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
☆ 2014년 가해 1월14일 (녹)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수도회] 악령과 하느님의 영을 식별하는 능력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제1독서 : 1사무엘 1, 9 - 20
† 복음 : 마르 1, 21ㄴ - 28
★ 한나는 흐느껴 울면서 아들을 청하는 간절한 기도를 바친다. 그리고
아이를 주시면 그를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겠다고 맹세한다. 엘리
사제는 그녀의 진실한 마음을 보고 안심하고 돌아가라며 위로한다.
한나는 마침내 아들을 얻는다(제1독서).
★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란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와
달리 권위를 지니셨으며 그 권위는 더러운 영마저 복종시켰기 때문이다
(복음).
◈ 오늘의 묵상
서울 중심부에 있는 한 대형 서점은 계절마다 좋은 시의 구절을 거대한
현수막에 옮겨 거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언젠가 거기에서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의 앞 구절을 보고 크게 감동받았습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이 시의 표현대로 한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이 어마어마한
것처럼, 우리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의 자취도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 사람이 남다르게 진하고 그윽한 사랑의 향기를
지녔던 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은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던 영화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이태석 신부가 주님께로 떠난 날입니다. 벌써 4년이 흘렀지만 그의
자취는 여전히 많은 이를 감동시키며 인생의 지표가 되고 있습니다.
그의 삶과 인격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한국 사회 전체에 아름다운
삶의 귀감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깊이 감사하고 같은 신앙인으로서 자긍심을 갖습니다.
그 역시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기에 몸과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끝까지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지만, 그의 기일에 더욱 그리워하며 그를 사로잡은 주님의 사랑을
조금 더 깊이 느끼고 싶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권위 있는 가르침 : 반신부의 복음묵상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월14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마르 1,21-28)
권위 있는 가르침
오늘은 청주교구 부제, 사제 서품식이 있는 날입니다. 하느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소명에 감사하며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온전히 봉헌하는 삶이 항구하게 지켜지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하느님의 권위가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사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몹시 놀란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자기를 열지 않는
사람은 그 권위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는데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습니다
(마르1,21-22). 권위를 나타내는 라틴어 ‘아욱토리타스’
(auctoritas)는 ‘아우제레’(augere)라는 동사에서 유래 하는데,
이 동사는 ‘자라게 하다’, ‘증가시키다.’, ‘커지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권위는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권위는 당신의 명예와
권위를 높이는데 있지 않고 모든 사람들, 특히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예수님’은 아주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은총을 주시는 분으로 기대합니다. 기적을
행하시고 앓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시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어
그들의 위로와 힘이 되어주셨듯이 오늘도 우리에게 그렇게 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사는 데는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은총은
그분이 가르치는 바를 통해서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바를 잘 알아듣고 그것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배우려는
노력도,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어떤 기적이나 체험을 바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하느님 체험을 하고 싶어 하는데 그것을 신비로운
현상이나 꿈, 장미향을 느끼는 등 현실과는 동떨어진 어떤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성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그런 것들이
일시적으로 있을 수 있으나 그게 다가 아니며 분명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확실한 체험은 말씀을 통해 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은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1테살2,13). 하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의 말씀이 단순히
문자가 아니라 나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가올 때 깊은
감동과 기쁨을 느끼게 되고 하느님을 체험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순간 어떤 말씀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나를 전율케
한다면, 실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면 그 순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경을 통해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권위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골로3,16).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뽐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각 신심단체에 이름을
걸어놓고 위로를 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지 않고는 영적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여러분이 예수님을 닮아
그리스도인의 권위를 지니고 주님의 가르침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의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되길 바랍니다.
악령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를, 한 마디로 소통하기를 거부합니다.
말 따로 행동 따로 하는 것이 악령의 특징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악령 들린 사람처럼 한 입으로 두 말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보다는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하느님을 이용하고 이웃을 힘들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사참례를 열심히 하면서 거룩해 보이지만 실상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를 거부하며 내 뜻을 이루려 안달하는 악령으로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권위 있는 주님의 가르침에
순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조용히 하여라. 내게서 나가라.
오늘 새벽 묵상을 하면서 제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벽 4시에 누가 저에게 전화를 하겠습니까? 그리고 묵상을 한 두
시간 동안 하는 것도 아닌데도, 무슨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성당에 들어가면서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족쇄 같은 휴대전화가 고장 나면 어떨까? 어쩔 수
없이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가 없을 테고, 자연스럽게 항상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는 습관도 없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정말로 고장이 났습니다. 화면의 어떤 버튼을
눌러도 동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전원 버튼 까지도
먹통이 되어서 어떠한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제 휴대전화는
배터리 일체형이기 때문에 배터리를 뺌으로 인해서 다시 껐다가
켤 수도 없는 것입니다.
고장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고장 났습니다. 제가
어떠했을까요? 기쁘고 신났을까요? 아닙니다. 그 순간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는 많은 일정들에 대해서, 또 아침마다 성소후원회의
특별회원들에게 보내는 문자메시지에 대한 걱정들, 그리고 기타
등등 휴대전화를 이용하던 것들에 대한 생각들이 떠올리면서
“안 돼!!”를 외칩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은 우리의 삶 안에서 자주 보였던 것 같습니다.
내 생각이 이루어지면 분명히 좋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참 많았지요. 그러면서도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보다는 항상 내 뜻대로 이루어지기만을 청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기 뜻대로만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것은 어쩌면 내 안에 있는 악의 유혹이었음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소리를 지르며
말합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께서 굳이 이 세속적인 땅에 오셔서 왜
간섭을 하느냐는 것이지요. 거룩하신 분께서는 그냥 거룩한
곳에서만 사시고, 이 세속적인 땅에서는 자기들 마음대로 살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악의 유혹에
물들어 사는 인간의 모습을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거룩한 사람이 되어 진정으로 행복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악의 유혹처럼
자기 뜻대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그 뜻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종종 내 뜻대로 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특히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욕심을 내세우고 싶은 유혹의 속삭임이
마음속에서 움터 나오기도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악을 향해
꾸짖으신 말씀을 내 자신에게 해 보십시오. 분명 커다란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조용히 하여라. 내게서 나가라.”
사랑하는 사람을 종일 기다리는 마음은 애타고 힘들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달려가는 마음은 두근거리고 기쁩니다. 희망도 그렇습니다.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탁현민).
전혀 필요없어 보이는 PET 병들을 모아 이렇게 멋진 작품이
만들어졌습니다.
단점들도 좋은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언젠가 다람쥐에 대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다람쥐는
도토리를 주로 먹지요. 그래서 다람쥐는 추운 겨울을 대비해서
가을이 되면 부지런히 도토리를 땅에 묻어서 보관을 한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큰 문제가 있습니다. 글쎄 머리가 좋지 못해서
자기가 묻은 곳이 어디인지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억하지 못해서 계속해서 땅에 묻힌 도토리는 어떻게
될까요? 이 도토리들이 나중에 도토리나무가 되어 다시 다람쥐에게
도토리를 선물합니다. 만약 다람쥐의 머리가 좋아서 자기가 묻은
도토리를 전부 찾아서 먹어버렸다면 더 이상 새롭게 자라는 도토리는
있을 수가 없겠지요. 머리가 좋지 못하는 단점이 새로운 생명을
만드는 가장 훌륭한 장점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필요 없는 것이 있을까요? 소위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단점이라 할 수 있는 것도 내게 반드시 필요한 장점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의 작은 것
하나하나도 쓸데없이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행복은 지식이 아닌 지혜에서 옵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행복은 지식이 아닌 지혜에서 옵니다.'
2014년 가해 1월14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묵상
마르 1,21ㄴ-28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르코1,22)
---
참 많은 지식과 정보들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원하는
지식이나 정보는 인터넷 선만 연결이 되어있으면 손쉽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세상이다. 그 지식은 분명 우리에게 편리함을
주고 많은 것을 알게 한다. 하지만 그것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진작 깨닫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다고 한다.
어떤 가르침이었을까? 성서 어디를 뒤져봐도 예수님께서 수학이나
의학 혹은 물리학의 원리나 그 어떤 학문화된 논리를 가르치셨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놀랐고 움직였고 심지어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자 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이 있다.
우리가 평생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할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다.
지식은 모아진 정보들을 들추어보고 시간을 들이면 내 것이 된다.
하지만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도 엇나간 방향이라면 절대로 내
것이 안 되는 것이 지혜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가르침에 놀란 사람들, 인생이 바뀐 사람들,
그들이 본 것은 그분의 지혜였다. 내 경험으로는 지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 정의, 겸손. 평화와 같은 아름다움을
닮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지혜를 청해야 한다. 사랑할 수 있는
마음, 의롭게 살려는 마음, 있을 곳과 떠날 자리를 알고자 하는
겸손의 마음, 평화를 갈구하는 마음을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한다. 그 권위는 진실에 대한 확신에서
온다. 우리는 진실과 만날 때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고 감동하고
만다.
감동적인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남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감동할 수 있는 삶이라 한다면 우리는 정말 행복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실을 볼 수 있는 지혜를 청해야만 한다.
(2013.01.15)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악령과 하느님의 영을 식별하는 능력
2014년 가해 1월14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마르 1,21ㄴ-28
악령과 하느님의 영을 식별하는 능력
교회 역사 안에서 ‘회개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성인이 한 분
계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님이십니다(353-430).
이분은 젊은 시잘 마니교라는 이단과 방탕한 생활에 빠져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386년 8월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그래서 눈을 떠보니 성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로마서 13장 13-14절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과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그 말씀 읽는 순간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이런 느낌이
들었답니다.
“나의 가슴은 확신의 빛으로 가득 찼고 의심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결정적인 회심을 한 것입니다. 그는 즉시 암브로시오 주교로
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은둔 속에 기도하면서
하느님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회개여정은 완전히 종결되었는가? ‘인생
한방’이라고 그걸로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는가?
천만의 말씀입니다. 회개는 평생 지속되었습니다. 완전히
하느님께로 돌아섰다고 생각했는데, 과거의 악습들이 어느새
고개를 들었습니다.
악의 영들은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친구야,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네가 우리 없이 어떻게 살려고 하느냐?”
수시로 귀에 대고 속삭이는 악한 영들의 유혹과 감언이설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정말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유혹이 클수록
더 열심히, 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고비를 넘기게
되었고 아주 감미로운 천사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두려워말고 모든 근심걱정을 하느님께 맡겨라.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라. 미래는 하느님 섭리의 손길에 맡겨라. 현재는
하느님 은총 안에 기뻐하라.”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한평생에 걸친 화두는 두 가지였습니다.
‘죄와 은총.’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이 더 풍부하게 내리고 있음을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죄는 나쁜
것이고, 우리를 힘겹게 하는 것이지만 죄는 다른 한 편으로 우리
인간 각자의 나약함을 알게 하고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도구로도 사용된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에게서 악령을 쫒아내 주십니다.
언제나 하느님의 영, 곧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사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어떤 것이
악령이고 어떤 것이 하느님의 영인지 정확하게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선과 악을 구분하는
명확한 식별 능력을 지니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양한 악과 유혹, 선택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오늘의 우리들입니다.
어느 것이 선이고 어느 것이 악인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선과 악을 구분하는 식별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능력은 오직 기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주님의 영 안에 머묾으로서
그 능력이 주어집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1주간 화요일
2014년 가해 1월14일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마르 1,21ㄴ-28
고등학교 다닐 때, 산악 반엘 들어갔습니다. 주말이면 북한산을
주로 갔습니다. 산에 오르고, 야영을 하고,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인수봉’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수봉은 바위를 타는
사람들에게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짜릿해지는 암벽입니다. 암벽
등반은 위험하기 때문에 4명이 하나의 조를 이루어 올랐습니다.
가장 위험한 자리는 선두에 서는 사람입니다. 줄을 메고 바위에
올라서 줄을 안전하게 매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위험한
자리는 마지막에 있는 사람입니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서
줄을 확보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올라오면서 줄을 정리해야
합니다. 그나마 안전한 자리는 중간에서 올라가는 사람입니다.
선두에 선 사람이 안전하게 줄을 매달았고, 후미에 오는 사람이
줄을 정리해 주기 때문입니다. 선두에 서는 사람은 중간에 설치된
줄을 걸어둘 자리를 잘 알아야 합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갈
만큼 희생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실력이 좋아야 합니다.
저는 선두에서 암벽등반을 하지는 못 했습니다. 겁도 났고, 실력도
뛰어나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후미에서 줄을 정리한 적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존경과 사랑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분에게 주어진 직책과 그분에게 주어진 권한이 크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권위는 있으나,
권위적이지 않은 그분의 말과 행동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 고통
중에 있는 이들, 억울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새로 되신 보좌주교님께서 주교의 문장과 표어를 정하셨습니다.
표어는 ‘여러분도 서로 발을 씻겨 주십시오.’입니다. 주교님과 함께
신학생 시절을 보냈습니다. 평소 그분의 말과 행동을 들었습니다.
그분의 품성과 그분의 인격에 적합한 표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교의
모관과 지팡이에서 권위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발을 씻어주려는
주교님의 말과 행동에서 권위는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대교구의 교구장이신 염 수정 대주교님께서 새로이 추기경이
되셨습니다. 염 수정 추기경님께서는 더욱 무겁고, 어려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 신년 메시지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형제애’를 가지고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저분에게서 새로운 권위를 보았습니다. 저 분의 말과 행동은 권위가
있습니다.’ 그 권위는 분명 위험을 감수하고 줄을 매고 선두에서서
안전한 길을 확보하려는 희생의 권위입니다. 그 권위는 나의 십자가는
물론 타인이 십자가도 함께 지려는 봉사의 권위입니다. 그 권위는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권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추구하는 권위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령께서 주시는 권위
2014년 가해 1월14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
복음 : 마르코 1,21ㄴ-28
< 성령께서 주시는 권위 >
우리나라 현대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인물은 누구일까요?
아마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김수환 추기경’이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분의 영향력은 누구보다 강해서 대통령들도 그분이
어떻게 나올지 눈치를 보아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데모하다가 정권을 피해서 명동성당에 들어오면 그 분이 보호해
주셨고 그러면 군인 경찰들도 그 안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란 기사를 보았습니다. 영향력이 곧 권위입니다. 그분이
한 마디 하시면 전 세계 가톨릭 모든 신자들뿐 아니라 그분을
존경하는 많은 이들이 움직입니다. 현재 그렇게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도 집에서 무슨 결정을
내리면 아내나 자녀의 반대가 튀어나오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오바마 대통령도 뭐 하나 하려면 많은 국민의
반대를 무릅써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은 어떻게 그렇게 강한 영향력을 지닐 수
있으셨을까요? 강한 영향력을 지니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을까요?
정경수란 분이 아나운서 30년, 사회단체 KSA 20년을 하는
경력동안 만나온 사람들에 대한 책을 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만난 김수환 추기경님은 권위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하고
계셨습니다.
한 번은 정경수 씨가 경찰의 날 리셉션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만났습니다. 당시 내무장관, 내무차관, 법무장관, 법무차관,
검찰총장 등 4대 권력단체의 책임자들이 모두 참석을 해서
축배를 나눴고 김 추기경님은 종교단체 대표로서 참석을 하신
것입니다.
정경수 씨가 기억하는 당시의 김 추기경님은, 겸손하시면서도
소박한 미소와 유머로 참석한 귀빈들을 즐겁게 해주셨다고 합니다.
참석한 귀빈들도 한바탕 웃고 나면 장내 분위기가 한층 부드러워
졌습니다. 더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추기경께서는 공개석상인데
주저 없이 참석자들에게 “누구 담배 갖고 있느냐”고 묻고 담배를
청해서 담배를 맛있게 피워대는 모습이었습니다. 리셉션 자리에서
추기경 혼자 담배를 흔쾌히 흡연하시면서 “내가 이 담배 때문에
살아.” 그리고 맥주 한 컵을 즐겁게 드시면서 “내가 이 맥주
안마시면 목이 타서 못살아.”라고 하셨습니다.
제복을 입고 온 많은 정치인들, 경찰들, 높으신 분들은 감히
담배를 피울 생각도 자유롭게 맥주 한 잔 들이킬 자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김 추기경님은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을 남들 눈치 안 보고 다
하셨습니다. 이것이 참다운 권위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자유로우실
수 있으셨던 것은 당신의 권위가 사람들이 아닌 높은 곳, 바로
하늘에서 오는 것임을 잘 아시고 계셨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전에 김수환 추기경님에 대한 강론을 누가 쓴 기억이 납니다.
그분을 곁에서 보셨던 신부님이셨는데, 김 추기경님은 항상
밤늦도록 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바로 권위를 부여받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 때 신부님도 성당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김 추기경님이 나가시고 자신도 시간이 흘러 기도를
마치고 성당 밖으로 나오는데 자신의 신발이 신기 편하게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추기경님이 나가시면서 몸을
굽혀 그 신부님의 신발을 놓아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아마 그런 겸손하신 추기경님께 목숨이라도 바치고 싶은 마음이
드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다운 권위인 것입니다. 권위는
겸손한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성령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겸손하게 아버지 앞에서 당신을 낮추셔서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에 성령을 받으셨고 그 성령의 힘으로 가르치시고
마귀도 쫓아내신 것입니다.
한 아이가 백악관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 집무실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오바마 대통령을 보며 머리를 만져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오바마 대통령은 머리를 숙여 아이의
손이 닿을 수 있게 하였고 그렇게 아이가 대통령의 머리를 만지는
사진이 퍼진 적이 있습니다. 이제 그 아이는 오바마 대통령의 권위
하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를 사랑하게 되겠기 때문입니다.
한 어머니가 전에 저를 찾아와서는 어찌해야 하는지 물은 적이
있습니다. 딸을 자신의 신발로 때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이
매우 부었다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는 결혼을 하겠다고 딸이
고집을 부려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권위가 없어지면 폭력을 쓰게 됩니다. 그러나 참다운
권위는 상대가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우리가 낮아질 때 성령의 힘과
영향력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높아지려 할 때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사람이 되어갑니다. 참다운 권위, 그것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세례 받으실 때 그분 머리 위로 내렸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하늘 뜻 따라 명령하며 살기
2014년 가해 1월14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하늘 뜻 따라 명령하며 살기
명령의 위력, 권위 있는 명령, 꼼짝 못하게 당당히 복종시키는 명령.
돈 때문에? 목숨 때문에? 명예 때문에? 사랑 때문에? 좀 복잡합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공부해라. 학원가라. 점수 올려라.’좀 그렇지요?
세상이 만들거나 내 마음이나 욕심대로 내리는 명령이 많지 않을까요?
하늘과 통하는 진리에 입각한 확신에 찬 명령을 하는 사람 많을까요?
이 점에서 사람의 가치가 구분되므로 하늘 뜻 따라 명령하며 살아야지요.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마르코 1,27)”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도회]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월14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사무 상 1,9-20 마르 1,21ㄴ-28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마르 1,21ㄴ-28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오늘은 ‘권위’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오늘날을 권위 상실의 시대라 말합니다. 권위을 잃어갈 때
억압과 폭력의 시스템은 점차 강화되고 사람들은 서서히 길들어져
노예화 됩니다.
권위주의는 좋지 않지만 권위는 공동체 삶에 필수입니다.
존경과 신뢰를 잃어 스승의 권위, 부모의 권위, 장상의 권위가
실추되면 공동체의 혼란이요 일치와 평화도 힘들어집니다.
권위의 원천은 하느님입니다.
"위대하신 임금이신 우리 주님께 어서 와 조배드리세."
오늘 새벽 성무일도 시 화답송 후렴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이
권위의 원천이심을 고백했습니다. 진정 존중해야 할 바 하느님의
권위입니다. 하느님의 권위를 존중할 때 사람의 권위를 존중하고,
하느님께 순종할 때 사람에게 순종합니다.
권위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참 권위는 강압적이거나 강요적이 아니라 주님을 만날 때 저절로
우러납니다. 이런 진정한 권위 앞에 자발적인 승복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권위가 참 권위의 모범입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권위를 반영합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모두가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진정한 권위입니다. 어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어부들을 보시고 ‘나를 따라 오너라’
말씀하셨을 때 즉시 따라 나섰던 것도 바로 예수님의 권위를
반영합니다. 권위 있는 말씀에 어부들은 즉각적인 순종으로 주님을
따랐습니다.
참 스승에 참 제자를 말하지만 참 제자가 있을 때 참 스승도
나타납니다. 권위를 존중하지 않는 세대에는 권위 있는 스승이
나타나도 쉽사리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제 복음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한 제자들이나 오늘 회당에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던 이들은 마음이 순수했던 이들입니다.
마음이 순수했기에 주님의 권위에 순종하여 따랐고 주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권위 있는 어른이나 스승을 찾기 이전 마음의 순수가 우선임을
깨닫습니다. 마음이 순수할 때 진정 권위 있는 분은 주님 한
분뿐임을 깨닫게 되며 주님의 권위를 반영하여 권위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권위의 원천이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마음의 순수입니다. 복음의
더러운 영이 들린 이가 상징하는바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더러운 영에 들려 마음의 순수를 잃고 권위를 부정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만이 치유할 수 있는 교만의 영,
불순종의 영, 질투의 영 등 무수한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들입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빛 앞에 저절로 사라지는 어둠처럼,
빛이신 주님 앞에 어둠의 더러운 영은 숨을 데가 없습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아갑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우리에게는 새로운 깨달음입니다.
“이게 어찐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주님의 가르침만이 새롭고 권위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순수해야,
믿음이 있어야 이런 새롭고 권위 있는 주님의 가르침을 깨닫습니다.
하여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항구한 기도를 통한 마음의 순수요 주님을
만나 더러운 영들로부터 해방됩니다.
바로 1독서의 한나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로
주님의 응답을 받아낸 그는 그길로 가서 음식을 먹었고 그의 얼굴은
더 이상 전과 같이 어둡지 않았다 합니다.
완전히 근심과 질투의 더러운 영으로부터 해방된 모습입니다.
다음 묘사도 아름답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은 일찍 일어나
주님께 예배를 드리고 라마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 역시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주님께 예배를 드리고자 주님의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을 배우고자
겸손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안에 잠재해 있는 더러운
영들을 말끔히 쫓아내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으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수원] 분별할 수 있는 은혜
2014년 가해 1월14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분별할 수 있는 은혜(14일 강론)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마르 1,21ㄴ-28
찬미예수님, 알렐루야~
오늘 제 1독서에서 한나가 하느님 대전에서 눈물로써 호소하여서
아들을 갖게 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만군의 주님, 이 여종의
가련한 모습을 눈여겨보시고 저를 기억하신다면, 그리하여 당신
여종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 여종에게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신다면,
그 아이를 한평생 주님께 바치고 그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느님께 하소연합니다.
엘리 사제가 '이 여자가 술이 취했나' 하면서 그만 집에 가라고
하니까, 아니라고 술이 취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자신이 하느님께
청하고, 자기는 너무 괴롭고 분해서 하느님께 하소연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자 엘리가 "안심하고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당신이 드린 청을 들어주실 것이오." 하고 대답합니다.
"나리께서 당신 여종을 너그럽게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음식을 먹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그의 얼굴이 더 이상 전과 같이
어둡지 않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은총을 받고 변화되기 시작하면 얼굴이 많이 변합니다.
제가 누구라고 얘기는 안하겠습니다만, 오늘 본당에 어떤 자매님
동생이 왔습니다. '어, 우리 언니가 바뀌었어요.' 그러는 겁니다.
'무슨 소립니까? 우리언니가 까칠 왕이거든요, 그런데 얼굴이
달라졌습니다. 부드러워지고, 사람이 은혜를 받으면 얼굴모습도
달라지나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들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갈수록 얼굴이 밝아지고 환해지고, 외부에서 오는 사람들도
우리 성당에 오면 무엇인가 다른 기운이 느껴진답니다. 밝고
희망차고 기쁜, 기쁨이 저절로 나는 그런 분위기가,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 신자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성체조배하고 이런
것으로 인해서 하느님의 은총이 여기에 풍부히 내려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 듭니다.
한나라는 여인은, 어제 독서에서 보았듯이 프닌나라는 여인이
얼마나 약 올리고 화를 돋우고 그랬습니까? 그래서 한나가
하느님께 울부짖자 사무엘이라는 위대한 아들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태문을 열고 닫는 것은 하느님의 주관이다.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인공수정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다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당신이 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저는 안합니다.
당신이 책임져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하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우리 신자 중에 14년 동안 태기가 없이 고통 중에 있던 자매님,
늘 웃으면서 봉사하고 하는 자매님이 끝까지 기도하고 의탁하는
그런 모습이, 아기가 생기고 안생기고를 떠나서 하느님께 매달리고
기도한다는 것에 대해서 정말 감동적입니다. 그런 노력하는,
기도하는 모습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모릅니다. 우리 안에, 모든
사람들 안에 그런 믿음으로 간구하는 그런 마음들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노력한다면 저는 하느님께서 틀림없이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나에게 그런 축복을
내려주셨던 것처럼.
오늘 복음에 보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 지르며 말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렇게 얘기하는데, 이것이 누가 얘기하는
것입니까? 그 사람이 얘기하는 것입니까? 그 사람 안에 있는
더러운 영이 얘기하는 것입니까? 네, 더러운 영이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 입을 통해서 말을 합니까? 그 사람을
통해서, 그 사람 입을 통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말만 할뿐 아니라 더러운 영들은 우리의 생각도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나쁜 생각들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생각을 따라 가게 되면 늘 나쁜 영이
지시하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지 못하고,
나쁜 영의 뜻에 따라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기쁨도 없고 행복도 없고, 열매 맺지 못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쁜 영이, 더러운 영이 우리의 입을 이용하기도 하고, 우리의
생각을 이용하기도 하고, 우리 감정도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울컥울컥 화나게 하는 감정이 내 느낌, 내 감정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더러운 영이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도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불신하고 믿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이런 생각들을 일으키는 것도 더러운 영이 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식별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것을
깨닫는 사람들은 영적세계에 접어든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매번 그 타령입니다. 진보가 안
됩니다. 거기서 거기, 그것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픈
사람들, 문제 있는 사람들, 힘든 사람들 상담하는 것은, 그것을
분별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분별하는데 이
사람이 어떻게 하면 받아들이면서 수용하게끔 해 주는가,
그것이 굉장히 힘들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나쁜 영은
예수님이 나타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 대드는 것입니다.
저항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상담하다보면 그 사람의 아픈 부분, 더러운 영의
부분을 건드리면 버럭 버럭 화를 냅니다. 나는 치유하고 싶은데,
그래서 그것을 치유의 언어로 바꾸어서 대화를 하고, 만나주고
그래서 굉장히 인내가 필요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화를 내는
것이 나한테 화내는 것이 아니라 아파서 그런 것이다. 힘들어서
그런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다 수용하는 것입니다.
다 받아들여주면 어, 이 사람이 정말 나를 사랑하나보다. 하며
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들안에 누군가 버럭버럭 화를
낼 때, 저사람 왜 저러지 하면 화합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하는 것은 그 안에 있는 더러운 영이 저렇게 버럭버럭 화를
내게 하는구나, 게으름 피우게 하는구나, 이런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 너그럽게 대하고, 너그럽게 보아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아주기 시작하다 보면, 내가 먼저 예수님의 눈으로
사람들을 보기 시작하면 그 사람들도 예수님의 빛을 받아서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미사 중에 내 안에도 무엇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
내 뜻인지, 악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식별할 수 있는, 분별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하고, 우리 가족이나 이웃들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할 때, 그것을 넓은 마음으로,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줄
수 있는 은총을 간절히 구합시다.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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