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4년 가해 1월26일 (백) 연중 제3주일(해외 원조 주일)
[수원] 물은 아래로 흐른다.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 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이사 8, 23ㄷ - 9,3
† 제2독서 : 1코린 1, 10 - 13. 17
† 복음 : + 마태 4, 12 - 23<또는 4,12-17>
한국 교회는 해마다 1월 마지막 주일을 ‘해외 원조 주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03년 추계 정기 총회에서 해외
원조 사업에 대한 올바른 홍보와 신자들의 의식 강화를 도모하고자
‘해외 원조 주일’을 정하였다. 오늘 특별 헌금은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등지의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원조에 쓰인다.
오늘 전례
▦ 오늘은 연중 제3주일입니다. 이 겨울에는 많은 사람이 가난과
추위와 고독으로 아파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십니다. 하늘 나라의 도래는
다름 아니라 구원 약속의 성취를 뜻합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
구원의 작은 도구가 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에게 빛을
전하는 노력을 하기로 다짐하며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합시다.
★ 이사야 예언자는 장차 태어날 임금을 예언하며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이 영화로울 것이라고 한다. 이제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이며 암흑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칠 것이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에게 당파로 분열하는 행태를
그만두라고 강하게 권고한다. 그리고 자신의 소명인 복음 선포는
말재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밝힌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대로 갈릴래아로 가시어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의 호숫가 카파르나움에 자리 잡으신다.
그리고 회개를 촉구하시며 하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가시어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시는 장면을 전해 줍니다. 그러면서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알려 줍니다. 제1독서에서 우리는
그 예언을 들었습니다. 이 차가운 계절에 이사야서의 이 대목을
묵상해 봅니다.
무거운 침묵과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겨울밤입니다. 한 줄 한 줄
눈으로 이 구절들을 따라갑니다. 이윽고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9,1)라는 말씀에 멈추어 섭니다. 왠지 울컥하다
싶더니 조금씩 반향이 울리기 시작합니다. 서서히 마음속 깊이
어디선가 빛이 돋아나는 것 같습니다. 밖은 어둡지만 이미 새벽이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사야서에서 나오는 ‘빛’과 ‘어둠’은 인간 존재를 표현하고 움직이는
근본적인 표상입니다. 이런 근본적인 표상은 단순히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게 하는 도구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체로서 삶의 의미와
방향을 얻고 새롭게 해 주기도 합니다.
한 철학자가 빛과 어둠의 표상에 대해 묵상한 내용이, 이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가져다줄 감동을 이해하는 데 좋을 것 같습니다.
“세계 안에서 서로 겨루고 있는 대립적인 것들이 불가항력적으로
자기 자신 너머를 가리킨다. 세계가 가진 색깔과 빛들의 수많은
변화 형태들로부터 우리 안에는 ‘빛’이라는 표상이 생겨난다. 이
표상 안에서 우리는 비춤, 덮임, 밝힘, 타오름 등을 알아차린다.
이 표상 안에서 우리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게 된다.
‘어둠’의 표상에서 우리는 신비가 있고, 방황이 있고,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현존하시는 하느님』에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예언의 성취는 우리가 우리의 어두운
곳을 밝히는 빛을 간절히 기다릴 때, ‘지금 여기에서’ 구원의
체험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내가 무슨 죽을죄를 지었다고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월26일 연중 제3주일(해외 원조 주일)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셨다.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 마태오 4,12-23<또는 4,12-17>
내가 무슨 죽을죄를 지었다고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한결
같으시고 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큽니다.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을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의 끝부분을 보면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회개’는 삶 전체를 포괄하여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뿐 아니라 마음에 품은 의도까지도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회개라는 말을 들으면 달갑지 않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누가 ‘회개하십시오’하면 ‘내가 무슨 죽을죄를
지었다고 나에게 그런 소리를 하느냐!’며 기분 나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회개라는 것은 삶의
태도를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찾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기분이 나쁩니까? 그것은 지금 내가
‘잘 살고 있다’는 교만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마음을 내려 놓고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사실, ‘주님의
뜻대로’를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대로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거듭거듭 어제보다는 더 나은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죽는
순간까지 새로 나야 합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살아왔거나
잊고 살아온 삶에서 복음이 말해주는 삶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삶의 중심으로 모시며 살 때 회개는
은총의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새로워지는 삶이 회개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삶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회개하라’는 말을 사랑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
(2베드3,9) 그리고 마침내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고
(2티모,2,25)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2코린 7,10)
어떤 젊은이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다가 도둑질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먹고살자니 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도 이해해
주실 것’이라고 합리화 시키면서 어느 날 밤 몰래 수도원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자루에 담아가지고
나왔습니다. 집에 와서 자루에 담긴 것을 하나하나 보니
별로 돈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재수 더럽게 없다’고
투덜거리며 하나씩 팽개치다가 금장으로 되어있는 자그마한
책을 보게 되었는데 성경이었습니다. 성경이 무엇입니까?
하느님 말씀을 묶어놓은 책입니다. 젊은이는 ‘그래 이게
믿는 이들이 말하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거냐? 한번 무슨
얘기가 기록되었는지 읽어나 보자!’ 하고 펼쳐서 눈에
들어오는 대로 읽었습니다. 읽다가 기겁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말씀은 “도둑질하던 사람은 더 이상 도둑질을 하지 말고,
자기 손으로 애써 좋은 일을 하여 곤궁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에페4,28). 라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말씀은 살아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도둑질을 그만두게
되었답니다. 도둑이 회개 했다는 것은 바로 도둑질을
그만두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십자가 옆의 두 도둑 중
하나는 구원되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회개하였습니다.
여러분도 희망을 가지고 서둘러 회개한다면 반드시 구원의
은총을 입을 것입니다”(“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23,42)
성경에서 회개했던 사람들의 실례를 잠깐 보겠습니다.
아론은 미르암이 악성 피부병에 걸린 모습을 보며 모세에게
“아, 나의 주인님, 우리가 어리석게 행동하여 저지른 죄의
값을 우리에게 지우지 마십시오. 미르암을, 살이 반은
뭉그러진 채 모태에서 죽어 나온 아이처럼 저렇게 놓아두지
마십시오.”(민수 12,10-12) 하고 애원합니다.
다윗은 나탄이 꾸짖자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오.”
(2신명12.13)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욥은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욥기42,1-6) 라고 말합니다.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저는 감사 기도와 함께 당신께
희생제물을 바치고 제가 서원한 것을 지키렵니다. 구원은
당신의 것입니다.”(요나 2,10) 하고 회개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닭이 두번째 울 때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울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14,72)
세리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둘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18,13)
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자기를 죄인 중에 “첫째가는 죄인”(1티모1,16)으로
고백합니다. 이밖에도 방탕했던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향해
발길을 돌렸고(루카15,21) 세리 자캐오는 자기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남을 속여 먹인 것에 대해 네 갑절로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성경의 인물들은 많은 허물을 안고 사는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 줍니다. 하느님 없이는 못사는 사람으로,
그분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생을 깨닫고
새 삶을 살았던 그들을 바라보며 우리도 매일 매 순간
거듭나는 새로운 삶에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죄를 짓지 않고서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보다는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뉘우친 죄인을 하느님께서는 더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의인인체
뽐내는 죄인이 있고, 죄인임을 자복하는 의인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여정에서 마음 안에 무엇을 담고 사는가는
아주 중요합니다. 사람은 큰 수술을 할 때 마취에서
깨어나면서 마음속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수술 받으러 마취실에 들어가면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과연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프다고 소리 지르고,
욕을 해대는 사람들의 음성 을 들으며 저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 말했지만 차마 첫 반응이 어떠했는지는
물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내돈, 하고 어떤이는 아내의 이름을,
남편을 자식을 부르며…어떤 사람은 숨겨놓은 애인의
이름을 부르기도 한데요. 마음 안에 주님을 담고 산 사람은
결정적으로 주님을 부릅니다.
우리 본당 임가밀로 신부님께서는 ‘성모님 저의 영혼을
구원하소서.’를 반복하다가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저에게 영세를 준 신부님이신데 이라우렌시오 신부님은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면서 임종하셨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 하십시오.”
하셨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서로 용서하십시오.” 잘 아시는 이태석 신부님께서는
“걱정하지마, 다 잘 될 거야!” 소화데레사 성녀는 “그 어느날
아침 내가 죽어 있는 것을 보아도 마음 아파하지 마십시오.
그건 하느님께서 나른 데려가신 것뿐입니다. 하느님께서
필요하셔서 불러간 줄로만 생각하십시오.”하고 죽음을
준비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무엇을 품고 살아야 하는 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음 두는 곳으로 몸은 따라갑니다. 마음을 산에 두면
산으로 가고, 바다에 두면 바다로 갑니다. 마음을 좋은
곳에 두면, 좋은 곳으로 몸이 가고, 마음을 나쁜 곳에 두면
나쁜 곳으로 갑니다. 몸은 마음의 그림자입니다. 품고 사는
마음이 밖으로 표현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하나요? 텔레비전, 드라마, ....
성경공부, 성체조배...주님께서 기뻐하실 곳에 마음을 두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회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3,8).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
그렇다면 회개의 삶은 생활태도를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꾸어야 할 생활태도를 한 번 찾아보시면 좋겠습니다.
타성에 젖은 나의 삶을 바꿔야 합니다. 주일이니까 성당
나오고, 교무금 내라니까 내고, 금육재를 지키라하니까
지키고.. 그저 의무감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신심단체가입도 하고 성체조배, 평일미사
참례 등 능동적인 삶이 필요합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귀를 바꿔야 합니다. 쓴게 약이 된다고
합니다. 그저 좋은 얘기만 듣기를 원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것은 피하는 약삭빠름은 참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강론을 들으면서도 내 비위에 거슬리지 않는 이야기만 해주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주님의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입니다. 말만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림의 떡’입니다. 세상의 풍조와 타협하며
‘이정도쯤이야 괜찮겠지’ '남들도 다 하는 것인데...나만 고상하게
굴 것 없다.'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거부하고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피아노를 연주하려면 ‘피아노 연주가 끝난 다음에 조율하는
것이 아니고 중요한 연주 앞에서 조율을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고 생활한 다음에 후회하고
회개하지 말고, 생활하기 전에 우리 마음을 조율해야 합니다.
믿음이 실천 없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야고2,17). 따라서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마음에 들고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 늘 생각해야 하고 또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회개한다는 것은 결코 일회적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죽음에 이르기 까지 지속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내를 대하는 태도가, 남편을 대하는 태도가, 자식을 대하는
태도가, 부모를 대하는 태도가,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과연 주님의
마음에 드실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 있다면 단호히 버려야
합니다. 잘못된 습관이 있다면 그물을 버리듯, 아버지와 삯꾼과
관계를 끊어버리듯 확실하게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4,23-24).
부디 하느님을 품고 사는 삶,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생활을 통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매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회개의 삶’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저는 지금 몸 컨디션이 아주 안 좋습니다. 어젯밤 밤새 끙끙 앓았지요.
지난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밤마다 모임이 있었는데, 무리를 한
것인지 드디어 어제 몸살감기가 제게 찾아와서 좀 쉬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새벽 묵상 글도 이렇게 늦게 올리게 되네요.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여러분도 건강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몸이 아프니 그렇게 잘 일어나던 새벽 시간에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묵상을 해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즉, 잘 하던 것도 아프면 잘 할 수가 없게 되네요.
바로 이렇게 아플 때 푹 쉬어야 하며 또 심할 때에는 약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 어떨까요? 쉬어야
하는데 계속해서 일을 하고, 약을 먹지 않고 그냥 온 몸으로 버티면
어떻겠습니까?
시간이 지나서 저절로 나을 수도 있겠지만, 쉬지 않고 또 약도 먹지
않으면 병이 더 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육체의 병을 보면서
우리 마음의 병은 또 어떨까 싶습니다. 마음의 병이 더 치료하기가
힘들며, 이 마음의 병이 육체의 병까지 가져오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종종 볼 수 있지요. 따라서 이 마음의 병 역시 치료를 잘
받아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어하는 마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영적 쉼의 시간이 필요하며 또 주님의 말씀이라는 만병통치약을
먹으면서 힘든 병을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치료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물론 육체의 병을 고쳐주시기도 했지만, 이 역시 마음의 병을 깨끗이
치료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은 모두 당신에게 오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문제는 병의 치료를 위해 잘 쉬거나 병원을 찾아가야 하는 것처럼,
마음의 병 역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회개’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자신을 낮출 수 있는 회개를 통해 진정한 구원의 약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가득 담겨 있는 주님의 치료약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직접 바라볼 수 있는 진정한 회개가 먼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고쳐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 사랑을 기억하면서,
먼저 필요한 나의 회개를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그때 모든 병에서
벗어나 주님과 함께 참 행복의 기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희망에게는 아름다운 두 딸이 있다. 분노와 용기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 것에 대한 분노, 그렇게 되어야 마땅한 방식으로 그
모든 것을 바꾸는 용기(아우구스티누스).
어제 예비신학생 면접이 있었습니다. 사제의 꿈을 꾸는 이
학생들의 꿈이 변하지 않기를...
익명소설
‘해리포터’ 작가 조앤 롤링이 쓴 추리 소설 ‘뻐꾸기의 외침’은 저자를
민간 안보 전문가 ‘로버트 갤브레이스’로 내걸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책은 두 달 동안 겨우 1,500부 팔렸답니다. 그런데 얼마 뒤에 실제
작가가 롤링임이 밝혀진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밝혀지자마자
단번에 책이 품절되었다고 하네요.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선택하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임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요? 이 세상 삶 어디에도 주님의 사랑이 없는 곳이 없는데,
우리들은 주님의 사랑을 보려하지 않고 다른 것, 즉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만 바라보려 하니 정작 삶 안에서 주님을 선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의 사랑을 선택하는데 최선을 다해보십시오. 얼마나
그 사랑이 큰 것인지, 얼마나 그 사랑이 감사한지를 깨닫도록
하십시오. 그러한 깨달음 안에서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참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어둠이 빛을 막을수는 없지만...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어둠이 빛을 막을 수는 없지만, 빛을 가리고 어둠을 만들
수는 있다는 것을 경게해야 합니다.'
2014년 가해 1월26일 연중 제3주일 복음묵상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마태오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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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힘에 짓눌린 사람들은 늘 빛을 찾기 마련이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답은 같다. 이천 년 전 예수님을
만난 지친 영혼들도 그랬고, 오늘을 사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빛을 빛으로서 알아보고 이해하고 따른 이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다. 역시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진정 삶의 빛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어둠이 싫다 하면서 어둠에 기대려 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마음만 먹으면 가릴 수 있는 것이 빛이다.
언제든지 어둠 속으로 숨을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아무리 큰 빛이라도, 아무리 큰 하느님의 사랑이라도 우리가
거부하면 그만이다.
오늘은 단 한가지만 생각했으면 한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의 삶이 너무 슬퍼진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어둠을 없앨 수는 없다.
어디든지 있고, 내 안에도 있다.
중요한 것은 빛을 향한 마음이고 노력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셔서 본격적으로
복음선포를 시작하신다. 그리고 그 기쁜 소식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회개하라 하신다.
회개는 결국 어둠의 자리에서 빛의 자리로 옮기라는 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끝도 없이 길고 긴 터널을 지나면서도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월26일 연중 제3주일(해외 원조 주일)
마태4,12-23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끝도 없이 길고 긴 터널을 지나면서도>
끝도 없이 길고 긴 터널 같은 막막한 삶 앞에 망연자실하고
있는 이웃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분들의
하소연 앞에 저 역시 한없는 나락으로 빠져 드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나만큼 불행한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아무리 꼬인다할지라도 이렇게 꼬인 인생이 있을까요?”
“이런 상황에서 사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힘겹기만 한 그들의 인생길, 축 처진 뒷모습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습니다. 기껏 술 한 잔 사드리며 위로해 드리지만
무슨 도움이나 되겠습니까?
따뜻한 차 한 잔 대접해드리며 격려해드리지만 너무도
미미합니다. 결국 내세울 분은 예수님뿐이시더군요.
“형제님, 힘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형제님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렇게 힘겨워하고 계시는 형제님을
위한 빛이 되어 오셨습니다.
어둠이 깊다면 여명이 멀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고통이 극심하다면 위로의 손길이 다가오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슬픔이 가장 깊다면 하느님께서 형제님 생애 가장 아름답고
찬연한 무지개를 준비하고 계신다는 표시입니다.
형제님 인생길이 계속 활짝 피기만 한다면,
형제님 인생길에 계속해서 햇빛만 비춘다면 형제님 인생은
머지않아 메마른 사막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아름다운 무지개가 활짝 떠오르려면 태양뿐만 아니라 먹구름도
동시에 필요합니다.
형제님, 우리의 인생에 어둠과 고통은 선택과목이 아니라
필수과목입니다.
이 어둠과 고통, 기꺼이 맞서 나가다보면 언젠가 형제님
인생길에 다시 한 번 찬란한 예수님의 빛이 비쳐질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흥미진진하게 살아가려면, 자신에게 주어진 은총의
선물인 삶을 보다 여유 있게 관조하려면 이런 의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식의 전환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랍니다.
의식의 전환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지속적인 회개입니다.
순간순간 빛이신 예수님께로 돌아서는 회심의 노력입니다.
회개야말로 천국의 열쇠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3주일
2014년 가해 1월26일 해외 원조주일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셨다.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 마태 4,12-23<또는 4,12-17>
2001년부터 신학생들을 위한 30일 피정을 함께 했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교회에 큰 보물을 선물하였습니다. 그것은
‘영신수련’입니다. 영신수련 23항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믿어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것들은 취할 것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은 버릴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약함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단명 하는 것을 택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 원리와 기초는 마치 만능키와 같습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것을 막는 모든 장애물을 넘어설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피정을 하면서 가장 보람되고 기쁜 것은 30일 동안에 변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기도 시간을 힘들어하는 학생들이 조금씩 기도의 맛을
느끼고,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고 매번 묵상 때마다 성서의
말씀에서 전해지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하면서 때로는 감사의 기도를, 때로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그런 학생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하나의
은총입니다.
오늘은 2014년 1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설레임과 기대로
시작한 1월도 이렇게 훌쩍 가버리는 것을 보면 “흐르는
시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막을
수 없는 시간이라면 그 시간 시간 동안 의미 있는 삶,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최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가장 의미 있는 시간, 가장 의미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다가 왔음을 알리는 일, 회개하고 그 복음을
믿는 일, 이제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면서 백성들 가운데서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고쳐주는 일” 바로 이 일이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시간을 가장 의미 있게 보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손가락은 10개입니다. 이 10개의 손가락이 모여서 양손이
됩니다. 손가락 하나하나 만으로는 물건을 만들기도 힘들고,
글을 쓰기도 힘들고, 밥을 먹기도 힘이 듭니다. 10개의 손가락이
모두 하나가 되어서 손을 이룰 때 우리의 손은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 내기도하고, 농사를 지을 수도 있고, 청소를 할 수도
있고, 우리의 몸을 위험에서 막을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믿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를 이웃에게
전하고, 소외된 사람들, 아픈 사람들,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것도 우리 각자의 힘만으로는 힘들고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의견을 통일시켜 갈라지지 말고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굳게 단합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사랑의
다리 친교의 다리 봉사의 다리가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형제들 간에 사랑의 다리, 친교의 다리,
봉사의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본당의 사무실은 본당신부님과
신자들 사이에 중요한 다리의 역할을 합니다. 본당의 각 구역
반장님들은 신자들 사이에 다리가 되고, 본당과 본당 신자들
사이에 다리가 됩니다. 본당 사목 협의회는 본당의 각 단체들
간에 다리가 되고 본당 신부님과 신자들 사이에 다리가 됩니다.
본당 레지오의 선교 활동은 비신자들과 본당 사이에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렇게 많은 본당의
단체들과 단체들이 서로에게 다리를 놓고 그 안에서 사랑을
친교를 봉사를 나눈다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잘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겸손되이 뉘우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단체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합심하고 일치하여 같은
목소리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리고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서로를 도와줄 때 우리는
커다란 힘으로 복음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물은 아래로 흐른다
2014년 가해 1월26일 연중 제3주일(해외 원조 주일)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셨다.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복음 : 마태오 4,12-23<또는 4,12-17>
< 물은 아래로 흐른다 >
요즘 매우 흥행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디즈니 에니메이션
‘겨울왕국’입니다. 참 사랑을 만나야만 고립되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손에 닿게 되는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힘(혹은 저주)을 가지고
있는 ‘엘사’는 동생 ‘안나’와 즐겁게 노는 중에 그 힘에 의해
‘안나’를 다치게 만듭니다. 언니 엘사는 거기에 대한 트라우마와
점점 자랄수록 주체할 수 없는 힘에 의해 독방을 쓰며 세상과의
단절을 이루게 됩니다. 게다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부모님들까지
한 번에 죽게 되는 불상사도 생깁니다. 시간은 계속 흘러 성인이
되어 대관식을 거행하게 되고 갇혀 있던 엘사는 두려움과 함께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이 때 동생 안나는 한스를 만나 하루
만에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혼문제에 대해 언니 엘사와 다투다가
엘사가 화를 내며 자신의 주위를 얼려버리는 바람에 언니의
능력(저주)이 만천하에 공개되고 맙니다. 결국 엘사는 북쪽의
산으로 도망쳐서 자신만의 겨울왕국을 세우게 되고 안나는
언니를 찾으러 모험을 떠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도 혹은 우리 주위에도 혼자만의 왕국을 만들어놓고 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치유되지 않는 상처, 남을
아프게 하는 그 상처가 있을 때 그 두려움으로 사람은 자기만의
성을 쌓게 됩니다. 사실 그런 트라우마들은 남들이 별 관심도
없어하는 것이지만 자기에게는 세상 무엇보다도 들키기 두려운
상처인 것입니다. 물이 얼어버리면 날카로워지고 딱딱해져서
그것을 담을 아주 넓은 용기가 아니면 보통 사람의 마음 안에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외톨이가 되는 것입니다. 또 아무도 받아들여주지
않으니 자신만의 성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님이 불구거나 가난하여 남들에게 보이기
두려워하는 것이라든지, 왕따를 당했던 기억이라든지, 성추행
등을 당했던 기억들은 세상에서 자신의 차가운 성을 쌓아 자신을
그 안에 가두게 만듭니다. 작가는 이것을 엘사가 도망쳐 세운
얼음성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차가움은 누군가의 뜨거움으로,
이 어둠은 누군가의 빛으로써만 치료가 가능해집니다. 마음이
얼어버렸다면 그것을 녹일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따뜻함입니다.
줄거리를 이어가볼까요? ‘엘사’를 찾아 헤매는 ‘안나’ 앞에
‘크리스토프’와 ‘올라프’를 만나 함께 모험을 떠납니다. 천신만고
끝에 언니 ‘엘사’를 만나게 되지만 언니는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그 와중에 또 한 번 언니의 차가움에 ‘안나’의 심장이
다치게 됩니다. 치료를 위해 트롤을 만나지만 이번엔 심장이
얼어붙어 고칠 수가 없으며 진정한 사랑으로만 고칠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 한 눈에 반해 결혼하려
했던 ‘한스’를 만나러 가지만 ‘한스’는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한스는 소유하려 한 것이지 사랑을
위해 자신의 것을 잃을 생각은 꿈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갇혀있던 ‘안나’는 ‘크리스토프’와 만나기 위해 탈출하고 한스에
의해 붙잡혀 돌아오게 된 엘사 역시 탈출하여 두 자매가 만나게
되면서 진정한 사랑(가족애)으로 인하여 안나는 병을 고칠 수
있게 되고, 또 이런 사랑을 통해 힘의 조절이 가능해진 엘사는
자신의 왕국에서 나쁜이들을 몰아내고 다시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차갑게 얼어버렸던 엘사는 자신을 녹여줄 누군가의 따듯함이
필요했고, 그녀에게 다가갔다가 자신의 마음도 얼어버린 동생
안나도 누군가의 사랑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 차가움을 녹여줄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뜨거움입니다.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라디오에서 들은 사연입니다. 어떤 냉병을 심하게 앓고 있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엘사와 마찬가지로 아주 더운
여름에도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난로를 틀어놓고 방에
있어도 추워서 못 견디는 병에 걸렸습니다. 병원에서는 그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병은 마음의 병이
몸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병을 고쳐준 것은 그녀의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은 그녀와 함께 여름에도 그 더운 방에서
함께 했습니다. 땀띠가 온 몸에 나도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남편은 유일한 따뜻함이었고 유일한
빛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녀는 누구의 사랑도
받아보지 못한 얼음공주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고아였습니다. 그것이 부끄러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녀의 남편이 그녀의
마음을 사랑으로 녹여준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남편은
자신의 심장이 얼어버리는 고통을 참아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녀가 기적적으로 병이 나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복음전파를 시작하십니다. 그런데
복음전파를 밝은 곳에서 시작하셨을까요, 어두운 곳에서
시작하셨을까요? 추운 곳에서 시작하셨을까요, 따듯한 곳부터
시작하셨을까요?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예수님은 가장 어둡고 가장 춥고 가장 외지고 가장 가난한
이들로부터 복음전파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따듯함이
가장 필요한 곳은 가장 추운 곳이고 빛이 가장 필요한 곳은
어둠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복음전파와 사랑은 똑같은
말입니다. 나를 태워 어둠을 몰아내고, 나의 따듯함을 잃으면서
차가움을 녹여주는 것이 사랑이지만 동시에 선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희생하여 당신 살과 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 곧 사랑이며 선교인 것입니다. 우리 어둡고
추운 땅에 그분의 뜨거운 불이 들어오셔 우리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어제 어떤 수녀님으로부터 들은 쥐 실험 이야기입니다. 쥐 두
마리를 빛이 들어오지 않는 상자 속에 넣어두었다고 합니다.
한 상자는 완전히 빛을 차단하였고 또 한 상자에는 아주 작은
빛만 들어올 수 있도록 바늘구멍을 내 두었습니다. 둘 다 음식이
없었지만 두 쥐가 산 기간은 두 배 차이가 났다고 합니다. 어둠
속에 있던 쥐는 일 주일을 살았고, 아주 작은 빛이라도 볼 수
있었던 쥐는 이 주일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바늘구멍으로 새어 들어오는 아주 작은 빛은 거의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둠으로만 휘감긴 누구에게는 생명을
이어갈 유일한 희망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둠으로
가지 않는 것은 참 빛이 아닐 것입니다. 태양 밑에 촛불이 있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둠으로 가야 참 빛이고, 추운 곳으로
가야 참 따듯함이고, 가난한 곳으로 가야 참 부유함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복음선포를 시작하는 날인 동시에 해외원조
주일입니다. 우리가 외식 한 끼 할 돈이면 다른 곳에서는 여러 명의
아이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저도 부끄러운 면이 많지만 나의 것이
참으로 필요한 곳으로 흐르지 않는다면 나는 온전한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산다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물질이든
기도든 우리 자신들이든 말입니다.
물은 아래로 흐릅니다. 물은 은총이고 사랑이고 선교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돌아가시고 결국 사흘 동안
저승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사랑이시기 때문이고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느 쪽으로 흐르려고 합니까? 가난하고
어두운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에게 이득이 될 위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고 있습니까? 아래로 흐르지 않는 것은 물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어둡고 춥고 가난한 곳으로 흐르지 않아도
사랑이 아닙니다. 이렇게 내가 빛이고 따듯함이고 부유함이고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라는 것은 나의 삶이 어디를 향해 흐르고
있는가로 결정되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세상살이 뒤에 하늘나라살이가 이어진다
2014년 가해 1월26일 연중 제3주일(해외 원조 주일)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셨다.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 마태 4,12-23<또는 4,12-17>
세상살이 뒤에 하늘나라살이가 이어진다
너, 까불면 죽어! 하며 협박하는 건 안 까불면 살려 주겠다는 말이겠지요.
애들도 이러면서 마음을 고치라는 걸 강하게 배우며 배워주며 커갑니다.
사람들은 계속 뭔가를 바꾸기를 강요하고 방향전환해가며 산다는 거지요.
공부 시험 입사 사랑 장사 재정 거의 모든 분야가 세상살이 문제들입니다.
세상살이 뒤에 하늘나라살이가 이어진다는 걸 모르면 시력 나쁜 거지요.
하늘나라살이까지 보시는 시력으로 예수님은 회개하라고 강조하신
겁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마태오 4,17)”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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