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도 -
☆ 2014년 가해 1월17일 (백) 금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수원] 뭉치면 강하다? 뭉쳐야 산다.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1사무엘 8, 4 - 7. 10 - 22ㄱ
† 복음 : 마르 2, 1 - 12
안토니오 성인은 3세기 중엽 이집트의 중부 지방 코마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느 날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감화되어, 자신의 많은 상속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 사막에서 은수 생활을 하였다. 많은 사람이
안토니오를 따르자 그는 수도원을 세우고 세상의 그릇된 가치를
거슬러 극기와 희생의 삶을 이어 갔다. 성인은 ‘사막의 성인’, ‘수도
생활의 시조’로 불릴 만큼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4세기 중엽 사막에서 선종하였다.
★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사무엘에게 임금을 세워 달라고 요구한다.
사무엘은 임금의 횡포로 고통을 겪을 것이라고 경고하지만 임금이
전쟁을 이끄는 다른 민족들을 부러워하는 이들은 뜻을 굽히지
않는다(제1독서).
★ 카파르나움에서 사람들은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움직이지
못하는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에 데려간다. 그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하신다. 그리고 죄의 용서는
곧 치유라는 사실을 율법 학자들에게 똑똑히 보여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죄의 용서와 치유가 내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이것이 구원이 드러나는 자리임을 분명히 보여
주십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자면 우리 삶에서 구원을 가장
직접적으로 실감하게 되는 사건은 바로 용서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죄를 용서받았음을 깊이 깨닫고, 그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다른 이를 용서하는 행위를 할 때 우리는 구원을
실제로 살게 됩니다. 그 반면에 용서의 어려움을 체험하고 심지어
용서가 불가능하다고까지 느끼는 순간, 주님의 온전한 구원과
치유에 대한 믿음 역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지난 가을에 본 연극 한 편의 강한 인상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러시아의 한 극단이 영국의 유명한 연출가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공연한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폭풍우)였습니다. 놀라운 연기와
신선한 연출에도 감탄했지만 무엇보다도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에서 남긴 ‘용서’라는 주제를 다시 음미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연극의 뒷부분인 에필로그에 나오는 주인공
프로스페로의 마지막 대사는 용서만이 인생의 행복을 다시 찾는
길이라는 작가의 마지막 확신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부릴 정령도 없고/ 걸 수 있는 마술도 없고 해서/
기도로 구원되지 않는다면/ 저의 마지막은 절망이 됩니다./
기도는 뚫고 들어가 자비를 움직여서/ 온갖 잘못을 용서합니다./
여러분도 죄를 용서받으시려거든/ 관대하게 저를 놓아주십시오.”
우리는 용서가 때로는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는 것과, 그러나
용서하지 못한다면 행복할 수 없다는, 이 두 가지 모순된 사실을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프로스페로에게 용서가 삶을 건 도전이었듯이
우리에게도 용서는 그것을 감행할 용기를 요구합니다. 그것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바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어 우리가
온전하게 치유받고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그분을 바라보면서 걷는 우리의 삶이라면, 용서의
힘은 분명히 우리 안에 소리 없이 자라나 있을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주님은 명의시다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1월17일 금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 마르 2,1-12
주님은 명의시다.
몸에 향수를 뿌리고 얼굴에 화장을 하여도 몸도 얼굴도 변하지
않습니다. 새 옷을 갈아입고 치장을 해도 그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겉모양이 달리 보일 뿐입니다. 마음은 그대로 두고
요란을 떨면 떨수록 본래의 모습은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을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를 당신 앞에
내려놓은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마르2,5).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외적인 중풍병을 고치려고 왔는데 주님께서는 그 원인을 치유시켜
주심으로 사람의 근본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평범한 의사는
상처를 다스리고 명의는 뿌리를 다스린다고 했는데 바로 우리의
주님이 명의이십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뿌리에 생명을 더하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 이십니다.
겉은 멀쩡한데 속이 뒤틀린 사람이 있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탓을 남에게 돌리며 투덜대기 좋아하는 사람, 정말 치유를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처지를 다
꿰뚫고 계시니 그분 앞에 서슴없이 나의 모든 것을 열어드려야
하겠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를 하지 않는 영혼은 중풍병에
걸렸거나 손발이 부자유스럽게 된 사람과 같아서, 손과 발에게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듣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만약에
이런 영혼들이 그 커다란 비참을 깨닫지 못하고, 따라서 스스로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롯의 아내가 고개를 돌리다가
소금 기둥이 된 것처럼 자기한테서 머리를 돌린 탓으로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 것”(영혼의 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중풍환자, 즉 영적인 감각을 상실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접하고도 아무런 깨달음을 갖지 못하고
은총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장애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읽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거나 또 설령 읽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상태가 중풍환자나 다름없습니다. 기도 안에서 치유받기를
희망합니다.
이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생각합니다.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려온
사람들의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자 지붕을 벗겨내는 열성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마르2,4).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위해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할 수 있는 마음을 담고 있는가? 또한 나를 위해 그렇게
해 줄 이웃이 있는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이웃사촌이라 하지만
요즘 세상은 서로를 너무 모르고 지내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웃을
향한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길 청하면 주님이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실 것입니다. 겉모양도 중요하지만 속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사람들이 중풍환자를 예수님께 데려간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넘어야 할 두 가지 장벽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군중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이
가니까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목적과 소신을 가지고 가야합니다.
나의 인생은 남이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요, 군중에 떠밀려가듯이
가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인생의 선장입니다.
두 번째의 장벽은 지붕이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를 들것에 매달아 내려 보냈습니다. 막히면
뚫고 걷어내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위대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기적을
낳습니다. 그 믿음이 내 믿음이든 다른 사람의 믿음이든 믿음을
갖고 하는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들 것에 누워있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고,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혹 누워있다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제게 눈이 있어 보는 것이 아니라
빛이 있어 보는 것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게 코가 있어 숨쉬는 것이 아니라
산소가 있어 숨쉬는 것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게 귀가 있어 듣는 것이 아니라
공기가 있어 들리는 것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게 입이 있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가르쳐 주셨음을 깨닫게 하소서.
지구가 중심이 아니고 태양이 중심이듯
나 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새롭게 하소서. 아멘” -유광수-
교황님의 새해 결심 10가지를 소개합니다.
서방의 한 일간지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밝혀진 것이랍니다.
1. 험담하지 않기
2. 음식 남기지 않기
3. 다른 사람들을 위해 시간 내기
4. 좀 더 가난하게 살기
5.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기
6.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기
7. 반대자들을 친절하게 대하기
8. 교리들에 대해 헌신하기
9. 기도하는 습관들이기
10. 행복하게 살기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모든 의심과 선입견들을 내려놓을 때
우선 1박 2일 동안의 짧은 여행을 잘 마치고 돌아왔음을 새벽님들께
알려드립니다.
저의 여행 소식을 들으신 많은 분들이 제게 참 많은 메일과 문자
메시지를 보내셨더군요. 또한 카페 묵상 글 댓글과 SNS를 통해서도
많은 내용을 남기셨습니다. 그런데 꽤 많은 분들이 ‘부럽다’는 말씀을
하시네요. 가족이 없는 매이지 않은 몸이라 훌쩍 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는 말씀, 여행 갈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있어서 부럽다는 말씀
등등의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올린 몇 장의 좋은 풍경 사진을 보시고서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겠지만, 제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여행이라기
보다는 피정의 성격이 더 짙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오래 걷고 오래 뛰는 것을 싫어합니다. 군대 생활을 할
때에도 제일 싫었던 것이 행군이었고, 학창시절에 제일 못하는
운동이 오래 달리기나 마라톤이었습니다. 또 여행을 많이 다니기는
했지만 혼자 다니는 것보다는 함께 다니는 여행을 선호합니다.
그러한 제가 이번 여행에서 혼자 40Km 이상을 걸었습니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발에 알이 배겨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저는 새로운 곳에 가면 그 지방의 음식을 먹어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소위 맛집 기행을 너무나도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루에 1~2끼밖에 먹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그냥 평범한 음식들만
먹었지요. 자장면, 국밥(돼지국밥이 아닌 콩나물국밥이었습니다),
밀면(유익한 부산 지방의 대표음식이네요).
결국 이번 여행은 즐기기 위한 단순한 여행이 복잡한 머릿속의
생각들을 떨쳐내기 위한 무작정 걷기였지요. 계속 걷다보면 머릿속이
단순해지거든요. 그리고 그 단순함을 통해서 앞으로 일들도 걱정
없이 해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보내주신 글을 보면서 마치 제가 멋진 여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비쳐지더군요. 어쩌면 ‘여행은 즐기는 것’이라는
선입견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특히 주님의 일에 대해서는 선입견과 의심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치유하실 때 종종 쓰시는 말씀은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죄의 용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데, 눈에
보이는 예수라는 사람이 어떻게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인가 라는 것이지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런 선입견과 의심으로
구세주이시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붕을 벗기고 중풍 병자를 들 것에 달아서 내려 보내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지요. 주님만이 이 중풍 병자를 고쳐줄 수
있다는 의심 없는 믿음으로 그 어떤 선입견을 갖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각종 의심과 굳은 선입견들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이렇게 해주셔야 한다.’는 굳은 선입견,
‘이것이 가능할까?’라는 계속된 의심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항상
진리는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 병자를 내려 보내는
사람들처럼 모든 의심과 선입견들을 내려놓을 때, 주님께서는
자유롭게 당신의 구원 활동을 펼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은 수많은 별들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우주의 당당한 구성원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당신은,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맥스 에흐만).
피할 수 없으면 즐기십시오.
어제 걷고자 했던 길의 딱 중간쯤 왔을 때였습니다. 전날의 피로가
풀리지 않아서인지 점점 더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떤
분으로부터 문자메시지가 도착했고, 그분께 ‘걷는 것이 너무 힘들다’
는 푸념식의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 문자에 곧바로 이러한 답 문자를
보내주셨습니다.
‘네가 선택한 고생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제 여행의 결론을 내려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복잡한 일들에 대한
생각들이었는데, 사실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냥 즐기면 그만인데, 어렵다고 힘들다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힘들게
걸으면서 그 해결점을 보려고 했었던 것이지요.
삶 전체가 이렇지 않을까요? 즐기지 못해서 힘든 것이지요. 즐기지
못해서 불평과 원망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고요.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즐기는 방법을 찾는 것, 더군다나 남의 강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것이라면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
하겠지요.
즐기며 사는 하루, 기쁘게 살아가는 오늘이 될 것을 생각하니 이
새벽부터 설렙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용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2014년 가해 1월17일 금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복음묵상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르코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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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용서는 커다란 화두일 수밖에 없다.
용서에 대한 가르침도 수없이 많다.
하지만, ‘무조건 용서하라'는 그분의 말씀에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이가 과연 있을까. 그렇게 사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오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주님의 기도 중 한 대목이다.
무서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고마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간단히 말해서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용서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 힘은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용서를 받고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에서 나온다.
그 힘은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께 늘 용서받고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 나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 보다 아름다운 선물이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이 삶이 다할 때까지, 청해야 할 유일한 희망일 지도 모른다.
앞으로 용서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먼저 생각할 것은 용서하지
못할 누군가가 아니라, 아니, 더 솔직히 말해서, 용서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가 아니라, 용서받아왔고 앞으로도 용서받으며 살아가야
할 자신을 떠올리는 것이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여는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제일 먼저 용서와 화해를 청해야 할 대상이
타인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2013.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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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당신에게 상처를 준 것을 용서하고 잊어라. 하지만, 그것이
당신에게 가르쳐 준 것은 절대로 잊지 말라.”
(“Forgive and forget what has hurt you in the past, but never
forget what it has taught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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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 용기 선생님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교회의 보물이자 중심
2014년 가해 1월17일 금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 마르 2,1-12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교회의 보물이자 중심>
같은 반 학생들로부터의 ‘집단 따돌림’과 집요한 가혹 행위, 그리고 즉시
다가온 심리적 충격, 굴욕감, 좌절감, 깊은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나머지
이루어진 ‘극단적 선택!’
그리고 남은 가족들의 피맺힌 절규, 계속되는 상실감, 분노와 죄책감,
집단 우울증, 신경정신과 치료, 사직서 제출...
조금 어눌하고 착하다는 이유로 시작된 한 친구의 불행, 그리고 가족
전체의 깊은 슬픔 앞에 할 저는 할 말을 잊었습니다. 그 착한 아이,
그 법 없이도 살 가족 전체를 생지옥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가해학생들이
미워 저는 밤잠을 설쳤습니다.
과연 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이런 비극 앞에 서야 했던가요? 경제제일주의,
일등지상주의, 외모지상주의가 불러온 당연한 결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조금 느리면 어떻습니까? 조금 능력이 떨어지면 어떻습니까? 조금 천천히
가면 또 어떻습니까? 부족하면 부족한데로, 약하면 약한 데로, 참아주면서,
기다려주면서 함께 걸어가면 될텐데... 너무나 갈 길이 급한 나머지
기다려 주지를 못합니다. 조금 늦으면 소외시킵니다. 조금 부족해보이면
왕따 시켜버립니다. 참으로 비인간적인 세상 한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요즘 우리 사회는 이주 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정의 급증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뿐만 아니라 노령화가 가속화되면서 소외받는
노인들, 사각지대에 놓인 노인들 인구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약자
층에 대한 관심과 배려, 돌봄과 사랑이 더욱 필요한 시대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교회의 약한 지체들, 어린이들,
노약자들, 장애우들, 이방인들,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들은 우리 교회의
보물이자 중심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철저하게도 성서적입니다. 마르코 복음 2장에는 한
중증 중풍병자와 그 가족들이 등장합니다. 중풍으로 쓰러진지 어언
수십 년,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밥 한술
뜰 수 있는 처지가 너무나 비참해 차라리 죽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끝이려니, 이렇게 식물처럼 살다가 생을 마감하려니 했었는데
어느 날 치유자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습니다.
가족들은 한 마음으로 중풍병자의 치유를 위해 노력합니다. 밤새
환자를 눕힐 들것을 만들었습니다. 환자를 들것에 태운 가족들은 먼
길을 거의 달려오다시피 했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에
도착했는데, 깜짝 놀람과 동시에 큰 실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집 주변은 치유받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정상적인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는 2박3일을
기다려도 차례가 올까 말까였습니다.
중풍병자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가족들이었습니다. 임시대책회의를
열었을 것입니다. 절대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 그렇다고 새치기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그때 누군가가 묘안을 한 가지 냈습니다.
지붕 쪽을 공략하기로.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들 가정의 가장 약한 지체였던 중풍병자를 가장
중심에 두었습니다. 어찌 보면 가정의 가장 약점이자 수치꺼리인
중풍병자를 가장 귀중히 여겼습니다. 그를 위해 가족 모두가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런 중풍병자 가족들의 정성, 가족애, 따뜻한 마음을 예수님께서 높이
평가하십니다. 기상천외한 그들의 방법이 예의가 아니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으시고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오늘 우리 가족 공동체 안에, 우리 직장 공동체 안에,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가장 중심에 둬야할 대상, 가장 배려 받아야 할 대상, 가장 사랑이
필요한 대상이 어디 있는지 유심히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약하면 약할수록, 문제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큰 사랑으로, 더
큰 자비심으로 그를 공동체의 중심에 두고, 그를 꼭 안아주고, 결국
그를 구원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1주간 금요일
2014년 가해 1월17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 마르 2,1-12
예비자 교리를 할 때,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종교는
4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4가지
요소를 갖춘 종교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인류 역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말씀을 드립니다.
첫째는 종교의 창시자가 있어야 합니다. 불교는 석가모니, 기독교는
예수님, 이슬람교는 마호메트와 같이 분명한 창시가자 있습니다.
둘째는 경전이 있어야 합니다. 불교는 불경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성경이 있으며 이슬람교는 코란이 있습니다.
셋째는 윤리성이 있어야 합니다. 윤리라는 것은 사람이 본능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이성과 감정을 가지고 사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과 같은
것입니다. 종교 안에 겸손함이 있어야하고, 박애심이 있어야
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부끄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네 번째는 사회성입니다. 종교는 혼자만이 잘 먹고 살사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루며 더불어 사는 이웃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고, 복음을 전한 것도 혼자만의 구원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공동체가 함께 구원을 받도록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고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사회성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마을의 동료들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중풍병자는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중풍병자를 도왔습니다. 중풍병자를 도와서 예수님께
데리고 갔고,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보았지만, 마을 사람들의
따듯한 마음을 먼저 보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희생과 봉사의 마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병을 낮게 해 주셨습니다.
예전에 천국과 지옥의 표정을 나타낸 글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천국은 긴 젓가락과 긴 수저가 있지만 서로를 위해서 먹을 것을 떠주기
때문에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옥은 긴 젓가락과
긴 수저로 자신만이 먹으려 했기 때문에 맛있는 음식을 흘렸고, 제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한문으로 사람을 나타내는 ‘人’이라는 글자는
서로가 기대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실 때도 먼저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먼저 먹을 것을 주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꽃동네와 작은 예수회가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희망을 주고, 그들에게 따듯한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먹을 것을 나누어 주라.’는 말씀을 실천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바가지의
‘마중물’은 지하에 있는 많은 물을 끌어 올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나누는 작은 사랑과 희생은 우리를 하느님의 품으로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뭉치면 강하다? 뭉쳐야 산다.
2014년 가해 1월17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
복음 : 마르코 2,1-12
< 뭉치면 강하다? 뭉쳐야 산다. >
얼마 전 우연히 TV를 보다가 남극의 펭귄이 겨울을 나는 방법이
소개되어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여자 펭귄은 아기 펭귄을 낳고
남자 펭귄들에게 아기를 맡기고는 모두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
떠나버립니다. 남극의 추위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아기 펭귄들을
데리고 각자가 살아남으려고 먹을 것도 없이 몇 달 동안 계속되는
어두운 겨울을 단 한 마리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남는 법을 배웠습니다. 아기 펭귄을 다리 사이에 끼고 서로
몸을 최대한 밀착시켜 추위와 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몇 달 동안을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봄이 찾아오고 그 때
암컷들과 교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뭉치면 강하고 흩어지면 약해진다는 것을 많이도 듣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이 동물들에게는 살아남기 위한 절대
절명의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기러기는 또 어떻습니까? 몸집이 커서 혼자서는 절대로 이동할
수 없는 엄청난 거리(약 3만 km)를 함께 이동하여 얼어 죽지
않습니다. 그들은 V자 형태로 나는데 맨 앞에 한 마리가 앞장섭니다.
그렇게 나는 이유는 앞에서 바람을 막아주면 뒤에 따라오는
기러기들은 약 1/3정도의 힘이 덜 든다고 합니다. 그리고 앞의
기러기가 힘을 내도록 뒤에서 소리를 질러주고 또 앞의 기러기가
지치면 뒤에서 차례로 교대를 해 줍니다. 이들 또한 생존하기
위해 함께 해야 하는 법을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뭉칠 필요가 있을까요? 물론 혼자서는 절대로
인간답게 살 수 없습니다. 늑대인간의 예에서 보듯이 인간은
함께 살아야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함께 뭉칠 필요는 있을까요?
예수님은 둘이나 셋이 당신 이름으로 모인 곳이면 당신도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당신 뜻으로 모여야만 더
유익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서로 사랑해서 함께 살기를 그렇게도 원해서 결혼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둘도 마음이 맞지 않아서 어떤 때는
결혼을 후회하기도 하는데, 어떻게 큰 유대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이혼 등으로 가정이 해체되는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그렇게
뭉치기가 어려운 것일까요?
제가 교구청에서 관심 가져야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소공동체’
활성화입니다. 그러나 잠깐 본당에 있으면서 느꼈던 것은 소공동체가
좀처럼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전국적인 어려움입니다.
서로 직장도 연령도 학식도 관심도 다른 이들이 신앙 안에 모여서 함께
한다는 것이 저로서도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더욱더 개인적인 성향이 두드러져 서로 집을 개방하려
하지 않으려 하고 마음에 조금만 맞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나오려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소공동체가 활성화 될 수 있을까요?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뭉치면 강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네 명이 한 명을 들것에 들고 예수님 앞으로 나왔고,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가 아닌 같은 뜻을 지닌 그 네 명의 믿음을 보고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나 두 사람만이 그 병자를 데려오려
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억지로 들것을 끌고 올 수는
있었겠지만 지붕까지 나르고 예수님 앞으로 내려 보내는 일은 둘의
힘만으로는 부족했을 것입니다. 네 명이 최소 인원인 것입니다.
결국 함께 모이기 위해서는 그 ‘뜻’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오늘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데려온 네 사람은 ‘같은 뜻’이 있었습니다.
이 뜻이 함께 모이게 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뜻으로 함께 모여야 할까요? 바로 복음전파가
아닐까요? 그 뜻이 퇴색되고 다른 목적들이 들어오면 가장 중요한
뜻이 사라져버려 함께 하려는 힘이 약화됩니다. 함께 모여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 나오지 못하는 이를 힘을 합쳐서 그분께 데려
오려는 이유여야 합니다. 결국 모임이 잘 되게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우리 신앙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가 복음 선포이고 그 복음
선포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해야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인식이
뿌리깊이 박혀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이들의 장례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너는 가서
복음을 전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복음을 전하지 않는 이는
죽은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뜻을 위해 뭉쳐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펭귄이나 기러기들이 살기
위해서 뭉치는 것처럼 우리도 강하기 위해서 뭉치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뭉쳐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들도 오늘 복음의 4명처럼
예수님께 오지 못하는 이들을 데려올 수 있는 그런 살아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가볍고 거뜬한 영혼으로 탈바꿈할 기회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 마르 2,1-12
가볍고 거뜬한 영혼으로 탈바꿈할 기회
몸이 아무리 건강해도 돈병에 걸려 있으면 모든 균이 몸을 파괴합니다.
마음도 정신도 이웃관계도 친척 가족관계도 병 걸리기 십상입니다.
점점 육체가 쇠약해지면 인생은 불구되고 안 죽으려는 병까지 걸리지요.
인생마감이 이러면 풀포기만도 못할 터, 돈병 뉘우치고 되살아나야지요.
정신도 마음도 이웃관계도 모두 용서받아 되살리면 큰 도움될 겁니다.
가볍고 거뜬한 영혼으로 탈바꿈할 기회를 예수님께서 허락하실 거니까요.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마르코 2,10~11)”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원]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믿으면(마르 2, 1-12)
2014년 가해 1월17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마르 2,1-12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믿으면
찬미예수님 알렐루야~~
오늘 우리는 사무엘기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지금까지
판관이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막아내고
보호했었는데, 이제 이스라엘에게 강력한 왕을 뽑아 달라고 하느님께
떼를 쓰는 내용이 나옵니다.
왕정제도를 하게 되면 여러분이 이런저런 고통을 받게 될 것 이라고
사무엘이 설명을 해 주어도 왕이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왕정제도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왕정제도가 되면 왕이 있고 그 밑에 신하들이 있고, 또 조직들이
생기는데 천인대장 백인대장, 오십 인 대장 등 군사들이 생기고
관리들도 생기게 되어 조직적으로 나라를 통치하게 되는 장점도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세금을 내야 되고 자식을 군대에 보내야 되는
불편함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이익이 되는 점도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이 원하는 대로 그들에게 왕을
세워 주십니다. 그 왕이 하느님을 경외하고 받들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왕 일 때는 백성들이 기쁘고 행복 하지만. 그렇지 않고 왕이 사리사욕을
채우고 간신배들이 들끓는 왕정제도를 펴게 되면 백성들이 많은 고난과
고통을 당하고 힘든 일들을 당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대통령이나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만큼
나라를 잘 다스리는가가 대단히 중요하고, 또 교회에서도 사제나 주교나
많은 성직자들이 얼마만큼 신자를 사랑하고 하느님께로 이끌려고 노력
하는가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런 큰일을 맡은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서 가정을 봉헌하면서 이끌어 가려고 노력할 때 그 안에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깃들면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저를
비롯해서 모든 신자들이 각자 각자가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끌어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대로 살아가도록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려고 또 만지고 싶어서 병을 치유 받고 싶어서 예수님의
집 마당에 가득히 모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들것에 메고 왔습니다. 하지만
군중들에 막혀 예수님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비키라고 해도
자기가 더 먼저 왔다고 비켜주질 않습니다. 그랬을 때 미안하지만
안 되겠네 하고 포기할 수도 있지만. 이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에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가
누워있는 들것을 달아내려 보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이 사람들의 믿음과 노력이 대단한가! 믿음대로 노력하고 행동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많아도 포기 하지 않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구멍을 내어 들것을
예수님께 내려 보냈을 때 그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예수님도 굉장히 감동했을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 중풍병자 같은
병자들은 다 죄인 이었습니다. 죄가 있어서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죄인을 위해 수고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예수님도
감동을 받으시는 겁니다.
내가 화가라면 들것을 내려 보내고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감동어린 눈빛을 그리고 싶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자캐오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자캐오의 눈빛, 자캐오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빛 등 어느 쪽에서 봐도 예술적인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것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죄인을 위해 저렇게까지 수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감동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냉담자들을 위해서 9일기도를 바치고, 나름대로 희생하고,
간단하지만 선물을 꾸준히 사다주고 할 때 그 사람도 감동받지만
예수님께서 먼저 감동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래서 전지전능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감동을
받으시고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이 중풍병자는 얼마나 듣고 싶었던 이야기
였겠습니까! 사람들이 볼 때마다 저 사람은 무슨 죄가 얼마나 많기에,
아니면 엄마 아빠가 얼마나 죄가 많기에 저렇게 중풍병에 걸렸나
하는 소리를 들을 때 마다 죄책감이 얼마나 크게 느껴졌겠습니까?
자기 스스로도 나는 죄인 중에 죄인 나 때문에 우리 엄마 아빠가 기도
못 펴시고 늘 죄인처럼 살아가는 모습들을 생각 할 때마다.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워했겠는가?
그런 사람에게 예수라는 분이 수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능력
있으신 그 분이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을 해 줄 때 이 사람이
얼마나 감동을 받고 기쁘고 행복했겠는가!
이미 치유되기 이전에 이 사람은 예수님의 한 말씀으로 인해 형언할
수 없는 그런 기쁨을 누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무도 이 사람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전지전능하신 바로 그
분이 그 말을 전했을 때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겠는가!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난 잘
모르지만 당신을 정말로 사랑합니다. 내 온 마음으로 당신을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사람들을 받아들일 때 그 사람들은
감동받는 것입니다. 냉담자이건, 냉담자가 아니건, 남편이건,
자녀이건, 내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난 그대를 사랑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대할 때 감동받지 않을 사람이 없는 겁니다.
사실 제가 상담할 때는 그런 부분들을 찾아냅니다. 이 사람 영혼
안에 어떤 상처들이 있는가? 어떤 상처가 있길래 이 사람 얼굴이
꽃처럼 피지 못하고 아기를 못 갖는가? 하는 것들을 찾는 겁니다.
처음에는 두렵고 힘들어서 자기 속 이야기를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편안하게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았던 무슨 일을 했던 다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당신의 모든 죄가 다 용서될 수
있다는 믿음을, 신뢰를 주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조금씩 자기
마음을 열고, 자기 속 이야기까지 다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과거의 모든 죄로부터 해방이 되고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유로워지면 그 사람의 육체적인 병들도 치유가
되고 또 아기가 갖고 싶은 사람은 막혔던 영이 풀림으로써 아기도
갖게 되는 겁니다.
오늘도 수많은 태문이 열리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고구마가
주렁주렁 넝쿨째 캐지는 그런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은총을 주시려고 그러시는가! 미약하게나마 지난달에 왔다갔는데
아기가 생겼다는 이야기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합니다. 저는
주님께서 외치라는 대로 외칠 뿐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신앙이라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시고 그분이 내
안에서 일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권능에 대해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겁니다. 눈으로 바라보아도 그것을 믿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죄인이고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면,
죄인이기 때문에 중풍병에 걸렸었다면 다 나앗을 때 죄가 없어
진거와 마찬가지고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이 증명이 되는 겁니다.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걸어가거라 하니 걸어갑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이 증명이 된 겁니다. 예수님이 죄를
사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이 증명이 된 것입니다. 자기 눈으로 보아도
그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식대로 해석을 합니다.
시몬 형제가 저 앞에 앉아서 걷기를 하며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시몬 형제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는지
모릅니다. 자신 안에도 굉장히 큰 고통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뿐만이 아니라, 친구들과 만나서 놀고 싶고, 술도 마시고 싶고,
또 운동도 하고 싶고, 집안에 있는 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미사에 나오고, 일어서려고
노력하고 걸어 나와서 성체모시고 하는 것들이 많은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저렇게 힘든 사람도 노력하는데 나는
더 열심히 노력할 수 있다하는 겁니다.
시몬 형제가 저를 부러워한다고 하기에 그랬습니다. 형제님이 나보다
더 큰일을 하고 있습니다. 시몬의 그 용기가 시몬의 그 신앙이 시몬이
성체 앞에서 몸부림치면서 매일매일 기도하고 성체조배 하는 모습들이
사람들에게 더 큰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믿는다는 것, 신앙한다는 것은, 이 바리사이들처럼
내가 눈으로 보아도 그것을 어린이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면, 계속해서
여러 가지 의혹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고,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믿으면 나도 같이 은총 속에서 기쁨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네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었고, 믿음대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고 행동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믿음을 끝까지 열매가
맺도록 결실이 맺어지도록 최선을 다하는 은총을 이 미사 중에
간절히 구합시다. 아멘.
-희망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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