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병환자를 고치심 -
☆ 2014년 가해 1월10일 (백) 주님 공현 후 금요일
[청주] 외딴곳으로 물러가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1요한 5, 5 - 13
† 복음 : 루카 5, 12 - 16
★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이는 세상을 이긴다. 진리의
성령께서는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하느님의
아드님에게 있다고 증언한다. 믿는 이는 이 증언을 마음에 간직한다
(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병을 낫게 해 주십사 간청하는 나병 환자를
치유해 주신다. 그리고 소문을 내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증거가
되게 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그분에 관한 이야기는 점점 퍼져 나간다
(복음).
◈ 오늘의 묵상
‘나병’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치유 이야기에서 매우 인상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병으로 여겨져 그 병을 앓고 있는 이는
참으로 비참한 처지의 삶을 이어 가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보여 주신 예수님의 깊은 연민은 세상의 모든 사람에 대한 그분의
자비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병이 끔찍하다는 사실을 제가 처음 느낀 것은 아주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극장에서 본 ‘벤허’라는 영화에서였습니다. 주인공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병에 걸린 장면이 나오는데, 이들이
동굴에 숨어 살고 또 온몸이 종기투성이여서 사람들이 피하는 것을
굉장히 무서워하며 본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한하운이라는 나환자 시인의 시를 배우며 그의 기구한 인생에
먹먹해지기도 했고, 고등학생 때에는 경남 산청에 있는 음성
나환자촌에서 봉사 활동을 한 기억도 있습니다. 소록도에서
나환자들을 보살폈던 오스트리아 수녀님들의 미담을 언론을 통해
보고 듣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유럽에 가서는 학생 때 전기를
읽었던 ‘나환자의 성자’ 다미안 신부님의 출신지인 루뱅이라는
벨기에의 작은 도시를 들러 그분의 묘소를 참배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돌아보니, 저에게 나병 환자란 그저 간접적이고 피상적인
차원에서 애처롭게 여기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깊이 그들의 고통과 처절함에 함께하셨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세상에는 당사자와 주님께서만
아시는 고통이 얼마나 많겠는지요? 그럼에도 지금까지 얼마나
자주 피상적인 이해와 말로 그 아픔의 무게를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고 대하였는지 저 자신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외딴 곳으로 물러가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1월10일 주님 공현 후 금요일
<곧 그의 나병이 가셨다.>
(루카5,12-16)
외딴 곳으로 물러가
추위에도 불구하고 순례오시는 분들을 보며 저의 게으름을
반성합니다. 저는 춥다고 움츠리며 성당에서 조배하는 것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분들은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성당을 찾아오십니다. 오시는 분을
정성껏 맞이하지 못해도 순례객들은 복된 은혜의 시간에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성모님의 품을 그리워했기에 시간이 아까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정작 성당에 있는 저는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기도를
소홀히 합니다.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한 순간들을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너무 큽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지혜로운 말씀과 능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 답은 외딴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시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외딴곳은 ‘광야’로 가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달콤한 자리를 떠나
하느님을 만나러 나가는 작은 탈출입니다. 광야는 바로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분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이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6,6)
기도를 통해 내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되고, 또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요, 영혼의 숨결이라고 합니다. “심장과
심장의 만남”이라고도 합니다. 하느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또한 “기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토마스 키킹신부).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하더라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기도’에서 말하듯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병에 걸린
사람이 엎드려 청한 것처럼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5,12).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것은 ‘모든 것은 주님께 달려
있고, 나는 오로지 주님의 처분만을 바랄 뿐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믿음의 자세가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자세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나의 원의를 이루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데 있는 것이고,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관계를 회복하면 모든 능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느덧
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으로, 내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를 확장하려는 사람으로 바뀌어있음을 감사하게
됩니다. 늘 행복하게 됩니다. 그러니 외딴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기도한 나병환자의 마음으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당시 나병은 불치의 병이고 전염성이 높기
때문에 가족은 물론 사회에서 격리되어 살아야 했고, 사람들은
그들을 철저히 소외시키고 외면을 했습니다. 나병환자는 공공장소에
나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혹 누가 가까이 오면 ‘다가오지 말라’고
소리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나병환자는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했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려있습니다.’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만이 저의 희망입니다.’
하는 순종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분 앞에 피조물로써 경배하는
자세입니다. ‘당신만이 저의 모두입니다.’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올 때 취할 자세는 바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자세입니다. 그 안에 치유의 능력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외면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손을 내밀어 병자에게
대시고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5,13)며 나병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서서
치유의 손길을 보내주셨습니다.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죄로 인한 벌로써
병을 얻었다는 종교적 단죄, 사회적 소외에서 해방시켜 그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앓고 있는 어느 한
부분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 모두를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의 모든 병을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비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의 따뜻한 손길에.....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영국의 극작가로 유명한 조지 버나드 쇼
(George Bernard Shaw)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이 호랑이를 죽일 때는 그것을 스포츠라고 한다. 호랑이가
인간을 죽일 때는 사람들은 그것을 재난이라고 한다. 범죄와
정의와의 차이도 이것과 비슷한 것이다.”
이 말에 많은 공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중심적인 생각이
과연 정의인가 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네요. 실제로 이
인간중심적인 생각으로 무분별한 개발이 이루어져 왔지요. 그러나
그 인간중심적인 생각이 다시 인간에게 더 큰 아픔과 상처로
돌아왔었음을 역사를 통해 우리는 쉽게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사람의 개인의 삶 안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강조하는 사람은 과연 행복할까요? 자기중심적인
삶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사는 사람들은 신체적인 변화를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즉, 엔도르핀과 일산화질소가 증가되어
마치 규칙적인 운동을 해 온 사람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중심적인 행동이나 이기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아드레날린과 스테로이드
호르몬을 많이 배출하게 된다고 합니다.
결국 자기중심적인 삶, 인간중심적인 삶은 참 행복의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길이 아닌 주님 중심적인 삶을 우리가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 중심적인 삶이 무엇일까요?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에 맞춰서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심지어
커다란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서도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더 큰 행복의 길에 들어설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이러한 말을
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정말로 대단한 고백이 아닐까요? 지금처럼 의학이 발달한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병에 걸렸음은 곧 ‘죽음’으로 연결되는
아주 긴박하고 절실한 상황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조건을 말하기 보다는 ‘반드시 해주셔야 하는’ 조건으로 바꿔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고자 하시면’이라고 말하면서 주도권을
주님께 넘깁니다.
이 믿음에 주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면서
그의 병을 깨끗하게 낫게 해주시지요. 인간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주도권을 넘기는 삶이 아닌, 주님께 주도권을 넘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는 겸손, 좋은 쪽으로 이끌어
주시리라는 굳은 믿음, 여기에 주님의 크신 사랑이 추가되어 우리
모두가 진정한 행복의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익숙해진 생활에서 쫓겨나면 절망하지만, 실제는 거기서
새롭고 좋은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동안은 행복이
있다.(톨스토이)
승리하는 사람
어느 날 세계적인 프로골프 선수인 잭 니클라우스가 경쟁자이면서
우정을 함께 나누어온 아놀드 파머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파머의 집에서 이상한 점 하나를 발견한 것입니다. 글쎄 이제까지
많은 우승을 했기에 수많은 트로피가 있어야 할 텐데, 이 집 안에는
딱 하나의 작은 우승컵 하나만 달랑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묻자 아놀드 파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집 안에 가장 값진 트로피 하나만 남겨두기로 했소. 이 트로피는
내가 프로선수가 된 후 처음 출전한 경기에서 따낸 우승컵이오. 힘들
때마다 트로피와 함께 받은 이 상패의 글귀를 보면서 마음을 다스리곤
한다오.”
이 상패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패배했다고 생각하면 당신은 패배한 것이다. 만약
당신이 패배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당신은 패배한 것이 아니다.
인생은 강한 사람이나 빠른 사람에게 항상 승리를 안겨주지 않는다.
우승자는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하지 못할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주님께서는 우리 편이 되셔서 항상 우리의 뜻과 같이 손을 맞춰
주십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진정으로 승리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가장 공을 들여야 할 건강은 마음입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가장 공을 들여야 할 건강은 마음입니다.'
2014년 가해 1월10일 금요일 복음묵상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루카5,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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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환자가 예수님께 치유를 청한다. 확신을 갖고 청한다.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치유를 받는다.
‘깨끗해지다’ 라는 말을 생각해본다.
함께 ‘치유’라는 말도 생각해본다.
누구나 과거를 가지고 산다. 그 시간들 속에는 내 것이 아니었으면
하는 것도 있으리라. 닦고 닦아도 지울 수 없는 시간들 그리고
상처들. 그런 시간들을 가지고 우리는 살고 있다.
육체의 치유라는 의미는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암을 치유 받았다고
한들, 그 몸은 다시 늙어갈 것이고 병들어갈 것이다.
마음이 치유되어야 한다. 마음이 깨끗해져야 한다.
그것이 참된 치유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암이 치유된 것보다 다시 한 번 마음을 닦을 수 있도록 시간을
허락하신 것에 기뻐해야 한다.
그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그분께서 함께 하심을 확신하는 것이
치유임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조건, 어떤 모습으로든,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은 기회를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 기회는 그분께서 나와 함께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드려야 하는 시간이다.
진정한 행복은 삶과 죽음, 그리고 영원을 함께 볼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움직여야 한다.
(2013.01.11)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하느님과 인간의 접촉
2014년 가해 1월10일 주님 공현 후 금요일
<곧 그의 나병이 가셨다.>
루카 5,12-16
하느님과 인간의 접촉
지난여름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가까운 야산으로 산책을
나갔을 때였습니다. 한 나무 밑을 지나오자마자 갑자기 온 몸이
가렵기 시작했습니다. 풀독으로 인한 것인지 어떤 곤충의 분비물로
인한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순식간에 목이며 팔이 사정없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좀 지나면 괜찮겠지, 정 안되면 내일 날 밝으면 피부과에 가야지,
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습니다. 여기저기
얼마나 가렵던지 참으려니 펄쩍펄쩍 뛸 지경이었습니다. 긁으니
점점 더 부위가 넓어지니 나중에는 손끝을 붕대로 감싸면서 그렇게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렇게 밤새 안절부절 못하면서 나환우들이
겪었을 고통에 잠시나마 동참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가장 가난했으며 가장 비참한 삶을 살아갔던 사람들이
바로 나환우들이었습니다. 번번한 치료제도 없던 당시 매일 썩어
문드러져가는 자신의 환부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는 것은 참으로
큰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고통이 있었으니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었습니다.
당시 나병을 하느님의 벌로 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더 이상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성 밖으로 나가 동굴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한 마디로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환우는 ‘온 몸에 나병이 걸린’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환우들 가운데서도 가장 중증 환우였습니다. 그는 이미 오랜
세월 나병에 시달려왔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갔습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치유자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나환우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로구나.
목숨을 한번 걸어보자.’ 하면서 율법규정까지 어겨가면서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치유되고 싶은 심정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얼굴을 땅에 대고 완전
납작하게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정말이지 온 몸과 마음을 다 담아서
절박하게 청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참으로 감동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온 몸이 종기로 뒤덮인
한 가련한 인간과 측은지심으로 가득 찬 하느님이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나환우가 지니고 있었던 수많은 죄와 상처, 종기, 고름은
뜨거운 하느님 사랑의 불꽃에 모두 소멸되어 버렸습니다. 그 대신
태초의 보송보송한 애기 피부로 아름답게 재생되었습니다.
결국 죄인인 우리, 결핍과 상처투성이뿐인 우리 인간이 살길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의 지속적인 접촉입니다.
한 가련한 인간과 구체적으로 접촉하시는 치유자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회심의 길을 걷기 시작한 프란치스코가 하루는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한 나병환자를 만났습니다. 프란치스코 시대 당시도
나병환자들은 가장 밑바닥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에게도 그들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마음 한편에서는 빨리 그를 지나쳐가고 싶은 마음도 일었습니다.
그를 보는 것 자체가 역겨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도 중에
떠오른 하느님의 말씀이 귓전을 울렸습니다.
“프란치스코야, 네가 나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네가 육신 안에서
갈망하고 사랑하던 모든 것을 미워하고 경멸하는 것이 너의 의무이다.
그리고 네가 이것을 시작했을 때 지금 너에게 달콤하고 사랑스럽게
보이던 모든 것이 씁쓸하고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피하던 것들 그 자체가 크나큰 감미로움과 넘치는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다.”
드디어 프란치스코는 말에서 내려왔습니다. 지금까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나병환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강하게 끌어안았습니다. 그 순간 역겨움은 달콤함으로 뒤바뀌었습니다.
그 사건이후로 프란치스코는 아무런 미련 없이 세속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네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삶은 동화 속처럼 언제나
화려하거나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역겨움 투성이입니다. 피하고
싶은 두려움의 대상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회피하지 않고
똑바로 직면할 때, 도망가지 않고 크게 팔을 벌려 끌어안을 때 공포의
대상들이 은총과 축복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주님 공현 후 금요일
2014년 가해 1월10일
‘About time'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의 실수와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동생이 음주 운전으로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시간을 되돌려서 교통사고를 예방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걸 알고서 역시 시간을
되돌려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시간을
아무리 되돌려도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시간을 아무리 되돌려도
오늘 성실하게 살지 못하면 소용이 없었습니다. 영원을 사는 것은
오늘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라고 영화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는 우주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돌, 나무, 구름, 비, 물, 꽃, 나비, 새, 사람과 같이 형태의 변화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 형상을 구성하는 원자들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제 몸을 구성하는 것들도 언젠가는 변화될 것이고, 제 몸은 다시
땅으로 돌아 갈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의 법칙이고, 자연의 섭리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성서는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물리적인
법칙을 넘어서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공간 안에서 시간을
무한정 늘리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 사랑의 길, 자비의
길’을 함께 걷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진주와 과자를 주면 과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진주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앙 안에서 살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택하게 됩니다. 돈, 명예, 권력, 성공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것은
맛있어 보이고, 아름다워 보이고, 화려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을 투자합니다. 시간을 투자하고, 공부를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도 합니다. 세상의 것들을 택하는 사람들에게
‘양보, 인내, 친절, 겸손, 나눔, 봉사’를 택하라고 하면 웃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힘들고, 어렵고, 얻는 것도 별로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은 그런 것들을 택하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택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행복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과정을 미리
보여주십니다. 사람들로부터 죄인취급을 당하고,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는 나병환자를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나병환자는 죄인취급을
당하지 않아도 되고, 고개를 들고 세상을 볼 수 있으며, 가족들과도
함께 지낼 수 있고, 단절된 관계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모든 죄가 사해지고, 하느님
품안에서 참된 행복을 느끼며, 단절된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약하기 때문에 세상의 유혹 앞에 넘어지곤 합니다. 그래서
참된 가치와 진실한 행복을 선택하기 보다는, 순간의 기쁨을 주는 것들을
택하게 됩니다. 잠시의 기쁨과 쾌락을 위해서 양심과 영혼을 속이기도
합니다. 오늘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를
2014년 가해 1월10일 주님 공현 후 금요일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를
박수갈채 받고 대환영 받으며 인기절정으로 오르면 행복해들 합니다.
더 빨리 좀 더 많이 더 앞으로 더 위로 오르면 성공한 줄 압니다.
세상의 이런 일들에 매료되어 시간가는 줄 모르지만 곧 허무해 집니다.
시간이 흐르고 쇄약해지고 병들고 잘못이 들어나면서 허무는 시작됩니다.
미리 세상의 찬양에 휘말리지 않고 제동을 걸며 본연을 지켰어야지요.
주님의 모범을 보면 이럴 때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도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루카 5,15~16)”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2014년 가해 1월10일 주님 공현 후 금요일
<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복음 : 루카 5,12-16
<깨끗하게 하시는 분>
‘연탄길 3’에 소개된 ‘아이의 발자국’이란 사연입니다.
한 할머니가 전동차 안에서 초라한 행색으로 초콜릿을 팔고 있었다.
비에 젖은 할머니 몸에선 퀴퀴한 냄새가 풍겼다.
나무껍질같이 벗겨진 할머니의 손바닥 위에는 얇은 초콜릿 몇 개가
겹겹이 놓여 있었다.
초콜릿을 본 아이가 엄마를 조르며 칭얼대기 시작했다.
"초콜릿~~ 초콜릿~~"
"좀 있다가 엄마가 나가서 사 줄게, 보채지 말고 가만있어..."
아이 엄마는 혼내듯 아이에게 말했다. 아이는 입을 잠시 실룩거리더니
떠나갈 듯 소리를 지르며 울어댔다
"으아~~앙"
"알았어. 알았어, 엄마가 초콜렛 사 줄테니깐 빨리 뚝해, 빨리~~"
아이 엄마는 우는 아이를 우선 달래야겠다는 생각으로 지갑을
꺼냈다. 울음을 그친 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초콜렛 하나만 주세요."
샐쭉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이 엄마가 할머니에게 돈을 내밀었다.
"네네,, 드려야지요..."
할머니는 거듭거듭 머리를 조아리며 아이 엄마에게 초콜릿 한
개를 건네주었다.
할머니가 건네준 초콜릿이 불결하다고 생각했는지 아이 엄마는
시트위에 초콜릿을 몇 번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는 포장을 뜯은
후 초콜릿 하나를 잘라 아이 입에 넣어 주었다. 아이는 달짝지근한
초콜릿을 오물오물 씹으며 해죽해죽 웃었다.
잠시 후, 아이 엄마는 아이를 업으려고 신발을 신고 있던 아이를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출입문이 열리자 아이를 업은
그녀는 서둘러 나가 버렸다.
아이를 올려놓았던 푸른 시트 위에는 빗물에 젖은 아이의 흙
발자국 두개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아이구 이런.... 사람들이 앉을 자린데 옷들 다 버리겠네..."
초콜릿을 팔던 할머니는 시트 위에 나란히 새겨진 아이의 흙
발자국을 맨손으로 깨끗이 털어내고 있었다. 아이 엄마는 할머니의
손이 불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 손으로 전동차
시트 위에 흉하게 묻어 있는 아이의 흙발자국을 아무렇지도 않게
닦아냈다.
저희 어머니는 머리 숯이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배우지도 못하셨고
또 말씀도 걸걸하게 하십니다. 이젠 쭈글쭈글 해진 얼굴에 화장도
잘 안 하시고 밖으로 다니십니다. 조금 꾸미기라도 하시면 좋으련만.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도 많이 야위셨습니다. 전엔 그렇게
커보였는데. 저희를 위해 고생해서 굵어지고 굳은살 박이고 울퉁불퉁
비뚤어진 부모님의 손과 발을 볼 땐 이젠 좀 꾸미고 더 깨끗하고
멋있게 하고 다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분들이 그렇게 볼품없이 되어버린 것은 우리를
볼품있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세수를 시켜주시며 코를 팽 풀라고 하시며
손가락을 코에 대고 기다리시다가 제가 팽 풀면 그것을 손으로 잡아
빼내주시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저 조차도 더러워서 만지기 싫은
저의 코였습니다. 물론 어머니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이, 더러워!”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계속 해 주셨습니다. 더럽다고 하시며 당신
손을 더럽히셨습니다. 누가 더러운 것일까요? 당신 손을 더럽히는 분이
더러운 것일까요, 아니면 상대를 더럽히는 내가 더러운 것일까요? 내가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더러워져야 합니다. 수건으로 더러운
것을 닦을 때 그 수건이 더 깨끗해 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나병의 몸에 손을 댑니다. 나병은 더러움이요 예수님은
깨끗함입니다. 십자가를 지고가시는 예수님의 온 몸에는 이 세상 온갖
더러움들로 빈틈없이 더럽혀졌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 더러움을 지고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깨끗한 손으로
사도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당신이 더럽혀지고 죽는
이유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남을 닦아주는 사람이 깨끗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착각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작년 11월 6일 일반알현 때 교황님께서
얼굴에 극심한 병으로 흉측한 모양이 되어버린 한 남자의 이마에
키스한 후 껴안아 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nDimxrhkCvs]
참으로 깨끗함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만진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다른 이의 더러움을 피하는
것이 아닌 나의 깨끗함으로 닦아주려는 사람이 참 사랑을 가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처음에 나병환자들을 피했지만 나중엔 그들을 품에
안아 주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용기와 깨끗함을 청해야겠습니다.
깨끗하게 하는 이가 깨끗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나병환자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 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청하는 사람은
2014년 가해 1월10일 주님 공현 후 토요일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청하는 사람은(루카 5, 12-16)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엎드려
청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나병은 하느님만이 고치는 병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나병환자 나아만이 이스라엘 임금에게 고쳐달라고
편지를 보냈을 때 임금은 옷을 찢으면서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시는 하느님이란 말인가? 그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하다니!” 라고 말합니다.
또 예수님 시대에 나병환자들은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염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가족들과
분리된 삶을 살아야했고, 마을로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있으면 “나는 부정한 사람입니다.” 하고 소리를
쳐서 사람들이 피하도록 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분리된 삶을 살아야 하는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용기를 내어 예수님 앞까지 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그의 용기와 믿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본당에 교통사고로 20여년을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미사
시간 내내 앉아서 미사를 드리는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그
형제님은 어느 날 치유 미사 시간에 용기를 내어 하느님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저의 강론을 들으면서
“아멘!” 이라고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날 그 형제는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일어서서
미사를 드리고, 성체도 부축을 받으며 걸어 나와서 영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전 주에 그는 성체조배실에서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것을 알고 바닥에 엎드려 몸부림을 치면서
예수님께 자신도 걷고 싶다고 말씀드렸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그 형제의 기도를 마음 깊이 새기셨을 것입니다.
또 어느 날인가 새벽에 제가 성체조배를 하고 나오는데 한 자매가
저에게 쫓아 나와서 자신의 눈이 초점이 맞지 않고, 잘 안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수술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저는 성체조배 시간에 어떤 자매님이 뒤뚱
뒤뚱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보여주셨는데 이 분을 가리키는 것인가
보다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조용히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며 안수를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눈에 손을 대고 “주님 제 손을 도구삼아 이 자매님을 어루만져
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습니다.
며칠 뒤에 자매님이 오셔서 잘 보이고 초점도 잘 맞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축하합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리십시오.
자매님의 믿음에 하느님께서 은총을 내려 주셨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요즘은 주님께서 태문을 열어주시는 것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계십니다. 믿고 의탁하고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청하는 사람은
주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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