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사 -
☆ 2014년 가해 2월10일 (백)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청주] 주님의 손이 되어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1열왕 8, 1 - 7. 9 - 13
† 복음 : 마르 6, 53 - 56
스콜라스티카 성녀는 480년 무렵 이탈리아 움브리아의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성 베네딕토 아빠스의 누이동생인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성인이 세워 그녀에게 맡긴 여자 수도원의 첫 번째 수녀이자 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성녀는 베네딕토 성인과의 영적 담화를 통하여 수도 생활에
대한 많은 격려와 도움을 받았다.
★ 솔로몬은 이스라엘 각 지파의 대표들을 소집하고 주님의 궤를 모신다.
그 궤 안에는 모세가 넣어 둔 두 개의 돌 판이 들어 있었다.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에 가득 찼고, 솔로몬은 주님께 ‘당신께서 영원히 머무르실 웅장한
집을 지었다.’고 고백한다(제1독서).
★ 예수님과 제자들이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지방으로 갔지만 거기서도
수많은 병자가 예수님을 찾아온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라도 손이
닿기를 청했으며, 실제로 손을 댄 이들은 모두 치유되었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은 스콜라스티카 성녀의 축일입니다. 수도 생활의 초석을 놓은 성
베네딕토 아빠스(대수도원장)의 누이동생인 성녀 역시 고귀한 봉헌의
삶을 살았습니다. 성녀가 남긴 일화 중 특히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은
오빠 베네딕토 성인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이미 수도원을 세워 수도 생활을 하던 베네딕토는 일 년에 한 차례 정도
방문하는 스콜라스티카를 수도원 동료들과 함께 수도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만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한번은 스콜라스티카가
오라버니에게 조금 더 함께 머물며 대화하자고 청했지만 베네딕토는
수도원 규칙에 어긋난다며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때 성녀가 하느님께
기도드리자 갑자기 번개와 천둥을 동반한 비가 밤새도록 퍼부었습니다.
베네딕토와 그의 동료들은 어쩔 수 없이 수도원에 돌아가지 못한 채
스콜라스티카와 밤을 지새우며 영적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성녀를 ‘편드신’ 이 일화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그의
『대화집』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누이동생이 오빠보다 더
강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요한 성인의 말씀대로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스콜라스티카가 선종하였을 때 베네딕토는 여동생의
유해를 자신을 위해 준비해 놓은 묘지에 안장하였는데, 이로써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말하듯, “한마음이 되어 하느님 안에서 일치되었던
이들 오누이는 그 육신도 함께 묻히게”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의 깊은 형제애와 영적 친교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고 미소 짓게 합니다. 사람 사이의, 혈육의 정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통해 얼마나 더 아름답고 온전해지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 모두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성녀의 삶을 요약한,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진리를 마음속 깊이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주님의 손이 되어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2월10일 연중5주간 월요일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53-56
주님의 손이 되어
신부는 고향 본당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 받지 못하셨듯이(마르6,4) 고향에서
환영받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이 고향성당으로
인사발령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고향 분들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그러다가 할머니 한 분을 만났는데 할머니께서는 그 신부님의
옛날 얘기를 꺼내셨습니다. 오줌을 싸서 체를 뒤집어쓰고 동네를 돌던
얘기며 똥을 싸고……., 고집통이고, 어머니 젖이 모자라 당신 젖을 먹고
컸다는 둥….정말이지 개천에서 용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사람 저 사람에게 자꾸 자랑 삼아 얘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고민 끝에 하루는 할머니의 가슴을 풀어
제치며 옛날에 내가 먹던 젖인지 확인 좀 해야겠다고 진피를 떨었답니다.
그 이후 할머니 입에서 다시는 신부의 옛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답니다.
고향에서 예수님께서도 환영을 받지 못 했는데 하물며 감히 누가 환영
받겠습니까? 내가 알고 있는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더 좋은 것을 취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합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인다면 더 큰 혜택을 입을 것인데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옛날이 아무렴
어떻습니까? 지금이 중요하고 또 앞으로 다가올 날이 더 소중한 것이지요.
과거 때문에 미래를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땅에 도착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심지어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다 놓는 이들도
있었습니다(마르6,54). 그리고 주변 마을까지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마르6,56). 그 동네는 도시가 아니라 시골이었습니다.
시골의 순박한 마음이 큰 은총을 입게 한 것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그리스도는 이제 몸이 없습니다. 우리의 몸밖에는. 그분에게는 손이
없습니다. 우리의 손밖에는. 그분에게는 발이 없습니다. 우리의
발밖에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눈을 통하여 연민 가득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발로 뛰어다니시며 선을 행하십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의 손으로 우리를 축복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 받을
것입니다”(야고5,15)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앞에 모셔다 놓아진 이들은
단순히 병을 치료 받은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소중한 마음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도 확인 받은 것입니다. 굽어진 마음, 오그라든 마음, 상처 입은
마음은 일반 병원에 가서 치료 받을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 안에서 만이 온전하게 치유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줄 능력이 있는 분이시지만 육신의 치유자로만 보면 부분을 전체로
보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여 있는 중병이 있다면 예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듯이(마르6,56) 오늘 우리가 구원을 위한
행동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귀찮게 여기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주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받고 열이 가신 부인은 곧 예수님과 그 일행의 시중을
들었습니다(마르1,31).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님의 자녀가
되고 죄를 용서 받아 구원을 얻은 우리도 주님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시중을 든다는 것은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고 기뻐하시는지를 알고 그에
맞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동네에도 가야 한다’하시며 복음을 선포하신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 마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마땅히 시중을 들어야 한다’하고 고백할 만큼 내가‘구원 받았음’을
확신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제가 중학생 때쯤인가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받았던 ‘암행어사’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암행어사가 초라한 행색으로 전국을 돌면서, 탐관오리
들을 혼내주고 힘없는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내용이었지요. 사실
주인공인 암행어사의 초라한 행색에 사람들은 힘없는 양반쯤으로 생각하고서
아주 우습게봅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이렇게 우습게 보는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요. 심지어 아이들까지 거지가 왔다고 심하게 놀려대도 부끄러워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임금님이 내려주신 암행어사 마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암행어사
출두요~~”라면서 마패를 보여주면 모두가 벌벌 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놀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마패의 힘을 믿고 있기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언제나 떳떳할 수 있습니다.
암행어사의 마패처럼 우리를 세상 안에서 떳떳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가슴 깊이 간직하면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진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부끄러워 할 이유도 또
두려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큰 사랑을 통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절대로 위축된 삶을 살지 않습니다. 누가 놀려대도
‘주님이 계시는데 뭐.’라면서 웃어넘길 수가 있습니다. 자신감이 넘치고,
불의에 대해서 큰 소리로 꾸짖을 수 있는 용기도 갖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 옷자락 술에라도 손을 댈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손만 대어도 병이 나을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과 함께 하려는 마음,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만 있다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이 세상도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이신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서 큰 힘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을 보면 ‘더불어 함께’ 보다 ‘나 홀로’가 더 익숙한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주님과 함께 하기보다는, 자기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에 빠져 삽니다. 그러나 완벽한 인간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한계를 금방 깨닫게 되면서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 자신을 위해서도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큰 기쁨 안에서 자신 있게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성실하게 일하고, 가족을 지키며 자식을 키우는 삶. 그것만으로 충분히 인생을
잘 살았다는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기타노 다케시).
오늘은 성녀 스콜라스트카 축일입니다. 축일맞이하신 분 축하합니다.
‘나’ 와 ‘우리’ 의 갈림길
아마 이 이야기를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서로 아주 친한 친구가 있었지요. 어느 날, 둘은 함께 여행을 합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길을 걷다가 땅에 떨어진 지갑을 발견해 주우면서 “야, 오늘은
나의 운수가 트인 날인데?”라고 말합니다. 다른 친구는 섭섭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하지요.
“자네는 어떻게 ‘나’라는 말을 쓰나? 이럴 때는 ‘우리’라는 말을 쓰면 더
좋지 않나?”
하지만 지갑을 주운 친구는 “내가 지갑을 주운 것이지, 우리가 함께 주운
것이 아니지 않나?”라고 말하면서 지갑의 소유가 자기 혼자임을 강조합니다.
바로 그때 지갑을 잃어버린 남자가 나타나면서 다짜고짜 “이 도둑놈들!”라고
몰아붙입니다. 이에 지갑을 돌려주면서 말합니다.
“우리를 도둑으로 몰다니요. 우리는 그저 땅에 떨어져 있던 지갑을 주웠을
뿐입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친구가 기가 막힌 듯이 말했습니다.
“자네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조금 전 운수가 좋을 때는 ‘나’라고 하고,
궁지에 몰리자 ‘우리’를 찾고 있지 않나?”
욕심과 이기심은 함께 하지 못하게 합니다. 결정적인 순간, 어렵고 힘든
순간에 ‘우리’임을 기억하면서 함께 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보다 우리를 위한 삶. 바로 주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 우리들이
따라야 할 삶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복음의 유효기간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재촉합니다.'
2014년2월10일 월요일 복음묵상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마르코6,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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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緊急)하다.” “긴박(緊迫)하다.” “급박(急迫)하다.”
“시급(時急)하다.” “절박(切迫)하다.” “애바쁘다.”
아주 급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형용사들이다.
무엇인가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임을 말하고 있음이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데려왔다고 한다.
복음은 우리에게 어떤 것인가?
서둘러야 할 그 무엇은 아닐까?
복음의 유효기간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시간을
긴 시간으로 본다면 서두를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삶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덧없이 흘러갈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느낀다면 분명히 복음은 서둘러야 할 어떤 것이다.
백 년이 주어진들, 이백 년이 주어진들 우리의 삶의 길이에 만족할 수
있을까? 모르긴 해도, 우리는 어떤 조건 하에서도 인생은 짧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복음이 아름답고 신나는 일이라고 믿는가?
그렇다면 서둘러 복음을 살아야 한다.
복음이 말하는 기쁜 소식이 내 삶으로 녹아 들어야 한다.
복음은 장신구가 아니다. 필요할 때 여기 저기 매달고 다니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복음은 생명과 직결된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인이다.
삶의 껍데기가 무엇이고 알맹이가 무엇인지 식별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이 필요하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그분을 찾는 간절한 심정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2월10일 월요일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마르 6,53-56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그분을 찾는 간절한 심정>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다 보니 가끔씩 ‘다운’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사춘기 비슷한 ‘사추기’가 아니냐고 그럽니다.
사는 게 그저 그렇습니다. 인생 별 것 아닌 것 같고, 이렇게까지 아등바등
살아봐야 뭐하겠나, 하는 생각에 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은데도 불구하고
그냥 하릴없이 시간을 보냅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난 저녁은 씁쓸하고
허탈합니다. 송구스런 마음에 혼자 머리를 긁적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자주 복음을 펼쳐봐야겠습니다. 특히 오늘 복음 같은 경우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과 제자들, 그야말로 ‘대목’입니다. 하루 온종일
밀려드는 ‘고객’들로 인해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이 밀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웃음을 되찾습니다.
삶에서 남은 것이라곤 오직 우울한 회색빛 나날뿐이었는데 예수님으로 인해
화사한 인생으로 탈바꿈합니다.
사방이 높은 담으로 가로막혀 조금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었는데 예수님으로
인해 작지만 다른 쪽 문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공생활이 한창이던 시절 예수님과 제자들 참으로 행복하셨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딜 갔는데 아무도 알아봐주는 사람들도 없고, 챙겨주는 사람도
없다면 얼마나 마음이 쓸쓸하겠습니까? 봉사하려고, 도움을 베풀려고 어느
마을로 들어갔는데, 다들 필요 없다고 손사래를 치면 얼마나 '뻘쭘‘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시는 고을고을
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중 나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줄곧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 손 한번 잡아보려고 기를 썼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 앞에 예수님 마음도 더 큰 사목적 열정으로 불타
올랐을것입니다. 절박하고 간절한 그들의 처지를 눈여겨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더 큰 측은지심으로 활활 타올랐을 것입니다.
결국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찾는 간절한 심정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잡아보려는 강렬한 의지입니다. 잠시라도 그분과 마주 서보고
싶은 절절한 열망입니다.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분입니다. 미지근한 마음, 그저
그런 마음이 아니라 간절한 마음, 절박한 마음, 열렬한 마음, 불같은 마음,
다시 한 번 새 출발하려는 단단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과 그분을 바라보는 불타는 눈, 그분을 향해
달려가는 날랜 걸음, 그분의 선하심을 끝없이 찬양하는 뜨거운 입술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2014년 가해 2월10일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53-56
예전에 ‘맥가이버’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맥가이버가 손을 대면
모든 것들이 다 고쳐지고, 정상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스위스에서 제작된
다용도 칼을 ‘맥가이버 칼’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작은 도구들을 이용하거나, 과학적인 원리를 이용해 위기를
탈출하곤 하였습니다. 맥가이버에게는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삶에
유용한 작품이 되고, 도구가 되었습니다.
제가 캐나다에 살 때, 함께 살던 동창신부도 거의 맥가이버 수준이었습니다.
스테이크도 만들어 먹고, 스파게티도 만들 줄 알았습니다. 시장에 가면 무엇을
사야 되는지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제가 손을 대면 고장 나거나 부서지는
것들이, 친구가 손을 대면 신기하게도 다시 작동을 하고, 고쳐졌습니다.
친구는 제게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도와주는
거다.’ 그 말을 들으면서 약간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맥가이버와 제 친구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가슴이 따뜻하다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있으면 아무런
조건 없이 기꺼이 도와주었습니다. 한번은 제가 실수로 차를 눈밭으로 몰고
가서 차가 꼼짝도 하지 않았던 적이 있습니다. 친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차를 눈밭에서 꺼내 주었습니다.
둘째는 순수하다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 이유 없이 남을 돕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친구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앞뒤 생각하지 않고
먼저 도와주었습니다. 저는 무슨 일을 할 때, 계산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저의 계산은 친구의 순수함 앞에서면 너무나 작고 초라해 보였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진정한
‘맥가이버’이십니다. 우리들의 상상과 생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빛을
만들고, 땅을 만들고, 하늘을 만들고, 물을 만들고, 해와 달, 별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정도는 되셔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정도는 되셔야지 만물의 주인이시고,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 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의 옷깃만
스쳐도 병이 낫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정말 장난이 아니십니다. 어디가
아픈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언제부터 아픈지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예수님 곁에서 옷만 만져도 모든 병이 저절로 치유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 그 정도는 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도
공통점이 있으십니다.
첫째는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넘치는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작은 것들을 하고도,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광개토왕비, 진흥왕 순수비’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업적과 명예가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큰 잘못도
아닙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들의 업적과
자랑도 아닙니다. 그저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비하시기 때문입니다. 웬만한 잘못들은 다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너희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하얗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뉘우치고, 하느님께, 예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지난 모든 것은
덮어주고 당신의 나라에 다시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 안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가슴이 따뜻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계산하고 따지기 보다는 순수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너그럽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환대는 경청이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2월10일 월요일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호세2,16.21-22 루카10,38-42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53-56
환대는 경청이다.
오늘은 ‘환대’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환대의 기쁨, 환대의 행복입니다.
냉대보다 큰 아픔도, 환대보다 큰 기쁨도 없습니다.
구약은 물론 신약에서 교회 및 수도원에서 면면히 계승되고 있는 환대의
전통입니다. 정주의 삶을 사는 분도수도자들에게 환대는 중요 영성 중의
하나입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
성규 53장 첫 구절 말씀입니다. ‘하여 수도원을 ‘환대의 집’으로, 수도자를
‘환대의 사람’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환대를 통한 위로와 치유요 환대를
통한 선교입니다.
우리의 환대 같지만 실은 우리를 통한 주님의 환대입니다.
수도자의 환대를 통해 주님의 환대를 체험하는 손님들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마리아가 환대의 모범입니다.
환대 중의 환대가 주님을 환대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잘 환대할 때 찾아오는 손님들을 잘 환대할 수 있습니다.
잘 들여다보면 우리의 환대는 주님의 환대에 대한 응답입니다. 오늘
1독서의 호세아서에서 우리를 환대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너’로 상징되는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우리 믿는 이들 모두를 가리킵니다.
정의와 공정으로, 신의와 자비로써, 진실로써 우리를 환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환대를 체험한 호세아 예언자임이
분명합니다.
우리 역시 매일 미사를 통해 우리를 환대하시는 이런 주님을 체험합니다.
오늘 복음을 교부들은 관상과 활동으로 나눠, 마리아는 관상의 전형으로,
마르타는 활동의 전형으로 이해했습니다만 환대에 초점을 맞춰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마리아와 마르타 각자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주님을 환대합니다.
물론 이에 앞서 주님의 환대를 체험했음이 분명합니다.
환대는 경청입니다. 내 방식대로의 환대가 아니라 손님인 주님의 마음에
맞춘 환대가 제대로 된 환대입니다. 바로 마리아가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주님을 제대로 환대합니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바로 환대는 경청임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장면입니다.
이런 자세로 미사 중 주님을 환대하며 말씀을 경청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를 환대하는 주님이요 주님을 환대하는 우리들입니다.
즉 주님의 환대와 우리의 환대가 만나는 은총의 미사시간입니다.
불평하는 마르타에게 주님은 말씀의 경청이 얼마나 중요한지 상기시킵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주님을 환대하는 데 있어 필요한 것 한 가지, 좋은 몫은 말씀의 경청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참 행복은 주님을 환대하는데 있습니다.
말씀을 경청함으로 주님을 환대하는 것입니다.
이런 환대를 통한 주님과의 일치가 환대의 원천입니다.
하여 성전에서의 미사와 시편성무일도의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주님을
환대하며 말씀을 경청함이 그리도 중요합니다.
이래야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베네딕도 성인의 누이 스콜라스티카 축일입니다.
두 분의 우정 역시 참 아름답고 깊습니다.
‘그레고리오 대종 베네딕도 전기’ 중 다음 대목을 통해 두 분 다 ‘환대의
대가’임이 드러납니다.
-성인의 누이 스콜라스티카는 어릴 때부터 전능하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였는데, 일 년에 한 번 그분을 만나러 오곤 하였다. 그러면 하느님의
사람은 수도원의 대문 밖에서 멀지 않은 수도원 땅에 속해 있는 곳으로
내려가셔서 누이를 만나곤 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온종일
성스런 대화를 나누었다.-
참 아름다운 환대의 장면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사랑으로 경청하며
서로를 환대하는 오누이 성인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을 환대하며
당신 말씀을 경청하는 우리 모두를 위로하고 치유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옷자락 술''은 ''성사''의 상징
2014년 가해 2월10일 성녀 스콜라 스티카 동정 기념일
연중 제5주간 월요일
<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
복음: 마르코 6,53-56
< '옷자락 술'은 '성사'의 상징 >
안젤라 스터길이 중학교 1학년 때 자신이 사는 한 동네에서 간호사를
돕는 봉사를 했었습니다. 여름 방학 내내 일주일에 서른 시간정도를
일을 했는데, 그 대부분의 시간을 길레스피 씨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서
보냈습니다.
길레스피 씨는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그의 상태에 신경을 쓰는
사람도 없는 듯했습니다. 안젤라는 그의 틈나는 대로 그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 그의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아주 가끔 안젤라의
손을 꼭 쥐는 것 외에 길레스피씨의 반응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장기간
의식불명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일주일 동안 부모님과 여름휴가를 다녀왔습니다. 그가 병원으로
갔을 때는 길레스피 씨의 침대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안젤라는 간호사에게 차마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
것이 두려워서였습니다. 안젤라는 그 후로도 병원 봉사를 계속 하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그녀는 주유소에서 아주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누구라는 걸 떠올리는 순간 안젤라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길레스피 씨가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혹시 다섯 해 전에 동네 병원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입원해 있었던
길레스피 씨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안젤라는 그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병원에 있을
때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했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길레스피 씨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는 자신이 혼수상태에 있을 때 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었고, 이야기하는 동안 내내 그의 손을 잡고 있던 안젤라의 손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한 인간이
아니라 천사라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길레스피 씨는 자신을 소생시킨
힘이 바로 안젤라의 목소리와 그녀의 손길이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둘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고 눈물을 쏟고 포옹을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
이후로 안젤라는 길레스피 씨를 다시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길레스피 씨는 안젤라에게 언제나 기쁨으로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를 천사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참조: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나를 천사로 만든 사람]
‘안젤라’라는 이름의 뜻은 ‘천사’입니다. 어쩌면 진짜 하느님께서 안젤라를
통하여 길레스피 씨를 살려냈는지 모릅니다. 안젤라 안에 천사가 정말로
있으면서 그에게 생명의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의식불명의
상태였던 길레스피 씨가 자신이 살아날 수 있었던 힘이 그녀로부터 왔다면
그녀는 어쩌면 생명의 힘을 전달해주는 통로였던 것입니다. 그녀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살리는 힘은
하느님에게로부터만 나오게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녀를 통해서
그 힘을 주실 수는 있으셨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병자들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라도 만져보려고 노력하였고,
그 술을 만지는 사람들은 누구나 병이 나았고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옷자락 술은 무엇입니까? 옷에 달려있는 가장 끝자락입니다. 그 끝자락에
병은 치유하는 성령님이 숨어계신 것일까요? 옷은 분명 예수님은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입은 옷도 그 옷 자체로만은 어떠한 힘도 지니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 옷을 통해 당신 에너지를 내보내시는 것입니다. 비록 그 옷이
예수님 자신은 아닐지라도 그 옷 술을 통해서도 그분은 생명의 에너지를
전달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안젤라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의 ‘옷자락 술’의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분의 성령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도구들, 그것이 무엇일까요? 분명
예수님은 아니지만 그분을 연결해주는 것, 우리는 이것을 ‘성사’라
부릅니다. 우리는 성사를 통해 그분의 성령을 받고 새로운 삶으로
변화됩니다. 성사는 7성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나에게
들어오시는 모든 도구들이 다 성사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내 안에 모시는
행위를 넓은 의미의 ‘기도’라고 합니다. 마치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깃을
만지려 했다면 우리는 7성사는 물론이요, 성경읽기나 성체조배, 좋은 강의
듣기 등을 통해서 그분의 에너지가 나에게 흘러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만약
내 삶의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기도를 찾아서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서는 어떤 에너지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믿는 것과
같습니다. 즉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뜻은 마치 당시의
병자들이 예수님 옷자락이라도 잡아보려 했던 것처럼 그분의 에너지가
흘러오는 모든 성사들, 모든 기도들을 찾아서 하려고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매일, 어쩌면 매 순간 그분으로부터 에너지를 얻으려 손을 뻗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도 의심을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연구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진화의 최고점을 지니신 예수님
2014년 가해 2월10일 성녀 스콜라 스티카 동정 기념일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53-56
진화의 최고점을 지니신 예수님
모든 병을 돈만 있으면 고치는 걸로 생각하지만 그건 오산이랍니다.
그래서 불치병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의학은 계속 진화해야지요.
그렇다면 불치병도 있고 여건상 치료가 불가능한 병자도 있습니다.
의학이 계속 발전하고 진화해야할 막막한 길은 끝이 안 보인답니다.
진화의 최고점을 지니신 예수님을 향하여 인류는 진화중일 뿐이지요.
고차원에 계신 예수님께 접근하는 오늘의 방법이 바로 믿음이랍니다.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마르코 6,55)”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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