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
☆ 2014년 가해 1월13일 (녹)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청주] 하느님 나라 선포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1사무엘 1, 1 - 8
† 복음 : 마르 1, 14 - 20
★ 한나는 엘카나의 아내이다. 엘카나의 다른 아내 프닌나는 한나에
대해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비웃었고, 한나의 마음은 찢어지듯 아팠다
(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시며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다. 그들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실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구약 성경에서 우리는 가슴 찢어지는 아픈 심정으로 하느님께
호소하는 이들을 자주 만납니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마음의 가난이
무엇인지를 그저 비유나 논리적인 사고로서가 아니라 절실한 삶
속에서 보게 됩니다. 오늘과 내일의 독서에서 만나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그 좋은 보기입니다.
사무엘기 상권에서는 시작부터 한나의 한스러운 처지를 생생하게
알려 줍니다. 그 쓰라리고 원통한 마음을 그녀는 억지로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서 해답을 찾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하느님께 달려가 한없이 흐느끼는 가운데 기도하며 자비를 청합니다
(내일 독서 참조). “하느님, 제 권리를 되찾아 주소서. 충실치 못한
백성을 거슬러 제 소송을 이끌어 주소서. 거짓되고 불의한 자에게서
저를 구하소서”(시편 43〔42〕,1). 우리가 자주 듣는 이 애원처럼,
하느님께만 마지막 희망을 둘 수 있는 절박함을 이 여인은 잘 보여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면서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며 ‘사람 낚는
어부’의 덕목이 무엇일지 묵상해 봅니다. 한나처럼 모든 것을 내놓은
채 하느님께 호소해야 할 정도로 처절하고 가난한 이의 마음을 제대로
볼 줄 아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굴곡과
서러움의 마디마디를 가벼이 여기지 않고, 그 상처와 한을 두려움
없이 하느님 앞에서 고스란히 호소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것이,
주님의 제자로서 사람을 대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하느님 나라 선포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1월13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1,14-20)
하느님 나라 선포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지내시면서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준비하셨고 광야 생활을 마친 다음 세상으로 나가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시기는 요한이 잡힌 뒤입니다. 요한이 체포된
다음에 예수님의 활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을 전하는 힘찬
목소리가 위압에 의해 사라져 버린 암울한 시기에 그분이 등장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어둠을 비추는 등불이 희미해지자 그 자리에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나타난 것입니다(손희송).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례를 받으신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하느님의 통치, 하느님의 권위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하느님의 법에 따라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걸어 다니는‘하느님의 나라’이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어떤 상태에
더 가깝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한정된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건설되는 나라입니다. 먼 미래에 올 나라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나라요, 죽은 다음에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현재 우리 안에 현존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후회와는
다릅니다. “회개는 한 번 하는 것이요, 후회는 두고두고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생각을 바꾸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말하자면 도둑이 회개 하였다는 것은
도둑질을 그만 둔 것입니다. 그리고 그만둔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의 삶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삶입니다. 한마디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확실한 선택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머뭇거림 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자기이해 능력과 사고방식의
세계가 아닌 그 이상의 세계로 넘어 간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인생을
이성의 잣대나 사고방식, 또는 지적인 능력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영의 세계로, 즉 복음적인 관점으로 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유광수). 회개는 영적 여정의 첫 출발이며 복음을 알아듣기 위해
취해야 할 기본자세입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자신이며 그분이 선포하신 말씀, 보여주신 활동 모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선포를 사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이 바탕이 되지 않는 믿음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분명
사람을 끄는 강력한 힘, 애지중지하던 것마저 아낌없이 버리게 하는
신비로운 매력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그분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낚였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바뀌었습니다. 그 삶은 ‘회개하라’는 주님의 선포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분명 그들은 가족과 재물을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께 낚인 것이 아니라
먼저 낚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먼저 선택한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께
온전히 낚여있는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얻기 위해
일상 안에서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읽고 묵상은
하지 못해도 취미생활을 하거나 드라마를 보는 일, 운동을 하며, 쇼핑을
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을 갖지 못해 아쉬워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13,44)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버려야
됩니다. 버림으로써 얻게 됩니다. 사랑합니다.
@@@@
“무엇을 얻는 데에는 크게 두 방법이 있습니다.
구해서 얻는 것과 버림으로써 얻는 방법입니다.
구해서 얻는 것은 그 얻음이 아무리 커도 다음에 더 큰 목표가
생기기 때문에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나 버려서 얻는 것은 아무리
작아도 덤으로 얻는 기분이기 때문에 만족과 기쁨이 큽니다.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원하는 사람은
버려서 얻는 방법을 택합니다.”(고도원의 아침편지 중에서)
“금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가득 찬 은을 버려야 하고
다이아몬드를 얻기 위해서는 또 어렵게 얻은 그 금마저 버려야 한다.
버리면 얻는다. 그러나 버리면 얻는다는 것을 안다 해도 버리는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쉬운 일이 아니다. 버리고 나서 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까 봐. 그 미지의 공허가 무서워서 우리는 하찮은 오늘에 집착하기도
한다.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중에서.
@@@ 유경촌 티모테오 주교님 일화
금번 교황님께서 유 신부에게 주교서임을 통보하시자 유 신부는 주교가
될 수없는 3가지 이유를 댔다고 합니다.
1. 저는 나이가 젊습니다. 2. 저는 일을 모릅니다. 3. 저는 덕이 없습니다.
그러자 교황님께서
1. 세월이 흐르면 자연히 나이를 먹는다.
2. 일은 로마에서 알고 있다.
3. 주교 중에 덕 있는 사람 본 적이 있나? 라고 답하셨다고 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
지난 1월 7일에는 인천교구 사제서품식이 있었습니다. 7명의 사제가
인천교구 소속으로 새롭게 탄생했지요. 사실 7명이라는 숫자가 너무
적다고 이야기들을 많이 하십니다. 왜냐하면 어떤 해에는 20명이 넘는
사제를 배출하기도 했었는데, 올해에는 10명도 채 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이번에 사제서품을 받은 반의 숫자가 원래 적은 것이 아닙니다.
제가 성소국장으로 처음으로 부임했을 때, 가장 인원이 많았던 반이
바로 이번 사제서품을 받은 반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 반 역시
20명 넘게 사제서품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었습니다. 더군다나 20명이
넘다보니 능력 있는 사람들도 참 많았습니다. 하지만 2014년 1월 7일,
다 나가고 사제서품을 받은 사람은 겨우 7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능력이 가장 많은 일곱 명이 남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제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에는 능력 많은 학생들은 모두 그만두었습니다.
대신 약간 부족한 듯한 학생들만이 남아 사제가 된 것입니다. 눈을 감고
7명의 사제들을 떠올려 봅니다. 하나 같이 부족한 면이 최소한 한
가지라도 생각날 정도로 완벽하지 않은 사제입니다.
왜 주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능력 많은 완벽한 사제를 뽑지
않고, 이렇게 부족함이 보이는 사제들을 당신의 일꾼으로 뽑았을까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능력이 많으면 그만큼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더
좋을 것 같은데, 오히려 많은 부분에서 부족한 사람을 당신의 일꾼으로
뽑으신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런데 이렇게 부족하기 때문에 당신의
일꾼으로써 더욱 더 완벽하게 일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스스로 부족함을 알고 있는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 간에
싸움을 생각해보세요. 그 싸움의 원인을 잘 보면, 서로가 자기 잘 났다고
또 자기가 맞다는 것을 주장하다보니 생기는 싸움이 대부분입니다. 만약
스스로 잘못했음을 인정하면 절대로 싸움이 날 수 없지요. 이처럼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 뜻을 드러내기보다, 주님의 뜻을
드러내는데 최선을 다하는 사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를 뽑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배우지도 못했고
별 다른 능력도 없는 이들을 당신의 제자로 뽑아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다스리는 도구로 쓰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하는 용기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시몬과 안드레아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아버지를 배에 버려두고 따라 나섭니다. 이는 다른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그들은 생계의 중요한 수단들을 움켜잡고 주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승의 삶에 묶여 있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볼 수 있었기에 부르심을 받았고, 주님의 큰 일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 바로 우리 신앙인들이 걸어야 할
모습이 아닐까요?
선택은 꿈을 향해 내딛는 길 위에서 만나는 표지판이다. 자신의 능력에
맞는 길을 선택하는 지혜로운 사람만이 최종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스샤오옌).
두초디부오닌세냐의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부르심'
주님과 함께 하며 희망을 잃지 맙시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부족함에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그런데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부족함에 오히려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철저하게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사람의 어떤
인생도 부족한 인생, 또 끝장난 인생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며
사는 사람이란 바로 희망을 간직하며 사는 사람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희망을 간직하며 사는 사람은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쓸데없는 로또 종이 한 장에 인생을 걸지 않으며, 금쪽같은 하루하루를
쓸데없는 일을 하면서 보내지도 않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는데 어떻게
그 소중한 시간을 낭비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부터 연중시기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어떤 특별한 신비(성탄, 부활)
를 묵상하는 시기가 아닌,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 기억하며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다시금 주님과 함께
하면서 희망을 잃지 않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신앙은 결단에서 시작됩니다.'
2014년 가해 1월13일 월요일 복음묵상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가1,18)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루가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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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라 하면,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들은 어떻게 이리도 쉽게 즉각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응답할 수 있었던가? 이들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삶이
잔인한 죽음으로 마감할 것을 조금이라도 예상할 수 있었을까?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나타나서 “나를 따르라”는 소리에 모든 것을
버리고, 심지어는 아버지조차 내버려두고 길을 나설 수 있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어떤 마력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셨는지, 아니면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 어떤 또 다른 줄거리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성서는 간단하게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
따라오라 하셨고,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곧바로 응했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전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연이 있었고, 어떤 힘이
그들을 그렇게 하도록 하였나’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즉각적인 응답’이라는 그들이 보여준 모습이다.
여러분은 ‘결심(決心)’과 ‘결단(決斷)’의 차이를 잘 아시리라 본다.
결심이란 말 그대로 마음을 결정하는 것이고,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는 마음이다. 결단이란 결정을 위하여 그 결정을 방해하는
무엇인가를 끊어버린다는 뜻이다.
신앙은 결심 정도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신앙은 결단이다.
복음적 삶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끊고 나아가는 삶이다.
여기서 각자 자신의 삶을 한 번 뒤돌아 볼 일이다. 한 번이라도
복음을 위해서 결단을 내린 적이 있었던가를. 혹시 그렇지 못하다면
결단을 내려야 한다. 우리의 참된 신앙을 위해서.
(2013.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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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삶 안에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갈라놓고자 한다면, 당신은
다음 삶에서 그분과 함께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말할 필요도 없는 명백한 이야기다.” - 교황 베네딕또 16세 –
(“If you choose to separate yourself from God in this life, then
you won’t be with Him in the next. It’s as simple as that.”
– Pope Benedict XVI -)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2014년 가해 1월13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4-20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운전 중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재미난’ 이야기를 듣고 혼자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요즘 많은 어머님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편감’ ‘나의 로망’으로 뜨는 한 인물이 계신답니다.
그분은 바로 수십 년 째 서민들의 일요일 아침을 기쁘게 해주고
계신 ‘전국 노래 자랑’의 사회자 송해 선생님이시라고 하네요.
이유는 다른 남편들은 40대 초반에 벌써 실직 걱정하느라 전전긍긍
하는데, 이분은 80이 넘은 나이에도 아무 걱정 없이 ‘쭉’, 꾸준히
출근하고 계시지, 남들은 일 년에 몇 번 못가는 지방 출장을 매주
어김없이 한번 씩 다녀오시지, 다녀오실 때 마다 지방특산물 들고
들어오시지...
농담 섞인 말이었지만, 가만히 송해 선생님 생각하면서 참으로
대단한 분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84세의 연세에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십니다. 최고령 MC이자 최장수 프로그램 MC 기록을 계속
갱신하고 계십니다.
준비성이 얼마나 투철하신지 대본 한 구절, 한 구절, 사람 한명
한명을 꼼꼼히 챙기신답니다. 지방으로 촬영을 가시면 꼭 그 동네
목욕탕엘 가신다더군요. 함께 목욕을 하면서 그 지방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프로그램 진행에 필요한 정보를 얻으신답니다.
그렇게 나름대로의 준비에 만전을 기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땅에서의 삶을 정말 충만하게 살아가시는
모습이 참으로 부러웠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가장 바람직한
응답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목숨 다하는 날
까지, 하느님께서 마지막으로 부르시는 그 날 까지 최선을 다해,
성심성의껏, 충실히 살아내는 삶,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가장 적절히 대응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제자들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지니신 스승님, 참 진리의 선포자이신
스승님의 부르심 앞에 그간 간직해왔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가족, 생계도구였던 배와 그물, 그간 추구해왔던 가치관, 인생관...
그 결과 더 큰 인생, 더 풍요로운 삶, 더 빛나는 생애를 선물로
얻었습니다.
우리 역시 사도들 못지않게 여러 차례, 여러 측면의 하느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이것 정말
보통 부르심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생명’으로 부르셨습니다.
그것만도 감지덕지한 일인데, 세례성사로 또 부르셨군요. 뿐만 아니라
견진성사에로, 신품성사에로. 뿐만 아닙니다. 아버지로, 어머니로,
교사로, 봉사자로 부르셨습니다. 또 회갑에로, 칠순에로, 80의 나이로,
100세로 부르셨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새롭게 주어진 이 한해는 하느님께서 아직 우리의
가능성을 눈여겨보시고 다시 한 번 부르셨다는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우리에게 매일 주어지는 이 ‘하루’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신다는 표현이 확실합니다. 오늘 이 아침에 우리가 다시 눈뜬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는 거룩한 부르심이
분명합니다.
‘이 나이에 무슨’이란 말은 절대 금물입니다. ‘나는 이제 끝났어’란
말처럼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 무책임한 말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마운 내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면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한 해 되길 바랍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1주간 월요일
2014년 가해 1월13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4-20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의 일곱 가지 습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목적을
분명하게 정하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의 원칙과 목적은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노를 저을 때도 같은 방향으로 저어야 합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노를 저으면 배는 똑바로 갈 수 없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중요한 일보다 소중한 일을 먼저 합니다. 성공하는
것, 돈을 버는 것, 명예를 얻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가족을
돌보는 것, 이웃을 돕는 것,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중요한 일을 먼저 하기 때문에 소중한 것들을 놓치곤
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소중한 것들을 먼저 하셨습니다. 아픈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죄인들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함께 합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나누어서 함께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기회를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그 권한과 능력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혼자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셨지만 제자들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스티븐 코비는 자신이 발견한 성공의 비결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에서 배웠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 밖에도
서로가 승리하는 방법, 시너지 효과를 내는 방법, 처음과 끝을 명확하게
하는 방법,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다스리는 방법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책을 읽고, 마음을 다스리지만 우리는 너무나 쉽게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감정에 휩쓸리곤 합니다. 어제는 할아버지 기일이라서
의정부 어머니 집엘 다녀왔습니다. 식구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고,
연도를 바치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제 뒤에 차 두 대가 있었습니다.
전화를 드려서 차를 빼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한 대는 회사에
출근을 했고, 아내에게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한 분은 주차장 안 쪽에 차를 대셨기 때문에 오래 계실 줄 알고
멀리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차를 빼달라는 부탁을 하고 40분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시간들은 길었고, 짜증이 났습니다. 어머니는
추우니까 들어가시라고 하셔도 저와 함께 차를 빼줄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려 주셨습니다. 이제 곧 80이신 어머니께는 아직도 제가 어린아이
같으신 것 같습니다.
40분을 기다리면서 묵주기도를 했다면, 책을 읽었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 마음은 짜증과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를 50년 넘게 기다려 주고 계시는데 말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부르심이 주는 힘
2014년 가해 1월13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
복음 : 마르 1,14-20
<부르심이 주는 힘>
안 좋은 일이 생겨서 지금은 조금은 조용하지만, 얼마 전까지 참
잘나가던 강사 김미경씨를 잘 아실 것입니다. 김미경씨는 강의
한 번 할 때 약 1천만 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TV에서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자신의 이름을 내 건 토크쇼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본인만 알 것입니다.
항상 4시 30분에 일어나고 매일 책 1권씩 읽고 8시간씩 강의준비를
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살 수 있었을까요? 그분의
딸도 이해를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매일 늦게 일어나고 놀고먹는
대학생이었던 딸이 김미경씨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엄마, 잘 모르겠어서 그러는데... 엄마는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아?”
“어, 누가 시켜서.”
“누가?”
“내 꿈이.”
그런데 요즘은 딸을 통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너무 바쁘게 살아서랍니다. 그래서 이번엔 엄마가 묻습니다.
“집에 좀 들어와라. 얼굴 좀 보자. 왜 이렇게 바쁘게 사니?”
그러면 이번엔 딸이 대답한답니다.
“어, 누가 시켜서...”
젊은 나이에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꿈을 찾은 사람들은 참
행복한 이들인 것 같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것이 아니랍니다.
꿈이 자녀를 키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억지로 일찍 일어나라고 해도
안 되지만, 그 안에 꿈이 들어가면 사람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며칠 전에 20년 만에 군대 동기들을 만났습니다. 각자의 삶 안에서
열심히들 살고 있었습니다. 다들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살고 있었지만
군 생활 할 때의 모습과 달라진 건 별로 없어 보였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기엔 제가 조금 달라진 것처럼 보였나 봅니다.
아마도 그 때는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은 사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들 보기에는 신기한가 봅니다. 그래서 저의 삶에
대해 이것저것 궁금해 하였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저의 규칙적인 삶에 대해 말하자 신기한 듯이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의 삶은 퇴근하면 씻고 밥 먹고, 아니면 밥
먹고 씻고, TV 보다가 잠들어서 다음 날 다시 출근하는 것의
반복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저도 당시의 모습대로 살았다면 그렇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일찍 일어나고 조금 덜
자고 조금 더 일하고 조금 더 불편한 것을 스스로 찾게 됩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의 저의 삶에 만족합니다. 왜냐하면 제 안의
에너지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저를 불러주셨고 저를 뛰게
하십니다. 그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취직 안 돼 집에서 빈둥대는
괴로움이 아마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행복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의 차이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잘 살고 있는 어부들을 부르십니다. 그런데
어부들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더 힘든 삶으로
기꺼이 일어섭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삶보다 더욱 자신들을 힘들게
하실 분이 그 분임을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삶을 바꾸어 줄
‘꿈’을 주실 분이 그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삶을
힘있게 살고 싶은 이들이었고 지금의 삶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전구에 적합한 필라멘트를 찾기 위해 2천 종류나
되는 재료들을 실험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만족스럽지
않자 그의 조수가 이렇게 불평하였습니다.
“우리의 노력이 전부 헛수고가 되었군요. 고생만 하고 얻은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그러자 단단히 확신에 차 있는 에디슨이 대답하였습니다.
“아니지.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노력을 해 왔고 그것으로부터 얻은
것도 적지 않아. 좋은 전구를 만드는데 사용할 수 없는 재료 2천
가지가 어떤 것들인지 알게 되었잖아?”
꿈이 있는 사람은 무한한 에너지를 지닙니다. 꿈은 하나의 ‘부르심’
입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지쳐버리지만, 부르심을 받고 목적지가
명확한 사람은 에디슨과 같이 지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았던
사도들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분들이 ‘어떻게 저런 고통을 견디셨을까?’
하는 정도의 수고와 노력, 피와 땀, 순교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 때
그분들은 우리들이 “어떻게 그렇게 사실 수 있으셨어요?”라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우리도 그분의 부르심에 귀 기울입시다. 그리고 나를 새벽부터 깨울
수 있는 에너지를 주시는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합시다. 나를 움직이는
힘이 솟아 넘치게 될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하늘과의 관계가 맺어진 사람
2014년 가해 1월13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
하늘과의 관계가 맺어진 사람
사람과 사람의 관계문제가 영물이기에 깊고 크고 복잡하다고
생각합니다. 상하관계 동료관계 부부관계 부자모녀지간 등
열거하기도 힘들지요. 그렇다면 인간의 관계론만 해도 심리학
이상의 연구 분야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면 하늘과의 관계도 이에 못지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부르시고 제자들이 응답함으로 하늘과의 관계가 맺어진
것이지요. 신앙으로 초대돼 영세를 받으면 하늘과의 관계가 맺어진
것도 마찬가지고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르코 1,17~18)”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도회] 새로운 시작, 새로운 출발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3년 가해 1월13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
사무 상1,1-8 마르1,14-20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새로운 시작, 새로운 출발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늘 새로운 시작, 새로운 출발입니다.
새벽 성무일도 찬미가 중 한 연이 마음을 새롭게 했습니다.
-주님을 가장 먼저 찬미하오며/뜨거운 마음으로 그리옵나니
더없이 거룩하신 주님이시여/오늘의 우리생활 인도하소서-
연중 제1주간 첫 날 월요일 새로운 평범한 일상이 시작되었습니다.
평범한 일상의 첫날에 말씀의 배치도 적절합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의 평생 선포의 요약이며 예나 이제나 믿는 이들에겐 영원한
진리입니다. 박진감 있게 다가 온 하느님 나라에 하루하루, 늘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깨어 살아야 하는 일상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몸담아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자리가 세상입니다.
내 마음이 세상의 축소판이듯, 우리 공동체 삶 역시 세상입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를 통해서 저는 ‘세상’을 묵상했습니다. 복음의
부름 받는 두 쌍의 형제들이 몸담아 살고 있던 삶의 터전 갈릴래아
호수가 그들의 세상이듯, 사무엘 상 독서의 가장 엘카나의 가정이
하나의 세상입니다.
밖에서는 평화로워 보여도 안에서는 영적전투 치열한 최전방의
세상입니다..
얼핏 보면 두 장면 다 탈출구 없는 세상 같습니다. 복음에 설명되어
있진 않지만 갈릴래아 호수를 삶의 터전으로 하여 평생 고기잡이
하며 살아간다는 것 역시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복음의 두 쌍의 형제들은 탈출구가 꽉 막힌 상황에 내적
갈등도 많았을 것이며 답답함도 컸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갈릴래아 호수를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 단조로운 반복의
삶을 살다가 인생 허무하게 마쳤을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새로운 탈출구가 마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모두를 버리고 떠난 그들의 행동에서
빛을 향한 내면의 갈망이 얼마나 컸겠는지 짐작이 됩니다.
문자 그대로 모두를 버리고 떠나라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이자 전적으로 주님을 향해 탈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끊임없이 주님을 향해 내적으로 버리고 따르는 삶의 연속일
때 늘 새로운 삶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안주가 아닌 정주의
삶입니다.
바로 우리의 유일한 탈출구는 주님이요, 이런 내적 탈출구 역할을
해주는 것이 매일 미사와 시편성무일도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이런 공동전례기도의 항구한 수행이 늘 주님을 따라 흐르는 맑은
강이 되어 살게 합니다. 우리에겐 임박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응답이 공동전례기도의 충실한 수행입니다..
1독서 사무엘 상 권의 엘카나 가정 역시 갈릴래아 호수처럼
얼핏 보면 탈출구 없는 세상 같습니다. 공동체 삶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들어납니다.
수도생활은 공동생활이요, 수도생활의 어려움은 공동생활이요,
함께 살아가는 것이 수도(修道)라는 저의 지론을 연상케 하는
장면입니다.
며칠 전 읽은 부부에 대한 예화도 재미있어 나눕니다.
30대 부부는 마주보고 자고, 40대 부부는 천장을 보고 자고,
50대 부부는 등을 돌리고 자고, 60대 부부는 각방에서 자고,
70대 부부는 어디서 자는지 모른다는 예화입니다.
이 또한 부부공동생활의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늘 1독서의 엘카나 가정공동체의 어려움은 그대로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여기서 모두가 나름대로 힘들었겠지만 가장
힘들었을 사람은 아이가 없었던 ‘한나’였습니다.
다음 대목에서 한나의 어려움이 잘 드러납니다..
‘이런 일이 해마다 되풀이 되었다. 주님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프닌나가 이렇게 한나의 화를 돋우면, 한나는 울기만 하고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남편 역시 진퇴양난의 처지라 말로만 위로할뿐
별 대책은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꽉 막힌 상황에서 한나의
유일한 탈출구이자 숨통은 주님이었음이 내일 독서에서 잘
들어납니다. 바로 살아계신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내적 탈출구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비우고 부단히 주님을 따라 나설 때
비로소 정주의 삶이요 공동체의 평화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오늘도 우리 모두 자기를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당신을 따라 나서게 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에겐 늘 새로운 시작, 새로운 출발만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시편34,6).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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