
부르심을 받고 선택된 충실한 이들도 그분과 함께 승리할 것이다”
(묵시17,14).
따라서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증언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크나 큰 희망과 기쁨이 될 것이며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신경을 건드리는 빌미가 될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1,18)고 했듯이 어린양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진홍같이 붉은 나의 죄가 말끔히 씻어지고
양털같이 되리니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가 미사 때 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 받은 이는 복되도다!” 하고 선언하는 것은
곧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었음을 확인하는
것이요, 어린양의 희생으로 구원을 이루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할 때 좀 더 진중하고 감사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우리 이웃에게 어린양이 되어줄 수 있기를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새해의 시작에 선 우리는
요즘 청소년들의 장래 희망으로 연예인이 아주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연예인들만 나타났다
하면 그곳은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하지요. 이러한 상황을
생각하면서, 어느 성당의 입구에 아주 유명한 연예인 사진을
대문짝하게 걸어 놓았습니다. 청소년들이 이 사진을 보고서
‘이 연예인이 이곳 성당을 다니는 거야? 그러면 나도 나가봐야지.’
라는 생각을 하고서 성당에 나오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지요.
그렇다면 이 성당의 입구에 크게 걸린 사진의 주인공인 연예인은
이 사실에 대해 자기를 홍보해줬다면서 좋아할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의도가 아닌 전혀 다른 의도로 자신의
사진이 붙어 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연예인의 사진을 함부로 도용하는 것, 법적으로도 큰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에게도 함부로
도용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주님을 잘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생각과 말이
주님의 뜻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도와 묵상을
통한 주님과 대화도 잘 하지 않으면서, 주님의 뜻을 함부로
판단하고 불평불만을 던질 때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렇게 주님을 잘 알지도 못하고, 주님과 대화를 나누지도
않으면서 주님의 뜻인 것처럼 말하고 함부로 판단하고 있다면
과연 주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고 기뻐하실까요? 앞서 함부로
연예인 사진을 도용하면 법적인 처벌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주님을 알지도 또 주님의 뜻대로 살지도 않으면서도 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고 있다면 커다란 죄가 됩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제2계명에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고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죄를
무의식중에 계속해서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더욱 더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을
끊임없이 읽음으로써 그리고 멈추지 않는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
주님을 더욱 더 많이 알아 나가야 하고 이로써 주님과 정말로
가까운 친밀의 관계에 놓여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십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낮추고 대신 주님을 높이는 말씀을 계속하시지요. 솔직히
나를 낮추고 다른 이를 높인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이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정말로
주님은 높아지셔야 할 분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세례자 요한과는 달리 주님은 낮아지셔야 할 분으로,
대신 나는 계속해서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새해의 시작에 선 우리는 주님을 더욱 더 잘 알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함부로 주님의 이름과 뜻을 남발하는
것이 아닌, 정말로 주님을 알아서 주님의 이름과 뜻을 세상에 높이
올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행복은 뭘까? 우리와 함께 하는 것들. 숨 쉬는 공기, 나무, 하늘,
가족, 친구. 이에 대한 고마움은 스쳐 지나가기가 쉽다. 행복은
우리와 함께하는 것들의 가치를 아는 것이다(신현림).
어느 가게에서 본 문구. 연예인 특히 현아를 좋아하나
봅니다. ㅋㅋ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
어느 책에서 본 ‘입의 십계명’입니다.
1. 희망을 주는 말을 하라.
2. 용기를 주는 말을 하라.
3. 사랑의 말을 하라.
4. 칭찬의 말을 하라.
5. 좋은 말을 하라.
6. 진실 된 말을 하라.
7. 꿈을 심는 말을 하라.
8. 부드러운 말을 하라.
9. 화해의 말을 하라.
10. 향기로운 말을 하라.
어떻습니까? 정말로 이러한 말들을 하고 있었는지요? 말은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가장 쉬운 도구이지요. 그러나 그만큼 실수를
하기 쉽고, 다른 이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기도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위의 ‘입의 십계명’을 잘 지켜 나가야 하는 이유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말 10가지’도 있다고 하네요.
1. ‘잘 해봐라’ 는 비꼬는 말
2. ‘난 모르겠다’ 는 책임 없는 말
3. ‘그건 안 된다’ 는 소극적인 말
4. ‘네가 뭘 아느냐’ 는 무시하는 말
5. ‘바빠서 못한다’ 는 핑계의 말
6. ‘잘 되어가고 있는데 왜 바꾸느냐’ 는 안일한 말
7. ‘이 정도면 괜찮다’ 는 타협의 말
8. ‘다음에 하자’ 는 미루는 말
9. ‘해보나마나 똑같다’ 는 포기하는 말
10. ‘이젠 그만 두자’ 는 의지를 꺾는 말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말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잘 아시겠죠? 올
새해에는 꼭 해야 할 말만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
2014년 가해 1월3일 주님 공현 전 금요일 복음묵상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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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에게 있어서, 티없이 깨끗한 어린양은
하느님께 바쳐야 할 제물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말 그대로, 하느님께서 바치는 제물이라는 뜻이다.
당신께 드려져야 할 누군가로부터의 제물이 아니라
당신께서 누군가를 위해서 스스로 바치시는 제물이다.
그 누군가는 죄 속에 있는 세상이며, 그 제물로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선택하셨다. 단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유로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을 내어주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 그저 흥얼거리면서 노래할 말조각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런 사랑이 담겨진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셨다는 뜻이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아름다운 뒷모습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월3일 주님 공현 전 금요일
요한 1장 29-34절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아름다운 뒷모습>
겸손한 세례자 요한의 생애를 묵상하며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내가 식당을 먼저 개업했습니다. 좋은 장소도 찾았고, 손님들을
많이 끌기 위해 식당 홍보도 제대로 했습니다. 손님들의 구미에
맞는 특별한 메뉴도 계발했습니다. 백방의 노력을 다 한 결과
유명한 식당이 되었습니다. 구름처럼 손님들이 몰려왔고, 점심식사
시간에는 손님들에게 번호표를 나눠주고 대기시켜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식당 바로 옆에 누군가가 식당을 개업했습니다.
그 식당 주인은 얄밉게도 우리 식당 메뉴와 똑같은 음식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식당 한 모퉁이에 ‘원조’라는 간판을
달았습니다.
우리 식당으로만 향하던 손님들의 발길에 점점 저쪽 식당으로
쏠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쪽에서는 특별 이벤트다, 경품이다,
하며 손님들의 눈길을 끌기 시작하면서 결국 우리 식당은 파리만
날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먼저 시작한 식당 주인의 심기는 엄청 불편할
것입니다. 그래서 늦게 시작한 식당 사장을 찾아가서 왜 하필 여기
와서 이러느냐, 왜 남의 인생에 고춧가루를 뿌리느냐며 따질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비슷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구세사
전면에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세례자 요한은 정말 잘 나갔습니다.
그는 수많은 군중과 추종자들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가 설교를
시작하면 백성들은 숨죽여가며 그의 말을 경청했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환호성을 터트렸습니다.
저 같았으면 어깨를 으쓱하며 착각에 빠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나를 떠받들어주고 나를 극진히 대접합니다. 인간인지라 우쭐하는
마음에 그 상태가 계속 지속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왜 들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나보다 더 탁월한, 나보다 더 잘나가는 누군가가
나타났다면,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리로 쏠린다면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을 것입니다. 빈정이 많이 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달랐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한 사명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절대로 메시아가 아니며, 단지 자기 뒤에 오실 분이 어떤 분인지를
백성들에게 알리는 이정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쪽을 향해 다가오십니다. 그때
세례자 요한은 수많은 군중들에 둘러싸여 감동적인 회개의
설교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설교의 핵심은 당연히 임박한
메시아의 도래, 즉 예수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저 분이시다고 외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주인공이신 예수님, 세상을 구원하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보다 확연히 드러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정말 눈물겹습니다. 그분을 위해 자신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하나의 불쏘시개가 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더 이상 나 자신의 영예나 체면, 백성들의
관심과 박수갈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아름다운
한 송이 꽃으로 활짝 피어나도록 한 줌 재로 산화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정녕 감동적입니다.
요즘 또 다시 교회 인사이동 시즌입니다. 다른 임지로 떠나가시면서
걱정이 많은 분들도 계시겠지요. 내가 떠나가면 여기 이곳은 어떻게
될까? 그간 공들였던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내가
좀 더 남아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가 떠나가야 더 잘 됩니다. 내가 떠나가면
내 뒤에 오실 그분께서 더 큰 사랑으로, 더 활기찬 모습으로 아름답게
모든 것을 이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큰 행복, 큰 충족감을 안고
무대 뒤로 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2014년 가해 1월3일 주님 공현 전 금요일
<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복음 : 요한 1,29-34
<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
‘연탄길 2’에 ‘아버지의 훈장’으로 소개된 내용입니다.
민호라는 아이는 엄마의 울을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술을 드시고
들어온 아빠 때문에 엄마는 자주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엄마를
울리는 아빠를 민호는 미워했습니다. 하지만 민호가 장남이기
때문에 민호는 아버지의 유일한 위안이었습니다. 민호 아빠는
민호를 무릎 위에 앉혀놓고 6.25 때 이야기를 자주 해 주시곤
했습니다. 민호는 자신이 아빠를 진정시켜 주어야 엄마가 속 썩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아빠의 이야기를 인내심 있게 잘 들어
주었습니다.
“아빠가 전쟁에서 하마터면 죽을 뻔 했거든...”
민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합니다.
하지만 집에 있는 어머니가 너무 불쌍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 어머니를 보기 위해 내려가면 그때마다 아버지가 안아주었는데,
민호는 아버지에게 풍기는 지독한 술 냄새가 너무 싫었습니다.
민호가 서울에 돌아가는 날이면 아빠는 같이 서울에 가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토하듯 아픔을 뱉어 내는 아빠의 얼굴은 슬퍼보였습니다.
하지만, 술에 취해 발음까지 이상한 아빠와 같이 타면 너무 창피
했습니다. 기차 안에서 아빠는 안주도 없는 술을 마시며 민호에게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습니다.
“민호야, 아빠가 매일 술만 마셔서 너도 속상하지? 어른이 되면 민호
너도 알게 될 거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속상한 일이 생기거든.
아빠는 속상해서 술을 마시는 거야. 아빠는 말이야, 우리 민호가
어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아빠 얼굴은 슬퍼 보였습니다. 하지만 민호는 아빠의 말소리를
외면하고 빠르게 지나가는 차창 밖 풍경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민호는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술 때문에 끝내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슬픈 엄마를 위로하기
위해 주말이면 내려갔습니다.
민호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사대를 졸업하고 선생님이 됩니다.
선생님이 된 민호는 학생들과 전쟁영화를 보았습니다. 월남전을
다룬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민호는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의 모습은 아버지의 모습과 닮아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조국을 위해 용감히 싸웠습니다. 많은 적들을
죽인 공로로 국가로부터 훈장까지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그는 정신분열을 일으켰습니다. 적을 죽이지 않았다면
자신이 죽었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 민호는 영화를 보고 나서, 아버지를 고통스럽게
한 게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왜 그렇게 술을
마셔야 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총
끝에서 고통스럽게 죽어 간 얼굴들을 잊기 위해 오랜 세월 술을
마셔야 했던 것입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해가 되지 않지만 때가 되면 이해가
되는 것도 있습니다. 부모가 되어 보아야 부모 마음을 알게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고 두
번씩이나 말합니다. 우리와 똑같은 처지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세례자 요한은 알아보는데 우리는 알아보지 못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세례자 요한보다 그분을 더 알려고
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알려고 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그분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지 않으셨겠습니까? 지금 알지 못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도 알지 못하면 더 이상은 핑계가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당신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간호견 그레델이란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평생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하는 주인의 반려견이자 간호견으로 주인을 섬겨온
그레델이 나이가 다 되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눈 뜰 힘도
없이 누워있는 그레델이 무언가 주인에게 말하려 하는 것
같았습니다. 주인도 도저히 그 끙끙거리는 소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결국 이를 해석하기 위해 동물의 말을 통역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녀를 부릅니다. 그녀는 반려견이
죽어가면서도 주인을 걱정하며 지켜주려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제는 시력이 보이지 않는 그레델은 후각으로 낯선 냄새가 나는
사람이 있으면 주인을 지키기 위해 신음소리라도 냈던 것입니다.
이는 누가 보면 웃을 일이지만 동물의 말을 통역해주는 사람까지
동원하지 않았다면 그레델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노력하는 만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누워있는 걸인이 “목마르다!”라고 신음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이 바로 예수님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그분에 대해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외면하고 싶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요한은 “나도 그분을
알지 못하였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이 말이
‘처음에는 나도 너와 똑 같이 그분을 알지 못했지만 나는 지금
그분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너는 얼마나 그분을 알려고
노력하고 있니?’라고 들립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알고 싶어
하는 이에게 당신 자신을 더 드러내십니다. 그분을 더 알아야
그분을 더 증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담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상대를 위해 봉헌하는 겸허한 자세
2014년 가해 1월3일 주님 공현전 금요일
상대를 위해 봉헌하는 겸허한 자세
사람을 볼 줄 아는 눈, 관상도 아니고 사주도 아니며 첫 인상도
아닌 것, 사람의 진가를 인정하는 사랑과 존경, 인정하고 믿는
마음 말입니다. 자신의 전생을 바쳐가며 상대를 위해 봉헌하는
겸허한 자세 말입니다.
그런 인간관계가 세상엔 필요한데 실은 너무 드물다는 생각입니다.
부부관계도 서로가 요한과 같은 마음으로 상대를 그리 보면
천당이지요. 예수님도 요한을 사람들 중에 제일 훌륭하다고
극찬하시지 않았습니까.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서울] 주님 공현전 금요일
2014년 가해 1월3일
14년째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기부를 하는 분이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는 분입니다. ‘노송동의 기부천사’입니다. 매년
연말이면 주민센터 앞의 전화기, 화단, 우체통 근처에 기부금을 담은
상자를 놓고 가시는 분입니다. 나쁜 일을 하면서 자신을 감추려하는
것은 많이 보았지만 좋은 일을 하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만큼 자신의 능력과 업적이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는 세상입니다. 14년 동안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기부를
하시는 분에게 존경과 사랑을 드립니다.
세례자 요한은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삶으로서 모범을 보였습니다. 사람들도 세례자 요한을 존경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구세주처럼 따라다녔습니다. 예언자로
생각했습니다. 본인만 마음을 먹었으면 충분히 하나의 세력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와 맞서는 공동체를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평생 존경을 받으면서 편안하게 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모든 명예, 권력, 재물을 포기하였습니다.
자신은 새로이 오시는 분을 위해서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새로이 오시는 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힘은 바로 겸손에서 시작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의로운 사람이었던 요셉도 이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했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였습니다. 성모님께서도 자신에게 다가온 엄청난 일을 받아들이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신앙의 길, 구원의
길은 언제나 그 시작이 겸손입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추기경님께 인사를 다녀왔습니다. 제가 운전을 해서
대주교님과 보좌주교님을 모시고 갔습니다. 먼저 와서 기다리던 많은
신부님들이 제 차 앞에서 인사를 하였습니다. 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교구장님과 주교님들을 모시고 갔기 때문입니다. 저 때문이라고
착각하고, 제 자신을 드러내려 했다면 아주 우스운 모습이 되었을
것입니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기억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나비도 땅위를 기어 다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원주민들은 지금의 사람들을 ‘돌연변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 자신만을 아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거짓을 말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이웃을 죽이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감출 것이 너무 많아서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머물다가는
육체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쓰면서도 영원히 살아가는 영혼에게는
너무 무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원래의 모습대로 살아가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기쁨과 희망, 위로와 평화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월3일 주님 공현 전 금요일
1요한2,29-3,6 요한1,29-34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 기쁨과 희망, 위로와 평화 -
예수님 성탄 이후로 축일 미사 때마다 부르는 화답송 후렴이 참
좋습니다. 20년 넘게 부르는 노래이지만 부를 때 마다 늘
새롭습니다. 우리에게 무한한 기쁨과 희망, 위로와 평화를 줍니다.
“땅 끝마다 우리 주의 구원을 모두가 우러러 보았도다.”
(성탄 대축일 낮 미사)
“주님의 집에 사는 자 얼마나 행복되리.”(성가정 축일)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천주의 모친 마리아 대축일)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우리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기쁨과 희망, 위로와 평화입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한 화두와 같은 열쇠 말은 기쁨과
희망, 위로와 평화입니다. 너나할 것 없이 기쁨과 희망, 위로와
평화를 목말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문득 떠오른 얼마 전 선물 받은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이란 책 제목과 ‘배미향의 저녁 스케치’를
진행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DJ’라는 배 미향에 대한 인터뷰
기사였습니다.
-흔히 방송은 치열한 경쟁이고 전쟁이라고 하잖아요. 꼭대기에
오르려면 어마어마한 노력과 치열한 작전이 있어야 한다고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죠. 실제로도 그래요.
근데 저는 솔직히 얘기하면 저는 정말 아니 예요.
저는 전쟁 치르듯 방송하지 않아요. 그냥 일상이에요.
음악도 일상이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도 아주 편안하게 해요.
그렇게 하는데 제 프로그램이 계속 1위를 하는 거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죠. ‘아, 위안이나 편안함을 원하는 사람이 많은 게
맞구나.’”
‘그냥 일상이에요.’ 라는 말이 참 자연스럽고 좋습니다. 문득 위로와
평화를 찾아 무수히 수도원을 찾는 지친 영혼들이 떠올랐습니다.
우리의 삶이 꽃향기처럼 저절로 퍼져나가는 기쁨과 희망, 위로와
평화의 일상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바로 이게 복음이요 매일미사 은총입니다.
꿈이, 희망이 있어야 삽니다. 꿈을, 희망을 잃으면 살아있어도
실상 죽은 삶입니다. 사람들이 날로 거칠어지고 사나워지는 것은
꿈을, 희망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꿈꿀 때 기쁨과 희망이요 위로와
평화입니다. 하느님만이 궁극의 꿈이자 희망입니다.
일상의 보이는 것 넘어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꿈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오늘 1독서의 사도 요한과 복음의 세례자요한이 이런 사람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하느님 친히 선물하시는 기쁨과 희망, 위로와 평화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큰 사랑을 받는 하느님의 자녀 됨을 절절히 체험할 때
샘솟는 기쁨과 희망, 위로와 평화입니다.
그분께 대한 간절한 사랑이 그분 사랑을 닮아 순결한 삶을 살게
합니다. 하여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 그분처럼 되어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되리라는 희망이 참 희망입니다.
이 희망은 영혼의 닻, 영혼의 등대와 같아 어둡고 험한 세상에서도
언제나 기쁨과 희망, 위로와 평화의 사람이 되어 살게 합니다.
바로 성인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사랑의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희망의 표지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을 통해 전달되는 기쁨에
가득한 분위기입니다.
희망의 표지들 중 표지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의 현현인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희망의 원천입니다.
사랑의 눈이 활짝 열려 주님을 뵌 요한 세례자의 감격의 기쁨
가득한 고백입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유난히 주목되는 ‘보았다.’라는 단어입니다.
우리 모두 활짝 열린 믿음의 눈, 사랑의 눈, 희망의 눈으로 주님을
보라 초대하는 요한 세례자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 희망의, 하느님 사랑의 표지들로 가득한
세상이요 이런 체험이 그대로 하느님 체험입니다.
저절로 샘솟는 하느님 찬양과 감사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 사랑을 체험케
하시고 우리 모두에게 한량없는 기쁨과 희망, 위로와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매일 미사 은총이 날마다 새 하늘, 새 땅을 살게
합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수원] 2014년 가해 1월3일 금요일 강론
찬미예수님 알렐루야 ~~~
오늘도 미사에 나오시면서 갖고 오셨어요? 뭘 갖고 오라고
그랬죠? 지향.미사 때 마다 지향을 갖고 오는 것을 예수님께서
무척 좋아하신다고 그러셨습니다. 그냥 습관처럼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미사 중에 우리 가정에 누가 냉담하고 있는데, 우리
옆집에 누가 냉담하고 있는데. 누가 하느님을 못 받아들이고
미신을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을 예수님께 봉헌하는 식으로 자꾸
예수님께 와서 달라고 청 한다면 예수님께서 대단히 기뻐하신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미사에 오실 때 마다 그냥 오지 마시고 오늘은 예수님께 뭘 청할까?
아이가 성탄 날 엄마 아빠가 무슨 선물을 주실까? 이런 기대감으로
성탄을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도 미사 때 마다 그런 기대감을 갖고
미사에 참여 할 수 있도록 하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미사 중에 뭘 청할지 생각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조금 있다가 물어 볼게요.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뭔가, 내가 바라는
것이 뭔가, 생각을 다하셨습니까? 자꾸 하다보면 습관이 돼야 됩니다.
그러다보면 예수님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겁니다.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와함께 살아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뭘 하나 했으면 계속 하는 것들, 그 분과 약속한 것이 있으면
내가 최대한 지킬려고 노력하는 것, 어쨌든 그 분이 깨워 주시면
일어난다는 제 철칙이니까, 요즘은 그분이 계속 일찍 깨워주십니다.
어제도 밤늦게 까지 상임위원회를 했는데 오늘도 새벽 시도 안되어
깨워주셨습니다. 그럼 무조건 요사이 내 기도가 필요하시고 뭔가
쓰실려는구나, 아니면 누가 은총을 받아야 되는데 지금 기도를
안하나보다 내가 대신 해야지 하고 일어나서 기도를 하는 겁니다.
기도를 하다보면 자꾸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이 몇일 이지요. 1월일.. 1,2,3일 계속 새벽에 깨워주시는데 계속
기도 할 때마다 태문 열어주시는 것을 삼일 내내 보여 주셨습니다.
계속 여러분들도 주위에 아기가 필요한 분들 위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니까? 같이 뜻을 합해서 저와 함께 기도를 해 주십사하고
부탁드립니다. 제가 말하는 것을 듣고 흘려버리는 것이 아니라,
저와 일치해서, 같이 지향을 두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두 배 네 배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멘~
‘아멘’ 이라고 말한 사람들은 열 배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복을 받는 훈련을 해야 됩니다. 하느님이 멀리 계신 것이 아닙니다.
임마누엘 하느님이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고, 사도행전에
다 나오잖아요 어디로 가라 하면 예 하고, 꿈에서 보따리를 보여
주시면 거기에서 의미를 찾고, 온 세상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
하느님께서 나에게 전하시는 그 메시지들로 가득 차 있는 겁니다.
그 책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책이 절판 되가지고 안 나와서 참
안타깝습니다. 제목이 뭐더라 음 “그분의 손길”입니다. 그 책이
내가 감명 깊게 읽었던 책입니다. 절판 되서 안 나옵니다. 바오로
출판사에 몇 번 얘기해도 판권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분께
안테나만 세우고 있으면 그분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든지 대화를 나누는데, 우리가 그걸 알지를 못합니다.
그분이 계속해서 말씀을 주시는데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말씀하십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예수님에 대해서 첫 번째로 말씀하시는 것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성경말씀이 일관 됩니다. 제 강론을 열심히 들은 사람은 뭘
얘기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성탄 때도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구세주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를 없애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요셉에게도 나타나서 죄를 없애실 분이시다 라고
말씀하셨고, 구세주의 어머니 마리아도 원죄에 물들지 않게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를 없애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일관되게 계속 성경에서는 그렇게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제대로 잘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
인류에게 원하시는 게 무엇이고 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는가?
그 목표를 명확하게 알 때, 우리도 신앙생활을 정확한 목표를 갖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모르면 맨 날 헛다리짚고, 헛 열심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제대로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또 죄를 지었다면
바로바로 회개하고 성사를 보고 이런 것들이 대단히 중요하다. 하는
것들을 여러분들에게 제가 누차 강조를 합니다.
고해성사를 가능한 한 자주 보는 게 좋다, 조그만 죄라도 떠오르면
와서 또 성사 보고 성사 보고 이런 습관을 들이다 보면, 내 영혼이
점점 맑아지고 내 안에 성령이 거룩하게 머무는 궁전이 될 수 있다.
하는 것을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다' 하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물과
축성 성유로 도유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제 독서에서 그런 말씀을 우리는 듣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 이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지난번 세례식 때 다 말씀을 드렸죠?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말씀 드렸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무엇이든지 그분께 청할
수 있다,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무것이든 다 청할 수 있다.
그러면 그분이 청할 때 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청하는 것보다
더 귀한 것, 더 좋은 것들을 베풀어 주신다.
그런 말씀을 드렸고, 또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 그런
것 말씀 드렸고, 우리가 고해성사나 여러 가지 성사들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성사를 통해서 깨끗해질 수 있는 그런
은혜를 은총을 받았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요한 서에서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자녀 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죄를 저지르는 자는 모두 불법을 자행하는 자입니다. 죄는
곧 불법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복음하고 또 이렇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들은 모두가 다 한결같이 이 죄에 대해서 말하고, 우리가
죄를 지으면 안 된다. 라고 계속 해서 계속 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세주, 하느님은 죄를 없애시는 분, 이것이 머릿속에 딱 박혀야
되는 것입니다. 죄를 없애시기 위해 오셨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구원을 어떻게 하느냐? 죄를 없이 함으로써 구원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조그마한 죄라도, 그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하고 피하고
그렇게 살면서, 죄를 짓는 실수를 범했으면 바로 바로 성사를 통해서
깨끗한 영혼을 보존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영혼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기뻐하면서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새벽에 눈뜨면 이부자리에서 몇 시 인가 보고, 몇시네...새벽에
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은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겁니다. 무조건, 졸리든 어쨌든, 그렇게 찬미 드리고
기도하고, 또 일어나서 씻고 하면서도 노래 부르는 것입니다.
노래하고 찬미하다보면 내안에서 기쁨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내안에 잠재되어 있던, 잠자고 있는 기쁨이 밤새 잠들었던 기쁨이
내가 찬미를 부르는 순간 다시 깨어나는 것입니다. 내 영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의 삶이 더 충만해지고 기쁨 속에
머무르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오늘은 누구를 위해서 기도를 해야 되는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생각해보고, 가장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군가?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이렇게 살다보면 삶이 자꾸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도 정말 충만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 평화, 행복 이것을 이 미사시간에 우리도 그렇게
충만하게 누릴 수 있는 은혜를 간절히 청합시다.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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