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기 예수님 봉헌 -
☆ 2014년 가해 2월2일 (백) 주님 봉헌 축일(봉헌 생할릐 날)
[청주] 기다림의 기쁨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말라 3, 1 - 4
† 제2독서 : 히브 2, 14 - 18
† 복음 : 루카 2, 22 - 40(또는 2,22-32)
교회는 성탄 다음 40일째 되는 날, 곧 2월 2일을 예수 성탄과 주님
공현을 마감하는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낸다. 이 축일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한다. 예루살렘에서는 386년부터 이 축일을 지냈으며,
450년에는 초 봉헌 행렬이 여기에 덧붙여졌다. 6세기에는 시리아에서 이
축일이 거행되었고, 로마는 7세기 후반에 이를 받아들였다. 8세기 중반에는
‘성모 취결례(정화) 축일’로 부르기도 하였는데, 18세기 프랑스 전례에서
‘주님 봉헌’으로 바뀌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날을 ‘봉헌 생활의 날’로 제정하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삼았다. 이에 따라 교황청 수도회성은
해마다 맞이하는 이 봉헌 생활의 날에 모든 신자가 수도 성소를 위해 특별히
기도하고, 봉헌 생활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권고한다.
오늘 전례
▦ 우리는 이월의 첫 주일을 주님 봉헌 축일 미사로 봉헌합니다. 요셉
성인과 성모님께서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시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역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도록 합시다. 우리 각자에 대한 주님의 부르심에 감사드리고,
또한 교회 안에서 각별한 봉헌의 삶을 선택한 수도자들을 기억하며 그들이
자신의 소명에 더욱 충실할 수 있도록 이 미사 중에 함께 기도해야겠습니다.
★ 말라키 예언자는 주님께서 당신의 사자를 보내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는 주님의 길을 닦을 것이며, 레위의 자손들을 정화하여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지난날처럼 주님의 마음에 들게 할 것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과 깊은 연대감을 지니고 계셨다. 그분께서는
죽음의 공포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는 분이시다. 또한 대사제가
되시어 당신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는 분으로,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 있다(제2독서).
★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려가 성전에서 주님께
봉헌한다. 시메온 예언자는 아이를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한 뒤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 아기가 많은 사람에게 반대받는 표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젊은이들이 즐겨 부르는 『가톨릭 성가』 469번 ‘사랑하면 알리라’라는
젠 성가의 가사는 이러합니다.
“언제나 나는 물었다. 언제나 주께 물었다./
세상은 사랑 찾는데 왜 고통이 있냐고?/
오직 한마디 내게 주었네, 마치 물음에 답하듯이./
사랑하라 알고 싶거든 빛이 솟음을 너 보리라./
사랑하라 말해 주네. 사랑을 하면 알리라./
사랑하라, 슬픔 가고 기쁨을 찾으리.”
오늘 주님 봉헌 축일에 교회는 ‘봉헌 생활의 날’을 지내며 주님께 봉헌된
삶을 선택한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들은 위
성가 가사처럼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찾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십자가의
주님께 세상의 모순과 고통의 무게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정직하고
강렬하게 물었던 이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논리와 복음의 가르침
사이의 적당한 타협에 만족할 수 없는, 뜨거운 마음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진리에 대한 추구는 사랑의 선택 안에서만 그 참된 길을
발견하는 것임을 깨닫고 그 길을 걷기로 결심한 이들입니다.
독일에 머물렀던 시절, 오랜 숙고 끝에 봉헌의 삶을 선택한 한 분과 교분을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욕심과 바람이 아니라 오직 정직하게
‘진리와 진실을 찾는 이’가 되기를 바라던 성실한 젊은이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공동체와 이웃을 위한 사랑의 삶에 그토록 애타게
찾던 진리가 있음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많은 수도자가 자신의 서원을
더욱 새롭게 다지는 이 복된 날, 문득 자신의 응답의 결실에 감사하고
있을 그가 떠올랐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봉헌 생활의 길은 수도자들만이 아니라 조금은
다른 방식이지만 우리 모두에게도 주어져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인생살이에서 실천할 사랑의 소명을 주님에게서 부여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기다림의 기쁨 | 반신부의 복음 묵상
주님 봉헌 축일
<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
복음 : 루카 2,22-40
기다림의 기쁨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길 빕니다.
올 한해도 주님의 축복을 충만히 받으시길 빕니다. 오늘은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아기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모세의 율법은“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 되셨고 만국의 빛이
되셨습니다. 봉헌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쓰임받기를 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봉헌되었듯이 우리도 매순간 자신을
주님께 봉헌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제단의 초를 바라보며 자신을 불태워 빛을
밝혀야 하는 사랑의 응답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 사랑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를 위해 모두를 내어주신 그분처럼 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초는 자신을 녹여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희생을 통하여, 더 큰 사랑을 통하여 세상은 새롭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시메온 이라는 사람은 의롭고 독실한 사람으로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알림을 받았고,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 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메시아, 구세주가 장차 오리라고 선언하였지만 시메온은 메시아를
직접 보았습니다. 이사야서를 보면“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 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52,10)고 기록하고 있는데 바로 이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였고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았으며
마침내 주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시메온은 성령께 순명하였기에 성령께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고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시메온은 기다림의 열매 앞에서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안히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루카2,29-32).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은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만났으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옛말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희망하는 대로
살아감으로써‘죽어도 여한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백년을 살든 천년을
살든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깊이 알아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신앙의
목적도 바로 구원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권력과 부가 아니라 주님을 차지해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열망이
있는 만큼 하느님의 뜻에 맞갖은 삶으로 기다림을 간직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에게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요, 사람이 지킬 것은
지존하신 분에게 서원한 것을 갚는 일”(시편50,14).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봉헌은 우리에게도 우리의 봉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봉헌은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의롭고 독실하게 살아온
시메온은 성령과 함께 기다림의 삶을 살아왔고 그 안에서 위로와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내 삶의 자리가 바로 천상과 연결 되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천상을 갈망하는 만큼 ‘지금 이 순간’을
잘 살아야 합니다.‘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마지막기회일수도 있고,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가 구세주가 찾아오는 자리이며, 그 자리를 가꾸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지금 이 순간을 주님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선언하였습니다.“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12,1). “예수님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제물을
바칩시다. 그것은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히브13,15).
온 마음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8,12) 그리고
우리에게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자신의 거룩한 삶을
봉헌함으로써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빛이 되는 데
있어서 히브리서의 말씀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히브2,17). 주님께서 우리의 눈높이를 맞추어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사람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만민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구원을 우리가 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 듯이 하십시오! 또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있는 듯이 기다리십시오”(성 이냐시오). 혹 “우리가
그분께 드릴 것이 정령 아무 것도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것 자체를
드리기로 합시다”(마더 데레사). 내 일을 하지 말고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기다림이든지 그 간절한 기다림이 하느님 마음에 들어 기쁨이 되고
축복이 되길 바랍니다. 기다림의 열매를 가지고 주님을 증거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려고 기다리시며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려고 일어서신다. 주님은 공정의 하느님이시다. 행복하여라,
그분을 기다리는 이들 모두!”(이사30,18)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주님을 위해서라면 나의 모든 것을 봉헌할 수 있는
어제 저녁 청소년 담당 신부님으로부터 지난 1월 27일에 있었던 청소년들의
축제인 바다의 별 축제에 대한 이야기 하나를 듣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문제를 50번까지 모두 맞춘 사람이 마지막에 골든벨을 울릴 수 있는 ‘성경
골든벨’이라는 축제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우선 마지막까지
골든벨을 울린 친구는 없었다고 합니다. 단지 한 아이가 아깝게도 마지막
50번 문제를 풀지 못해서 골든벨을 울리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
아이에게 마지막 문제를 풀기 전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하네요.
“마지막 문제까지 다 맞춰서 골든벨을 울리게 되면 상금을 받게 되는데,
받은 상금으로 무엇을 하고 싶어요?”
중학교 1학년 학생이랍니다. 어린 학생이 가지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지만 이 학생의 대답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었지요.
“받은 상금은 모두 우리 본당의 성전 건축금으로 봉헌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얻고 나서야 여유가 있을 때 주님께
봉헌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 코가 석자인데 누구를 도와 주냐?’고
말하면서 자신이 항상 우선되는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워 나간다는 것은 한도 끝도 없지요.
욕심이란 마치 깨진 독과 같아서 절대로 나를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소국장으로 있으면서 감동적인 사람들을 종종 뵙게 됩니다. 시장에서
행상을 하시기에 그리 넉넉하지도 않은 살림을 가지고 있지만, 벌써 몇
차례나 꽤 많은 돈을 신학생을 위해 써 달라고 보내주신 분이 계십니다.
또 교통사고로 받은 합의금을 가지고 오신 어떤 생활보호대상자 할머니도
계십니다. 가난해서 이제까지 봉헌을 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뜻밖의 돈이
생겼다면서 신학생들을 위해 쓰고 싶다는 것이었지요. 이밖에도 너무 많은
분들이 자신도 부족하면서 아낌없는 봉헌을 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이렇게 자신에게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을 봉헌하는 이런 분들을 보고
주님께서는 얼마나 기쁘실까요? 문제는 남은 그렇게 봉헌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내 자신은 그러한 봉헌과는 거리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정결례를 마치고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 그 자체로 온전한 봉헌이지요.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스스로 선택하신
당신의 큰 봉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큰 봉헌으로 인해 우리 모두의
구원이 보장되는 커다란 선물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 주님의 봉헌을 늘 생각하면서, 주님을 위해서라면 나의
모든 것을 봉헌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늘 가져야 합니다. 물론 세상의
관점으로는 손해를 보는 것 같고, 바보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가장 기뻐하실 행동이고, 이런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구원의 길이 내 앞에 더욱 더 활짝 열려질
것입니다.
강하다는 것은, 약함을 아는 것. 약하다는 것은, 겁을 내는 것. 겁을
내는 것은, 소중한 것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소중한 것을 가졌다는
것은 결국 강하다는 것.
제10회를 맞이한 인천교구 바다의 별 청소년 축제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봉헌을...
어느 성당에서 미사를 마친 후 성당 입구에서 신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꼬마 아이가 제게 와서는 막대 사탕 하나를 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님, 이거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사탕이에요.”
많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하나를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먹기
싫어서 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미사를 해 준 신부님이라고 또 자기
마음에 든다고, 하나밖에 없는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막대 사탕을
제게 준 것이었지요.
문제는 제가 사탕을 전혀 먹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 음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사탕이나 초콜릿 같은 것들을 전혀 입에 대지도
않거든요. 따라서 누군가가 제게 사탕이나 초콜릿을 선물로 주면 그대로
다른 사람 줄 때가 참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 막대 사탕은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막대 사탕을 보면 그 아이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봉헌도 이렇지 않을까요? 우리가 무엇인가를 주님께 봉헌한다고
해서 주님한테 어떤 이득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따뜻한 마음을 기쁘게 받으실 뿐입니다.
봉헌은 돈의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사랑에서 나오는 봉헌이 가장 중요합니다.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봉헌된 삶이란...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참된 사랑을 위해 열정을 다 태워야 합니다. 그것이 봉헌입니다.'
2014년 가해 2월2일 주님 봉헌 축일 복음묵상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루카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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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헌된 삶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좁은 의미로는 사제나 수도자들의 삶을 두고 하는 말이지요.
하지만 넓은 의미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은 봉헌된 삶으로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봉헌된 삶이란 무엇일까요?
우선 봉헌(奉獻)이라는 말의 의미를 한 번 집고 넘어가보도록 하지요.
봉헌이란 누군가를 위해서, 혹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바치는
것을 뜻합니다. ‘받들다’는 의미의 봉(奉)이라는 한자와 ‘바친다’ 혹은
‘드린다’는 의미의 헌(獻)이라는 한자가 뜻하는 것처럼, 봉헌이란
무엇인가를 누군가 혹은 어떤 사명을 위해, 공경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두 손으로 받들어 바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봉헌이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봉헌된 삶이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말씀과 죽음으로 드러내신 복음입니다.
결국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모아집니다.
주머니 속에서 잡히는 돈 몇 푼을 헌금 바구니에 넣는 것을 봉헌이라
하지 않습니다.
불우한 이웃에게 보이는 어설픈 동정이나 적선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봉헌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양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의 손에
들려 성부께 봉헌되는 날입니다. 성부의 뜻대로 우리 죄를 대신해서
마지막 잔까지 마시게 될 예수님의 거룩한 봉헌을 암시하는 날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거룩한 봉헌의 시작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순간부터 봉헌된 삶으로
불리어졌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작년 주님의 봉헌 축일에 정리해 본 마음을 부끄럽지만 다시 한 번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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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헌
삶을 당신께 바치겠다고 한 그 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기도와 사연 많은 눈물, 벗들의 따뜻한 눈빛,
순수했던 나의 가슴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많은 강과 많은 산을 만났습니다.
일어섬과 넘어짐의 시간들. 그 안에는 늘 당신께서 계셨지요.
사랑 하나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당신께 내어드리는 것이
내 삶이어야 함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참 많이도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래도 당신께서는 곁에 있어주셨지요.
내 안의 너무 많은 것들 때문에 그저 당신을 뿌리치고 싶었던 날들.
그러함에도, 봉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시간들.
어제의 일만이 아닌,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싸워야 할 나와의 다툼입니다.
나 이상의 아픔을 가지고 언제나 내 곁에 계실 당신.
다시 일어서렵니다.
당신 종이 여기 있습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무엇을 봉헌할 것입니까?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2월2일 주일 주님 봉헌 축일(봉헌 생활의 날
루카 2,22-40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가게 해주셨습니다.”
<무엇을 봉헌할 것입니까?>
주님 봉헌 축일을 맞아 ‘봉헌’이란 말의 의미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봉헌한다는 것은 드린다는 말, 바친다는 말, 내어놓는다는
말이겠지요.
나를 고집하지 않고, 내 안에 갇혀있지 않고, 나만 생각하지 않고, 보다
큰 흐름, 보다 큰 물결, 보다 큰 선, 보다 큰 가치관이신 하느님과 합일하기
위해 내 전존재를 내어놓는 행위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봉헌한다’고 할 때 주로 뭔가 좋은 것, 고가의 것, 귀중한 것, 가치
있는 것을 바쳐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데,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봉헌되신 아기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삶 전체에 대한 봉헌,
아무런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냥 바치는 봉헌도 좋은 모습의
봉헌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어깨를 내리누르는 일상의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해보시기
바랍니다. 돌아보기도 싫은 끔찍했던 지난 세월도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바쳐보시기 바랍니다. 죽어도 용서하기 힘든 그 누군가도 ‘그냥’ 하느님께
드리기 바랍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헤어날 수 없는 내 한계, 부끄러움,
죄...이 모든 것 역시 하느님께 맡겨보시기 바랍니다.
결국 우리 매일의 삶 전체가 봉헌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매일 겪는
기쁨과 슬픔, 고통과 십자가, 좌절과 방황, 한계와 모순, 회한과 눈물,
이 모든 것들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봉헌의 대상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참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의 빛나는 외모, 그의 재산, 그의 성공,
그의 젊음만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의 부족함, 그의 실패, 그의 한계,
그의 쇠락, 그의 죽음조차도 사랑해야, 그것이 참 사랑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열렬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장점, 우리의 긍정적인 측면, 우리의 성공만을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한 부분만을 사랑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통째로
사랑하십니다.
봉헌한다는 말, 내어맡긴다는 말에는 조금은 수동적인 분위기, 소극적인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그러나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보면 꼭 그런 의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봉헌한다는 말, 바친다는 말에는 자기 자신이라는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는 적극성과 도전정신이 담겨져 있습니다.
자신을 보다 큰 흐름에 내어맡김으로 인해 얻는 자유, 더 이상 내가 내
삶을 좌지우지 않고 크신 하느님께서 의지한다는 결단이 봉헌이란 말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크게 내어맡김으로 인해 더 크게 성장하고, 완전히 바침으로 인해 더 큰
해방을 얻는 그런 봉헌축일 보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봉헌하고 온전히 빈손으로, 완벽히 텅 빈 마음으로
하느님께 나아갈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상상을 초월할 대자유를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텅 빈 충만, 완벽한 평화가 반드시 찾아올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주님 봉헌 축일
2014년 가해 2월2일
<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
복음 : 루카 2,22-40
설날을 맞이해서 많은 분들이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진지 40일이 되는 날, 성모님과 요셉은 예수님을
성전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예물을 바쳤습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신앙으로 고백하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 ‘봉헌’입니다.
봉헌에는 크게 3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치’입니다. 국민은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그리고
국민은 국가에 세금을 냅니다. 이는 국가와 국민이 일치하는 한
방법입니다. 국민과 국가의 일치는 자발적인 것은 아니고 강제적입니다.
세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국가는 강제적인 방법으로 징수하기 때문입니다.
국민은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를 대상으로 보상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 안에서의 일치는 자발적입니다. 가장 큰 일치는
나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봉헌입니다. 우리가 이웃과 하나가 되는
것은 그들의 아픔과 고통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셨습니다. ‘제자들의 배반, 율법학자들의 모함,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고독’ 이런 것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지고 가셨던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의
결말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부활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십자가를 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무겁기 마련입니다. 십자가는
인내를 요구합니다. 십자가는 나를 구속하기도합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열쇠입니다.
세 번째는 ‘감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어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성찬의 전례’의 핵심은 빵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변화되는 기도입니다.
교회는 이 기도를 ‘감사송’이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몸과 피를
봉헌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름다운 성찬기도문은
이렇습니다. ‘스스로 원하신 수난이 다가오자, 예수께서는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쪼개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
말씀하셨나이다. 저녁을 잡수시고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다시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가장 큰 악의 유혹은 ‘교만, 욕심,
시기’입니다. 이것을 이겨내는 것은 ‘정결, 가난, 순명’의 복음 삼덕입니다.
이 복음삼덕을 가장 잘 보여 주신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의 일치, 십자가의 희생, 하느님께 감사’하는 진정한 봉헌을
통해서 악의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오늘 주님의 봉헌축일을 지내면서 참된 '봉헌‘의 의미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봉헌은 단순히 내가 가진 것들 중에서 일부를 남과 나누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봉헌은 나의 욕심과 잘못을 비워내고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봉헌은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는 것입니다. 봉헌은 어떤 처지에서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봉헌하면 생명, 가지려 하면 독
2014년 가해 2월2일 주님 봉헌 축일(봉헌 생활의 날)
<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
복음 : 루카 2,22-40
< 봉헌하면 생명, 가지려 하면 독 >
조두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소원’을 보았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엔 ‘상처’에 관한 내용인줄 알았는데 영화를 다 보고나서는
‘치유’에 관한 영화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원이네 문방구, 그리고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아빠, 이들은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원이는 늦게 학교에 가게 됩니다. 문방구 앞에서
기다리다가 자존심 때문에 소원이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고 말하며
먼저 학교로 뛰어갔던 같은 반 남자친구, 바쁜 탓에 소원이 머리를
묶어줄 수 없었던 엄마, 아빠. 그리고 자신을 해치려는 못된 아저씨에게
우산을 씌워달라는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소원이의 착한 마음. 이 모든
것들이 되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의 발단이었습니다.
소원이는 결국 그 악마 같은 사람 때문에 대장까지 파열되어 평생
옆구리에 호스를 차고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살아난 것만도
기적입니다. 그러나 언론은 한 아이와 가족의 피해는 생각지도 않고
카메라를 들이밉니다. 그렇게 비싼 일인 실에 입원을 해야만 했고
가족은 마음고생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고통을 받게 됩니다. 소원이는
우산을 씌워준 것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렸고
자신에게 상처만 주는 세상과 담을 쌓게 됩니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치유는 작은 관심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친구가 적금을 털어
도와주고 아이들까지 소원이를 위해 모금을 합니다. 혼자 학교로 갔던
같은 반 남자 친구는 자기가 함께 갔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후회 섞인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치유되기는 소원이의
상처는 너무도 큽니다. 특히 옆구리로 변이 새어나와서 그것을 닦기
위해 바지를 벗기려는 아빠가 그 무시무시한 범죄자처럼 느껴집니다.
아빠가 병실에 들어오면 부끄러워 이불로 얼굴을 가리고 둘이 있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아빠는 소원이가 냉장고나라 코코몽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코코몽
인형 안으로 들어가 조금씩 소원이와 친해지려 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을
좋아합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도 점심시간에 밥도 먹지 않고 소원이만
볼 수 있는 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코코몽 인형 속에서 소원이를
응원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이 보이면 그 무시무시한 학교 앞 길도 힘
있게 걸을 수 있습니다. 소원이는 코코몽 덕분으로 학교도 갈 수 있었고
자신을 그렇게 만든 나쁜 아저씨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원이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그 코코몽이 아빠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소원이는 누군가가 자기를 아프게 한 만큼 그만큼 큰 사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소원이는 아빠의 희생 덕분으로 잃어버렸던 말도 되찾아 말을
하게 되고 아이들과도 이전처럼 자신의 사탕을 나누어주며 아빠에게
농담도 하는 그런 아이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면 이렇게 줄 수밖에 없습니다. 소원이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 했던
범죄자는 짧은 쾌락으로 자신의 온 인생을 맞바꾸었습니다.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을 주어야지 그것을 내 것으로
삼으려다가는 그것이 내 안에서 독이 되어 나를 죽이게 됩니다.
봉헌은 사랑하면 당연히 주어야 하는 내 자신이고 내 자신의 희생입니다.
소원이 아빠는 소원이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소원이는 그 제물을 받아들였고 다시 인형 속에 들어가 있는 아빠의
땀을 닦아주었습니다. 봉헌은 상대를 위해 자신을 소진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향이 자신을 태워 아름다운 향기를 올려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랑한다면 자신을 소진시키고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태초에 우리 조상들은 가난해지려 하지 않고 부자가 되려
했습니다. 부족함이 없었지만 금지된 것까지 가지려 했습니다. 부자가
되려고 하니 관계는 끊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이 아담과 하와의 죄를 당신의 봉헌으로 기워 갚습니다. 당신
아드님을 당신 것이라 여기지 않고 다시 하느님께 봉헌해 드립니다.
그분이 당신의 전부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봉헌은 우리 죄와도 직결됩니다. 죄란 마땅히
봉헌해야 할 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려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라푼젤’이란 디즈니 만화영화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나라에 모든 병을
다 고칠 수 있는 불로초와 같은 꽃이 한 송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로초는 수백 년을 산 마녀의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불로초를
감추어 놓고 자신만 사용하여 항상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임신을 한 왕비가 큰 병에 걸렸습니다. 왕비와 아기까지 생명이
위험해지자 온 나라 사람들은 그 생명의 꽃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는
마녀가 감추어둔 꽃을 뿌리째 뽑아서 왕비를 낫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예쁜 공주가 태어났는데 그 공주의 머리카락은 공주가 노래 부를 때마다
금색으로 변하며 그것을 만지는 사람은 누구나 치유되고 젊음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마녀는 그 공주를 몰래 훔쳐서 자신이 살고 있는 깊은 산 속
높은 탑 위에 가두어 두고 자신만이 또다시 그 생명과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탑 위에 한 도둑이 숨어들면서부터입니다. 그 도둑은 왕궁에서
왕관을 훔쳐 달아나다가 그 탑까지 숨어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공주는
몰래 그 훔친 물건을 감추고 자신을 밖으로 내보내 주면 나중에 그 왕관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엄마라고 속여
왔던 마녀는 사랑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주가 그 왕관을 돌려주면
그 남자는 바로 떠나버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도둑은 자신이 훔친 왕관을 버리고 목숨을
걸고 라푼젤을 참 부모님에게 돌려줍니다. 그렇게 되자 마녀는 더 이상
공주로부터 오는 생명력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그렇게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애니메이션이 다 그렇듯이 왕과 왕비는 자신의
딸을 찾아준 그 도둑과 자신들의 딸을 혼인시킴으로써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됩니다.
라푼젤이라는 공주는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긴 했지만 결국 우리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봉헌할
줄 알면 그것이 비로소 우리 것이 되어 그것과 하나가 됩니다. 이 생명나무가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로 나타나십니다. 성모님은 그리스도를 봉헌하시기에
그분을 되돌려 받습니다. 우리 또한 그 분을 영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들면서 주인에게 도조를 바치지
않는 못된 소작인들 때문이 주인의 외아들인 당신이 돌아가셔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봉헌하지 않고 내 것으로 가지고 있으려고 한다면
그 생명나무는 그 사람 안에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되어버립니다.
마녀가 라푼젤을 자기 혼자의 것으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에 왕국과의
관계단절을 경험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소원이를 자기 것으로 취하려고
했던 어린이 성추행범이 그러했습니다. 이렇게 오늘 봉헌축일은 우리
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그분께서
주신 것임을 깨닫고 오롯이 다시 바쳐드릴 수 있는 마음이 있을 때 그 분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지 못하고 내 것으로 소유하려 하면 그것은 내 안에서 독으로
변하여 나를 죽이게 됩니다.
경주 최씨가 오랫동안 만석꾼 집안으로 이어져 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집
가보가 ‘돈을 똥처럼 여겨라!’라는 집안의 가르침 때문이라고 합니다. 생명의
양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오래 있으면 그것이 대변이 되어서 그것을
밖으로 밀어내지 않으면 똥독이 옮아 나를 죽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생명은
나에게 생명을 주는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봉헌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다음 주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연피정이라 묵상이 없겠습니다. ^ ^
•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봉헌과 삶 -봉헌예찬-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2월2일 주일 주님 봉헌 축일(봉헌생활의 날),
말라3,1-4 히브2,14-18 루카2,22-40
<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
복음 : 루카 2,22-40
봉헌과 삶 -봉헌예찬-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참 아름다운 축일입니다.
주님 봉헌과 더불어 우리의 봉헌에 대해 묵상하는 날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겐 봉헌이란 말보다 더 아름다운 말은 없습니다.
봉헌할 때 마음의 순수입니다. 욕심 없이 모두를 하느님께 봉헌할 때
그 모두는 본연의 아름다움을 되찾습니다.
봉헌의 기쁨, 봉헌의 자유, 봉헌의 평화, 봉헌의 행복, 봉헌의 축복,
봉헌의 아름다움 등 끝이 없습니다.
봉헌은 우리 삶의 모두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었기에 봉헌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면 영원히 봉헌이란 말을 모르고 살 뻔 했습니다.
봉헌의 삶과 그냥 삶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믿는 이들에겐 봉헌이 전부입니다. 봉헌이 삶의 의미입니다.
봉헌이 빠진 삶은 허무와 무의미 그 자체입니다.
삶의 목표도 방향도 중심도 없는 참 아무 것도 아닌 삶입니다.
봉헌의 빛이 무의미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에 봉헌의 여러 측면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봉헌은 사랑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 봉헌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저절로 봉헌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입니다.
애당초 하느님을 사랑하고 믿지 않으면 봉헌이란 말도 무의미합니다.
봉헌이란 말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모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 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치고
이어 제물도 바칩니다. 이 모두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행들 바로 봉헌임을 깨닫습니다. 침묵, 노동, 기도, 환대
등 모든 수행이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이 있어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로가 아닌 자발적 기쁨의
수행이요 봉헌입니다.
둘째, 봉헌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우리 봉헌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봉헌의 영원한 모범입니다.
봉헌의 삶에 충실할 때 우리 역시 봉헌되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 바로 봉헌의 자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봉헌의 삶에 항구했던 시메온과 한나는 바로 봉헌되시는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만납니다. 우리 역시 이 거룩한 성전 전례를 통해
봉헌되신 예수님을 만나 함께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말라키의
예언이 오늘 복음을 통해 이 거룩한 주님 봉헌 축일 미사를 통해 그대로
실현됩니다.
평생 봉헌의 삶에 충실하다 봉헌되신 주님을 만난 시메온은 감격에
겨워 찬미가를 바칩니다. 바로 우리 수도자들이 끝기도 때마다 바치는
시메온의 노래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우리의 눈 또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의 구원을 보고 평화로이
세상을 향해 파견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봉헌의 중심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과 일치가 깊을수록 우리의 봉헌의 삶도
깊어집니다.
히브리서가 고백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에겐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우리를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봉헌이 있어 비로소 악마의 종살이에서, 죽음 공포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된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봉헌은 이런 예수님의
봉헌에 대한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감사의 응답입니다.
셋째, 봉헌은 축복입니다.
봉헌자체가 축복입니다. 봉헌 따로 축복 따로 가 아닙니다.
봉헌에 따른 축복의 열매들입니다.
진정한 기쁨도, 행복도 봉헌에 있습니다.
봉헌 아닌 엉뚱한 곳에서 기쁨을, 행복을 찾기에 실망과 환멸입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바로 이게 봉헌의 축복입니다. 봉헌했을 때 주님 친히 보살펴
주십니다. 주님께 진정 자신을 봉헌할 때 이어지는 주님의 위로와 치유,
평화의 축복입니다.
진정 자신을, 자녀들을, 형제들을 사랑한다면 자신을, 자녀들을, 형제들을
하느님께 봉헌하십시오.
하느님의 것을 다시 하느님의 것으로 드리는 봉헌입니다.
이런 봉헌의 삶만이 허무한 삶을 충만한 삶으로 바꿔줍니다. 평생
봉헌의 삶에 충실했기에 시메온도 한나도 주님을 만나는 축복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우리 역시 미사를 통해 주님께 자신을 봉헌함으로 축복자체이신 주님의
성체를 통째로 받습니다. 도대체 이 축복을 능가할 수 있는 복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넷째, 봉헌은 찬미입니다.
찬미의 사람, 이게 인간에 대한 정의입니다.
최고의 봉헌이 찬미의 봉헌입니다.
하느님 찬미 봉헌의 기쁨으로, 힘으로 살아가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세상에 찬미의 기쁨을 능가하는 기쁨은 없습니다.
지금 여기서 천상행복을 살게 하는 찬미의 봉헌입니다.
봉헌의 생활화에 찬미의 봉헌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끊임없는
찬미의 봉헌이 우리 삶을 점차 봉헌의 삶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가톨릭교회의 전례가 목표하는 바입니다.
찬미의 봉헌이 우리의 봉헌을 완성시켜줍니다. 하여 매일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우리의 봉헌의 삶을 활성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전례기도시간입니다.
이런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보다 봉헌의 삶에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찬미의 봉헌이 우리 삶을 점차 변화시켜줍니다.
부정적 비관적 인생관은 긍정적 낙관적 인생관으로, 절망은 희망으로,
슬픔은 기쁨으로, 어둠은 빛으로, 죽음은 생명으로, 상처는 치유로
변화시켜줍니다. 바로 이게 찬미의 봉헌을 통해 주님께서 주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찬미의 아름다움입니다. 끊임없는 찬미의 봉헌을 통해 아름다움 자체이신
하느님을 닮아가니 이보다 더 큰 축복도 없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기도 합니다.
다섯째, 봉헌은 삶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결정적인 봉헌은 이뤄졌지만, 결코 한 번으로 끝나는
봉헌이 아닙니다. 평생과정의 봉헌입니다.
봉헌이 삶이며 삶이 봉헌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봉헌입니다.
그러니 봉헌은 우리 삶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아픔도, 슬픔도, 걱정도
그 모두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그분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순경이든
역경이든 어떤 처지에서든 그 모두를 찬미와 감사로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래야 세상 걱정의 짐에서 스트레스에서 벗어납니다.
세상살이에 봉헌의 대상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봉헌의 삶에
항구할 때 주님은 우리의 짐을 덜어주시고 평화와 기쁨을, 지혜를
주십니다.
마지막 봉헌, 결정적 봉헌이 죽음입니다. 무에로 돌아가는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봉헌의 죽음입니다. 장례미사 때 제대 앞에 놓인
시신이 든 관을 볼 때마다 죽음은 마지막 봉헌임을 실감합니다. 평상시
아름답고 항구한 봉헌의 삶 있어, 마지막 아름다운 봉헌의 죽음임을
깨닫습니다.
마지막으로 봉헌의 아픔입니다. 봉헌의 아픔을 빠트릴 번 했습니다.
결코 값싼 봉헌은 없습니다. 봉헌의 아픔이 있어 봉헌의 아름다움입니다.
시메온, 한나의 봉헌의 기쁨에 앞서 봉헌의 아픔은 또 얼마나 컸겠는지요.
봉헌의 꽃만 볼게 아니라 봉헌의 아픔인 뿌리도 봐야 합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에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시메온의 예언처럼 성모님의 아픔은 또 얼마나
컸겠는지요.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한 분들 역시 누구보다 봉헌의 아픔을
잘 공감할 것입니다. 그러나 봉헌의 아픔이 전부는 아닙니다.
봉헌의 기쁨과 축복이 아픔을 상쇄하고도 남습니다.
아픔의 빈 자리는 기쁨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참 아름다운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삶이 봉헌이며 봉헌이 삶입니다.
세상에 봉헌보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을 잘 드러내는 말도 없습니다.
봉헌의 아름다움, 봉헌의 행복, 봉헌의 기쁨, 찬미의 봉헌, 봉헌은 우리
삶의 모두입니다. 정말 성공적인 행복한 삶의 열쇄는 순전히 봉헌의
삶에 달렸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당신 봉헌 축일 미사를 통해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우리 모두를 영원한 생명의 축복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서울] 귀한 무형의 재산인 예수님의 가르침
<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
복음 : 루카 2,22-40
귀한 무형의 재산인 예수님의 가르침
사람들에게 빛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돈 뿐이라 생각하면 정답입니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르신 최영장군은 어둠속에 살았다는 건가요?
사는 게 오직 돈 때문이라면 세상 얼마나 무서울지 끔직 하지 않나요?
돈으로도 못 사는 것들, 행복 사랑 감사 인정 애정 믿음 이런 것 아닌가요?
이런 것들이 삶을 밝히는 빛이며 재물도 이런 것을 따라 다닐 겁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런 귀한 무형의 재산을 살려내는 원천이랍니다..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루카 2,32)”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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